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윤이는 탁유미가 선물을 준비하는 걸 보며 호기심에 물었고 그때 그녀가 7월 22일이 임유진의 생일이라고 알려줬다.윤이는 아마 그 뒤로 계속 임유진의 생일을 마음에 두고 있었던 것 같다.하지만 생각해보면 탁유미와 탁유미 엄마를 제외하고 임유진만큼 윤이를 잘 대해줬던 사람이 또 없었으니 윤이가 그녀에게 애정을 보이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나도 이모한테 선물 주고 싶어요."아이의 진지한 표정에 탁유미가 눈을 깜빡였다.그녀는 임유진이 윤이를 도와준 일들이 떠올랐다. 임유진이 아니었으면 윤이는 이렇게 빨리 회복도 못 했을 것이고 좋은 치료도 받지 못했을 것이다.하지만 백화점 안에는 사람이 너무 많아 선물을 고르는 데 시간이 걸리고 얼굴이 노출될 위험도 커지게 된다.이경빈은 아직 S 시에 있고 그가 만약 윤이를 보기라도 한다면...탁유미는 저도 모르게 몸을 부르르 떨었다.몇 년도 지난 일이지만 그 남자의 얼굴을 떠올리면 그때의 고통이 되살아나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한때 가장 사랑했던 남자가 남기고 간 흉터가 말이다."엄마!"윤이는 고개를 쳐들고 간절히 원하는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어지간히 선물을 고르고 싶은가 보다.탁유미는 잠깐 망설이나 싶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알았어. 대신 빨리 골라야 해.""네!"탁유미는 아들의 손을 잡고 백화점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그녀는 오랜만에 보는 명품 브랜드를 보며 조금 쓸쓸한 마음이 들었다. 이경빈의 여자였을 때 그녀는 그에게서 셀 수도 없이 많은 브랜드 옷과 가방을 선물 받았다.탁유미가 원하는 거면 이경빈은 주저하지 않고 사다 주었다. 그때의 그녀는 이게 사랑인 줄 알았다.하지만 물질로 쌓아 올린 감정은 사랑이 될 수 없었고 거기에 진심은 조금도 담겨있지 않았다.그리고 그녀가 이걸 깨달았을 때는 이미 너무 늦어버렸다.윤이는 탁유미의 손을 잡고 3층 여성 브랜드 매장으로 향했다.사실 아이는 사고 싶은 것이 하나 있었는데 그건 바로 유리 구두였다. 얼마 전 공원에서 산
이경빈이다!그는 슈트 차림에 예전처럼 머리를 깔끔하게 위로 올렸고 잘생긴 얼굴은 단지 옆모습만으로도 탁유미의 심장을 아프게 했다.그는 마치 세월을 혼자 비껴간 사람처럼 여전히 가슴 떨리게 잘생겼다. 하지만 그에 반해 탁유미는 만신창이가 되었고 예전 모습은 찾아볼 수가 없었다.그때 그녀의 시선을 느끼기라도 한 듯 이경빈이 그들 쪽으로 고개를 돌렸고 탁유미는 홱 하고 고개를 돌리더니 이내 아들을 안고 비상계단 쪽으로 뛰어갔다."손님, 손님?"매장 직원은 얼떨떨한 표정을 지으며 탁유미를 향해 외쳤다.에스컬레이터에 타고 있던 이경빈은 그 찰나의 시간 동안 누군가가 황급히 도망가는 걸 본 후 얼굴이 급속도로 굳어졌다.그러고는 미친 듯이 에스컬레이터로 내려가 그녀가 달려간 곳으로 뛰어갔다. 한편, 이경빈 뒤에 있던 일행들은 평소 침착하고 여유롭기로 유명한 자신들의 대표가 갑자기 이성을 잃은 듯 뛰어가는 걸 보고 입을 다물지 못했다.이경빈의 경호원 두 명도 잠시 황당해하고 있다가 곧바로 이경빈을 따라갔다.이경빈는 지금 눈에 뵈는 게 없었고 오직 여자의 뒷모습만 눈에 아른거렸다.그 여자다! 그 여자가 틀림없다!분명히 칙칙한 옷을 입고 머리는 대충 위에 포니테일로 묶은, 그의 기억 속 여자와는 너무 다른 모습이었지만 달려가는 그녀의 뒷모습을 보는 순간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그 여자라고! 그리고 아까부터 거세게 뛰기 시작한 이 심장도 그녀가 맞다고 외치고 있는 듯했다.탁유미!몇 년간 머릿속에서 지워지지 않는 그 이름. 그녀의 눈물이, 그녀의 마지막 말이 시도 때도 없이 떠올랐다.탁유미는 감옥에 들어간 거로 모든 게 끝났다고 생각했겠지만, 절대 아니었다.그와 그녀는 절대 이대로 끝이 날 수가 없는 사이이고 그녀가 빚진 건 모두 찾아와야만 했다.하지만 출소 후 탁유미는 마치 증발이라도 한 것처럼 사라져버렸고 사람을 풀어도 봤지만, 여전히 아무런 수확도 없었다.그런데 S 시에 있었다니!이경빈이 1층으로 내려왔을 때 그녀는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엄마?"윤이는 택시에 올라탄 후에야 탁유미를 불렀다. 