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유진은 언제 나오는 거지?그녀는 절대 그를 배신하지 않겠다고 다짐까지 해놓고 왜 또 의사를 만나러 간 걸까?아직도 강현수와의 기억을 찾고 싶은 건가?그렇게 가만히 보고 있다 보니 드디어 입구에서 흰색 원피스를 입은 그녀가 강지혁의 시야에 들어왔다.정신없이 오가는 사람들 틈에서 그는 그녀를 한눈에 알아봤다. 임유진은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려는 듯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곧이어 강지혁의 전화벨 소리가 울려 퍼졌고 핸드폰을 꺼내 들어보니 발신자 표시란에 ‘누나’라는 이름이 떴다.그는 아직도 이 이름을 바꾸지 않았다.아마도 그건 추억이 가득한 호칭이어서 일 거다."너 내 동생 할래? 앞으로 나는 너를 아껴줄 거고 너도 나를 아껴주는 거야."임유진은 환한 미소를 지으며 이렇게 말했었다.누나... 누나...그때의 강지혁은 훗날 이 여자를 이렇게나 사랑하게 될 줄은 상상도 못 했다.벨 소리는 계속 울려 퍼졌고 강지혁이 통화버튼을 누르자 전화기 너머로 청아하고 맑은 목소리가 들려왔다."혁아, 어디야?"강지혁은 병원 입구를 바라보며 답했다."나 지금 회사야.""그럼 이따가 점심 사 들고 갈테니까 같이 먹자. 뭐 먹고 싶은 거 있어?"임유진이 물었다."아무거나 좋아. 네가 알아서 정해.""응, 알겠어."임유진은 통화를 마친 후 택시를 잡고 떠났고 강지혁도 기사에게 회사로 돌아가자고 말했다....임유진은 도시락 2인분과 사과 두 알을 들고 GH 그룹에 도착했다.얼마 전 인터넷에 임유진의 사진이 올라와 이슈가 될 뻔한 적이 있었지만, 다시 빠르게 사라진 덕에 그녀를 알아보는 사람은 많이 없었다.오랜만에 들린 회사이지만 경비원과 프런트 데스크 직원은 그녀의 얼굴을 기억하고 있었다. 배달 일을 했던 시절 계속 강지혁에게 도시락은 전해줬던 그녀였으니까.그들은 빠르게 다가가 예의를 갖춰 인사하더니 그녀를 엘리베이터까지 정중히 모셨다."저 여자가 누군데 그렇게 굽신거려요?"엘리베이터 문이 닫힌 후 지나가던 일반 직원이 그녀를 향해 물었다."우
임유진이 문을 열고 들어가자 강지혁이 창밖을 내려다보고 있었다.마치 한 폭의 그림과도 같은 그의 모습에 임유진은 넋을 잃고 말았다.모든 걸 자신의 손아귀에 넣고 원하는 대로 휘두를 것만 같은 지금의 강지혁은 새벽 고독에 찬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던 그와는 아예 다른 사람 같았다."혁아."임유진의 부름에 강지혁이 고개를 돌리더니 이내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왔어?""응, 도시락 사 왔는데 네 입맛에 맞을지는 모르겠어,"그녀는 익숙한 듯 소파에 앉아 손에 든 도시락과 과일을 테이블에 올려놓았다.강지혁도 마찬가지로 소파로 다가와 앉더니 도시락 뚜껑을 열어 식사를 시작했다.이러고 있으니, 마치 매일 점심 같이 식사하던 그때로 돌아간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맛있어?"임유진은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괜찮네."강지혁이 답했다."다행이다.""참, 요즘도 머리 아프다고 했었지? 의사 예약해 줄까?"그때 강지혁이 문득 그녀의 두통에 관해 물었고 임유진의 손은 잠깐 멈칫하더니 다급하게 말했다."아니야. 얼마 전에 의사한테 보였잖아.""