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적 강지혁은 행여나 이 노인의 눈 밖에 날까 봐 조심하고 또 조심했다.그러다 지금 드디어 한때는 자신의 운명을 쥐고 있던 노인이 나이가 들었다.할아버지와 손자 사이라고는 하지만 피가 섞인 외에 가족 간의 정은 아마 얼마 없을 것이다."저 임유진과 결혼해요."청량한 목소리가 정적을 깨웠고 강지혁은 마치 통보하듯 말을 내뱉었다."결혼?"강문철이 피식 웃었다."그 여자는 우리 강씨 집안과 어울리지 않아.""그건 내가 정해요."강지혁은 여전히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고 강문철은 우습다는 듯 코웃음을 쳤다."네가 지금 그 여자 사건까지 뒤집고 있다지?"강문철은 병상에 계속 누워있지만 그렇다고 소식까지 느린 것은 아니었다. 어쩌면 다른 사람들보다 알고 있는 것이 더 많을지도 모른다."그 여자는 아니? 그 사건에 사실 너도 엮여 있었다는 거."강문철은 여유롭게 물었고 강지혁의 얼굴은 금세 어두워졌다."전에도 말씀드린 것 같은데요. 난 그 일을 절대 유진이가 모르게 할 예정이라고.""그럼 내가 대신 말해줄까? 그 여자가 그걸 알고도 너와 결혼하겠다고 하는지 궁금하구나. 만약 돈이 목적인 여자라면 그 사실을 알고도 저와 결혼할 테지. 강씨 가문의 며느리가 되면 앞으로 막대한 재산을 손에 쥐고 휘두를 수 있을 거니까. 다만 지혁아, 너는 네 어미처럼 돈만 밝히는 그런 여자를 원하는 거냐?"지금의 강문철은 마치 악마처럼 두 개의 막다른 길을 강지혁이 앞에 내어주었다. 만약 임유진이 사실을 알고 그를 포기한다면 당연히 결혼은 못 하게 될 것이고 만약 그를 포기하지 않고 결혼을 원한다면 임유진은 강씨 일가의 돈 때문에, 돈을 보고 결혼했다는 것을 증명하는 꼴이 된다.그리고 강지혁은 돈만 보고 아버지와 결혼한 어머니를 극도로 경멸하고 미워했다.그래서 이 사실을 임유진이 알게 되는 순간 결혼은 물 건너가게 되는 것이다.강지혁은 얼굴을 굳히더니 천천히 병상 옆으로 다가왔다.강문철의 옆을 지키던 비서가 그의 앞을 가로막으며 말했다."도련님, 뒤로...
강문철은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직접 키운 아이기는 하지만 도저히 입맛대로 다룰 수가 없었다. 그리고 그는 하루가 다르게 늙어가고 있고 아이는 하루가 다르게 강해지고 있다."너 이렇게 보니 정말... 네 아버지를 많이 닮았구나."강문철은 조금 복잡한 눈으로 자기 손주를 바라보았다. 그때 당시 강선우도 강문철의 앞에서 강지혁의 엄마와 결혼을 꼭 해야 한다고, 그녀를 위해서라면 강씨 집안 도련님 신분 따위 포기해도 상관없다고 했었다.마치 강문철이 일궈놓은 것이 전혀 값어치가 없다는 것처럼 말이다.강지혁은 그의 말에 그저 침묵할 뿐이었다."하지만 언젠간 후회할 거다. 네 아버지처럼 후회할 거야..."강문철은 강선우를 떠올리며 입을 열었고 강지혁은 그 어느 때보다 더 확고하게 답했다."난 후회 안 해요. 유진이를 사랑하고 유진이와 결혼하기로 마음먹은 건 아마 제일 잘한 일일 거예요.""그러냐? 하하하..."강문철은 갑자기 웃음을 터트렸다."후회를 안 한다라... 말은 쉽지. 그런데 네가 후회하는 꼴을 내가 볼 수 있겠는지 모르겠구나.""그럼 더 오래 사시던가요."강지혁은 강문철을 빤히 바라보며 말해다."백 세까지 사셔서 내가 얼마나 후회 안 하고 잘살고 있는지 한번 보세요. 그때가 되면 아마 나와 유진이 사이에서 나온 아이도 볼 수 있을지 모르죠. 그리고 그게 더 재밌지 않겠어요?"강지혁은 말을 마친 후 발에 힘을 풀었고 바닥에 깔려있던 비서는 얼른 일어나 옷매무새를 정리하고는 강문철을 향해 물었다."회장님, 괜찮으세요?"강문철은 고개를 저으며 자신의 손주를 바라보았다."내가 정말 백 세까지 살았으면 좋겠냐?""네."강지혁이 옅게 웃었다. 아까까지만 까만 눈동자에 서려 있던 살기는 어느샌가 사라지고 없고 그 대신 부드러움이 자리 잡았다."할아버지, 백 세까지 사시라고 한 말 진심이에요. 제가 아버지와 달라 얼마나 행복하게 사는지 할아버지도 드디어 깨달으시는 날이 오겠죠."그 말을 끝으로 강지혁은 병실을 나갔다.강문철의 눈에
