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가 생겼다는 탁유미의 말은 그저 감정을 이용해 자신을 붙잡으려는 마지막 발악이었을 것이다.하지만 그녀는 틀렸다. 애초에 자신은 그녀에게 감정 따위 남아 있지 않으니까!요만큼의 감정도 남아있지 않다!이경빈은 마음속으로 이 말을 끊임없이 되뇌었다. 하지만 왜인지 그녀가 피를 뚝뚝 흘리던 그 날의 모습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는다.탁유미는 그날, 마치 그와의 인연을 모두 잘라내려는 듯했다.얼마나 어렵게 그녀를 다시 찾아냈는데 만약 이대로 또다시 못 보게 된다면...이런 가정을 할 때마다 심장이 욱신거리며 아파 왔다.아직 제대로 복수를 끝내지도 못했는데, 고작 몇 년 옥살이 한 것만으로는 성에 차지 않는다!이경빈은 결국 돌고 돌아 그 핑계로 자신을 설득하며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었다.“나야. 그 여자한테 사람 붙여. 그리고 무슨 일 생기면 바로 나한테 알리고.”이번에는 절대 그렇게 쉽게 사라지게 놔두지 않을 것이다.‘탁유미, 날 안 보는 게 네 소원이면, 나는 절대 그 소원이 이뤄지도록 놔두지 않을 거야.’...탁유미의 집에서 나온 후 곽동현은 임유진을 입까지 데려다주기로 했다.가는 길, 곽동현이 물었다.“윤이네 정말 이사 가기로 한 거예요?”“네.”“아쉽네요. 윤이랑은 조금 더 같이 놀고 싶었는데.”곽동현은 진심으로 윤이가 마음에 들었다.“사는 곳이 달라지는 것뿐이에요. 앞으로 쭉 만나지 못하는 것도 아니잖아요.”그때 도로 반대편에서 차 한 대가 무섭게 돌진하더니 곽동현의 차가 목적인 듯 서서히 다가오기 시작했다.“뭐야?!”곽동현은 재빨리 핸들을 꺾은 후 브레이크를 밟고 갓길에 차를 세웠다.그러고는 화가 났는지 안전벨트를 풀고 임유진에게 말했다.“유진 씨는 여기 있어요. 대체 또 어떤 부잣집 도련님이 이런 정신머리로 운전을 하는 건지.”그는 방금 자신을 향해 다가오던 차가 한정판 벤틀리에 가격이 어마어마한 차량이라는 걸 알고 있다.곽동현이 운전석에서 내리려는데 임유진이 그의 손을 잡고 제지했다.일부러라도 스킨십은 하지
곽동현은 그녀의 손을 잡으며 물었다.“나도 같이 가줄까요? 만에 하나 무슨 일이라도...”“아무 일도 없을 거예요.”임유진은 그를 향해 웃어준 후 가볍게 어깨까지 두드렸다.“아는 사람이에요.”그 말에 곽동현은 그제야 아쉬운 듯 손을 풀어주었다.임유진은 차에서 내려 운전기사를 따라 벤틀리 옆으로 다가갔다.운전기사는 직접 뒷좌석 문을 열어주었고 그녀는 차에 올라탔다. 곽동현은 언뜻 뒷좌석에 정장 차림의 남자가 있는 게 보였지만 얼굴까지는 보이지 않았다.탁!차 문이 닫히고 벤틀리는 볼일이 끝났다는 양 다시 갈 길을 갔다.홀로 차 안에 남은 곽동현은 지금 궁금한 것투성이였다.대체 뒷좌석에 앉은 남자는 누군지, 그리고 그녀와는 대체 무슨 관계인 건지......임유진은 옆에 앉은 남자를 쳐다보았다. 강지혁은 지금 재밌는 장난감을 발견한 듯 웃고 있었다. 하지만 자세히 보면 그 눈은 차갑지 그지없었다.“저 남자가 정말 마음에 든 거야? 그래서 오늘도 이렇게 같이 다니는 건가?”무심하게 뱉는 그 말들이 그녀의 마음을 아프게 때렸다.“너와 상관없는 일이야.”“그래? 차량 대리점 운영한다고 했었나? 규모도 작던데, 하룻밤 사이에 사라져도 모르겠다, 그치?”임유진의 몸이 굳이 버렸다.지금 곽동현의 차량 대리점을 없애버릴 수도 있다고 경고하는 건가...?그녀는 고작 자신 때문에 곽동현이 이유 모를 불이익을 당하는 건 싫었다.“안 좋아해.”“정말?”강지혁은 그녀의 말이 진실인지 감별하듯 집요하게 눈을 맞춰왔다.“내가 동현 씨를 좋아했으면 환경미화원 일할 때부터 진작에 사귀었겠지.”사실 가끔은 만약에라는 가정을 해보기도 한다. 만약 그녀가 좋아했던 사람이 곽동현이었다면 지금쯤 평범한 날들을 보내며 우직하고 성실한 남자와 행복하게 살고 있지는 아닐까 하고 말이다.“그래. 계속 좋아하지 말아야 할 거야.”강지혁은 말을 마치고 그녀의 왼손을 잡았다.임유진이 깜짝 놀라 바라보자 그는 티슈를 꺼내 들더니 그녀의 왼손을 가볍게 닦아주었다.“아까
“너 같은 사람은 그게 어떤 기분인지 모르겠지. 모두 다 같은 사람인데 어떤 사람들은 위에 군림하며 너무나도 쉽게 다른 사람의 목숨줄을 흔들어. 그리고 어떤 사람들은 그저 평범한 사람일 뿐인데 위에 있는 사람들 눈치를 보며 자신의 운명조차 손에 쥐지 못해.”그때도 만약 임유진이 그저 그런 집안의 딸이 아닌 부잣집 딸이었다면 교통사고 누명 따위 뒤집어쓰지도 않았을 것이다.애초에 누명을 씌우려는 짓을 감히 하지 못했겠지.감옥에 있을 당시 임유진은 마치 그저 껍데기만 남아있는 사람처럼 그저 하루하루 다른 사람의 눈치만 봐야 했다. 오늘 매 맞지 않고 무사히 지나가느냐 마느냐는 그녀보다 먼저 들어온 수감자의 손에 달렸으니까.그리고 그 수감자 또한 윗사람의 명령을 따랐을 뿐이었다.