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때 누군가가 임유진이 들어오는 걸 보더니 곧장 말했다.“예전에는 너희 집안에서 유진이가 제일 잘 나갈 줄 알았는데 어릴 때 그 씩씩하던 아이가 지금은 되레 제일 초라한 꼴이 됐네. 여진이야말로 노씨 일가의 자랑 아니겠어.”이 사람은 임유진을 비하하며 배여진을 추켜세웠다. 배여진은 원래 이런 말을 듣기 좋아했다. 어쨌거나 어릴 때부터 두 사람은 생김새도 비슷하고 나이대도 비슷해 다들 두 사람을 비교했다.임유진은 공부를 잘해서 명문대에 입학했지만 배여진은 그녀에 비해 성과가 미약하여 사람들이 늘 깔보았다.그리하여 배여진은 임유진 앞에서 더 기세등등해질 수 있는 게 소원이었다. 다만 그건 임유진의 남자친구가 강지혁이란 걸 알기 전까지 일이다.이제 강지혁의 정체를 알게 되니 배여진은 그저 입을 나불거리는 저 친척을 쥐어패고 싶은 심정이다. 그녀는 난감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그 친척은 아직 아부가 모자란 줄로 알고 계속 입을 떠벌렸다.“너희 외할머니 병도 다 유진이 때문에 화병 나서 그런 거야. 집안에 감방 다녀온 사람이 생겼으니 화 안 나게 생겼어? 여진이 네가 장해서 다행이야. 어릴 때 강현수 도련님을 구해드려서 이렇게 몇 년 만에 찾아오셨잖니. 우리 여진이는 앞으로 돈 걱정 없이 평생 누리면서 살겠네.”배여진은 안색이 돌변하여 곁눈질로 임유진을 흘겨봤다. 친척들의 말에 임유진이 뭔가 생각난 건 아닌지 걱정됐다.다만 그녀의 눈빛이 강지혁에게 닿고 말았다. 짙은 눈동자는 마치 그녀를 비난하듯 마음을 심란하게 했다.자신은 단지 사칭한 사람이란 것을 바로 들켜버린 것만 같았다.“됐어요, 그만 얘기해요.”배여진이 그 친척에게 말했다.“외할머니 병이 유진이 때문이라니요? 할머니는 아직 발인도 안 하셨는데 이렇게 말하는 거 너무 지나친 것 같네요!”말을 마친 배여진은 얼른 임유진 곁으로 다가와 그녀를 위로했다.“유진아, 너무 신경 쓰지 마. 저 사람들 함부로 말한 것 때문에 우리 둘 사이에 금이 가면 안 되지.”배여진에게 질책당한 친척은 어리둥절
임유진은 멍하니 강지혁을 쳐다보다가 한참 후에야 대답했다.“그럼 내가 그 많은 일을 겪은 것도... 다 널 만나고 사랑하기 위해서인 것 같아. 이런 우여곡절을 겪지 않았다면 너랑도 아무런 접점이 없었겠지.”그녀가 감옥에 가지만 않았어도 소민준과 결혼하고 계속 변호사로 지냈을 것이다. 그리고 결혼 뒤에 여전히 소씨 일가에 스며들지 못했을 테고.혹은 소민준의 부모님이 한사코 그녀를 반대해 결국 그와 결혼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다만 어찌 됐든 그녀는 그 깊은 밤에 초라한 몰골로 강지혁을 만나고 그를 집에 데려올 일은 없다.두 사람은 두 개의 평행선처럼 서로 접점 없이 스쳐 지나갔겠지.강지혁의 속눈썹이 살짝 떨렸다. 그는 임유진을 가볍게 안고 그녀의 목깃에 얼굴을 깊이 파묻으며 그녀의 체취를 맡았다.“맞아, 누나도... 나 만나려고 그랬을 거야.”하지만 그녀는 아직 모른다. 자신이 겪은 고통 중에 일부분은 강지혁이 줬다는 것을. 애초에 강지혁이 그녀에게 일말의 동정이라도 있었다면, 일말의 선심이라도 베풀었다면 그녀의 운명은 이 지경이 되지 않았을 것이다.그 3년간의 옥살이는 더더욱 없었을 테고.그녀를 안은 강지혁의 두 손이 미세하게 떨렸다.“너 왜 그래? 추워?”임유진이 물었다.“응, 조금 춥네.”그가 나지막이 중얼거렸다.“내가 가서 담요 가져올게. 너 걸쳐.”밤바람은 차갑기 마련이다. 풍습대로 빈소를 지킬 때 방 문을 닫지 말아야 해서 찬 바람이 틈 사이로 스며들었다.임유진이 말하면서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는데 강지혁이 두 손으로 그녀를 꼭 끌어안았다.“담요는 됐고 누나가 좀 안아줘.”애교 섞인 나긋한 목소리였다.임유진은 문득 이런 강지혁이 위로를 얻으려는 어린아이 같았다.그녀는 두 손 들어 다정하게 강지혁을 안아줬다.“혁아, 이러면 안 추워?”제스처처럼 부드러운 그녀의 목소리가 심금을 울렸다.강지혁은 그녀의 겨드랑이 사이에 얼굴을 비비며 말했다.“응, 안 추워.”오직 그녀만이 그에게 안정감을 줄 수 있다.한때 강지혁은
