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유진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를 바라보았다.“짐을 왜 옮겨? 설마 너 여기서 살려고?”“응. 그때도 같이 살았잖아.”강지혁이 뭐가 문제냐며 피식 웃었다.그때와 지금이 같을 리가 없지 않은가.임유진은 입술을 깨물며 어떻게 답을 해야 할지 몰랐다.“왜? 누나는 나랑 같이 사는 게 싫어?”강지혁은 허리를 숙여 임유진의 얼굴 가까이에 다가가 물었다. 근거리에서 보는 그의 얼굴은 마치 신이 빚은 걸작이 따로 없었다. 게다가 어찌나 가까웠는지 속눈썹 개수까지 셀 수 있을 정도였다.임유진은 얼굴을 반대쪽으로 돌리며 그에게서 시선을 돌렸다. 하지만 강지혁은 그걸 용납하지 않겠다는 듯 그녀의 턱을 잡고 자신과 눈을 마주치도록 돌려버렸다.“이게 대답하기 곤란한 질문이야?”그의 목소리는 어느새 차갑게 가라앉았다. 그리고 마치 그녀의 마음을 꿰뚫어 보려는 듯 지독하게 눈을 맞춰왔다.“아니면 후회해? 탁유미 그 여자를 구하고 내 제안에 동의한 거 후회해?”“후회... 안 해.”임유진은 속으로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너처럼 하루아침에 우리 관계를 바꾸는 게 쉽지 않아서 그래. 강지혁, 나한테 적응할 시간을 좀 줘.”그녀의 목소리는 거의 애원에 가까웠다.“알았어. 누나 부탁인데 들어줘야지. 잠깐은 이대로 따로 살아. 적응할 시간을 줄게. 하지만 나는 오래 기다리는 거 못 해.”임유진은 그제야 안도했다.“그리고 혁이라고 불러.”강지혁의 손가락이 천천히 그녀의 입술을 매만졌다. 입술 온도가 조금은 뜨거웠다.“응, 혁아...”원하는 대로 혁이라는 호칭을 듣자 그는 활짝 웃더니 그녀를 자기 품 안에 꽉 끌어안았다. 그러고는 얼굴을 그녀의 목에 묻으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얘기했다.“드디어 내 누나가 됐네? 앞으로 내 옆에만 있어. 어디 떠날 생각하지 말고. 알았지?”임유진의 몸이 뻣뻣하게 굳었다. 지금은 마치 눈에 보이지 않는 한기가 몸을 덮고 있는 듯한 그런 느낌이었다.강지혁의 품은 분명히 이토록 따뜻한데 왜 이리도 추울까......임유진은 다음날
임유진과 강지혁의 첫 만남이 어땠는지 탁유미는 일전 임유진에게 들은 적이 있다. 그때만 해도 두 사람이 그렇게 만난 된 건 정말 대단한 인연이라며 감탄했었다.하지만 지금은 그게 인연이 아니라 점점 더 악연처럼 보였다.“나 때문에 무리 안 해도 돼요!”탁유미가 부채감 가득한 얼굴로 말했다.“사실 언젠가는 이렇게 될 거였어요. 언니가 그런 표정을 짓지 않아도 돼요. 강지혁은 얼마 전부터 계속 자기 누나가 되어 달라고 했었거든요. 그냥 언니 일 때문에 그 시기가 조금 앞당겨졌을 뿐이에요.”강지혁은 자신이 원하는 거라면 그게 무엇이든 반드시 손에 넣는다.지금까지는 여차여차 거절을 해왔지만 그 거절이 언제고 먹힐 거라는 보장은 그 어디에도 없다. 그녀의 거절은 비유하자면 그가 게임을 클리어하는 데 난이도를 조금 높여줄 장애물 정도일 것이다.“하지만...!”“대신 언니랑 윤이는 이제 이곳에서 마음 졸이지 않아도 되잖아요. 그리고 나도 강지혁이라는 든든한 뒷배가 생긴 거고요. 이렇게 생각하면 꽤 나쁠 것 없는 거래 아니에요?”