강지혁은 눈앞에 있는 여자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았다.“내가 그 기분을 모른다고 어떻게 확신해?”그는 자조하듯 피식 웃었다.임유진과 헤어진 이유가 그녀를 더는 사랑하지 않겠다고 다짐한 이유가 자신의 운명이 남의 손에 쥐어지는 게 싫어서인데 그가 어떻게 그 기분을 모를 수 있을까.사랑이라는 감정에 너무 깊이 빠져버리면 자기도 모르는 새에 자신의 모든 걸 상대방에게 내어주게 된다.임유진은 그의 말에 의문이 피어올랐다. 그의 표정이 마치 정말 그 기분을 아는 것 같았으니까.하지만 상대는 강지혁인데... 감히 누가 그의 목숨줄을 쥐고 있을 수 있겠는가!“강지혁, 그건 네가 생각해도 웃기는 말인 거 알지?”“혁이라고 부르라 했어.”강지혁은 미간을 위로 치켜세우며 말을 이었다.“어젯밤은 그렇게 나를 끌어안으며 혁이라고 부르더니.”임유진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믿지 못하겠다는 표정을 지었다.“왜, 못 믿겠어? 고이준한테 전화해 볼까? 직접 물어봐. 어제 옆에서 똑똑히 들었을 테니까. 아니면 백연신한테 물어보던가.”임유진은 눈에 띄게 당황했다.“어제는... 취해서...”“취해서?”“취해서 헛소리한 거야.”“취중 진담이 아니고?”취중 진담? 대체 어제 취해서 또 무슨 말
강지혁은 그의 입술로 이제 따뜻해진 임유진의 손 위를 간지럽혔다.“나는 너만 원한다면 우리가 제일 처음 만났을 때로 돌아갈 수 있어. 네가 강씨 저택에 돌아가기 싫은 거라면 전처럼 너와 같이 이곳에서 살 수도 있고.”임유진은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눈앞에 있는 남자는 지나치게 잘생겨 시선을 뗄 수 없었고 검은색 눈동자는 마치 그녀를 삼켜버릴 듯 어둡게 일렁였다. 게다가 그의 입술은 아직도 그녀의 손에서 벗어날 줄을 몰랐다.그와 전처럼 돌아가고 싶은 걸까? 누나 동생처럼 서로를 아끼던 그때로?임유진은 자신에게 물었다.아마 그녀도 어느 정도 그리웠을 것이다. 따뜻하고 그 무엇에도 속박받지 않았던 그때가, 가족 같은 누군가가 곁에 있어 더는 외롭지 않았던 그때가.임유진은 한 번도 그에게 사랑을 바란 적이 없다. 그저 가족 간의 정에 목말랐을 뿐. 멋대로 사랑을 준 건 그였다.한참 뒤, 복잡하게 일렁이던 그녀의 눈이 차분하게 가라앉았다.“강지혁, 우리는 헤어졌고 이제 서로 누나 동생 하던 때로 돌아갈 수도 없어. 누나가 필요한 거라면 다른 사람 찾아봐.”그녀의 손을 잡고 있던 강지혁의 손에 순간 힘이 들어갔다.“그러니까 곽동현 그 인간이랑은 같이 있을 수 있는데 나랑 있는 건 싫다는 거네?”강지혁의 입에서 싸늘한 음성이 들려왔다.“자꾸 그 사람 끌어들이지 마.”“왜? 마음이라도 아파? 안 좋아한다며? 그리고 난 솔직히 이해가 안 가. 어떻게 나랑 헤어지고 그런 남자를 곁에 둘 수가 있지? 곽동현의 뭐가 그렇게 좋은데?”임유진이 또 한 번 곽동현을 두둔하자 강지혁은 기분이 언짢았다.‘동현 씨는 최소한 나한테 진심이었고 나를 존중해줬어. 그리고 동현 씨와 함께라면 또 언제 버려질까 전전긍긍할 필요도 없겠지.’임유진은 목구멍까지 차오른 이 말을 꾹 삼켰다. 괜한 소리로 곽동현에게 피해를 줄 수는 없었으니까.“다시 한번 말하지만 나 그 사람 안 좋아해. 일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만났을 뿐이야.”임유진은 그와 눈을 마주한 채 차분한 말투
손목에 남은 붉은색 자국이 마치 불타오르는 것처럼 뜨거웠다.임유진은 눈을 감을 때마다 이 자국 위에 입을 맞췄던 강지혁이 떠올라 미칠 것 같았다....3일 뒤, 탁유미는 아침 일찍 일어나 아직 자고 있는 윤이 얼굴을 바라보았다.아이가 자라는 모습을 이렇게 옆에서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벌써 꽉 차는 기분이다.돌이켜보면 그때 아이를 지우지 않은 건 세상에서 제일 잘한 일이었다. 물론 아이 때문에 두 배로 더 힘든 시기를 보내야 했을 때도 있었지만 지금에 와서 보니 그 모든 것이 다 그만한 가치가 있었다.그때 탁유미 엄마가 방으로 들어왔다. 그녀는 세상을 다 가진듯한 얼굴의 딸을 보더니 피식 웃고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유미야, 짐 정리는 이제 끝이야. 어차피 오후에 출발할 거니까 지금 좀 자 둬.”“잠이 안 와요.”탁유미는 고개를 저었다.“이따가 이삿짐센터도 오기로 했잖아요. 슬슬 일어나야죠.”“G 시에 가게 되면 가게도 새롭게 시작해야 하는데... 아무래도 조금 걱정이 되네.”탁유미 엄마의 얼굴은 근심과 걱정으로 가득했다.‘윤이 식당’이 대단히 장사가 잘됐던 것은 아니지만 이제는 어느 정도 단골손님도 많아졌기에 수입이 대체로 안정적이었다. 하지만 G 시로 가게 되면 모든 걸 다시 처음부터 구축해 나가야 하니 걱정하지 않을 수가 없었을 것이다.“이곳에서 자리 잡았던 것처럼 거기서도 열심히 하면 되죠. 걱정하지 마세요, 엄마, 우리 세 식구 분명히 괜찮을 거예요.”탁유미 엄마는 씩씩한 딸을 보며 마음이 미어졌다.“나는 네가 행복했으면 좋겠어.”“엄마랑 윤이가 있는데 내가 행복하지 않을 이유가 없잖아요.”탁유미는 자신의 엄마를 꼭 끌어안아 주었다.이곳을 떠나는 건 다른 게 아닌 ‘행복’해지려고 가는 것이다....커다란 연회 홀에서는 지금 파티가 열리고 있었다.이경빈은 오늘 이곳에서 공수진과의 결혼 날짜를 발표할 예정이다.전에는 단지 애인 사이인 것만 알렸다면 오늘은 확실히 두 사람이 맺어지게 된다는 일종의 서약과도 같았