강현수는 저도 모르는 사이에 속으로 되뇌었다.‘나 지금 뭐 하는 거지? 이제 다 해결됐잖아. 배여진이 바로 내가 찾던 사람이잖아!’애초에 그를 구한 사람은 배여진이다. 그가 조사한 바에 의하면 배여진은 이 몇 해 동안 썩 잘 지내지 못했다. 강현수가 할 일은 배여진에게 최선을 다하는 것이다. 그녀에게 부귀영화를 누리게 하여 그때 당시 그를 살려준 생명의 은혜에 보답해야 한다.다만 강현수의 마음은 배여진을 찾은 이후로 오히려 무언가를 잃은 것처럼 텅 비어버렸다.“현수 씨, 뭐 봐요?”배여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강현수는 고개 돌려 이리로 다가오는 배여진을 쳐다보더니 앞으로 걸어갔다.“아니야, 아무것도. 오늘은 이만 갈게. 무슨 일 있으면 바로 전화해.”“벌써 가게요?”배여진은 아쉬움 가득한 표정을 지었다.“밤이 너무 늦었어요. 여기서 하룻밤 자고 내일 돌아가요. 여기 빈방도 있어서 바로 쉬면 돼요.”“아니야, 내일 회사에 급하게 처리해야 할 일도 있어서 이젠 돌아가야 해.”강현수가 대답했다.그가 이렇게 말한 이상 배여진도 더는 뭐라 할 수 없었다. 그녀는 마지못해 동의하며 강현수와 함께 차 세운 곳으로 걸어갔다.“현수 씨... 전남편이 전에 작성한 이혼합의서에 사인 안 하겠다고 번복해요. 20억을 더 줘야 사인한대요.”배여진이 말했다. 그녀는 다른 사람들 앞에서 이혼했다고 하지만 엄밀히 따지면 법적으로 아직 이혼하지 않았다.“그 사람과의 결혼생활이 정말 고통스럽다면 내가 도와줄게. 이혼에 관한 일은 걱정하지 마. 며칠 뒤에 재판이 열리면 분명 이혼에 동의할 테니까.”강현수가 담담하게 말했다.배여진은 확답을 얻은 듯 경배에 찬 눈길로 강현수를 쳐다봤다. 이 남자는 세상 모든 난제를 다 해결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오직 이 남자만이 그녀 마음속의 왕자였다!애초에 본인 인생은 흐지부지하게 흘려보낼 거라 여겼는데 뜻밖에도 연예계 황태자께서 눈앞에 나타났다.배여진은 평상시에 인터넷에서 강현수에 관한 가십거리 뉴스를 많이 봐왔는데 그와
배여진은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그럼 만약 내가 현수 씨를 안 구했다면 나한테 잘해주지 않을 거예요?”그녀는 단지 ‘그런 거 아니야’라는 이 한마디만 원했는데 정작 돌아온 건 차갑고 소외감이 느껴지는 짙은 눈빛이었다.눈앞의 남자는 차분한 눈길로 그녀를 쳐다보고만 있었지만 그녀에게 주는 느낌은 마치 낯선 이를 대하는 식이었다.배여진은 문득 가슴이 움찔거리고 방금 했던 말이 후회됐다.“난 그저... 현수 씨가 내게 잘해줬으면 하는 바람에서 그랬어요. 내가 구해준 것 때문에 이러는 게 아니라... 또 다른 무언가도 있었으면 해서요...”그녀는 말을 더듬으며 겨우 대답했다.“됐어, 너무 많은 생각 하지 마.”강현수가 담담하게 말했다.“시간이 늦었어. 너도 일찍 자.”그는 말하면서 차 문을 열고 차에 올라타려는데 배여진이 뒤에서 갑자기 외쳤다.“운전 조심해, 현수야!”‘현수야’라는 이 한마디에 강현수는 돌연 몸이 굳어버렸다. 그의 머릿속엔 그해 가녀린 소녀가 그를 업고 하산하는 장면이 스쳐 지나갔다.그때 그 소녀는 쉴 새 없이 그에게 말을 걸었다. 그가 과다출혈로 쓰러질까 봐 그런 듯싶다.“넌 이름이 뭐야? 말 안 하면 그냥 현수라고 부른다. 옷깃에 적은 글자 네 이름 맞지? 현수야, 자면 안 돼. 자면 못 깨어나. 내가 이야기해줄게. 무슨 이야기 들을래? 나 이야기 엄청 잘한다! 현수야, 얼른 대답 좀 해봐! 현수야... 현수야...”‘현수야’라는 세글자가 이 몇 해 동안 수없이 그의 귓가를 맴돌았고 매번 꿈속에서 놀라 잠을 깨기도 했다.그때 만약 그 소녀가 없었다면 지금의 강현수도 없다!그는 몸을 돌려 배여진을 지그시 바라봤다.“그래, 알았어.”눈가에 스쳤던 차가운 기운이 조금은 사라진 듯싶었다.강현수의 차가 멀어져간 후에야 배여진은 표정이 서서히 변하고 이를 악문 채 제자리에 서서 두 주먹을 꽉 쥐었다.어쨌거나 그녀는 이미 임유진의 신분을 사칭했으니 임유진만 이 일을 기억하지 못하면 배여진이 바로 그해 강현수를 구한 그 소녀를
