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 같은 사람은 그게 어떤 기분인지 모르겠지. 모두 다 같은 사람인데 어떤 사람들은 위에 군림하며 너무나도 쉽게 다른 사람의 목숨줄을 흔들어. 그리고 어떤 사람들은 그저 평범한 사람일 뿐인데 위에 있는 사람들 눈치를 보며 자신의 운명조차 손에 쥐지 못해.”그때도 만약 임유진이 그저 그런 집안의 딸이 아닌 부잣집 딸이었다면 교통사고 누명 따위 뒤집어쓰지도 않았을 것이다.애초에 누명을 씌우려는 짓을 감히 하지 못했겠지.감옥에 있을 당시 임유진은 마치 그저 껍데기만 남아있는 사람처럼 그저 하루하루 다른 사람의 눈치만 봐야 했다. 오늘 매 맞지 않고 무사히 지나가느냐 마느냐는 그녀보다 먼저 들어온 수감자의 손에 달렸으니까.그리고 그 수감자 또한 윗사람의 명령을 따랐을 뿐이었다.강지혁은 눈앞에 있는 여자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았다.“내가 그 기분을 모른다고 어떻게 확신해?”그는 자조하듯 피식 웃었다.임유진과 헤어진 이유가 그녀를 더는 사랑하지 않겠다고 다짐한 이유가 자신의 운명이 남의 손에 쥐어지는 게 싫어서인데 그가 어떻게 그 기분을 모를 수 있을까.사랑이라는 감정에 너무 깊이 빠져버리면 자기도 모르는 새에 자신의 모든 걸 상대방에게 내어주게 된다.임유진은 그의 말에 의문이 피어올랐다. 그의 표정이 마치 정말 그 기분을 아는 것 같았으니까.하지만 상대는 강지혁인데... 감히 누가 그의 목숨줄을 쥐고 있을 수 있겠는가!“강지혁, 그건 네가 생각해도 웃기는 말인 거 알지?”“혁이라고 부르라 했어.”강지혁은 미간을 위로 치켜세우며 말을 이었다.“어젯밤은 그렇게 나를 끌어안으며 혁이라고 부르더니.”임유진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믿지 못하겠다는 표정을 지었다.“왜, 못 믿겠어? 고이준한테 전화해 볼까? 직접 물어봐. 어제 옆에서 똑똑히 들었을 테니까. 아니면 백연신한테 물어보던가.”임유진은 눈에 띄게 당황했다.“어제는... 취해서...”“취해서?”“취해서 헛소리한 거야.”“취중 진담이 아니고?”취중 진담? 대체 어제 취해서 또 무슨 말
강지혁은 그의 입술로 이제 따뜻해진 임유진의 손 위를 간지럽혔다.“나는 너만 원한다면 우리가 제일 처음 만났을 때로 돌아갈 수 있어. 네가 강씨 저택에 돌아가기 싫은 거라면 전처럼 너와 같이 이곳에서 살 수도 있고.”임유진은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눈앞에 있는 남자는 지나치게 잘생겨 시선을 뗄 수 없었고 검은색 눈동자는 마치 그녀를 삼켜버릴 듯 어둡게 일렁였다. 게다가 그의 입술은 아직도 그녀의 손에서 벗어날 줄을 몰랐다.그와 전처럼 돌아가고 싶은 걸까? 누나 동생처럼 서로를 아끼던 그때로?임유진은 자신에게 물었다.아마 그녀도 어느 정도 그리웠을 것이다. 따뜻하고 그 무엇에도 속박받지 않았던 그때가, 가족 같은 누군가가 곁에 있어 더는 외롭지 않았던 그때가.임유진은 한 번도 그에게 사랑을 바란 적이 없다. 그저 가족 간의 정에 목말랐을 뿐. 멋대로 사랑을 준 건 그였다.한참 뒤, 복잡하게 일렁이던 그녀의 눈이 차분하게 가라앉았다.“강지혁, 우리는 헤어졌고 이제 서로 누나 동생 하던 때로 돌아갈 수도 없어. 누나가 필요한 거라면 다른 사람 찾아봐.”그녀의 손을 잡고 있던 강지혁의 손에 순간 힘이 들어갔다.“그러니까 곽동현 그 인간이랑은 같이 있을 수 있는데 나랑 있는 건 싫다는 거네?”강지혁의 입에서 싸늘한 음성이 들려왔다.