이제 며칠 뒤면 재판이 열리게 된다.임유진이 한숨을 깊게 내쉬며 머리 아파하고 하고 있을 때 차량은 어느새 어딘가에 도착해 있었다.고개를 돌려보니 이곳은 전에 강지혁이 한번 데리고 왔던 샵이었다.임유진이 어리둥절한 얼굴로 기사에게 물었다.“왜 여기로 온 거예요?”“대표님께서 이곳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그 말에 임유진은 고개를 끄덕이고 차에서 내렸다.안으로 들어가니 샵 원장이 친절하게 마중을 나왔다.“임유진 씨 맞으시죠? 강지혁 대표님이 계시는 룸으로 안내하겠습니다.”임유진은 원장을 따라 2층의 한 VIP룸에 도착했다. 문을 열어 보니 소파 한가운데 강지혁이 앉아 있었고 그 옆에는 연보라색 드레스가 세팅되어 있었다.보라색과 흰색 수정이 박혀 있는 해당 드레스는 눈을 뗄 수 없을 정도로 너무 고급지고 예뻤다.“이따 저녁에 파티가 있어. 나랑 같이 가야 하니까 이거로 입어 봐.”“파티?”임유진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되물었다.“거창한 파티는 아니니까 너무 긴장하지 말고.”전에 그를 따라 파티에 참석한 적이 있지만 그다지 좋은 기억은 없었다.‘오늘은 과연 아무 일도 없이 지나갈 수 있을까...?’임유진은 피팅룸으로 들어가 드레스로 갈아입었다.강지혁이 고른 드레스는 그녀의 몸에 있는 상처를 전부 다 가려주었다. 단 손만 빼고 말이다.멀리에서 보면 괜찮을지 몰라도 가까이에서 보면 삐뚤빼뚤한 것을 단번에 알아차릴 수 있다.그녀가 신경 쓸 만한 부분은 다 가려주고 싶었지만 손이라서 어쩔 수가 없었다.임유진이 피팅룸에서 나오자 강지혁의 눈에 놀라움이 스쳤다.사실 그는 처음 이 드레스를 봤을 때부터 임유진에게 잘 어울리는 옷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디자이너의 하나밖에 없는 이 드레스를 거액에 사버렸다.그리고 지금 입고 나온 것을 보니 마치 처음부터 그녀의 옷이었던 것처럼 역시 잘 어울렸다. “예쁘네.”강지혁이 앞으로 다가가 입꼬리를 올리고 웃었다.임유진은 조금 어색한 얼굴로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그는 옆에 놓인 액세서리 상자
“내 마음에 들고 안 들고가 중요해?”“당연히 중요하지. 이 드레스가 싫으면 다른 거로 입어도 돼.”강지혁의 목소리는 부드럽기 그지없었다. 그는 마치 아끼고 또 아끼는 공주를 대하는 듯했다.이에 임유진은 자신들이 정말 헤어진 연인 사이가 맞나 싶은 착각이 들어 머리가 복잡해졌다.“그럼 이런 누나 동생 사이가 싫다고 하면 이것도 그만해 줄 거야?”임유진은 자기도 모르게 이 말을 입 밖으로 내뱉었다.그러자 강지혁의 얼굴이 점점 어두워지더니 이내 웃는 얼굴로 답했다.“안 돼. 혹시 하는 기대도 품지 마.”강지혁은 그녀가 영원히 그의 곁에 있기를 바란다.임유진이 원하는 거라면 무슨 수를 써서든 줄 것이다. 그녀를 사랑하는 것과 그녀를 곁에서 떠나보내는 것만 제외하고 말이다....강지혁은 거창한 파티가 아니라고 했지만 임유진의 눈에는 꽤 큰 규모의 파티로 보였다.S 시의 재벌 2, 3세들 뿐만 아니라 뉴스에 자주 등장하는 영향력 있는 인물들도 파티에 얼굴을 비추었다.임유진이 강지혁과 팔짱을 끼고 파티장에 들어섰을 때 파티장의 모든 이목이 그곳으로 쏠렸다.임유진은 자신을 향한 사람들의 따가운 시선이 전부 다 느껴졌다.일전 열렸던 파티에서 임유진의 얼굴을 이미 봤던 사람들은 그다지 놀란 얼굴이 아니었지만 임유진을 처음 보는 사람들은 그녀를 보며 자기들끼리 속닥거렸다.“배고프지. 일단 뭐 좀 먹을래?”강지혁의 말에 임유진은 잠깐 고민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퇴근하고 바로 샵으로 가 드레스 입고 메이크업까지 받느라고 저녁때를 놓쳤기에 지금 상당히 배가 고팠다.“여기서 기다려. 먹을 것 좀 가져올게.”만약 사람들이 강지혁의 이 말을 들었더라면 또 한 번 놀랄 것이다. 여자를 위해 음식을 가져다주는 강지혁의 모습은 한 번도 본 적이 없었을 테니까.강지혁의 약혼자였던 진애령조차 이런 대접은 받아본 적이 없다.강지혁이 떠난 후 임유진은 제자리에 서서 주위를 한번 둘러보았다. 파티장에는 재벌 2, 3세들 뿐만이 아니라 화려하게 갖춰 입은 연예인들도