이 그림들은 모두 당시 ‘그녀’가 강현수를 업고 하산할 때의 광경이 아니면 두 어린 남녀가 산속에서 서로 의지하고 있는 풍경이었다.그때의 두 사람은 의지할 곳이 서로뿐이었고 아마도 그때 처음으로 옆에 있는 이 사람이 얼마나 중요한 사람인지, 심지어는 이 사람 없이는 살 수 없다는 걸 깨달았을 것이다.많고 많은 그림 중에 하나의 예외도 있었는데 거기에는 아이들의 모습이 아닌 성인 여성이 그려져 있었다. 그림 속의 여성은 옅은 미소를 짓고 있었고 눈동자에는 따뜻함이 흘러나와 있었다. 그녀를 보고 있으면 마치 모든 걱정이 다 사라지는 듯한 기분마저 들었다.강현수는 그림 앞에 서서 가만히 여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러다 문득 칠흑같이 어두운 눈동자 속에 슬픔이 스쳐 지나갔다.만약 이곳에 임유진이 있었으면 강현수는 그림 속 여인이 바로 임유진, 그녀라는 걸 확신했을 것이다."왜 네가 아닌 거야..."원망이 섞여 있는듯한 그의 목소리가 화실에 울려 퍼졌고 그에 대한 답은 돌아오지 않았으며 그림 속 여인은 그저 옅게 웃으며 그를 바라보기만 할 뿐이다.강현수는 손을 들어 여인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단지 그림인데도 불구하고 조심스럽기 그지없는 그의 손길은 마치 실존하는 여인의 얼굴을 만지는 듯했다.만약 임유진이 지금 여기 나타난다면 그녀는 강현수가 이렇게 만지도록 내버려 두지 않을 것이다...오늘 웨딩드레스 모습의 그녀가 눈앞에 나타났을 때, 강현수는 그제야 임유진과 강지혁이 결혼한다는 사실을 실감했다.임유진은 강현수가 아닌 다른 남자의 아내가 될 것이고 앞으로는 그 남자만 눈에 담을 것이며 그 남자의 아이를 낳고 행복하게 살아갈 것이다. 강현수와는 아무런 가능성도 남기지 않은 채 말이다.이 생각이 머릿속에 스쳐 지나가자 강현수는 갑자기 숨이 막혀오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한참 후, 갑자기 화실 문이 벌컥 열리더니 강현수가 입을 열었다."화실에 있는 그림 전부 다 치워버리세요. 그리고 방문을 잠근 후 그 누구의 출입도 허락하지 마세요.""네, 알겠습니
한편 임유진은 이 마을에서의 평판이 좋지 못하다. 마을 사람들은 감옥살이한 임유진을 경멸했고 조문 오는 사람 중에는 혀를 끌끌 차며 삿대질하거나 심지어는 노씨 집안 사람들에게 그녀를 내쫓아버리라고 얘기하기도 했다.그러나 매번 그런 소리를 들을 때마다 심장이 남아나질 않는 건 임유진이 아니라 오히려 노씨 집안 사람들이었다. 임유진을 건드려 화가 난 강지혁이 홧김에 노씨 집안을 없애버릴 수도 있는 노릇이었으니까. 게다가 강현수가 배여진을 지켜준다고는 하지만 그 범위가 노씨 집안까지일지는 그 누구도 알 길이 없었다.상복을 입은 임유진의 얼굴이 퉁퉁 부은 것이 벌써 몇 번이나 눈물을 흘린 게 틀림없다.그러다 조문객들을 대접하는 자리에서 큰 삼촌이 사람들에게 외할머니와의 추억을 얘기할 때 임유진은 어김없이 또 한 번 눈물을 흘렸다.그녀를 사랑하는 사람들은 점점 사라져만 간다. 임유진의 어머니도 그렇게, 이제는 외할머니도 그녀의 곁을 떠났다.다음에는 또 누가 그녀의 곁을 떠나게 될까...?임유진의 머릿속에는 자꾸만 자기도 모르게 무서운 상상이 들었다.그렇게 두려움에 잠식되어 주먹을 꽉 쥐고 있을 때 한 남자의 따뜻한 손이 그녀에게 다가와 정처 없이 흐르는 눈물을 조심스럽게 닦아주었다.마치 아기 다루듯 다정하고 따뜻한 남자의 손에 임유진의 두려움이 서서히 걷히기 시작했다.고개를 돌려보니 거기에는 자신만을 바라봐주는 강지혁이 있었다.‘지혁이는 나만 내버려 두고 쉽게 떠나지는 않을 거야. 우리는 할머니 할아버지가 될 때까지 평생 함께 있을 거야...’장례식장을 찾는 사람들은 더더욱 많아졌고 그중에는 이미 술에 얼큰하게 취한 사람들도 있었다. 삼촌들과 이모는 사람들 챙기기에 바빴고 상주 자리는 임유진이 대신 지키며 조문객들을 맞이했다.모든 게 평화로운 그때 조문을 마친 한 남자가 다짜고짜 임유진에게 삿대질하며 언성을 높였다."네가 무슨 자격으로 상주 자리에 있어? 감옥까지 다녀온 애가 집안 망신인 줄 알면 안 보이는 구석에 찌그러져 있거나 차라리 이곳에
남자는 말을 채 끝마치기도 전에 누군가에 의해 바닥에 꼴사납게 널브러졌다."실수, 발이 제멋대로 움직이는 바람에."실수라고 하기에는 강지혁의 왼쪽 발은 여전히 남자의 심장 쪽을 꾹 짓누르고 있다. 남자는 숨이 막히는 듯한 고통에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라서는 끙끙 앓으며 신음을 냈다. 발버둥을 치려고도 해봤지만 마치 돌덩이에 깔리기라도 한 것처럼 꿈쩍할 수가 없었다.상황이 심각해지자 옆에서 구경만 하던 노씨 집안 삼촌들과 이모가 헐레벌떡 다가오더니 그에게 사정하기 시작했다."저... 아무리 그래도 여기는 장례식장인데 이럴 필요가 있을까요?""장례식에서 불상사라도 생기면 안 되잖아요.""이 사람도 그냥 생각 없이 막 내뱉은 말일 거예요. 진심으로 받아들일 필요 없어요."강지혁은 세 사람 쪽으로 고개를 돌린 후 천천히 입을 열었다."