말은 그렇게 했지만 탁유미는 그녀가 자신의 죄책감을 덜어주려고 이런다는 걸 너무 잘 알고 있다.겉으로 보기에는 그럴싸한 거래지만 임유진에게는 아니다. 잊고 싶은 옛 연인과 누나 동생이라는 이상한 관계에 발이 묶이는 게 정상일 리가 없다.“이제 내 얘기는 여기서 그만. 그보다 어제 이경빈이 뭐래요?”탁유미가 쓰게 웃었다.“윤이를 이씨 집안으로 데려가겠대요. 물론 거절했어요.”“그럼 윤이는 이경빈이 아버지라는 걸 알게 된 거예요?”“아니요. 윤이는 호텔 방에 도착하자마자 잠이 들어버려서 아무것도 몰라요. 그리고 이경빈이 윤이에게 말을 걸 틈도 없이 강지혁 씨 비서라는 분이 찾아왔거든요.”어제는 만약 강지혁이 아니었다면 이경빈은 절대 두 사람을 풀어주지 않았을 것이다.자는 윤이를 데리고 방에서 빠져나올 때 이경빈의 얼굴은 무섭게 일그러져있었다.임유진은 잠시 생각하더니 입을 열었다.“그런 소리까지 한 걸 보면 조만간 윤이의
“만약 이경빈이 정말 양육권을 걸고넘어진다면 그때는 내가 도와줄게요. 그러니까 지금은 너무 비관적으로 생각하지 말아요.”임유진은 그녀의 어깨를 토닥였다.“고마워요, 유진 씨.”만약 임유진이 아니었다면 지금쯤 패닉에 빠졌을 것이다. 게다가 여태껏 이경빈의 손에서 벗어나지 못했을 테고.임유진은 탁유미의 거처에서 나왔다.사실 아까 그녀 앞에서는 차마 얘기를 할 수 없었지만, 만약 이경빈이 양육권을 찾겠다고 나오면 탁유미는 높은 확률로 지게 된다.탁유미는 경제적으로 안정적이지 못하고 게다가 옥살이했던 경력까지 있었으니까. 그에 반해 이경빈은 해성시의 유명한 사업가이기에 아이에게 풍족한 생활을 줄 수 있다.게다가 이경빈은 머지않아 공수진과 결혼하게 되고 그렇게 되면 아무래도 한 부모 가정보다 정상적인 가족 환경이 더 좋을 것이라고 판단할 수 있기 때문이다.모든 면에서 탁유미는 불리할 수밖에 없다.대체 어떻게 해야 탁유미가 양육권을 빼앗기지 않게 할 수 있을까?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다 보니 어느새 월세방 앞에까지 다다랐다.현관문을 열고 들어가니 거실 한가운데 강지혁이 있었다.“왜 또 왔어?”강지혁은 소파에 앉아 얼마 전 임유진이 구매한 법률 서적을 들고 현관문 쪽을 바라보았다.“내가 오는 게 싫어?”“그게 아니라, 당분간 나 적응할 시간을 준다며?”임유진은 입술을 깨물며 말했다.“맞아. 오늘은 그냥 누나 얼굴 보러 온 거야.”그는 손에 든 서적을 내려놓더니 그녀 앞으로 다가갔다.“탁유미 씨 만나고 왔어?”“응.”이제는 그걸 어떻게 알았는지 되묻는 걸 그만뒀다. 강지혁이라면 그녀의 일거수일투족을 다 알고 있을 테니까.“그렇게 걱정돼?”강지혁은 조금 언짢은 얼굴로 말했다.“언니한테는 신세를 많이 졌으니까.”옥살이하고 나와 그런지 좋은 사람들의 호의는 더 소중히 여기게 된다.“나도 좀 걱정해주지?”강지혁은 그녀의 머리카락을 가볍게 건드리며 말했다.“너 걱정해주는 사람 많잖아.”“그런 사람 몇천 명이 와도 나는 네가 걱정해주는
