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유진의 큰삼촌, 둘째 삼촌과 셋째 이모는 외할머니가 돌아가신 지 두세 시간 만에 병원 연락을 받고 속속들이 병원에 도착했다.한편 그녀의 외할아버지 노준태는 몸이 편찮다는 이유로 병원에 안 왔다. 병원에 와서 시신을 보고 상심이 크면 몸이 더 안 좋아질 테니까.저승에 계신 외할머니는 외할아버지의 이런 이유를 들으면 과연 어떤 심정일까? 임유진은 가히 짐작할 수 없었다.한편 삼촌, 이모들은 임유진을 보자 제일 먼저 든 생각이 바로 외할머니의 묘지와 장례식 비용이었다. 임유진도 엄마 몫을 내야 한다며, 일전 한 푼 안 낼 순 없다고 한다!임유진은 저도 몰래 울화가 치밀었다. 외할머니가 돌아가셨는데 삼촌, 이모들이 신경 쓰는 건 오직 돈 문제였다.“돈이요?”옆에서 줄곧 아무 말 없던 강지혁이 입을 열었다.두 삼촌은 그제야 병실에 다른 사람이 있다는 걸 발견하고 화들짝 놀랐다. 너무 성급하게 온 것도 있고 조카가 웨딩드레스를 입고 있어 유난히 눈에 띄다 보니 옆에 있던 강지혁은 전혀 신경 쓰지 못했다.강지혁이 입을 열자 두 삼촌은 흠칫 놀라며 바로 그를 알아봤다. 그날 밤 박씨 일가에서 봤던 사람이니까.처음에 그들은 임유진을 박씨 일가의 바보 아들 박성호에게 시집보낼 생각이었는데 한밤중에 강지혁이 한 무리 사람들을 거느리고 와서 임유진을 데려갔다.나중에 그들은 현지 경찰서에 며칠이나 갇혀 있어야만 했다!“당... 당신이 여긴 어떻게?”두 삼촌이 버벅거리며 물었다.셋째 이모는 강지혁을 보더니 자연스럽게 말했다.“유진의 남자친구도 있었네. 네가 한꺼번에 돈을 내놓지 못하겠으면 남자친구더러 보태 달라고 해. 외할머니 장례식 치르고 묘지 살 돈도 없는 건 아니잖니.”임유진이 막 말을 꺼내려 할 때 강지혁이 그녀의 어깨를 가볍게 짓누르며 이모님께 말했다.“돈은 문제없어요. 근데 당신들이 과연 감당할 수 있겠어요?”셋째 이모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이 말은 무슨 뜻이지?이때 두 삼촌이 얼른 이모를 잡아당기며 전에 박성호의 집에서 있은
큰외삼촌이 유독 험상궂은 얼굴로 말을 내뱉었다.“야 이 자식아, 저번에 네가 우릴 구치소에 그 오랜 시간을 가둬 넣었지? 지금 당장 사과하고 손해배상비 물어내. 안 그러면 두 발로 걸어 나가지 못할 줄 알아.”“아직 감히 내게 사과를 요구하는 사람은 없는데.”강지혁이 느긋하게 말했다.한편 임유진은 마냥 의아할 따름이었다. 이게 다 무슨 일이지? 두 외삼촌이 원래 혁이를 무서워했는데 이모가 방금 그 말을 한 뒤로 두 삼촌의 태도가 180도 바뀌었다.설마 이모네 딸 배여진에게 뒷배가 생겨서 이러는 걸까?배여진은 남편과 자그마한 철제 가게를 운영하고 수입도 보통인데, 마을의 대다수 주민들과 비슷한 수준인데 대체 무슨 뒷배가 있다는 걸까? 임유진은 이해되지 않았다.“좋아. 사과 안 한다 이거지? 이따가 무릎 꿇고 빌어도 이 일은 절대 쉽게 넘어갈 수 없어! 그런 줄 알아!”큰 외삼촌이 표독스럽게 말했다.셋째 이모는 옆에서 좋은 구경 난 것처럼 거들먹거렸다.“유진아, 이모는 분명히 말해뒀어. 지금이라도 안 늦었으니 얼른 네 남자친구더러 두 삼촌께 사과하고 보상 톡톡히 해드리라고 해. 너도 알다시피 여진이가 평상시에 두 삼촌들과 사이가 얼마나 좋아. 삼촌들이 괴롭힘당하는 걸 절대 보고만 있을 여진이가 아니지.”임유진은 그제야 알아챘다. 셋째 이모는 오늘 옷차림이 전과 달렸다. 자세히 들여다보니 정교하게 만든 옷이라 싸구려는 아닐 듯싶었다. 게다가 손에 다이아몬드 반지와 금팔찌를 끼고 있었는데... 돈벼락이라도 맞은 듯싶었다.셋째 이모가 계속 입을 떠벌렸다.“너희 여진 언니는 더이상 예전의 여진이가 아니야. 뒤에 귀인이 뒷받침해주고 있어 감히 우리 여진의 심기라도 건드리면, 쯧쯧...”“귀인?”강지혁이 경멸의 미소를 날렸다.“마침 잘됐네요. 대체 어떤 귀인인지 한번 지켜봐야겠어요.”“너 따위가 뭔데? 이 세상엔 네가 감히 건드릴 수 없는 사람도 있어!”셋째 이모가 두 눈을 부릅뜨고 강지혁을 노려보며 이제 곧 후회할 일만 남았다고 암시하는 듯