사랑해 마지않는 손녀가 이런 어디서 굴러먹다 온 건지도 모를 놈한테 비난이나 듣는 걸 할머니가 아신다면 엄청나게 속상해하지 않을까요? 내 말이 틀렸습니까?"무표정한 얼굴에 이렇게까지 소름이 끼쳐본 적은 그들도 아마 처음일 것이다."그, 그럼요. 그렇고 말고요.""이 인간 그때 유진이가 프러포즈 좀 거절했다고 속 좁게 이러는 게 틀림없어요. 남자가 돼서는, 쯧쯧.""이런 인간은 장례식에 올 자격도 없는 사람이에요. 우리 유진이가 어떤 앤데, 이런 막말을 듣고만 있게 해줘서는 안 되죠! 우리 엄마가 평소에 제일 좋아하는 사람도 바로 유진이었는걸요."세 사람은 금세 태도를 돌변해서는 서둘러 임유진의 편을 서며 강지혁의 기분을 살폈다. 게다가 큰 삼촌은 경비원까지 불러 임유진에게 막말한 남자와 그의 가족들을 전부 다 빈소에서 쫓아내 버렸다.그리고 이 광경을 모두 지켜본 조문객들은 입을 떡 벌리고 그저 벙쪄있었다.감옥살이하고 나온 임유진을 당연히 노씨 집안의 천덕꾸러기라고 생각했던 그들은 이제까지 그녀에게 비난의 말을 서슴지 않았는데 그녀 뒤에 이런 무서운 남자친구 있었을 줄 누가 상상이나 했을까?아까 까불다가 경비원에
임유진은 고개를 돌려 영정사진 속 외할머니를 바라봤다. 이제는 정말 작별 인사를 고할 때가 왔고 그녀 역시 그걸 알고 있었기에 외할머니 얼굴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엄마를 잃은 임유진의 공허한 마음을 채워줬던 건 바로 외할머니의 사랑이었다. 그녀 덕에 임유진은 어린 시절 외롭고 쓸쓸하게 보내지 않아도 됐었고 엄마 다음으로 사랑하는 사람이 생겼다.다음 날 아침, 발인 후 임유진은 결국 외할머니의 화장 순간을 지켜보지 못하고 뛰쳐나왔다. 외할머니가 정말 그녀의 곁을 떠나버렸다는 생각에 가슴이 찢어질 듯 아팠고 그런 그녀를 강지혁이 옆에서 지켜줬다."혁아, 할머니가 나만 버리고 가셨어."임유진은 구석 쪽에 주저앉아 중얼거렸다."나는 나를 진정으로 사랑해주는 사람을 또 한 명 잃게 된 거야..."강지혁은 임유진을 꽉 끌어안으며 말했다."나는 널 떠나지 않을 거야."강지혁은 무슨 일이 있어도 그녀 곁을 떠나지 않을 것이다."응, 알아. 너는 날 떠나지 않을 거야. 그리고... 나도."강지혁은 임유진의 불안한 마음을 끊임없이 달래줬고 그녀를 안심시켰다.화장을 마친 후 임유진의 삼촌들과 이모는 외할머니를 노씨 집안 조상들의 묘지에 모셨다.외할머니의 묘비 앞에서 노씨 집안 사람들은 예의를 갖춰 향을 피운 후 세 번의 목례를 하고 절을 한번 했다. 이건 집안 대대로 내려오는 방식대로 고인이 어른일 경우 하는 예절이다.삼촌들과 이모 그리고 배여진이 먼저 인사를 하고 임유진이 마지막으로 절을 한 후 몸을 일으켰다. 그때 어느샌가 옆으로 다가온 강지혁이 아무 말도 없이 그녀와 똑같은 방식으로 향을 피우고 묘비를 향해 목례를 한 후 그들의 방식을 따라 절을 했다.강지혁이 무릎을 꿇고 절을 하자 노씨 집안 사람들은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강씨 집안 성묘를 제외하고 그가 이렇게 무릎을 꿇을 일이 과연 또 있기나 할까?그의 이런 행동은 임유진을 향한 사랑이고 그녀의 외할머니를 향한 존중이다.배여진은 강지혁의 모습에 눈을 반짝이더니 언젠가는 자신도 강현수를 저렇게
강지혁은 수저를 들고 그녀가 해준 음식을 하나둘 입에 넣었다.분명히 흔히 볼 수 있는 가정 요리고 손에 들고 있는 것도 포크나 나이프가 아닌 그저 숟가락과 젓가락일 뿐인데 상대가 강지혁이라 그런지 꼭 고급스러운 레스토랑에서 식사하고 있는 것 같았다.임유진은 원래 강지혁이 밥을 다 먹은 뒤에 오늘 있었던 일을 얘기하려고 했다. 하지만 강지혁이 밥을 먹으며 먼저 선수를 쳐버렸다.“오늘 하마터면 떨어지는 화분에 다칠 뻔했다는 얘기 들었어. 무사해서 다행이야. 내일부터는 경호원을 두 명 더 붙여줄게.”임유진은 그 말에 눈을 두어 번 깜빡이며 어리둥절해 하다 이내 남편이 강지혁이라는 것을 깨닫고 납득했다는 표정을 지었다.아마 일이 터지고 5분도 안 돼 바로 강지혁에게 보고가 들어갔을 테니까.“응, 알겠어.”임유진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누가 화분을 떨어트린 건지 알아봐 달라고 했어. 아직 따로 연락이 오지는 않았지만.”“청소부가 한 짓이야.”“청소부?”임유진이 깜짝 놀라며 물었다.“벌써 조사를 마쳤어?”“당연한 거 아니야? 네 일인데.”만약 임유진의 몸에 생채기라도 났으면 강지혁은 아마 이성을 잃고 건물 전체를 폭파하고 관계자들까지 다 처리해버렸을 것이다.강지혁은 갑자기 젓가락을 내려놓더니 임유진의 양손을 덥석 잡았다.