이모 선물을 고르고 있을 때 엄마가 왜 갑자기 자신을 안아 들고 허겁지겁 뛰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분명히 무슨 이유가 있을 거로 생각해 택시로 향하는 길 그는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아까는 엄마가 보고 싶지 않은 사람과 마주치는 바람 그만 윤이 생각도 안 하고 뛰어버렸네. 이모 선물은 엄마랑 다음에 와서 살까?" 탁유미의 말에 윤이는 착하게도 고개를 끄덕여주었다."엄마가 보고 싶어 하지 않는 사람은 나쁜 사람이에요?"그 말에 탁유미의 코가 시큰해졌다. 윤이가 지금보다 더 어릴 때 자신의 아빠에 관해 물은 적이 있었다. 그럴 때면 그녀는 항상 아이에게 아빠는 하늘에 있다고 대답했다.윤이가 언제 하늘에 있다는 의미를 알아챌지 그녀는 모른다. 하지만 아까 아빠가 불과 몇십 미터도 안 되는 거리에 있었다는 걸 말하면 안 된다는 사실만은 똑똑하게 알고 있다.너희 아빠는 너의 존재를 반가워하지도 않고 네가 있는 것도 모른다는 사실을 이 어린아이에게 어떻게 전할 수 있을까."엄마, 왜 울어요?"자그마한 손이 탁유미의 얼굴을 매만지며 그녀를 위로했다.탁유미는 그제야 자신이 울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엄마, 울지 마세요. 윤이 말도 잘 듣고 빨리 말도 배우고 앞으로 공부도 열심히 할게요."윤이는 그녀가 자신 때문에 속상해하는 거라고 생각했다.아직 듣지 못하던 시절 탁유미는 항상 그를 껴안고 울었고 외할머니와 얘기를 나눴다. 입술 모양으로밖에 추측할 수 없었지만 아마 아이의 귀가 안 들린다는 것 때문에 속상한 듯 보였다.그러다 수술을 성공적으로 마친 후부터 탁유미는 슬퍼하는 일이 적어졌고 매일매일 그에게 미소를 지었다.윤이는 엄마가 슬퍼하는 게 싫었기에 열심히 말을 배워서 엄마를 즐겁게 해주고 싶었다.또래 애들보다 빨리 철이 든 듯한 아이를 보며 탁유미는 마음이 아팠다."응, 엄마 이제 안 울게. 그리고 엄마는 앞으로도 계속 윤이 옆에 있을 거야."그녀는 평생을 윤이 옆에 있고 싶었지만, 자꾸만
임유진은 지금 병원 앞에 서 있다. 그녀는 아직도 이 선택이 맞는지 감이 서지 않았다.정말 잃어버린 기억이라면 되찾고 나서는 어떻게 되는 거지? 강현수와는 어떤 사이가 되는 거며 강지혁은 또다시 불안해하는 걸까?정말 기억을 찾는 게 맞을까? 아니면 영원히 묻어두는 게 더 좋으려나?또 혹은 앞으로 강현수와 일정한 거리만 유지한다면 이 두통도 자연스럽게 괜찮아지는 건 아닐까?"유진 씨!"그때 한 여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들어보니 임유진은 어느새 안은영 의사 진료실 앞에 도착했고 방금 그녀의 이름을 불렀던 사람은 바로 어제 안은영 선생님 옆에 있던 간호사였다."안 선생님께서 오늘 급하게 볼일이 있으시다고 출근을 못 했어요. 여기까지 헛걸음하게 해서 죄송해요."간호사는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급한 사정이라 그런지 유진 씨에게 미처 얘기도 못 했다고 하더라고요."그 순간 임유진은 왠지 홀가분해진 느낌이 들었다.안은영 의사가 없다는 건 적어도 오늘은 최면 치료를 안 해도 되는 것이고 기억을 되찾을 걱정 역시 안 해도 된다는 것이다.‘뭐? 걱정?’그녀는 지금 기억을 되찾는 걸 두려워하는 건가?기억을 되찾고 나면 모든 일이 복잡하게 돌아가고 더 혼란스러워 질까 봐?그녀는 마음속 깊이 이 기억은 되찾지 않는 게 좋겠다고 이미 여기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임유진은 고개를 숙인 채 다시 엘리베이터 쪽으로 걸어갔다.그리고 막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르려는데 갑자기 누군가가 그녀의 팔을 잡고 비상계단으로 데려갔다.이곳은 사람들이 자주 드나들지 않는 곳으로 주위가 고요한 것이 마치 다른 세상에 온 듯했다."강현수 씨?!"임유진은 어이없고 놀란 표정으로 눈앞에 있는 남자를 바라봤다.비상계단 쪽에는 오직 작은 창문으로 들어오는 빛밖에 없었고 강현수는 그녀에게 표정을 들키기 싫은 듯 빛을 등진 채 서 있었다."여기는 왜 왔어요? 최면은 왜 하려고 하는데요?"강현수의 다급한 외침에는 절박함이 서려 있었다.모든 걸 다 알고 있는 듯한 그의 말에 임
