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진 씨, 잠시만요."다급해진 강현수가 얼른 그녀의 팔을 잡았다."혹시 화났어요? 유진 씨 일을 깎아내리려는 의도는 없었어요."그러자 임유진이 이상한 눈길로 그를 쳐다봤다."화 안 났어요."임유진은 그저 사실을 말했을 뿐이고 이런 일에까지 화를 냈다면 그녀는 진작에 화병으로 몸져누웠을 것이다.강현수가 안심한 듯한 표정을 짓더니 말했다."혹시 일자리 필요하면 언제든 나한테 연락해요."그러자 임유진이 그를 쳐다보다 단호하게 얘기했다."솔직히 말하면 우리가 그렇게 친한 사이도 아니고 강현수 씨가 제 직업까지 신경 써줄 필요 없다고 생각해요. 그리고 아까도 말했다시피 전 지금 배달원 일에 만족하고 있어요."그러고는 자신의 팔을 잡은 강현수의 손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이제 손 좀 풀어주시겠어요? 배달하러 가야 해서."강현수의 검은 눈동자가 그녀를 뚫어지게 바라보더니 이내 서서히 손에 힘을 풀고 그녀를 놓아주었다.친한 사이가 아니라고? 임유진은 모르겠지만 강현수는 꽤 임유진에 대해 많이 알고 있었다. 그녀가 어릴 때부터 지금에 잇따르기까지, 물론 전부 임유라의 입에서 전해 들은 말이긴 하지만."지금 일에 만족하고 있다고요?"강현수는 피식 웃었다."한때 잘나가는 변호사였던 사람이 지금 배달 일에 만족하고 있다고요?"그에 임유진의 눈빛이 잠깐 흔들렸다. 변호사라는 건 이제 그녀의 마음속에서 꽤 오래전 일이 되어버린 듯했다.그녀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은 채 스쿠터에 올라탔다. 그러자 뒤편에서 또다시 강현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두 사람 사이가 내가 생각했던 것과는 많이 다른 것 같네요. 강지혁 옆에 더는 있고 싶지 않게 되면 언제든지 나한테 연락해요."그 말에 임유진이 잠깐 멈칫하나 싶더니 이내 스쿠터를 타고 떠났다.언젠가 임유진이 강지혁의 곁을 떠나게 되는 날이 와도 강현수를 찾아갈 일은 없을 것이다. 그의 사회적 신분을 생각하면 아마 그는 강지혁보다 더 냉정하고 무정할 것이니까.강현수의 연애사는 꽤 화려한 편이다. 그는 자신의
"너 어디 있냐고 그래서 주방에 있다고 하니까 슬쩍 쳐다보더니 가버리던데?"탁유미 엄마가 대답했다."대체 저 사람이 누군데? 너 아는 사람이야?"필경 자신의 딸이 남자의 얼굴을 본 순간 다급하게 숨어버리는 걸 봐버렸으니 탁유미 엄마도 많이 궁금했을 것이다.그러자 탁유미가 복잡한 얼굴을 하며 말했다."강현수라고 엔터 사업 쪽에서 알아주는 사람이에요. 내가 그 사람... 옆에 있을 때 저 남자하고 몇 번 정도 마주친 적 있었어요.""그럼 너 알아본 거 아니야?"탁유미 엄마가 다급하게 묻자 탁유미는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아마... 알아본 것 같아요."탁유미가 예전과는 많이 다른 모습이라고는 하나 알아보지 못한 거였으면 굳이 떠날 때 그녀에 관해 물어보지는 않았을 것이다.그러자 탁유미 엄마가 표정을 굳히며 물었다."그, 그럼 이제 어떡하지? 너 여기 있다고 얘기라도 하게 되면 어떡해? 아! 아까 유진 씨 보니까 그 남자와 아는 사이인 것 같던데, 유진 씨한테 부탁해 보면 어때? 너 여기 있는 거 말하지 말아 달라고."그에 탁유미가 입술을 깨물었다. 그녀는 솔직히 강현수가 어쩌다 이런 작은 가게까지 오게 됐는지 의문이긴 했었지만, 상황을 보니 임유진을 찾으러 온 것이었다. 하지만...‘그 강현수가 일개 식당 배달원을 찾으러 여기까지 왔다고?’임유진이 배달을 마치고 돌아오자 탁유미가 조심스럽게 물었다."유진 씨, 혹시 강현수 씨랑 아는 사이에요?""언니가 강현수 씨를 어떻게 아세요?"임유진이 놀란 듯 묻자 탁유미가 멋쩍게 웃으며 답했다."매번 여자친구 스캔들로 기사에 대문짝만하게 실리잖아요. 만났던 여자친구들도 다 유명 연예인이라고. 그래서 알죠.""강현수 씨하고는 몇 번 만난 적 있었어요.""그럼 그 사람하고... 아, 아니에요."탁유미가 손사래를 치며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웃어 보였다. 임유진은 잠깐 고개를 갸우뚱하더니 배달음식을 들고 말했다."언니, 그럼 저 배달 다녀올게요.""그래요."탁유미는 역시 자신이 직접 강현수를