“혁아, 됐어, 관둬.”임유진이 말했다.“금방 숨 거둔 외할머니, 가시는 길 편히 보내드리고 싶어.”어쨌거나 셋째 이모는 외할머니의 친딸이었으니!그녀가 아무리 셋째 이모에게 불만이 많아도 이런 때에 외할머니를 불편하게 해드리고 싶지 않았다.적어도 가시는 길은 편히 보내드리고 싶었다.“그래.”강지혁이 다정하게 말하며 셋째 이모의 손을 놓았다.셋째 이모는 휘청거리며 뒤로 몇 걸음 물러서다가 겨우 자세를 다잡았다.그녀는 얼굴이 창백해지고 아픈 손목을 매만지며 임유진을 죽일 듯이 노려봤지만 감히 아까처럼 덮쳐들진 못했다.“죽일 놈의 계집애, 이따가 여진이 오거든 너 아주...”말이 채 떨어지기도 전에 배여진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엄마, 뭔데? 내가 오면 뭐?”임유진은 고개 들어 이리로 걸어오는 배여진을 쳐다봤다.배여진은 샤넬 신상 슈트를 입고 가방도 샤넬 시그니처 크로스백이었다. 얼굴엔 세련된 메이크업을 했고 머리도 전처럼 대충 묶은 게 아니라 웨이브를 넣어서 우아하게 풀어헤쳤다.전과 확연히 다른 모습이었고 아예 딴사람으로 변한 것만 같았다. 그런데 임유진을 가장 놀라게 한 건 바로 배여진 곁에 따라온 사람이 강현수였다!!검은색 정장 차림의 강현수는 전보다 조금 야위었고 여전히 잘생긴 얼굴이지만 양미간 사이에 피곤함이 살짝 묻어났다.강현수가 그날 윤이 식당에 달려와 다짜고짜 임유진에게 강지혁과 결혼하냐고 물은 이후로 한동안 보이지 않더니 여기서 이렇게 다시 보게 될 줄이야.게다가... 임유진의 사촌 언니와 함께 들어오다니.그럼 설마 셋째 이모가 말한 사촌 언니의 귀인이 강현수였다고?!한편 강현수는 안에 들어서자마자 임유진에게 시선이 꽂혔다. 예상했다는 눈빛이지만 그 속엔 놀라움도 담겨 있었다.그는 임유진이 당연히 이리로 올 줄 알았다. 그녀의 외할머니가 돌아가셨으니 안 올 수가 없지.바로 이 때문에 배여진이 이 병원에 간다고 할 때 함께 온 것이다. 오는 길에서 강현수는 수없이 되뇌었다. 본인은 단지 배여진 때문에 병원에 가
강지혁은 강현수와 그의 옆에 있는 배여진을 보더니 두 눈을 반짝이며 입가에 옅은 미소를 지었다. 그는 한 손으로 임유진의 어깨를 잡고 강현수에게 말했다.“현수야, 여기서 또 이렇게 보네.”강현수는 그제야 강지혁에게 시선을 돌렸다.“그래, 오랜만이야.”한편 딸에게 불만을 늘어놓으려던 셋째 이모는 이 광경을 보더니 놀란 기색이 역력했고 이어서 어리둥절한 채 물었다.“두 분 아는 사이에요?”강현수가 생각에 잠긴 눈길로 강지혁을 쳐다봤다.“이분들 아직 네가 누군지 몰라?”“아마도.”강지혁이 대답했다.“난 너처럼 오만하지 않잖아. 그건 그렇고 네가 왜 여기 있어? 이 여자는...”그의 시선이 강현수 옆에 있는 배여진을 향했다.“너 이 여자 만나? 아까 다들 이 여자 뒤에 귀인이 뒷받침해준다더니 그게 너였어?”강현수는 복잡미묘한 표정을 지었고 시선은 또다시 웨딩드레스를 입은 임유진을 향했다.가슴이 또다시 후벼 파듯 아프고 모든 게 그의 착각이라고 말해주는 것만 같았다. 그가 생각했던 건 전부 그의 환상일 뿐, 그저 꿈에 불과했다.그녀가 본인이 찾는 사람이길 얼마나 바랐던가?하지만 그녀의 과거를 따라 조사해봤더니 또 다른 ‘팩트’를 얻었다.“여진이가 내가 찾는 사람이었어.”강현수가 말했다.임유진은 흠칫 놀랐지만 강현수의 말을 바로 이해했다. 한때 강현수는 사람을 잘못 알아보고 그녀 앞에서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강현수가 그 사람을 찾는 일에 얼마나 집착하는지 임유진은 제대로 체감했다.그런데 여진 언니가 바로 강현수가 애타게 찾던 그 사람이라고? 어릴 때 그 소녀였단 말인가?!임유진은 문득 세상 참 좁다는 생각이 들었다.“일단 축하해야겠네.”강지혁이 미소를 지었지만 경멸의 눈빛으로 배여진을 쳐다봤다.인간의 탐욕이란 역시! 분명 아니면서 한사코 옳다고 잡아떼는 추악한 몰골!강지혁이 꼼수를 부려 온갖 단서를 조작해 배여진이 바로 강현수가 찾는 사람이라고 만들었다. 하지만 강현수가 정말 배여진을 찾았을 때 그녀가 솔직하게 고백한다면 그
배여진은 요즘 강현수를 따라 S 시로 가서 강지혁 이름 석 자가 뭘 의미하는지 너무 잘 안다.그런 인물이 지금... 사촌 동생 남자친구라고?!임유진은 감방까지 다녀왔는데 어떻게 이런 남자친구를 사귈 수 있을까?!게다가 강지혁뿐만 아니라... 배여진은 옆에 있는 강현수를 힐긋 쳐다보며 답답한 마음을 애써 가라앉히고 억지 미소를 지었다.“강지혁 씨였네요. 유진아, 저번에 남자친구 집에 데려왔을 때 왜 말하지 않았어. 너 이러면 섭섭해.”셋째 이모도 얼른 아양 떨며 웃었다.“아이고 유진아, 네가 강지혁 씨 같은 남자친구를 만난 것도 다 네 복이지 뭐! 너희 외할머니도 이젠 저승에서 마음 놓고 눈 감으실 수 있겠네. 큰오빠, 작은 오빠, 다들 왜 서 있기만 해? 얼른 유진이한테 사과해야지! 