강지혁의 얼굴이 순식간에 어두워졌다.그녀 말대로 이건 모순이 맞다.임유진을 너무 깊게 사랑할까 봐 두려웠다. 아버지의 전철을 밟게 될까 봐, 사랑 때문에 자존심이고 목숨이고 다 버릴 정도로 그녀를 사랑하게 될까 봐 두려웠다.하지만 헤어지고 나서는 미쳐버릴 정도로 그녀가 보고 싶고 강제로라도 옆에 두고 싶었다.“날 이렇게 모순덩어리로 만드는 사람은 이 세상에서 너밖에 없어.”그의 이글거리는 눈동자가 그녀에게로 향했다.임유진은 더욱더 이해가 안 된다는 얼굴로 역시 그를 빤히 바라보았다.그녀를 바라보는 강지혁의 눈에는 갈망과 억제가 같이 섞여 있었다....다음날, 임유진이 퇴근하려고 빌딩에서 나와보니 강씨 저택 기사가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대표님께서 임유진 씨를 보고 싶으시답니다.”임유진은 잠깐 망설이더니 별말 없이 차에 올라탔다.그리고 그 장면을 정한나가 또 한 번 목격해버리고 말았다.정한나는 그녀가 전과 같은 차량에 오르는 것을 보고 역시 유승호와 뭔가 있는 게 맞다고 확신했다.전에 친구에게서 유승호의 현 여자친구는 연예인이라고 들은 적이 있다. 그러니 만약 이 사실을 그 여자친구가 알게 된다면...정한나는 사악한 미소를 짓더니 휴대폰을 꺼내 들어 임유진이 차에 오르는 장면과 차가 떠나는 모습까지 전부 사진에 담았다.이러한 증거를 조금 더 모은 후 인터넷에 뿌리게 되면 유승호의 애인이 알아서 임유진을 처리해줄 것이다.유승호의 애인은 성격이 괴팍하기로 소문났다고 알려져 있다. 그러니 임유진은 단단히 잘못 걸린 것이다.정한나는 구석진 곳에서 혼자 사진을 보며 씩 웃었다.임유진을 태운 차량은 강씨 저택 앞에 멈춰 섰다.“대표님은 안에 계십니다. 유진 씨가 오게 되면 바로 침실로 올라오라고 하셨어요.”침실이라는 말에 임유진은 조금 어색하게 웃었다. 강씨 저택 사람들 모두 두 사람 사이를 알고 있다 해도 민망한 건 어쩔 수 없었다.지금은 마치 연극 무대에 선 배우가 된 기분이었다. 강지혁이 쓴 대본대로 진행할 수밖에 없는 배우
강지혁은 허리에 타올 하나만 두른 채 촉촉이 젖은 머리를 하고 나왔다. 그러고는 임유진을 보더니 싱긋 웃었다.“왔어?”“응.”임유진은 시선을 어디에 둬야 할지 몰라 애먼 벽만 바라보았다.“왜? 민망해?”강지혁은 그런 그녀 앞으로 다가와 말했다.“나 머리 안 말려 줄 거야? 그때 월세방에 처음 들어갔을 때도 샤워하고 나온 내 머리를 누나가 말려줬었잖아.”“너는 키가 너무 커. 그러니까 알아서...”그녀의 말이 다 끝나기도 전에 강지혁이 허리를 숙였다.“이제 됐지?”얼굴 바로 옆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그녀가 깜짝 놀라 고개를 돌리자 마침 강지혁의 두 눈과 마주쳐 버리고 말았다.그의 두 눈은 마력이라도 있는 건지 한번 보면 눈을 뗄 수가 없다.강지혁은 타올 하나를 그녀의 손에 쥐여주었다.“난 누나가 내 머리 말려주는 거 좋아.”임유진은 뻣뻣한 손으로 타올을 건네받더니 천천히 그의 머리에 묻은 물기를 닦아주었다.타올 덕에 그와의 눈 맞춤을 피할 수 있어서 어찌 보면 참 다행이었다.사실 처음 만났을 때뿐만 아니라 강씨 저택에 들어와 살면서도 몇 번이나 그의 머리를 말려주었다.다만 그때와 똑같은 행동이지만 지금은 전혀 다른 마음이라는 것이다.물기를 어느 정도 닦아내자 강지혁은 손가락으로 앞머리를 매만졌다.“머리가 좀 길었네. 하는 김에 나 머리도 잘라줘.”“미용실 가서 자르는 게 좋지 않을까? 난 할 줄 몰라.”임유진은 반사적으로 거절했다.“거짓말을 제일 싫어한다는 사람이 거짓말하면 어떡해.”강지혁은 입꼬리를 씩 올렸다.“그때도 나 머리 잘라준 적 있잖아.”임유진은 입술을 깨물었다.강지혁은 그녀와 월세방에서 했던 것들을 하나부터 열까지 다 다시 해볼 작정인 건가?그와 월세방에서 한 일은 많고도 많았다.“하지만 머리 자르는 도구 같은 것도 없잖아.”임유진은 다른 핑계를 댔다.그러자 강지혁은 집사를 시켜 미용실에서나 볼 법한 도구들을 금방 준비해주었다.이에 조금 말문이 막힌 그녀였다.이렇게 많은 도구는 필요 없거니와 다
