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응, 괜찮아. 어제는 연신 씨네 집에서 잤어.]한지영은 술에 취해 백연신을 덮쳤다는 얘기는 굳이 하지 않았다.아까 아침밥 먹을 때 백연신이 진지하게 얘기를 꺼냈었다.“너 이제 초범 아니야. 이러고도 나 책임 안 지겠다고 하면 진짜 죽을 줄 알아.”원래 이런 말은 여자가 하는 게 맞지만 이 두 사람 관계에서만큼은 백연신이 말하는 게 더 잘 어울리기도 했다.“책임 질 거지?”백연신이 그녀를 노려보며 물었다.“어... 그래야죠.”한지영은 뜨거운 그의 시선에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아까 아침에 있었던 일이 떠오르자 한지영은 자기도 모르게 피식 웃음이 터져 나왔다. 분명히 달콤한 말은 아니지만 어쩐지 가슴 한편이 붕 뜨는 기분이었다.그녀는 임유진과 대화를 마친 후 일을 하기 시작했다.그리고 임유진 역시 휴대폰을 집어넣고 일에 집중했다. 하지만 사건을 훑어보던 손이 얼마 안가 멈추고 그녀는 고민에 빠졌다.어젯밤 강지혁은 왜 그곳에 간 걸까? 게다가 그 장소는 또 어떻게 알고?그리고 누나 제안은 이미 거절했는데 왜 또 눈앞에 나타나는 걸까?헤어졌는데 분명히 헤어진 게 맞는데 이건 그녀가 상상했던 이별과는 매우 달랐다.깔끔하게 서로를 지우고 연락도 안 하며 다시는 못 볼 줄 알았지만, 그는 한 번도 아니고 여러 번이나 그녀의 앞에 나타났다.‘아니야. 생각하지 마, 임유진!’임유진은 고개를 세게 흔들며 지금은 강지혁이 아닌 일에 집중해야 한다며 스스로를 다그쳤다.어느새 오후가 되고 차 변호사는 임유진을 사무실로 불러와 말했다.“유진 씨는 다시 곽동현 씨를 만나 그날 곽동현 씨가 얘기해줬던 의심스러운 부분을 다시 한번 확인하고 사인까지 받아오세요. 증인이 직접 얘기했다는 증명이 필요합니다. 경찰 쪽은 얘기해 본 결과 재수사는 아직 어렵지만 이 사건을 담당했던 분에게 의문점을 제기하니 개인적으로 알아보겠다고 했습니다. 그나마 희망적인 소식이죠.”정말 희망적인 소식이 아닐 수 없다.경찰 쪽에서 새로운 증거를 입수하게 되면 재수사도 분명히 가능
“좀 지저분하죠...?”곽동현은 민망한 듯 웃어 보였다.“창업이라는 게 다 이렇죠. 솔직히 동현 씨가 조금 부럽기도 해요.”임유진 역시 로펌에서 경험을 쌓다가 언젠가는 자신의 로펌을 차리는 게 꿈이었다.하지만 지금은... 변호사도 아니라 변호사 비서 일을 하고 있으니, 정말 세상일이란 생각대로 흘러가는 건 아닌 듯싶었다.“여기 동현 씨가 저번에 얘기해줬던 의문점을 문서로 적어봤어요. 읽어보고 문제없으면 거기에 사인하면 돼요.”임유진은 이곳으로 오기 전 이미 미리 그에게 얘기했던 터라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곽동현은 서류를 받아들고 한번 쭉 훑어보더니 바로 사인했다.임유진도 다시 서류를 받아들고 옆에 자신의 이름을 사인했다. 그러다 사인을 마치고 고개를 들어보니 자신을 보고 있는 그와 눈이 마주쳤다.“왜요? 무슨 문제라도 있어요?”“전에... 많이 힘들었죠.”감옥이라는 두 글자를 굳이 입 밖으로 내뱉지는 않았지만 임유진은 그의 말을 알아들었다.“이미 지나간 일인데요, 뭐.”그녀는 정말 괜찮다는 듯 담담하게 웃어 보였다.하지만 곽동현은 그 미소를 보며 가슴이 시큰거렸다. 