"다만, 뭐?"강지혁이 물었다."내 몸에 흉터가 좀 많아서 웨딩드레스는 전신을 감싸는 듯한 디자인 밖에 할 수 없을 거야. 노출이 많으면 흉터가 드러나잖아."임유진은 조금 민망해 하며 말했다.하지만 그 모습에 강지혁은 또다시 마음이 찌릿하게 아파왔다."보수적인 디자인도 좋아. 난 내 신부가 노출이 많은 옷을 입는 거 싫어."강지혁은 입꼬리를 씩 올리고는 임유진을 꼭 끌어안았다."솔직히 말하면 나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노출이 하나도 없었으면 좋겠어. 누나도 알지? 나 소유욕 엄청나게 강한 거. 그래서 나는 다른 사람들이 내 여자를 아예 보지 말았으면 좋겠어."임유진은 그의 말로 민망했던 마음이 싹 가셨다."혁아, 고마워."임유진이 중얼거렸다."나, 누나 기분 생각해서 이런 말 하는 거 아니야. 진심이야."강지혁은 입술로 임유진의 얼굴을 이리저리 비비적거리며 말했다."나는 누나 몸에 흉터가 있다고 해도 상관없어. 그 흉터마저 소유하고 싶으니까. 가능하면 어디 무인도에다 누나를 가둬두고 나만 보고 싶은 기분이야. 그러면 누가 뺏어갈 일도 없을 테니까."임유진이 피식 웃었다."누가 날 뺏어가."강지혁은 대답 대신 그녀를 빤히 바라봤다.임유진은 모를 것이다. 그녀가 강지혁을 얼마나 떨리게 하고 미치게 하는지. 그리고 그 특유의 분위기 때문에 또 얼마나 사람을 편하게 만들어주는지.그건 마치 어떻게 할 수 없는 임유진만의 마력과도 같았다. 그리고 강현수도 그걸 똑같이 느꼈을 것이다.그 증거로 강현수는 임유진이 자신이 찾는 여자가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결국 끌려버리고 말았다.임유진은 고심 끝에 디자이너를 골랐다. 해당 디자이너의 작품을 보면 클래식하고 보수적인 스타일이 많았고 그것이 그녀의 요구에도 꼭 들어맞았다.강지혁도 물론 그녀가 좋다고 하면 다 좋았다."참, 우리 결혼하는 거 너희 할아버지가 허락하실까? 반대하시면 어떡해?"임유진이 조심스럽게 물었다."허락은 안 하시겠지만 이건 우리 결혼이야. 난 할아버지 의견 필요 없어."강
임유진은 그 어린 강지혁이 그 저택에서 혼자 얼마나 외롭고 쓸쓸하고 무서웠을지 너무나도 상상이 갔다. 하나밖에 없는 핏줄에게서는 가족의 정을 느끼지 못하고 심지어는 언제든지 대체 당할 걱정까지 해야 한다는 게 말이나 되는 일인가.강지혁은 그래서 부단히 강해질 수밖에 없었고 나약해질 기회조차 허락받지 못했다. 나약함을 보이는 순간 바로 버려질 게 뻔했으니까."어릴 때 많이 힘들었어...?"임유진은 눈앞에 있는 남자가 안쓰러워 미칠 것 같았다.그를 알기 전 다른 사람의 입을 통해 강지혁을 알았을 때 그녀는 위에서 고고하게 내려다보는 남자는 걱정 없이 편히 인생을 즐길 것만 같았다.하지만 지금 보니 걱정 없이 편히 살 수 있는 사람은 없었고 강지혁이 현재 누리는 모든 것들은 어린 그가 힘들게 얻은 것이다.어린 나이에 다른 아이들은 상상조차 못 할 것들을 짊어지고 있었다."괜찮아."강지혁은 기다란 손가락으로 그녀의 볼을 어루만졌다. 지금 이 순간, 임유진의 눈동자에는 온통 강지혁밖에 없었다."모두 지난 일이고 적어도 지금은 내 걱정 안 해도 돼. 이제는 누구도 나를 함부로 대체할 수 없을 테니까."강지혁의 운명은 이제 오로지 그의 손에 쥐고 있으니까."응, 모두 지난 일이야."임유진은 그의 손을 잡고는 볼을 그의 손바닥에 비볐다."나한테 있어 너는 절대 다른 사람으로 대체할 수 없어."강지혁의 그녀는 꼭 이렇게 듣고 싶은 말만 해준다."그 말 영원히 잊어버리지 마."강지혁은 낮게 속삭이더니 허리를 숙여 그녀의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포갰다.키스가 끝나고 임유진은 또다시 조금 전 문제로 돌아갔다."그럼 할아버지 쪽은 정말 이대로 내버려 둘 거야? 아니면 내가... 내가 만나볼까?"이 말을 하는 그녀의 몸이 살짝 떨렸다. 강문철을 향한 두려움을 어떻게 금방 떨쳐낼 수 있을까."아니야."강지혁이 말했다."아까도 말했지만 나는 할아버지가 허락하든 안 하든 누나와 결혼 할 거야. 만약 할아버지가 누나한테 허락 안 한다고 하면 누나는 나와
