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유진은 씻은 후 바로 병원으로 향했다. 그녀가 저택을 빠져나간 후 누군가가 그녀의 행보를 강지혁에게 보고했다."대표님, 임유진 씨가 방금 집을 나섰습니다."대표 사무실.고이준의 말에 강지혁의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그래."그러고는 숨 막힐 듯한 정적이 이어졌다.고이준은 화를 내는 강지혁보다 아무 말 없이 침묵을 지키는 강지혁이 더 두려웠다.임유진은 어느새 병원에 도착했고 접수를 마친 뒤 곧장 안은영의 진료실로 들어갔다.40대 초반으로 보이는 의사는 살집이 조금 있었고 친근한 얼굴을 하고 있어 편안한 느낌을 주었다. 심리상담 의사에 너무나도 잘 어울리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임유진은 자리에 앉은 후 자신의 증상을 의사에게 얘기하고는 요즘 꿈을 꾸는 일이 점점 더 많아졌다고 토로했다.특히 전시회에서 강현수를 만난 이후 또다시 꿈을 꿨다."임유진 씨는 아마 기억을 잃은 게 맞을 겁니다. 다른 사람에게 들은 이야기로 자신을 꿈에 대입시켰다기에는 같은 꿈을 꾸는 횟수가 너무 많거든요."안은영이 차근차근 분석했다.기억을 잃었을 수도 있었겠다는 생각은 전에도 해봤지만, 막상 의사의 입으로 직접 들으니 느낌이 확연히 달랐다.만약 그 꿈이 정말 잃어버린 그녀의 기억이 맞다면 강현수와 그녀는..."임유진 씨?"안은영이 그녀의 이름을 불러 잡념에서 꺼내주었다."죄송해요. 뭐라고 하셨죠?""기억을 잃어버린 게 맞는지 알고 싶은 거면 잘 찾아오셨어요. 최면 유도를 통하면 유진 씨 기억도 되살아날 수 있을 거예요."안은영이 말했다."그렇게 쉽게 돌아오는 건가요...?"임유진이 조금 의아해하며 묻자 안은영이 옅게 웃었다."유진 씨는 이미 수차례 꿈을 꾸었고 점점 더 선명해진다고 하니 최면 유도만 하게 되면 쉽게 해결될 수 있어요. 물론 만에 하나 기억 상실이 아니었다고 하면 다른 쪽으로 원인을 찾아보면 되고요."안은영은 잠시 스케줄을 체크하더니 말을 이었다."임유진 씨가 당장이라도 기억을 찾고 싶으시다면 내일 바로 최면 치료해드릴 수 있
임유진은 언제 나오는 거지?그녀는 절대 그를 배신하지 않겠다고 다짐까지 해놓고 왜 또 의사를 만나러 간 걸까?아직도 강현수와의 기억을 찾고 싶은 건가?그렇게 가만히 보고 있다 보니 드디어 입구에서 흰색 원피스를 입은 그녀가 강지혁의 시야에 들어왔다.정신없이 오가는 사람들 틈에서 그는 그녀를 한눈에 알아봤다. 임유진은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려는 듯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곧이어 강지혁의 전화벨 소리가 울려 퍼졌고 핸드폰을 꺼내 들어보니 발신자 표시란에 ‘누나’라는 이름이 떴다.그는 아직도 이 이름을 바꾸지 않았다.아마도 그건 추억이 가득한 호칭이어서 일 거다."너 내 동생 할래? 앞으로 나는 너를 아껴줄 거고 너도 나를 아껴주는 거야."임유진은 환한 미소를 지으며 이렇게 말했었다.누나... 누나...그때의 강지혁은 훗날 이 여자를 이렇게나 사랑하게 될 줄은 상상도 못 했다.벨 소리는 계속 울려 퍼졌고 강지혁이 통화버튼을 누르자 전화기 너머로 청아하고 맑은 목소리가 들려왔다."혁아, 어디야?"강지혁은 병원 입구를 바라보며 답했다."나 지금 회사야.""그럼 이따가 점심 사 들고 갈테니까 같이 먹자. 뭐 먹고 싶은 거 있어?"임유진이 물었다."아무거나 좋아. 네가 알아서 정해.""응, 알겠어."임유진은 통화를 마친 후 택시를 잡고 떠났고 강지혁도 기사에게 회사로 돌아가자고 말했다....임유진은 도시락 2인분과 사과 두 알을 들고 GH 그룹에 도착했다.얼마 전 인터넷에 임유진의 사진이 올라와 이슈가 될 뻔한 적이 있었지만, 다시 빠르게 사라진 덕에 그녀를 알아보는 사람은 많이 없었다.오랜만에 들린 회사이지만 경비원과 프런트 데스크 직원은 그녀의 얼굴을 기억하고 있었다. 배달 일을 했던 시절 계속 강지혁에게 도시락은 전해줬던 그녀였으니까.그들은 빠르게 다가가 예의를 갖춰 인사하더니 그녀를 엘리베이터까지 정중히 모셨다."저 여자가 누군데 그렇게 굽신거려요?"엘리베이터 문이 닫힌 후 지나가던 일반 직원이 그녀를 향해 물었다."우