소민영은 다리를 다친 후 소민준에게서 자신이 이런 꼴은 당하게 된 건 모두 임유진 뒤에 강지혁이 있기 때문이라는 말을 들었다.소씨 집안은 강지혁이 또 복수하려고 들까 봐 소민영을 해외로 보냈다.소민영은 해외에서도 줄곧 임유진을 주시하고 있었다. 그러다 임유진이 강씨 저택에서 나와 홀로 월세방에서 살며 현재는 작은 로펌에서 비서 일을 한다는 것을 듣고는 그날로 바로 귀국을 결심했다. 정황상으로 강지혁에게 차인 게 분명했으니까.원래는 귀국한 후 며칠 정도 지나고 나서 임유진의 다리도 똑같이 절게 만들어 버릴 예정이었는데 이렇게 파티장에서 만나게 될 줄이야.“이번엔 또 어떤 남자 물었어요? 혹시 강지혁 씨와 다시 잘 돼보겠다고 온 건 아니죠? 그런 생각을 품기 전에 자기가 어떤 주제인지 파악 좀 하죠? 강지혁 씨한테 당신은 그저 한 번 데리고 놀 정도의 여자일 뿐이에요. 강지혁 씨가 옆에 없으면 당신은 아무런 가치도 없어요. 알아들었어요?”소민영은 신랄하게 비아냥거렸다.임유진은 그녀의 말을 무시하고 고개를 옆으로 돌리다 마침 이쪽으로 걸어오는 소민준과 진세령을 발견했다.생각해보면 이런 파티에서 그들과 마주하게 되는 건 아주 당연한 일이었다.진세령은 이제 연예인이라는 후광이 사라졌지만 여전히 진씨 가문의 아가씨이기에 꿀릴 건 아무것도 없었다.진세령은 임유진 앞으로 다가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이런 곳에서 만나게 될 줄은 몰랐네? 사건 뒤집은 거 축하해. 혹시 우리 집안 원망하는 건 아니지? 그러게 그때 조금 더 강력하게 어필하지 그랬어. 그랬으면 무죄판결을 받았을 수도 있었을 텐데.”진세령은 아랫사람 대하듯 그녀를 바라보며 ‘축하’를 해주었다. 그리고 이미 모든 게 다 짜인 판에 좀 더 강력하게 어필했으면 무죄를 받았을지도 모른다는 막말을 해댔다.“진범 잡은 거 축하해. 그러고 보니 너희 집안은 후계자가 죽었는데 제대로 조사할 생각도 안 한 거야? 아니면 사건의 진범이 누구든 상관없이 그저 누명 씌울 사람이 필요했던 건가?”“너!”이에 진세
뭐가 됐든 이렇게 된 이상 후회해봤자 소용없는 일이다. 그리고 지금은 진세령과 함께 하는 것이 소씨 가문을 위하는 일이기도 했다.“이만 가자. 회장님한테 인사드려야지.”소민준은 이 상황을 중재하려고 했다. 하지만 소민영은 도끼눈을 뜨며 물러설 생각을 하지 않았다.“오빠, 이 여자가 하는 소리를 듣고도 가자는 소리가 나와?”“전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벌써 까먹었어?”소민준이 얼굴을 굳히며 호통쳤다.“그때는 강지혁 씨가 있었으니까 그런거고. 지금은 헤어졌는데 우리가 눈치 볼 이유가 뭐가 있어? 이 여자는 지금 보잘것없는 여자일 뿐이라고!”소민영은 주변 사람 전부 들으라는 듯이 일부러 더 목소리를 높였다.그녀의 말을 들은 사람들은 모두 소민영을 바라보았다. 그들 중에는 호기심 어린 표정인 사람들도 있었지만 동정의 눈길을 보내는 사람들도 있었다.소민영은 그 동정의 시선이 임유진을 향한 것인 줄 알고 더욱더 활개를 쳤다.“지금 보면 강지혁 씨도 참 취향이 특이해. 오빠가 버린 여자한테도 관심을 주고. 뭐, 지금 이렇게 버린 걸 보면 확실히 정신을 차린 거지.”그녀는 임유진을 바라보며 한껏 비아냥거렸다.“아, 감방에서는 맨날 무릎 꿇고 거지처럼 남은 밥이나 주워 먹었다면서요? 어떻게 지금 여기서 재연해보는...”철썩.그녀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누군가가 그녀의 뺨을 내리쳤다. 어마어마한 힘에 소민영은 바로 바닥에 쓰러졌다.그녀는 몇 초간 멍한 표정으로 있다가 간신히 정신을 차린 뒤 맞은쪽 뺨을 부여잡고 소리쳤다.“감히 날 때려?! 어떤 새끼야!”소리 한번 치고 나니 맞은 쪽 뺨이 더 화끈거리며 아파 왔다.오늘 그녀가 소민준과 진세령을 따라 파티에 참석한 건 자신의 짝으로 딱 맞는 상류층 자제들을 물색하기 위해서이다. 다리를 절뚝거린 다음부터 남자들의 대시가 뚝 하고 끊겼다.그렇다고 일반 집안에 시집을 가자니 그건 또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그녀의 친구들 남자친구는 하나같이 재벌 2세들이거나 톱스타들이었다.그러니 지