저번에 있은 일은 정말 인간이 할 짓이 못됐어!”셋째 이모의 태도가 180도 달라졌다.두 삼촌도 서로 마주 보며 좀전의 기고만장한 기세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둘은 아첨하며 연신 사과했고 이게 다 조카를 위해서라는 둥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퍼부었다.삼촌들 사과에 임유진은 아무런 느낌도 없었다.그녀가 바라는 건 딱 하나, 친척들이 제발 더는 소란을 피우지 말았으면 하는 것이다. 장례식을 마칠 때까지 부디 외할머니가 편히 쉬시게 해드리고 싶었다.이때 장의사가 다가와 외할머니께 수의를 입혀드리고 할머니 시신을 냉장 투명관에 넣어드렸다. 투명관 속에서 편히 잠든 외할머니를 보자 임유진은 또다시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할머니!”아무리 불러봐도 투명관 속의 어르신은 더이상 그녀에게 대답할 수 없었다.강지혁이 얼른 그녀를 부축했다. 임유진은 이젠 바로 서 있을 힘조차 없었다.외할머니 시신은 관에 담겨 일단 노씨 일가로 실어 갔고 풍습에 따라 집에 사흘 놓아둔 후에 발인한다.노씨 일가에서 상조회사에 이미 연락해 위패와 제사상 등을 다 배치해놓았다.마을 이웃과 친척들도 노 씨네 어르신이 돌아가신 소식을 전해 듣고 추모하러 왔다. 노 씨네 가족들은 전부 나서서 마을
그런 옷을 지금 임유진이 입고 있으니 배여진은 배가 아파 죽을 지경이다.“안 그래도 너 갈아입을 옷 좀 찾아주려 했는데 벌써 다 갈아입었네.”배여진이 말하면서 또다시 다정하게 강현수의 팔짱을 꼈다.“현수 씨, 정식으로 소개해드릴게요. 이쪽은...”“필요 없어. 우리 아는 사이야.”강현수가 대답했다.배여진은 그가 강지혁만 아는 줄 알았는데 임유진도 알고 있었다니.그녀는 문득 두려움이 밀려왔지만 곧장 괜찮다며 저 자신을 위로했다. 임유진은 그해 일을 아예 기억하지 못한다고 스스로 되뇌었다!‘현수 씨가 날 찾아온 걸 보면 유진이가 사실 현수 씨한테 아무 말도 안 했다는 걸 증명해. 난 오직 어릴 때 현수 씨를 구한 캐릭터만 잘 연기하면 돼. 그럼 내가 원하는 건 죄다 얻게 될 거야.’배여진이 강현수의 팔짱을 끼자 임유진은 그 모습을 바라보며 미간을 살짝 구겼다. 스킨쉽이 조금 지나친 듯싶었다. 사촌 언니는 남편이 있는 유부녀였으니!그러고 보니 노씨 일가로 돌아온 이후로 사촌형부가 보이지 않았다.강현수가 팔을 빼내자 배여진이 살짝 난감한 표정을 지었지만 곧장 배시시 웃었다.“유진이 너 아직 모르는구나. 나 장이경이랑 이혼했어.”장이경은 배여진의 대장장이 전남편이다.임유진은 화들짝 놀랐다. 이혼이라니? 이렇게 갑자기? 그렇지만 그녀 옆에 서 있는 강현수를 보니 가능할 것도 같았다.사촌 언니 배여진은 일찌감치 대장장이에게 시집온 걸 후회했는데 갑자기 강현수가 나타나 버리니 마음이 변하기 마련이다.강현수는 S 시의 많은 부잣집 여인들 사이에서도 우수한 남편감으로 꼽히는데 작은 마을의 사촌 언니는 오죽할까?게다가 또 마침 강현수가 그토록 집요하게 찾던 사람이 배여진이였으니 전에 만난 수많은 여자친구들은 단지 그녀의 대체품에 불과하다.이렇게 생각하니 배여진이 마음이 바뀐 것도 다 이해됐다.다만 강현수가 배여진을 대하는 태도는 너무 평범했고 심지어 임유진이 볼 때 조금 소외감이 느껴졌다.배여진은 비록 강현수에게 아주 큰 기대를 품고 있지만 그
배여진은 넋이 나간 강현수를 보자 눈가에 질투가 어렸다. 강현수와 임유진이 아는 사이라는데 그의 표정을 보니 어떠한 감정을 꾹 짓누르고 있는 듯싶었다.설마 강현수가 임유진에게... 아니, 그럴 일은 절대 없다!배여진은 얼른 저 자신을 위로했다. 연예계 황태자가 어떤 사람인데, 감방 다녀온 여자를 좋아할 리가 있을까!강지혁이 임유진에게 걸려든 건 이미 그녀에게 충분히 횡재였다!강현수는 지금 배여진이 어릴 때 자신을 구한 소녀라고 여기고 있으니 그녀야말로 강현수의 마음속에서 가장 중요한 사람이다.이 기회를 잘 잡으면 영원히 강현수와 함께할 수 있다.“유진이는 참 운이 좋아요. 어떻게 강지혁 씨랑 함께 있네요. 오늘도 웨딩드레스 차림으로 병원까지 달려온 거 있죠. 두 사람 설마 곧 결혼하는 건가요...”배여진은 문득 하던 말을 멈췄다. 강현수는 그녀의 말을 아예 안 들었고 두 눈은 오직 저 멀리 떠나간 임유진을 향해 있었다.지금 뭘 보는 걸까? 배여진은 마음속의 불안감이 서서히 켜졌다...임유진과 강지혁은 문밖을 나서 대충 작은 음식 가게로 들어갔다. 급하게 달려오느라 그녀는 여태껏 점심도 못 먹었지만 사실 배고픈 느낌도 없었다.