그녀의 손가락은 여전히 삐뚤빼뚤했다.임유진의 손을 이렇게 만든 사람은 진세령이고 소민준은 당시 진세령의 곁에서 가만히 구경만 했다.강지혁은 임유진의 손을 매만지다 문득 1시간 전에 봤던 청소부의 피범벅이 된 두 손을 떠올렸다.그는 다른 사람의 손은 피가 나든 잔인하게 잘리든 아주 조금의 연민도 들지 않았다. 하지만 임유진의 손은 볼 때마다 가슴이 아프고 또 울컥했다.“왜? 왜 그렇게 봐?”임유진은 강지혁이 손가락을 뚫어지게 보는 게 불편한지 손을 뒤로 빼며 거두어들이려고 했다.그녀 역시 다를 것 없는 여자라 사랑하는 사람 앞에서는 자신의 좋은 것만 보여주고 싶었다.“내 손 안 예뻐... 보지 마.”임유진의 손
“그래...”강지혁이 낮게 읊조렸다.“그래야 할 거야.”고이준은 저도 모르게 소민준이 매우 가엽게 느껴졌다. 만약 임유진이 정말 소민준을 동정하면 그때는 지금 하고 있는 택배 기사 일도 못 하게 될지도 모르니까.“고 비서, 누가 저 여자한테 돈을 쥐여주고 유진이를 해할 계획을 세운 건지 알아내.”강지혁이 차가운 목소리로 지시했다.“네, 회장님.”고이준이 얼른 답했다.“그리고 S 시에서 제일 실력 좋은 변호사를 고용해서 유진이와 권건우 변호사 고소 건에 붙여. 김승수한테 지시를 내리는 다른 누군가가 있는 건 아닌지도 한번 알아보고.”고이준에게 김승수의 뒷조사를 맡긴 건 이유가 있었다.임유진이 강지혁의 와이프고 현 강씨 가문의 유일한 안주인인 걸 알고도 고소를 한 건 누가 봐도 이상했으니까. 상식적인 인간이라면 강씨 가문을 상대로 덤빌 리가 없다.게다가 김승수가 억울하다는 당시의 사건을 강지혁도 한번 훑어봤지만 임유진의 말대로 증거가 확실했고 결과 역시 납득 가능한 결과였다.즉 그렇다는 건 김승수에게 다른 목적이 있다는 것이다. 또 혹은 김승수를 뒤에서 조종하고 있는 누군가에게 다른 목적이 있을 수도 있고 말이다.하지만 이유가 뭐가 됐든 임유진을 건드린 이상 강지혁이 손을 놓고 있을 리가 없다. 그에게는 임유진이 목숨줄과도 같은 존재니까.“네, 알겠습니다.”임유진이 강지혁에게 있어 얼마나 중요한 사람인지 고이준은 너무나도 잘 알고 있다. 다만 요즘 따라 부쩍 이상한 위화감 같은 것이 느껴졌다.임유진을 대하는 강지혁의 태도가 꼭 기억을 잃기 전의 강지혁 같았기 때문이다. 꼭 기억을 다 되찾은 것처럼 말이다.강씨 저택.강지혁은 현관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가 마침 임유진과 두 아이들이 거실에서 동요에 맞춰 춤을 추고 있는 모습을 보게 되었다.현이는 흥분한 건지 얼굴이 빨개진 채로 깔깔거리며 춤을 추고 있었고 무뚝뚝하던 율이도 볼을 살짝 붉히며 어색하게 몸을 좌우로 흔들고 있었다.몸만 보면 썩 내키지 않아 하는 것 같지만 미소를 띠고
강지혁은 여자를 무섭게 노려보더니 이내 곁에 있는 경호원에게 지시를 내렸다.“두 번 다시 손에 뭘 들 수 없게 만들어놓고 경찰에 넘겨.”“네, 알겠습니다.”청소부는 그들의 대화에 얼굴이 새하얗게 질려버렸다.‘지, 지금 내 손을 부러트리려는 건가?’그녀는 이런 무서운 인간을 만날 줄 알았으면 차라리 경찰에게 잡히는 것이 더 나았겠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잘못했습니다! 다시는 안 그럴게요! 제가... 제가 알아서 경찰서로 가서 자수하겠습니다. 그러니까 제발...!”하지만 간절한 그녀의 부탁에도 강지혁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점점 더 얼굴이 차가워지기만 할 뿐이었다.사실 청소부는 양손만 부러지는 것에 감사해야 한다. 만약 그녀가 던진 화분으로 임유진이 큰 상처를 입었으면 그때는 양손은 물론이고 몸 전체가 너덜너덜해진 채 죽으니만 못한 삶은 살았을 테니까.“으아아악!!”그녀의 절규와 함께 강지혁은 유유히 현장을 빠져나왔다. 그리고 고이준도 곧바로 그의 뒤를 따라나섰다.바로 앞에 세워진 차량에 올라탄 후 고이준은 곧바로 강지혁에게 자료 하나를 건넸다.“소민준 씨의 지난 5년간 행적입니다. 몇 년 전부터 배달 기사 일을 하는 것으로 확인이 됐고 오늘은 우연히 건물 앞을 지나가다 사모님을 구한 것으로 보입니다. 사모님께서는 감사의 뜻으로 소민준 씨를 병원에 보냈고 손목 골절로 인한 치료 비용을 전액 다 부담해주셨습니다.”강지혁은 어둡게 가라앉은 얼굴로 수중의 자료를 훑어보았다. 차 안의 분위기는 그야말로 얼음장 같았다.“참 기막힌 우연이야. 안 그래?”그때 줄곧 입을 다물고 있던 강지혁의 입에서 뜬금없는 한마디가 흘러나왔다.“네... 네.”고이준은 식은땀을 흘리며 룸미러로 강지혁의 눈치를 봤다. ‘혹시 소민준이 사모님을 구해준 것에 질투라도 하는 건가...?’“CCTV는?”“네, 여기 있습니다.”고이준은 얼른 휴대폰을 꺼내 경호원이 보내준 CCTV 영상의 일부를 틀어 강지혁에게 건넸다.영상 속 소민준은 화분이 떨어짐과 동시에