“자꾸 그 사람 끌어들이지 마.”“왜? 마음이라도 아파? 안 좋아한다며? 그리고 난 솔직히 이해가 안 가. 어떻게 나랑 헤어지고 그런 남자를 곁에 둘 수가 있지? 곽동현의 뭐가 그렇게 좋은데?”임유진이 또 한 번 곽동현을 두둔하자 강지혁은 기분이 언짢았다.‘동현 씨는 최소한 나한테 진심이었고 나를 존중해줬어. 그리고 동현 씨와 함께라면 또 언제 버려질까 전전긍긍할 필요도 없겠지.’임유진은 목구멍까지 차오른 이 말을 꾹 삼켰다. 괜한 소리로 곽동현에게 피해를 줄 수는 없었으니까.“다시 한번 말하지만 나 그 사람 안 좋아해. 일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만났을 뿐이야.”임유진은 그와 눈을 마주한 채 차분한 말투
손목에 남은 붉은색 자국이 마치 불타오르는 것처럼 뜨거웠다.임유진은 눈을 감을 때마다 이 자국 위에 입을 맞췄던 강지혁이 떠올라 미칠 것 같았다....3일 뒤, 탁유미는 아침 일찍 일어나 아직 자고 있는 윤이 얼굴을 바라보았다.아이가 자라는 모습을 이렇게 옆에서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벌써 꽉 차는 기분이다.돌이켜보면 그때 아이를 지우지 않은 건 세상에서 제일 잘한 일이었다. 물론 아이 때문에 두 배로 더 힘든 시기를 보내야 했을 때도 있었지만 지금에 와서 보니 그 모든 것이 다 그만한 가치가 있었다.그때 탁유미 엄마가 방으로 들어왔다. 그녀는 세상을 다 가진듯한 얼굴의 딸을 보더니 피식 웃고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유미야, 짐 정리는 이제 끝이야. 어차피 오후에 출발할 거니까 지금 좀 자 둬.”“잠이 안 와요.”탁유미는 고개를 저었다.“이따가 이삿짐센터도 오기로 했잖아요. 슬슬 일어나야죠.”“G 시에 가게 되면 가게도 새롭게 시작해야 하는데... 아무래도 조금 걱정이 되네.”탁유미 엄마의 얼굴은 근심과 걱정으로 가득했다.‘윤이 식당’이 대단히 장사가 잘됐던 것은 아니지만 이제는 어느 정도 단골손님도 많아졌기에 수입이 대체로 안정적이었다. 하지만 G 시로 가게 되면 모든 걸 다시 처음부터 구축해 나가야 하니 걱정하지 않을 수가 없었을 것이다.“이곳에서 자리 잡았던 것처럼 거기서도 열심히 하면 되죠. 걱정하지 마세요, 엄마, 우리 세 식구 분명히 괜찮을 거예요.”탁유미 엄마는 씩씩한 딸을 보며 마음이 미어졌다.“나는 네가 행복했으면 좋겠어.”“엄마랑 윤이가 있는데 내가 행복하지 않을 이유가 없잖아요.”탁유미는 자신의 엄마를 꼭 끌어안아 주었다.이곳을 떠나는 건 다른 게 아닌 ‘행복’해지려고 가는 것이다....커다란 연회 홀에서는 지금 파티가 열리고 있었다.이경빈은 오늘 이곳에서 공수진과의 결혼 날짜를 발표할 예정이다.전에는 단지 애인 사이인 것만 알렸다면 오늘은 확실히 두 사람이 맺어지게 된다는 일종의 서약과도 같았
“아빠가 이따 결혼 날짜 발표는 경빈 씨가 하는 게 좋겠대요.”“그래.”공수진이 원하는 거라면 다 해줄 수 있다.“그리고 이따 음악이 흐르면 나랑 같이 춤춰요.”“그래.”그때 휴대폰 진동이 울렸고 이경빈은 발신자를 힐끗 보더니 미간을 찌푸렸다. 그러고는 공수진에게 전화 한 통만 하고 오겠다며 연회장 구석 쪽으로 갔다.그에게 걸려온 발신 번호는 탁유미를 감시하려고 보낸 사람의 번호였다.그런 그에게서 연락이 왔다는 건 탁유미 쪽에 급한 일이 생긴 게 분명했다.통화 버튼을 누르고 상대방의 말을 듣던 이경빈의 얼굴색이 급속도로 변해버렸다.“대표님, 탁유미 씨가 3시 45분 출발의 KTX 승차권을 구매한 것이 확인됐습니다. 