소민준은 다급하게 그의 옆으로 가 해명했다.“강 대표님, 오해예요. 민영이가 아직 어려서 철이 없어요. 한 번만 용서해주세요.”그러고는 바닥에서 아직 멍한 얼굴로 바라보기만 하는 소민영을 향해 호통쳤다.“얼른 사과하지 않고 뭐해!”소민영은 솔직히 이 상황이 너무 억울했다. 왜 맞은 건 자신인데 자신이 도리어 사과를 해야 할까.하지만 상대는 그 강지혁이기에 머리를 조아릴 수밖에 없었다. 강지혁 앞에서 소씨 가문은 상대할 가치도 없는 작은 가문이니까.물론 한편으로는 의문도 들었다. 그녀가 얻은 정보에 의하면 임유진이 강씨 저택을 나와 월세방에서 사는 건 확실한데, 그렇다는 건 강지혁이 임유진을 차버린 거나 다름없을 텐데, 대체 왜 강지혁은 지금 임유진을 감싸고 있는 거지?‘설마 임유진을 이곳으로 데려온 게 강지혁인 건가?!’소민영은 궁금한 것투성이였지만 이에 답변해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그녀는 천천히 바닥에서 몸을 일으키더니 불만 가득한 얼굴로 사과하려고 했다.하지만 이제 막 입을 뗐을 때 임유진이 먼저 입을 열었다.“어차피 받아줄 생각 없으니까 사과하지 마세요.”소민영은 자신이 잘못 들은 건 아닌가 싶어 임유진을 바라보았다.‘사과하려고 했는데 뭐가 어째?’“하긴, 억지 사과 같은 건 받지 않는 게 좋겠다, 누나.”강지혁도 옆에서 맞장구를 쳐주었다.‘누나?!’누나라는 호칭에 소민준의 표정이 미묘하게 변했다. 그가 기억하기로 강지혁은 임유진과 사귄 뒤로 누나라는 호칭을 쓴 적이 없다.그런데 지금 또 누나라고...‘대체 뭐가 어떻게 된 거지?’소민준은 의문 가득한 얼굴로 두 사람을 번갈아 보았다.한편 소민영은 지금 민망해 죽을 지경이었다. 원래는 빨리 사과하고 자리를 피하려고 했는데 임유진이 사과를 받지 않겠다고 얘기하는 바람에 이대로 자리를 벗어나지도 못하게 되어 버렸다.그녀는 퉁퉁 부어오른 얼굴로 주위 사람들의 비웃음을 그대로 받았다.그때 소민영의 모습을 본 진세령이 나서서 말했다.“사과는 필요 없다고 했지만 민영이가 잘
다만 자리를 뜨기 전에 진세령은 고개를 돌려 두 사람을 한 번 더 바라보았다.임유진의 뒤에 강지혁이 있는 것은 확실하다. 그렇다면 헤어졌다는 소식은 뭐지?뭐가 됐든 강지혁이 뒤에서 지키고 있는 이상 임유진을 건드리는 건 쉽지 않을 것이다.진세령은 임유진 때문에 연예계에서 퇴출당한 것을 떠올릴 때면 이가 갈렸다. 그런데 강지혁이 옆에 있어 존대하는 건 물론이고 심기를 건드릴까 봐 굽신거려야 하니 더더욱 분통이 터졌다.‘이럴 줄 알았으면 아예 감옥에 있을 때 죽여버리는 거였는데!’“오빠, 강지혁이 우리를 이대로 보냈으니 별문제 없는 거겠지?”소민영은 오히려 후련한 표정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억지로 사과하지 않아도 되고 돈을 쓰지 않아도 되니 이 정도면 체면을 지킨 것이라고도 볼 수 있다.반면 소민준은 지금 머리가 복잡했다.그가 아는 강지혁은 절대 이 정도로 넘어갈 사람이 아니었다. 게다가 한번 전적이 있는 사람들에게는 더하면 더 했지 덜하지는 않을 것이다.하지만 아까 소민영이 그렇게 임유진을 모욕했음에도 강지혁은 뺨 한번과 몇 마디로 끝을 냈다. 이건 그냥 봐준 거나 다름없었다.정말... 이대로 봐준 걸까?소민준 역시 확신할 수 없었기에 소민영에게 그저 당부의 말만 했다.“아마도 그럴 거야. 하지만 앞으로는 조심해. 다시는 임유진 건드리지 마. 그때는 우리 집안에도 영향을 끼칠지도 모르니까.”그러자 소민영이 입을 삐죽거리며 비아냥거렸다.“강지혁이 없으면 별것도 아닌 년이. 흥, 언젠가 강지혁에게 버림받는 날이 오면 내가 진짜 걔 다리를...!”“그만해!”소민준은 그녀의 말을 끊고 거세게 호통쳤다.“아까 그 상황을 보고도 아직 그 입 놀리고 싶어? 다른 한쪽 다리도 병신 되고 싶어서 그래?!”이에 소민영의 얼굴이 빨개지더니 입을 꾹 닫았다.진세령은 소민준을 보면서 조금 불안한 표정을 지었다.아까 임유진을 만났을 때 소민준은 미련이 가득한 표정을 지었었다.‘설마 임유진과의 추억에 젖기라도 한 거야? 그런 거야?’당연히 이 말은
배여진은 이런 파티가 있을 때면 항상 강현수의 파트너로 참석했다. 그 때문인지 강현수가 그녀를 여자친구라고 얘기하지 않아도 네티즌들은 배여진이 강현수의 여자친구라고 굳게 믿었다.또한, 강현수는 매번 배여진을 직접 픽업하는 것은 물론이고 그녀에게 드라마 배역을 준다거나 온갖 것들을 다 누릴 수 있게 해주었다.임유진이 이런 사실을 알고 있는 건 네티즌들이 종종 인터넷에 목격담을 올렸기 때문이다.강현수의 이름은 항상 인기 검색어에 올랐기에 보지 않으려고 해도 안 볼 수가 없었다. 그리고 이러한 기사나 목격담이 뜰 때면 항상 배여진의 평가도 따라붙었다. 배여진은 얼굴이 예쁘지 않고 집안도 잘사는 것이 아니며 학력도 낮고 게다가 이혼까지 했다며 강현수가 만났던 여자 중에서 최악이라고 했다.심지어 강현수가 약을 잘 못 먹어 그런 여자를 옆에 두는 거라며 조롱했다.강현수는 그런 댓글들에 한 번도 먼저 나서서 뭔가를 한 적이 없다.