임유진은 탈의실로 들어가 웨딩드레스를 갈아입었고 한지영도 들어가 도왔다.한편, 탈의실 밖 대기 공간에는 강지혁과 백연신 두 남자가 앉아 있었다.백연신은 솔직히 강지혁이 이렇게까지 빨리 임유진과 결혼식을 올리게 될 줄은 몰랐다."임유진 씨 사건 곧 뒤집을 수 있을 것 같다면서요?"백연신이 먼저 화제를 찾아 말을 걸었다."소식이 빠르시네요."강지혁은 고개를 들어 백연신을 쳐다보았다."지영이가 임유진 씨 사건이라면 눈에 불을 켜고 달려들어서요. 그래서 나도 자연스럽게 알게 된 게 많아요."백연신이 말을 이었다."그런데 듣기론 강지혁 씨는 이번 사건의 원흉이 허재명이라고 하셨다면서요?"강지혁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은 채 그저 백연신을 뚫어지게 바라보기만 했다."임유진 씨 사건, 나도 조사한 적 있어요. 허재명은 정말로 책임을 회피하려고 모든 걸 임유진 씨에게 덮어씌우려고 했을지도 모르죠. 하지만 그때 당시 허재명은 사건이 종결된 후 바로 사직서를 내고 해외로 나갔어요. 그런데 누가 봐도 수상쩍은 행동을 한 그를 진씨 가문은 가만히 내버려 뒀죠."백연신의 질문에 강지혁이 차갑게 물었다."무슨 말이 하고 싶은 겁니까?""그저 진씨 일가도 수상하다고 생각됐을 뿐이에요."백연신이 웃으면서 말했다."그 당시 파일을 보면 진씨 일가는 마치 뭔가에 쫓기듯 서둘러 임유진 씨의 죄를 단정 지으려고 그뿐만 아니라 당시 언론매체나 여론도 재판부에 빨리 사건을 종결시키라는 이상한 부담을 줬더라고요. 그리고 비슷한 다른 사건과 비교해 봤을 때 이 사건은 유독 빨리 끝났기도 했고요."강지혁은 입을 꾹 다문 채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고 그에 반해 백연신은 계속 말을 이어갔다."물론 사회적 관심이 많이 쏠린 사건이니만큼 빨리 종결한 것도 있었겠죠. 하지만 지금 임유진 씨가 무죄라는 게 증명이 되면 진씨 가문이 당시 정말 숨기는 게 없는 건 맞는지 다시 한번 의심해 볼 필요가 있죠."강지혁은 묵묵히 듣고 있다가 차가운 목소리로 대꾸했다."백연신 씨가 이렇게나
정말 천사가 아닐까...?강지혁은 마치 진짜 천사를 만난 사람처럼 말로 이루 표현할 수 없는 표정을 지었다. 아마 그에게는 임유진이 천사가 맞을 것이다. 메마른 그의 삶을 구제해주고 의미를 부여해줬으니 말이다.만약 임유진이 없었다면 강지혁은 아마 계속 그렇게 무의미한 채로 살았을 것이다."혁아, 어때?"임유진이 물었다.아까 문이 열리기 전 거울을 보는데 거울 속 자신의 모습이 너무 예뻐서 그녀는 마치 딴 사람을 보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이 드레스로 결정한 건 아니지만, 정말 너무 예뻐서 소리를 지를 만큼 마음에 들었다.아마 여자들의 마음속에는 모두 웨딩드레스를 향한 로망이 있는 듯싶다.어릴 적 임유진은 예쁜 웨딩드레스를 입고 입장하는 신부를 보며 언젠가는 자신도 저런 드레스를 입고 동화 속 왕자님과 행복하게 살고 싶었다.그리고 지금... 임유진은 드디어 그녀만의 왕자님을 만난 것 같았다.그녀는 자신을 향해 걸어오는 강지혁을 바라봤다. 그는 마치 모델처럼 정장을 너무 잘 소화했고 아마 기본 티에 츄리닝을 입혀도 강지혁은 여전히 멋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게다가 신이 내린듯한 정교한 이목구비는 그를 한층 더 돋보이게 해주었다."예뻐."섹시한 입술에서 간단명료한 두 글자가 튀어나왔다."나도 이 드레스 너무 예쁜 것 같아."임유진이 웃으며 대답했다."아니, 옷 말고 너."강지혁의 말에 그녀는 금세 얼굴이 핑크빛으로 달아올랐다.다른 남자들이 이런 말을 하면 느끼해 보이기만 하던데 왜 강지혁이 하면 이렇게나 설렐까?임유진은 아까부터 심장이 거세게 뛰었다."너 지금 순백의 천사 같아."강지혁은 허리를 숙여 그녀의 귓가에 입술을 가까이 갖다 대고 임유진만 들을 수 있게 속삭였다."그래서 널 이대로 납치해 내 곁에만 두고 싶어."만약 정말 천사라면 강지혁은 임유진이 어디에도 못 가게 그녀의 양 날개를 부러트리고 싶다는 생각도 했다.임유진은 얼핏 들으면 조금 무서운 고백도 강지혁의 입에서 나와서 그런지 설레고 심장이 콩닥콩닥 뛰었
“파였어요? 난 모르겠는데.”한지영은 몸에 걸친 드레스를 훑어봤다. 그녀는 어깨가 드러난 이브닝드레스를 입었다. 치마 길이는 뒷면이 앞면보다 긴데 앞면은 무릎 위까지 내려오고 뒷면은 발목까지 내려온다.드레스 핏이 워낙 예뻐 그녀의 몸매를 한 층 업그레이드해주고 허리라인도 맞춤하게 잡아줬다.이건 여자들이 꿈에 그리던 완벽한 효과였다!한지영이 백연신에게 말했다.“나 이렇게 입으면 뭔가 좀 있어 보이고 섹시한 것 같지 않아요? 몸매도 훨씬 예뻐 보이고요.”백연신은 안색이 확 어두워졌다.‘한지영 얘는 여자 맞아? 내 앞에서 뭐가 있어 보인다느니, 섹시하다느니, 뭘 이렇게 거침없이 묻고 있어. 날 아예 남자로 안 보는 거야?’두 사람은 현재 명의상 애인 사이가 맞지만 한지영은 마음속으로 단 한 번도 그를 남자친구로 생각한 적이 없는 듯싶다!그녀에게 백연신은 그저 복수하고 빚이나 돌려받으려는 사람일 뿐이다.