아무래도 S 시를 떠나려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그리고?”“혼자가 아닙니다.”혼자가 아니라고?탁유미에게는 어머니가 있고 전에 출소했을 때도 어머니와 함께 사라졌었다.그래서 같이 있는 건가?“아들이 한 명 있습니다.”그 말에 이경빈은 하마터면 휴대폰을 놓칠 뻔했다.“뭐라고?”“3, 4살 정도 되는 아들이 한 명 있습니다.”아들? 탁유미에게 아들이라니?!이경빈은 머리가 새하얘졌다.“대표님, 이제 어떡할까요. 못 떠나게 잡을까요, 아니면 이대로 보낼까요?”이대로 그녀가 S 시를 벗어나게 되면 다시 찾는데 또다시 시간이 걸리게 된다.그때 연회장의 조명이 하나둘 꺼지더니 감미로운 음악 소리가 흘러나왔다.공수진은 그와 춤을 추기 위해 이경빈의 옆으로 걸어갔다. 그녀는 오늘 두 사람이 함께 춤을 추는 사진을 위해 특별히 기자까지 섭외해 두었다.그리고 오늘이 지나면 그간 인터넷에서 떠돌던 그녀를 향한 동정의 시선들이 단번에 사라지게 될 것이다.하지만 그녀가 막 입을 열려던 찰나, 이경빈이 휴대폰에 대고 소리를 질렀다.“떠나지 못하게 당장 잡아! 그리고 내가 갈 때까지 절대 놓치지 말고!”춤을 추기로 약속했던 남자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연회장 밖으로 뛰쳐나갔다.“경빈 씨!”당황한 그녀가 자신도 얼른 따라나
“모르겠어요, 나도...”공수진은 입술을 꼭 깨물고 대답했다.이경빈이 이상해진 건 전화를 받고 나서부터였다. 대체 그건 누구에게서 결려온 전화일까? 누굴 잡으라고 한 거지?그녀는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 알 길이 없었다.“혹시 우리 수진이와의 결혼을 원하지 않아서 떠난 건 아닐까요...?”공수진 엄마가 걱정 가득한 얼굴로 물었다.공수진의 집안은 원래 소소하게 중소기업을 운영했었지만 요 몇 년간 이씨 가문의 지지를 받으며 회사가 빠르게 성장해 공씨 가문은 어느새 상류층 가문에 낄 수 있게 되었다.세간에서는 그들을 이씨 가문을 이용해 자신의 지위를 올리려는 기생충 정도로밖에 생각하지 않았다.그러니 만약 두 사람의 결혼이 깨지기라도 하면 공씨 가문은 계속해서 비난을 받을 것이며 여차하면 예전으로 돌아가게 될 수도 있다.“결혼 날짜도 이미 다 받아왔는데 무슨. 당신은 재수 없는 소리 좀 하지 마.”공수진의 아빠가 호통을 쳤다. 그러고는 두 명을 향해 조용히 속삭였다.“지금 사람들 많은 거 안 보여? 태연한 척해. 아무 문제 없는 것처럼.”공수진의 부모는 억지 미소를 지으며 손님들에게 웃어 보였다.그리고 공수진은 입술을 깨물며 이경빈이 사라진 연회장 입구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아까 그는 마치 그녀 따위 보이지 않는 듯 화를 내며 뛰쳐나갔다.이 자리가 어떤 자리인지 알면서도 그는 사라져버렸다.대체 누굴까? 대체 누가 이경빈을 이곳에서 사라지게 만든 걸까?강한 불안감이 공수진을 감쌌다.탁유미는 지금 이삿짐센터 직원분과 얘기를 나누고 있다. 그리고 모든 짐이 차량 위에 실린 걸 본 뒤에야 엄마와 아들을 바라보았다.“엄마, 짐은 이제 됐으니까 일단 식사부터 하고 천천히 출발해요.”윤이는 예쁜 두 눈을 깜빡이며 물었다.“엄마, 그럼 우리 이제 S 시로는 안 돌아오는 거예요?”“음...”탁유미는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몰랐다.언제까지 이경빈의 눈을 피해 살아야 하는지 그녀도 몰랐으니까.“이제 윤이가 크면 윤이 좋아하는 곳으로 가자.”
