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유진은 그 어린 강지혁이 그 저택에서 혼자 얼마나 외롭고 쓸쓸하고 무서웠을지 너무나도 상상이 갔다. 하나밖에 없는 핏줄에게서는 가족의 정을 느끼지 못하고 심지어는 언제든지 대체 당할 걱정까지 해야 한다는 게 말이나 되는 일인가.강지혁은 그래서 부단히 강해질 수밖에 없었고 나약해질 기회조차 허락받지 못했다. 나약함을 보이는 순간 바로 버려질 게 뻔했으니까."어릴 때 많이 힘들었어...?"임유진은 눈앞에 있는 남자가 안쓰러워 미칠 것 같았다.그를 알기 전 다른 사람의 입을 통해 강지혁을 알았을 때 그녀는 위에서 고고하게 내려다보는 남자는 걱정 없이 편히 인생을 즐길 것만 같았다.하지만 지금 보니 걱정 없이 편히 살 수 있는 사람은 없었고 강지혁이 현재 누리는 모든 것들은 어린 그가 힘들게 얻은 것이다.어린 나이에 다른 아이들은 상상조차 못 할 것들을 짊어지고 있었다."괜찮아."강지혁은 기다란 손가락으로 그녀의 볼을 어루만졌다. 지금 이 순간, 임유진의 눈동자에는 온통 강지혁밖에 없었다."모두 지난 일이고 적어도 지금은 내 걱정 안 해도 돼. 이제는 누구도 나를 함부로 대체할 수 없을 테니까."강지혁의 운명은 이제 오로지 그의 손에 쥐고 있으니까."응, 모두 지난 일이야."임유진은 그의 손을 잡고는 볼을 그의 손바닥에 비볐다."나한테 있어 너는 절대 다른 사람으로 대체할 수 없어."강지혁의 그녀는 꼭 이렇게 듣고 싶은 말만 해준다."그 말 영원히 잊어버리지 마."강지혁은 낮게 속삭이더니 허리를 숙여 그녀의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포갰다.키스가 끝나고 임유진은 또다시 조금 전 문제로 돌아갔다."그럼 할아버지 쪽은 정말 이대로 내버려 둘 거야? 아니면 내가... 내가 만나볼까?"이 말을 하는 그녀의 몸이 살짝 떨렸다. 강문철을 향한 두려움을 어떻게 금방 떨쳐낼 수 있을까."아니야."강지혁이 말했다."아까도 말했지만 나는 할아버지가 허락하든 안 하든 누나와 결혼 할 거야. 만약 할아버지가 누나한테 허락 안 한다고 하면 누나는 나와
임유진은 탈의실로 들어가 웨딩드레스를 갈아입었고 한지영도 들어가 도왔다.한편, 탈의실 밖 대기 공간에는 강지혁과 백연신 두 남자가 앉아 있었다.백연신은 솔직히 강지혁이 이렇게까지 빨리 임유진과 결혼식을 올리게 될 줄은 몰랐다."임유진 씨 사건 곧 뒤집을 수 있을 것 같다면서요?"백연신이 먼저 화제를 찾아 말을 걸었다."소식이 빠르시네요."강지혁은 고개를 들어 백연신을 쳐다보았다."지영이가 임유진 씨 사건이라면 눈에 불을 켜고 달려들어서요. 그래서 나도 자연스럽게 알게 된 게 많아요."백연신이 말을 이었다."그런데 듣기론 강지혁 씨는 이번 사건의 원흉이 허재명이라고 하셨다면서요?"강지혁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은 채 그저 백연신을 뚫어지게 바라보기만 했다."임유진 씨 사건, 나도 조사한 적 있어요. 허재명은 정말로 책임을 회피하려고 모든 걸 임유진 씨에게 덮어씌우려고 했을지도 모르죠. 하지만 그때 당시 허재명은 사건이 종결된 후 바로 사직서를 내고 해외로 나갔어요. 그런데 누가 봐도 수상쩍은 행동을 한 그를 진씨 가문은 가만히 내버려 뒀죠."백연신의 질문에 강지혁이 차갑게 물었다."무슨 말이 하고 싶은 겁니까?""그저 진씨 일가도 수상하다고 생각됐을 뿐이에요."백연신이 웃으면서 말했다."그 당시 파일을 보면 진씨 일가는 마치 뭔가에 쫓기듯 서둘러 임유진 씨의 죄를 단정 지으려고 그뿐만 아니라 당시 언론매체나 여론도 재판부에 빨리 사건을 종결시키라는 이상한 부담을 줬더라고요. 그리고 비슷한 다른 사건과 비교해 봤을 때 이 사건은 유독 빨리 끝났기도 했고요."강지혁은 입을 꾹 다문 채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고 그에 반해 백연신은 계속 말을 이어갔다."물론 사회적 관심이 많이 쏠린 사건이니만큼 빨리 종결한 것도 있었겠죠. 하지만 지금 임유진 씨가 무죄라는 게 증명이 되면 진씨 가문이 당시 정말 숨기는 게 없는 건 맞는지 다시 한번 의심해 볼 필요가 있죠."강지혁은 묵묵히 듣고 있다가 차가운 목소리로 대꾸했다."백연신 씨가 이렇게나