대신 배여진의 매니저가 배여진의 악플러들에게 선처 없이 고소하겠다며 해결에 나섰다. 그리고 그녀의 매니저는 강현수가 붙여준 사람이었다.사람들도 그 사실을 알고 있기에 매니저의 발언이 강현수의 뜻이라며 추측했다.파티장에 들어선 강현수는 누군가의 시선을 느낀 듯 사람들을 뚫고 곧바로 임유진 쪽을 바라보았다.그러다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치는 순간, 큰 손이 임유진의 두 눈을 가려버렸다.“보지 마. 나는 누나가 그런 식으로 다른 남자를 뚫어지게 보는 거 싫어.”질투 어린 목소리가 임유진의 귓가에 들려왔다.그녀는 잠깐 멈칫하더니 그를 향해 말했다.“장난하지 말고 이 손 내려.”“장난하는 거 아니야.”강지혁은 말을 마치고 차가운 눈으로 강현수를 바라보았다.강현수는 임유진과 강지혁이 함께 있는 것을 보더니 자기도 모르게 눈썹을 찌푸렸다.어떻게 된 거지? 헤어진 거 아니었나? 대체 두 사람이 왜 또 함께 있는 거지?!두 남자의 눈빛이 허공에서 부딪혔다. 한 명은 의문투성이인 얼굴이었고 한 명은 질투 가득한 얼굴이었다.강지혁은 자
드디어 캄캄했던 시야에 불빛이 들어왔다. 잠깐 불빛에 적응하고 보니 강현수와 배여진은 어느새 코앞까지 와 있었다.“유진아, 네가 여기 왜 있어? 그것도... 강지혁 씨랑 같이?”배여진은 눈앞의 상황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임유진은 분명히 강지혁과 헤어졌는데 대체 왜 같이 있는 거지?‘대체 뭐가 어떻게 된 거야!’요 며칠 그녀는 임유진이 강현수를 찾아와 모든 걸 다 얘기해버릴까 봐 틈만 나면 강현수 앞에서 임유진의 흉을 봤다. 그리고 어릴 적 그를 구해준 사람이 자신이라는 것을 몇 번이나 더 어필했다.하지만 그런 노력이 무색하게도 임유진은 강현수를 찾아오지 않았다.이유가 뭐가 됐든 드듸어 안도의 한숨을 쉬며 조금 편해지려던 찰나 이곳에서 임유진을 만나게 되어버렸다.“나와 같이 있으면 안 되나 보죠?”그녀의 말에 대답한 건 강지혁이었다.“당연히 아니죠. 하하하...”배여진은 어색하게 웃었다.“둘이 왜 같이 있어?”그때 강현수가 강지혁을 똑바로 바라보며 물었다.“전에 말했던 것 같은데, 너는 얘 못 건드린다고.”강지혁 역시 강현수와 눈을 마주치며 답했다.“내가 네 말을 들을 이유는 없지.”강현수는 싸늘하게 대답하더니 이번에는 임유진을 보며 물었다.“전에 나한테 더 이상 강지혁 사랑하지 않을 거라고 하지 않았어요? 그런데 대체 왜 지금 강지혁과 이곳에 있는 거죠?”임유진의 얼굴이 굳어버렸다.강현수는 지금 강지혁의 체면 따위 전혀 고려하지 않고 말을 내뱉었다.역시 그 말을 듣는 순간 강지혁의 얼굴이 한층 더 어두워졌다. 그리고 그들을 감싼 공기도 팽팽해졌다.“제 행동을 강현수 씨에게 일일이 보고할 필요는 없을 것 같은데요.”임유진은 말을 하면서 자리에서 일어섰다.그리고 자리에서 일어선 덕에 강현수는 그제야 그녀의 드레스 모습을 볼 수 있었다.보라색과 흰색 수정이 박혀있는 연보라색 드레스는 앉아있을 때보다 서 있을 때 더욱더 시선을 끌었다.강현수는 지금 상당히 놀란 얼굴이었다.임유진이 입고 있는 드레스는 전에 유명 디자이너의
게다가 이제는 강문철도 없으니 임유진이 강씨 가문이 안주인이라는 건 그 누구도 반박할 수 없는 사실이 되었다.또한 임유진은 임신까지 했으니 아이들이 무사히 태어나면 그때는 그 누구도 그 자리를 감히 탐낼 수 없게 된다.장례식에 참석한 사람들 모두 그 사실을 인지하고 있기에 강지혁을 대하는 것처럼 그녀를 대했다.임유진은 강지혁의 아내로서 줄곧 강지혁의 곁에 있었다.강씨 가문은 S 시에서 가장 뿌리가 깊고 또 유명한 가문이라 장례식장도 컸고 조문객들도 훨씬 많았다.강지혁은 임유진이 무리라도 할까 봐 몇 번이나 그녀에게 이만 쉬라고 했지만 임유진은 고개를 저으며 계속해서 그의 곁을 지켰다.“나 아직 괜찮아. 진짜 힘들면 너한테 얘기할게. 나도 내 몸 귀한 줄 알아. 그러니까 걱정하지 마.”임유진도 자신이 아이셋을 가진 임산부라는 사실을 잘 인지하고 있었다.그때 조문객들이 입구를 바라보며 강현수의 이름을 불렀다.이에 임유진은 살짝 움찔하더니 저도 모르게 시선을 돌려 입구 쪽을 바라보았다.그러자 익숙한 남자의 실루엣이 천천히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는 것이 보였다.강현수와 마지막으로 본 것도 이제는 몇 달 전이었다.한때는 생사를 함께 했던 친구였는데 결국에는 썩 유쾌하지 않은 방식으로 헤어지게 되었다.