“미안해. 나 때문에 아직 점심도 못 먹었지.”임유진이 말하며 테이블에 놓인 음식들을 바라봤지만 수저를 들 기미가 없었다.“뭐가 미안해. 이렇게 큰일이 생겼는데 당연히 누나랑 함께해야지.”그는 말하면서 수저를 건드리지도 않는 임유진을 바라봤다.“배 안 고파도 뭐라도 좀 먹어. 사흘 내내 외할머니 빈소를 지켜드려야 해. 무엇보다 체력이 우선이야. 힘이 나야 빈소도 지킬 거 아니야.”임유진도 강지혁이 말이 일리 있다는 걸 안다. 뭐라도 좀 먹어서 체력을 보전해야 외할머니 빈소를 3일 동안 지킬 수 있다.그녀는 고개를 푹 숙이고 음식을 입에 집어넣었지만 마치 돌덩어리를 씹는 것만 같았다.“맛없어? 딴 데 가서 먹을까?”강지혁이 물었다.“아니야. 어디서 먹든 다 똑같아.”대답을 마친 그녀는 마치 미션을 완성하듯
“맞아.”임유진이 감개무량하게 말했다.“앞으로도 그런 오해는 없을 거야. 애타게 찾던 사람을 드디어 만났으니 잘된 일이야.”이젠 강현수도 그렇게 울진 않겠지! 그녀의 머릿속에 문득 그날 밤 강현수가 그녀 앞에서 울던 모습이 떠올랐다.웬일인지 가슴 한쪽이 답답하고 머리가 이따금 아파 났다.임유진은 갑자기 걸음을 멈추고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왜 그래?”강지혁이 황급히 물었다.“아니, 그냥... 갑자기 머리가 아파서.”그녀가 대답했다.강지혁은 사색이 된 그녀를 보더니 미간을 구겼다.“안색이 너무 안 좋아. 근처 모텔에 가서 조금만 쉴래?”이 근처엔 제대로 된 호텔은커녕 작은 모텔들만 몇 개 보였다.“괜찮아.”임유진이 대답했다. 두통도 잠시일 뿐 이렇게 얘기 나누는 사이에 통증이 금세 사라졌다.“이젠 안 아프네. 가서 외할머니 옆에 더 있고 싶어.”그녀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말을 이었다.“혁아, 나 여기서 3일 있어야 해. 외할머니 발인하신 후에 S 시로 돌아갈 테니 넌 일단 먼저 돌아가.”“내가 항상 옆에 있어 준다고 했잖아. 그새 잊었어?”강지혁이 말했다.“하지만 사흘이면 회사에 처리해야 할 업무가 산더미처럼 쌓일 거야.”임유진이 말했다.“난 혼자 여기 있어도 괜찮아. 어차피... 앉아서 외할머니 지켜볼 뿐이니.”외할머니의 빈소를 지키면서 그녀는 자신이 꼭 아웃사이더처럼 느껴졌다. 할머니께 문상 온 손님들에게 인사하는 것 외엔 아무런 대화가 없었으니까.오히려 배여진은 사람들에게 떠받들려 자신을 향한 아부를 즐기고 있었다.임유진은 당연히 알고 있다. 이런 변화는 전부 강현수 때문이란 것을.“누나가 여기 며칠 있든 난 항상 누나 옆을 지켜줄 거야.”강지혁이 말했다.“누나 혼자 여기 두고 가면 내가 마음이 안 놓여.”“괜찮아. 이젠 삼촌들도 네 신분을 알아서 감히 예전처럼 나한테 막 대하지 못해.”임유진은 이 점에 대해 아주 확신한다.감히 강지혁을 건드릴 수 있는 사람이 몇 안 되는데 강자에게 약하고 약자에게 강한
강현수는 강지혁에게는 시선 한번 주지 않고 임유진만 바라보았다.“만약 그 어느 날 강지혁이 네가 생각하는 그런 사람이 아니라는 걸 알게 되면, 더 이상 강지혁 곁에 있을 수 없다는 걸 알게 되면 그때는... 내 곁으로 와줄래? 내가 널 돌 볼 수 있게 해줄래?”강현수의 목소리는 미세하게 떨려 있었다.이 말을 입 밖으로 내뱉기까지 상당히 많은 고민을 하고 또 용기를 낸 듯했다.어쩌면 지금이 그의 마지막 기회일지도 모른다.강현수는 말을 마친 후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하고 아래로 내린 두 손도 덜덜 떨고 있었다.그의 얼굴에 어린 긴장감이 여실히 드러나고 있었다.임유진은 그 얼굴에 잠깐 넋을 잃었다가 이내 자신의 손을 잡고 있던 강지혁의 손에 힘이 들어가는 것을 느꼈다.또 불안해하는 건가?임유진은 강지혁의 손을 꽉 맞잡고 강현수에게 말했다.“아니요. 그럴 일은 없을 거예요. 지금이든 앞으로든 내가 함께하고 싶은 사람은 혁이일 테니까요.”그녀의 단호한 말에 강현수의 눈이 어둡게 가라앉았다. 어쩌면 흔들릴지도 모를 거라고 생각했던 마음이 아주 손쉽게 저 먼 곳으로 내던져졌다.대체 뭘 기대한 걸까?강현수가 쓰게 웃었다.“혁아, 이만 가자.”이번에는 임유진이 강지혁의 손을 잡고 앞으로 걸어갔다.그리고 곁에 있던 경호원들도 두 사람의 뒤를 따랐다.강현수는 제자리에 가만히 선 채 미동도 없었다. 임유진을 태운 차량이 서서히 멀어져 가는데도 그는 여전히 아무런 움직임도 없었다.한편 임유진은 강지혁과 차에 올라탄 다음 곧바로 그의 볼을 매만졌다.“혁아, 너 얼굴이 왜 그래?”강지혁은 그녀의 손길에 움찔하더니 이제야 정신을 차린 듯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내 얼굴이 왜?”“안색이 안 좋아 보여. 꼭 무슨 일 있는 것처럼. 혹시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것 때문에 회사에 무슨 문제라도 생긴 거야?”조금 얼이 빠진 듯하고 아까보다 확 어두워진 얼굴을 한 강지혁의 모습은 좀처럼 볼 수 없는 모습이기에 임유진은 무척이나 걱정스러웠다.“아무것도 아니야