탁유미 엄마는 분노가 치밀어 올라 한숨이 절로 나왔다.공수진과 비교하면 자신의 딸은 처지가 너무나도 기구했다.“엄마! 윤이 듣겠어요.”탁유미 엄마는 그제야 입을 꾹 닫았다.다행히 윤이는 지금 다른 곳에 정신이 팔려 두 사람의 대화는 듣지 못한 모양이었다.시간은 천천히 흘러갔고 탁유미는 점점 더 불안해졌다. 심지어 지금 당장 엄마와 아이를 데리고 열차에 오르고 싶은 충동도 일었다.그런 그녀의 마음을 알아주기라도 한 듯 마침내 안내방송이 들려오고 전광판에는 그들이 타게 될 열차 옆에 빨간색 승차 준비 등이 깜빡였다.하지만 그때 하필이면 윤이가 화장실을 가고 싶다고 했고 탁유미는 어쩔 수 없이 그를 데리고 화장실로 갔다.“엄마, 나 윤이 데리고 화장실 갔다 올게요.”“늦지 않게 빨리 와.”“알겠어요.”그녀는 윤이를 혼자 남자 화장실로 보낼 수는 없었기에 아이를 데리고 여자 화장실 안으로 들어갔다.그리고 볼일을 보게 한 다음 아이의 손을 깨끗하게 씻어주었다.“엄마, 혹시 무서워요?”막 나가려는데 아이의 입에서 뜻밖의 말이 흘러나왔다.탁유미는 윤이와 눈을 마주치며 물었다.“왜 그렇게 생각해?”“엄마 얼굴이 지금 딱 악당을 마주치기 직전의 얼굴이에요.”윤이는 요즘 히어로물 애니메이션에 푹 빠져 있었다탁유미는 그 말에 웃을 수가 없었고 동공이 심하게 흔들렸다.아이도 알아챌 수 있을 만큼 그렇게 얼굴에 티가 탔나?“엄마, 내가 엄마 지켜줄 테니까 무서워하지 말아요!”그녀는 눈가가 젖어오는 것을 느끼고는 자기도 모르게 아이를 꼭 끌어안았다.“응, 엄마 이제 안 무서워.”그녀에게 있어 윤이를 낳은 건 정말 최고로 잘한 일일 것이다. 이토록 사랑스러운 아이를 만날 수 있을 거라고는 상상이나 했을까?탁유미는 아마 윤이를 위해서라면 뭐든지 할 것이다.그때 안내방송이 한 번 더 울리고 탁유미는 그제야 아이를 데리고 화장실에서 나왔다.하지만 몇 걸음 채 떼기도 전에 그녀는 다시 제자리에 굳어버렸다.몸은 덜덜 떨리고 얼굴은 새하얗게 질렸다
이경빈은 자신의 두 눈으로 직접 확인해 보고 싶었다. 아이는 대체 어떻게 된 건지.하지만 막상 아이를 보고 나니 또 한 번 놀랄 수밖에 없었다.전에 한 번 만난 적 있는 아이였기 때문이었다.그때 이상할 정도로 아이가 신경 쓰이고 심지어는 후원까지 하고 싶더라니... 그게 그녀의 아이였을 줄이야...이경빈은 허리를 숙이더니 자신과 닮은 듯한 눈매를 가진 아이를 가만히 바라보았다.“너... 이름이 뭐야?”그의 목소리는 잠겨있었다.“‘탁윤’이에요. 그런데 다들 윤이라고 불러요.”윤이는 이경빈을 향해 활짝 웃었다.그리고 이경빈은 그 미소를 보며 왜 그때 이 아이가 이상하리만큼 신경이 쓰였는지 이제야 알 것 같았다.웃는 얼굴이 탁유미와 똑 닮아있었기 때문이다.탁윤...“아빠는... 어디 있어?”그의 목소리가 언뜻 떨리는 것 같기도 했다.그 질문에 아이의 얼굴은 갑자기 시무룩하게 변했다.“없어요. 엄마가 그러는데 아빠는 하늘나라로 갔대요.”하늘나라?이경빈은 아이를 단숨에 안아 들더니 창백한 얼굴로 서 있는 탁유미의 앞으로 다가갔다.“아이... 이리 줘.”그녀의 목소리는 티 나게 떨려있었다.