‘그러니까 임유진 씨의 마음을 얻고 싶은 게 맞다는 거지...?’고이준은 오래 살고 볼 일이라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강지혁이 여자 하나 때문에 이런 고민을 한다는 게 신기할 따름이었다."임유진 씨는 과거에... 아픈 상처를 지닌 분이셔서 다른 사람들과는 다르게 마음을 사로잡기 쉽지 않을 겁니다. 그래서 아마 억지로 밀어붙인다거나 하면 겉으로는 따를지도 모르겠지만 마음속으로는 점점 더 멀어지게 될 거고요."고이준이 임유진을 냉철하게 분석했다."이건 어디까지나 제 의견이긴 합니다만, 항상 친절하고 부드럽게 대해주고 맞춰주려고 하는 자세로 다가가는 게 제일 좋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래야만 임유진 씨 마음의 벽도 서서히 무너질 테니까요.""그러니까 내가 철저하게 잘 보여야 한다는 거지?"강지혁의 혼잣말에 고이준은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친절하고 부드럽게 대해주고 맞춰주려고 하는 자세로 다가가는 게 좋을 것 같다고 했지 자신이 언제 철저하게 잘 보이라고 했나..."그런데 잘 보이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 거지?"고이준은 한 번도 여자에게 먼저 잘 보이려고 노력해 본 적 없을 것 같은 자신의 대표를 보며 뭐라고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그때 핸드폰이 울렸고 고이준은 발신자를 보더니 이내 신속하게 전화를 받았다. 그렇게 몇 분 정도 지났을까, 고이준이 전화를 끊고는 강지혁에게 말을 전했다."대표님, 누군가가 진애령 씨 사건을 들쑤시고 있다고 합니다."그러자 강지혁의 얼굴이 삽시에 굳었다."누가?""그것까지는 알아내지 못했습니다. 다만 현재 알고 있는 건 꽤 여러 명이 당시 사건자료와 증인들의 행방을 찾고 있다는 겁니다. 또한, 해성시에 있는 증인한테는 현재 사람까지 붙인 것으로 보입니다.""‘갈’씨 성을 가진 그 증인 말하는 거야?"강지혁이 눈썹을 추켜올리며 물었다."네, 그리고 지금 해당 증인을 조사하고 있는 사람은 일전 한지영 씨가 고용한 사립탐정이 아니라고 합니다."고이준은 한지영이 사립탐정을 고용한 시점에서 이미 상황을 다 파악하고 있었다.
정장 차림에 가죽 구두, 거기에 만화를 막 찢고 나온 것 같은 얼굴까지, 이런 사람을 갑자기 남자친구라고 소개하면 그 누가 믿을 수 있을까.한지영은 하늘을 바라보며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는 요 며칠 일어난 일들을 회상하며 자신이 너무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었다.모든 일의 시작이 된 그 맞선. 한지영은 그날 선 자리를 그렇게 망쳐버린 건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집으로 돌아와 보니 한지영의 엄마가 노발대발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왜 남자친구가 있는데 자기한테 얘기를 안 하냐고, 그것 때문에 자기가 어떤 말을 들었는지 아느냐고. 그러고는 집요하게 남자친구가 누군지 물어보기 시작했다.그에 한지영은 마침 근처에 있던 친구가 자신의 사정을 듣고 일부러 남자친구인 척 도와줬다고 거짓말을 했다. 그러고는 어느 친구냐는 질문에 적당히 자신과 친한 남자애의 이름을 대고 다음 날 말을 맞추려고 했었다.하지만 말을 맞추기도 전에 마침 백연신에게서 전화가 왔고 전화를 받지 않는 한지영이 이상했던 그녀의 엄마가 핸드폰을 낚아채 대신 전화를 받고는 백연신과 얘기를 나누기 시작했다.그렇게 자연스럽게 한지영과의 관계를 물었고 백연신은 당연하다는 듯, 이 한마디를 던졌다."어머님, 제가 바로 그 남자친구입니다."그 한마디에 한지영네 집은 초토화가 됐고 한지영의 엄마는 언제 한번 시간 내서 집으로 오라고 쐐기를 박았다. 한지영이 필사적으로 핸드폰을 잡으려고 했지만, 한지영의 아빠가 그녀를 제지했고 그렇게 그녀는 자신의 엄마와 백연신이 통화하고 있는 걸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여차여차 통화를 끝낸 후 한지영은 엄마와 아빠한테 족히 2시간을 더 잡혀있었다."너는 애가 남자친구가 있으면 있다고 얘기를 하면 될 것을, 뭘 그렇게 꼭꼭 숨기고 그러니? 얼굴이 못생겼든 직장이 변변치 않든 가족들한테는 얘기는 했었어야지. 아니면 덜컥 애라도 생기고 나서야 얘기하려고 했어?!""..."한지영은 맹세코 그런 생각은 한 적이 없었다.하지만 부모님에게 백연신과는 감정 없는 연애를
