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경빈은 돌아가는 차 안에서 자기도 모르게 아까 탁유미가 잡았던 팔을 매만졌다.두 사람이 다시 만난 뒤로 탁유미가 먼저 잡아 온 건 오늘이 처음이었다.팔을 잡혔을 때 그녀의 손 떨림이 여실히 느껴졌다. 게다가 그의 손을 뿌리치려고 살갗이 닿았을 때 솔직히 깜짝 놀랐다. 그녀의 손이 마치 산 사람이 아닌 것처럼 차가웠기 때문이다.이경빈은 어느새 또 탁유미 생각을 하는 자신을 발견하고 눈을 질끈 감았다.그녀를 동정해서는 안 된다. 아이는 반드시 이씨 집안으로 데리고 와야 한다!...임유진은 한시라도 빨리 단서를 모으고 싶은 마음에 홀로 가해자 차량 궤적을 따라 CCTV가 없는 그 도로에 도착했다.그리고 이곳에 오기 몇 분 전에는 인터넷에 글까지 올리며 사고 당시 시간대에 CCTV가 없었던 구간을 지나간 차량이 있는지, 혹 블랙박스에 뭔가 찍힌 게 있으면 언제든지 연락을 달라고 했다.하지만 당연하게도 연락을 주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그도 그럴 것이 사건이 일어난 지 벌써 꽤 시간이 흘렀고 만약 정말 찍혔다 하더라도 데이터가 지워졌을 수도 있다.게다가 임유진이 쓴 글을 마침 그 도로를 지났던 사람이 볼 확률은 복권에 당첨될 확률보다 낮았다.임유진은 도로를 거닐며 혹시라도 미처 발견하지 못한 CCTV가 있는지 다시 한번 확인했다. 물론 이 작업도 경찰 쪽에서 이미 다 한 것이라 별다른 수확은 없었다.그녀는 거의 1분에 한 번꼴로 휴대폰을 확인했다. 그러다 드디어 그녀의 글에 답변을 단 사람이 나타났다. 그 사람은 그날 그 시간대에 확실히 그쪽을 지나쳤고 블랙박스를 확인한 결과 두 여자가 내린 것을 봤다며 임유진의 연락처를 물었다.임유진은 이에 눈이 초롱초롱해졌다.이건 행운인 걸까? 정말 증거를 잡은 걸까?!그녀는 고민도 하지 않고 바로 자신의 휴대폰 번호를 건넜다. 그러자 1분도 되지 않아 휴대폰이 울렸다.전화를 받아보니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진이’님 맞으세요?”‘진이’는 임유진의 닉네임이었다.“네, 혹시 ‘강산’님이신가
“네, 그럼 기다리고 있을게요.”임유진은 활짝 웃으며 전화를 끊었다.생각보다 일이 쉽게 풀릴 수도 있을 것 같다!만약 소지혜가 진정한 가해자라는 게 밝혀지고 그녀가 재산을 옮기는 것까지 미리 막아버린다면 이재하는 배상금을 받을 수 있게 될 것이다.임유진은 그 생각에 기분이 좋아졌다.10분이 거의 다 되어갈 때쯤 흰색 봉고차 한 대가 그녀 쪽으로 다가오더니 이윽고 그녀 앞에 멈춰 섰다.문이 열리자 선글라스와 모자를 쓴 남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차에서 내리지 않은 채 임유진을 향해 물었다.“‘진이’님 맞아요?”임유진의 시선이 운전석에 있는 남자에게로 향했다. 그 남자 역시 모자와 선글라스를 쓰고 있었고 얼굴에는 마스크까지 했다.그녀는 본능적으로 위기감을 느끼고 뒤로 한 발짝 물러섰다. 그러나 그녀에게 말을 걸었던 남자가 그녀의 손을 덥석 잡아채더니 단번에 차 안으로 끌어당겼다.그리고 차 문은 쾅 하고 닫혔다.“출발해!”남자가 운전석을 향해 외치자 차에 시동이 걸리며 천천히 앞으로 나아갔다.역시 일이 이렇게 쉽게 풀릴 리가 없었다!임유진은 그의 손에서 빠져나오려고 필사적으로 발버둥 쳤다.방금 그녀가 있던 곳은 CCTV가 없는 곳이다. 그리고 상대방도 아마 그 점을 알고 이렇게 당당하게 유괴를 했을 것이다.“그 여자 허튼짓 못 하게 꽉 잡아.”운전석 남자의 차가운 음성이 들려왔다.“도착하기 전에 재미 좀 봐도 되지?”임유진을 제압한 남자가 변태 같은 얼굴로 물었다.“죽이지만 않으면 돼. 지시 사항에는 그 여자를 당분간 병원 신세 지게 하면 된다고 했으니까.”지시 사항?! 누군가의 지시가 있었다는 것인가?임유진의 위에 올라탄 남자는 더러운 손으로 그녀의 옷을 벗기려고 했다.열심히 발버둥 쳐봤지만 소용없었다. 두 손은 남자에 의해 묶여있었고 얼굴은 여러 번 맞은 탓에 입가에는 피까지 흘렀다.“돈 때문이면 내가 더 줄게요.”임유진은 침착하게 말을 내뱉었다. 지금 상황에서는 냉정해야만 살 수 있다.“돈? 변호사 비서나 하는