정말 천사가 아닐까...?강지혁은 마치 진짜 천사를 만난 사람처럼 말로 이루 표현할 수 없는 표정을 지었다. 아마 그에게는 임유진이 천사가 맞을 것이다. 메마른 그의 삶을 구제해주고 의미를 부여해줬으니 말이다.만약 임유진이 없었다면 강지혁은 아마 계속 그렇게 무의미한 채로 살았을 것이다."혁아, 어때?"임유진이 물었다.아까 문이 열리기 전 거울을 보는데 거울 속 자신의 모습이 너무 예뻐서 그녀는 마치 딴 사람을 보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이 드레스로 결정한 건 아니지만, 정말 너무 예뻐서 소리를 지를 만큼 마음에 들었다.아마 여자들의 마음속에는 모두 웨딩드레스를 향한 로망이 있는 듯싶다.어릴 적 임유진은 예쁜 웨딩드레스를 입고 입장하는 신부를 보며 언젠가는 자신도 저런 드레스를 입고 동화 속 왕자님과 행복하게 살고 싶었다.그리고 지금... 임유진은 드디어 그녀만의 왕자님을 만난 것 같았다.그녀는 자신을 향해 걸어오는 강지혁을 바라봤다. 그는 마치 모델처럼 정장을 너무 잘 소화했고 아마 기본 티에 츄리닝을 입혀도 강지혁은 여전히 멋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게다가 신이 내린듯한 정교한 이목구비는 그를 한층 더 돋보이게 해주었다."예뻐."섹시한 입술에서 간단명료한 두 글자가 튀어나왔다."나도 이 드레스 너무 예쁜 것 같아."임유진이 웃으며 대답했다."아니, 옷 말고 너."강지혁의 말에 그녀는 금세 얼굴이 핑크빛으로 달아올랐다.다른 남자들이 이런 말을 하면 느끼해 보이기만 하던데 왜 강지혁이 하면 이렇게나 설렐까?임유진은 아까부터 심장이 거세게 뛰었다."너 지금 순백의 천사 같아."강지혁은 허리를 숙여 그녀의 귓가에 입술을 가까이 갖다 대고 임유진만 들을 수 있게 속삭였다."그래서 널 이대로 납치해 내 곁에만 두고 싶어."만약 정말 천사라면 강지혁은 임유진이 어디에도 못 가게 그녀의 양 날개를 부러트리고 싶다는 생각도 했다.임유진은 얼핏 들으면 조금 무서운 고백도 강지혁의 입에서 나와서 그런지 설레고 심장이 콩닥콩닥 뛰었
“파였어요? 난 모르겠는데.”한지영은 몸에 걸친 드레스를 훑어봤다. 그녀는 어깨가 드러난 이브닝드레스를 입었다. 치마 길이는 뒷면이 앞면보다 긴데 앞면은 무릎 위까지 내려오고 뒷면은 발목까지 내려온다.드레스 핏이 워낙 예뻐 그녀의 몸매를 한 층 업그레이드해주고 허리라인도 맞춤하게 잡아줬다.이건 여자들이 꿈에 그리던 완벽한 효과였다!한지영이 백연신에게 말했다.“나 이렇게 입으면 뭔가 좀 있어 보이고 섹시한 것 같지 않아요? 몸매도 훨씬 예뻐 보이고요.”백연신은 안색이 확 어두워졌다.‘한지영 얘는 여자 맞아? 내 앞에서 뭐가 있어 보인다느니, 섹시하다느니, 뭘 이렇게 거침없이 묻고 있어. 날 아예 남자로 안 보는 거야?’두 사람은 현재 명의상 애인 사이가 맞지만 한지영은 마음속으로 단 한 번도 그를 남자친구로 생각한 적이 없는 듯싶다!그녀에게 백연신은 그저 복수하고 빚이나 돌려받으려는 사람일 뿐이다.“너 진짜 이 옷 입고 신부 들러리를 할 생각이면 미리 말하는데 결혼식 날 예식장도 못 갈 줄 알아!”백연신이 싸늘하게 말을 내뱉었다!“연신 씨...”한지영이 그를 째려봤다.“왜 이래요 진짜. 고작 드레스일 뿐이잖아요!”“그럼 어디 해보시던가. 내가 보내줄 것 같아?”백연신이 말을 이었다.“세상 어떤 남자가 제 여자친구에게 노출이 심한 옷을 입히는 걸 좋아하겠어?”그녀의 몸매는 확실히 눈 호강할 만큼 날씬하고 예쁘다. 다만... 백연신만 보면 됐지 딴 남자들에겐 절대 보여줄 수 없다.게다가 강지혁의 결혼식에 수많은 하객이 참석하겠는데 그중에서 한지영에게 흑심을 품을 남자가 없을 거란 보장은 못 한다.한지영은 한심해서 말문이 막혔다. 왠지 백연신이라면 정말 그런 일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아니 그렇지만 그녀가 전에 백연신을 따라 연회에 참석했을 때 지금 한지영이 입은 드레스보다 훨씬 노출이 심한 드레스를 입고 온 여자들을 봐도 백연신은 노골적이란 말 한마디 없었다!요즘 드레스 중에 어깨를 가린 드레스가 몇 개나 된다고!백연신은