엘리베이터가 도착하고 문이 열리니 거기에는 한지영의 이웃집 주민이 있었다. 이웃 주민은 한지영을 보더니 반갑게 인사를 했다."지영아, 이제 집에 오는 거니? 그럼 이쪽이 바로 그 남자친구?"이웃 주민은 한지영을 향해 얘기하면서도 연신 백연신 쪽을 쳐다보았다. 그에 한지영이 막 말을 하려고 할 때 백연신이 먼저 입을 열었다."네, 제가 지영 씨 남자친구입니다.""어머나, 그럼 곧 좋은 소식이 들리겠네."이웃 주민은 깍듯하게 인사까지 하는 백연신을 보며 활짝 웃더니 얼른 집으로 올라가라고 재촉했다."이런, 지영아, 얼른 집으로 올라가. 너희 엄마가 오늘 너 남자친구 데리고 온다고 아주 신이 나셨어."한지영은 그제야 왜 이웃 주민이 백연신을 보고 단번에 남자친구냐고 물었는지를 알 것 같았다. 그녀의 엄마가 자신의 딸이 남자친구를 데려온다고 동네방네 소문을 낸 것이었다.엘리베이터 문이 닫히고 한지영은 백연신 쪽을 힐끔 올려다보았다. 그러자 백연신이 곧 웃음이 터질 것 같은 얼굴을 하고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그에 그녀는 밀려오는 부끄러움에 얼른 해명했다."저기, 그게... 우리 부모님이 내가 처음으로 남자친구를 사귀는 거라서 많이 들뜨셨나 봐요. 이따가 대충 고개만 끄덕이면 될 것 같으니까 내가 기회 봐서 연신 씨 데리고 나올게요.""내가 첫 남자친구야?"백연신이 흥미롭다는 듯 허리까지 숙여서 그녀를 바라보았다. 바로 눈앞에 조각 같은 얼굴이 떡하니 놓여있자 한지영은 그만 몸이 굳어버렸다. 그러다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다."하하하... 그게 내가 일만 하다 보니까.""그래? 나를 못 잊어서 다른 남자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고 했으면 내 기분이 더 좋았을 텐데."진지한 얼굴로 이런 말을 내뱉은 백연신 때문에 한지영은 심장이 터져버릴 것만 같았다.그때, 타이밍 좋게 엘리베이터가 층에 도착했고 한지영은 다행이라는 듯 빠른 걸음으로 엘리베이터에서 빠져나왔다.이윽고 백연신과 함께 집 문 앞까지 도착해버린 한지영은 심호흡을 한 번 뱉더니 천천히 문을
"그, 그래요. 반가워요."한지영의 부모님은 백연신의 말에 그제야 정신을 차린 듯 인사를 했다.한지영의 아버지는 백연신을 거실로 안내했고 한지영의 어머니는 한지영을 불러세우더니 낮게 속삭였다."진짜 너 남자친구 맞아? 어디 업체에 부탁해서 데려온 거 아니야?"그러자 한지영이 째려보며 말했다."그럼 그렇게 생각하시던가요.""어머, 얘 말하는 것 좀 봐. 됐고, 얼른 가서 차나 내와."한지영의 어머니는 자신의 딸을 주방으로 보낸 후 친절한 얼굴을 하고 백연신이 앉아 있는 쪽으로 다가갔다.한지영은 군말 없이 주방으로 가서 분부대로 차를 탔다. 그렇게 거실로 차를 내오니 세 사람은 어느새 화기애애하게 이야기꽃을 피우고 있었다."우리 지영이하고는 해외에 있을 때 알게 됐다고 했는데 그럼 계속 연락을 하고 지낸 건가?"한지영 엄마가 물었다."아니요. 제가 얼마 전에 한국에 귀국하고 우연히 만나게 됐어요. 그때부터 다시 연락하게 된 거고요."백연신은 한지영 쪽을 슬쩍 보더니 살짝 웃으며 말을 이었다."사실은 꽤 오랫동안 지영이를 찾고 있었어요. 그런데 어떻게 우연히 만나게 됐네요."한지영의 부모님은 백연신의 말에 감동한 얼굴을 했고 한지영은 소름이 돋았다."그것 참 인연이로구먼, 허허허."한지영의 아버지가 웃으며 말했다."헌데, 해외에서 만난 지 며칠밖에 안 됐을 텐데 그 짧은 시간 동안 어떻게 우리 딸아이를 좋아하게 됐는가?"한지영의 아버지는 자신이 딸이 고작 해외에 있던 그 며칠 새에 이런 남자를 3년이나 목매게 했다는 사실에 호기심이 일었다. 백연신은 태어나서부터 지금까지 여자가 끊이지 않았을 것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으니까."지영이랑 같이 있으면 마냥 즐거웠어요. 하루는 제가 술에 취해서..."백연신이 두 사람의 스토리를 얘기하려고 하자 한지영이 당황한 듯 손을 떨더니 이내 찻물을 손에 쏟고 말았다."앗!"그녀가 얼른 찻잔을 내려놓았지만, 손등은 이미 빨갛게 부어올랐다. 백연신은 그 모습에 얼굴을 찌푸리더니 얼른 그녀를 일으켜