임유진이 문을 열고 들어가자 강지혁이 창밖을 내려다보고 있었다.마치 한 폭의 그림과도 같은 그의 모습에 임유진은 넋을 잃고 말았다.모든 걸 자신의 손아귀에 넣고 원하는 대로 휘두를 것만 같은 지금의 강지혁은 새벽 고독에 찬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던 그와는 아예 다른 사람 같았다."혁아."임유진의 부름에 강지혁이 고개를 돌리더니 이내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왔어?""응, 도시락 사 왔는데 네 입맛에 맞을지는 모르겠어,"그녀는 익숙한 듯 소파에 앉아 손에 든 도시락과 과일을 테이블에 올려놓았다.강지혁도 마찬가지로 소파로 다가와 앉더니 도시락 뚜껑을 열어 식사를 시작했다.이러고 있으니, 마치 매일 점심 같이 식사하던 그때로 돌아간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맛있어?"임유진은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괜찮네."강지혁이 답했다."다행이다.""참, 요즘도 머리 아프다고 했었지? 의사 예약해 줄까?"그때 강지혁이 문득 그녀의 두통에 관해 물었고 임유진의 손은 잠깐 멈칫하더니 다급하게 말했다."아니야. 얼마 전에 의사한테 보였잖아.""하지만 전시회 때 네 상황을 보면 효과가 없는 것 같던데?"임유진이 뜨끔한 듯 목소리를 조금 낮췄다."그게... 다른 의사로 바꿨어."강지혁이 그녀를 빤히 쳐다봤다."그래?""으, 응."그녀는 그의 얼굴을 마주할 용기가 나지 않아 어쩔 수 없이 고개를 푹 숙인 채 식사했다.하지만 고개를 들지 않아도 그의 시선이 그녀에게 꽂혀있다는 건 느낄 수 있었다."정말 내 도움 필요 없어?"강지혁이 다시 한번 물었다."응... 일단은. 내일 다시 병원에 가보기로 했거든. 그래도 안 되면 그때 다시 너한테 얘기할게."내일이 지나면 임유진은 기억을 잃은 게 맞는지 아닌지를 알 수 있게 되고 자신이 강현수가 그토록 찾아 헤매던 소녀가 맞는지 아닌지도 알 수 있게 된다.그녀는 내일이 지나고 나서... 결과가 나오면 그때 강지혁에게 얘기할 생각이었다."알았어. 그럼 내일까지 기다려 보지, 뭐.."계속 고개를 숙이
사과를 깎는 단순한 행동도 지금의 그녀는 집중하고 또 집중해야만 했다.굳이 직접 사과를 깎아주겠다고 하는 그녀의 정성에서 강지혁을 향한 그녀의 사랑이 엿보였다.강지혁은 그녀가 자신을 얼마나 사랑하고 있는지 새기려는 듯 그녀의 행동을 하나하나 바라보았다.드디어 사과 하나를 다 깎았고 임유진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더니 이내 강지혁에게 건넸다."자, 여기."그녀에게서 건네받은 사과를 한입 깨물어 보니 달콤한 과즙이 그의 입안에 퍼졌다."달아?""응, 달아.""그럼 나도 어디 한번."임유진이 남은 사과 한 알을 들고 또 깎으려고 하자 강지혁이 그녀를 자신의 품으로 끌어당겼다."뭘 귀찮게 또 깎으려고 그래.""응?"강지혁은 멍하니 올려다보는 임유진에게 자신이 한입 베어먹은 사과를 건네주었다.그러자 임유진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고 그가 베어 물었던 곳을 보며 어쩔 줄을 몰라했다."안 먹을 거야?"강지혁이 장난기 가득한 표정을 지으며 그녀에게 묻자 임유진은 잠깐 망설이더니 곧 빨간 입술로 그가 베어 물었던 곳을 또다시 베어 물었다.마치 간접키스라도 한듯한 느낌에 그녀는 심장이 두근거렸다."달아?"강지혁의 목소리가 그녀의 귓가에 감돌았다.임유진은 온 신경이 그를 향하고 있어 씹고 있는 사과가 무슨 맛인지조차 몰랐다.그리고 강지혁의 표정이 마치 사과가 아니라 자신과의 간접키스에 대해 물어보는 느낌이 들었고 그녀는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였다.그 모습을 지켜본 강지혁은 옅게 웃더니 손가락으로 그녀의 빨간 입술을 매만졌다."아쉽네. 아니라고 하면 한 번 더 먹여주고 싶었는데."임유진은 그의 말에 담긴 뜻을 알아채고는 얼굴이 더 빨갛게 달아올랐다."일주일 뒤면 생일인데 뭐 갖고 싶은 거 있어?"강지혁이 화제를 돌렸다.임유진은 그제야 7월 22일 곧 다가온다는 사실을 깨달았다.감옥살이한 뒤부터 그녀의 생일을 챙겨준 건 오직 한지영뿐이었다. 그녀는 매번 생일 때마다 케이크를 들고 초에 불도 켜주며 생일축하 노래도 불러주었다.하지만 아쉽게도