외할머니는 얼마 전에 퇴원하시고 집에 돌아가 편히 휴식을 취하셔서 병이 차츰차츰 나아질 거로 알았는데... 어떻게 이럴 수가!방금 병원 간호사에게 전화가 걸려 왔는데 그 간호사는 외할머니의 부탁을 받고 임유진에게 전화했다. 할머니가 지금 병원에 계시는데 상태가 매우 위독하시고 간헐적 혼수상태에 빠져있다고 했다. 한편 외할머니의 마지막 소원은 죽기 전에 임유진을 한 번 보는 거라고 하셨다!간호사는 외할머니가 이미 입원하신 지 3일이 되었다고 하는데 큰 삼촌, 둘째 삼촌, 그리고 셋째 이모까지 왜 아무도 그녀에게 전화해서 알리지 않았을까?오늘 간호사의 전화가 없었더라면... 그랬다면 임유진은 외할머니의 마지막 모습도 못 지켜봤을 것이다!‘아니, 아니야. 마지막 모습이라니, 그럴 리 없어.’임유진은 속으로 끝없이 되뇌었지만 휴대폰을 쥔 두 손은 점점 더 세게 떨렸다.이때 강지혁이 커다란 손으로 그녀의 떨리는 두 손을 잡고 다정하게 말했다.“걱정 마. 무슨 일 있어도 내가 항상 옆에 있어.”임유진은 고개 들어 옆에 앉은 강지혁을 쳐다봤다.“혁아, 할머니가 만약 진짜...”‘죽음’이란 두 글자는 목에 걸린 듯 도저히 내뱉을 수 없었다.“나 어떡해? 할머니 잃고 싶지 않단 말이야!”가족 중에 외할머니만이 그녀를 진심으로 대했다. 나중에 제대로 효도해드리며 할머니를 모시고 여기저기 구경시킬 생각인데 이젠 그 희망들이 회색빛으로 변해버린 것만 같았다.잃고 싶지 않다고... 강지혁이 입술을 앙다물었다. 그도 한때 엄마를 잃고 싶지 않았지만 결국 엄마는 떠나갔다. 나중에 아빠도 잃고 싶지 않았지만 또 끝내 그의 곁을 떠났다.지금 강지혁이 지키고 싶은 사람은 임유진 한 명뿐이다!“유진아, 네겐 아직 내가 있어. 무슨 일이 있어도 내가 항상 옆에 있어 줄게!”강지혁이 부드럽게 말했다.그는 신이 아니다. 아무리 권력과 재력을 지녀도 생명 앞에선 가끔 무기력해질 따름이다.병실에서 노쇠한 어르신은 사경을 헤매고 있었다. 간신히 숨을 쉬며 버텨가는 중이었고
외할머니는 결국 마지막 그 한마디를 잇지 못했다. 눈도 여전히 뜨고 있고 입도 벌리고 있지만 그만 숨이 멎었다.임유진은 멍하니 넋 놓고 있다가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옆에 있던 의사와 간호사는 외할머니의 사망시간을 확인하고 임유진에게 말했다.“임유진 씨,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고인의 명복... 가족 중에 유일하게 그녀를 사랑해주는 할머니가 세상을 떠나셨다!임유진은 아직 온기가 남아있는 할머니의 몸에 엎드려 대성통곡했다.“흐엉.”몸엔 아직 온기가 남아있는데 호흡이 멈추고 심장 박동이 멈췄다. 앞으로 그녀는 더이상 할머니의 부름을 들을 수 없고 자신을 향해 웃는 할머니의 미소를 볼 수 없다...임유진은 엉엉 울었고 강지혁은 옆에 서서 묵묵히 그녀를 위로했다.지금은 슬픈 만큼 눈물을 쏟아내야 한다. 외할머니는 그녀에게 정신적 지주이자 그녀가 엄마를 여읜 후 유일하게 지켜준 사람이다.임유진은 이제 더이상 할머니를 볼 수 없다.가족을 잃은 고통이 무엇인지 강지혁은 잘 안다. 그해 아빠도 그의 앞에서 얼어 죽었다. 그 순간 강지혁은 온 세상에 나 홀로 남겨진 듯한 슬픔에 잠겼다.나중에 친척 관계를 확인하고 강씨 일가로 돌아갔지만 가족이란 느낌은 전혀 없었다.다만 아빠에게 죽음은 일종의 해탈이겠지. 아빠는 엄마를 너무 사랑하셔서 엄마를 잃은 후 사는 게 죽는 것만 못한 고통이었을 테니까.그래도 아빠는 본인에게 자식이 있다는 걸 기억하셔야 했다. 아빤 모든 감정을 엄마에게 쏟아부었고 자식에겐 유서 한 장만 남겼다. 유서로 강지혁의 신분을 밝혔고 그가 강씨 일가에 돌아갔으면 하는 소원을 적었다.임유진은 오랫동안 울고 나니 나중에 눈물이 메말라서 잠긴 목소리로 울먹였다.“유진아, 외할머니 편히 보내드리자.”강지혁이 드디어 말을 꺼냈다.그녀는 흐느끼며 두 눈이 벌겋게 부어올랐다.“그래, 편히 보내드려야지... 우리 할머니...”말을 마친 임유진은 아쉬운 마음을 뒤로 한 채 손으로 할머니의 얼굴을 가렸다. 눈도 감으시고 입도 다물게 해드렸다
임유진의 큰삼촌, 둘째 삼촌과 셋째 이모는 외할머니가 돌아가신 지 두세 시간 만에 병원 연락을 받고 속속들이 병원에 도착했다.한편 그녀의 외할아버지 노준태는 몸이 편찮다는 이유로 병원에 안 왔다. 병원에 와서 시신을 보고 상심이 크면 몸이 더 안 좋아질 테니까.저승에 계신 외할머니는 외할아버지의 이런 이유를 들으면 과연 어떤 심정일까? 임유진은 가히 짐작할 수 없었다.한편 삼촌, 이모들은 임유진을 보자 제일 먼저 든 생각이 바로 외할머니의 묘지와 장례식 비용이었다. 임유진도 엄마 몫을 내야 한다며, 일전 한 푼 안 낼 순 없다고 한다!임유진은 저도 몰래 울화가 치밀었다. 외할머니가 돌아가셨는데 삼촌, 이모들이 신경 쓰는 건 오직 돈 문제였다.“돈이요?”옆에서 줄곧 아무 말 없던 강지혁이 입을 열었다.두 삼촌은 그제야 병실에 다른 사람이 있다는 걸 발견하고 화들짝 놀랐다. 너무 성급하게 온 것도 있고 조카가 웨딩드레스를 입고 있어 유난히 눈에 띄다 보니 옆에 있던 강지혁은 전혀 신경 쓰지 못했다.