경비원은 그 말에 시선을 내려 바닥에 떨어진 산산조각이 난 화분을 보고는 그제야 얼른 손을 놓아주었다.임유진은 경호원에게 소민준의 손목을 봐달라고 했고 경호원은 알겠다며 그의 손목을 자세히 살폈다.“사모님, 아무래도 골절인 것 같습니다.”“그럼 지금 당장 병원으로 데려가 치료를 받게 하세요.”“네, 알겠습니다.”그때 휴대폰이 울렸고 임유진은 경호원에게 가보라는 손짓을 한 후 이내 전화를 받았다.무슨 얘기를 들은 건지 그녀는 전화를 받은 지 얼마 안 돼 곧바로 심각한 얼굴을 했다.“네,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통화를 마친 후 임유진은 건물이 아닌 법원으로 향했다.잠시 후, 임유진이 법원에서 나왔을 때 마침 소민준을 병원으로 데려간 경호원으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검사를 받아본 결과 다행히 심각한 상처는 아니고 한 달 정도면 완전히 회복될 거라는 내용이었다.“알겠어요. 치료비는 다 제가 책임진다고 하고 혹시 다른 무언가의 보상을 원하면 저한테 따로 연락 주세요.”“네, 사모님.”임유진은 전화를 끊은 후 휴대폰을 집어넣는 것이 아닌 권건우에게 전화를 걸었다.“스승님, 죄송해요. 아무래도 당분간은 좀 시끄러워질 것 같아요.”“들었다. 김승수가 우리 둘을 고소했다지? 걱정할 것 없어. 우리는 그 사건에 한 점 부끄럼 없이 임했으니까. 그보다 요즘 인터넷에 떠드는 루머 말인데 나야 다 늙어서 그런 건 전혀 신경이 안 쓰인다고 하지만 너는 남편과 재회한 지도 얼마 안 됐는데...”“걱정하지 마세요. 혁이는 스승님과 제 사이 오해 안 해요.”임유진의 말에 권건우는 안심한 듯 미소를 지었다.“그럼 다행이고.”그날 저녁, 임유진이 집에 돌아오자마자 집사가 다가와 말했다.“회장님은 오늘 일 때문에 조금 늦으신다고 먼저 아이들과 식사를 하시라고 하셨습니다.”“네, 알겠어요.”임유진은 대수롭지 않게 고개를 끄덕이며 아이들과 밥 먹을 준비를 했다. 일 때문에 늦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니까.그 시각, 강지혁은 냉기를 풍기며 차가운 시선으로 눈앞
“위험해!”등 뒤로 누군가의 다급한 외침이 들려왔다.임유진은 미처 상황을 파악하지도 못한 채 누군가의 품에 안겨 바닥에 나뒹굴었다. 그녀를 구해준 누군가는 쓰러지는 그 순간에도 양손으로 그녀를 지켜주고 있었다.“사모님!”“사모님!”다급한 발걸음 소리와 함께 경호원과 기사들이 큰소리로 외치며 다가왔다.임유진은 그들의 소리에 그제야 정신을 차렸고 경호원의 부축으로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난 괜찮아요.”그녀는 말을 마치고는 고개를 옆으로 돌려 고개를 숙인 채 자리에서 일어나며 몸에 묻은 먼지를 툭툭 털어내는 남자를 바라보았다.“괜찮으세요? 구해주셔서 정말 감사...”임유진은 말을 하다가 남자가 고개를 드는 것을 보고 저도 모르게 흠칫하며 말을 멈추고 말았다.그녀를 구해준 건 다름 아닌 소민준이었다.소씨 가문의 장남이자 한때는 그녀의 남자친구였으며 진세령의 약혼자이기도 했던 그 소민준 말이다.하지만 지금의 그는 5년 전과는 완전히 다른 모습을 하고 있었다.색이 다 바랜 낡아빠진 옷에 더러운 운동화, 세월을 정통으로 맞은 것 같은 얼굴에 새치 가득한 머리까지, 지금의 그는 도무지 30대 중반이라고는 믿기지 않는 모습을 하고 있었다.그래도 한때는 상류층에 있었던 사람인데 지금은 일반 시민도 아닌 제일 아래 계층에 있는 사람처럼 보였다.고개를 든 소민준은 눈앞에 있는 사람이 임유진이라는 것을 보고는 마찬가지로 조금 놀란 듯 움찔했다. 그러고는 곧바로 쓴웃음을 지었다.“너였구나. 다시 이곳으로 돌아왔다는 기사를 봤어. 이런 식으로 만나게 될 줄은 몰랐는데.”“너...”임유진은 뭐라 말을 하고 싶었지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소민준은 당시 그녀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줬고 그녀가 절망의 끝에 자살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궁지까지 몰아붙였으며 두 번 다시 사랑 같은 건 하고 싶지 않게끔 만들어놓기도 했다.아마 강지혁이 아니었다면 임유진은 지금도 여전히 과거의 상처에 매달려 스스로를 고립시키며 살았을 것이다.하지만...하지만