“그래?”강지혁은 수중에 있는 가위를 보더니 눈빛이 순간 차갑게 변했다. 방금 그 순간, 그는 그녀라면 기꺼이 목숨을 내줄 수 있다는 생각을 했었다.미친 게 틀림없다.한 번도 여자에게 자신의 목숨을 줘도 된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다. 그의 죽음은 오직 그가 결정하는 것이니까. 애초에 그녀와 헤어진 것도 그렇게 될까 봐 겁이 나서 아니었나?그런데 왜 헤어진 마당에 이런 생각이 드는 거지?“정말 일부러 그런 거 아니야.”그의 침묵 때문에 임유진이 뭔가 오해했는지 다급하게 해명했다.“너랑 헤어졌을 때 확실히 힘들고 고통스럽긴 했어도 다 지난 일이야. 고작 헤어진 거로 상대를 죽이려는 생각은 안 해.”강지혁은 미간을 찌푸렸다. 그녀가 다 지난 일이라고 했을 때, 마치 심장에 뭔가에 찔린 듯 욱신거렸다.“나 죽이고 싶단 생각 한 적 없어?”강지혁이 고개를 돌리며 물었다.“응, 없어.”“내가 죽는 건 싫다는 뜻이야?”그는 그녀를 꿰뚫어 보듯 집요하게 눈을 맞춰왔다.“죽길 바라지는 않아.”두 사람이 헤어졌다고 한들 그것 때문에 강지혁이 죽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그저 서로가 모든 걸 잊고 각자의 길을 가기만을 바랐다. 물론 지금에 와서는 그것도 안 될 것 같지만...“그럼 너는 날 죽일 일도 없겠네?”임유진은 그의 말이 조금 웃겼다. 일단 그의 말은 성립 자체가 되지 않는다. S 시 제일 꼭대기에 있는 남자를 고작 변호사 비서 따위가 무슨 수로 죽일 수 있을까.“그건 내가 대답하고 말고의 문제가 아닌 것 같은데?”“대답해 줘.”강지혁은 그녀의 답을 원했다.그의 눈과 마주하자 임유진의 심장이 거세게 뛰었다. 그녀는 입을 달싹이다 한참 뒤에야 ‘응’이라는 한 글자를 내뱉었다.이에 강지혁의 입꼬리가 서서히 올라가더니 이내 활짝 웃었다. 눈가가 예쁘게 접힌 것이 진심으로 기쁜 듯했다.“그 말 꼭 기억해.”그는 다시 수중의 가위를 그녀에게 건네주었다.“계속 잘라.”머리를 다 자르고 나니 임유진은 손이 다 얼어붙
“...”애착 인형 같은 건가...?임유진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상념에서 빠져나와 다시 한번 사건 자료에 집중했다.며칠 후면 이재하의 재판이 열리게 된다. 김은아 쪽은 이대로 계속 질질 끌며 배상금을 주지 않을 생각인 듯했다.배상금으로 거의 억 단위의 돈을 주기보다 1년 형을 사는 게 더 낫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임유진은 교통사고를 낸 진정한 가해자가 소지혜라는 걸 거의 90% 확신하고 있지만 아직 이렇다 할 유력 증거는 잡지 못한 상태다.역시 사고 현장을 다시 한번 둘러보며 증거를 찾을 수밖에 없는 건가? 이거 말고는 현재로서 다른 방법이 없었다.증거를 찾지 못하면 재판에서 이긴다고 한들 이재하 가족은 일 푼도 얻지 못하게 된다.