하지만 전시회 때 네 상황을 보면 효과가 없는 것 같던데?"임유진이 뜨끔한 듯 목소리를 조금 낮췄다."그게... 다른 의사로 바꿨어."강지혁이 그녀를 빤히 쳐다봤다."그래?""으, 응."그녀는 그의 얼굴을 마주할 용기가 나지 않아 어쩔 수 없이 고개를 푹 숙인 채 식사했다.하지만 고개를 들지 않아도 그의 시선이 그녀에게 꽂혀있다는 건 느낄 수 있었다."정말 내 도움 필요 없어?"강지혁이 다시 한번 물었다."응... 일단은. 내일 다시 병원에 가보기로 했거든. 그래도 안 되면 그때 다시 너한테 얘기할게."내일이 지나면 임유진은 기억을 잃은 게 맞는지 아닌지를 알 수 있게 되고 자신이 강현수가 그토록 찾아 헤매던 소녀가 맞는지 아닌지도 알 수 있게 된다.그녀는 내일이 지나고 나서... 결과가 나오면 그때 강지혁에게 얘기할 생각이었다."알았어. 그럼 내일까지 기다려 보지, 뭐.."계속 고개를 숙이
사과를 깎는 단순한 행동도 지금의 그녀는 집중하고 또 집중해야만 했다.굳이 직접 사과를 깎아주겠다고 하는 그녀의 정성에서 강지혁을 향한 그녀의 사랑이 엿보였다.강지혁은 그녀가 자신을 얼마나 사랑하고 있는지 새기려는 듯 그녀의 행동을 하나하나 바라보았다.드디어 사과 하나를 다 깎았고 임유진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더니 이내 강지혁에게 건넸다."자, 여기."그녀에게서 건네받은 사과를 한입 깨물어 보니 달콤한 과즙이 그의 입안에 퍼졌다."달아?""응, 달아.""그럼 나도 어디 한번."임유진이 남은 사과 한 알을 들고 또 깎으려고 하자 강지혁이 그녀를 자신의 품으로 끌어당겼다."뭘 귀찮게 또 깎으려고 그래.""응?"강지혁은 멍하니 올려다보는 임유진에게 자신이 한입 베어먹은 사과를 건네주었다.그러자 임유진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고 그가 베어 물었던 곳을 보며 어쩔 줄을 몰라했다."안 먹을 거야?"강지혁이 장난기 가득한 표정을 지으며 그녀에게 묻자 임유진은 잠깐 망설이더니 곧 빨간 입술로 그가 베어 물었던 곳을 또다시 베어 물었다.마치 간접키스라도 한듯한 느낌에 그녀는 심장이 두근거렸다."달아?"강지혁의 목소리가 그녀의 귓가에 감돌았다.임유진은 온 신경이 그를 향하고 있어 씹고 있는 사과가 무슨 맛인지조차 몰랐다.그리고 강지혁의 표정이 마치 사과가 아니라 자신과의 간접키스에 대해 물어보는 느낌이 들었고 그녀는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였다.그 모습을 지켜본 강지혁은 옅게 웃더니 손가락으로 그녀의 빨간 입술을 매만졌다."아쉽네. 아니라고 하면 한 번 더 먹여주고 싶었는데."임유진은 그의 말에 담긴 뜻을 알아채고는 얼굴이 더 빨갛게 달아올랐다."일주일 뒤면 생일인데 뭐 갖고 싶은 거 있어?"강지혁이 화제를 돌렸다.임유진은 그제야 7월 22일 곧 다가온다는 사실을 깨달았다.감옥살이한 뒤부터 그녀의 생일을 챙겨준 건 오직 한지영뿐이었다. 그녀는 매번 생일 때마다 케이크를 들고 초에 불도 켜주며 생일축하 노래도 불러주었다.하지만 아쉽게도