강현수는 오늘 부모님과 함께 장례식에 참석했다.임유진이 그를 바라봤을 때 그의 시선 역시 임유진에게 닿아있었다.강현수는 임유진을 보자마자 옆으로 늘어트린 손을 살짝 움켜쥐었다.그토록 오래 찾아 헤맸던 사람을, 오랜 기간 마치 습관처럼 떠올렸던 사람을 그는 번번이 놓쳐버렸다.임유진과 다른 방식으로 다시 시작할 수도 있었는데 그는 그 가능성마저도 자기 손으로 부숴버렸다.그 결과 그녀는 다른 남자의 아내가 되었고 다른 남자의 아이를 임신했으며 지금 그 남자의 곁에 서 있게 되었다.강현수는 이제 영원히 그녀 곁에는 있을 수 없게 되었다.강현수네 가족이 강지혁과 임유진의 앞으로 다가왔을 때 강현수는 위로의 말을 건네는 부모님과 달리 아무 말도 하지
어쩌면 강지혁은 줄곧 할아버지의 사랑을 받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그 어린 나이에 아버지를 잃고 돌아온 그에게 유일한 버팀목이라고는 강문철밖에 없었으니까.“나는 솔직히 네 할아버지가 고마워. 혁이 너를 이렇게 멋있게 키워줬잖아. 그리고 나랑 만나게 해줬고.”임유진은 계속해서 그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을 이어갔다.“혁아, 네가 원하는 가족 간의 사랑은 앞으로 내가 줄게. 그리고 우리 아이들도 줄 거야.”그 말에 강지혁의 눈동자가 흔들렸다.임유진은 모든 걸 알고 있었다. 그가 무엇을 가장 원하는지 이미 다 알고 있었다.“아까 네가 그랬지? 사람마다 중요하게 여기는 게 다 다르다고. 그럼 너는? 네가 중요하게 여기는 건 뭔데?”강지혁이 임유진의 체향을 들이마시며 물었다.그녀의 냄새를 맡고 있으면 늘 이렇게 마음이 진정되고 몸이 편안해졌다.“나?”임유진은 그 말에 잠시 생각하다가 답했다.“내가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건 혁이 너랑 우리 아이들이야.”“유진아, 나는 욕심이 많아. 나는 너를 그 누구와도 나누고 싶지 않아. 그게 우리 아이들이라고 해도 나는 싫어. 나는 내가 네 마음속 1순위였으면 좋겠고 너한테 가장 중요한 사람이었으면 좋겠어.”강지혁의 말에 임유진이 눈을 깜빡였다.설마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아이들을 질투하는 건가?“혁아, 너는 내 마음속 1순위야. 물론 아이들도 너무 중요하고 소중하지만 너랑은 결이 조금 달라. 혁이 너는 나한테 유일무이한 존재잖아.”임유진은 두 손을 둘러 가볍게 강지혁을 끌어안았다.이미 배가 불러올 대로 불러와 완전히 꼭 끌어안지는 못했지만 싸늘한 방 공기를 녹이기에는 충분했다.“내가 너한테 유일무이한 존재라고?”“응. 널 대신할 사람은 그 어디에도 없어. 물론 아이들을 낳고 진정한 엄마가 되면 어쩔 수 없이 아이들에게 더 신경을 쓰고 더 관심을 쏟을 수밖에 없겠지.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네가 중요하지 않은 건 아니야. 이건 장담해. 그리고 네가 원하면 네가 원하는 방식대로 더 많이 널 사랑해줄게. 혁아,
별채로 가는 길에는 늘 조명이 켜져 있기에 어두운 저녁이라도 전혀 무섭지 않았다.임유진이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 보니 강지혁이 방 한가운데 멀뚱히 서 있는 것이 보였다.강지혁은 불빛을 받으며 시선을 내린 채 바로 앞에 있는 냉동관을 그저 가만히 바라만 보고 있었다.“혁아.”임유진은 그를 부르며 천천히 옆으로 다가갔다.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강지혁은 상념에서 빠져나와 고개를 돌렸다.“오지 말라니까. 여기는 나 혼자 있으면 돼.”“너랑 같이 있고 싶어서 왔어.”임유진은 강지혁의 바로 앞에 서서 그의 볼을 매만졌다.지금은 1월이라 날씨가 무척이나 추웠다. 게다가 지금은 밤이고 별채 쪽에는 보일러도 없었기에 바깥과 거의 비슷할 정도로 추웠다.“오늘 밤도 여기 있을 거야?”임유진이 물었다.“응. 그래도 날 키워주셨으니 할 도리는 다해야지. 내일 할아버지 장례식에 사람들 많이 올 거야. 너는 몸이 불편하니까 가지 말고 그냥 집에 있어.”“출산할 시기가 임박한 것도 아닌데 뭐. 내일 할아버지 장례식에 나도 참석할 거야. 만약 몸이 불편하거나 하면 바로 너한테 얘기할게.”강지혁은 그 말에 임유진의 손을 살짝 잡았다.“너한테는 좋은 기억 하나 없는 사람이잖아. 그런데 왜...”“네 할아버지잖아. 네 유일한 가족이잖아. 