임유진의 침묵에 강현수는 이제 확신이 들었다."정말 뭔가를 잊어버린 거야? 그리고 그게 나와 관련 있는 일이고?"임유진은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뭔가 오해가 있는 것 같네요. 나는 그저 최면을 통해 다른 증세를 치료하려고 온 것뿐이에요. 강현수 씨도 알다시피 난 3년 동안 감옥에 있었고 불안증세가 조금 있어요."강현수는 그녀를 꿰뚫어 보듯 눈을 마주치고 물었다."당신이 불안증세가 있다고?"임유진은 그의 눈을 피하지 않고 답했다."네."강현수는 잘생긴 얼굴을 그녀의 얼굴 가까이 가져다 댔다."다시 한번 물어볼게. 그때 전시회에서 내 손 잡고 했던 말 뭐였어? 왜 날 구해준 그 아이와 똑같은 말을 했냐고!""그때도 말했지만 별다른 뜻은 없었어요. 그저 헛소리일 뿐이라고요."임유진은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고 대꾸했다."하, 헛소리라고?"강현수가 코웃음을 쳤다."그때 너는 내 손을 잡고 절대 이 손 놓지 않을 거라고, 반드시 날 데리고 올라갈 테니 이 손 꽉 잡으라고 했어! 헛소리를 어떻게 해야 이런 말이 나와? 그리고 날 어디로 데려가려고 했던 건데?"그의 질문들은 날카로운 비수가 되어 그녀의 심장을 찔렀고 임유진은 가슴이 답답해 나며 숨조차 쉬기 힘들었다.강현수는 서서히 그녀와의 거기를 좁혔고 임유진의 등은 어느새 벽에 부딪혔다.그녀는 본능적으로 손을 올려 그를 밀치려고 했지만, 강현수에 이해 두 손 모두 벽에 포박되었다."강현수 씨, 지금 뭐 하는 거예요? 이거 안 놔요?!"임유진이 아무리 저항해 봤자 남자의 힘은 당해낼 수가 없었다."임유진, 날 구해준 걸 인정하는 게 그렇게 힘들어?!"강현수가 울부짖었다.천하의 강현수가, 평생 사람 위에 군림했던 남자가 지금은 한 여자 때문에 애원하고 있었다.임유진은 발버둥 치는 걸 멈추고 고개를 들어 눈앞에 있는 남자를 바라봤다. 거리가 좁혀진 덕에 드디어 그의 얼굴이 제대로 보였다.눈가가 빨갛게 부어오른 그는 지금 죄인을 보듯 그녀를 노려보았다.하지만 그 눈빛 속에는 억울함도
임유진은 숨을 깊게 들이쉰 후 더는 몸부림치지 않고 되레 차분해졌다.“강현수 씨를 구해준 사람은 여진 언니 아닌가요? 이 점은 현수 씨가 직접 조사했겠는데 되레 나한테 이렇게 묻는 게 웃기지 않아요?”그녀는 강현수에게 찬물을 끼얹었다. 순간 강현수의 낯빛이 창백해졌다.“강현수 씨 추측이 너무 황당하다고 생각되지 않으세요? 여진 언니가 이 자리에서 방금 현수 씨가 한 질문을 들었다면 어떤 기분이었을까요?”강현수는 충혈된 두 눈으로 임유진을 빤히 쳐다봤다. 그가 조사한 바로 모든 단서가 배여진을 지목하고 있다.그녀야말로 강현수가 찾는 사람이라고 모든 단서가 알려주고 있다.하지만 왜? 강현수는 여전히 눈앞의 이 여자말로 어릴 때 그 소녀 같은 걸까? 외모 때문에? 아니면 그녀가 가끔 내비치는 그런 눈빛 때문에?뭇사람들에게 짓밟혀도 여전히 남아있는 오만함과 정의에 대한 동경과 추구... 그런 모습들이 너무 닮아있었다!“너 정말... 아니야?”간단한 물음이지만 그의 입에서 내뱉기가 너무 어려웠다.“나 아니에요.”임유진이 대답했다.강현수는 불쑥 가볍게 웃었다.“그러게. 너 아니지. 너 아니야...”단지 이 팩트가 마치 그를 얼음물에 잠가놓은 것처럼 뼛속까지 춥게 했다.대체 왜? ‘나 아니에요’라는 말을 들었을 때 왜 이렇게 괴로운 걸까? 마치 심장을 도려내는 것처럼 죽도록 아팠다.강현수는 죽을힘을 다해 이성의 끈을 잡고 그녀의 손목을 놓아주었다.꽉 잡았던 열 손가락에 서서히 힘을 풀자 임유진도 그제야 구속에서 벗어나 황급히 비상구 쪽으로 걸어갔다.강현수는 온몸에 힘이 쫙 풀려서 초췌한 몰골로 벽에 기대 쓴웃음을 지었다.결국 그녀가 아니었다. 이 모든 건 강현수가 제멋대로 추측한 일이다.어릴 때 그를 구해준 사람은 배여진이다. 더 이상 의심할 여지가 없지 않은가?!...임유진은 황급히 병원을 나섰지만 마음은 줄곧 침울했다.그녀는 이미 결정을 내렸다.강현수에게 자신이 그 소녀가 아니라고 말했을 때 실은 그 꿈에 대한 진실도 인제 그