“아빠가 이따 결혼 날짜 발표는 경빈 씨가 하는 게 좋겠대요.”“그래.”공수진이 원하는 거라면 다 해줄 수 있다.“그리고 이따 음악이 흐르면 나랑 같이 춤춰요.”“그래.”그때 휴대폰 진동이 울렸고 이경빈은 발신자를 힐끗 보더니 미간을 찌푸렸다. 그러고는 공수진에게 전화 한 통만 하고 오겠다며 연회장 구석 쪽으로 갔다.그에게 걸려온 발신 번호는 탁유미를 감시하려고 보낸 사람의 번호였다.그런 그에게서 연락이 왔다는 건 탁유미 쪽에 급한 일이 생긴 게 분명했다.통화 버튼을 누르고 상대방의 말을 듣던 이경빈의 얼굴색이 급속도로 변해버렸다.“대표님, 탁유미 씨가 3시 45분 출발의 KTX 승차권을 구매한 것이 확인됐습니다. 아무래도 S 시를 떠나려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그리고?”“혼자가 아닙니다.”혼자가 아니라고?탁유미에게는 어머니가 있고 전에 출소했을 때도 어머니와 함께 사라졌었다.그래서 같이 있는 건가?“아들이 한 명 있습니다.”그 말에 이경빈은 하마터면 휴대폰을 놓칠 뻔했다.“뭐라고?”“3, 4살 정도 되는 아들이 한 명 있습니다.”아들? 탁유미에게 아들이라니?!이경빈은 머리가 새하얘졌다.“대표님, 이제 어떡할까요. 못 떠나게 잡을까요, 아니면 이대로 보낼까요?”이대로 그녀가 S 시를 벗어나게 되면 다시 찾는데 또다시 시간이 걸리게 된다.그때 연회장의 조명이 하나둘 꺼지더니 감미로운 음악 소리가 흘러나왔다.공수진은 그와 춤을 추기 위해 이경빈의 옆으로 걸어갔다. 그녀는 오늘 두 사람이 함께 춤을 추는 사진을 위해 특별히 기자까지 섭외해 두었다.그리고 오늘이 지나면 그간 인터넷에서 떠돌던 그녀를 향한 동정의 시선들이 단번에 사라지게 될 것이다.하지만 그녀가 막 입을 열려던 찰나, 이경빈이 휴대폰에 대고 소리를 질렀다.“떠나지 못하게 당장 잡아! 그리고 내가 갈 때까지 절대 놓치지 말고!”춤을 추기로 약속했던 남자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연회장 밖으로 뛰쳐나갔다.“경빈 씨!”당황한 그녀가 자신도 얼른 따라나
“모르겠어요, 나도...”공수진은 입술을 꼭 깨물고 대답했다.이경빈이 이상해진 건 전화를 받고 나서부터였다. 대체 그건 누구에게서 결려온 전화일까? 누굴 잡으라고 한 거지?그녀는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 알 길이 없었다.“혹시 우리 수진이와의 결혼을 원하지 않아서 떠난 건 아닐까요...?”공수진 엄마가 걱정 가득한 얼굴로 물었다.공수진의 집안은 원래 소소하게 중소기업을 운영했었지만 요 몇 년간 이씨 가문의 지지를 받으며 회사가 빠르게 성장해 공씨 가문은 어느새 상류층 가문에 낄 수 있게 되었다.세간에서는 그들을 이씨 가문을 이용해 자신의 지위를 올리려는 기생충 정도로밖에 생각하지 않았다.그러니 만약 두 사람의 결혼이 깨지기라도 하면 공씨 가문은 계속해서 비난을 받을 것이며 여차하면 예전으로 돌아가게 될 수도 있다.“결혼 날짜도 이미 다 받아왔는데 무슨. 당신은 재수 없는 소리 좀 하지 마.”공수진의 아빠가 호통을 쳤다. 그러고는 두 명을 향해 조용히 속삭였다.“지금 사람들 많은 거 안 보여? 태연한 척해. 아무 문제 없는 것처럼.”공수진의 부모는 억지 미소를 지으며 손님들에게 웃어 보였다.그리고 공수진은 입술을 깨물며 이경빈이 사라진 연회장 입구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아까 그는 마치 그녀 따위 보이지 않는 듯 화를 내며 뛰쳐나갔다.이 자리가 어떤 자리인지 알면서도 그는 사라져버렸다.대체 누굴까? 대체 누가 이경빈을 이곳에서 사라지게 만든 걸까?강한 불안감이 공수진을 감쌌다.탁유미는 지금 이삿짐센터 직원분과 얘기를 나누고 있다. 그리고 모든 짐이 차량 위에 실린 걸 본 뒤에야 엄마와 아들을 바라보았다.“엄마, 짐은 이제 됐으니까 일단 식사부터 하고 천천히 출발해요.”윤이는 예쁜 두 눈을 깜빡이며 물었다.“엄마, 그럼 우리 이제 S 시로는 안 돌아오는 거예요?”“음...”탁유미는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몰랐다.언제까지 이경빈의 눈을 피해 살아야 하는지 그녀도 몰랐으니까.“이제 윤이가 크면 윤이 좋아하는 곳으로 가자.”