강지혁이 입을 열자 두 삼촌은 흠칫 놀라며 바로 그를 알아봤다. 그날 밤 박씨 일가에서 봤던 사람이니까.처음에 그들은 임유진을 박씨 일가의 바보 아들 박성호에게 시집보낼 생각이었는데 한밤중에 강지혁이 한 무리 사람들을 거느리고 와서 임유진을 데려갔다.나중에 그들은 현지 경찰서에 며칠이나 갇혀 있어야만 했다!“당... 당신이 여긴 어떻게?”두 삼촌이 버벅거리며 물었다.셋째 이모는 강지혁을 보더니 자연스럽게 말했다.“유진의 남자친구도 있었네. 네가 한꺼번에 돈을 내놓지 못하겠으면 남자친구더러 보태 달라고 해. 외할머니 장례식 치르고 묘지 살 돈도 없는 건 아니잖니.”임유진이 막 말을 꺼내려 할 때 강지혁이 그녀의 어깨를 가볍게 짓누르며 이모님께 말했다.“돈은 문제없어요. 근데 당신들이 과연 감당할 수 있겠어요?”셋째 이모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이 말은 무슨 뜻이지?이때 두 삼촌이 얼른 이모를 잡아당기며 전에 박성호의 집에서 있은
큰외삼촌이 유독 험상궂은 얼굴로 말을 내뱉었다.“야 이 자식아, 저번에 네가 우릴 구치소에 그 오랜 시간을 가둬 넣었지? 지금 당장 사과하고 손해배상비 물어내. 안 그러면 두 발로 걸어 나가지 못할 줄 알아.”“아직 감히 내게 사과를 요구하는 사람은 없는데.”강지혁이 느긋하게 말했다.한편 임유진은 마냥 의아할 따름이었다. 이게 다 무슨 일이지? 두 외삼촌이 원래 혁이를 무서워했는데 이모가 방금 그 말을 한 뒤로 두 삼촌의 태도가 180도 바뀌었다.설마 이모네 딸 배여진에게 뒷배가 생겨서 이러는 걸까?배여진은 남편과 자그마한 철제 가게를 운영하고 수입도 보통인데, 마을의 대다수 주민들과 비슷한 수준인데 대체 무슨 뒷배가 있다는 걸까? 임유진은 이해되지 않았다.“좋아. 사과 안 한다 이거지? 이따가 무릎 꿇고 빌어도 이 일은 절대 쉽게 넘어갈 수 없어! 그런 줄 알아!”큰 외삼촌이 표독스럽게 말했다.셋째 이모는 옆에서 좋은 구경 난 것처럼 거들먹거렸다.“유진아, 이모는 분명히 말해뒀어. 지금이라도 안 늦었으니 얼른 네 남자친구더러 두 삼촌께 사과하고 보상 톡톡히 해드리라고 해. 너도 알다시피 여진이가 평상시에 두 삼촌들과 사이가 얼마나 좋아. 삼촌들이 괴롭힘당하는 걸 절대 보고만 있을 여진이가 아니지.”임유진은 그제야 알아챘다. 셋째 이모는 오늘 옷차림이 전과 달렸다. 자세히 들여다보니 정교하게 만든 옷이라 싸구려는 아닐 듯싶었다. 게다가 손에 다이아몬드 반지와 금팔찌를 끼고 있었는데... 돈벼락이라도 맞은 듯싶었다.셋째 이모가 계속 입을 떠벌렸다.“너희 여진 언니는 더이상 예전의 여진이가 아니야. 뒤에 귀인이 뒷받침해주고 있어 감히 우리 여진의 심기라도 건드리면, 쯧쯧...”“귀인?”강지혁이 경멸의 미소를 날렸다.“마침 잘됐네요. 대체 어떤 귀인인지 한번 지켜봐야겠어요.”“너 따위가 뭔데? 이 세상엔 네가 감히 건드릴 수 없는 사람도 있어!”셋째 이모가 두 눈을 부릅뜨고 강지혁을 노려보며 이제 곧 후회할 일만 남았다고 암시하는 듯
강지혁은 수저를 들고 그녀가 해준 음식을 하나둘 입에 넣었다.분명히 흔히 볼 수 있는 가정 요리고 손에 들고 있는 것도 포크나 나이프가 아닌 그저 숟가락과 젓가락일 뿐인데 상대가 강지혁이라 그런지 꼭 고급스러운 레스토랑에서 식사하고 있는 것 같았다.임유진은 원래 강지혁이 밥을 다 먹은 뒤에 오늘 있었던 일을 얘기하려고 했다. 하지만 강지혁이 밥을 먹으며 먼저 선수를 쳐버렸다.“오늘 하마터면 떨어지는 화분에 다칠 뻔했다는 얘기 들었어. 무사해서 다행이야. 내일부터는 경호원을 두 명 더 붙여줄게.”임유진은 그 말에 눈을 두어 번 깜빡이며 어리둥절해 하다 이내 남편이 강지혁이라는 것을 깨닫고 납득했다는 표정을 지었다.아마 일이 터지고 5분도 안 돼 바로 강지혁에게 보고가 들어갔을 테니까.“응, 알겠어.”임유진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누가 화분을 떨어트린 건지 알아봐 달라고 했어. 아직 따로 연락이 오지는 않았지만.”“청소부가 한 짓이야.”“청소부?”임유진이 깜짝 놀라며 물었다.“벌써 조사를 마쳤어?”“당연한 거 아니야? 네 일인데.”만약 임유진의 몸에 생채기라도 났으면 강지혁은 아마 이성을 잃고 건물 전체를 폭파하고 관계자들까지 다 처리해버렸을 것이다.강지혁은 갑자기 젓가락을 내려놓더니 임유진의 양손을 덥석 잡았다.그녀의 손가락은 여전히 삐뚤빼뚤했다.임유진의 손을 이렇게 만든 사람은 진세령이고 소민준은 당시 진세령의 곁에서 가만히 구경만 했다.강지혁은 임유진의 손을 매만지다 문득 1시간 전에 봤던 청소부의 피범벅이 된 두 손을 떠올렸다.그는 다른 사람의 손은 피가 나든 잔인하게 잘리든 아주 조금의 연민도 들지 않았다. 하지만 임유진의 손은 볼 때마다 가슴이 아프고 또 울컥했다.“왜? 왜 그렇게 봐?”임유진은 강지혁이 손가락을 뚫어지게 보는 게 불편한지 손을 뒤로 빼며 거두어들이려고 했다.그녀 역시 다를 것 없는 여자라 사랑하는 사람 앞에서는 자신의 좋은 것만 보여주고 싶었다.“내 손 안 예뻐... 보지 마.”임유진의 손