"해달라는 거 다 해줄게요."한지영은 어차피 자신이 뭘 줘도 백연신의 성에는 차지 않을 거라며 배 째라는 식으로 말했다."그럼 그러지."백연신의 말에 한지영은 그가 이렇게 쉽게 수락할 줄은 몰랐는지 어찌 됐든 간에 다행이라며 안심했다."손은 어때? 아직도 따가워?"백연신이 그녀의 손을 바라보며 물었다."아니요. 이제 좀 괜찮아진 것 같아요."한지영이 괜찮다고 대답을 하고 나서야 백연신은 수도꼭지를 잠그고 몸에 지니고 있던 손수건으로 그녀의 손에 남아있는 물기를 닦아주었다."아직도 조금 빨갛게 달아올랐네, 바르는 약은 있어?""아, 있어요.""그럼 지금 가서 약 가지고 와."백연신의 말에 한지영이 쪼르르 자신의 방으로 달려가 바르는 약을 집어 들었다. 그러고는 자신이 마치 말 잘 듣는 어린애가 된 것만 같은 기분에 머리를 한번 긁적이다 이내 생각을 멈추고 방에서 나왔다.한지영이 약을 가지고 나와보니 백연신은 어느새 거실에 앉아 자신의 부모님과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그녀가 세 사람 쪽으로 가까이 다가가자 마침 그녀의 엄마가 말을 했다."그렇구나, 술에 취해서 우리 지영이가 자네를 밤새 돌봐줬었구나. 우리 지영이 얘가 어릴 때부터 마음이 착하고 여려서 꼭 그렇게 힘든 사람을 보면 도와줘야 직성이 풀리곤 했어. 호호호."한지영은 그 말에 하마터면 발을 접지를 뻔했다. 마음이 착하고 여려? 힘든 사람을 보면 꼭 도와줘야 직성이 풀린다고?한지영은 진실을 모른 채 백연신이 들려주는 얘기에 그녀를 잘 포장하고 있는 자신의 엄마를 보며 양심의 가책을 느꼈다."네, 그때 지영이가 옆에서 절 밤새 돌봐주지 않았더라면 술 취한 제가 어디 길가에 널브러져 그대로 나쁜 사람들한테 시비라도 당했을 거예요."백연신은 말을 한 후 한지영을 쳐다보며 살인미소를 날렸다."지금도 그때 생각만 하면 얼마나 고마운지 몰라요."한지영은 양심을 콕콕 찌르는 그의 말에 차마 그쪽으로 고개를 돌릴 수가 없었다.하지만 한지영의 부모님은 자신의 딸이 대견한지 거기에 한 술
"배다른 형제자매들이 있습니다."백연신이 담담하게 얘기했다."저희 아버지가 생전에 여자가 좀 많았었어요. 그래서 자식들도 따라서 많아졌죠."한지영의 부모님은 이런 대답이 나올 줄을 예상 못 했는지 어떤 말을 해야 할지 몰라 어색해 하고 있었다.그때 한지영이 자신도 모르게 한마디 했다."엄마, 아빠. 연신 씨 부모님 일은 연신 씨와 아무런 관계가 없다고 생각해, 난."백연신은 한지영의 말에 의외라는 듯 그녀를 바라보고는 곧 자신도 모르게 따뜻한 눈빛을 보냈다.그녀의 단호한 목소리에 한지영의 아버지가 먼저 정신을 차리고 말했다."그래, 그건 지영이 네 말이 맞다. 그럼 자네는 지금 어떤 일을 하고 있는가?""회사를 책임지고 운영하고 있습니다.""회사를... 운영하고 있다고?"백연신의 답에 한지영 아버지는 자신이 잘못 들은 건 아닌가 하는 표정을 지었다."이제 29살이라고 하지 않았나? 그런데 무슨 회사를 운영한다는 건가?"한지영의 아버지는 고작 29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회사를 운영한다는 게 도저히 믿어지지 않았다. 그는 기껏해야 자신의 동창 자식들처럼 회사에서 대리나 혹은 팀장직을 맡고 있을 거로만 생각했다."백선 그룹이라고, 혹시 들어보신 적 있으실지 모르겠습니다."한지영의 아버지 같은 소시민들에게 백선 그룹이라고 말을 해 봤자 아마 잘 모를 것이다.그래서 한지영의 아버지는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글쎄... 들어본 적 없는 것 같네. 스타트업 이런 건가?"한지영 아버지는 대기업이라고는 전혀 생각도 안 했는지 당연히 작은 회사인 줄로만 알았다.한지영은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옆에서 민망한 듯 다른 곳을 보고 있었고 백연신은 그저 옅게 웃을 뿐이었다.그렇게 한참을 더 얘기하다가 한지영은 슬슬 타이밍을 보며 백연신을 데리고 나가려고 했다. 하지만 그때 한지영의 부모님이 같이 식사라도 하지 않겠냐고 제안해왔다."회사에 급한 일이 아직 남아 있다고 하지 않았어요?"한지영이 눈을 깜빡이며 백연신에게 사인을 주었다."그렇다고 어머님
“딸 관리 좀 제대로 해! 유산은 무슨 얼어 죽을! 당신 나랑 분명히 약속했어. 집안의 모든 건 다 우리 승찬이 거라고! 어차피 딸은 출가외인이니까 지금부터 제대로 교육해. 재산 같은 건 꿈도 꾸지 말라고!”“알았어. 알았으니까 이제 그만해. 사람들이 자꾸 쳐다보잖아.”남자는 여자의 어깨를 끌어안으며 계속해서 달랬다.여자아이는 싸움이 일단락되자 빠르게 뒤로 돌았다. 그러고는 고사리 같은 손으로 남자아이의 뺨을 매만지며 울상이 된 얼굴로 물었다.“많이 아파?”임유진은 남자아이가 무슨 표정을 짓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고개를 도리도리 젓는 걸 보면 괜찮다고 한 것 같았다.임유진은 서로 많이 의지하고 있는 듯한 남매를 보며 괜스레 마음이 아팠다.