탁유미 엄마는 분노가 치밀어 올라 한숨이 절로 나왔다.공수진과 비교하면 자신의 딸은 처지가 너무나도 기구했다.“엄마! 윤이 듣겠어요.”탁유미 엄마는 그제야 입을 꾹 닫았다.다행히 윤이는 지금 다른 곳에 정신이 팔려 두 사람의 대화는 듣지 못한 모양이었다.시간은 천천히 흘러갔고 탁유미는 점점 더 불안해졌다. 심지어 지금 당장 엄마와 아이를 데리고 열차에 오르고 싶은 충동도 일었다.그런 그녀의 마음을 알아주기라도 한 듯 마침내 안내방송이 들려오고 전광판에는 그들이 타게 될 열차 옆에 빨간색 승차 준비 등이 깜빡였다.하지만 그때 하필이면 윤이가 화장실을 가고 싶다고 했고 탁유미는 어쩔 수 없이 그를 데리고 화장실로 갔다.“엄마, 나 윤이 데리고 화장실 갔다 올게요.”“늦지 않게 빨리 와.”“알겠어요.”그녀는 윤이를 혼자 남자 화장실로 보낼 수는 없었기에 아이를 데리고 여자 화장실 안으로 들어갔다.그리고 볼일을 보게 한 다음 아이의 손을 깨끗하게 씻어주었다.“엄마, 혹시 무서워요?”막 나가려는데 아이의 입에서 뜻밖의 말이 흘러나왔다.탁유미는 윤이와 눈을 마주치며 물었다.“왜 그렇게 생각해?”“엄마 얼굴이 지금 딱 악당을 마주치기 직전의 얼굴이에요.”윤이는 요즘 히어로물 애니메이션에 푹 빠져 있었다탁유미는 그 말에 웃을 수가 없었고 동공이 심하게 흔들렸다.아이도 알아챌 수 있을 만큼 그렇게 얼굴에 티가 탔나?“엄마, 내가 엄마 지켜줄 테니까 무서워하지 말아요!”그녀는 눈가가 젖어오는 것을 느끼고는 자기도 모르게 아이를 꼭 끌어안았다.“응, 엄마 이제 안 무서워.”그녀에게 있어 윤이를 낳은 건 정말 최고로 잘한 일일 것이다. 이토록 사랑스러운 아이를 만날 수 있을 거라고는 상상이나 했을까?탁유미는 아마 윤이를 위해서라면 뭐든지 할 것이다.그때 안내방송이 한 번 더 울리고 탁유미는 그제야 아이를 데리고 화장실에서 나왔다.하지만 몇 걸음 채 떼기도 전에 그녀는 다시 제자리에 굳어버렸다.몸은 덜덜 떨리고 얼굴은 새하얗게 질렸다
“네.”한지영은 고개를 끄덕이며 연우진을 보냈다.가만히 서서 기다리고 있자니 갑자기 속이 울렁거려 그녀는 근처 쓰레기통 앞으로 가 음식물을 게워냈다.그렇게 한참을 토하던 그녀는 오늘 먹었던 것을 다 비우고서야 주섬주섬 가방을 더듬으며 티슈를 찾았다.하지만 아무리 찾아도 티슈가 손에 잡히지 않았다.그때 웬 손수건 하나가 그녀의 눈앞에 나타났다.“고마워요.”한지영은 눈을 게슴츠레 뜬 채 그것이 손수건인지 티슈인지 확인도 하지 않고 입가를 쓱 닦았다.야무지게 다 닦고서야 그녀는 손에 든 것이 티슈가 아닌 손수건이었다는 것을 알아챘다.“어... 이거는 내가 내일 세탁해서 다시 줄게요.”한지영은 말을 하면서 서서히 고개를 들었다.당연히 연우진이 건넨 손수건이라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눈앞에 있는 사람은 너무나도 익숙한, 5년간 틈틈이 그녀의 꿈에 나타나던 남자의 얼굴이었다.슈트 차림의 남자는 머리를 완전히 빗어 올린 채 훤한 이마를 드러내고 있었다. 환한 달빛 때문인지 원래부터 예뻤던 얼굴이 오늘따라 더더욱 예뻐 보였다.세월의 흔적 같은 게 존재하지 않는 남자의 얼굴을 한지영은 말없이 가만히 바라보았다.“끅...”술 냄새를 가득 담은 딸꾹질과 함께 조용했던 침묵이 깨졌다.“오랜... 만이에요.”한지영의 입에서 먼저 말이 흘러나왔다. 술을 마셨던 터라 말이 느려지고 또 버벅거렸다.“너 취했어.”백연신이 눈을 가늘게 뜨며 말했다.“술을 좀 마셨어요.”한지영은 눈앞의 남자를 두 눈에 똑바로 담으려는 듯 눈을 크게 뜨기 위해 노력했다.“아까 그 남자는... 남자친구야?”백연신이 물었다.“남자친구?”한지영은 눈을 깜빡이다 갑자기 피식 웃었다. 술에 취해있어 그런지 그 웃음이 어쩐지 바보 같아 보였다.“아... 우진 씨는 오늘 소개팅한 남자예요. 괜찮은 사람이었어요. 첫 만남인데도 대화도 잘 통하고...”한지영은 말을 하며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술기운 때문인지 두 눈이 심하게 요동치고 있었다.그간 백연신을 향한 마음을 접으려고