"응, 케이크면 돼. 그리고 그날은 너랑 나 그리고 한지영네와 같이 간단하게 보내고 싶어."임유진은 오랜만에 사랑하는 사람들과 같이 보내는 생일이긴 했지만, 너무 거창하게 쇠고 싶지는 않았다."그래, 알았어. 생일 케이크는 내가 준비할게."강지혁이 고개를 끄덕였다."응, 고마워."임유진은 문득 시간을 확인한 후 점심시간이 끝나가는 걸 보고는 옆에 있던 가방을 들고 몸을 벌떡 일으켰다."그럼 나 먼저 갈게. 일 열심히 해."다만 그녀가 막 발걸음을 떼기도 전에 강지혁이 뒤에서 그녀를 끌어안았고 임유진은 그의 품에 갇혀버렸다.그는 그녀의 목덜미에 얼굴을 파묻은 후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내일... 그 병원 안 가면 안 돼? 내가 말한 병원으로 가자."그러고는 그녀를 끌어안은 팔에 힘을 주었다.임유진은 잠깐 흠칫하더니 조금 뜸을 들인 후 천천히 입을 열었다."내일 한 번만 더 가보고 그래도 나아지지 않으면 그때는 네가 얘기한 곳으로 갈게."강지혁은 아무 대답도 없이 그저 그녀를 꽉 끌어안고 있었다."혁아?"임유진이 그의 이름을 불렀다."그래, 네가 원하는 대로 해."강지혁은 그제야 서서히 팔에 힘을 풀었다.임유진은 고개를 돌려 그의 얼굴을 바라봤다. 평소와 똑같이 잘생긴 얼굴에 입가에는 미소도 띄워져 있었지만, 그녀는 왠지 모르게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그럼... 난 이만 가볼게.""기사님한테 데려다주라고 할게."임유진은 고개를 끄덕인 후 대표 사무실을 나갔고 강지혁은 소파에 도로 앉더니 아까 먹다 남은 사과를 마저 먹었다.그러다 문득 열심히 그를 위해 껍질을 깎아줬던 그녀의 모습이 떠올랐다."유진아, 그냥 내 말대로 하면 되잖아."사과는 너무도 달았지만, 강지혁의 입안은 너무 썼다...."오늘도 수고하셨어요."탁유미는 윤이를 데리고 활짝 웃는 표정으로 언어 재활센터에서 나왔다.윤이의 상태는 날이 갈수록 더 좋아졌고 이제는 또래 아이들과 다른 점이 거의 없어 보였다.재활센터 선생님도 이곳으로 오는 횟수를 줄여도 되
며칠 전, 윤이는 탁유미가 선물을 준비하는 걸 보며 호기심에 물었고 그때 그녀가 7월 22일이 임유진의 생일이라고 알려줬다.윤이는 아마 그 뒤로 계속 임유진의 생일을 마음에 두고 있었던 것 같다.하지만 생각해보면 탁유미와 탁유미 엄마를 제외하고 임유진만큼 윤이를 잘 대해줬던 사람이 또 없었으니 윤이가 그녀에게 애정을 보이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나도 이모한테 선물 주고 싶어요."아이의 진지한 표정에 탁유미가 눈을 깜빡였다.그녀는 임유진이 윤이를 도와준 일들이 떠올랐다. 임유진이 아니었으면 윤이는 이렇게 빨리 회복도 못 했을 것이고 좋은 치료도 받지 못했을 것이다.하지만 백화점 안에는 사람이 너무 많아 선물을 고르는 데 시간이 걸리고 얼굴이 노출될 위험도 커지게 된다.이경빈은 아직 S 시에 있고 그가 만약 윤이를 보기라도 한다면...탁유미는 저도 모르게 몸을 부르르 떨었다.몇 년도 지난 일이지만 그 남자의 얼굴을 떠올리면 그때의 고통이 되살아나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한때 가장 사랑했던 남자가 남기고 간 흉터가 말이다."엄마!"윤이는 고개를 쳐들고 간절히 원하는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어지간히 선물을 고르고 싶은가 보다.탁유미는 잠깐 망설이나 싶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알았어. 대신 빨리 골라야 해.""네!"탁유미는 아들의 손을 잡고 백화점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그녀는 오랜만에 보는 명품 브랜드를 보며 조금 쓸쓸한 마음이 들었다. 이경빈의 여자였을 때 그녀는 그에게서 셀 수도 없이 많은 브랜드 옷과 가방을 선물 받았다.탁유미가 원하는 거면 이경빈은 주저하지 않고 사다 주었다. 그때의 그녀는 이게 사랑인 줄 알았다.하지만 물질로 쌓아 올린 감정은 사랑이 될 수 없었고 거기에 진심은 조금도 담겨있지 않았다.그리고 그녀가 이걸 깨달았을 때는 이미 너무 늦어버렸다.윤이는 탁유미의 손을 잡고 3층 여성 브랜드 매장으로 향했다.사실 아이는 사고 싶은 것이 하나 있었는데 그건 바로 유리 구두였다. 얼마 전 공원에서 산