방금 있었던 대화로 추측해보건대 표독스러운 여자는 새엄마인 듯했고 세 명의 아이 중 살이 통통한 아이만이 그녀의 친아들인 듯했다.그리고 야윈 남자아이와 당찬 여자아이의 엄마는 이미 세상에 없는 듯하고 말이다.남매끼리라도 사이가 좋으니 그나마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솔직히 임유진은 뺨을 맞고서도 아무런 반응이 없던 아이가 누나가 맞을 것 같으니 바로 몸을 던지려 하는 모습이 매우 놀라웠다.그저 뒷모습만 보였을 뿐이지만 아이는 아까 진심으로 여자를 때려눕히려 했다.‘하필이면 저런 여자가 새엄마라니... 안 됐네. 아직 어린 것 같은데.’사람들 많은 곳에서도 아무런 거리낌 없이 손을 올리는데 집에서라고 가만히 있을 리가 만무했다. 더했으면 더했지 절대 덜하지는 않을 거라고 임유진은 확신할 수 있었다.게다가 입고 있는 옷만 봐도 그랬다. 통통한 남자아이의 옷은 새것인 것에 반해 남매의 옷은 몇 년은 입은 것 같은 헌 옷이었으니까.왜소한 체구의 남자아이는 기껏해야 4, 5살쯤 돼 보이고 여자아이는 그보다 3살 정도 더 많아 보이는데 아직 어린 나이에 제대로 돌봐줄 보호자가 없다는 건 무척이나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임유진은 아이들을 보며 저도 모르게 어릴 적 자신의 모습이 떠올랐다.당시 그녀
한편 멀지 않은 곳에서 네 사람을 지켜보고 있던 경호원들은 처음 보는 광경에 입을 떡 벌린 채 서로를 바라보았다.임유진과 강선현이 돌아온 뒤로 강지혁은 확실히 전과 많이 달라져 있었다.놀이공원에 입장한 후, 임유진은 강지혁에게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현이가 하는 말을 전부 다 받아줄 필요는 없어.”“왜? 우리는 가족이잖아. 나는 현이 아빠고.”임유진은 예상외의 대답에 조금 놀란 듯 눈을 두어 번 깜빡였다. 강지혁의 눈빛이 다정하다 못해 그 이상의 애정까지 흘러넘치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게다가 갓 재회했을 때와 달리 그는 마치 두 눈에 그녀밖에 안 보인다는 듯이, 꼭 그녀가 세상의 전부라는 듯한 시선을 보내고 있었다.“그렇지. 우리는 가족이지.”임유진은 간신히 정신을 차리며 미소를 지었다.놀이공원 안내인 역을 맡은 사람은 일전에 한 번 와본 적이 있는 강선율이었다. 율이는 현이가 좋아할 만한 것들을 이것저것 가리키며 조금 들뜬 얼굴로 얘기했다.율이는 아주 이상하게도 전에 왔을 때와는 차원이 다른 감정이 솟구치는 것이 느껴졌다.사람이 많아 이리저리 부대끼기도 하고 길게 늘어진 줄도 서야 하는데 율이는 그것들이 싫지 않았다.지겹도록 탄 놀이 기구도 현이와 함께 하니 새롭게 느껴지고 그때는 느끼지 못했던 즐겁다는 기분이 들기도 했다.네 사람은 이리저리 구경하다 현이가 제일 좋아하는 바이킹을 타기 위해 줄을 섰다.그런데 긴 줄을 서며 차례를 기다리고 있던 그때, 어디선가 날카로운 마찰음 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곧이어 경멸이 한가득 담긴 여자의 표독스러운 음성도 들려왔다.“이게 감히 우리 찬이를 할퀴어?!”임유진은 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비싸 보이는 옷을 입고 유명한 브랜드의 가방을 손에 든 여자가 눈을 무섭게 부릅뜬 채 바로 앞에 있는 남자아이를 노려보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임유진의 시야에서는 아이의 뒷모습밖에 보이지 않았다.키는 율이와 언뜻 비슷해 보였지만 눈에 띄게 야위어 보였고 옷은 색이 다 바래 있었다.
지난 5년간, 그는 그저 살아지는 대로 살뿐 삶에 큰 의미를 느끼지 못했다.그래서 임유진이 다시 돌아와 줘서 참으로 다행이었다. 그녀가 있는 것만으로도 인생이 다시 원래 있어야 할 궤도 위에서 흘러가는 것 같았으니까.지금의 강지혁에게 유일한 불안요소가 있다면 그건 바로 그녀가 떠난 진짜 이유를 아직 모른다는 것뿐이다.“혁아.”놀이공원 입구에 다다랐을 때 임유진은 다급하게 강지혁을 부르며 신신당부했다.“안으로 들어가서도 꼭 현이 손 잘 잡고 있어야 해, 알겠지? 아니면 눈 깜짝하는 사이 사라져버릴 거야. 율이는... 괜찮네.”임유진은 율이의 모습을 확인하고는 새삼 신기한 듯 속으로 감탄했다. 그도 그럴 것이 또래 아이들과 달리 너무나도 순하고 심지어는 듬직해 보이기까지 했으니까.반대로 현이는 벌써 강지혁의 손을 잡은 채 이곳저곳을 끌고 다니며 쉴 틈 없이 재잘거렸다.“걱정하지 마. 