“좋아. 대신 번호만 부르라고 하고 전화는 네가 걸어. 저 여자가 쓸데없는 소리를 하는 것 같으면 바로 팔을 부러트려.”운전석 남자가 무서운 말을 늘어놓았다.이에 임유진는 잠깐 두려움이 스쳤다가 이내 다시 마음의 안정을 되찾았다.적어도 지금은 잘만 하면 살 수 있을 테니 감옥에 있을 당시보다 훨씬 나은 상황이었다.감옥에 있을 때는 아무리 애를 써봐도 매를 피하지 못했었다. 그리고 맞을 때마다 그저 감내할 수밖에 없었다.남자는 휴대폰을 꺼내 들더니 임유진에게 번호를 부르라고 했다. 임유진은 강지혁의 번호를 알려주었다.생각해보면 지금처럼 웃기는 일도 없다. 강지혁에게는 그렇게 철벽을 치며 심지어 마음속으로 강지혁은 혁이가 아니라고 외치면서 막상 이런 순간에는 결국 강지혁에게 기대고 만다.그때 전화가 연결되고 강지혁의 목소리가 들려왔다.“누나?”임유진이 부른 번호는 오직 임유진만 알고 있는 번호였다. 하지만 강지혁의 휴대폰에 보이는 번호는 그녀의 것이 아닌 낯선 번호였다.“설마 동생한테 전화한 거야?”남자는 임유진이 자기를 가지고 놀았다고 생각해 발끈하며 외쳤다.“아니에요. 난 동생 같은 거 없어요. 이건 그냥... 일종의 플레이 같은 거예요.”임유진이 다급하게 해명했다.“X랄도 가지가지 하네.”강지혁은 그들의 대화로 단번에 상황의 심각성을 눈치챘다.“너 누구야?”“네 여자 지금 우리 손에 있거든? 살리고 싶으면 지금 당장 내 계좌로 20억 이체해.”“그러지.”강지혁은 아무런 망설임 없이 제안을 수락했다.“대신 그 여자 털끝 하나라도 건드렸다가는 단 1푼도 못 받을 줄 알아.”“돈이나 준비해 놓고 그딴 소리를 해!”“다시 한번 경고하는 데 그 여자 건드리지 마. 만약 내 말 어기면 고통밖에 없는 인생이 어떤 건지 똑똑히 알게 해줄 거야.”그의 싸늘한 음성에 남자는 순간 손이 떨려와 하마터면 휴대폰을 바닥에 떨어트릴 뻔했다.“목소리 들어야겠으니까 바꿔.”남자는 잠깐 망설이더니 이내 두 손이 묶여있는 임유진 앞으로 휴대폰을
강지혁이라면 분명히 그녀를 무사히 구출해 줄 테니까.임유진은 이런 생각을 한 자신이 기가 막힌 지 자기도 모르게 쓰게 웃었다.뭐든 혼자 하겠다고 결심해놓고 결국에는 또 그에게 기대게 된다.그들의 차량은 계속 P 시 쪽으로 달렸고 곧 있으면 S 시를 벗어나게 된다. 임유진은 강지혁이 무슨 생각인 건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이제 곧 톨게이트 쪽을 지나가려 할 때 차가 갑자기 멈춰 섰다.“뭐야, 왜 서?”남자가 운전석을 향해 물었다. 하지만 운전석 쪽에서는 아무런 답변도 들려오지 않았다.남자는 결국 혀를 한번 차더니 임유진을 향해 얌전히 있으라는 명령을 한 후 상반신을 앞쪽으로 가져갔다. 그리고 머리를 운전석 쪽으로 내밀어 바깥을 바라보았다.그리고 남자의 몸도 운전석 남자처럼 굳어버렸고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대체 뭘 본 거지?임유진은 손이 묶인 채 시트에 눕혀져 있어 몸을 일으킬 수가 없었다.그때 누군가 밖에서 확성기로 말을 걸어왔다.“너희들은 이미 포위됐다. 저항할 생각하지 말고 순순히 잡히는 게 좋을 거다.”임유진은 그 소리에 깜짝 놀랐다.강지혁의 지시인 걸까?그때 굳게 닫혔던 차 문이 열리고 경찰복을 입은 사람들이 신속하게 남자 두 명을 차에서 끌어냈다. 그리고 경찰들 뒤로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강지혁이다!임유진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그저 그의 얼굴을 바라보기만 했다.강지혁은 그녀의 모습을 보자마자 마치 누구 한 명 죽일 기세로 얼굴을 굳혔다.“아무도 이쪽으로 오지 마!”강지혁은 반대편을 향해 별안간 그렇게 외치더니 차 안으로 들어가 묶여있던 그녀의 손을 풀어주고 자신의 외투도 벗어주었다.“둘 중 누가 이랬어? 아니면 둘 다야?”강지혁은 부어오른 임유진의 뺨을 조심스럽게 어루만졌다. 조금 전에 몇 대 맞은 것이 벌써 빨갛게 부어올라 있었다.임유진은 긴장이 풀린 건지 그제야 고통이 느껴지기 시작했다.“마스크 안 한 남자가 이랬어.”“그리고 다른 데는 다친 곳 없어? 혹시 저놈들이 너한테...”“괜찮아! 그냥 몇