“너 진짜 이 옷 입고 신부 들러리를 할 생각이면 미리 말하는데 결혼식 날 예식장도 못 갈 줄 알아!”백연신이 싸늘하게 말을 내뱉었다!“연신 씨...”한지영이 그를 째려봤다.“왜 이래요 진짜. 고작 드레스일 뿐이잖아요!”“그럼 어디 해보시던가. 내가 보내줄 것 같아?”백연신이 말을 이었다.“세상 어떤 남자가 제 여자친구에게 노출이 심한 옷을 입히는 걸 좋아하겠어?”그녀의 몸매는 확실히 눈 호강할 만큼 날씬하고 예쁘다. 다만... 백연신만 보면 됐지 딴 남자들에겐 절대 보여줄 수 없다.게다가 강지혁의 결혼식에 수많은 하객이 참석하겠는데 그중에서 한지영에게 흑심을 품을 남자가 없을 거란 보장은 못 한다.한지영은 한심해서 말문이 막혔다. 왠지 백연신이라면 정말 그런 일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아니 그렇지만 그녀가 전에 백연신을 따라 연회에 참석했을 때 지금 한지영이 입은 드레스보다 훨씬 노출이 심한 드레스를 입고 온 여자들을 봐도 백연신은 노골적이란 말 한마디 없었다!요즘 드레스 중에 어깨를 가린 드레스가 몇 개나 된다고!백연신은
외할머니는 얼마 전에 퇴원하시고 집에 돌아가 편히 휴식을 취하셔서 병이 차츰차츰 나아질 거로 알았는데... 어떻게 이럴 수가!방금 병원 간호사에게 전화가 걸려 왔는데 그 간호사는 외할머니의 부탁을 받고 임유진에게 전화했다. 할머니가 지금 병원에 계시는데 상태가 매우 위독하시고 간헐적 혼수상태에 빠져있다고 했다. 한편 외할머니의 마지막 소원은 죽기 전에 임유진을 한 번 보는 거라고 하셨다!간호사는 외할머니가 이미 입원하신 지 3일이 되었다고 하는데 큰 삼촌, 둘째 삼촌, 그리고 셋째 이모까지 왜 아무도 그녀에게 전화해서 알리지 않았을까?오늘 간호사의 전화가 없었더라면... 그랬다면 임유진은 외할머니의 마지막 모습도 못 지켜봤을 것이다!‘아니, 아니야. 마지막 모습이라니, 그럴 리 없어.’임유진은 속으로 끝없이 되뇌었지만 휴대폰을 쥔 두 손은 점점 더 세게 떨렸다.이때 강지혁이 커다란 손으로 그녀의 떨리는 두 손을 잡고 다정하게 말했다.“걱정 마. 무슨 일 있어도 내가 항상 옆에 있어.”임유진은 고개 들어 옆에 앉은 강지혁을 쳐다봤다.“혁아, 할머니가 만약 진짜...”‘죽음’이란 두 글자는 목에 걸린 듯 도저히 내뱉을 수 없었다.“나 어떡해? 할머니 잃고 싶지 않단 말이야!”가족 중에 외할머니만이 그녀를 진심으로 대했다. 나중에 제대로 효도해드리며 할머니를 모시고 여기저기 구경시킬 생각인데 이젠 그 희망들이 회색빛으로 변해버린 것만 같았다.잃고 싶지 않다고... 강지혁이 입술을 앙다물었다. 그도 한때 엄마를 잃고 싶지 않았지만 결국 엄마는 떠나갔다. 나중에 아빠도 잃고 싶지 않았지만 또 끝내 그의 곁을 떠났다.지금 강지혁이 지키고 싶은 사람은 임유진 한 명뿐이다!“유진아, 네겐 아직 내가 있어. 무슨 일이 있어도 내가 항상 옆에 있어 줄게!”강지혁이 부드럽게 말했다.그는 신이 아니다. 아무리 권력과 재력을 지녀도 생명 앞에선 가끔 무기력해질 따름이다.병실에서 노쇠한 어르신은 사경을 헤매고 있었다. 간신히 숨을 쉬며 버텨가는 중이었고
윤이는 한참이 지나서야 자신이 여전히 임유진을 안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 얼굴이 빨개진 채 서둘러 그녀를 품에서 놓아주었다. 귀까지 빨개진 것이 무척이나 귀여워 임유진은 저도 모르게 소리 내 웃었다.윤이는 여전히 예전의 그 귀여운 윤이었다.강선율은 유치원에 가야 했기에 임유진은 오늘 강선현만 데리고 나왔다. 현이와 윤이는 다행히도 죽이 잘 맞는 듯했다.그런데 둘이서 잘 얘기하며 놀던 중에 현이가 윤이의 귀에 꽂혀있는 보청기를 신기한 눈으로 보더니 곧장 보청기를 빼버렸고 그 탓에 하마터면 보청기가 물컵 안에 떨어질 뻔했다.임유진을 그걸 보고는 엄한 얼굴로 그러면 안 된다고 얘기해 주었다.그러자 현이가 눈을 깜빡이며 이해가 안 된다는 얼굴로 물었다.“왜? 이거 중요한 거야?”“응, 이거 없으면 소리를 못 들어. 그래서 이걸 꼭 착용하고 있어야 해.”탁윤이 차분한 목소리로 대신 대답해주었다.윤이는 세상 사람들이 어떠한 시각으로 장애인을 보는지 이제는 굳이 누구에게 듣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보청기를 끼고 있는 이상 일반인과 다를 거 하나 없는데도 학교에서는 여전히 그에게 동정 어린 시선을 보내거나 키득키득하며 대놓고 조롱의 시선을 보내는 아이들이 존재했다.“우와! 이 보청기 대단하다. 이거 덕분에 오빠가 현이 목소리도 들을 수 있는 거잖아. 