그가 이 얘기를 갑자기 꺼낸 건 방금 사인하는 임유진의 손이 다른 사람과 다르게 삐뚤빼뚤했기 때문이었다.아직 상처가 아물지 않았던 건지, 단지 이름을 적는 것인데도 그녀는 매우 느렸다.감옥에서 생긴 상처인 걸까?임유진에게는 이미 여러 번 거절당했지만 그는 자기도 모르게 자꾸 그녀를 걱정하게 된다.하여 임유진이 볼일을 마치고 몸을 일으켰을 때 곽동현은 결국 그녀를 붙잡고 말았다.“유진 씨... 이따 시간 좀 내줄 수 있어요? 윤이한테 선물을 주고 싶어서요. 같이 고르러 가 줄 수 있어요?”임유진은 조금 놀란 듯 다시 물었다.“윤이한테 선물을 주겠다고요?”“네, 그때 잠깐 같이 있었던 것뿐이지만 꽤 정이 들었나 봐요.”게다가 영민해 보이는 아이가 귀가 들리지 않는다는 것을 듣고는 동정심도 일었다.“그래요. 그럼 이따 같이 가요.”그녀도 마침 탁유미와 윤이가
윤이 또래 남자아이들은 이런 장난감 총을 좋아한다.얼마 안 가 윤이 때문에 온 집안이 다 버블로 차버렸고 이에 곽동현은 조금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저... 아무래도 윤이를 데리고 밖으로 나가야 할 것 같아요. 요 근처에서 놀다가 반 시간 후 다시 데리고 올게요.”“그럼 부탁해도 될까요?”탁유미가 웃으며 답했다.“그럼요. 저도 윤이랑 노는 게 좋아요.”윤이는 곽동현의 손을 잡고 신이 나서 밖으로 나가버렸다.탁유미는 두 사람이 나간 뒤에야 임유진에게 물었다.“웬일로 저분과 같이 왔어요?”“사건 때문에 얘기 나누러 갔다가 동현 씨가 윤이 선물 고르는 걸 부탁해서 같이 오게 됐어요.”임유진은 옆에 놓인 캐리어를 보면서 물었다.“언제 떠나요?”“3일 뒤에요. 가구 같은 건 이삿짐센터에 맡기고 저랑 엄마 그리고 윤이는 KTX 타고 갈 거예요.”“그러면 그때 배웅하러 갈게요.”“괜찮아요. 주말도 아닌데 유진 씨는 출근해야죠.”탁유미는 그녀의 손을 잡으며 웃었다.“마음만 받을게요. G 시에 도착하면 제일 먼저 유진 씨한테 연락할게요. 그리고 유진 씨가 배웅하러 오면 윤이가 안 가겠다고 할지도 몰라요.”임유진도 옅게 웃었다.“알겠어요. 그럼 조심해서 가요.”“네, 그럴게요.”탁유미는 G 시에 가면 이번에야말로 그토록 원하면 평화 같은 날을 얻을 수 있을 것 같았다.더 이상 이경빈과는 만나지 않기를 밤마다 빌고 또 빌었다....“경빈 씨, 이 목걸이 어때요?”공수진은 목에 걸린 다이아몬드 목걸이가 더 잘 보이도록 턱을 살짝 치켜들었다.불빛까지 받아서 그런지 다이아몬드는 눈부시게 빛나고 있었다.“괜찮네.”이경빈은 그녀를 힐끗 보더니 말했다.“마음에 들면 사.”“160억이나 하는데 괜찮아요...?”공수진은 그의 눈치를 보며 물었다.“응, 괜찮아.”공수진은 그제야 환하게 웃었다.하지만 그녀는 사실 다이아몬드 목걸이보다는 다이아몬드 반지가 갖고 싶었다.며칠 후에 있을 파티에 두 사람의 결혼 날짜를 알리기로 했지만 그는 아직