“왔어? 병은 잘 보였어? 의사가 뭐래?”강지혁이 물었다.“그럭저럭 괜찮대.”임유진은 잠시 생각하다가 대답했다.“그 두통은 나중에 내가 또다시 머리 아프다고 하면 네가 대신 의사 선생님 소개해줄래?”강지혁의 두 눈이 살짝 반짝였다.“그래.”“그나저나 너 언제부터 케이크 만드는 데 관심 가졌어? 이걸 배운 계기가 뭐야? 얼마나 배웠어?”임유진은 물으면서 고개 숙여 강지혁이 데코한 케이크를 자세히 관찰했다.문외한인 그녀가 볼 때 나름 데코가 괜찮았다. 빵집에서 파는 케이크랑 거의 비슷했다.“강지혁 씨는 습득 능력이 매우 빨라요. 한 번만 가르치면 바로 요령을 장악해요.”옆에 있던 제빵사가 칭찬을 남발했다.“자, 오늘은 여기까지만 할게요. 먼저 나가보세요.”강지혁이 제빵사에게 말했다.제빵사는 머리를 끄덕이고 주방을 떠났다.문득 커다란 주방에 임유진과 강지혁 두 사람만 남았다.“누나는? 오늘 병원 간 것 말고 또 다른 일은 없었어?”강지혁이 담담하게 물었다.분명 다 알면서, 그녀가 왜 병원에 갔는지 다 알면서, 게다가 병원에서 강현수와 마주친 것도 다 알면서 기어코 그녀 입에서 모든 얘기를 듣고 싶었다.거만일까 자존심 때문일까? 또 혹은... 그녀가 어떠한 일도 숨김없이 그에게 토로하길 바라는 마음일까?임유진은 살짝 불편한 기색이 스쳤지만 곧바로 웃어넘겼다.“딱히 특별한 일은 없었어. 아 참, 너 왜 집에서 케이크 만들어? 지금 이 시간대는 회사에 있어야 하는 거 아니야?”그녀는 화제를 돌렸다.“누나가 말했잖아. 생일에 케이크 갖고 싶다며. 미리 배워둬야지.”그의 긴 속눈썹이 살짝 떨리면서 그 안에 드리워진 짙은 눈빛을 전부 가렸다.임유진은 두 눈을 깜빡거렸다.“그러니까 지금... 내 생일 때 직접 케이크를 만들어주려고?”“마음에 들어?”강지혁이 물었다.“나도 오늘 막 배우기 시작했어. 누나 생일 땐 제대로 된 케이크를 만들어야겠는데.”임유진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그가 자신을 사랑하는 건 알고 있지만 직접 케이
그는 묵묵히 그녀를 바라보다가 가볍게 웃었다.그 미소는 마치 눈 녹은 봄날의 산처럼 아름다워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그래, 유진아. 난 널 믿어.”강지혁이 넌지시 대답했다.그는 태생이 의심이 많은 사람이라 누군가를 진정 믿어본 적이 없다.다만 지금 이 여자가 하는 말은 전부 믿고 싶다. 그녀는 배신하지 않을 테니까. 그의 마음을 저버리지 않을 테니까!그렇다면 유진의 말을 믿으면 된다. 강현수와 둘 사이에 아무 일도 없다고 믿으면 된다! 그 또한 아빠의 길을 반복하지 않을 거로 믿으면 된다!강지혁은 몸을 살짝 기울이고 그녀의 입술에 키스했다.임유진의 부드러운 키스와는 달리 그의 키스는 매우 거칠었다. 그녀의 스윗함을 전부 앗아갈 것처럼 거칠기 그지없었다.그렇게 거칠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너무 부드러웠다.이 부드러운 느낌은 오직 그녀에게만 선사한다!키스를 마친 후 임유진은 제대로 서 있지도 못하고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왜? 더 하고 싶어?”강지혁이 씩 웃었다.순간 임유진의 볼이 더 빨개졌다.그녀는 재빨리 화제를 돌렸다.“너... 전에도 케이크 데코레이션 배운 적 있어? 엄청 숙련된 솜씨던데.”그는 한눈에 그녀의 속내를 알아챘지만 묻는 말에 고분고분하게 대답했다.“아니, 오늘 금방 배웠는데 꽤 재밌더라고.”“...”강지혁은 천재다. 인정을 안 할 수가 없다. 비즈니스에 대한 안목이 예리하고 결단력이 있을뿐더러 이젠 케이크까지 잘 만든다.“사실 데코 그렇게 어렵지 않아. 금방 배워.”강지혁이 대답했다.금방 배운다고? 임유진은 살짝 의아했다. 강지혁은 생크림을 조금 짜서 간단한 플라워를 만든 게 아니라 장미꽃을 만들었다고!“내가 가르쳐줄게. 한번 해봐.”그가 제안했다.임유진도 은근 도전하고 싶었다. 마침 또 주방에 케이크를 만들 재료가 다 있으니 따로 준비할 필요가 없다.강지혁은 그녀 앞에서 아주 천천히 케이크 데코레이션을 했다. 동작마다 일부러 속도를 늦춰 그녀가 자세히 관찰하고 배울 수 있게 도와줬다.사실 과정
강지혁은 수저를 들고 그녀가 해준 음식을 하나둘 입에 넣었다.분명히 흔히 볼 수 있는 가정 요리고 손에 들고 있는 것도 포크나 나이프가 아닌 그저 숟가락과 젓가락일 뿐인데 상대가 강지혁이라 그런지 꼭 고급스러운 레스토랑에서 식사하고 있는 것 같았다.임유진은 원래 강지혁이 밥을 다 먹은 뒤에 오늘 있었던 일을 얘기하려고 했다. 하지만 강지혁이 밥을 먹으며 먼저 선수를 쳐버렸다.“오늘 하마터면 떨어지는 화분에 다칠 뻔했다는 얘기 들었어. 무사해서 다행이야. 내일부터는 경호원을 두 명 더 붙여줄게.”임유진은 그 말에 눈을 두어 번 깜빡이며 어리둥절해 하다 이내 남편이 강지혁이라는 것을 깨닫고 납득했다는 표정을 지었다.아마 일이 터지고 5분도 안 돼 바로 강지혁에게 보고가 들어갔을 테니까.“응, 알겠어.”임유진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누가 화분을 떨어트린 건지 알아봐 달라고 했어. 아직 따로 연락이 오지는 않았지만.”“청소부가 한 짓이야.”“청소부?”임유진이 깜짝 놀라며 물었다.