정말 잘 됐다! 오빠, 현이가 나중에 오빠를 위해서 피아노 연주해줄게. 현이 피아노 엄청 잘 쳐!”현이가 눈을 반짝이며 윤이에게 말했다.만약 이곳에 피아노가 있었으면 아마 이런 말 할 겨를도 없이 바로 자기 솜씨를 뽐내러 건반을 두드렸을 것이다.탁윤은 초롱초롱한 눈으로 말하는 현이를 조금 멍한 얼굴로 바라보았다. 현이는 진심으로 그가 들을 수 있는 것에 기뻐하고 있었다.이제껏 다른 사람에게 청력에 관한 얘기를 했을 때 이런 대답을 들은 적은 이번이 처음이었다.그래서일까, 윤이는 현이의 말과 미소에 괜스레 마음이 따뜻해지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그래. 현이가 쳐주는 피아노 연주 꼭 들을게.”사실
지난 5년간 그는 매일같이 후회했다. 그때 임유진과 조금 더 가까워질 기회를 자기 스스로 놓쳐버렸던 그였으니까. 결과적으로 그는 자기 손으로 그녀를 강지혁에게 내어준 거나 다름이 없었다.그리고 그 때문에 임유진은 절벽에서 떨어지고 말았다.만약 그때 억지로라도 그녀를 곁에 두었으면 어쩌면 그딴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차량이 강씨 저택 앞에 도착했다.강현수가 차에서 내려 안으로 들어가려 하자 경호원들이 그의 앞을 막아섰다.“유진이 보러 온 거니까 비켜.”강현수를 알아본 경호 실장이 예의를 갖추어 그에게 말을 건넸다.“사모님께서는 지금 외출 중이십니다. 사모님과 만나 뵙기를 원하시면 후일 따로 약속을 잡고 오시죠.”강현수는 그 말에 떠나는 것이 아닌 차에 기댄 채 임유진이 오기를 기다렸다.몇 시간이 걸린다고 해도 상관없었다. 5년이라는 시간에 비하면 몇 시간 정도는 귀여운 수준이었으니까.경호원들은 고집스러운 그의 행동에 별다른 얘기는 못 하고 그저 그를 가만히 내버려 둘 수밖에 없었다. 그도 그럴 게 아무리 강지혁이 대단하다고 한들 강현수도 만만치 않은 인물이었으니까.그시각, 임유진은 현이와 함께 강씨 저택으로 돌아오는 지하철에 안에 있었다.사실 외출하겠다고 했을 때 집사가 차량을 준비해두겠다고 했지만 임유진은 오랜만에 돌아오기도 했고 또 딸에게 S 시를 제대로 보여주고 싶어 집사에게 지하철로 가겠다고 했다. 이곳은 그녀와 강지혁이 만나고 서로 알아가고 사랑했던 곳이니까.“엄마, 우리 다음에 또 윤이 오빠 보러 가자. 그때는 율이 오빠도 같이!”현이가 활짝 웃으며 말했다. 기분이 좋아 보이는 것으로 보아 탁윤이 상당히 마음에 들었던 모양이다.“그래, 다음에는 율이도 같이 가자. 유미 이모랑 윤이가 엄청 좋아할 거야.”두 사람이 오늘 외출한 이유는 탁유미 때문이었다.탁유미는 간이식 수술을 받은 뒤로 전과 같이 힘들게 일을 하는 건 무리라 윤이 초등학교 근처에 작은 분식점을 차렸다.그 덕에 윤이는 하교하고 나면 바로 분식집에 들
강지혁은 조금 어색하게 고개를 돌리더니 허리를 다시 바로 세웠다.“별로.”그는 이 말을 남긴 후 강선율의 손을 잡고 밖으로 향했다.임유진은 두 사람이 떠난 후 멍한 얼굴로 강지혁의 말을 곱씹어보았다.‘별로... 싫은 건 아니라는 뜻인가? 정말 싫었다면 혁이 성격상 바로 얘기했을 테니까. 그렇다는 건 앞으로도 계속 그렇게 쓰다듬어도 된다는 말인가?’임유진은 강지혁이 생각보다는 그녀를 잘 받아주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어쩌면 그가 자신을 다시 사랑하게 만드는 게 그렇게까지 어려운 일은 아닐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네가 여기까지는 웬일이야?”이한이 웃으며 강현수에게 물었다.“시간이 조금 비어서 왔어.”강현수가 답했다.“그리고 며칠 뒤에 또다시 나가봐야 할 것 같아서 그 전에 얼굴 한번 보려고.”“또 해외로 간다고? 돌아온 지 일주일도 채 안 됐잖아.”“해외에서 새로 시작한 프로젝트가 있는데 주관할 사람이 필요해.”강현수가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아저씨도 너 가는 거 동의하셨어?”“아버지가 동의 안 한다고 해서 달라지는 건 없어. 내가 가겠다고 한 거니까.”이한은 잠깐 멈칫하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현수야, 너 자꾸 해외로 나가는 거 임유진 씨 때문이지?”강현수는 그 말에 얼굴이 확 어두워졌다. 여전히 그는 임유진이라는 이름을 듣는 것만으로도 숨이 막히고 가슴에 통증이 밀려왔다.“임유진 씨가 죽은 것 때문에 괴로워서 해외로 나가는 거라면 이제 그러지 않아도 돼. 그럴 필요가 없어졌으니까.”이한이 강현수의 얼굴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유진 씨 죽지 않았어. 다시 돌아왔어. 지혁이 곁으로.”어차피 임유진이 살아있단 얘기는 그가 말하지 않아도 강현수도 며칠 뒤면 자연스럽게 알게 될 일이다.강씨 가문의 안주인이 사실은 죽은 게 아니라는 것과 다시 살아서 강지혁의 곁으로 돌아왔다는 걸 알 사람들은 이미 다 알고 있으니까.강현수는 그간 줄곧 해외사업에만 몰두하고 있어 국내 소식은 조금 늦게 접하는 편이었다. 만약 그