이 남자가 바로 그 돈줄인 건가?대체 얼마나 대단한 남자이기에 경찰들이 이렇게까지 하는 걸까?!강지혁의 시선이 마스크를 안 한 남자 쪽으로 향하더니 뒤에 있던 부하에게 명령을 내렸다.“내가 가면 손버릇이 더러운 게 어떤 건지 제대로 알려줘.”“네, 알겠습니다.”부하들은 눈앞에 남자는 이제 사는 게 사는 것 같지 않겠다는 생각에 속으로 혀를 끌끌 찼다.마스크 안 한 남자는 그 말에 한기를 느끼더니 강지혁이 임유진을 안고 옆에 주차된 벤틀리에 올라타려 하자 돌연 큰소리로 외쳤다.“당신 정체가 뭐야? 그리고 그 여자는 정말 변호사 비서 맞아?”돈줄이라는 남자가 절세미녀도 아닌 여자 때문에 이런 소동을 벌인다는 게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그리고 단순히 돈 되는 일을 받았을 뿐인데 결과가 이렇게 될 줄은 정말 상상도 하지 못했다.그의 질문에 대답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강지혁은 이미 임유진과 함께 차에 올라탔고 벤틀리는 유유히 현장을 벗어났다.차 안에서 임유진이 먼저 입을 열었다.“고마워.”오늘은 강지혁이 아니었으면 분명히 끔찍한 결과를 맞았을 것이다.“그 상황에도 침착하게 나한테 연락을 다 했네. 잘했어.”강지혁은 그녀의 머리카락을 넘겨주며 말을 이었다.“너한테 원한을 품을 만한 사람 누구 생각나는 거 있어?”임유진은 고개를 저었다.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상대방이 원한을 품었을 수는 있을 테지만 이 정도 악랄한 수단을 쓸 사람은 좀처럼 생각나지 않았다.“벌써 두 번째야.”“뭐가?”임유진이 고개를 갸웃거렸다.“저번에 단지 앞에서도 너 해치려는 놈들이 있었잖아.”“같은... 사람의 짓이라는 거야?”“조사해 보면 알겠지.”강지혁은 차갑게 말을 내뱉고는 그녀의 얼굴을 보고 다시 부드러운 얼굴로 돌아왔다.“많이 아파?”“조금. 하지만 참을 만해.”볼이 따끔하게 아파 왔지만 감옥에 있을 때와 비교하면 양호한 편이었다.강지혁은 미간을 찌푸리더니 손으로 그녀의 입가에 묻은 피를 조심스럽게 닦아주었다.“피 나? 티슈로 닦으면
물론 강지혁도 알고 있다. 임유진을 아프게 한 건 이따위 눈에 보이는 상처가 아니라 마음속에 새겨진 상처라는 것을.그리고 그 상처가 다 아물기까지 꽤 시간이 걸릴 것이다....차량은 어느새 병원 앞에 도착하고 강지혁은 임유진을 안고 차에서 내렸다.미리 얘기해 둔 것인지 임유진이 진찰실에 들어선 순간 의사는 기다렸다는 듯이 그들을 마중했다.다행히 가벼운 찰과상뿐이라 큰 문제는 없는듯했다. 얼굴의 부기도 며칠 뒤면 말끔히 돌아온다고 했다.모든 검사가 끝나고 강지혁은 그녀에게 새 옷을 보여주며 말했다.“옷 갈아입어야지.”“응.”임유진의 옷은 어깨 부분부터 찢겨 있어 확실히 옷을 갈아입어야만 했다.옷을 건네받으려고 손을 내밀자 강지혁은 줄 생각이 없는 듯 쇼핑백을 들고 멀뚱히 바라보기만 했다.이에 임유진이 고개를 갸웃했다.“다쳤잖아. 혼자 갈아입기 불편할 거야.”‘그래서? 아...’무슨 뜻인지 파악한 임유진의 얼굴이 단번에 빨갛게 달아올랐다. 그 모습이 이상하게 더 야릇해 보이기도 했다.“간호사한테 대신 입혀달라고 하면 돼...”임유진이 다급하게 얘기했다. 두 사람은 지금 VIP룸에서 간호사가 약을 가져오길 기다리는 중이다.“부끄러워서 그래? 뭐가 부끄럽지? 전에도 몇 번이나 옷을 갈아 입혀준 적 있잖아.”‘그건 그때고 지금은 지금이지.’임유진은 아직 그런 행동을 아무렇지 않게 받기는 힘들었다.강지혁의 입술이 굳게 닫히고 방 안의 공기는 단번에 싸늘해졌다.그가 혹시 화가 난 건 아닌가 싶어 임유진이 힐긋 바라보자 강지혁은 갑자기 몸을 돌리더니 방에서 나가버렸다.그리고 얼마 안 가 간호사 한 명이 방금 그 옷을 가지고 안으로 들어왔다.“강지혁 대표님께서 임유진 씨 옷을 갈아입혀 주라고 해서 왔습니다.”“아, 네, 그럼 부탁할게요.”옷을 다 입고서야 강지혁은 다시 안으로 들어왔다.“약 받아왔어. 이제 데려다줄게.”그는 방금 그 어색한 순간 따위 없었던 것처럼 아무렇지 않게 행동했다.그러고는 당연하게 다시 그녀를 안아 들었
그녀의 빨갛게 부어오른 뺨을 보고 있자니 심장이 무언가에 짓눌린 듯 답답하고 아파 왔다.아까 임유진을 구출할 당시 두 손이 꽉 묶여 볼품없는 모습으로 시트 위에 눕혀져 있는 것 봤을 때는 살인 충동마저 느꼈다.아끼고 또 아끼던 여자를 다른 사람이 상처 내고 아프게 했으니 당연한 반응일지도 모른다.임유진은 입술을 깨물며 결국 한마디 신음도 내지 않았다. 고통을 참는 건 이미 습관이 되었으니까. 그리고 아프다고 외쳐봤자 소용없다는 걸 너무 잘 알고 있으니까...강지혁은 얼굴을 다 닦아주고 약을 발라주었다.임유진은 얼굴뿐만이 아니라 몸에도 얻어맞은 상처가 있었다.“내가 알아서 바를게.”“등 뒤는 손이 안 닿을 거야.”“하지만...”“부끄러워서 그러는 거면 눈을 감고 발라줄게. 아까 보고서를 잠깐 봐서 대충 어느 위치인지 알고 있으니까.”