“벌써 조사를 마쳤어?”“당연한 거 아니야? 네 일인데.”만약 임유진의 몸에 생채기라도 났으면 강지혁은 아마 이성을 잃고 건물 전체를 폭파하고 관계자들까지 다 처리해버렸을 것이다.강지혁은 갑자기 젓가락을 내려놓더니 임유진의 양손을 덥석 잡았다.그녀의 손가락은 여전히 삐뚤빼뚤했다.임유진의 손을 이렇게 만든 사람은 진세령이고 소민준은 당시 진세령의 곁에서 가만히 구경만 했다.강지혁은 임유진의 손을 매만지다 문득 1시간 전에 봤던 청소부의 피범벅이 된 두 손을 떠올렸다.그는 다른 사람의 손은 피가 나든 잔인하게 잘리든 아주 조금의 연민도 들지 않았다. 하지만 임유진의 손은 볼 때마다 가슴이 아프고 또 울컥했다.“왜? 왜 그렇게 봐?”임유진은 강지혁이 손가락을 뚫어지게 보는 게 불편한지 손을 뒤로 빼며 거두어들이려고 했다.그녀 역시 다를 것 없는 여자라 사랑하는 사람 앞에서는 자신의 좋은 것만 보여주고 싶었다.“내 손 안 예뻐... 보지 마.”임유진의 손
“그래...”강지혁이 낮게 읊조렸다.“그래야 할 거야.”고이준은 저도 모르게 소민준이 매우 가엽게 느껴졌다. 만약 임유진이 정말 소민준을 동정하면 그때는 지금 하고 있는 택배 기사 일도 못 하게 될지도 모르니까.“고 비서, 누가 저 여자한테 돈을 쥐여주고 유진이를 해할 계획을 세운 건지 알아내.”강지혁이 차가운 목소리로 지시했다.“네, 회장님.”고이준이 얼른 답했다.“그리고 S 시에서 제일 실력 좋은 변호사를 고용해서 유진이와 권건우 변호사 고소 건에 붙여. 김승수한테 지시를 내리는 다른 누군가가 있는 건 아닌지도 한번 알아보고.”고이준에게 김승수의 뒷조사를 맡긴 건 이유가 있었다.임유진이 강지혁의 와이프고 현 강씨 가문의 유일한 안주인인 걸 알고도 고소를 한 건 누가 봐도 이상했으니까. 상식적인 인간이라면 강씨 가문을 상대로 덤빌 리가 없다.게다가 김승수가 억울하다는 당시의 사건을 강지혁도 한번 훑어봤지만 임유진의 말대로 증거가 확실했고 결과 역시 납득 가능한 결과였다.즉 그렇다는 건 김승수에게 다른 목적이 있다는 것이다. 또 혹은 김승수를 뒤에서 조종하고 있는 누군가에게 다른 목적이 있을 수도 있고 말이다.하지만 이유가 뭐가 됐든 임유진을 건드린 이상 강지혁이 손을 놓고 있을 리가 없다. 그에게는 임유진이 목숨줄과도 같은 존재니까.“네, 알겠습니다.”임유진이 강지혁에게 있어 얼마나 중요한 사람인지 고이준은 너무나도 잘 알고 있다. 다만 요즘 따라 부쩍 이상한 위화감 같은 것이 느껴졌다.임유진을 대하는 강지혁의 태도가 꼭 기억을 잃기 전의 강지혁 같았기 때문이다. 꼭 기억을 다 되찾은 것처럼 말이다.강씨 저택.강지혁은 현관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가 마침 임유진과 두 아이들이 거실에서 동요에 맞춰 춤을 추고 있는 모습을 보게 되었다.현이는 흥분한 건지 얼굴이 빨개진 채로 깔깔거리며 춤을 추고 있었고 무뚝뚝하던 율이도 볼을 살짝 붉히며 어색하게 몸을 좌우로 흔들고 있었다.몸만 보면 썩 내키지 않아 하는 것 같지만 미소를 띠고
강지혁은 여자를 무섭게 노려보더니 이내 곁에 있는 경호원에게 지시를 내렸다.“두 번 다시 손에 뭘 들 수 없게 만들어놓고 경찰에 넘겨.”“네, 알겠습니다.”청소부는 그들의 대화에 얼굴이 새하얗게 질려버렸다.‘지, 지금 내 손을 부러트리려는 건가?’그녀는 이런 무서운 인간을 만날 줄 알았으면 차라리 경찰에게 잡히는 것이 더 나았겠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잘못했습니다! 다시는 안 그럴게요! 제가... 제가 알아서 경찰서로 가서 자수하겠습니다. 그러니까 제발...!”하지만 간절한 그녀의 부탁에도 강지혁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점점 더 얼굴이 차가워지기만 할 뿐이었다.사실 청소부는 양손만 부러지는 것에 감사해야 한다. 만약 그녀가 던진 화분으로 임유진이 큰 상처를 입었으면 그때는 양손은 물론이고 몸 전체가 너덜너덜해진 채 죽으니만 못한 삶은 살았을 테니까.“으아아악!!”그녀의 절규와 함께 강지혁은 유유히 현장을 빠져나왔다. 그리고 고이준도 곧바로 그의 뒤를 따라나섰다.바로 앞에 세워진 차량에 올라탄 후 고이준은 곧바로 강지혁에게 자료 하나를 건넸다.“소민준 씨의 지난 5년간 행적입니다. 몇 년 전부터 배달 기사 일을 하는 것으로 확인이 됐고 오늘은 우연히 건물 앞을 지나가다 사모님을 구한 것으로 보입니다. 사모님께서는 감사의 뜻으로 소민준 씨를 병원에 보냈고 손목 골절로 인한 치료 비용을 전액 다 부담해주셨습니다.”강지혁은 어둡게 가라앉은 얼굴로 수중의 자료를 훑어보았다. 차 안의 분위기는 그야말로 얼음장 같았다.“참 기막힌 우연이야. 안 그래?”그때 줄곧 입을 다물고 있던 강지혁의 입에서 뜬금없는 한마디가 흘러나왔다.“네... 네.”고이준은 식은땀을 흘리며 룸미러로 강지혁의 눈치를 봤다. ‘혹시 소민준이 사모님을 구해준 것에 질투라도 하는 건가...?’“CCTV는?”“네, 여기 있습니다.”고이준은 얼른 휴대폰을 꺼내 경호원이 보내준 CCTV 영상의 일부를 틀어 강지혁에게 건넸다.영상 속 소민준은 화분이 떨어짐과 동시에