이경빈이다!그는 슈트 차림에 예전처럼 머리를 깔끔하게 위로 올렸고 잘생긴 얼굴은 단지 옆모습만으로도 탁유미의 심장을 아프게 했다.그는 마치 세월을 혼자 비껴간 사람처럼 여전히 가슴 떨리게 잘생겼다. 하지만 그에 반해 탁유미는 만신창이가 되었고 예전 모습은 찾아볼 수가 없었다.그때 그녀의 시선을 느끼기라도 한 듯 이경빈이 그들 쪽으로 고개를 돌렸고 탁유미는 홱 하고 고개를 돌리더니 이내 아들을 안고 비상계단 쪽으로 뛰어갔다."손님, 손님?"매장 직원은 얼떨떨한 표정을 지으며 탁유미를 향해 외쳤다.에스컬레이터에 타고 있던 이경빈은 그 찰나의 시간 동안 누군가가 황급히 도망가는 걸 본 후 얼굴이 급속도로 굳어졌다.그러고는 미친 듯이 에스컬레이터로 내려가 그녀가 달려간 곳으로 뛰어갔다. 한편, 이경빈 뒤에 있던 일행들은 평소 침착하고 여유롭기로 유명한 자신들의 대표가 갑자기 이성을 잃은 듯 뛰어가는 걸 보고 입을 다물지 못했다.이경빈의 경호원 두 명도 잠시 황당해하고 있다가 곧바로 이경빈을 따라갔다.이경빈는 지금 눈에 뵈는 게 없었고 오직 여자의 뒷모습만 눈에 아른거렸다.그 여자다! 그 여자가 틀림없다!분명히 칙칙한 옷을 입고 머리는 대충 위에 포니테일로 묶은, 그의 기억 속 여자와는 너무 다른 모습이었지만 달려가는 그녀의 뒷모습을 보는 순간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그 여자라고! 그리고 아까부터 거세게 뛰기 시작한 이 심장도 그녀가 맞다고 외치고 있는 듯했다.탁유미!몇 년간 머릿속에서 지워지지 않는 그 이름. 그녀의 눈물이, 그녀의 마지막 말이 시도 때도 없이 떠올랐다.탁유미는 감옥에 들어간 거로 모든 게 끝났다고 생각했겠지만, 절대 아니었다.그와 그녀는 절대 이대로 끝이 날 수가 없는 사이이고 그녀가 빚진 건 모두 찾아와야만 했다.하지만 출소 후 탁유미는 마치 증발이라도 한 것처럼 사라져버렸고 사람을 풀어도 봤지만, 여전히 아무런 수확도 없었다.그런데 S 시에 있었다니!이경빈이 1층으로 내려왔을 때 그녀는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엄마?"윤이는 택시에 올라탄 후에야 탁유미를 불렀다. 이모 선물을 고르고 있을 때 엄마가 왜 갑자기 자신을 안아 들고 허겁지겁 뛰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분명히 무슨 이유가 있을 거로 생각해 택시로 향하는 길 그는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아까는 엄마가 보고 싶지 않은 사람과 마주치는 바람 그만 윤이 생각도 안 하고 뛰어버렸네. 이모 선물은 엄마랑 다음에 와서 살까?" 탁유미의 말에 윤이는 착하게도 고개를 끄덕여주었다."엄마가 보고 싶어 하지 않는 사람은 나쁜 사람이에요?"그 말에 탁유미의 코가 시큰해졌다. 윤이가 지금보다 더 어릴 때 자신의 아빠에 관해 물은 적이 있었다. 그럴 때면 그녀는 항상 아이에게 아빠는 하늘에 있다고 대답했다.윤이가 언제 하늘에 있다는 의미를 알아챌지 그녀는 모른다. 하지만 아까 아빠가 불과 몇십 미터도 안 되는 거리에 있었다는 걸 말하면 안 된다는 사실만은 똑똑하게 알고 있다.너희 아빠는 너의 존재를 반가워하지도 않고 네가 있는 것도 모른다는 사실을 이 어린아이에게 어떻게 전할 수 있을까."엄마, 왜 울어요?"자그마한 손이 탁유미의 얼굴을 매만지며 그녀를 위로했다.탁유미는 그제야 자신이 울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엄마, 울지 마세요. 윤이 말도 잘 듣고 빨리 말도 배우고 앞으로 공부도 열심히 할게요."윤이는 그녀가 자신 때문에 속상해하는 거라고 생각했다.아직 듣지 못하던 시절 탁유미는 항상 그를 껴안고 울었고 외할머니와 얘기를 나눴다. 입술 모양으로밖에 추측할 수 없었지만 아마 아이의 귀가 안 들린다는 것 때문에 속상한 듯 보였다.그러다 수술을 성공적으로 마친 후부터 탁유미는 슬퍼하는 일이 적어졌고 매일매일 그에게 미소를 지었다.윤이는 엄마가 슬퍼하는 게 싫었기에 열심히 말을 배워서 엄마를 즐겁게 해주고 싶었다.또래 애들보다 빨리 철이 든 듯한 아이를 보며 탁유미는 마음이 아팠다."응, 엄마 이제 안 울게. 그리고 엄마는 앞으로도 계속 윤이 옆에 있을 거야."그녀는 평생을 윤이 옆에 있고 싶었지만, 자꾸만
임유진은 갑작스러운 소민준의 등장에 깜짝 놀랐다.오늘 장례식 참석 목록에 소씨 가문은 없었다. 그런데도 소민준이 이렇게 들어와 있다는 건 이곳 직원을 매수했던가 참석 인원에게 간절히 부탁한 게 틀림없다.소민준의 뒤로 소민영도 다리를 절룩거리며 다가왔다.“그런데 솔직히 우리 오빠한테 감사해야 하는 거 알죠? 오빠가 헤어져 주지 않았으면 강지혁 씨랑 결혼하지도 못했을 거 아니에요. 안 그래...”“소민영!”소민준은 소민영이 쓸데없는 소리로 임유진의 심기를 건드릴까 봐 크게 호통쳤다.“빨리 유진이한테 사과해!”그러고는 임유진을 바라보며 말했다.“유진아, 미안해. 민영이가 철이 없는 거 너도 알잖아. 그리고 다시 한번 사과할게. 정말 미안해. 나나 우리 집안이나 너한테는 미안한 마음뿐이야. 한 번만 봐주라... 제발...”임유진은 그 말에 문득 일전 강지혁이 진씨 가문을 상대하려 했던 것이 떠올랐다.