“그건 아니고 이제껏 설렌다는 느낌이 들었던 여성분이 없었어요.”설레는 느낌이라는 걸 누군가는 부질없는 감정이라고 할지 몰라도 적어도 한지영은 그 말을 쉽게 지나칠 수 없었다.이제껏 많은 아이돌과 배우들을 좋아해 왔지만 진정으로 마음이 설레었던 사람은 백연신 한 사람뿐이었으니까.아무리 소개팅을 해봐도 같이 있으면 가슴이 뛴다고 느껴지는 남자는 없었다.“설렌다는 느낌... 중요하죠. 쉽게 느끼기 어려운 감정이잖아요. 그리고 그런 느낌이 들었던 상대를 놓치고 다시 찾으려고 하면 더 힘들고요.”한지영의 말에 연우진이 조금 흠칫했다.“지영 씨는 그런 사람을 만난 적이 있나 봐요?”“네, 딱 한 번 있었어요.”한지영은 솔직하게 대답했다.연우진은 분명히 소개팅 상대였지만 그녀는 얘기를 나누면서 그가 남자로 보이는 것이 아닌 묘하게 친구 같이 느껴졌다.“어떤 사람이었어요?”연우진이 호기심 어린 눈으로 물었다.“그 사람은 일단 너무 예쁜 사람이었어요. 그리고 내 말이라면 뭐든 다 들어주는 그런 착한 사람이었죠.”백연신 얘기에 한지영의 입꼬리가 저도 모르게 위로 말려 올라갔다.이미 헤어졌음에도 백연신과 함께 했던 나날은 여전히 그녀의 마음속에 제일 소중했던 기억으로 자리 잡고 있었다.연우진이 생각보다 편한 말 상대였기 때문인지 아니면 오늘 우연히 백연신의 소식을 들어서인지 한지영은 평소보다 훨씬 더 감정적이고 말이 많았다.그녀는 술을 연거푸 마시며 얘기를 이어갔고 연우진은 그런 그녀의 얘기를 그저 가만히 들어주고만 있었다.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한지영이 앉아있는데도 휘청거리자 연우진은 그제야 술잔을 들어 올리려는 그녀의 손을 제지했다.“이제 그만 마셔요. 이러다 취하겠어요.”“취하는 게 뭐가 나빠요?”한지영이 웅얼거렸다.“지영 씨랑 나 오늘 첫 만남 아닌가요? 내가 어떤 사람인지 제대로 알지 못하면서 이렇게 무방비한 모습을 막 보여줘도 돼요? 내가 나쁜 마음이라도 먹으면 어쩌려고?”연우진의 말에 한지영이 피식 웃었다.“정말 그럴 생각
한지영은 손가락을 억지로 움직이며 소개팅 상대에게 메시지를 보냈다.그녀가 지금 신경 써야 할 사람은 백연신이 아니라 소개팅 상대였다. 어쩌면 이번에야말로 진정으로 그녀를 좋아하고 그녀도 좋아하는 남자가 나올지도 모른다.저녁.한지영은 약속 시간에 맞춰 번화가의 한 카페로 들어섰다.창가 쪽으로 향하니 소개팅 상대가 앉아있는 것이 보였다. 남자의 이름은 연우진이었고 현재 대기업에서 팀장직을 맡고 있는 유능한 사람이었다.한지영은 남자의 겉모습을 확인하고는 저도 모르게 속으로 감탄했다. 스펙이 좋은 사람이라는 건 프로필을 통해 충분히 알고 있었지만 외모까지 훌륭할 줄은 몰랐다.연우진은 깔끔한 정장 차림에 안경을 쓰고 있었다. 지적인 분위기에 앉아있는 자세까지 바른 것이 상당히 인기가 많을 것 같았다. 게다가 35살이라고 들었는데 막상 보니 이제 막 30대가 된 듯한 얼굴이었다.“안녕하세요. 한지영 씨 맞으시죠? 만나서 반가워요.”한지영이 자리에 앉기도 전에 남자가 먼저 인사를 건네왔다.“네, 안녕하세요.”한지영은 서둘러 미소를 지으며 자리에 앉았다.두 사람은 첫 만남에 할법한 얘기를 서로 두어 마디 주고받은 후 곧바로 근처 레스토랑으로 향했다.사실 한지영은 그저 아무런 고깃집이나 들어가 대충 식사를 하고 만남을 끝내려고 했는데 연우진은 원래 성격이 그런 건지 아니면 소개팅하는 여자들과는 항상 레스토랑을 가는 건지 아주 자연스럽게 그녀를 데리고 비싼 레스토랑으로 왔다.메뉴판을 들어 가격을 보니 헙 하는 소리가 절로 나왔다.“드시고 싶은 거 마음껏 주문하세요.”연우진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한지영은 잠깐 고민하더니 결국에는 상대적으로 저렴한 음식들을 주문했다.이에 연우진은 그녀를 잠시 바라보더니 별다른 말 없이 다른 음식도 주문한 다음 웨이터에게 메뉴판을 건넸다.“실례가 안 된다면 지영 씨가 소개팅에 나온 이유를 물어도 될까요? 혹시 나이 압박 때문에 결혼을 서두르고 싶은 건가요?”음식을 먹던 중에 연우진이 먼저 질문을 건네왔다.“그렇지