강지혁은 말을 마치고 임유진이 뭐라고 할 틈도 없이 바로 그녀의 등 뒤로 갔다. 그러고는 눈을 감은 채 손을 뻗어 그녀의 옷을 위로 올렸다.“앗!”임유진이 깜짝 놀라 몸을 움찔 떨었다.“움직이지 마. 움직이면 정확한 위치를 알 수가 없어.”강지혁의 손은 그녀의 등에서 천천히 움직였다.그러다 아픈 곳을 정확히 찾아냈을 때 임유진의 몸이 다시 한번 흠칫 떨렸다. 그리고 이내 시원한 약이 펴 발라지고 등 뒤에서 알싸한 느낌이 들었다.하지만 분명히 시원해야 할 등이 지금은 점점 더 뜨거워지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정확히는 강지혁의 손이 스치는 곳마다 혈액이 다 몰린 것처럼 뜨거웠다.약을 다 바른 뒤 임유진의 등 뒤는 블러셔를 바른 것처럼 핑크색이 되었다.그녀는 서둘러 옷을 내렸다.“됐... 됐어.”강지혁은 그제야 굳게 닫힌 눈을 천천히 떴다. 기다란 속눈썹이 위로 올라가는 순간 매혹적인 눈동자가 드러났다.“며칠 정도는 일 나가지 마. 집에서 쉬어.”강지혁은 옆 탁자에 약을 올려놓으며 말했다.“안 돼. 걷지 못하는 것도 아니고. 그리고 요즘 일 많아서 쉬는 건 힘들어.”게다가 아직 변호사 비서이고
집에서 쉬게 하려고 로펌 전체를 쉬게 만든 것은 아닐까?고작 한 사람을 쉬게 만들겠다고?하지만 그게 아니라면 로펌이 아무 이유도 없이 3일이나 쉴 리가 없다.임유진은 씻고 침대 위에 누웠다. 상처 부분에 약을 다 발랐던 터라 이제는 아프지 않았다. 다만 눈을 감으면 오늘 있었던 일들이 파노라마처럼 스쳐 지나간다.아까 강지혁이 눈앞에 나타났을 때 임유진은 이래도 되나 싶을 정도로 안심했다. 그리고 그녀는 이 세상에 한지영을 빼고 이토록 자신을 아껴줄 수 있는 사람이 또 있구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하지만 그 사람은 이토록 그녀를 아껴주면서도 사랑은 싫다고 한다.연인 놀이는 강지혁이 헤어짐을 얘기하는 순간 끝이 났다. 그러면 누나 동생 놀이는 또 언제 끝이 날까?마음속으로 아무리 되뇌어 봐도 그녀에게 답을 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강지혁은 지금 큰 방 한가운데서 싸늘한 눈으로 고개를 푹 숙이고 땀만 삐질삐질 흘리고 있는 경호원 두 명을 보고 있다. 그리고 그 옆에는 체념한 표정의 고이준도 있었다.“경호를 이딴 식으로 해?”차가운 목소리에 고이준의 몸이 움찔 떨렸다.강지혁은 지금 화가 난 상태다. 그것도 아주 단단히.경호원들의 얼굴은 이미 사색이 되었다.그때 고이준이 용기를 내어 먼저 입을 열었다.“대표님, 얘네들도 임유진 씨가 납치된 후 그들이 아지트에 다다랐을 때 구출하려고 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납치범들이...”고이준은 강지혁의 시선이 자기한테 떨어지자 등 뒤에 식은땀이 흘렀다.만약 임유진이 오늘 더 다치기라도 했다가는 고이준 역시 무사하지 못했을 것이다. 두 명의 경호원은 그가 직접 골라 붙여준 사람이니까.“납치범들이 차 안에서 손을 댈 줄은 몰랐다? 만약 저것들이 구할 때까지 기다렸다면 상황이 어떻게 됐을 것 같아?”강지혁은 자리에서 일어서 두 명의 경호원 앞으로 다가가더니 바로 발로 복부를 차버렸다.“고이준, 이딴 것들을 유진이 옆에 둘 생각을 했어?”강지혁이 싸늘한 얼굴로 비웃었다.고이준과 두 명의 경
“네.”한지영은 고개를 끄덕이며 연우진을 보냈다.가만히 서서 기다리고 있자니 갑자기 속이 울렁거려 그녀는 근처 쓰레기통 앞으로 가 음식물을 게워냈다.그렇게 한참을 토하던 그녀는 오늘 먹었던 것을 다 비우고서야 주섬주섬 가방을 더듬으며 티슈를 찾았다.하지만 아무리 찾아도 티슈가 손에 잡히지 않았다.그때 웬 손수건 하나가 그녀의 눈앞에 나타났다.“고마워요.”한지영은 눈을 게슴츠레 뜬 채 그것이 손수건인지 티슈인지 확인도 하지 않고 입가를 쓱 닦았다.야무지게 다 닦고서야 그녀는 손에 든 것이 티슈가 아닌 손수건이었다는 것을 알아챘다.“어... 이거는 내가 내일 세탁해서 다시 줄게요.”한지영은 말을 하면서 서서히 고개를 들었다.당연히 연우진이 건넨 손수건이라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눈앞에 있는 사람은 너무나도 익숙한, 5년간 틈틈이 그녀의 꿈에 나타나던 남자의 얼굴이었다.슈트 차림의 남자는 머리를 완전히 빗어 올린 채 훤한 이마를 드러내고 있었다. 환한 달빛 때문인지 원래부터 예뻤던 얼굴이 오늘따라 더더욱 예뻐 보였다.