강지혁의 오른쪽 옆에 앉은 강선현이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며 물었다.“아빠, 안 먹어? 엄마가 만든 김밥 엄청 맛있어! 현이가 장담해!”아이는 말을 마친 후 다시 고개를 돌려 왼쪽 옆에 앉은 강선율을 바라보았다.“오빠도 엄청 맛있다고 했어. 그치?”강선율은 그 말에 입에 김밥을 넣은 채로 잠깐 멈칫하더니 이내 어색하게 고개를 끄덕였다.사실 엄청 맛있는 건 아니었지만 엄마가 만든 거라 계속 입에 넣었다. 유치원에서 또래 친구들은 항상 엄마가 준비해준 음식을 먹었으니까.임유진의 김밥은 아이들이 좋아할 만한 예쁜 모양을 하고 있었다.맛이 없지는 않다만 과연 아빠가 이 김밥을 먹을까?강선율은 강지혁이 이런 귀여운 김밥을 먹는다는 게 좀처럼 상상이 가지 않았다.두 아이는 들고 있던 포크도 내려놓고 강지혁에게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고 임유진은 미소를 지은 채 강지혁을 바라보았다.“한번 먹어봐. 분명히 맛있을 거야.”그녀가 이렇게 자신감을 가지고 말하기까지 수많은 시행착오가 있었다. 처음에는 단지 김밥을 마는 것뿐인데도 모양이 제대로 나지 않았고 맛도 짜거나 이상했으니까.강지혁이 선뜻 손을 대지 않자 옆에 있던 집사가 한마디 거들었다.“사모님께서 1시간이나 넘게 부엌에서 만드신 거예요. 저도 맛을 봤는데 아주 맛있더라고요.”그 말에 강지혁은 임유진의 손을 바라보았다. 변형되어있는 손가락을 보고 있자니 또다시 심장에 통증이 이는 것 같았다.강지혁은 몇 초 고민하다 결국 젓가락을 들어 김밥을 입에 넣었다.그리고 강선율은 그 모습에 깜짝 놀라 입을 떡하고 벌렸다.아빠가 아이들이나 먹을 것 같은 김밥을 먹다니, 이건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전에 셰프가 귀여운 동물 모양의 음식을 내왔을 때도 한 번쯤은 먹을 만한데 끝까지 손을 대지 않았던 그였으니까.반면 강선현은 묵묵히 김밥을 먹는 강지혁을 바라보며 역시 엄마의 김밥은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김밥이라며 뿌듯해하고 있었다.아침 식사를 마친 후 강지혁은 회사에 가기 위해, 그리고 강선율을 유치원에 가
“그래, 그렇게 해.”임유진은 흔쾌히 알겠다고 했다.“나는 네 손을 놓을 생각이 없으니까 뭐가 됐든 상관없어. 두 손이 부러지는 한이 있더라도 나는 네 손을 놓지 않을 거야. 그런데 혁아, 언젠가는 나만 네 손을 놓지 않는 게 아니라 너도 내 손을 꽉 잡고 놓지 말아줬으면 좋겠어. 지금처럼...”그녀의 시선이 서로를 꽉 잡고 있는 두 사람의 손 쪽으로 내려갔다.“한사람이 잡는 것보다 역시 둘이 함께 잡는 게 훨씬 더 단단하잖아. 안 그래?”임유진의 말에 강지혁의 손이 미세하게 떨렸다.강지혁은 순간적으로 저도 모르게 그녀의 손을 더 꽉 잡고 싶다는 미친 생각이 들었다....강지혁은 임유진의 끈질긴 말에 결국 그녀가 가져온 음식을 먹기 시작했다. 다만 그녀가 두 손을 턱에 받친 채 생글생글 웃으며 지켜보는 바람에 그는 식사하는 내내 조금 불편한 기분이 들었다.여자의 시선 같은 건 이미 익숙해질 대로 익숙해져 있는데 이상하게도 이 여자가 바라보면 심장이 평소보다 더 빠르게 쿵쿵거리며 피가 얼굴에 몰리는 느낌이었다.고작 여자의 시선 하나에 이런 식의 반응이 온다는 건 정말 이상한 일이 아닐 수가 없었다.그날 저녁, 임유진은 씻은 후 전처럼 강지혁과 이어져 있는 침실에서 잠을 청하기로 했다.침실로 들어온 후 그녀가 조금 의외라고 느꼈던 건 방이 그녀가 5년 전에 썼던 그대로라는 것이었다. 심지어 그녀의 옷가지들까지 똑같이 그대로 옷장 안에 걸려 있었다.지속해서 도우미들이 방을 깨끗이 청소해준 게 틀림없었다.임유진은 오늘 하루 너무나도 많은 일이 있어 조금 피곤했던 건지 딸까지 마저 씻긴 후 금방 잠자리에 들었다.깊은 밤.누군가가 침대 바로 옆으로 다가와 창문으로 쏟아진 달빛을 빌어 새근새근 자고 있는 여자와 아이를 바라보았다.두 사람은 정말 똑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그리고 이 두 사람은 바로 그의 아내와 딸이다.어제까지만 해도 죽은 아내가 다시 살아올 거라는 생각은 하지도 못했는데 바로 오늘, 이미 사망한 것으로 밝혀진 아내가 그와