“뭘 그렇게 열심히 봐?”그때 강지혁의 목소리가 바로 옆에서 들려왔다.고개를 돌려보니 강지혁은 어느새 화상 회의를 끝내고 그녀의 곁에 와 있었다.그는 허리를 숙이고 한 손으로 책상을 지탱한 채 그녀가 보고 있던 사건 자료를 바라보았다.“사건 좀 보는 중이야.”“정말 그 작은 로펌에서 변호사 비서로 계속 일할 거야? 내가 좀 도와줄까?”강지혁의 시선이 그녀를 향했다.“아예 로펌을 세워줄게. 그러면 너는 변호사 자격증도 있으니까 남들 보조가 아니라 네가 직접 사건을 받을 수도 있게 돼.”“괜찮아. 지금은 일단 경력을 쌓고 싶어.”“그래서 거절하려고?”그의 목소리가 낮게 가라앉았다. 두 사람을 감싸고 있던 공기도 덩달아 무거워진 듯했다.임유진은 속으로 한숨을 내쉬더니 그를 보며 말했다.“강지혁, 나한테 뭘 자꾸 해주지 않아도 돼. 네가 언니랑 윤이 지켜주는 것만으로도 나는 충분히 고마우니까.”그녀는 그에게 기댈 생각이 없다.강지혁이 정말 로펌을 차려준다고 해도 그건 결국 그녀의 것이 아닌 언제 사라질지 모르는 신기루 같은 것일 테니까. 언젠가 그의 마음이 또 변하게 되면 그것도 하루아침에 사라지게 된다.강지혁은 손가락으로 그녀가 입술을 깨물지 않게 입술을 어루만지며 물었다.“왜 계속 혁이라고
임유진은 입으로는 혁이라고 내뱉으면서 마음속으로는 ‘그는 강지혁이다.’를 계속해서 외쳤다.“네 앞에서 나는 그저 혁이일 뿐이야.”강지혁은 이 말과 함께 두 팔로 그녀를 꼭 끌어안았다.그녀의 몸은 그의 향기로 감싸졌다. 임유진의 눈은 어둡게 가라앉았다.강지혁은 더 이상 혁이가 될 수 없다. 헤어짐을 입 밖으로 냈을 때 그녀의 혁이는 이미 사라지고 없으니까....호텔 방 안.이경빈은 지금 공수진과 통화를 하고 있다.“내일 갈 거야. 인터넷은 내가 처리할 테니까 신경 쓰지 마.”“경빈 씨, 대체 무슨 일인데 나한테 한마디 말도 없이 떠나요? 따지려는 게 아니에요. 그냥 무슨 일인지는 얘기해줬으면 좋겠어요.”공수진의 목소리는 당장이라도 달려가 안아줘야 할 것처럼 가녀렸다.“돌아가면 다 얘기해줄게.”이경빈은 전화를 끊은 뒤 두 손으로 관자놀이를 주물렀다.그는 요즘 제대로 잠을 이루지 못했다. 눈만 감으면 탁유미와의 과거 추억들이 자꾸 떠올랐기 때문이다.그녀의 미소, 그녀의 눈물, 임신했다며 외치던 그녀의 모습과 그에 자신이 어떻게 답했는지 그리고 얼마 전 그녀를 찾아가 자신의 애를 낳으라고 했을 때 날카로운 유리잔으로 망설임 없이 배를 찌르던 모습까지...그녀에게는 이미 그의 피가 흐르는 아이가 있었다. 청각 장애가 있는 아이, 윤이.윤이와 처음 만났을 당시를 떠올리자 이경빈은 말로 이루 표현할 수 없는 감정이 치솟았다.그때 그는 아이에게 왜 그러냐고 물었다. 이에 윤이는 그와 닮은 두 눈으로 멀뚱히 바라만 보다가 열심히 손으로 휘적거리며 애써 입을 열려고 했지만 나오는 건 옹알이와 비슷한 말뿐이었다.아이가 청각장애인 걸 알아채자마자 밖에서는 냉혈한이라 불리던 그가 어쩐 일인지 동정이라는 걸 했다.하지만 그 아이가 자기 아들이었을 줄이야. 그리고 그 사실을 이제야 알게 됐다!이경빈은 갑자기 몸을 일으키더니 외투를 들고 방을 나섰다.거실에 있던 부하는 그가 나가려고 하자 벌떡 일어서며 물었다.“대표님, 이 시간에 어디 가시려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