경비원은 그 말에 시선을 내려 바닥에 떨어진 산산조각이 난 화분을 보고는 그제야 얼른 손을 놓아주었다.임유진은 경호원에게 소민준의 손목을 봐달라고 했고 경호원은 알겠다며 그의 손목을 자세히 살폈다.“사모님, 아무래도 골절인 것 같습니다.”“그럼 지금 당장 병원으로 데려가 치료를 받게 하세요.”“네, 알겠습니다.”그때 휴대폰이 울렸고 임유진은 경호원에게 가보라는 손짓을 한 후 이내 전화를 받았다.무슨 얘기를 들은 건지 그녀는 전화를 받은 지 얼마 안 돼 곧바로 심각한 얼굴을 했다.“네,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통화를 마친 후 임유진은 건물이 아닌 법원으로 향했다.잠시 후, 임유진이 법원에서 나왔을 때 마침 소민준을 병원으로 데려간 경호원으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검사를 받아본 결과 다행히 심각한 상처는 아니고 한 달 정도면 완전히 회복될 거라는 내용이었다.“알겠어요. 치료비는 다 제가 책임진다고 하고 혹시 다른 무언가의 보상을 원하면 저한테 따로 연락 주세요.”“네, 사모님.”임유진은 전화를 끊은 후 휴대폰을 집어넣는 것이 아닌 권건우에게 전화를 걸었다.“스승님, 죄송해요. 아무래도 당분간은 좀 시끄러워질 것 같아요.”“들었다. 김승수가 우리 둘을 고소했다지? 걱정할 것 없어. 우리는 그 사건에 한 점 부끄럼 없이 임했으니까. 그보다 요즘 인터넷에 떠드는 루머 말인데 나야 다 늙어서 그런 건 전혀 신경이 안 쓰인다고 하지만 너는 남편과 재회한 지도 얼마 안 됐는데...”“걱정하지 마세요. 혁이는 스승님과 제 사이 오해 안 해요.”임유진의 말에 권건우는 안심한 듯 미소를 지었다.“그럼 다행이고.”그날 저녁, 임유진이 집에 돌아오자마자 집사가 다가와 말했다.“회장님은 오늘 일 때문에 조금 늦으신다고 먼저 아이들과 식사를 하시라고 하셨습니다.”“네, 알겠어요.”임유진은 대수롭지 않게 고개를 끄덕이며 아이들과 밥 먹을 준비를 했다. 일 때문에 늦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니까.그 시각, 강지혁은 냉기를 풍기며 차가운 시선으로 눈앞
“위험해!”등 뒤로 누군가의 다급한 외침이 들려왔다.임유진은 미처 상황을 파악하지도 못한 채 누군가의 품에 안겨 바닥에 나뒹굴었다. 그녀를 구해준 누군가는 쓰러지는 그 순간에도 양손으로 그녀를 지켜주고 있었다.“사모님!”“사모님!”다급한 발걸음 소리와 함께 경호원과 기사들이 큰소리로 외치며 다가왔다.임유진은 그들의 소리에 그제야 정신을 차렸고 경호원의 부축으로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난 괜찮아요.”그녀는 말을 마치고는 고개를 옆으로 돌려 고개를 숙인 채 자리에서 일어나며 몸에 묻은 먼지를 툭툭 털어내는 남자를 바라보았다.“괜찮으세요? 구해주셔서 정말 감사...”임유진은 말을 하다가 남자가 고개를 드는 것을 보고 저도 모르게 흠칫하며 말을 멈추고 말았다.그녀를 구해준 건 다름 아닌 소민준이었다.소씨 가문의 장남이자 한때는 그녀의 남자친구였으며 진세령의 약혼자이기도 했던 그 소민준 말이다.하지만 지금의 그는 5년 전과는 완전히 다른 모습을 하고 있었다.색이 다 바랜 낡아빠진 옷에 더러운 운동화, 세월을 정통으로 맞은 것 같은 얼굴에 새치 가득한 머리까지, 지금의 그는 도무지 30대 중반이라고는 믿기지 않는 모습을 하고 있었다.그래도 한때는 상류층에 있었던 사람인데 지금은 일반 시민도 아닌 제일 아래 계층에 있는 사람처럼 보였다.고개를 든 소민준은 눈앞에 있는 사람이 임유진이라는 것을 보고는 마찬가지로 조금 놀란 듯 움찔했다. 그러고는 곧바로 쓴웃음을 지었다.“너였구나. 다시 이곳으로 돌아왔다는 기사를 봤어. 이런 식으로 만나게 될 줄은 몰랐는데.”“너...”임유진은 뭐라 말을 하고 싶었지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소민준은 당시 그녀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줬고 그녀가 절망의 끝에 자살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궁지까지 몰아붙였으며 두 번 다시 사랑 같은 건 하고 싶지 않게끔 만들어놓기도 했다.아마 강지혁이 아니었다면 임유진은 지금도 여전히 과거의 상처에 매달려 스스로를 고립시키며 살았을 것이다.하지만...하지만