세월의 흔적 같은 게 존재하지 않는 남자의 얼굴을 한지영은 말없이 가만히 바라보았다.“끅...”술 냄새를 가득 담은 딸꾹질과 함께 조용했던 침묵이 깨졌다.“오랜... 만이에요.”한지영의 입에서 먼저 말이 흘러나왔다. 술을 마셨던 터라 말이 느려지고 또 버벅거렸다.“너 취했어.”백연신이 눈을 가늘게 뜨며 말했다.“술을 좀 마셨어요.”한지영은 눈앞의 남자를 두 눈에 똑바로 담으려는 듯 눈을 크게 뜨기 위해 노력했다.“아까 그 남자는... 남자친구야?”백연신이 물었다.“남자친구?”한지영은 눈을 깜빡이다 갑자기 피식 웃었다. 술에 취해있어 그런지 그 웃음이 어쩐지 바보 같아 보였다.“아... 우진 씨는 오늘 소개팅한 남자예요. 괜찮은 사람이었어요. 첫 만남인데도 대화도 잘 통하고...”한지영은 말을 하며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술기운 때문인지 두 눈이 심하게 요동치고 있었다.그간 백연신을 향한 마음을 접으려고
“그건 아니고 이제껏 설렌다는 느낌이 들었던 여성분이 없었어요.”설레는 느낌이라는 걸 누군가는 부질없는 감정이라고 할지 몰라도 적어도 한지영은 그 말을 쉽게 지나칠 수 없었다.이제껏 많은 아이돌과 배우들을 좋아해 왔지만 진정으로 마음이 설레었던 사람은 백연신 한 사람뿐이었으니까.아무리 소개팅을 해봐도 같이 있으면 가슴이 뛴다고 느껴지는 남자는 없었다.“설렌다는 느낌... 중요하죠. 쉽게 느끼기 어려운 감정이잖아요. 그리고 그런 느낌이 들었던 상대를 놓치고 다시 찾으려고 하면 더 힘들고요.”한지영의 말에 연우진이 조금 흠칫했다.“지영 씨는 그런 사람을 만난 적이 있나 봐요?”“네, 딱 한 번 있었어요.”한지영은 솔직하게 대답했다.연우진은 분명히 소개팅 상대였지만 그녀는 얘기를 나누면서 그가 남자로 보이는 것이 아닌 묘하게 친구 같이 느껴졌다.“어떤 사람이었어요?”연우진이 호기심 어린 눈으로 물었다.“그 사람은 일단 너무 예쁜 사람이었어요. 그리고 내 말이라면 뭐든 다 들어주는 그런 착한 사람이었죠.”백연신 얘기에 한지영의 입꼬리가 저도 모르게 위로 말려 올라갔다.이미 헤어졌음에도 백연신과 함께 했던 나날은 여전히 그녀의 마음속에 제일 소중했던 기억으로 자리 잡고 있었다.연우진이 생각보다 편한 말 상대였기 때문인지 아니면 오늘 우연히 백연신의 소식을 들어서인지 한지영은 평소보다 훨씬 더 감정적이고 말이 많았다.그녀는 술을 연거푸 마시며 얘기를 이어갔고 연우진은 그런 그녀의 얘기를 그저 가만히 들어주고만 있었다.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한지영이 앉아있는데도 휘청거리자 연우진은 그제야 술잔을 들어 올리려는 그녀의 손을 제지했다.“이제 그만 마셔요. 이러다 취하겠어요.”“취하는 게 뭐가 나빠요?”한지영이 웅얼거렸다.“지영 씨랑 나 오늘 첫 만남 아닌가요? 내가 어떤 사람인지 제대로 알지 못하면서 이렇게 무방비한 모습을 막 보여줘도 돼요? 내가 나쁜 마음이라도 먹으면 어쩌려고?”연우진의 말에 한지영이 피식 웃었다.“정말 그럴 생각
한지영은 손가락을 억지로 움직이며 소개팅 상대에게 메시지를 보냈다.그녀가 지금 신경 써야 할 사람은 백연신이 아니라 소개팅 상대였다. 어쩌면 이번에야말로 진정으로 그녀를 좋아하고 그녀도 좋아하는 남자가 나올지도 모른다.저녁.한지영은 약속 시간에 맞춰 번화가의 한 카페로 들어섰다.창가 쪽으로 향하니 소개팅 상대가 앉아있는 것이 보였다. 남자의 이름은 연우진이었고 현재 대기업에서 팀장직을 맡고 있는 유능한 사람이었다.한지영은 남자의 겉모습을 확인하고는 저도 모르게 속으로 감탄했다. 스펙이 좋은 사람이라는 건 프로필을 통해 충분히 알고 있었지만 외모까지 훌륭할 줄은 몰랐다.연우진은 깔끔한 정장 차림에 안경을 쓰고 있었다. 지적인 분위기에 앉아있는 자세까지 바른 것이 상당히 인기가 많을 것 같았다. 게다가 35살이라고 들었는데 막상 보니 이제 막 30대가 된 듯한 얼굴이었다.“안녕하세요. 한지영 씨 맞으시죠? 만나서 반가워요.”한지영이 자리에 앉기도 전에 남자가 먼저 인사를 건네왔다.“네, 안녕하세요.”한지영은 서둘러 미소를 지으며 자리에 앉았다.두 사람은 첫 만남에 할법한 얘기를 서로 두어 마디 주고받은 후 곧바로 근처 레스토랑으로 향했다.사실 한지영은 그저 아무런 고깃집이나 들어가 대충 식사를 하고 만남을 끝내려고 했는데 연우진은 원래 성격이 그런 건지 아니면 소개팅하는 여자들과는 항상 레스토랑을 가는 건지 아주 자연스럽게 그녀를 데리고 비싼 레스토랑으로 왔다.메뉴판을 들어 가격을 보니 헙 하는 소리가 절로 나왔다.“드시고 싶은 거 마음껏 주문하세요.”연우진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한지영은 잠깐 고민하더니 결국에는 상대적으로 저렴한 음식들을 주문했다.이에 연우진은 그녀를 잠시 바라보더니 별다른 말 없이 다른 음식도 주문한 다음 웨이터에게 메뉴판을 건넸다.“실례가 안 된다면 지영 씨가 소개팅에 나온 이유를 물어도 될까요? 혹시 나이 압박 때문에 결혼을 서두르고 싶은 건가요?”음식을 먹던 중에 연우진이 먼저 질문을 건네왔다.“그렇지