탁유미, 그 여자 생각만 하면 이경빈은 숨이 턱하고 막히는 기분이었다.“별로야.”그는 인상까지 찌푸리며 말했다.“결혼인데 다른 거로 해. 보석이긴 해도 눈물이라는 단어가 마음에 안 들어.”공수진은 순간 조금 어안이 벙벙해 하다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그래요... 그럼 다른 거로 하죠, 뭐. 경빈 씨는 어떤 디자인의 반지가 좋아요?”“반지는 며칠 후에 다시 보러 오는 거로 해. 파티에서 우리 결혼 날짜 발표하고 나서 골라도 안 늦어.”공수진의 눈에 일말의 실망이 스쳐 지나갔지만 그녀는 곧바로 미소를 띄우며 말했다.“알겠어요. 그때 가서 천천히 골라요.”두 사람은 다이아몬드 귀걸이까지 고른 뒤 가게를 나왔다.“먼저 가.”“경빈 씨는요?”공수진이 조금 놀라 물었다.“나는 처리할 일이 있으니까 먼저 들어가. 이따 전화할게.”공수진은 고개를 끄덕이고 그가 준비한 차에 앉으려다가 불안한 얼굴로 물었다.“경빈 씨, 우리 결혼 날짜 말인데요, 정말 그날로 할거예요?”“왜? 무슨 문제 있어? 집안 어르신들이 받아온 날짜잖아. 좋은 날로 받아오셨겠지.”두 집안 어른들이 받아온 날짜인데 대체 뭐가 문제일까.그녀는 이경빈과 결혼할 것이며 이씨 집안 안주인이 될 것이다.공수진은 그를 향해 웃어 보이고는 다시 차에 올라탔다.결혼식은 반년 뒤로 정해졌고 반년 후 그녀는 그토록 원하는 것을 얻게 된다.그리고 탁유미 그 여자는 이제 끼어들지 못한다!이경빈은 공수진이 떠나는 걸 확인한 후 도로를 따라 걷다가 성당 안으로 들어갔다.이곳은 도심 한가운데 자리한 규모가 그리 크지 않은 성당이었다.안으로 들어가 보니 기도드리는 사람 한 명 없이 무척이나 조용했다.그는 성모 마리아가 아이를 안고 있는 조각상을 바라보았다.전에 탁유미는 이 조각상 앞에서 몇 시간이나 서 있다가 결국에는 눈물까지 흘렸다.그때 그 눈물의 의미에 대해 물으니 그녀는 이렇게 답했다.“그냥... 예수가 어떤 결말을 맞이하는지 갑자기 떠올라 버렸어... 만약 언젠가 내 자식이
아이가 생겼다는 탁유미의 말은 그저 감정을 이용해 자신을 붙잡으려는 마지막 발악이었을 것이다.하지만 그녀는 틀렸다. 애초에 자신은 그녀에게 감정 따위 남아 있지 않으니까!요만큼의 감정도 남아있지 않다!이경빈은 마음속으로 이 말을 끊임없이 되뇌었다. 하지만 왜인지 그녀가 피를 뚝뚝 흘리던 그 날의 모습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는다.탁유미는 그날, 마치 그와의 인연을 모두 잘라내려는 듯했다.얼마나 어렵게 그녀를 다시 찾아냈는데 만약 이대로 또다시 못 보게 된다면...이런 가정을 할 때마다 심장이 욱신거리며 아파 왔다.아직 제대로 복수를 끝내지도 못했는데, 고작 몇 년 옥살이 한 것만으로는 성에 차지 않는다!이경빈은 결국 돌고 돌아 그 핑계로 자신을 설득하며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었다.“나야. 그 여자한테 사람 붙여. 그리고 무슨 일 생기면 바로 나한테 알리고.”이번에는 절대 그렇게 쉽게 사라지게 놔두지 않을 것이다.‘탁유미, 날 안 보는 게 네 소원이면, 나는 절대 그 소원이 이뤄지도록 놔두지 않을 거야.’...탁유미의 집에서 나온 후 곽동현은 임유진을 입까지 데려다주기로 했다.가는 길, 곽동현이 물었다.“윤이네 정말 이사 가기로 한 거예요?”“네.”“아쉽네요. 윤이랑은 조금 더 같이 놀고 싶었는데.”곽동현은 진심으로 윤이가 마음에 들었다.“사는 곳이 달라지는 것뿐이에요. 앞으로 쭉 만나지 못하는 것도 아니잖아요.”그때 도로 반대편에서 차 한 대가 무섭게 돌진하더니 곽동현의 차가 목적인 듯 서서히 다가오기 시작했다.“뭐야?!”곽동현은 재빨리 핸들을 꺾은 후 브레이크를 밟고 갓길에 차를 세웠다.그러고는 화가 났는지 안전벨트를 풀고 임유진에게 말했다.“유진 씨는 여기 있어요. 대체 또 어떤 부잣집 도련님이 이런 정신머리로 운전을 하는 건지.”그는 방금 자신을 향해 다가오던 차가 한정판 벤틀리에 가격이 어마어마한 차량이라는 걸 알고 있다.곽동현이 운전석에서 내리려는데 임유진이 그의 손을 잡고 제지했다.일부러라도 스킨십은 하지