그러니까 아무리 나를 마음에 들지 않아 했어도, 아무리 끝까지 나를 손주며느리로 받아들이지 않았어도 나는 할아버지 가시는 길을 너와 같이 보내드려야 할 의무가 있어.”다른 건 없었다.그저 강지혁의 어린 시절을 곁에서 지켜줬다는 사실만으로도 임유진은 충분히 감사했다.강지혁은 그 말에 그녀의 손을 조금 세게 쥐었다.“할아버지가 마지막에 한 말은 신경 쓰지 마. 그 말은 그냥...”“알아. 네 할아버지는 그저 누군가를 깊게 사랑하는 것으로 행복한 결과를 낳을 거라는 걸 믿지 못하시는 분이었던 거지. 네 증조할아버지와 증조할머니 일도 있고 네 아버지 일도 있어서 많이 무서우셨을 거야. 너도 나중에 불행하게 될까 봐.”임유진이 말했
강지혁은 마치 강문철에게 자신이 임유진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보여주려는지 조금 격앙된 목소리로 얘기했다.강문철은 그 말에 눈동자를 돌려 자신의 유일한 손주를 노려보았다. 그러다 몇 초 후 이제는 모든 게 다 피곤한 듯 천천히 눈을 감으며 입을 열었다.“우리 집안에서... 여자한테 미친 인간 치고... 멀쩡한 사람을 못 봤다. 네가... 계속해서 이러면 너도 언젠가는...”강문철의 목소리가 점점 작아지는가 싶더니 이내 옆에 있던 종합모니터에서 삐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임유진은 그 소리에 강문철이 세상을 떠났다는 것을 바로 알았다.누군가의 생명이 바로 눈앞에서 멎었다.조금은 무서웠던 노인이, 강지혁의 유일한 가족이었던 노인이 이렇게 세상에서 사라졌다고 생각하니 어쩐지 모든 게 다 비현실적으로 다가왔다.강지혁은 삐 소리가 들린 뒤로 임유진의 손을 꽉 잡았다. 그렇게 계속 힘을 주다가 임유진의 입에서 아프다는 소리가 들리고서야 비로소 정신을 차리며 손을 놓아주었다.“미안. 아팠지?”강지혁은 어느새 빨개진 그녀의 손을 다시 잡으며 초조한 눈길로 물었다.“괜찮아. 그것보다 할아버지...”“응. 가셨어.”강지혁의 얼굴은 가족을 잃은 사람 같지 않게 무척이나 평온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정말 아무런 감정도 없는 게 아니라는 걸 임유진은 알고 있다.아무리 살가운 사이가 아니었어도 강문철은 강지혁의 할아버지고 유일한 가족이었다. 강선우가 죽은 뒤로 그의 곁을 지켜줬던 유일한 사람이었다.강지혁은 몸을 돌려 편히 잠든 강문철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았다.그리고 임유진은 그런 강지혁의 옆에 서서 그의 손을 꽉 잡아주었다....강문철의 장례식은 3일 뒤로 정했다.그 3일 동안 시신은 냉동관에 넣은 채 강씨 저택의 별채에 두기로 했다.그리고 그 3일 동안 강지혁은 그 어떤 외부인도 별채에 들이지 않았다.별채는 강씨 가문 사람 외에는 허락하지 않는 특별한 곳이었으니까.강선우가 죽었을 때도 그의 시신은 잠시 이 별채에 놓여 있었다. 그리고 지금은 그의
강지혁은 임유진의 고집에 결국 알겠다며 그녀와 함께 집에서 나와 병원으로 향했다.병원에 도착한 후 강지혁은 뒤따라온 경호원에게 임유진의 곁을 맡기고 혼자 병실로 들어갔다.안으로 들어가 보니 빼빼 마른 강문철이 흰색 병상 위에 가만히 누워있는 것이 보였다.한 시대를 주름잡았던 남자도 병마와 세월 앞에서는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었다.강문철은 강지혁이 안으로 들어온 것을 보더니 마지막 힘을 쥐어짜 입을 움직였다.“왔... 니...”“네, 저 왔어요.”강지혁이 곁으로 다가오며 대답했다.사실 강지혁은 강문철에게 대단한 가족 간의 정은 느끼지 못했다.실제로 강문철은 강지혁이 할아버지에 대한 애정을 느낄만한 행동을 보여주지 않았으니까.강문철은 언제나 강지혁을 자신의 뒤를 이어 강씨 가문의 모든 것을 물려받을 하나의 장기 말로 여겨왔다. 물론 그 장기 말도 쓸모가 없었다면 진작 버렸을 것이다.“이제는... 강씨 가문의 모든 게 네 손에... 달렸다. 만약... 네가 가문을 망하게 하면... 가만두지 않을 거야.”강문철이 숨을 몰아쉬며 힘겹게 말을 내뱉었다.“할 말은 그게 끝이에요?”강지혁이 강문철을 빤히 바라보았다.이에 강문철은 탁한 눈동자를 옆으로 굴려 병실 문 쪽을 바라보며 말했다.“임유진... 그 아가씨... 밖에 있지? 들어오라고 해...”그 말에 강지혁의 눈썹이 꿈틀거렸다.“유진이 건드릴 생각하지 마세요.”“이 꼴로... 내가 뭘 할 수 있을 것 같으냐? 어차피... 그 아가씨 옆에는... 네 사람 천지일 텐데.”강지혁은 그가 두 손으로 직접 키운 손주이자 가문의 후계자이기에 강지혁의 생각 같은 건 이미 훤히 꿰고 있었다.강지혁이 움직이지 않고 가만히 있자 강문철이 다시 입을 열었다.“그저... 마지막으로 해줄 얘기가... 있어서 그러는 것뿐이다...”호흡이 점점 가빠지고 안색도 창백해진 것이 정말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듯했다.강지혁은 잠깐 고민하다가 결국 발걸음을 옮겨 병실 밖으로 나갔다. 그러고는 곧바로 임유진의 손을