소민준이 장례식까지 찾아와 이렇게 비는 걸 보면 아마 진씨 가문을 건드리는 동시에 소씨 가문도 건드린 것 같다.“사실 나도 그때 너 그렇게 보내고 마음이 편치 않았어. 특히 네가 억울했다는 게 밝혀진 뒤로는 더더욱. 만약 내가 그때 널 위해서 진실을 밝히려고 했으면 네가 그런 고생은 하지 않아도 됐을 거야. 정말... 너를 볼 면목이 없어.”소민준의 얼굴에는 후회의 감정이 잔뜩 서려 있었다. 게다가 눈시울까지 붉어진 것이 아마 다른 여성들이 봤으면 그가 잘못한 게 무엇이든 바로 용서해주려고 했을지도 모른다.하지만 임유진은 아니었다. 그녀는 그의 열연에도 표정 하나 변하지 않았다.그녀는 당시 진세령의 옆에 딱 붙어 서서 그녀의 손톱이 하나하나 뽑히는 걸 그저 지켜봤을 뿐만 아니라 피가 흥건한데도 표정 하나 변하지 않았던 소민준의 모습이 여전히 눈앞에 선했다.심지어 그는 고통스러워하는 그녀를 보며 제일 후회되는 일이 바로 그녀와 함께했었던 일이라고까지 했다.그렇게도 차갑고 태도가 손바닥 뒤집듯 바뀌는 남자인데 임유진이 지금 그의 아련한 얼굴을 좀
강현수의 시선이 너무 지독하게 한곳에 꽂혀있던 탓인지 조문객들이 하나둘 이쪽을 쳐다보며 수군거리기 시작했다.“강현수, 뭐 할 말 있어?”그때 강지혁이 임유진의 손을 잡으며 강현수를 노려보았다. 꼭 이 여자는 내 것이니 이만 꺼지라는 것 같았다.강현수는 잘 포개져 있는 두 사람의 손을 가만히 바라보더니 결국 끝까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시선을 떼고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한은정은 그 광경에 그제야 안도한 듯 표정이 풀어졌다.물론 안도한 건 한은정뿐만이 아니었다. 임유진 역시 다행이라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걱정하지 마. 아무 일도 없을 거야.”강지혁의 목소리가 귓가에 낮게 울려 퍼졌다. 그 소리에 임유진이 고개를 옆으로 돌리자 강지혁이 그녀의 두 눈을 바라보며 계속해서 말을 이어갔다.“오늘은 할아버지 장례식이라 강현수도 뭔 짓을 하지는 않을 거야. 여기서 일을 벌이면 그건 집안 간의 대립으로 이어질 테니까.”강지혁은 잠깐 머뭇거리더니 이내 임유진의 손을 더 꽉 잡았다.“강현수도 알 거야. 자기한테는 이제 그 어떤 기회도 없다는 걸.”그 뒤로 장례식은 순탄하게 진행됐다.임유진은 큰 배를 손으로 지탱하며 계속해서 강지혁의 곁을 지키다 조문객들이 조금 빠지고 나서야 밖에 있는 휴식 구역으로 가 휴식을 취했다.배 속의 아이들도 오늘은 분위기가 무거운 날인 걸 아는지 작은 태동만 있을 뿐 크게 그녀를 불편하게 만들지는 않았다.임유진은 의자에 앉아 습관적으로 자신의 배를 어루만지며 아이들에게 오늘 있었던 일들을 얘기해주었다.그때 그녀의 곁을 지키고 있던 경호원 몇몇이 부산스럽게 움직이기 시작했다.임유진이 고개를 돌려보니 멀지 않은 곳에 강현수가 서 있는 것이 보였다.경호원은 그가 임유진의 곁으로 다가오지 못하게 적당히 거리를 두고 그를 제지했다.“나한테 뭐 할 말 있어요?”임유진이 먼저 물었다.강현수는 임유진의 얼굴을 보며 방금 그녀가 배 속의 아이들과 다정하게 얘기를 나누던 장면을 떠올렸다.무척이나 낯선 모습이었지만 그
게다가 이제는 강문철도 없으니 임유진이 강씨 가문이 안주인이라는 건 그 누구도 반박할 수 없는 사실이 되었다.또한 임유진은 임신까지 했으니 아이들이 무사히 태어나면 그때는 그 누구도 그 자리를 감히 탐낼 수 없게 된다.장례식에 참석한 사람들 모두 그 사실을 인지하고 있기에 강지혁을 대하는 것처럼 그녀를 대했다.임유진은 강지혁의 아내로서 줄곧 강지혁의 곁에 있었다.강씨 가문은 S 시에서 가장 뿌리가 깊고 또 유명한 가문이라 장례식장도 컸고 조문객들도 훨씬 많았다.강지혁은 임유진이 무리라도 할까 봐 몇 번이나 그녀에게 이만 쉬라고 했지만 임유진은 고개를 저으며 계속해서 그의 곁을 지켰다.“나 아직 괜찮아. 진짜 힘들면 너한테 얘기할게. 나도 내 몸 귀한 줄 알아. 그러니까 걱정하지 마.”임유진도 자신이 아이셋을 가진 임산부라는 사실을 잘 인지하고 있었다.그때 조문객들이 입구를 바라보며 강현수의 이름을 불렀다.이에 임유진은 살짝 움찔하더니 저도 모르게 시선을 돌려 입구 쪽을 바라보았다.그러자 익숙한 남자의 실루엣이 천천히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는 것이 보였다.강현수와 마지막으로 본 것도 이제는 몇 달 전이었다.한때는 생사를 함께 했던 친구였는데 결국에는 썩 유쾌하지 않은 방식으로 헤어지게 되었다.강현수는 오늘 부모님과 함께 장례식에 참석했다.임유진이 그를 바라봤을 때 그의 시선 역시 임유진에게 닿아있었다.강현수는 임유진을 보자마자 옆으로 늘어트린 손을 살짝 움켜쥐었다.그토록 오래 찾아 헤맸던 사람을, 오랜 기간 마치 습관처럼 떠올렸던 사람을 그는 번번이 놓쳐버렸다.임유진과 다른 방식으로 다시 시작할 수도 있었는데 그는 그 가능성마저도 자기 손으로 부숴버렸다.그 결과 그녀는 다른 남자의 아내가 되었고 다른 남자의 아이를 임신했으며 지금 그 남자의 곁에 서 있게 되었다.강현수는 이제 영원히 그녀 곁에는 있을 수 없게 되었다.강현수네 가족이 강지혁과 임유진의 앞으로 다가왔을 때 강현수는 위로의 말을 건네는 부모님과 달리 아무 말도 하지