설마 재벌과 사귀었던 신데렐라가 주변에 있을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으니까.한지영은 천천히 정신을 차리고 조나연을 바라보았다. 조나연이 무슨 의도로 이런 말을 하는지 생각해볼 필요도 없었다. 이 번기 회에 자신을 깎아내리며 조롱하려는 게 분명했으니까.조나연은 예전에도 이런 식으로 묘하게 그녀를 깎아내렸다. 게다가 한지영이 없을 때면 다른 동료에게 두 사람은 얼마 안 가 반드시 헤어지게 될 거라며 저주 아닌 저주를 퍼붓기도 했다.그러다 정말 헤어졌을 때는 한껏 기분 좋은 얼굴로 한지영에게 이런 말을 건넸다.“나는 두 사람 오래 못 갈 줄 알았어요. 솔직히 백연신 씨가 아무것도 없는 지영 씨와 진심으로 사귈 리가 없잖아요. 요즘은 남자들도 여자 배경을 본다고요.”진심이 아니었다고? 그럴 리는 없다.한지영과 사귀었을 당시 백연신은 늘 그녀에게 진심을 다해 행동했고 자신의 사랑을 가감 없이 보여주었다. 그러니 진심이 아니었다는 말은 틀렸다.하지만 조나연의 말에 맞는 말도 있었다. 결과적으로 한지영은 백연신이 원하는 것을 주지 못했으니까.“지금 돌이켜봐도 참 안타까워요. 만약 헤어지지 않았으면 지금쯤 사모님 소리 들으며 편히 살고 있을 텐데.”조나연이 안타까운 척 그녀를 비꼬았다.한지영은 그런 그녀를 차가운 눈길로 빤히 바라보더니 갑자기 피식 웃었다.“그렇게 안타까우면 백연신 씨와 나 사이에 다리 좀 놔주지 그래요? 말로만 계속 안타깝다고 하니까 괜히 놀림 받는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요. 물론 제 착각이겠죠, 안 그래요?”한지영의 뼈 있는 말에 조나연의 얼굴이 한순간에 일그러졌다.그리고 가만히 구경하던 동료들 역시 그제야 분위기를 파악한 듯 이상한 눈길로 조나연을 바라보았다.조나연은 조금 머쓱한 얼굴로 웃더니 별다른 대답 없이 자리를 벗어났다.한지영은 자리로 돌아간 후 소개팅 상대와 약속 시간을 잡으려고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가 잠깐 멈칫하더니 저도 모르게 백연신의 기사를 검색했다.지난 5년간 그녀는 백연신을 완전히 내려놓을 작정으로 그와 관련
한지영은 한숨을 한번 내뱉더니 이내 사무실 밖으로 나갔다.“엄마, 소개팅 같은 거 하기 싫다고 내가 분명히 말했잖아요. 남자는 내가 알아서 찾을 테니까 나 좀 가만히 내버려 둬요. 이게 대체 몇 번째야.”“네가 어련히 알아서 잘하면 내가 이러지 않겠지. 너 이제 20대 아니고 30대야. 34살이나 돼서 남자친구 한 명 없다는 게 말이 돼? 내일모레면 당장 노산에 진입하는데 그때 되면 점점 더 좋은 남자 찾는 게 어려워져!”이해영이 속사포로 말을 뱉어냈다.한지영도 그녀가 왜 이렇게까지 소개팅을 주선하는지 잘 알고 있다. 34살이나 된 딸이 이대로 계속 남자와의 교제를 피하다 결국에는 남자도 자식도 없이 홀로 인생을 마감할까 봐 걱정되고 또 불안한 거겠지.사실 한지영은 혼자서도 얼마든지 잘 살 수 있다고 생각하는 주의였다. 게다가 요즘은 실버타운도 잘 되어있어 정말 혼자가 된다고 해도 크게 문제 될 건 없었다.하지만 부모님들은 그런 걸 바라지도 않거나와 그래도 결혼은 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는 분들이었다.그래서 한지영은 결국 오늘도 소개팅을 수락하고 말았다.더 이상 부모님께 걱정을 끼쳐드리고 싶지 않았기도 했고 말이다.“아, 알겠어요. 만나면 되잖아요. 톡으로 연락처 보내세요. 이따 연락할게요.”이해영은 딸의 말에 그제야 만족하며 전화를 끊었다.몇 초 후 한지영의 휴대폰에 메시지 하나가 도착했다. 보낸 사람은 이해영이었고 내용은 소개팅할 남자의 프로필과 연락처였다.한지영은 메시지를 보고는 다시 한번 한숨을 내뱉었다. 이해영의 말대로 그녀도 이제는 34살로 절대 마냥 어리기만 한 나이는 아니었다.지난 5년이라는 시간 동안 그녀는 백연신을 천천히 마음속에서 내려놓았다....정말?문득 마음속 깊은 속에서 이러한 의문이 떠올랐다.정말 백연신을 향한 마음을 완전히 접어버린 게 맞나?한지영은 입술을 살짝 깨물더니 이내 잡생각을 털어버리듯 머리를 흔들며 다시 사무실 안으로 들어갔다.자리로 돌아가려는데 웬 동료 한 명이 그녀를 불렀다.“지영 씨,