직장 동료들은 한지영에게 위로를 건네며 은근히 그녀에게 잘 보이려는 듯한 말투로 얘기했다.심지어 어떤 사람은 아예 대놓고 그녀에게 백연신과의 사이를 묻기도 했다.“그럼 지영 씨는 백연신 씨랑 다시 만나는 거예요?”“그날 기자들 무리에서 지영 씨 손을 덥석 잡고 차로 끌고 가는데 내가 다 설렜지 뭐예요? 완전 현실판 왕자님 아니에요?”“그럼 앞으로 지영 씨를 뭐라 불러야 하나?”“백연신 씨가 회장님이니 당연히 회장 사모님 아니겠어요?”한지영은 직원들의 태도가 바뀐 게 전부 백연신 때문이라는 걸 알고 있다. 이런 상황을 처음 겪는 것도 아니었으니까.“아니요. 백연신 씨와는 아무 사이도 아니에요. 그러니까 괜한 추측은 하지 말아주세요. 그리고 저, 사귀는 사람 따로 있어요.”한지영은 차가운 목소리로 대꾸했고 이에 사람들은 어색하게 웃으며 서로 눈빛을 주고받더니 금방 다시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옆에서 떠드는 사람들이 없으니 이제야 살 것 같았다.어제 집으로 돌아갔을 때 백연신은 끝까지 나타나지 않았다. 그저 경호원을 통해 그녀에게 전언만 남겼다.“회장님께서 더는 걱정하지 않으셔도 된다고, 앞으로도 쭉 전과 같이 아무 일도 없을 거라고 하셨습니다.”전과 같다는 건 백연신 역시 더는 그녀 앞에 나타나지 않을 거라는 건가?한지영은 그 생각에 갑자기 울컥하며 눈물이 차오르려는 것이 느껴졌다. 하지만 그녀는 곧바로 다시 마음을 다잡으며 스스로에게 되뇌었다.이건 자신이 바란 거라고, 그러니 아무것도 슬퍼할 것 없다고 말이다.‘그래, 잘 된 거야. 이게 제일 좋은 결말이야. 증오도 없고 더 이상의 미움도 없는... 그냥 좋은 추억만 간직한 지금이 제일 좋은 끝이야.’다시 그와 연인이 되었다가 또다시 고난에 부딪혀 헤어지게 되면 그때는 완전히 원수지간이 될지도 모르니 차라리 아무것도 시작하지 않는 게 백배는 더 나았다.한지영은 더 이상 백연신과 함께 할 용기가 없었다. 아무리 그가 사랑을 외쳐도 아무리 줄곧 그녀만 사랑해왔다고 해도 이제는 그 마음을
연우진은 그 어느 날 자신이 백연신의 질투 대상이 될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지영 씨한테 마음이 남은 거라면 내가 아닌 지영 씨와 얘기를 하세요.”연우진이 차분한 목소리로 말을 이어갔다.“그리고 내가 지영 씨와 만나고 싶다고 해도 지영 씨가 받아주지 않으면 함께 하지 못해요. 이건 백연신 씨도 마찬가지고요. 백연신 씨가 여전히 지영 씨를 좋아한다고 해도 지영 씨가 받아주지 않으면 두 사람 역시 함께 못해요. 선택권은 지영 씨한테 있으니까.”백연신은 주먹을 말아쥐며 다시 물었다.“지영이와 만날 건지에 대한 대답만 해.”연우진은 한숨을 한번 내쉬었다. 아무래도 대답을 해주지 않으면 순순히 보내주지 않을 듯하다.“지영 씨는 좋은 사람입니다. 이대로 감정이 싹트면 나로서는 당연히 지영 씨와 함께하고 싶겠죠.”“한지영의 곁에 있을 수 있는 남자는 모든 걸 다 내어줄 수 있을 정도로 한지영을 사랑하는 사람이 아니면 안 돼.”백연신이 경고하듯 낮게 읊조렸다.“어째 내가 모든 걸 다 내어줄 정도로 한지영 씨를 사랑하지 않으면 우리 둘이 함께하는 걸 방해하겠다는 얘기로 들립니다만?”연우진의 질문에 백연신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지만 냉랭하고 차가운 눈빛을 보면 그 대답이 뭔지 알 수 있을 것도 같았다.“백연신 씨는 지영 씨를 위해 모든 걸 다 내어줄 수 있습니까? 그 정도로 사랑한다면 여기서 나한테 이러지 말고 다시 한번 지영 씨 마음에 들기 위해 노력을 해보는 게 어떨까요?”백연신은 그의 말이 끝난 순간 갑자기 손을 뻗어 연우진의 멱살을 잡았다. 그러고는 이대로 갈기갈기 찢어버릴 듯한 눈빛으로 그를 노려보았다.“너는 아무것도 몰라. 나라고...”하지만 그는 말을 다 잇지 못했다. 또한 멱살을 잡았던 손도 힘없이 풀었다.질투와 분노로 가득했던 눈동자가 한순간에 어둠에 잠겨버린 듯 시들어졌다.“한지영한테 잘해. 만약 지영이한테 상처를 주면 그때는 사는 게 사는 것 같지 않다는 게 뭔지 똑똑히 알려주지. 내 말 허투루 듣지 마.”말을 마친 후