소민영은 이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는 듯 미간을 찌푸리며 외쳤다.“고작 그때 손톱 좀 뜯기고 3년밖에 안 되는 감옥 생활한 거 가지고 우리 집안이 무너져야 해? 네가 뭔데? 네가 뭔데!”그녀는 줄곧 임유진을 무시했었다. 임유진이 강씨 가문의 안주인이 된 지금도 역시 그녀는 임유진을 당시 함부로 자신의 집안 며느리 자리를 탐냈던 주제넘은 여자로 보고 있다.소민영의 말에 임유진이 뭐라 하려는데 둔탁한 마찰음 소리와 함께 소민영의 머리가 힘껏 옆으로 돌아갔다.“임유진이 뭐냐고 했지. 임유진은 감히 너희 같은 인간들이 함부로 쳐다볼 수 없는 내 아내야.”차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강지혁은 모든 걸 다 얼려버릴 것 같은 눈으로 소씨 가문의 두 남매를 쳐다보았다.소민영은 그 눈빛에 손바닥으로 볼을 감싼 채로 그만 굳어버리고 말았다.그녀는 자신이 꼭 한낱 개미 같은 존재가 된 듯했다. 여기서 한마디만 더 하면 영원히 입을 열지 못하게 될 것만 같았다.소민영은 강지혁이라는 남자를 진심으로 두려워하고 있다. 아무리 사람을 홀릴 정도의 잘생긴 남자라고 해도 그녀에게는 그런 것보다 두려움이 더 컸다.그래서 그녀는 입을 꾹 닫은 채 곧바로 소민준의 뒤로 숨었다.그리고 소민준은 이렇게 된 거 제대로 말은 해보려고 강지혁을 바라보았다.“강지혁 씨, 우리 집안은 늘 GH 그룹과 강씨 가문에 우호적이었어요. 앞으로도 그럴 거고요. 그러니까 이번 한 번만 제발 봐주세요.”강지혁은 그런 그를 그저 담담하게 쳐다볼 뿐이었다.“진씨 가문과 소씨 가문 모두 그때 내 아내를 벼랑 끝까지 몰고 가며 놓아주지 않았는데 나는 왜 당신들을 용서해야 하지?”그 말에 소민준의 얼굴이 당황으로 빨갛게 달아올랐다.“그... 그건 진씨 가문의 뜻이었어요. 저, 저희 집안은 그 일에 그 어떤 의견도 내지 않았어요.”“의견을 냈든 안 냈든 결과적으로 진씨 가문을 도와준 덕에 재미 좀 봤을 텐데? 그런데 이제 와서 자신은 그저 시키는 대로만 했다?”강지혁의 빈정거림에 소민준은 이를 꽉 깨물
임유진은 갑작스러운 소민준의 등장에 깜짝 놀랐다.오늘 장례식 참석 목록에 소씨 가문은 없었다. 그런데도 소민준이 이렇게 들어와 있다는 건 이곳 직원을 매수했던가 참석 인원에게 간절히 부탁한 게 틀림없다.소민준의 뒤로 소민영도 다리를 절룩거리며 다가왔다.“그런데 솔직히 우리 오빠한테 감사해야 하는 거 알죠? 오빠가 헤어져 주지 않았으면 강지혁 씨랑 결혼하지도 못했을 거 아니에요. 안 그래...”“소민영!”소민준은 소민영이 쓸데없는 소리로 임유진의 심기를 건드릴까 봐 크게 호통쳤다.“빨리 유진이한테 사과해!”그러고는 임유진을 바라보며 말했다.“유진아, 미안해. 민영이가 철이 없는 거 너도 알잖아. 그리고 다시 한번 사과할게. 정말 미안해. 나나 우리 집안이나 너한테는 미안한 마음뿐이야. 한 번만 봐주라... 제발...”임유진은 그 말에 문득 일전 강지혁이 진씨 가문을 상대하려 했던 것이 떠올랐다.소민준이 장례식까지 찾아와 이렇게 비는 걸 보면 아마 진씨 가문을 건드리는 동시에 소씨 가문도 건드린 것 같다.“사실 나도 그때 너 그렇게 보내고 마음이 편치 않았어. 특히 네가 억울했다는 게 밝혀진 뒤로는 더더욱. 만약 내가 그때 널 위해서 진실을 밝히려고 했으면 네가 그런 고생은 하지 않아도 됐을 거야. 정말... 너를 볼 면목이 없어.”소민준의 얼굴에는 후회의 감정이 잔뜩 서려 있었다. 게다가 눈시울까지 붉어진 것이 아마 다른 여성들이 봤으면 그가 잘못한 게 무엇이든 바로 용서해주려고 했을지도 모른다.하지만 임유진은 아니었다. 그녀는 그의 열연에도 표정 하나 변하지 않았다.그녀는 당시 진세령의 옆에 딱 붙어 서서 그녀의 손톱이 하나하나 뽑히는 걸 그저 지켜봤을 뿐만 아니라 피가 흥건한데도 표정 하나 변하지 않았던 소민준의 모습이 여전히 눈앞에 선했다.심지어 그는 고통스러워하는 그녀를 보며 제일 후회되는 일이 바로 그녀와 함께했었던 일이라고까지 했다.그렇게도 차갑고 태도가 손바닥 뒤집듯 바뀌는 남자인데 임유진이 지금 그의 아련한 얼굴을 좀