얘기가 일단락되자 강지혁은 아들의 손을 잡고, 임유진은 딸의 손을 잡고, 그리고 두 아이는 서로의 손을 꼭 잡은 채 유치원 안으로 들어갔다.소민아는 그런 네 사람의 뒤를 따라 딸과 함께 조용히 앞으로 걸어갔다.만약 전이였다면 어떻게 해서든지 강지혁의 옆에 서며 사람들의 뇌리에 그 모습을 각인하려고 했을 텐데 지금은 그럴 수가 없어 그저 고개를 푹 숙인 채 얼굴을 가릴 수밖에 없었다.소민아의 손을 잡고 안으로 들어가던 소안나는 강선현과 강선율이 맞잡고 있는 손을 빤히 바라보며 미간을 찡그렸다.강선율이 그녀의 손을 잡아준 건 첫 만남뿐으로 그 뒤로는 한번도 손을 잡아주려고 하지 않았다. 분명히 전보다 훨씬 예뻐지고 공주 옷도 입고 머리도 예쁘게 했는데 강선율은 다른 이들처럼 그녀에게 예쁘다고 칭찬해주기는커녕 점점 더 거리를 두며 이제는 말도 잘 섞으려고 하지 않았다.소안나는 그런 강선율의 행동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왜 자신의 손은 잡아주려 하지 않는 거지?결국에는 양녀라 정을 주지 않는 건가?경찰서 앞에서의 일이 있고 난 뒤 소민아는 강지혁의 사진을 들고 있던 여자아이가 바로 강씨 가문의 진정한 딸이고 강선율의 친여동생이라는 것을 소안나에게 얘기해주었다.소안나는 그 말을 듣고는 더욱더 기분이 나빠졌다. 갑자기 나타난 강선현에게 아빠와 오빠를 빼앗기는 것 같았으니까.유치원 입구에 다다른 임유진은 먼저 아이들을 안으로 들여보내고 선생님들과 얘기를 나눴다. 그리고 강지혁은 그런 그녀의 옆에 선 채 가만히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강선율은 안으로 들어간 후에도 강선현의 손을 꼭 잡은 채 자리까지 이동했다. 그러고는 듬직한 오빠의 얼굴로 동생의 가방을 직접 옆에 내려놓아 주기도 했다.그 장면을 바라보던 소안나는 질투심에 씩씩거렸다.‘나한테는 한번도 그렇게 해주지 않았으면서! 오빠랑 먼저 알게 된 건 쟤가 아니라 안나잖아!’“엄마, 나도 율이 오빠 친동생 하면 안 돼요?”소안나가 고개를 홱 들며 소민아에게 물었다.소민아는 딸의 말에 서둘러 주위
소씨 모녀의 등장에 사람들의 두 눈은 금세 흥미로움으로 가득 찼다. 그도 그럴 것이 강지혁이 또다시 결혼하게 된다면 그 상대는 분명히 양녀의 어머니인 소민아라고 생각했으니까.임유진은 포르쉐에서 내린 소민아를 발견하고는 저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렸다. 그간 집사와 고이준으로부터 전해 들은 말에 의하면 소민아는 소소하게 인기를 얻고 있던 인플루언서였다가 재벌 2세의 아이를 배고 그 집의 며느리로 들어가려다가 철저하게 버림을 받고 홀로 아이를 키우며 그간 힘든 나날을 보냈다고 한다.소안나가 강씨 가문에 입양된 건 2년 전의 일로 강지혁은 소안나와 소민아를 위해 집도 주고 생활비도 다달이 보내주며 그 외의 큰 지출도 부담해주었다고 한다. 즉 소씨 모녀는 하루아침에 강지혁이라는 든든한 백을 둔 신데렐라 모녀가 됐다는 뜻이었다.지금 소민아가 입고 있는 옷이나 타고 있는 차량만 봐도 그간 얼마나 호의호식하며 지냈는지 충분히 알 수 있었다.임유진이 소민아를 훑어보고 있을 때 소민아도 마찬가지로 임유진을 훑어보고 있었다. 설마 레스토랑에서 언쟁을 벌였던 별 볼 일 없는 여자가 강지혁의 사망한 아내라고 그 누가 상상이나 할 수 있었겠는가.소민아는 강지혁과 함께 나란히 서 있는 임유진을 바라보며 입술을 깨물었다. 질투의 감정이 몸 곳곳에 퍼지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하지만 그 감정을 겉으로 내비칠 수는 없었기에 소민아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임유진 씨 맞으시죠? 그날은 죄송했어요. 딸 일이라 괜히 흥분해서 언성을 좀 높였어요. 용서해주세요...”그 말에 임유진이 뭐라 대꾸하려는데 강지혁이 먼저 입을 열었다.“호칭 똑바로 해. 임유진 씨가 아니라 사모님.”차가운 그의 말에 주변 공기가 한순간에 얼어붙었다. 임유진이 강지혁의 아내였다는 것을 알고 있던 사람들은 임유진의 위치를 똑똑히 전하고자 하는 강지혁의 의도를 바로 알아챘다.5년 만에 돌아왔어도 임유진은 여전히 강지혁의 아내였고 강씨 가문의 안주인이었다.하지만 임유진이 누군지 모르고 있는 사람들은 강지혁의 말에