설마 재벌과 사귀었던 신데렐라가 주변에 있을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으니까.한지영은 천천히 정신을 차리고 조나연을 바라보았다. 조나연이 무슨 의도로 이런 말을 하는지 생각해볼 필요도 없었다. 이 번기 회에 자신을 깎아내리며 조롱하려는 게 분명했으니까.조나연은 예전에도 이런 식으로 묘하게 그녀를 깎아내렸다. 게다가 한지영이 없을 때면 다른 동료에게 두 사람은 얼마 안 가 반드시 헤어지게 될 거라며 저주 아닌 저주를 퍼붓기도 했다.그러다 정말 헤어졌을 때는 한껏 기분 좋은 얼굴로 한지영에게 이런 말을 건넸다.“나는 두 사람 오래 못 갈 줄 알았어요. 솔직히 백연신 씨가 아무것도 없는 지영 씨와 진심으로 사귈 리가 없잖아요. 요즘은 남자들도 여자 배경을 본다고요.”진심이 아니었다고? 그럴 리는 없다.한지영과 사귀었을 당시 백연신은 늘 그녀에게 진심을 다해 행동했고 자신의 사랑을 가감 없이 보여주었다. 그러니 진심이 아니었다는 말은 틀렸다.하지만 조나연의 말에 맞는 말도 있었다. 결과적으로 한지영은 백연신이 원하는 것을 주지 못했으니까.“지금 돌이켜봐도 참 안타까워요. 만약 헤어지지 않았으면 지금쯤 사모님 소리 들으며 편히 살고 있을 텐데.”조나연이 안타까운 척 그녀를 비꼬았다.한지영은 그런 그녀를 차가운 눈길로 빤히 바라보더니 갑자기 피식 웃었다.“그렇게 안타까우면 백연신 씨와 나 사이에 다리 좀 놔주지 그래요? 말로만 계속 안타깝다고 하니까 괜히 놀림 받는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요. 물론 제 착각이겠죠, 안 그래요?”한지영의 뼈 있는 말에 조나연의 얼굴이 한순간에 일그러졌다.그리고 가만히 구경하던 동료들 역시 그제야 분위기를 파악한 듯 이상한 눈길로 조나연을 바라보았다.조나연은 조금 머쓱한 얼굴로 웃더니 별다른 대답 없이 자리를 벗어났다.한지영은 자리로 돌아간 후 소개팅 상대와 약속 시간을 잡으려고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가 잠깐 멈칫하더니 저도 모르게 백연신의 기사를 검색했다.지난 5년간 그녀는 백연신을 완전히 내려놓을 작정으로 그와 관련
한지영은 한숨을 한번 내뱉더니 이내 사무실 밖으로 나갔다.“엄마, 소개팅 같은 거 하기 싫다고 내가 분명히 말했잖아요. 남자는 내가 알아서 찾을 테니까 나 좀 가만히 내버려 둬요. 이게 대체 몇 번째야.”“네가 어련히 알아서 잘하면 내가 이러지 않겠지. 너 이제 20대 아니고 30대야. 34살이나 돼서 남자친구 한 명 없다는 게 말이 돼? 내일모레면 당장 노산에 진입하는데 그때 되면 점점 더 좋은 남자 찾는 게 어려워져!”이해영이 속사포로 말을 뱉어냈다.한지영도 그녀가 왜 이렇게까지 소개팅을 주선하는지 잘 알고 있다. 34살이나 된 딸이 이대로 계속 남자와의 교제를 피하다 결국에는 남자도 자식도 없이 홀로 인생을 마감할까 봐 걱정되고 또 불안한 거겠지.사실 한지영은 혼자서도 얼마든지 잘 살 수 있다고 생각하는 주의였다. 게다가 요즘은 실버타운도 잘 되어있어 정말 혼자가 된다고 해도 크게 문제 될 건 없었다.하지만 부모님들은 그런 걸 바라지도 않거나와 그래도 결혼은 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는 분들이었다.그래서 한지영은 결국 오늘도 소개팅을 수락하고 말았다.더 이상 부모님께 걱정을 끼쳐드리고 싶지 않았기도 했고 말이다.“아, 알겠어요. 만나면 되잖아요. 톡으로 연락처 보내세요. 이따 연락할게요.”이해영은 딸의 말에 그제야 만족하며 전화를 끊었다.몇 초 후 한지영의 휴대폰에 메시지 하나가 도착했다. 보낸 사람은 이해영이었고 내용은 소개팅할 남자의 프로필과 연락처였다.한지영은 메시지를 보고는 다시 한번 한숨을 내뱉었다. 이해영의 말대로 그녀도 이제는 34살로 절대 마냥 어리기만 한 나이는 아니었다.지난 5년이라는 시간 동안 그녀는 백연신을 천천히 마음속에서 내려놓았다....정말?문득 마음속 깊은 속에서 이러한 의문이 떠올랐다.정말 백연신을 향한 마음을 완전히 접어버린 게 맞나?한지영은 입술을 살짝 깨물더니 이내 잡생각을 털어버리듯 머리를 흔들며 다시 사무실 안으로 들어갔다.자리로 돌아가려는데 웬 동료 한 명이 그녀를 불렀다.“지영 씨,