강현수의 시선이 너무 지독하게 한곳에 꽂혀있던 탓인지 조문객들이 하나둘 이쪽을 쳐다보며 수군거리기 시작했다.“강현수, 뭐 할 말 있어?”그때 강지혁이 임유진의 손을 잡으며 강현수를 노려보았다. 꼭 이 여자는 내 것이니 이만 꺼지라는 것 같았다.강현수는 잘 포개져 있는 두 사람의 손을 가만히 바라보더니 결국 끝까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시선을 떼고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한은정은 그 광경에 그제야 안도한 듯 표정이 풀어졌다.물론 안도한 건 한은정뿐만이 아니었다. 임유진 역시 다행이라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걱정하지 마. 아무 일도 없을 거야.”강지혁의 목소리가 귓가에 낮게 울려 퍼졌다. 그 소리에 임유진이 고개를 옆으로 돌리자 강지혁이 그녀의 두 눈을 바라보며 계속해서 말을 이어갔다.“오늘은 할아버지 장례식이라 강현수도 뭔 짓을 하지는 않을 거야. 여기서 일을 벌이면 그건 집안 간의 대립으로 이어질 테니까.”강지혁은 잠깐 머뭇거리더니 이내 임유진의 손을 더 꽉 잡았다.“강현수도 알 거야. 자기한테는 이제 그 어떤 기회도 없다는 걸.”그 뒤로 장례식은 순탄하게 진행됐다.임유진은 큰 배를 손으로 지탱하며 계속해서 강지혁의 곁을 지키다 조문객들이 조금 빠지고 나서야 밖에 있는 휴식 구역으로 가 휴식을 취했다.배 속의 아이들도 오늘은 분위기가 무거운 날인 걸 아는지 작은 태동만 있을 뿐 크게 그녀를 불편하게 만들지는 않았다.임유진은 의자에 앉아 습관적으로 자신의 배를 어루만지며 아이들에게 오늘 있었던 일들을 얘기해주었다.그때 그녀의 곁을 지키고 있던 경호원 몇몇이 부산스럽게 움직이기 시작했다.임유진이 고개를 돌려보니 멀지 않은 곳에 강현수가 서 있는 것이 보였다.경호원은 그가 임유진의 곁으로 다가오지 못하게 적당히 거리를 두고 그를 제지했다.“나한테 뭐 할 말 있어요?”임유진이 먼저 물었다.강현수는 임유진의 얼굴을 보며 방금 그녀가 배 속의 아이들과 다정하게 얘기를 나누던 장면을 떠올렸다.무척이나 낯선 모습이었지만 그
게다가 이제는 강문철도 없으니 임유진이 강씨 가문이 안주인이라는 건 그 누구도 반박할 수 없는 사실이 되었다.또한 임유진은 임신까지 했으니 아이들이 무사히 태어나면 그때는 그 누구도 그 자리를 감히 탐낼 수 없게 된다.장례식에 참석한 사람들 모두 그 사실을 인지하고 있기에 강지혁을 대하는 것처럼 그녀를 대했다.임유진은 강지혁의 아내로서 줄곧 강지혁의 곁에 있었다.강씨 가문은 S 시에서 가장 뿌리가 깊고 또 유명한 가문이라 장례식장도 컸고 조문객들도 훨씬 많았다.강지혁은 임유진이 무리라도 할까 봐 몇 번이나 그녀에게 이만 쉬라고 했지만 임유진은 고개를 저으며 계속해서 그의 곁을 지켰다.“나 아직 괜찮아. 진짜 힘들면 너한테 얘기할게. 나도 내 몸 귀한 줄 알아. 그러니까 걱정하지 마.”임유진도 자신이 아이셋을 가진 임산부라는 사실을 잘 인지하고 있었다.그때 조문객들이 입구를 바라보며 강현수의 이름을 불렀다.이에 임유진은 살짝 움찔하더니 저도 모르게 시선을 돌려 입구 쪽을 바라보았다.그러자 익숙한 남자의 실루엣이 천천히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는 것이 보였다.강현수와 마지막으로 본 것도 이제는 몇 달 전이었다.한때는 생사를 함께 했던 친구였는데 결국에는 썩 유쾌하지 않은 방식으로 헤어지게 되었다.강현수는 오늘 부모님과 함께 장례식에 참석했다.임유진이 그를 바라봤을 때 그의 시선 역시 임유진에게 닿아있었다.강현수는 임유진을 보자마자 옆으로 늘어트린 손을 살짝 움켜쥐었다.그토록 오래 찾아 헤맸던 사람을, 오랜 기간 마치 습관처럼 떠올렸던 사람을 그는 번번이 놓쳐버렸다.임유진과 다른 방식으로 다시 시작할 수도 있었는데 그는 그 가능성마저도 자기 손으로 부숴버렸다.그 결과 그녀는 다른 남자의 아내가 되었고 다른 남자의 아이를 임신했으며 지금 그 남자의 곁에 서 있게 되었다.강현수는 이제 영원히 그녀 곁에는 있을 수 없게 되었다.강현수네 가족이 강지혁과 임유진의 앞으로 다가왔을 때 강현수는 위로의 말을 건네는 부모님과 달리 아무 말도 하지