“그래...”강지혁이 낮게 읊조렸다.“그래야 할 거야.”고이준은 저도 모르게 소민준이 매우 가엽게 느껴졌다. 만약 임유진이 정말 소민준을 동정하면 그때는 지금 하고 있는 택배 기사 일도 못 하게 될지도 모르니까.“고 비서, 누가 저 여자한테 돈을 쥐여주고 유진이를 해할 계획을 세운 건지 알아내.”강지혁이 차가운 목소리로 지시했다.“네, 회장님.”고이준이 얼른 답했다.“그리고 S 시에서 제일 실력 좋은 변호사를 고용해서 유진이와 권건우 변호사 고소 건에 붙여. 김승수한테 지시를 내리는 다른 누군가가 있는 건 아닌지도 한번 알아보고.”고이준에게 김승수의 뒷조사를 맡긴 건 이유가 있었다.임유진이 강지혁의 와이프고 현 강씨 가문의 유일한 안주인인 걸 알고도 고소를 한 건 누가 봐도 이상했으니까. 상식적인 인간이라면 강씨 가문을 상대로 덤빌 리가 없다.게다가 김승수가 억울하다는 당시의 사건을 강지혁도 한번 훑어봤지만 임유진의 말대로 증거가 확실했고 결과 역시 납득 가능한 결과였다.즉 그렇다는 건 김승수에게 다른 목적이 있다는 것이다. 또 혹은 김승수를 뒤에서 조종하고 있는 누군가에게 다른 목적이 있을 수도 있고 말이다.하지만 이유가 뭐가 됐든 임유진을 건드린 이상 강지혁이 손을 놓고 있을 리가 없다. 그에게는 임유진이 목숨줄과도 같은 존재니까.“네, 알겠습니다.”임유진이 강지혁에게 있어 얼마나 중요한 사람인지 고이준은 너무나도 잘 알고 있다. 다만 요즘 따라 부쩍 이상한 위화감 같은 것이 느껴졌다.임유진을 대하는 강지혁의 태도가 꼭 기억을 잃기 전의 강지혁 같았기 때문이다. 꼭 기억을 다 되찾은 것처럼 말이다.강씨 저택.강지혁은 현관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가 마침 임유진과 두 아이들이 거실에서 동요에 맞춰 춤을 추고 있는 모습을 보게 되었다.현이는 흥분한 건지 얼굴이 빨개진 채로 깔깔거리며 춤을 추고 있었고 무뚝뚝하던 율이도 볼을 살짝 붉히며 어색하게 몸을 좌우로 흔들고 있었다.몸만 보면 썩 내키지 않아 하는 것 같지만 미소를 띠고
강지혁은 여자를 무섭게 노려보더니 이내 곁에 있는 경호원에게 지시를 내렸다.“두 번 다시 손에 뭘 들 수 없게 만들어놓고 경찰에 넘겨.”“네, 알겠습니다.”청소부는 그들의 대화에 얼굴이 새하얗게 질려버렸다.‘지, 지금 내 손을 부러트리려는 건가?’그녀는 이런 무서운 인간을 만날 줄 알았으면 차라리 경찰에게 잡히는 것이 더 나았겠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잘못했습니다! 다시는 안 그럴게요! 제가... 제가 알아서 경찰서로 가서 자수하겠습니다. 그러니까 제발...!”하지만 간절한 그녀의 부탁에도 강지혁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점점 더 얼굴이 차가워지기만 할 뿐이었다.사실 청소부는 양손만 부러지는 것에 감사해야 한다. 만약 그녀가 던진 화분으로 임유진이 큰 상처를 입었으면 그때는 양손은 물론이고 몸 전체가 너덜너덜해진 채 죽으니만 못한 삶은 살았을 테니까.“으아아악!!”그녀의 절규와 함께 강지혁은 유유히 현장을 빠져나왔다. 그리고 고이준도 곧바로 그의 뒤를 따라나섰다.바로 앞에 세워진 차량에 올라탄 후 고이준은 곧바로 강지혁에게 자료 하나를 건넸다.“소민준 씨의 지난 5년간 행적입니다. 몇 년 전부터 배달 기사 일을 하는 것으로 확인이 됐고 오늘은 우연히 건물 앞을 지나가다 사모님을 구한 것으로 보입니다. 사모님께서는 감사의 뜻으로 소민준 씨를 병원에 보냈고 손목 골절로 인한 치료 비용을 전액 다 부담해주셨습니다.”강지혁은 어둡게 가라앉은 얼굴로 수중의 자료를 훑어보았다. 차 안의 분위기는 그야말로 얼음장 같았다.“참 기막힌 우연이야. 안 그래?”그때 줄곧 입을 다물고 있던 강지혁의 입에서 뜬금없는 한마디가 흘러나왔다.“네... 네.”고이준은 식은땀을 흘리며 룸미러로 강지혁의 눈치를 봤다. ‘혹시 소민준이 사모님을 구해준 것에 질투라도 하는 건가...?’“CCTV는?”“네, 여기 있습니다.”고이준은 얼른 휴대폰을 꺼내 경호원이 보내준 CCTV 영상의 일부를 틀어 강지혁에게 건넸다.영상 속 소민준은 화분이 떨어짐과 동시에