얘기가 일단락되자 강지혁은 아들의 손을 잡고, 임유진은 딸의 손을 잡고, 그리고 두 아이는 서로의 손을 꼭 잡은 채 유치원 안으로 들어갔다.소민아는 그런 네 사람의 뒤를 따라 딸과 함께 조용히 앞으로 걸어갔다.만약 전이였다면 어떻게 해서든지 강지혁의 옆에 서며 사람들의 뇌리에 그 모습을 각인하려고 했을 텐데 지금은 그럴 수가 없어 그저 고개를 푹 숙인 채 얼굴을 가릴 수밖에 없었다.소민아의 손을 잡고 안으로 들어가던 소안나는 강선현과 강선율이 맞잡고 있는 손을 빤히 바라보며 미간을 찡그렸다.강선율이 그녀의 손을 잡아준 건 첫 만남뿐으로 그 뒤로는 한번도 손을 잡아주려고 하지 않았다. 분명히 전보다 훨씬 예뻐지고 공주 옷도 입고 머리도 예쁘게 했는데 강선율은 다른 이들처럼 그녀에게 예쁘다고 칭찬해주기는커녕 점점 더 거리를 두며 이제는 말도 잘 섞으려고 하지 않았다.소안나는 그런 강선율의 행동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왜 자신의 손은 잡아주려 하지 않는 거지?결국에는 양녀라 정을 주지 않는 건가?경찰서 앞에서의 일이 있고 난 뒤 소민아는 강지혁의 사진을 들고 있던 여자아이가 바로 강씨 가문의 진정한 딸이고 강선율의 친여동생이라는 것을 소안나에게 얘기해주었다.소안나는 그 말을 듣고는 더욱더 기분이 나빠졌다. 갑자기 나타난 강선현에게 아빠와 오빠를 빼앗기는 것 같았으니까.유치원 입구에 다다른 임유진은 먼저 아이들을 안으로 들여보내고 선생님들과 얘기를 나눴다. 그리고 강지혁은 그런 그녀의 옆에 선 채 가만히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강선율은 안으로 들어간 후에도 강선현의 손을 꼭 잡은 채 자리까지 이동했다. 그러고는 듬직한 오빠의 얼굴로 동생의 가방을 직접 옆에 내려놓아 주기도 했다.그 장면을 바라보던 소안나는 질투심에 씩씩거렸다.‘나한테는 한번도 그렇게 해주지 않았으면서! 오빠랑 먼저 알게 된 건 쟤가 아니라 안나잖아!’“엄마, 나도 율이 오빠 친동생 하면 안 돼요?”소안나가 고개를 홱 들며 소민아에게 물었다.소민아는 딸의 말에 서둘러 주위
소씨 모녀의 등장에 사람들의 두 눈은 금세 흥미로움으로 가득 찼다. 그도 그럴 것이 강지혁이 또다시 결혼하게 된다면 그 상대는 분명히 양녀의 어머니인 소민아라고 생각했으니까.임유진은 포르쉐에서 내린 소민아를 발견하고는 저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렸다. 그간 집사와 고이준으로부터 전해 들은 말에 의하면 소민아는 소소하게 인기를 얻고 있던 인플루언서였다가 재벌 2세의 아이를 배고 그 집의 며느리로 들어가려다가 철저하게 버림을 받고 홀로 아이를 키우며 그간 힘든 나날을 보냈다고 한다.소안나가 강씨 가문에 입양된 건 2년 전의 일로 강지혁은 소안나와 소민아를 위해 집도 주고 생활비도 다달이 보내주며 그 외의 큰 지출도 부담해주었다고 한다. 즉 소씨 모녀는 하루아침에 강지혁이라는 든든한 백을 둔 신데렐라 모녀가 됐다는 뜻이었다.지금 소민아가 입고 있는 옷이나 타고 있는 차량만 봐도 그간 얼마나 호의호식하며 지냈는지 충분히 알 수 있었다.임유진이 소민아를 훑어보고 있을 때 소민아도 마찬가지로 임유진을 훑어보고 있었다. 설마 레스토랑에서 언쟁을 벌였던 별 볼 일 없는 여자가 강지혁의 사망한 아내라고 그 누가 상상이나 할 수 있었겠는가.소민아는 강지혁과 함께 나란히 서 있는 임유진을 바라보며 입술을 깨물었다. 질투의 감정이 몸 곳곳에 퍼지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하지만 그 감정을 겉으로 내비칠 수는 없었기에 소민아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임유진 씨 맞으시죠? 그날은 죄송했어요. 딸 일이라 괜히 흥분해서 언성을 좀 높였어요. 용서해주세요...”그 말에 임유진이 뭐라 대꾸하려는데 강지혁이 먼저 입을 열었다.“호칭 똑바로 해. 임유진 씨가 아니라 사모님.”차가운 그의 말에 주변 공기가 한순간에 얼어붙었다. 임유진이 강지혁의 아내였다는 것을 알고 있던 사람들은 임유진의 위치를 똑똑히 전하고자 하는 강지혁의 의도를 바로 알아챘다.5년 만에 돌아왔어도 임유진은 여전히 강지혁의 아내였고 강씨 가문의 안주인이었다.하지만 임유진이 누군지 모르고 있는 사람들은 강지혁의 말에