입맞춤이 끝났을 때 임유진은 조금 빨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강지혁을 바라보았다.강지혁은 별다른 표정을 보이지 않았지만 그의 두 눈동자에는 모순의 감정이 가득 엉켜있었다.그리고 임유진은 그 눈동자를 보며 또다시 그와 입술을 맞추고 싶다는 충동이 일었다.“네가 얼마나 예쁜지 알아? 네가 얼마나 내 혼을 쏙 빼놓는지 알아? 나는 오히려 너한테 묻고 싶어. 왜 내가 널 사랑하지 않는다고 생각해? 왜 내가 몸과 마음을 다 내어줄 수 있을 정도로 너한테 빠져있지 않았을 거라고 생각해? 이런 예쁜 얼굴을 하고서 그러한 자신감도 없어?”임유진은 말을 하면서 손가락으로 그의 입술을 부드럽게 매만졌다.“너...!”강지혁은 이에 그녀의 손을 덥석 잡았다. 그녀의 행동은 마치 그를 유혹하고 있는듯했다.강지혁은 그녀에게 뭐라고 얘기하려다가 문득 손에 잡힌 그녀의 손가락이 조금 이상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그는 그제야 그녀의 손가락이 다른 사람과 달리 삐뚤빼뚤 변형되어 있다는 것을 눈치챘다.“너 손가락이 왜...”그의 눈동자에 순간 고통의 감정이 스쳐 갔다.“아무것도 아니야. 감옥에 있을 때 조금 다쳤는데 그때 이렇게 됐어.”임유진은 대수롭지 않은 얼굴로 가볍게 말해주었다.강지혁은 그 말에 침묵했고 임유진은 이에 고개를 숙인 채 강지혁의 손을 세게 맞잡았다. 그러고는 다시 고개를 들고 그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혁아, 나는 널 사랑해.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을 만큼. 내가 널 떠난 건 분명히 그럴 만한 사정이 있었을 거야. 그리고 뭐가 됐든 결국에는 다시 널 찾아왔잖아. 이렇게 다시 네 곁으로 왔잖아. 앞으로는 절대 네 곁을 떠나지 않을게. 이렇게 네 손을 꽉 잡고 절대 놓지 않을게. 약속해.”그녀의 목소리는 다정하고 또 그만큼 무척이나 단호했다. 그리고 그녀의 두 눈동자는 한 치의 거짓말도 담겨있지 않은 것처럼 매우 깨끗하고 맑았다.강지혁은 그런 그녀를 빤히 바라보았다.절대 내 곁을 떠나지 않고 또 손도 놓지 않을 거라고?그녀의 눈빛과 그녀의 목
임유진이 강지혁을 떠난 건 그를 사랑하지 않아서가 아닌 오히려 그를 너무나도 많이 사랑해서, 그를 대신해 죽어줄 수 있을 정도로 사랑해서, 그렇게도 지키고 싶었던 세 아이의 목숨을 잃을 각오까지 할 수 있을 정도로 그를 사랑해서였다.그녀는 세 사이의 엄마면서 이기적이게도 아이들의 목숨으로 그의 목숨을 바꾸려고 했었다.강지혁은 임유진의 말에 그녀의 눈을 빤히 바라보았다.그는 여자를 믿지 않는다.어머니를 너무 많이 사랑하고 또 철석같이 믿은 바람에 비참한 최후를 맞이한 아버지의 모습을 바로 눈앞에서 봤었기에 그는 여자를 믿지 않는다.원래 믿음이라는 건 배신당할 리스크를 어느 정도 쥐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애초에 믿지 않으면 배신당하는 기분 같은 걸 느낄 일이 없다.“그럼 5년 전에 네가 날 떠난 이유가 뭔지 네 입으로 한번 말해봐.”강지혁이 말했다.“그건...”임유진은 잠깐 멈칫하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그건 나도 아직 기억을 못 하고 있어.”그녀의 기억은 강지혁이 과거에 했던 행동을 용서해주기로 한 거기가 끝이고 그 뒤는 고이준에게서 오늘 막 들었으니 거짓말을 한 것도 아니었다.하지만 그녀의 자신 없는 말에 강지혁의 빈정거림은 더더욱 짙어졌다.“그래? 그럼 기억을 다 되찾고 나서 나한테 이런 말을 하던가 해. 아무것도 기억 못 하면서 날 사랑한다는 말을 습관처럼 내뱉지 말고.”임유진은 그 말에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강지혁은 분명히 그녀를 사랑했다. 그녀가 절벽에서 떨어진 것을 알고 하마터면 정신을 완전히 놓을 정도로 그녀를 사랑했다.아무리 모든 걸 다 잊었다고 해도 그녀를 사랑했던 마음의 아주 조그마한 조각 정도는 남아있어야 하는 거 아닌가?정말 이제는 그녀를 향한 마음 같은 건 하나도 기억나지 않는 건가?임유진은 그의 눈빛에 선명히 어려있는 빈정거림도 싫었고 불신으로 가득 차 있는 그의 태도도 싫었다.그래서 그녀는 욱하는 마음에 몸을 강지혁 쪽으로 확 기댔다.이에 강지혁은 어찌할 새도 없이 임유진의 아래에 꼼짝없이 갇혀버렸