어쩌면 강지혁은 줄곧 할아버지의 사랑을 받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그 어린 나이에 아버지를 잃고 돌아온 그에게 유일한 버팀목이라고는 강문철밖에 없었으니까.“나는 솔직히 네 할아버지가 고마워. 혁이 너를 이렇게 멋있게 키워줬잖아. 그리고 나랑 만나게 해줬고.”임유진은 계속해서 그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을 이어갔다.“혁아, 네가 원하는 가족 간의 사랑은 앞으로 내가 줄게. 그리고 우리 아이들도 줄 거야.”그 말에 강지혁의 눈동자가 흔들렸다.임유진은 모든 걸 알고 있었다. 그가 무엇을 가장 원하는지 이미 다 알고 있었다.“아까 네가 그랬지? 사람마다 중요하게 여기는 게 다 다르다고. 그럼 너는? 네가 중요하게 여기는 건 뭔데?”강지혁이 임유진의 체향을 들이마시며 물었다.그녀의 냄새를 맡고 있으면 늘 이렇게 마음이 진정되고 몸이 편안해졌다.“나?”임유진은 그 말에 잠시 생각하다가 답했다.“내가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건 혁이 너랑 우리 아이들이야.”“유진아, 나는 욕심이 많아. 나는 너를 그 누구와도 나누고 싶지 않아. 그게 우리 아이들이라고 해도 나는 싫어. 나는 내가 네 마음속 1순위였으면 좋겠고 너한테 가장 중요한 사람이었으면 좋겠어.”강지혁의 말에 임유진이 눈을 깜빡였다.설마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아이들을 질투하는 건가?“혁아, 너는 내 마음속 1순위야. 물론 아이들도 너무 중요하고 소중하지만 너랑은 결이 조금 달라. 혁이 너는 나한테 유일무이한 존재잖아.”임유진은 두 손을 둘러 가볍게 강지혁을 끌어안았다.이미 배가 불러올 대로 불러와 완전히 꼭 끌어안지는 못했지만 싸늘한 방 공기를 녹이기에는 충분했다.“내가 너한테 유일무이한 존재라고?”“응. 널 대신할 사람은 그 어디에도 없어. 물론 아이들을 낳고 진정한 엄마가 되면 어쩔 수 없이 아이들에게 더 신경을 쓰고 더 관심을 쏟을 수밖에 없겠지.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네가 중요하지 않은 건 아니야. 이건 장담해. 그리고 네가 원하면 네가 원하는 방식대로 더 많이 널 사랑해줄게. 혁아,
별채로 가는 길에는 늘 조명이 켜져 있기에 어두운 저녁이라도 전혀 무섭지 않았다.임유진이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 보니 강지혁이 방 한가운데 멀뚱히 서 있는 것이 보였다.강지혁은 불빛을 받으며 시선을 내린 채 바로 앞에 있는 냉동관을 그저 가만히 바라만 보고 있었다.“혁아.”임유진은 그를 부르며 천천히 옆으로 다가갔다.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강지혁은 상념에서 빠져나와 고개를 돌렸다.“오지 말라니까. 여기는 나 혼자 있으면 돼.”“너랑 같이 있고 싶어서 왔어.”임유진은 강지혁의 바로 앞에 서서 그의 볼을 매만졌다.지금은 1월이라 날씨가 무척이나 추웠다. 게다가 지금은 밤이고 별채 쪽에는 보일러도 없었기에 바깥과 거의 비슷할 정도로 추웠다.“오늘 밤도 여기 있을 거야?”임유진이 물었다.“응. 그래도 날 키워주셨으니 할 도리는 다해야지. 내일 할아버지 장례식에 사람들 많이 올 거야. 너는 몸이 불편하니까 가지 말고 그냥 집에 있어.”“출산할 시기가 임박한 것도 아닌데 뭐. 내일 할아버지 장례식에 나도 참석할 거야. 만약 몸이 불편하거나 하면 바로 너한테 얘기할게.”강지혁은 그 말에 임유진의 손을 살짝 잡았다.“너한테는 좋은 기억 하나 없는 사람이잖아. 그런데 왜...”“네 할아버지잖아. 네 유일한 가족이잖아. 그러니까 아무리 나를 마음에 들지 않아 했어도, 아무리 끝까지 나를 손주며느리로 받아들이지 않았어도 나는 할아버지 가시는 길을 너와 같이 보내드려야 할 의무가 있어.”다른 건 없었다.그저 강지혁의 어린 시절을 곁에서 지켜줬다는 사실만으로도 임유진은 충분히 감사했다.강지혁은 그 말에 그녀의 손을 조금 세게 쥐었다.“할아버지가 마지막에 한 말은 신경 쓰지 마. 그 말은 그냥...”“알아. 네 할아버지는 그저 누군가를 깊게 사랑하는 것으로 행복한 결과를 낳을 거라는 걸 믿지 못하시는 분이었던 거지. 네 증조할아버지와 증조할머니 일도 있고 네 아버지 일도 있어서 많이 무서우셨을 거야. 너도 나중에 불행하게 될까 봐.”임유진이 말했