“소란 피우고 싶은 게 아니라면 조용히 따라와.”이경빈의 싸늘한 시선에 탁유미는 몸이 움찔 떨렸다.꼼짝없이 잡힌 걸까? 윤이까지 들켰으니 이제 벗어나긴 힘든 걸까?아이의 존재를 그렇게 숨기고 숨겼는데 결국에는 들켜버렸다.그녀는 지금 할 수만 있다면 무력을 써서라도 아이를 그의 품에서 빼앗아 오고 싶었다. 하지만 천진난만한 윤이의 얼굴을 보고 있자니 그럴 마음이 싹 사라져버렸다.윤이한테는 어른들의 더럽고 추악한 세계를 절대 보여주고 싶지 않았으니까.“알았어... 갈게.”그녀가 입술을 꽉 깨물고 마지못해 답했다.“엄마, 우리 어디 가요? 기차 안 타요?”아이가 그녀의 말을 듣고 물었다.“윤이야, 우리 기차는 다음에 타고 오늘은... 아저씨랑 다른 곳으로 갈까?”“할머니는요? 할머니는 같이 안 가요?”이에 탁유미는 자기도 모르게 엄마가
탁유미는 한숨을 깊게 들이켜고 이경빈과 함께 차에 올라탔다.그때 탁유미의 휴대폰이 울리고 발신자를 보니 엄마였다.통화버튼을 누르니 전화기 너머로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너 지금 어디 있어? 왜 아직도 안 와?”“엄마, 나랑 윤이 못 가요. 엄마 먼저 근처에서 방 잡고 있어요.”“뭐? 무슨 일 있는 거야?”탁유미가 대답하려는데 마침 이경빈과 눈이 마주쳤다. 그녀가 어떻게 대답하는지 보려는 듯 그의 입가에는 싸늘한 미소가 걸려있었다.그리고 두 사람 사이에 있던 윤이도 고개를 들고 그녀를 바라보았다.이렇게 보니 윤이의 눈이 이경빈과 많이 닮아 있었다. 아니, 점점 닮아가는 건가?“나랑 윤이, 지금 이경빈이랑 같이 있어요.”탁유미가 담담하게 얘기했다.그러자 ‘헉’하는 소리가 들려왔다.“윤이를... 본 거야? 그럼... 너한테...”탁유미 엄마는 말까지 더듬었다.“걱정하지 마세요, 엄마. 내가 알아서 해결할게요.”탁유미는 그 말을 끝으로 전화를 끊어버렸다.“알아서 해결해?”그때 이경빈이 입을 열었다.“뭘 알아서 해결한다는 건지 궁금하네.”싸늘한 그의 목소리에 탁유미는 물론이고 두 사람 사이에 있던 윤이도 깜짝 놀라 몸을 움찔 떨었다.하지만 아이는 이내 고개를 들더니 이경빈을 향해 말했다.“아저씨, 우리 엄마한테 그런 식으로 말하지 마세요. 엄마 무서워하잖아요.”아이는 탁유미와 이경빈이 무슨 얘기를 하는 건지는 몰랐지만 일단 엄마가 무서워한다는 건 확실히 느껴졌다.윤이는 그녀를 지켜주려는 건지 이경빈과 시선을 마주치고는 등 뒤에 있는 탁유미의 손을 꽉 잡았다.이에 이경빈은 하려던 말을 다시 집어삼켰다.전에는 생글생글 잘도 웃어주더니 지금은 탁유미 때문에 볼을 부풀리고 그를 노려보고 있었다.정말 자신의 아이가 맞는 걸까?차로 오는 길 아무리 부정하려고 해봐도 올곧게 부딪혀오는 눈빛이 자신과 너무나도 비슷해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하지만 대체 언제 임신한 거지...?“너 몇 살이야?”윤이는 눈을 깜빡거리더니 손가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