경비원은 그 말에 시선을 내려 바닥에 떨어진 산산조각이 난 화분을 보고는 그제야 얼른 손을 놓아주었다.임유진은 경호원에게 소민준의 손목을 봐달라고 했고 경호원은 알겠다며 그의 손목을 자세히 살폈다.“사모님, 아무래도 골절인 것 같습니다.”“그럼 지금 당장 병원으로 데려가 치료를 받게 하세요.”“네, 알겠습니다.”그때 휴대폰이 울렸고 임유진은 경호원에게 가보라는 손짓을 한 후 이내 전화를 받았다.무슨 얘기를 들은 건지 그녀는 전화를 받은 지 얼마 안 돼 곧바로 심각한 얼굴을 했다.“네,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통화를 마친 후 임유진은 건물이 아닌 법원으로 향했다.잠시 후, 임유진이 법원에서 나왔을 때 마침 소민준을 병원으로 데려간 경호원으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검사를 받아본 결과 다행히 심각한 상처는 아니고 한 달 정도면 완전히 회복될 거라는 내용이었다.“알겠어요. 치료비는 다 제가 책임진다고 하고 혹시 다른 무언가의 보상을 원하면 저한테 따로 연락 주세요.”“네, 사모님.”임유진은 전화를 끊은 후 휴대폰을 집어넣는 것이 아닌 권건우에게 전화를 걸었다.“스승님, 죄송해요. 아무래도 당분간은 좀 시끄러워질 것 같아요.”“들었다. 김승수가 우리 둘을 고소했다지? 걱정할 것 없어. 우리는 그 사건에 한 점 부끄럼 없이 임했으니까. 그보다 요즘 인터넷에 떠드는 루머 말인데 나야 다 늙어서 그런 건 전혀 신경이 안 쓰인다고 하지만 너는 남편과 재회한 지도 얼마 안 됐는데...”“걱정하지 마세요. 혁이는 스승님과 제 사이 오해 안 해요.”임유진의 말에 권건우는 안심한 듯 미소를 지었다.“그럼 다행이고.”그날 저녁, 임유진이 집에 돌아오자마자 집사가 다가와 말했다.“회장님은 오늘 일 때문에 조금 늦으신다고 먼저 아이들과 식사를 하시라고 하셨습니다.”“네, 알겠어요.”임유진은 대수롭지 않게 고개를 끄덕이며 아이들과 밥 먹을 준비를 했다. 일 때문에 늦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니까.그 시각, 강지혁은 냉기를 풍기며 차가운 시선으로 눈앞
“위험해!”등 뒤로 누군가의 다급한 외침이 들려왔다.임유진은 미처 상황을 파악하지도 못한 채 누군가의 품에 안겨 바닥에 나뒹굴었다. 그녀를 구해준 누군가는 쓰러지는 그 순간에도 양손으로 그녀를 지켜주고 있었다.“사모님!”“사모님!”다급한 발걸음 소리와 함께 경호원과 기사들이 큰소리로 외치며 다가왔다.임유진은 그들의 소리에 그제야 정신을 차렸고 경호원의 부축으로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난 괜찮아요.”그녀는 말을 마치고는 고개를 옆으로 돌려 고개를 숙인 채 자리에서 일어나며 몸에 묻은 먼지를 툭툭 털어내는 남자를 바라보았다.“괜찮으세요? 구해주셔서 정말 감사...”임유진은 말을 하다가 남자가 고개를 드는 것을 보고 저도 모르게 흠칫하며 말을 멈추고 말았다.그녀를 구해준 건 다름 아닌 소민준이었다.소씨 가문의 장남이자 한때는 그녀의 남자친구였으며 진세령의 약혼자이기도 했던 그 소민준 말이다.하지만 지금의 그는 5년 전과는 완전히 다른 모습을 하고 있었다.색이 다 바랜 낡아빠진 옷에 더러운 운동화, 세월을 정통으로 맞은 것 같은 얼굴에 새치 가득한 머리까지, 지금의 그는 도무지 30대 중반이라고는 믿기지 않는 모습을 하고 있었다.그래도 한때는 상류층에 있었던 사람인데 지금은 일반 시민도 아닌 제일 아래 계층에 있는 사람처럼 보였다.고개를 든 소민준은 눈앞에 있는 사람이 임유진이라는 것을 보고는 마찬가지로 조금 놀란 듯 움찔했다. 그러고는 곧바로 쓴웃음을 지었다.“너였구나. 다시 이곳으로 돌아왔다는 기사를 봤어. 이런 식으로 만나게 될 줄은 몰랐는데.”“너...”임유진은 뭐라 말을 하고 싶었지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소민준은 당시 그녀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줬고 그녀가 절망의 끝에 자살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궁지까지 몰아붙였으며 두 번 다시 사랑 같은 건 하고 싶지 않게끔 만들어놓기도 했다.아마 강지혁이 아니었다면 임유진은 지금도 여전히 과거의 상처에 매달려 스스로를 고립시키며 살았을 것이다.하지만...하지만