직장 동료들은 한지영에게 위로를 건네며 은근히 그녀에게 잘 보이려는 듯한 말투로 얘기했다.심지어 어떤 사람은 아예 대놓고 그녀에게 백연신과의 사이를 묻기도 했다.“그럼 지영 씨는 백연신 씨랑 다시 만나는 거예요?”“그날 기자들 무리에서 지영 씨 손을 덥석 잡고 차로 끌고 가는데 내가 다 설렜지 뭐예요? 완전 현실판 왕자님 아니에요?”“그럼 앞으로 지영 씨를 뭐라 불러야 하나?”“백연신 씨가 회장님이니 당연히 회장 사모님 아니겠어요?”한지영은 직원들의 태도가 바뀐 게 전부 백연신 때문이라는 걸 알고 있다. 이런 상황을 처음 겪는 것도 아니었으니까.“아니요. 백연신 씨와는 아무 사이도 아니에요. 그러니까 괜한 추측은 하지 말아주세요. 그리고 저, 사귀는 사람 따로 있어요.”한지영은 차가운 목소리로 대꾸했고 이에 사람들은 어색하게 웃으며 서로 눈빛을 주고받더니 금방 다시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옆에서 떠드는 사람들이 없으니 이제야 살 것 같았다.어제 집으로 돌아갔을 때 백연신은 끝까지 나타나지 않았다. 그저 경호원을 통해 그녀에게 전언만 남겼다.“회장님께서 더는 걱정하지 않으셔도 된다고, 앞으로도 쭉 전과 같이 아무 일도 없을 거라고 하셨습니다.”전과 같다는 건 백연신 역시 더는 그녀 앞에 나타나지 않을 거라는 건가?한지영은 그 생각에 갑자기 울컥하며 눈물이 차오르려는 것이 느껴졌다. 하지만 그녀는 곧바로 다시 마음을 다잡으며 스스로에게 되뇌었다.이건 자신이 바란 거라고, 그러니 아무것도 슬퍼할 것 없다고 말이다.‘그래, 잘 된 거야. 이게 제일 좋은 결말이야. 증오도 없고 더 이상의 미움도 없는... 그냥 좋은 추억만 간직한 지금이 제일 좋은 끝이야.’다시 그와 연인이 되었다가 또다시 고난에 부딪혀 헤어지게 되면 그때는 완전히 원수지간이 될지도 모르니 차라리 아무것도 시작하지 않는 게 백배는 더 나았다.한지영은 더 이상 백연신과 함께 할 용기가 없었다. 아무리 그가 사랑을 외쳐도 아무리 줄곧 그녀만 사랑해왔다고 해도 이제는 그 마음을
연우진은 그 어느 날 자신이 백연신의 질투 대상이 될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지영 씨한테 마음이 남은 거라면 내가 아닌 지영 씨와 얘기를 하세요.”연우진이 차분한 목소리로 말을 이어갔다.“그리고 내가 지영 씨와 만나고 싶다고 해도 지영 씨가 받아주지 않으면 함께 하지 못해요. 이건 백연신 씨도 마찬가지고요. 백연신 씨가 여전히 지영 씨를 좋아한다고 해도 지영 씨가 받아주지 않으면 두 사람 역시 함께 못해요. 선택권은 지영 씨한테 있으니까.”백연신은 주먹을 말아쥐며 다시 물었다.“지영이와 만날 건지에 대한 대답만 해.”연우진은 한숨을 한번 내쉬었다. 아무래도 대답을 해주지 않으면 순순히 보내주지 않을 듯하다.“지영 씨는 좋은 사람입니다. 이대로 감정이 싹트면 나로서는 당연히 지영 씨와 함께하고 싶겠죠.”“한지영의 곁에 있을 수 있는 남자는 모든 걸 다 내어줄 수 있을 정도로 한지영을 사랑하는 사람이 아니면 안 돼.”백연신이 경고하듯 낮게 읊조렸다.“어째 내가 모든 걸 다 내어줄 정도로 한지영 씨를 사랑하지 않으면 우리 둘이 함께하는 걸 방해하겠다는 얘기로 들립니다만?”연우진의 질문에 백연신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지만 냉랭하고 차가운 눈빛을 보면 그 대답이 뭔지 알 수 있을 것도 같았다.“백연신 씨는 지영 씨를 위해 모든 걸 다 내어줄 수 있습니까? 그 정도로 사랑한다면 여기서 나한테 이러지 말고 다시 한번 지영 씨 마음에 들기 위해 노력을 해보는 게 어떨까요?”백연신은 그의 말이 끝난 순간 갑자기 손을 뻗어 연우진의 멱살을 잡았다. 그러고는 이대로 갈기갈기 찢어버릴 듯한 눈빛으로 그를 노려보았다.“너는 아무것도 몰라. 나라고...”하지만 그는 말을 다 잇지 못했다. 또한 멱살을 잡았던 손도 힘없이 풀었다.질투와 분노로 가득했던 눈동자가 한순간에 어둠에 잠겨버린 듯 시들어졌다.“한지영한테 잘해. 만약 지영이한테 상처를 주면 그때는 사는 게 사는 것 같지 않다는 게 뭔지 똑똑히 알려주지. 내 말 허투루 듣지 마.”말을 마친 후