“그래? 그럼 만약... 내가 너한테 상처를 줘도 너도 똑같이 나 안 볼 거야? 내가 아무리 용서해달라고 빌어도 나 용서 안 해줄 거야?”강지혁은 목구멍을 쥐어짜는 듯한 목소리로 한마디 한마디 힘겹게 내뱉었다.이에 임유진은 몸을 돌려 이해가 안 간다는 얼굴로 강지혁을 바라보았다.“혁아, 너 대체 왜 그래? 요즘 따라 너무 불안해 보여. 무슨 일 있는 거야?”강지혁은 자신의 불안해 보인다는 말에 고개를 푹 숙였다.확실히 그는 요 며칠 줄곧 불안해하고 있었다.탁유미와 이경빈의 일을 가까이에서 지켜보며 자신과 임유진의 결말도 그들과 똑같을까 봐 불안해하고 있었다.“혹시 방금 내가 한 말이 널 불안하게 만들었어? 혁아, 내가 언니를 이해한다고 했던 건 소민준과의 일이 생각나서 그랬던 거야. 네가 괜한 생각을 할 게 아니라고. 네가 나한테 상처 줄 리가 없잖아. 그리고...”임유진은 손을 들어 조금 우울해 보이는 강지혁의 눈가를 부드럽게 매만졌다.“전에 내가 말했잖아. 네가 정말 나한테 미안해야 할 일을 했다고 해도 울면 봐주겠다고.”그녀는 강지혁의 눈에 담긴 우울함이 사라질 수 있게 일부러 환히 웃으며 얘기했다.그러자 그 말을 들은 강지혁의 눈에 조금씩 빛이 들어오기 시작했다.“유진아, 너를 향한 내 감정은 언제나 그대로일 거야. 앞으로 무슨 일이 생기든 절대 변하지 않을 거야.”강지혁은 임유진의 오른손을 들어 자신의 심장에 가져갔다.“그러니까 너도 약속해. 날 영원히 사랑하겠다고. 절대 변하지 않을 거라고. 약속해.”임유진은 그 말에 눈을 깜빡였다.탁유미와의 대화에서 사람의 감정은 언젠가는 변한다는 말에 깊이 공감했는데 눈앞에 있는 남자는 자신의 감정은 변하지 않을 거라고 하고 있다.소민준과의 관계에서 질릴 대로 질려 그에게 모든 감정이 사라진 건 사실이다. 하지만 지금 눈앞에 있는 남자를 사랑하고 있고 그와 영원히 하고 싶은 것 또한 사실이다.“응, 영원히 너만 사랑할게. 절대 변하지 않을게. 약속해.”임유진은 진지한 얼굴로 그에
임유진은 한지영이 정신을 차린 모습을 떠올리면 마음이 아프다가도 그녀가 활기를 되찾아줘서 참으로 고마웠다.한지영은 백연신과 그렇게 헤어진 후 자포자기하는 것이 아닌 적극적으로 치료에 임하며 회복에 힘썼다. 심지어 며칠 전에는 미소를 지으며 이런 말까지 했다.“고작 남자랑 헤어진 것뿐인데 뭐. 연애가 다 이런 거 아니겠어? 사랑했다가 또 헤어졌다가. 그래서 결혼까지 가는 게 기적이라는 말도 있잖아. 열렬히 사랑했으니 그거로 난 됐어. 혹시 알아? 퇴원한 뒤에 진정한 내 운명이 나를 찾아올지.”“다행이네요.”탁유미는 한지영의 말을 전해 듣고 잔잔한 미소를 지었다.“유진 씨랑 지영 씨는 나처럼 이러지 말고 정말 행복했으면 좋겠어요.”그녀는 자신의 인생에서 더 이상의 사랑은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대화를 나누던 임유진과 탁유미는 병실 밖의 누군가가 그들의 대화를 다 듣고 있는 것을 몰랐다....임유진은 탁유미에게 인사한 후 강지혁과 함께 강씨 저택으로 돌아왔다.찌뿌둥한 몸을 이끌고 2층으로 올라가려는데 강지혁이 뒤에서 그녀를 품에 끌어안았다.“왜 그래?”갑작스러운 포옹에 임유진이 물었다.사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강지혁은 오늘따라 말수가 무척이나 적었고 시선은 거의 창밖에 고정하다시피 했다.그 모습에 임유진이 몇 번이나 무슨 일 때문에 그러는지 물었지만 강지혁은 그때마다 아무것도 아니라며 대답을 피했다.“그냥... 갑자기 안고 싶어져서.”강지혁은 낮게 중얼거리며 아까 병원에서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그는 이경빈을 따라 탁유미의 병실 앞으로 왔다가 비스듬히 열린 문틈 사이로 임유진과 탁유미의 대화 내용을 들었다.탁유미가 자신에게 상처 준 사람은 다시 받아줄 생각이 없다고 했을 때 이경빈은 휘청하며 그대로 주저앉았고 입을 틀어막으며 흐느끼는 소리가 새어나가지 않게 했다.그 순간만큼은 우는 것조차도 그에게는 허락되지 않았다.“맨날 안으면서 아직도 부족해?”임유진이 실소하며 물었다.“응. 부족해.”강지혁에게는 어쩌면 평생 부족할지도 모른다