설사 놓쳤다고 해도 금방 다시 우리 곁으로 다시 돌아올 테니까.”강지혁의 담담한 말에 임유진은 눈을 두어 번 깜빡이다 혹시 하는 얼굴로 물었다.“설마 지금 우리 주위에 경호원분들이 있어?”“응. 적당한 인원을 배치해뒀어. 그리고 놀이공원 CCTV 쪽에도 사람을 보냈고.”임유진은 그가 말한 적당한 인원이라는 게 정확히 몇 명인지 굳이 물어보지는 않았다. 강지혁이 생각하는 적당한 인원과 그녀가 생각하는 적당한 인원은 분명히 다를 테니까.강지혁은 임유진의 표정을 보더니 눈썹을 살짝 위로 올리며 물었다.“왜? 누가 따라다니는 거 싫어?”“그렇지는 않아.”경호원들의 삼엄한 경호라면 임신했을 당시 이미 톡톡히 맛본 적이 있기에 새삼 불편하거나 하지는 않았다.“그냥 놀이공원에서 노는 것뿐인데 이럴 필요까지 있나 싶어서.”임유진은 경호원까지 따라붙는 게 조금 유난이라고 생각하는 듯했지만 강지혁은 전혀 아니었다. 그는 그녀와 아이들을 한번 잃어봤기에 아주 조금도 그들을 다시 잃게 될 빌미를 만들고 싶지 않았다.“나는 그냥 너랑 아이들을 제대로 보호해주고 싶은 것뿐이야
“우리 현이는 어쩜 기억력도 좋아... 하하.”임유진은 어색하게 웃더니 곧바로 율이를 바라보며 화제를 돌려버렸다.“그런데 율아, 정말 아빠랑 놀이공원에 간 적 없어?”“네, 아빠랑 같이 간 적은 없어요.”강선율의 대답에 임유진은 고개를 돌려 강지혁을 바라보았다.“율이랑 같이 안 가줬어?”“도우미들이 함께 가줬어.”“같이 가주지. 그러다 율이 잃어버리면 어쩌려고. 너는 걱정도 안 됐어?”임유진은 자기가 다 서운한 듯 강지혁에게 바짝 가까이 다가가며 추궁 아닌 추궁을 했다.놀이공원 자체가 즐거운 곳인 건 맞지만 그래도 아이들은 부모와 함께 가는 걸 더 좋아할 것이 분명했으니까.“안 잃어버려.”강지혁이 단호하게 대답했다.“어떻게 그렇게 확신해?”“그야...”임유진은 강지혁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답변에 금세 수긍하고 말았다. 그도 그럴 것이 애초에 놀이공원 전체를 하루 대관한 거라 사람이라고는 아이 한 명과 직원들, 그리고 율이 곁을 지켜주는 도우미들밖에 없었기 때문이다.그리고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해 강지혁은 10명의 경호원을 아들과 조금 멀리 떨어진 곳에 배치하기도 했다.이 정도의 정성이라면 무슨 일이 생겨날 가능성은 거의 0에 가까울 수밖에 없다.하지만 안전은 확보가 됐지만 그런 식의 놀이공원이라면 줄을 설 때의 미묘한 기대감도 설렘으로 가득한 사람들의 북적거림도 느낄 수 없게 된다.“율아, 놀이공원 갔을 때 어땠어? 좋았어?”임유진이 물었다.그러자 아니나 다를까 율이는 고개를 저었다.“재미없었어요.”재미있어 보이던 놀이 기구도 두어 번 타보니 금세 흥미가 떨어졌다.“놀이공원이 얼마나 재미있는데!”강선현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외쳤다.“나랑 엄마는 엄청 자주 갔어. 바이킹도 타고 회전목마도 타고 대관람차도 타고. 그런데 매번 사람이 너무 많아서 바이킹 같은 건 두 번 밖에 못 탔어...”현이는 말을 하다 당시 기억이 떠올랐는지 조금 아쉬운 듯한 눈빛을 보냈다.‘그게 재밌다고?’강선율은 이해가 안 간다는 얼굴로 고개를
고이준은 이도 저도 못 하게 된 상황에 머리가 다 지끈해졌다.“이만 나가봐.”“네, 알겠습니다...”고이준이 나간 후 강지혁은 의자에 힘없이 기대더니 이내 눈을 감고 조용히 중얼거렸다.“살아있었어... 죽은 게 아니었어...”그는 말을 마치고는 갑자기 미친 사람처럼 웃기 시작했다. 하지만 커지는 웃음소리와 반대로 그의 눈가에는 점점 눈물이 맺혀 올랐다. 그리고 그 눈물은 매끈한 볼을 타고 힘없이 아래로 떨어져 내렸다.그날 밤의 극심한 두통으로 그는 임유진과의 첫 만남은 어땠는지, 그녀와 어떤 사랑을 했는지, 또 그녀와 어떻게 헤어졌다가 어떻게 다시 결혼까지 하게 됐는지까지 전부 다 떠올랐다.그리고 그녀를 지독하게 사랑한 덕에 배웠던 후회감과 두려움, 그리고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무력감까지도 다시 한번 느낄 수 있게 되었다.임유진이 모든 걸 알게 된 그 날, 강지혁도 그녀 못지않게 심장이 철렁하고 고통으로 사뭇 쳤다. 자신만 입을 닫고 진실을 감춰버리면 그녀는 영원히 모를 거라고 생각했던 자신의 오만함을 고배로 돌려받는 느낌이었다.세상에는 영원히 발각되지 않는 비밀이란 있을 수 없고 그가 통제할 수 없는 변수 또한 얼마든지 있다는 걸 그때의 그는 몰랐다.기억을 되찾은 강지혁은 지금 겪고 있는 모든 게 꼭 꿈만 같았다. 