백연신은 그 생각에 얼굴을 한껏 일그러트렸다. 질투와 분노, 슬픔과 고통의 감정들이 소용돌이치며 그의 얼굴에 담겼다.한지영의 집에서 나왔을 때 연우진은 꽤 편안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그는 몇 시간 전에 한지영에게 전화를 걸었다가 무사히 집에 도착했다는 말을 듣고 바로 그녀를 찾으러 집까지 왔다.다행히 사건은 무사히 일단락되었고 한지영도 예전의 일상을 다시 되찾은 것처럼 보였다.“우진 씨, 그... 나랑 더는 연락하고 싶지 않으면 언제든지 말해줘요. 난 괜찮으니까.”연우진은 한지영의 집에 도착하자마자 들은 그녀의 말을 떠올리고는 저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가끔 보면 한지영은 꼭 34살이 아닌 4살짜리 아이 같았다. 이런 상황에서도 마음속의 말을 솔직하게 전하며 상대방에게 선택권을 주니 말이다.하지만 그런 투명한 여자이기에 연우진도 그녀와 함께 있으면 더 즐겁고 자꾸 그녀와 연락을 이어나가게 되는 걸 것이다.“나는 지영 씨랑 계속 연락하고 싶은데. 지영 씨는 그저 피해자일 뿐이었잖아요. 그러니까 죄라도 지은 사람처럼 말하지 말아요.”“내가 백연신 씨와 호텔에서 아무 일도 없었다고 하면 믿을 수 있어요?”“네, 지영 씨가 그렇다고 하면 그렇게 믿을게요.”연우진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했다. 진심이었으니까.만약 정말 뭔 일이 있었으면 한지영 쪽에서 먼저 솔직하게 얘기를 해줬을 것이다. 한지영은 그런 여자니까.연우진은 엘리베이터 안에서 문득 백연신의 얼굴을 떠올렸다. 확실히 한지영은 백연신과의 인연을 이미 지난 과거로만 보고 있는 듯했다.하지만 백연신은? 그 역시 그럴까? 이제는 고은채와의 결혼도 파기됐는데?생각에 잠긴 채 엘리베이터에서 나오던 연우진은 아파트 입구에 서 있는 남자를 보고 멈칫하며 발걸음을 멈췄다.잘 뻗은 기럭지에 고고해 보이는 눈앞의 남자는 다름 아닌 백연신이었다.‘이 사람이 왜 여기에...’연우진과 백연신은 어느 정도 거리를 둔 채 서로를 바라보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렇게 침묵이 계속되다 연우진은 놀란 마
한지영의 말대로 백연신은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다른 여자를 곁에 둘 수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예쁜 여자를 곁에 둔다고 해도 그는 그녀가 아니면 안 되는 남자였다. 꼭 한지영이여야만 하는 남자였다.처음 본 순간부터 줄곧 한지영만을 사랑해왔으니까, 이미 모든 마음을 다 그녀에게 줘버렸으니까.사실 5년 전에 한지영이 아닌 고은채의 손을 잡았을 때 속으로 판을 짜고 있었다고는 하나 앞으로가 어떨지는 생각해 본 적도 없었다.그때는 자신에게 미래가 있을지도 없을지도 확신하지 못했거니와 백씨 가문의 모든 걸 되찾고 고씨 가문을 무너뜨리는 데 성공할 수 있을지 말지도 미지수였으니까.당시의 그에게는 한 걸음 한 걸음이 다 깨진 얼음판을 걷는 것 같았다. 그래서 섣불리 한지영에게 약속을 건넬 수도 없었다.지난 5년이라는 시간 동안 백연신은 사람을 은밀히 붙이는 것으로 한지영의 소식을 접할 뿐 그녀의 앞에 나서지는 못했다. 그때는 아무리 보고 싶어도 참아야만 했으니까.그런데 인내의 시간을 겪고 드디어 그녀의 앞에 나설 자격을 갖췄는데 한지영의 마음은 그사이 식어버렸다.백연신은 그 생각에 또 한 번 쓴 미소를 지었다.그녀와 함께하고 싶어 한 선택이, 그녀를 되찾기 위한 인내가 한지영이 거부함으로써 완전히 물거품이 되어버렸다.‘한지영을 살려주는 것만으로도 만족해라 이건가...?’백연신은 어쩌면 당시 한지영을 살려달라고 간절하게 외쳤을 때 모든 소원권을 다 써버린 걸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그는 운전석에 앉은 채 한지영의 모습이 사라질 때까지, 아니, 사라진 뒤에도 여전히 그쪽으로 시선을 고정하며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그러다 얼마나 지났을까, 휴대폰 진동이 울려댔다.“회장님, 고은채 씨가 방금 S 시를 떠났습니다. 그리고 매스컴 쪽에도 더는 한지영 씨의 일상을 방해하지 않게 조치를 해뒀습니다.”“고씨 가문 쪽은 계속해서 지켜봐. 손 내밀어주는 가문이 있나.”“네, 알겠습니다.”백연신은 통화를 마친 후 휴대폰을 다시 집어넣었다.고씨 가문에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