직장 동료들은 한지영에게 위로를 건네며 은근히 그녀에게 잘 보이려는 듯한 말투로 얘기했다.심지어 어떤 사람은 아예 대놓고 그녀에게 백연신과의 사이를 묻기도 했다.“그럼 지영 씨는 백연신 씨랑 다시 만나는 거예요?”“그날 기자들 무리에서 지영 씨 손을 덥석 잡고 차로 끌고 가는데 내가 다 설렜지 뭐예요? 완전 현실판 왕자님 아니에요?”“그럼 앞으로 지영 씨를 뭐라 불러야 하나?”“백연신 씨가 회장님이니 당연히 회장 사모님 아니겠어요?”한지영은 직원들의 태도가 바뀐 게 전부 백연신 때문이라는 걸 알고 있다. 이런 상황을 처음 겪는 것도 아니었으니까.“아니요. 백연신 씨와는 아무 사이도 아니에요. 그러니까 괜한 추측은 하지 말아주세요. 그리고 저, 사귀는 사람 따로 있어요.”한지영은 차가운 목소리로 대꾸했고 이에 사람들은 어색하게 웃으며 서로 눈빛을 주고받더니 금방 다시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옆에서 떠드는 사람들이 없으니 이제야 살 것 같았다.어제 집으로 돌아갔을 때 백연신은 끝까지 나타나지 않았다. 그저 경호원을 통해 그녀에게 전언만 남겼다.“회장님께서 더는 걱정하지 않으셔도 된다고, 앞으로도 쭉 전과 같이 아무 일도 없을 거라고 하셨습니다.”전과 같다는 건 백연신 역시 더는 그녀 앞에 나타나지 않을 거라는 건가?한지영은 그 생각에 갑자기 울컥하며 눈물이 차오르려는 것이 느껴졌다. 하지만 그녀는 곧바로 다시 마음을 다잡으며 스스로에게 되뇌었다.이건 자신이 바란 거라고, 그러니 아무것도 슬퍼할 것 없다고 말이다.‘그래, 잘 된 거야. 이게 제일 좋은 결말이야. 증오도 없고 더 이상의 미움도 없는... 그냥 좋은 추억만 간직한 지금이 제일 좋은 끝이야.’다시 그와 연인이 되었다가 또다시 고난에 부딪혀 헤어지게 되면 그때는 완전히 원수지간이 될지도 모르니 차라리 아무것도 시작하지 않는 게 백배는 더 나았다.한지영은 더 이상 백연신과 함께 할 용기가 없었다. 아무리 그가 사랑을 외쳐도 아무리 줄곧 그녀만 사랑해왔다고 해도 이제는 그 마음을
연우진은 그 어느 날 자신이 백연신의 질투 대상이 될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지영 씨한테 마음이 남은 거라면 내가 아닌 지영 씨와 얘기를 하세요.”연우진이 차분한 목소리로 말을 이어갔다.“그리고 내가 지영 씨와 만나고 싶다고 해도 지영 씨가 받아주지 않으면 함께 하지 못해요. 이건 백연신 씨도 마찬가지고요. 백연신 씨가 여전히 지영 씨를 좋아한다고 해도 지영 씨가 받아주지 않으면 두 사람 역시 함께 못해요. 선택권은 지영 씨한테 있으니까.”백연신은 주먹을 말아쥐며 다시 물었다.“지영이와 만날 건지에 대한 대답만 해.”연우진은 한숨을 한번 내쉬었다. 아무래도 대답을 해주지 않으면 순순히 보내주지 않을 듯하다.“지영 씨는 좋은 사람입니다. 이대로 감정이 싹트면 나로서는 당연히 지영 씨와 함께하고 싶겠죠.”“한지영의 곁에 있을 수 있는 남자는 모든 걸 다 내어줄 수 있을 정도로 한지영을 사랑하는 사람이 아니면 안 돼.”백연신이 경고하듯 낮게 읊조렸다.“어째 내가 모든 걸 다 내어줄 정도로 한지영 씨를 사랑하지 않으면 우리 둘이 함께하는 걸 방해하겠다는 얘기로 들립니다만?”연우진의 질문에 백연신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지만 냉랭하고 차가운 눈빛을 보면 그 대답이 뭔지 알 수 있을 것도 같았다.“백연신 씨는 지영 씨를 위해 모든 걸 다 내어줄 수 있습니까? 그 정도로 사랑한다면 여기서 나한테 이러지 말고 다시 한번 지영 씨 마음에 들기 위해 노력을 해보는 게 어떨까요?”백연신은 그의 말이 끝난 순간 갑자기 손을 뻗어 연우진의 멱살을 잡았다. 그러고는 이대로 갈기갈기 찢어버릴 듯한 눈빛으로 그를 노려보았다.“너는 아무것도 몰라. 나라고...”하지만 그는 말을 다 잇지 못했다. 또한 멱살을 잡았던 손도 힘없이 풀었다.질투와 분노로 가득했던 눈동자가 한순간에 어둠에 잠겨버린 듯 시들어졌다.“한지영한테 잘해. 만약 지영이한테 상처를 주면 그때는 사는 게 사는 것 같지 않다는 게 뭔지 똑똑히 알려주지. 내 말 허투루 듣지 마.”말을 마친 후