그녀가 다시 돌아와 사랑을 속삭이는 게 꼭 언젠가는 다시 사라질 꿈처럼 느껴졌다.그래서일까, 그날 밤 이후부터 그는 임유진이 깊은 수면에 든 후면 어김없이 조용히 눈을 뜨고 자는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며 아주 조심스럽게 그녀의 얼굴을 만지곤 했다.마치 이렇게 해야만 그녀가 곁에 있다는 것을 실감할 수 있고 그녀가 자신을 거부하는 게 아니라는 걸 확인할 수 있는 것처럼.“날 싫어하지 마. 내 곁을 떠나지 마. 제발...”힘없이 가라앉은 목소리는 매일 밤 그들의 침실에 아주 조용히 울려 퍼졌다....주말.임유진과 강지혁은 강선율과 강선현을 데리고 놀이공원으로 향했다.놀이공원에 가게 된 계기는 며칠 전의 어느 날 현이가
그도 그럴 게 강지혁의 부름으로 사무실에 왔다가 벌써 10분째 아무런 지시도 없이 그의 눈빛만 받고 있었기 때문이다.‘혹시 사모님과 다투신 건가? 아니면 또 두통 때문에...?’강지혁은 계속해서 눈치만 보고 있는 고이준을 빤히 바라보다 드디어 천천히 입을 열었다.“임유진이 내 곁을 떠난 이유가 정확히 뭔지, 정말 몰라?”고이준은 갑작스러운 질문에 심장이 철렁했다.“갑자기 그건 왜요...?”“진애령 사건 때문에 도저히 날 용서할 수가 없어 결국에는 내 곁을 떠난 거라고, 너나 한 집사나 두 사람 다 나한테 그렇게 얘기했어.”“네, 그랬죠. 하지만... 어디까지나 저희 추측일 뿐입니다. 사모님의 마음이 어땠는지는 사모님밖에 모르시니까요...”고이준은 당황한 얼굴로 계속해서 말을 이어갔다.“그런데 지금에 와서 다시 생각해보면 어쩌면 저희 추측이 틀렸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5년 만에 돌아오시고 나서 진애령 씨 사건에 관해 얘기했을 때 사모님은 회장님을 다 용서했다고 하셨거든요.”“용서?”강지혁이 코웃음을 쳤다.조금만 살이 맞닿아도 얼굴이 하얗게 질리고 토까지 했는데 그게 과연 용서한 사람의 행동일까?용서했다고 한 말도 어쩌면 기억을 잃은 것 때문에 자신이 용서했다고 착각하는 것일 수도 있다.“해외에 있는 요셉 선생한테 연락해서 들어오라고 해. 유진이한테는 아무 얘기도 하지 말고.”고이준은 강지혁의 말에 깜짝 놀랐다.요셉은 유명한 신경외과 전문의로 특히 기억 관련해서는 영향력 있는 논문을 다수 발표한 바 있다.‘회장님 설마...’“혹시 기억을 완전히 찾으실 생각이십니까?”“그래.”강지혁이 담담하게 대꾸했다.사실 그날 밤의 극심한 두통으로 그의 기억은 아주 세세한 부분을 제외하고는 거의 다 돌아온 상태다.하지만 그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건 바로 그 세세한 기억이었다. 거기에 그녀가 떠난 진짜 이유가 들어있었으니까.“하지만 박 선생도 전에 말했다시피 갑자기 모든 기억을 다 찾으려고 하면 회장님의 멘탈이 감당해내지 못할 겁
소민아는 그런 그녀의 아부가 싫지 않았기에 이름이 알려진 뒤로 심심풀이용으로 하던 라이브에 문혜진을 포함한 상류층 사람들을 부르며 인기몰이를 했다. 다들 무척이나 협조적이었고 심지어는 새벽에 연락해도 흔쾌히 나와주었다.부자들이 나오는 컨텐츠는 수요가 많았기에 소민아는 라이브로 얻은 인기에 힘입어 자신만의 작은 회사까지 차리며 계속해서 라이브로 수익을 벌어 들었다.하지만 임유진이 돌아온 뒤로 모든 것이 변했다. 매일같이 아부하며 스케줄을 물어보던 친구들은 갑자기 연락이 뚝 끊겼고 라이브에 와주기로 했던 사람들은 모두 하나같이 다른 스케줄이 있다며 거절을 해왔다.그리고 이제는 제일 만만하고 항상 개처럼 따르던 문혜진조차도 그녀의 초대를 단칼에 거절해버렸다.강씨 가문의 안주인 후보가 아닌 소민아는 아무런 가치도 없으니까.옆에 있던 비서는 소민아의 얼굴이 어둡게 가라앉은 것을 보고 조심스럽게 물었다.“대표님, 그럼 오늘 라이브는 어떻게...”“뭘 어떻게 해요? 지금 당장 스케줄 가능한 연예인 쪽으로 연락 돌리세요. 인기 없는 애들 말고 지금 한창 핫한 애들로요.”소민아가 앙칼진 목소리로 대꾸했다.‘너희들이 없으면 내가 라이브 못할 줄 알아? 두고봐. 반드시 후회하게 해주겠어!’“네, 알겠습니다.”비서는 고개를 한번 숙이더니 서둘러 사무실을 빠져나갔다.소민아는 의자 시트에 등을 기댄 채 화를 억누르다 다시금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그러고는 앨범을 한번 훑어보았다.많고 많은 사진 속 유난히 눈에 띄는 사진이 있었는데 그건 다름 아닌 한정판 드레스에 예쁜 루비 목걸이를 하고 강지혁의 바로 옆에 서 있는 임유진의 사진이었다.해당 사진은 누군가가 SNS에 업데이트한 사진으로 소민아는 사진을 보자마자 바로 자신의 앨범에 저장했다.소민아는 사진을 뚫어지게 바라보다 또다시 분노를 터트렸다.“드레스도 내가 먼저 고른 거고 루비 목걸이도 내가 먼저 발견한 건데 왜 다 이 여자한테 가 있는 거야!”임유진이 나타나기 전, 한창 사모님 기분을 내며 쇼핑하던 어