“혁아, 내가 널 얼마나 사랑하는지 알아?”임유진은 저도 모르게 낮은 목소리로 이 말을 중얼거렸다. 그녀는 지금 이 순간 그에게 이대로 입을 맞추고 싶은 충동까지 일었다.기다란 속눈썹이 움찔 떨리더니 이내 강지혁의 눈이 천천히 떠졌다. 그리고 다 떠진 눈동자에 임유진의 얼굴이 그대로 비쳤다.임유진은 순간 그의 눈에 사로잡힌 포로라도 되는 양 무슨 말을 할 수가 없었고 마치 홀린 것처럼 그저 그를 바라보기만 했다.“그럼 말해봐. 네가 날 얼마나 사랑하는지.”그때 조금 잠긴 듯한 목소리가 울려 퍼지고 임유진은 그제야 번쩍 정신을 차렸다.“나는...”강지혁을 얼마나 사랑하냐고?그녀는 그를 위해 3년간 억울하게 옥살이하는 걸 가만히 지켜보고만 있던 그의 행동을 다 알고도 과거의 원망을 다 내려놓겠다고 할 정도로 그를 사랑했다.이 세상에서 자신을 이렇게도 사랑해주는 남자가 또 없을 거라는 확신과 이렇게도 마음을 다해 사랑할 만한 남자가 또 없을 거라는 확신이 들었으니까.게다가 고이준의 말에 따르면 그녀는 강지혁이 죽는 게 싫어 자신이 절벽에서 떨어지는 선택을 했다고도 했다. 물론 기억을 잃은 강지혁은 이 사실을 전부 다 잊어버렸지만 말이다.“왜 말을 못 하지?”강지혁이 입꼬리를 위로 올렸다.“하긴 정말 날 사랑했으면 애초에 내 곁을 떠나지 않았겠지. 안 그래?”‘떠났다라... 혁이한테는 내가 내 두 발로 떠난 것으로 되어있으니까...’임유진은 꼭 심장이 뭔가에 의해 눌린 것처럼 숨이 잘 쉬어지지 않았다.“만약 네가 정말 나를 사랑했으면 그때 내가 아무것도 하지 않고 방관했다고 해도 내 곁에 있었어야지. 아무리 내가 잘못했다고 해도 내 곁에 있었어야지. 안 그래?”강지혁의 목소리에 점점 빈정거림이 섞여들기 시작했다.“즉 너는 날 진심으로 사랑한 게 아닌 거야. 그러니까 날 대단히 많이 사랑한다느니 하는 말은 두 번 다시 내 앞에서 하지 마.”임유진은 그의 말에 입술을 꽉 깨물었다.“사모님, 회장님은 사모님과의 기억이 떠오를 때면 늘 저
그때 현이가 옆에서 큰소리로 외쳤다.“나도 좋은 동생이 될 거야. 그리고 오빠는 내가 지켜줄 거야!”부풀린 볼이 꺼진 걸 보니 이제는 자신이 동생이 된 걸 인정한 모양이다.강선율은 현이의 말에 저도 모르게 몸이 움찔 떨렸다.‘동생이면서 나를 지켜주겠다고...?’아이는 오늘 온통 처음 겪는 것들투성이였다. 누군가를 지켜주겠다고 약속한 것도 처음이었고 누군가가 자신을 지켜주겠다는 약속을 들은 것도 처음이었다.이게 바로 여동생이 생기면 느끼게 되는 진짜 기분인 건가? 소안나는 진짜 동생이 아니라 그간 이런 느낌이 들지 않았던 건가?“사모님, 식사 준비가 다 되었습니다.”집사의 말에 임유진은 2층을 쳐다보았다.“혁이는요?”박건태는 1시간 전에 이미 저택을 떠났고 가기 전 임유진에게 강지혁은 그저 기억이 자극된 바람에 두통이 온 거라고 얘기해주었다.“방금 도우미가 물어보고 왔는데 입맛이 없으시다고 사모님과 아이들 먼저 식사하라고 하셨답니다.”‘혹시 두통 때문인가?’임유진은 속으로 생각하며 아이 둘을 데리고 식탁으로 향했다.하지만 저녁 식사를 다 마쳤는데도 여전히 강지혁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그래서 임유진은 식사를 들고 직접 2층으로 올라가기로 했다. 그런데 계단을 막 오르려는 찰나 작은 손이 그녀의 옷을 살짝 잡아당겼다.이에 임유진이 고개를 돌리자 강선율이 자신을 빤히 바라보고 있는 것이 보였다.“또다시 나랑 아빠 곁을 떠날 거예요?”아이가 진지한 얼굴로 물었다.“아니, 안 떠나. 율이랑 아빠 곁을 떠나는 일은 두 번 다시 없을 거야.”임유진은 부드럽게 웃으며 아이를 안심시켜 주었다.“율아, 엄마라고 불러줄래? 율이가 엄마라고 불러주면 엄청 기쁠 것 같아.”강선율은 그 말에 잠깐 흠칫하더니 그녀와 시선을 맞추는 게 부끄러운 듯 점점 볼을 붉히기 시작했다. 그러다 한참이나 지나서야 입을 열었다.“엄마...”아직 마음의 문을 다 연 것은 아닌 듯했지만 임유진은 율이가 엄마라고 불러준 것만으로도 가슴이 벅찼다.아들과는 5년이라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