곽동현은 그녀의 손을 잡으며 물었다.“나도 같이 가줄까요? 만에 하나 무슨 일이라도...”“아무 일도 없을 거예요.”임유진은 그를 향해 웃어준 후 가볍게 어깨까지 두드렸다.“아는 사람이에요.”그 말에 곽동현은 그제야 아쉬운 듯 손을 풀어주었다.임유진은 차에서 내려 운전기사를 따라 벤틀리 옆으로 다가갔다.운전기사는 직접 뒷좌석 문을 열어주었고 그녀는 차에 올라탔다. 곽동현은 언뜻 뒷좌석에 정장 차림의 남자가 있는 게 보였지만 얼굴까지는 보이지 않았다.탁!차 문이 닫히고 벤틀리는 볼일이 끝났다는 양 다시 갈 길을 갔다.홀로 차 안에 남은 곽동현은 지금 궁금한 것투성이였다.대체 뒷좌석에 앉은 남자는 누군지, 그리고 그녀와는 대체 무슨 관계인 건지......임유진은 옆에 앉은 남자를 쳐다보았다. 강지혁은 지금 재밌는 장난감을 발견한 듯 웃고 있었다. 하지만 자세히 보면 그 눈은 차갑지 그지없었다.“저 남자가 정말 마음에 든 거야? 그래서 오늘도 이렇게 같이 다니는 건가?”무심하게 뱉는 그 말들이 그녀의 마음을 아프게 때렸다.“너와 상관없는 일이야.”“그래? 차량 대리점 운영한다고 했었나? 규모도 작던데, 하룻밤 사이에 사라져도 모르겠다, 그치?”임유진의 몸이 굳이 버렸다.지금 곽동현의 차량 대리점을 없애버릴 수도 있다고 경고하는 건가...?그녀는 고작 자신 때문에 곽동현이 이유 모를 불이익을 당하는 건 싫었다.“안 좋아해.”“정말?”강지혁은 그녀의 말이 진실인지 감별하듯 집요하게 눈을 맞춰왔다.“내가 동현 씨를 좋아했으면 환경미화원 일할 때부터 진작에 사귀었겠지.”사실 가끔은 만약에라는 가정을 해보기도 한다. 만약 그녀가 좋아했던 사람이 곽동현이었다면 지금쯤 평범한 날들을 보내며 우직하고 성실한 남자와 행복하게 살고 있지는 아닐까 하고 말이다.“그래. 계속 좋아하지 말아야 할 거야.”강지혁은 말을 마치고 그녀의 왼손을 잡았다.임유진이 깜짝 놀라 바라보자 그는 티슈를 꺼내 들더니 그녀의 왼손을 가볍게 닦아주었다.“아까
“너 같은 사람은 그게 어떤 기분인지 모르겠지. 모두 다 같은 사람인데 어떤 사람들은 위에 군림하며 너무나도 쉽게 다른 사람의 목숨줄을 흔들어. 그리고 어떤 사람들은 그저 평범한 사람일 뿐인데 위에 있는 사람들 눈치를 보며 자신의 운명조차 손에 쥐지 못해.”그때도 만약 임유진이 그저 그런 집안의 딸이 아닌 부잣집 딸이었다면 교통사고 누명 따위 뒤집어쓰지도 않았을 것이다.애초에 누명을 씌우려는 짓을 감히 하지 못했겠지.감옥에 있을 당시 임유진은 마치 그저 껍데기만 남아있는 사람처럼 그저 하루하루 다른 사람의 눈치만 봐야 했다. 오늘 매 맞지 않고 무사히 지나가느냐 마느냐는 그녀보다 먼저 들어온 수감자의 손에 달렸으니까.그리고 그 수감자 또한 윗사람의 명령을 따랐을 뿐이었다.강지혁은 눈앞에 있는 여자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았다.“내가 그 기분을 모른다고 어떻게 확신해?”그는 자조하듯 피식 웃었다.