어쩌면 강지혁은 줄곧 할아버지의 사랑을 받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그 어린 나이에 아버지를 잃고 돌아온 그에게 유일한 버팀목이라고는 강문철밖에 없었으니까.“나는 솔직히 네 할아버지가 고마워. 혁이 너를 이렇게 멋있게 키워줬잖아. 그리고 나랑 만나게 해줬고.”임유진은 계속해서 그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을 이어갔다.“혁아, 네가 원하는 가족 간의 사랑은 앞으로 내가 줄게. 그리고 우리 아이들도 줄 거야.”그 말에 강지혁의 눈동자가 흔들렸다.임유진은 모든 걸 알고 있었다. 그가 무엇을 가장 원하는지 이미 다 알고 있었다.“아까 네가 그랬지? 사람마다 중요하게 여기는 게 다 다르다고. 그럼 너는? 네가 중요하게 여기는 건 뭔데?”강지혁이 임유진의 체향을 들이마시며 물었다.그녀의 냄새를 맡고 있으면 늘 이렇게 마음이 진정되고 몸이 편안해졌다.“나?”임유진은 그 말에 잠시 생각하다가 답했다.“내가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건 혁이 너랑 우리 아이들이야.”“유진아, 나는 욕심이 많아. 나는 너를 그 누구와도 나누고 싶지 않아. 그게 우리 아이들이라고 해도 나는 싫어. 나는 내가 네 마음속 1순위였으면 좋겠고 너한테 가장 중요한 사람이었으면 좋겠어.”강지혁의 말에 임유진이 눈을 깜빡였다.설마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아이들을 질투하는 건가?“혁아, 너는 내 마음속 1순위야. 물론 아이들도 너무 중요하고 소중하지만 너랑은 결이 조금 달라. 혁이 너는 나한테 유일무이한 존재잖아.”임유진은 두 손을 둘러 가볍게 강지혁을 끌어안았다.이미 배가 불러올 대로 불러와 완전히 꼭 끌어안지는 못했지만 싸늘한 방 공기를 녹이기에는 충분했다.“내가 너한테 유일무이한 존재라고?”“응. 널 대신할 사람은 그 어디에도 없어. 물론 아이들을 낳고 진정한 엄마가 되면 어쩔 수 없이 아이들에게 더 신경을 쓰고 더 관심을 쏟을 수밖에 없겠지.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네가 중요하지 않은 건 아니야. 이건 장담해. 그리고 네가 원하면 네가 원하는 방식대로 더 많이 널 사랑해줄게. 혁아,
별채로 가는 길에는 늘 조명이 켜져 있기에 어두운 저녁이라도 전혀 무섭지 않았다.임유진이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 보니 강지혁이 방 한가운데 멀뚱히 서 있는 것이 보였다.강지혁은 불빛을 받으며 시선을 내린 채 바로 앞에 있는 냉동관을 그저 가만히 바라만 보고 있었다.“혁아.”임유진은 그를 부르며 천천히 옆으로 다가갔다.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강지혁은 상념에서 빠져나와 고개를 돌렸다.“오지 말라니까. 여기는 나 혼자 있으면 돼.”“너랑 같이 있고 싶어서 왔어.”임유진은 강지혁의 바로 앞에 서서 그의 볼을 매만졌다.지금은 1월이라 날씨가 무척이나 추웠다. 게다가 지금은 밤이고 별채 쪽에는 보일러도 없었기에 바깥과 거의 비슷할 정도로 추웠다.“오늘 밤도 여기 있을 거야?”임유진이 물었다.“응. 그래도 날 키워주셨으니 할 도리는 다해야지. 내일 할아버지 장례식에 사람들 많이 올 거야. 너는 몸이 불편하니까 가지 말고 그냥 집에 있어.”“출산할 시기가 임박한 것도 아닌데 뭐. 내일 할아버지 장례식에 나도 참석할 거야. 만약 몸이 불편하거나 하면 바로 너한테 얘기할게.”강지혁은 그 말에 임유진의 손을 살짝 잡았다.“너한테는 좋은 기억 하나 없는 사람이잖아. 그런데 왜...”“네 할아버지잖아. 네 유일한 가족이잖아. 그러니까 아무리 나를 마음에 들지 않아 했어도, 아무리 끝까지 나를 손주며느리로 받아들이지 않았어도 나는 할아버지 가시는 길을 너와 같이 보내드려야 할 의무가 있어.”다른 건 없었다.그저 강지혁의 어린 시절을 곁에서 지켜줬다는 사실만으로도 임유진은 충분히 감사했다.강지혁은 그 말에 그녀의 손을 조금 세게 쥐었다.“할아버지가 마지막에 한 말은 신경 쓰지 마. 그 말은 그냥...”“알아. 네 할아버지는 그저 누군가를 깊게 사랑하는 것으로 행복한 결과를 낳을 거라는 걸 믿지 못하시는 분이었던 거지. 네 증조할아버지와 증조할머니 일도 있고 네 아버지 일도 있어서 많이 무서우셨을 거야. 너도 나중에 불행하게 될까 봐.”임유진이 말했