그리고 어쩌면 무의식 속에서 그 언젠가 임유진이 모든 진실을 알게 되고 그를 떠나면 그때 누군가가 이렇게 도움의 손길을 내밀어줬으면 해서 일지도 모른다....탁유미는 이틀 정도 중환자실에 있다가 모든 수치가 안정된 후 바로 일반 병실로 옮겨졌다.다만 수술은 성공적이었지만 앞으로 정기적으로 검진을 받아야만 했다.탁유미는 간호사가 들어와 약을 갈아줄 때마다 보이는 수술 자국을 보면서 조금 복잡한 마음이 들었다.그녀가 아무리 원치 않았다고 해도 지금 그녀의 몸 안에 있는 간은 이경빈의 간이었다.어쩌면 하늘이 조금은 그녀를 가엽게 여겨준 걸지도 모른다. 그래서 이런 방식으로 살게 된 건지도 모른다.윤이와 김수영은 요 며칠 거의 탁유미 곁에서 떨어지지 않다시피 했고 임유진도 자주 탁유미를 보러 병원에 왔다.“유진 씨, 미안해요. 괜히 나 때문에 힘들게 왔다 갔다 하고...”탁유미는 미안한 얼굴로 임유진의 큰 배를 바라보았다.지금쯤 집에서 태교나 들으며 휴식을 취해도 모자란 데 괜히 자신 때문에 임유진이 고생하고 있는 것 같았다.“언니, 그게 무슨 말이에요. 언니가 나였으면 안 이랬을까요? 그러니까 너무 그러지 않아도 돼요.”임유진은 말을 하며 의자에 앉았다.“나 윤이 데리고 나갈 테니까 둘이서 얘기하고 있어.”김수영이 꾸벅꾸벅 졸고 있는 윤이를 안아 들며 보호자가 쉴 수 있는 방으로 들어갔다.임유진은 두 사람이 들어간 것을 확인한 후 탁유미를 바라보며 조심스럽게 물었다.“혁이가 그러는데 이경빈 씨도 며칠 전부터는 걸어 다닐 수 있게 됐대요. 그런데... 언니 병실까지 왔다가 매번 들어오지는 못하고 다시 돌아가나 봐요.”그 말에 탁유미는 담담하게 대꾸했다.“이경빈과의 인연은 여기서 끝이에요. 어차피 이경빈도 몸이 다 나아지면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갈 거고 나는 계속 여기서 살게 되겠죠. 물론 나랑은 끝이라도 윤이랑은 부자간의 정이 있으니까 둘이서는 만나게 될지도 모르겠네요.”“이경빈 씨와는 정말 일말의 가능성도 없는 거예요?”임유진의
다시 눈을 뜬 이경빈이 보게 된 건 의사와 간호사, 그리고 강지혁이었다.마취가 아직 완전히 풀리지 않아서 그런지 통증 같은 건 없었다.“유미는... 어떻게 됐습니까?”이경빈이 힘겹게 입을 열며 물었다.“수술은 성공적으로 끝났고 탁유미 시는 지금 중환자실에 있어요. 이틀 정도 경과를 지켜봐야 한대요.”그의 말에 대답해준 건 강지혁이었다.이경빈은 그 말에 안도의 한숨을 쉬며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수술이 무사히 끝났으니 된 거다.앞으로 두 번 다시 탁유미 곁에 모습을 드러낼 수는 없지만 적어도 그녀의 몸 안에 그의 일부가 살아 숨 쉬고 있으니까, 그녀가 죽을 때까지 줄곧 함께하게 될 거니까 그것으로 됐다.그리고 그녀가 준 골수도 평생 그와 함께 할 테니 그 역시 이것으로 그녀와 평생 함께하고 있다고 생각하면 된다.이경빈은 탁유미의 상태 외에 아무런 질문도 하지 않았다. 마치 자기 몸은 어찌 되든 상관없다는 듯한 태도였다.의사가 수술 후 주의사항과 나타날 수 있는 증상들에 관해 설명해주는데도 그는 시큰둥한 얼굴로 침묵만 고수할 뿐이었다.강지혁은 그런 그를 빤히 바라보다가 의사와 간호사가 전부 다 나간 뒤 천천히 입을 열었다.“탁유미 씨 사건을 뒤엎으려고 한다고 들었는데 그렇게 되면 이강 그룹이 큰 타격을 입게 될 겁니다. 어쩌면 판결 결과에 따라 이경빈 씨는 감방살이하게 될지도 모르고요.”“알고 있어요.”이경빈이 담담하게 말했다.자신의 결정으로 그룹에 어떤 파문이 일지 그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 역시 그가 받아야 할 벌이다.복수하겠다는 생각에 매몰돼 공수진의 말만 믿고 거짓 증언한 그의 업보다.탁유미가 형을 살게 된 것에 제일 큰 공헌을 한 건 바로 그의 증언이었다.그러니 그녀를 감옥으로 보낸 건 그나 다름없었다.“정말 앞으로는 탁유미 씨 앞에 나타나지 않을 생각입니까?”강지혁이 물었다.“내가 유미를 위해 해줄 수 있는 건 많지 않아요. 그런데 유미가 그걸 원한다고 하니 나로서는 들어줄 수밖에요.”그 소원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