강지혁은 마치 강문철에게 자신이 임유진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보여주려는지 조금 격앙된 목소리로 얘기했다.강문철은 그 말에 눈동자를 돌려 자신의 유일한 손주를 노려보았다. 그러다 몇 초 후 이제는 모든 게 다 피곤한 듯 천천히 눈을 감으며 입을 열었다.“우리 집안에서... 여자한테 미친 인간 치고... 멀쩡한 사람을 못 봤다. 네가... 계속해서 이러면 너도 언젠가는...”강문철의 목소리가 점점 작아지는가 싶더니 이내 옆에 있던 종합모니터에서 삐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임유진은 그 소리에 강문철이 세상을 떠났다는 것을 바로 알았다.누군가의 생명이 바로 눈앞에서 멎었다.조금은 무서웠던 노인이, 강지혁의 유일한 가족이었던 노인이 이렇게 세상에서 사라졌다고 생각하니 어쩐지 모든 게 다 비현실적으로 다가왔다.강지혁은 삐 소리가 들린 뒤로 임유진의 손을 꽉 잡았다. 그렇게 계속 힘을 주다가 임유진의 입에서 아프다는 소리가 들리고서야 비로소 정신을 차리며 손을 놓아주었다.“미안. 아팠지?”강지혁은 어느새 빨개진 그녀의 손을 다시 잡으며 초조한 눈길로 물었다.“괜찮아. 그것보다 할아버지...”“응. 가셨어.”강지혁의 얼굴은 가족을 잃은 사람 같지 않게 무척이나 평온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정말 아무런 감정도 없는 게 아니라는 걸 임유진은 알고 있다.아무리 살가운 사이가 아니었어도 강문철은 강지혁의 할아버지고 유일한 가족이었다. 강선우가 죽은 뒤로 그의 곁을 지켜줬던 유일한 사람이었다.강지혁은 몸을 돌려 편히 잠든 강문철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았다.그리고 임유진은 그런 강지혁의 옆에 서서 그의 손을 꽉 잡아주었다....강문철의 장례식은 3일 뒤로 정했다.그 3일 동안 시신은 냉동관에 넣은 채 강씨 저택의 별채에 두기로 했다.그리고 그 3일 동안 강지혁은 그 어떤 외부인도 별채에 들이지 않았다.별채는 강씨 가문 사람 외에는 허락하지 않는 특별한 곳이었으니까.강선우가 죽었을 때도 그의 시신은 잠시 이 별채에 놓여 있었다. 그리고 지금은 그의
강지혁은 임유진의 고집에 결국 알겠다며 그녀와 함께 집에서 나와 병원으로 향했다.병원에 도착한 후 강지혁은 뒤따라온 경호원에게 임유진의 곁을 맡기고 혼자 병실로 들어갔다.안으로 들어가 보니 빼빼 마른 강문철이 흰색 병상 위에 가만히 누워있는 것이 보였다.한 시대를 주름잡았던 남자도 병마와 세월 앞에서는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었다.강문철은 강지혁이 안으로 들어온 것을 보더니 마지막 힘을 쥐어짜 입을 움직였다.“왔... 니...”“네, 저 왔어요.”강지혁이 곁으로 다가오며 대답했다.사실 강지혁은 강문철에게 대단한 가족 간의 정은 느끼지 못했다.실제로 강문철은 강지혁이 할아버지에 대한 애정을 느낄만한 행동을 보여주지 않았으니까.강문철은 언제나 강지혁을 자신의 뒤를 이어 강씨 가문의 모든 것을 물려받을 하나의 장기 말로 여겨왔다. 물론 그 장기 말도 쓸모가 없었다면 진작 버렸을 것이다.“이제는... 강씨 가문의 모든 게 네 손에... 달렸다. 만약... 네가 가문을 망하게 하면... 가만두지 않을 거야.”강문철이 숨을 몰아쉬며 힘겹게 말을 내뱉었다.“할 말은 그게 끝이에요?”강지혁이 강문철을 빤히 바라보았다.이에 강문철은 탁한 눈동자를 옆으로 굴려 병실 문 쪽을 바라보며 말했다.“임유진... 그 아가씨... 밖에 있지? 들어오라고 해...”그 말에 강지혁의 눈썹이 꿈틀거렸다.“유진이 건드릴 생각하지 마세요.”“이 꼴로... 내가 뭘 할 수 있을 것 같으냐? 어차피... 그 아가씨 옆에는... 네 사람 천지일 텐데.”강지혁은 그가 두 손으로 직접 키운 손주이자 가문의 후계자이기에 강지혁의 생각 같은 건 이미 훤히 꿰고 있었다.강지혁이 움직이지 않고 가만히 있자 강문철이 다시 입을 열었다.“그저... 마지막으로 해줄 얘기가... 있어서 그러는 것뿐이다...”호흡이 점점 가빠지고 안색도 창백해진 것이 정말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듯했다.강지혁은 잠깐 고민하다가 결국 발걸음을 옮겨 병실 밖으로 나갔다. 그러고는 곧바로 임유진의 손을