강지혁은 마치 강문철에게 자신이 임유진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보여주려는지 조금 격앙된 목소리로 얘기했다.강문철은 그 말에 눈동자를 돌려 자신의 유일한 손주를 노려보았다. 그러다 몇 초 후 이제는 모든 게 다 피곤한 듯 천천히 눈을 감으며 입을 열었다.“우리 집안에서... 여자한테 미친 인간 치고... 멀쩡한 사람을 못 봤다. 네가... 계속해서 이러면 너도 언젠가는...”강문철의 목소리가 점점 작아지는가 싶더니 이내 옆에 있던 종합모니터에서 삐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임유진은 그 소리에 강문철이 세상을 떠났다는 것을 바로 알았다.누군가의 생명이 바로 눈앞에서 멎었다.조금은 무서웠던 노인이, 강지혁의 유일한 가족이었던 노인이 이렇게 세상에서 사라졌다고 생각하니 어쩐지 모든 게 다 비현실적으로 다가왔다.강지혁은 삐 소리가 들린 뒤로 임유진의 손을 꽉 잡았다. 그렇게 계속 힘을 주다가 임유진의 입에서 아프다는 소리가 들리고서야 비로소 정신을 차리며 손을 놓아주었다.“미안. 아팠지?”강지혁은 어느새 빨개진 그녀의 손을 다시 잡으며 초조한 눈길로 물었다.“괜찮아. 그것보다 할아버지...”“응. 가셨어.”강지혁의 얼굴은 가족을 잃은 사람 같지 않게 무척이나 평온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정말 아무런 감정도 없는 게 아니라는 걸 임유진은 알고 있다.아무리 살가운 사이가 아니었어도 강문철은 강지혁의 할아버지고 유일한 가족이었다. 강선우가 죽은 뒤로 그의 곁을 지켜줬던 유일한 사람이었다.강지혁은 몸을 돌려 편히 잠든 강문철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았다.그리고 임유진은 그런 강지혁의 옆에 서서 그의 손을 꽉 잡아주었다....강문철의 장례식은 3일 뒤로 정했다.그 3일 동안 시신은 냉동관에 넣은 채 강씨 저택의 별채에 두기로 했다.그리고 그 3일 동안 강지혁은 그 어떤 외부인도 별채에 들이지 않았다.별채는 강씨 가문 사람 외에는 허락하지 않는 특별한 곳이었으니까.강선우가 죽었을 때도 그의 시신은 잠시 이 별채에 놓여 있었다. 그리고 지금은 그의
강지혁은 임유진의 고집에 결국 알겠다며 그녀와 함께 집에서 나와 병원으로 향했다.병원에 도착한 후 강지혁은 뒤따라온 경호원에게 임유진의 곁을 맡기고 혼자 병실로 들어갔다.안으로 들어가 보니 빼빼 마른 강문철이 흰색 병상 위에 가만히 누워있는 것이 보였다.한 시대를 주름잡았던 남자도 병마와 세월 앞에서는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었다.강문철은 강지혁이 안으로 들어온 것을 보더니 마지막 힘을 쥐어짜 입을 움직였다.“왔... 니...”“네, 저 왔어요.”강지혁이 곁으로 다가오며 대답했다.사실 강지혁은 강문철에게 대단한 가족 간의 정은 느끼지 못했다.실제로 강문철은 강지혁이 할아버지에 대한 애정을 느낄만한 행동을 보여주지 않았으니까.강문철은 언제나 강지혁을 자신의 뒤를 이어 강씨 가문의 모든 것을 물려받을 하나의 장기 말로 여겨왔다. 물론 그 장기 말도 쓸모가 없었다면 진작 버렸을 것이다.“이제는... 강씨 가문의 모든 게 네 손에... 달렸다. 만약... 네가 가문을 망하게 하면... 가만두지 않을 거야.”강문철이 숨을 몰아쉬며 힘겹게 말을 내뱉었다.“할 말은 그게 끝이에요?”강지혁이 강문철을 빤히 바라보았다.이에 강문철은 탁한 눈동자를 옆으로 굴려 병실 문 쪽을 바라보며 말했다.“임유진... 그 아가씨... 밖에 있지? 들어오라고 해...”그 말에 강지혁의 눈썹이 꿈틀거렸다.“유진이 건드릴 생각하지 마세요.”“이 꼴로... 내가 뭘 할 수 있을 것 같으냐? 어차피... 그 아가씨 옆에는... 네 사람 천지일 텐데.”강지혁은 그가 두 손으로 직접 키운 손주이자 가문의 후계자이기에 강지혁의 생각 같은 건 이미 훤히 꿰고 있었다.강지혁이 움직이지 않고 가만히 있자 강문철이 다시 입을 열었다.“그저... 마지막으로 해줄 얘기가... 있어서 그러는 것뿐이다...”호흡이 점점 가빠지고 안색도 창백해진 것이 정말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듯했다.강지혁은 잠깐 고민하다가 결국 발걸음을 옮겨 병실 밖으로 나갔다. 그러고는 곧바로 임유진의 손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