게다가 5년 만에 돌아온 거라 그간 많이 변한 저택의 상황도 알아야 했고 새로운 사람들과도 익숙해져야만 했다.그래서 아이들 일에는 조금 소홀해졌다. 딸이 아버지를 원했던 만큼 아들도 마찬가지로 엄마를 원했을 텐데 말이다.저택 고용인들에게 듣기로 강지혁은 매일 아침 율이와 함께 저택을 나서기는 하지만 나가서는 서로 다른 차를 타고 각자의 목적지로 향한다고 한다.즉, 강선율은 그간 아버지가 아닌 도우미나 기사의 보호 아래 유치원에 갔다는 소리였다.임유진은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자 또다시 죄책감이 피어올랐다. 또한 바쁘다는 이유로 율이에게 소홀했던 자신에게 화가 나기도 했다.강선율은 임유진의 팔이 더 세게 자신을 끌어안자 조금 움찔했다. 여전히 누군가에게 안기는 일은 익숙지 않았지만 상대가 엄마라서 그런지 이런 식의 포옹도 이제는 받아들일 수 있을 것 같았다. 아니, 솔직히 말하면 기분이 좋았다.게다가 앞으로는 하루도 빠짐없이 함께 유치원으로 가주겠다는 말 또한 기분 좋게 귓가에서 맴돌았다....다음날.강선현이 유치원으로 가는 날, 임유진은 율이와 현이에게 똑같은 옷을 입혔다. 다른 점이 있다면 강선율은 바지고 강선현은 치마라는 것이다. 엇비슷한 키의 두 아이가 똑같은 옷에 똑같은 신발을 신은 채 가방을 메고 있는 모습을 보니 절로 마음이 녹는 기분이었다.임유진은 결국 참지 못하고 두 아이를 품에 끌어안고 뽀뽀 세례를 퍼부었다.강선현은 그녀의 이런 행동에 이미 습관이 되었던 터라 꺄르르 웃으며 뽀뽀로 회답했지만 강선율은 별다른 반응 없이 그저 그녀의 행동을 받고만 있었다. 분명히 무표정한 얼굴이었지만 귀가 살짝 빨개진 것을 보니 기분이 나쁜 건 아닌 듯했다.강지혁은 세 사람이 다정하게 스킨십하는 걸 보면서 저도 모르게 슬쩍 입꼬리를 위로 올렸다.유치원에 도착한 후, 강지혁과 임유진은 각자 아이의 손을 잡고 차에서 내렸다. 아이를 등원시키러 온 학부모들은 네 사람의 등장에 입을 떡 벌리며 그대로 굳어버렸다.강지혁은 좀처럼 유치원에 얼굴을 내비치
하지만 남매 사이가 하루가 다르게 좋은 것 같아 보이니 임유진은 괜히 뿌듯해 나며 기분이 좋았다.“내일 유치원 갈 때 아빠도 엄마랑 함께 현이 데려다주면 안 돼?”현이가 눈을 반짝이며 강지혁을 바라보았다. 어지간히도 같이 가고 싶은 듯했다.강지혁은 아이가 이런 요구를 해올 줄은 몰랐는지 미간을 살짝 꿈틀거렸다.“유치원에 같이 가달라고?”“응! 원래 유치원 가는 첫날은 엄마랑 아빠가 함께 가줘야 하는 거야!”현이는 이번이 첫 유치원은 아니었지만 이제는 아빠도 찾았으니 강지혁과 함께 등원하고 싶었다. 아빠가 있다는 기분을 마음껏 누리고 싶었다.사실 지금껏 아빠의 부재에도 잘 자라왔던 아이였지만 아무래도 아빠의 빈자리가 꽤 컸던 모양이다.“그래, 그럼 내일 유치원에 같이 가줄게.”강지혁의 말에 현이는 활짝 웃더니 곧바로 팔을 쭉 내밀었다. 품에 안기고 싶다는 뜻이었다.강지혁은 스킨십 많은 딸이 아직도 잘 적응이 되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아들인 율이는 이제껏 이런 식의 요구를 해오지 않았으니까.하지만 임유진과 쏙 빼닮은 두 눈을 보고 있자니 저도 모르게 아이에게로 팔이 뻗어졌다.현이는 강지혁에게 안긴 후 그의 목을 꼭 끌어안으며 지난번 서재에서처럼 볼에 쪽 하고 뽀뽀를 했다.“아빠가 최고야!”진심으로 기뻐 보이는 딸의 모습에 임유진은 괜스레 코끝이 찡해 났다.딸이 아빠의 존재를 그리워한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새삼 이렇게 좋아하는 걸 보니 조금 더 빨리 기억을 회복하지 못했던 것에 죄책감이 일었다.임유진은 눈물을 감추기 위해 서둘러 시선을 돌렸다. 그러다 바로 옆에 서 있는 아들을 발견했다.혹시 율이도 엄마를 그리워하고 있지는 않았을까? 엄마가 있어야 하는 상황에 항상 없었던 것에 쓸쓸해 하지는 않았을까?“율아.”임유진은 그 생각에 강선율을 향해 팔을 활짝 열었다.“엄마가 안아줄까?”아이는 그 말에 어색해하며 답했다.“전 어린애가 아니에요. 동생이나 안아주세요.”말은 이렇게 하지만 은근히 원하고 있다는 눈빛을 보냈다.임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