“아주 잠깐 아팠을 뿐인데 뭐하러. 그리고 통증이 시작됐을 때 나는 침실이 아니라 서재에 있었어. 아침에 박 선생한테 연락해봤는데 큰 문제는 아니래. 그리고 일전에 박 선생이 처방해준 약도 아직 있어서 크게 문제 될 건 없어. 괜찮아.”임유진은 괜찮다는 그의 말에도 좀처럼 걱정이 가시지 않았다.“나 정말 괜찮아. 큰 상처도 아니고. 며칠 지나면 금방 괜찮아질 거야.”강지혁은 잠시 머뭇거리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그보다... 5년 전에 내 곁을 떠난 이유가 뭔지 정말 기억이 안 나?”임유진이 고개를 끄덕였다.“응.”사실이었다.다른 기억은 다 돌아왔지만 하필이면 그때의 기억만 마치 누가 잘라놓기라도 한 듯 아주 조금도 기억이 나지 않았다.사실 기억을 찾고 싶은 건 강지혁뿐만이 아니라 임유진 역시 마찬가지였다. 당시 절벽에서 그렇게 떨어진 후 무슨 일이 있었는지, 어떻게 살아남을 수 있었는지, 왜 현이만 곁에 있었는지, 그리고 나머지 한 아이는 죽었는지 살았는지, 만약 살아있다면 지금쯤 어디에 있는지 등등 궁금한 게 너무도 많았다.임유진은 손을 뻗어 강지혁의 입술을 조심스럽게 매만졌다.“어젯밤에... 사실은 많이 아팠던 거지?”강지혁은 아주 잠시만 아팠다고 했지만 그랬다면 이런 깊은 상처들이 생겼을 리가 없다.“지금은 안 아파.”“만약 앞으로 또 통증이 찾아오면 내가 자고 있더라도 깨워. 내가 아무것도 모르게 하지 마.”임유진은 강지혁이 고통스러워하는 순간에 아무것도 모른 채로 자고 있었다는 게 너무나도 속상했다.“나도 알아. 너 아플 때 내가 해줄 수 있는 건 뭐 없다는 거. 하지만 우리는 부부잖아. 그때 혼인신고하고 나올 때 아플 때도 슬플 때도 언제나 함께 있자고 맹세했잖아. 그러니까 앞으로는 뭐든 얘기해줘. 너 혼자 아파하지 마.”강지혁은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임유진의 얼굴만 빤히 바라보았다.얼굴이 창백해질 때까지 괴롭게 토를 하던 그녀의 얼굴이 또다시 그의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임유진은 그의 곁을 떠난 게 분명히 그럴
하지만 머리에 손이 닿기도 전에 강지혁이 빠르게 그녀의 손을 잡았다.“괜찮아. 이제 안 아파.”“그래.”임유진은 안도한 듯 웃으며 손을 거두어들이려고 했다. 하지만 강지혁의 손은 여전히 그녀의 손을 꽉 잡은 채 놓아주려 하지 않았다.“왜? 뭐 할 말 있어?”강지혁은 잠시 뜸을 들이더니 이내 큰 결심을 한 듯 천천히 입을 열었다.“5년 전에 네가 날 떠난 거 말이야. 정말 날 더 이상 사랑하지 않아서가 아닌 거 확실해?”“그건 갑자기 왜 물어? 그리고 말했잖아. 내가 널 떠난 건 분명히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어서일 거라고. 다른 건 몰라도 이거 하나만은 확실해. 내가 사랑했던 사람은 너밖에 없어.”임유진은 당시 절벽에서의 일을 얘기해 주면 강지혁에게 큰 자극으로 다가올까 봐 오늘도 진실을 얘기해 주지 않았다.“그냥... 갑자기 궁금해져서. 너도 알다시피 난 너에 관한 기억이 거의 없잖아.”임유진은 그 말에 미소를 지었다.“그럼 앞으로 내가 틈틈이 우리가 함께했을 때 얘기를 해줄게. 계속 듣다 보면 네 기억도 점점 돌아오게 될 거야.”“너는 내가 기억을 다 찾았으면 좋겠어?”강지혁이 임유진을 빤히 바라보며 물었다.“당연하지. 하지만 내 바람이 그렇다고 괜히 조바심낼 필요는 없어. 나는 네 기억이 아주 자연스럽게 무리가 가지 않는 선에서 천천히 돌아왔으면 좋겠으니까.”‘천천히... 하지만 내 기억은 이미...’강지혁은 조금 복잡한 얼굴로 임유진의 손을 놓아주었다.임유진은 손이 풀리자 침대에서 내려가려는 듯 몸을 옆으로 돌렸다. 하지만 막 바닥에 발을 딛고 일어나려는 순간 다리에 힘이 풀리는 바람에 몸이 앞으로 기울여버렸다.강지혁은 재빠르게 임유진을 받아내고는 이내 미간을 찌푸렸다.“고마...”임유진은 몸을 바로 세운 후 고맙다는 말을 하려다 강지혁의 손등을 보고 멈칫했다. 그도 그럴 게 고운 손에 시퍼런 멍이 한가득했기 때문이다.“너 손이 왜 이래?”임유진이 눈을 크게 뜬 채 묻자 강지혁은 재빠르게 손을 거두어들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