“그래? 그럼 만약... 내가 너한테 상처를 줘도 너도 똑같이 나 안 볼 거야? 내가 아무리 용서해달라고 빌어도 나 용서 안 해줄 거야?”강지혁은 목구멍을 쥐어짜는 듯한 목소리로 한마디 한마디 힘겹게 내뱉었다.이에 임유진은 몸을 돌려 이해가 안 간다는 얼굴로 강지혁을 바라보았다.“혁아, 너 대체 왜 그래? 요즘 따라 너무 불안해 보여. 무슨 일 있는 거야?”강지혁은 자신의 불안해 보인다는 말에 고개를 푹 숙였다.확실히 그는 요 며칠 줄곧 불안해하고 있었다.탁유미와 이경빈의 일을 가까이에서 지켜보며 자신과 임유진의 결말도 그들과 똑같을까 봐 불안해하고 있었다.“혹시 방금 내가 한 말이 널 불안하게 만들었어? 혁아, 내가 언니를 이해한다고 했던 건 소민준과의 일이 생각나서 그랬던 거야. 네가 괜한 생각을 할 게 아니라고. 네가 나한테 상처 줄 리가 없잖아. 그리고...”임유진은 손을 들어 조금 우울해 보이는 강지혁의 눈가를 부드럽게 매만졌다.“전에 내가 말했잖아. 네가 정말 나한테 미안해야 할 일을 했다고 해도 울면 봐주겠다고.”그녀는 강지혁의 눈에 담긴 우울함이 사라질 수 있게 일부러 환히 웃으며 얘기했다.그러자 그 말을 들은 강지혁의 눈에 조금씩 빛이 들어오기 시작했다.“유진아, 너를 향한 내 감정은 언제나 그대로일 거야. 앞으로 무슨 일이 생기든 절대 변하지 않을 거야.”강지혁은 임유진의 오른손을 들어 자신의 심장에 가져갔다.“그러니까 너도 약속해. 날 영원히 사랑하겠다고. 절대 변하지 않을 거라고. 약속해.”임유진은 그 말에 눈을 깜빡였다.탁유미와의 대화에서 사람의 감정은 언젠가는 변한다는 말에 깊이 공감했는데 눈앞에 있는 남자는 자신의 감정은 변하지 않을 거라고 하고 있다.소민준과의 관계에서 질릴 대로 질려 그에게 모든 감정이 사라진 건 사실이다. 하지만 지금 눈앞에 있는 남자를 사랑하고 있고 그와 영원히 하고 싶은 것 또한 사실이다.“응, 영원히 너만 사랑할게. 절대 변하지 않을게. 약속해.”임유진은 진지한 얼굴로 그에
임유진은 한지영이 정신을 차린 모습을 떠올리면 마음이 아프다가도 그녀가 활기를 되찾아줘서 참으로 고마웠다.한지영은 백연신과 그렇게 헤어진 후 자포자기하는 것이 아닌 적극적으로 치료에 임하며 회복에 힘썼다. 심지어 며칠 전에는 미소를 지으며 이런 말까지 했다.“고작 남자랑 헤어진 것뿐인데 뭐. 연애가 다 이런 거 아니겠어? 사랑했다가 또 헤어졌다가. 그래서 결혼까지 가는 게 기적이라는 말도 있잖아. 열렬히 사랑했으니 그거로 난 됐어. 혹시 알아? 퇴원한 뒤에 진정한 내 운명이 나를 찾아올지.”“다행이네요.”탁유미는 한지영의 말을 전해 듣고 잔잔한 미소를 지었다.“유진 씨랑 지영 씨는 나처럼 이러지 말고 정말 행복했으면 좋겠어요.”그녀는 자신의 인생에서 더 이상의 사랑은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대화를 나누던 임유진과 탁유미는 병실 밖의 누군가가 그들의 대화를 다 듣고 있는 것을 몰랐다....임유진은 탁유미에게 인사한 후 강지혁과 함께 강씨 저택으로 돌아왔다.찌뿌둥한 몸을 이끌고 2층으로 올라가려는데 강지혁이 뒤에서 그녀를 품에 끌어안았다.“왜 그래?”갑작스러운 포옹에 임유진이 물었다.사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강지혁은 오늘따라 말수가 무척이나 적었고 시선은 거의 창밖에 고정하다시피 했다.그 모습에 임유진이 몇 번이나 무슨 일 때문에 그러는지 물었지만 강지혁은 그때마다 아무것도 아니라며 대답을 피했다.“그냥... 갑자기 안고 싶어져서.”강지혁은 낮게 중얼거리며 아까 병원에서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그는 이경빈을 따라 탁유미의 병실 앞으로 왔다가 비스듬히 열린 문틈 사이로 임유진과 탁유미의 대화 내용을 들었다.탁유미가 자신에게 상처 준 사람은 다시 받아줄 생각이 없다고 했을 때 이경빈은 휘청하며 그대로 주저앉았고 입을 틀어막으며 흐느끼는 소리가 새어나가지 않게 했다.그 순간만큼은 우는 것조차도 그에게는 허락되지 않았다.“맨날 안으면서 아직도 부족해?”임유진이 실소하며 물었다.“응. 부족해.”강지혁에게는 어쩌면 평생 부족할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