임유진과 헤어진 이유가 그녀를 더는 사랑하지 않겠다고 다짐한 이유가 자신의 운명이 남의 손에 쥐어지는 게 싫어서인데 그가 어떻게 그 기분을 모를 수 있을까.사랑이라는 감정에 너무 깊이 빠져버리면 자기도 모르는 새에 자신의 모든 걸 상대방에게 내어주게 된다.임유진은 그의 말에 의문이 피어올랐다. 그의 표정이 마치 정말 그 기분을 아는 것 같았으니까.하지만 상대는 강지혁인데... 감히 누가 그의 목숨줄을 쥐고 있을 수 있겠는가!“강지혁, 그건 네가 생각해도 웃기는 말인 거 알지?”“혁이라고 부르라 했어.”강지혁은 미간을 위로 치켜세우며 말을 이었다.“어젯밤은 그렇게 나를 끌어안으며 혁이라고 부르더니.”임유진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믿지 못하겠다는 표정을 지었다.“왜, 못 믿겠어? 고이준한테 전화해 볼까? 직접 물어봐. 어제 옆에서 똑똑히 들었을 테니까. 아니면 백연신한테 물어보던가.”임유진은 눈에 띄게 당황했다.“어제는... 취해서...”“취해서?”“취해서 헛소리한 거야.”“취중 진담이 아니고?”취중 진담? 대체 어제 취해서 또 무슨 말
강지혁은 그의 입술로 이제 따뜻해진 임유진의 손 위를 간지럽혔다.“나는 너만 원한다면 우리가 제일 처음 만났을 때로 돌아갈 수 있어. 네가 강씨 저택에 돌아가기 싫은 거라면 전처럼 너와 같이 이곳에서 살 수도 있고.”임유진은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눈앞에 있는 남자는 지나치게 잘생겨 시선을 뗄 수 없었고 검은색 눈동자는 마치 그녀를 삼켜버릴 듯 어둡게 일렁였다. 게다가 그의 입술은 아직도 그녀의 손에서 벗어날 줄을 몰랐다.그와 전처럼 돌아가고 싶은 걸까? 누나 동생처럼 서로를 아끼던 그때로?임유진은 자신에게 물었다.아마 그녀도 어느 정도 그리웠을 것이다. 따뜻하고 그 무엇에도 속박받지 않았던 그때가, 가족 같은 누군가가 곁에 있어 더는 외롭지 않았던 그때가.임유진은 한 번도 그에게 사랑을 바란 적이 없다. 그저 가족 간의 정에 목말랐을 뿐. 멋대로 사랑을 준 건 그였다.한참 뒤, 복잡하게 일렁이던 그녀의 눈이 차분하게 가라앉았다.“강지혁, 우리는 헤어졌고 이제 서로 누나 동생 하던 때로 돌아갈 수도 없어. 누나가 필요한 거라면 다른 사람 찾아봐.”그녀의 손을 잡고 있던 강지혁의 손에 순간 힘이 들어갔다.“그러니까 곽동현 그 인간이랑은 같이 있을 수 있는데 나랑 있는 건 싫다는 거네?”강지혁의 입에서 싸늘한 음성이 들려왔다.“자꾸 그 사람 끌어들이지 마.”“왜? 마음이라도 아파? 안 좋아한다며? 그리고 난 솔직히 이해가 안 가. 어떻게 나랑 헤어지고 그런 남자를 곁에 둘 수가 있지? 곽동현의 뭐가 그렇게 좋은데?”임유진이 또 한 번 곽동현을 두둔하자 강지혁은 기분이 언짢았다.‘동현 씨는 최소한 나한테 진심이었고 나를 존중해줬어. 그리고 동현 씨와 함께라면 또 언제 버려질까 전전긍긍할 필요도 없겠지.’임유진은 목구멍까지 차오른 이 말을 꾹 삼켰다. 괜한 소리로 곽동현에게 피해를 줄 수는 없었으니까.“다시 한번 말하지만 나 그 사람 안 좋아해. 일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만났을 뿐이야.”임유진은 그와 눈을 마주한 채 차분한 말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