백연신은 그 생각에 얼굴을 한껏 일그러트렸다. 질투와 분노, 슬픔과 고통의 감정들이 소용돌이치며 그의 얼굴에 담겼다.한지영의 집에서 나왔을 때 연우진은 꽤 편안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그는 몇 시간 전에 한지영에게 전화를 걸었다가 무사히 집에 도착했다는 말을 듣고 바로 그녀를 찾으러 집까지 왔다.다행히 사건은 무사히 일단락되었고 한지영도 예전의 일상을 다시 되찾은 것처럼 보였다.“우진 씨, 그... 나랑 더는 연락하고 싶지 않으면 언제든지 말해줘요. 난 괜찮으니까.”연우진은 한지영의 집에 도착하자마자 들은 그녀의 말을 떠올리고는 저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가끔 보면 한지영은 꼭 34살이 아닌 4살짜리 아이 같았다. 이런 상황에서도 마음속의 말을 솔직하게 전하며 상대방에게 선택권을 주니 말이다.하지만 그런 투명한 여자이기에 연우진도 그녀와 함께 있으면 더 즐겁고 자꾸 그녀와 연락을 이어나가게 되는 걸 것이다.“나는 지영 씨랑 계속 연락하고 싶은데. 지영 씨는 그저 피해자일 뿐이었잖아요. 그러니까 죄라도 지은 사람처럼 말하지 말아요.”“내가 백연신 씨와 호텔에서 아무 일도 없었다고 하면 믿을 수 있어요?”“네, 지영 씨가 그렇다고 하면 그렇게 믿을게요.”연우진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했다. 진심이었으니까.만약 정말 뭔 일이 있었으면 한지영 쪽에서 먼저 솔직하게 얘기를 해줬을 것이다. 한지영은 그런 여자니까.연우진은 엘리베이터 안에서 문득 백연신의 얼굴을 떠올렸다. 확실히 한지영은 백연신과의 인연을 이미 지난 과거로만 보고 있는 듯했다.하지만 백연신은? 그 역시 그럴까? 이제는 고은채와의 결혼도 파기됐는데?생각에 잠긴 채 엘리베이터에서 나오던 연우진은 아파트 입구에 서 있는 남자를 보고 멈칫하며 발걸음을 멈췄다.잘 뻗은 기럭지에 고고해 보이는 눈앞의 남자는 다름 아닌 백연신이었다.‘이 사람이 왜 여기에...’연우진과 백연신은 어느 정도 거리를 둔 채 서로를 바라보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렇게 침묵이 계속되다 연우진은 놀란 마
한지영의 말대로 백연신은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다른 여자를 곁에 둘 수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예쁜 여자를 곁에 둔다고 해도 그는 그녀가 아니면 안 되는 남자였다. 꼭 한지영이여야만 하는 남자였다.처음 본 순간부터 줄곧 한지영만을 사랑해왔으니까, 이미 모든 마음을 다 그녀에게 줘버렸으니까.사실 5년 전에 한지영이 아닌 고은채의 손을 잡았을 때 속으로 판을 짜고 있었다고는 하나 앞으로가 어떨지는 생각해 본 적도 없었다.그때는 자신에게 미래가 있을지도 없을지도 확신하지 못했거니와 백씨 가문의 모든 걸 되찾고 고씨 가문을 무너뜨리는 데 성공할 수 있을지 말지도 미지수였으니까.당시의 그에게는 한 걸음 한 걸음이 다 깨진 얼음판을 걷는 것 같았다. 그래서 섣불리 한지영에게 약속을 건넬 수도 없었다.지난 5년이라는 시간 동안 백연신은 사람을 은밀히 붙이는 것으로 한지영의 소식을 접할 뿐 그녀의 앞에 나서지는 못했다. 그때는 아무리 보고 싶어도 참아야만 했으니까.그런데 인내의 시간을 겪고 드디어 그녀의 앞에 나설 자격을 갖췄는데 한지영의 마음은 그사이 식어버렸다.백연신은 그 생각에 또 한 번 쓴 미소를 지었다.그녀와 함께하고 싶어 한 선택이, 그녀를 되찾기 위한 인내가 한지영이 거부함으로써 완전히 물거품이 되어버렸다.‘한지영을 살려주는 것만으로도 만족해라 이건가...?’백연신은 어쩌면 당시 한지영을 살려달라고 간절하게 외쳤을 때 모든 소원권을 다 써버린 걸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그는 운전석에 앉은 채 한지영의 모습이 사라질 때까지, 아니, 사라진 뒤에도 여전히 그쪽으로 시선을 고정하며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그러다 얼마나 지났을까, 휴대폰 진동이 울려댔다.“회장님, 고은채 씨가 방금 S 시를 떠났습니다. 그리고 매스컴 쪽에도 더는 한지영 씨의 일상을 방해하지 않게 조치를 해뒀습니다.”“고씨 가문 쪽은 계속해서 지켜봐. 손 내밀어주는 가문이 있나.”“네, 알겠습니다.”백연신은 통화를 마친 후 휴대폰을 다시 집어넣었다.고씨 가문에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