게다가 5년 만에 돌아온 거라 그간 많이 변한 저택의 상황도 알아야 했고 새로운 사람들과도 익숙해져야만 했다.그래서 아이들 일에는 조금 소홀해졌다. 딸이 아버지를 원했던 만큼 아들도 마찬가지로 엄마를 원했을 텐데 말이다.저택 고용인들에게 듣기로 강지혁은 매일 아침 율이와 함께 저택을 나서기는 하지만 나가서는 서로 다른 차를 타고 각자의 목적지로 향한다고 한다.즉, 강선율은 그간 아버지가 아닌 도우미나 기사의 보호 아래 유치원에 갔다는 소리였다.임유진은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자 또다시 죄책감이 피어올랐다. 또한 바쁘다는 이유로 율이에게 소홀했던 자신에게 화가 나기도 했다.강선율은 임유진의 팔이 더 세게 자신을 끌어안자 조금 움찔했다. 여전히 누군가에게 안기는 일은 익숙지 않았지만 상대가 엄마라서 그런지 이런 식의 포옹도 이제는 받아들일 수 있을 것 같았다. 아니, 솔직히 말하면 기분이 좋았다.게다가 앞으로는 하루도 빠짐없이 함께 유치원으로 가주겠다는 말 또한 기분 좋게 귓가에서 맴돌았다....다음날.강선현이 유치원으로 가는 날, 임유진은 율이와 현이에게 똑같은 옷을 입혔다. 다른 점이 있다면 강선율은 바지고 강선현은 치마라는 것이다. 엇비슷한 키의 두 아이가 똑같은 옷에 똑같은 신발을 신은 채 가방을 메고 있는 모습을 보니 절로 마음이 녹는 기분이었다.임유진은 결국 참지 못하고 두 아이를 품에 끌어안고 뽀뽀 세례를 퍼부었다.강선현은 그녀의 이런 행동에 이미 습관이 되었던 터라 꺄르르 웃으며 뽀뽀로 회답했지만 강선율은 별다른 반응 없이 그저 그녀의 행동을 받고만 있었다. 분명히 무표정한 얼굴이었지만 귀가 살짝 빨개진 것을 보니 기분이 나쁜 건 아닌 듯했다.강지혁은 세 사람이 다정하게 스킨십하는 걸 보면서 저도 모르게 슬쩍 입꼬리를 위로 올렸다.유치원에 도착한 후, 강지혁과 임유진은 각자 아이의 손을 잡고 차에서 내렸다. 아이를 등원시키러 온 학부모들은 네 사람의 등장에 입을 떡 벌리며 그대로 굳어버렸다.강지혁은 좀처럼 유치원에 얼굴을 내비치
하지만 남매 사이가 하루가 다르게 좋은 것 같아 보이니 임유진은 괜히 뿌듯해 나며 기분이 좋았다.“내일 유치원 갈 때 아빠도 엄마랑 함께 현이 데려다주면 안 돼?”현이가 눈을 반짝이며 강지혁을 바라보았다. 어지간히도 같이 가고 싶은 듯했다.강지혁은 아이가 이런 요구를 해올 줄은 몰랐는지 미간을 살짝 꿈틀거렸다.“유치원에 같이 가달라고?”“응! 원래 유치원 가는 첫날은 엄마랑 아빠가 함께 가줘야 하는 거야!”현이는 이번이 첫 유치원은 아니었지만 이제는 아빠도 찾았으니 강지혁과 함께 등원하고 싶었다. 아빠가 있다는 기분을 마음껏 누리고 싶었다.사실 지금껏 아빠의 부재에도 잘 자라왔던 아이였지만 아무래도 아빠의 빈자리가 꽤 컸던 모양이다.“그래, 그럼 내일 유치원에 같이 가줄게.”강지혁의 말에 현이는 활짝 웃더니 곧바로 팔을 쭉 내밀었다. 품에 안기고 싶다는 뜻이었다.강지혁은 스킨십 많은 딸이 아직도 잘 적응이 되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아들인 율이는 이제껏 이런 식의 요구를 해오지 않았으니까.하지만 임유진과 쏙 빼닮은 두 눈을 보고 있자니 저도 모르게 아이에게로 팔이 뻗어졌다.현이는 강지혁에게 안긴 후 그의 목을 꼭 끌어안으며 지난번 서재에서처럼 볼에 쪽 하고 뽀뽀를 했다.“아빠가 최고야!”진심으로 기뻐 보이는 딸의 모습에 임유진은 괜스레 코끝이 찡해 났다.딸이 아빠의 존재를 그리워한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새삼 이렇게 좋아하는 걸 보니 조금 더 빨리 기억을 회복하지 못했던 것에 죄책감이 일었다.임유진은 눈물을 감추기 위해 서둘러 시선을 돌렸다. 그러다 바로 옆에 서 있는 아들을 발견했다.혹시 율이도 엄마를 그리워하고 있지는 않았을까? 엄마가 있어야 하는 상황에 항상 없었던 것에 쓸쓸해 하지는 않았을까?“율아.”임유진은 그 생각에 강선율을 향해 팔을 활짝 열었다.“엄마가 안아줄까?”아이는 그 말에 어색해하며 답했다.“전 어린애가 아니에요. 동생이나 안아주세요.”말은 이렇게 하지만 은근히 원하고 있다는 눈빛을 보냈다.임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