백연신은 그 생각에 얼굴을 한껏 일그러트렸다. 질투와 분노, 슬픔과 고통의 감정들이 소용돌이치며 그의 얼굴에 담겼다.한지영의 집에서 나왔을 때 연우진은 꽤 편안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그는 몇 시간 전에 한지영에게 전화를 걸었다가 무사히 집에 도착했다는 말을 듣고 바로 그녀를 찾으러 집까지 왔다.다행히 사건은 무사히 일단락되었고 한지영도 예전의 일상을 다시 되찾은 것처럼 보였다.“우진 씨, 그... 나랑 더는 연락하고 싶지 않으면 언제든지 말해줘요. 난 괜찮으니까.”연우진은 한지영의 집에 도착하자마자 들은 그녀의 말을 떠올리고는 저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가끔 보면 한지영은 꼭 34살이 아닌 4살짜리 아이 같았다. 이런 상황에서도 마음속의 말을 솔직하게 전하며 상대방에게 선택권을 주니 말이다.하지만 그런 투명한 여자이기에 연우진도 그녀와 함께 있으면 더 즐겁고 자꾸 그녀와 연락을 이어나가게 되는 걸 것이다.“나는 지영 씨랑 계속 연락하고 싶은데. 지영 씨는 그저 피해자일 뿐이었잖아요. 그러니까 죄라도 지은 사람처럼 말하지 말아요.”“내가 백연신 씨와 호텔에서 아무 일도 없었다고 하면 믿을 수 있어요?”“네, 지영 씨가 그렇다고 하면 그렇게 믿을게요.”연우진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했다. 진심이었으니까.만약 정말 뭔 일이 있었으면 한지영 쪽에서 먼저 솔직하게 얘기를 해줬을 것이다. 한지영은 그런 여자니까.연우진은 엘리베이터 안에서 문득 백연신의 얼굴을 떠올렸다. 확실히 한지영은 백연신과의 인연을 이미 지난 과거로만 보고 있는 듯했다.하지만 백연신은? 그 역시 그럴까? 이제는 고은채와의 결혼도 파기됐는데?생각에 잠긴 채 엘리베이터에서 나오던 연우진은 아파트 입구에 서 있는 남자를 보고 멈칫하며 발걸음을 멈췄다.잘 뻗은 기럭지에 고고해 보이는 눈앞의 남자는 다름 아닌 백연신이었다.‘이 사람이 왜 여기에...’연우진과 백연신은 어느 정도 거리를 둔 채 서로를 바라보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렇게 침묵이 계속되다 연우진은 놀란 마
한지영의 말대로 백연신은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다른 여자를 곁에 둘 수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예쁜 여자를 곁에 둔다고 해도 그는 그녀가 아니면 안 되는 남자였다. 꼭 한지영이여야만 하는 남자였다.처음 본 순간부터 줄곧 한지영만을 사랑해왔으니까, 이미 모든 마음을 다 그녀에게 줘버렸으니까.사실 5년 전에 한지영이 아닌 고은채의 손을 잡았을 때 속으로 판을 짜고 있었다고는 하나 앞으로가 어떨지는 생각해 본 적도 없었다.그때는 자신에게 미래가 있을지도 없을지도 확신하지 못했거니와 백씨 가문의 모든 걸 되찾고 고씨 가문을 무너뜨리는 데 성공할 수 있을지 말지도 미지수였으니까.당시의 그에게는 한 걸음 한 걸음이 다 깨진 얼음판을 걷는 것 같았다. 그래서 섣불리 한지영에게 약속을 건넬 수도 없었다.지난 5년이라는 시간 동안 백연신은 사람을 은밀히 붙이는 것으로 한지영의 소식을 접할 뿐 그녀의 앞에 나서지는 못했다. 그때는 아무리 보고 싶어도 참아야만 했으니까.그런데 인내의 시간을 겪고 드디어 그녀의 앞에 나설 자격을 갖췄는데 한지영의 마음은 그사이 식어버렸다.백연신은 그 생각에 또 한 번 쓴 미소를 지었다.그녀와 함께하고 싶어 한 선택이, 그녀를 되찾기 위한 인내가 한지영이 거부함으로써 완전히 물거품이 되어버렸다.‘한지영을 살려주는 것만으로도 만족해라 이건가...?’백연신은 어쩌면 당시 한지영을 살려달라고 간절하게 외쳤을 때 모든 소원권을 다 써버린 걸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그는 운전석에 앉은 채 한지영의 모습이 사라질 때까지, 아니, 사라진 뒤에도 여전히 그쪽으로 시선을 고정하며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그러다 얼마나 지났을까, 휴대폰 진동이 울려댔다.“회장님, 고은채 씨가 방금 S 시를 떠났습니다. 그리고 매스컴 쪽에도 더는 한지영 씨의 일상을 방해하지 않게 조치를 해뒀습니다.”“고씨 가문 쪽은 계속해서 지켜봐. 손 내밀어주는 가문이 있나.”“네, 알겠습니다.”백연신은 통화를 마친 후 휴대폰을 다시 집어넣었다.고씨 가문에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