"응, 케이크면 돼. 그리고 그날은 너랑 나 그리고 한지영네와 같이 간단하게 보내고 싶어."임유진은 오랜만에 사랑하는 사람들과 같이 보내는 생일이긴 했지만, 너무 거창하게 쇠고 싶지는 않았다."그래, 알았어. 생일 케이크는 내가 준비할게."강지혁이 고개를 끄덕였다."응, 고마워."임유진은 문득 시간을 확인한 후 점심시간이 끝나가는 걸 보고는 옆에 있던 가방을 들고 몸을 벌떡 일으켰다."그럼 나 먼저 갈게. 일 열심히 해."다만 그녀가 막 발걸음을 떼기도 전에 강지혁이 뒤에서 그녀를 끌어안았고 임유진은 그의 품에 갇혀버렸다.그는 그녀의 목덜미에 얼굴을 파묻은 후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내일... 그 병원 안 가면 안 돼? 내가 말한 병원으로 가자."그러고는 그녀를 끌어안은 팔에 힘을 주었다.임유진은 잠깐 흠칫하더니 조금 뜸을 들인 후 천천히 입을 열었다."내일 한 번만 더 가보고 그래도 나아지지 않으면 그때는 네가 얘기한 곳으로 갈게."강지혁은 아무 대답도 없이 그저 그녀를 꽉 끌어안고 있었다."혁아?"임유진이 그의 이름을 불렀다."그래, 네가 원하는 대로 해."강지혁은 그제야 서서히 팔에 힘을 풀었다.임유진은 고개를 돌려 그의 얼굴을 바라봤다. 평소와 똑같이 잘생긴 얼굴에 입가에는 미소도 띄워져 있었지만, 그녀는 왠지 모르게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그럼... 난 이만 가볼게.""기사님한테 데려다주라고 할게."임유진은 고개를 끄덕인 후 대표 사무실을 나갔고 강지혁은 소파에 도로 앉더니 아까 먹다 남은 사과를 마저 먹었다.그러다 문득 열심히 그를 위해 껍질을 깎아줬던 그녀의 모습이 떠올랐다."유진아, 그냥 내 말대로 하면 되잖아."사과는 너무도 달았지만, 강지혁의 입안은 너무 썼다...."오늘도 수고하셨어요."탁유미는 윤이를 데리고 활짝 웃는 표정으로 언어 재활센터에서 나왔다.윤이의 상태는 날이 갈수록 더 좋아졌고 이제는 또래 아이들과 다른 점이 거의 없어 보였다.재활센터 선생님도 이곳으로 오는 횟수를 줄여도 되
며칠 전, 윤이는 탁유미가 선물을 준비하는 걸 보며 호기심에 물었고 그때 그녀가 7월 22일이 임유진의 생일이라고 알려줬다.윤이는 아마 그 뒤로 계속 임유진의 생일을 마음에 두고 있었던 것 같다.하지만 생각해보면 탁유미와 탁유미 엄마를 제외하고 임유진만큼 윤이를 잘 대해줬던 사람이 또 없었으니 윤이가 그녀에게 애정을 보이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나도 이모한테 선물 주고 싶어요."아이의 진지한 표정에 탁유미가 눈을 깜빡였다.그녀는 임유진이 윤이를 도와준 일들이 떠올랐다. 임유진이 아니었으면 윤이는 이렇게 빨리 회복도 못 했을 것이고 좋은 치료도 받지 못했을 것이다.하지만 백화점 안에는 사람이 너무 많아 선물을 고르는 데 시간이 걸리고 얼굴이 노출될 위험도 커지게 된다.이경빈은 아직 S 시에 있고 그가 만약 윤이를 보기라도 한다면...탁유미는 저도 모르게 몸을 부르르 떨었다.몇 년도 지난 일이지만 그 남자의 얼굴을 떠올리면 그때의 고통이 되살아나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한때 가장 사랑했던 남자가 남기고 간 흉터가 말이다."엄마!"윤이는 고개를 쳐들고 간절히 원하는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어지간히 선물을 고르고 싶은가 보다.탁유미는 잠깐 망설이나 싶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알았어. 대신 빨리 골라야 해.""네!"탁유미는 아들의 손을 잡고 백화점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그녀는 오랜만에 보는 명품 브랜드를 보며 조금 쓸쓸한 마음이 들었다. 이경빈의 여자였을 때 그녀는 그에게서 셀 수도 없이 많은 브랜드 옷과 가방을 선물 받았다.탁유미가 원하는 거면 이경빈은 주저하지 않고 사다 주었다. 그때의 그녀는 이게 사랑인 줄 알았다.하지만 물질로 쌓아 올린 감정은 사랑이 될 수 없었고 거기에 진심은 조금도 담겨있지 않았다.그리고 그녀가 이걸 깨달았을 때는 이미 너무 늦어버렸다.윤이는 탁유미의 손을 잡고 3층 여성 브랜드 매장으로 향했다.사실 아이는 사고 싶은 것이 하나 있었는데 그건 바로 유리 구두였다. 얼마 전 공원에서 산
이경빈이다!그는 슈트 차림에 예전처럼 머리를 깔끔하게 위로 올렸고 잘생긴 얼굴은 단지 옆모습만으로도 탁유미의 심장을 아프게 했다.그는 마치 세월을 혼자 비껴간 사람처럼 여전히 가슴 떨리게 잘생겼다. 하지만 그에 반해 탁유미는 만신창이가 되었고 예전 모습은 찾아볼 수가 없었다.그때 그녀의 시선을 느끼기라도 한 듯 이경빈이 그들 쪽으로 고개를 돌렸고 탁유미는 홱 하고 고개를 돌리더니 이내 아들을 안고 비상계단 쪽으로 뛰어갔다."손님, 손님?"매장 직원은 얼떨떨한 표정을 지으며 탁유미를 향해 외쳤다.에스컬레이터에 타고 있던 이경빈은 그 찰나의 시간 동안 누군가가 황급히 도망가는 걸 본 후 얼굴이 급속도로 굳어졌다.그러고는 미친 듯이 에스컬레이터로 내려가 그녀가 달려간 곳으로 뛰어갔다. 한편, 이경빈 뒤에 있던 일행들은 평소 침착하고 여유롭기로 유명한 자신들의 대표가 갑자기 이성을 잃은 듯 뛰어가는 걸 보고 입을 다물지 못했다.이경빈의 경호원 두 명도 잠시 황당해하고 있다가 곧바로 이경빈을 따라갔다.이경빈는 지금 눈에 뵈는 게 없었고 오직 여자의 뒷모습만 눈에 아른거렸다.그 여자다! 그 여자가 틀림없다!분명히 칙칙한 옷을 입고 머리는 대충 위에 포니테일로 묶은, 그의 기억 속 여자와는 너무 다른 모습이었지만 달려가는 그녀의 뒷모습을 보는 순간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그 여자라고! 그리고 아까부터 거세게 뛰기 시작한 이 심장도 그녀가 맞다고 외치고 있는 듯했다.탁유미!몇 년간 머릿속에서 지워지지 않는 그 이름. 그녀의 눈물이, 그녀의 마지막 말이 시도 때도 없이 떠올랐다.탁유미는 감옥에 들어간 거로 모든 게 끝났다고 생각했겠지만, 절대 아니었다.그와 그녀는 절대 이대로 끝이 날 수가 없는 사이이고 그녀가 빚진 건 모두 찾아와야만 했다.하지만 출소 후 탁유미는 마치 증발이라도 한 것처럼 사라져버렸고 사람을 풀어도 봤지만, 여전히 아무런 수확도 없었다.그런데 S 시에 있었다니!이경빈이 1층으로 내려왔을 때 그녀는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엄마?"윤이는 택시에 올라탄 후에야 탁유미를 불렀다. 이모 선물을 고르고 있을 때 엄마가 왜 갑자기 자신을 안아 들고 허겁지겁 뛰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분명히 무슨 이유가 있을 거로 생각해 택시로 향하는 길 그는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아까는 엄마가 보고 싶지 않은 사람과 마주치는 바람 그만 윤이 생각도 안 하고 뛰어버렸네. 이모 선물은 엄마랑 다음에 와서 살까?" 탁유미의 말에 윤이는 착하게도 고개를 끄덕여주었다."엄마가 보고 싶어 하지 않는 사람은 나쁜 사람이에요?"그 말에 탁유미의 코가 시큰해졌다. 윤이가 지금보다 더 어릴 때 자신의 아빠에 관해 물은 적이 있었다. 그럴 때면 그녀는 항상 아이에게 아빠는 하늘에 있다고 대답했다.윤이가 언제 하늘에 있다는 의미를 알아챌지 그녀는 모른다. 하지만 아까 아빠가 불과 몇십 미터도 안 되는 거리에 있었다는 걸 말하면 안 된다는 사실만은 똑똑하게 알고 있다.너희 아빠는 너의 존재를 반가워하지도 않고 네가 있는 것도 모른다는 사실을 이 어린아이에게 어떻게 전할 수 있을까."엄마, 왜 울어요?"자그마한 손이 탁유미의 얼굴을 매만지며 그녀를 위로했다.탁유미는 그제야 자신이 울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엄마, 울지 마세요. 윤이 말도 잘 듣고 빨리 말도 배우고 앞으로 공부도 열심히 할게요."윤이는 그녀가 자신 때문에 속상해하는 거라고 생각했다.아직 듣지 못하던 시절 탁유미는 항상 그를 껴안고 울었고 외할머니와 얘기를 나눴다. 입술 모양으로밖에 추측할 수 없었지만 아마 아이의 귀가 안 들린다는 것 때문에 속상한 듯 보였다.그러다 수술을 성공적으로 마친 후부터 탁유미는 슬퍼하는 일이 적어졌고 매일매일 그에게 미소를 지었다.윤이는 엄마가 슬퍼하는 게 싫었기에 열심히 말을 배워서 엄마를 즐겁게 해주고 싶었다.또래 애들보다 빨리 철이 든 듯한 아이를 보며 탁유미는 마음이 아팠다."응, 엄마 이제 안 울게. 그리고 엄마는 앞으로도 계속 윤이 옆에 있을 거야."그녀는 평생을 윤이 옆에 있고 싶었지만, 자꾸만
임유진은 지금 병원 앞에 서 있다. 그녀는 아직도 이 선택이 맞는지 감이 서지 않았다.정말 잃어버린 기억이라면 되찾고 나서는 어떻게 되는 거지? 강현수와는 어떤 사이가 되는 거며 강지혁은 또다시 불안해하는 걸까?정말 기억을 찾는 게 맞을까? 아니면 영원히 묻어두는 게 더 좋으려나?또 혹은 앞으로 강현수와 일정한 거리만 유지한다면 이 두통도 자연스럽게 괜찮아지는 건 아닐까?"유진 씨!"그때 한 여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들어보니 임유진은 어느새 안은영 의사 진료실 앞에 도착했고 방금 그녀의 이름을 불렀던 사람은 바로 어제 안은영 선생님 옆에 있던 간호사였다."안 선생님께서 오늘 급하게 볼일이 있으시다고 출근을 못 했어요. 여기까지 헛걸음하게 해서 죄송해요."간호사는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급한 사정이라 그런지 유진 씨에게 미처 얘기도 못 했다고 하더라고요."그 순간 임유진은 왠지 홀가분해진 느낌이 들었다.안은영 의사가 없다는 건 적어도 오늘은 최면 치료를 안 해도 되는 것이고 기억을 되찾을 걱정 역시 안 해도 된다는 것이다.‘뭐? 걱정?’그녀는 지금 기억을 되찾는 걸 두려워하는 건가?기억을 되찾고 나면 모든 일이 복잡하게 돌아가고 더 혼란스러워 질까 봐?그녀는 마음속 깊이 이 기억은 되찾지 않는 게 좋겠다고 이미 여기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임유진은 고개를 숙인 채 다시 엘리베이터 쪽으로 걸어갔다.그리고 막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르려는데 갑자기 누군가가 그녀의 팔을 잡고 비상계단으로 데려갔다.이곳은 사람들이 자주 드나들지 않는 곳으로 주위가 고요한 것이 마치 다른 세상에 온 듯했다."강현수 씨?!"임유진은 어이없고 놀란 표정으로 눈앞에 있는 남자를 바라봤다.비상계단 쪽에는 오직 작은 창문으로 들어오는 빛밖에 없었고 강현수는 그녀에게 표정을 들키기 싫은 듯 빛을 등진 채 서 있었다."여기는 왜 왔어요? 최면은 왜 하려고 하는데요?"강현수의 다급한 외침에는 절박함이 서려 있었다.모든 걸 다 알고 있는 듯한 그의 말에 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