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으로도 말 잘 들을 테니까, 나 좋아해 줄래?"애절하게 말하는 강지혁을 보며 임유진은 망설였다.만약... 그가 강지혁이 아니었다면 그녀는 아마 그를 좋아하게 됐을지도 모른다.하지만 상대는 하필이면 강지혁이었고 3년이라는 감옥생활 동안 임유진은 하루도 그가 악몽이 아니었던 적이 없었고 그가 무섭지 않았던 적이 없었다....임유진은 이제 강지혁과의 관계를 자신도 뭐라고 표현해야 할지 몰랐다. 그녀는 여전히 그가 무섭고 두려웠지만, 자꾸 그가 신경이 쓰이고 마음이 아파 난다.강지혁이 진지한 얼굴로 달콤한 말을 속삭일 때면 임유진은 어김없이 심장이 두근거렸다.강지혁은 정말로 임유진을 그저 게임 상대로만 생각하고 있을까? 아니면 진심도 섞여 있는 걸까? 그렇다면 임유진은? 임유진은 그한테 설레고 있는 걸까?임유진은 현재 움직이려고 하면 할수록 더 깊이 빠져버리는 늪에 서 있는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배달을 마치고 돌아온 임유진은 가게 안에 있는 한 남자를 보고 멈칫했다. 의자에 앉아 있는 건 바로 강현수였고 그는 이런 작은 가게에 얼굴을 비출 사람이 아니었다.준수한 얼굴에 꼭 어울리는 정장 차림, 그리고 은은하게 풍기는 향수까지 그에게 어울리는 건 고급 레스토랑이나 라운지 바 같은 곳이지 절대 이런 후미진 작은 가게가 아니었다.계산대에는 탁유미가 아닌 탁유미 엄마가 서 있었다.그리고 이때 강현수도 임유진을 발견하고 천천히 그녀 앞으로 다가왔다."설마 했는데 진짜 여기서 일을 하고 있었네요?""여긴 어떻게 알고 오셨어요?"임유진이 궁금한 듯 물었다."어제 길을 가다 우연히 유진 씨가 스쿠터 타고 가는 걸 봤어요. 뒤에 ‘윤이 식당’이라고 쓰여 있더라고요. 그러다 오늘 마침 이 근처에 볼일이 있어서 식사도 할 겸 들렀죠."강현수는 아마 모를 것이다. 담담하게 내뱉은 목소리와는 반대로 그의 얼굴에서는 일말의 따뜻함이 묻어나오고 있다는 것을."유진 씨, 여기 세 곳 더 배달해야 해요."그때 탁유미 엄마가 임유진을 향해 외쳤다."네."
"유진 씨, 잠시만요."다급해진 강현수가 얼른 그녀의 팔을 잡았다."혹시 화났어요? 유진 씨 일을 깎아내리려는 의도는 없었어요."그러자 임유진이 이상한 눈길로 그를 쳐다봤다."화 안 났어요."임유진은 그저 사실을 말했을 뿐이고 이런 일에까지 화를 냈다면 그녀는 진작에 화병으로 몸져누웠을 것이다.강현수가 안심한 듯한 표정을 짓더니 말했다."혹시 일자리 필요하면 언제든 나한테 연락해요."그러자 임유진이 그를 쳐다보다 단호하게 얘기했다."솔직히 말하면 우리가 그렇게 친한 사이도 아니고 강현수 씨가 제 직업까지 신경 써줄 필요 없다고 생각해요. 그리고 아까도 말했다시피 전 지금 배달원 일에 만족하고 있어요."그러고는 자신의 팔을 잡은 강현수의 손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이제 손 좀 풀어주시겠어요? 배달하러 가야 해서."강현수의 검은 눈동자가 그녀를 뚫어지게 바라보더니 이내 서서히 손에 힘을 풀고 그녀를 놓아주었다.친한 사이가 아니라고? 임유진은 모르겠지만 강현수는 꽤 임유진에 대해 많이 알고 있었다. 그녀가 어릴 때부터 지금에 잇따르기까지, 물론 전부 임유라의 입에서 전해 들은 말이긴 하지만."지금 일에 만족하고 있다고요?"강현수는 피식 웃었다."한때 잘나가는 변호사였던 사람이 지금 배달 일에 만족하고 있다고요?"그에 임유진의 눈빛이 잠깐 흔들렸다. 변호사라는 건 이제 그녀의 마음속에서 꽤 오래전 일이 되어버린 듯했다.그녀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은 채 스쿠터에 올라탔다. 그러자 뒤편에서 또다시 강현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두 사람 사이가 내가 생각했던 것과는 많이 다른 것 같네요. 강지혁 옆에 더는 있고 싶지 않게 되면 언제든지 나한테 연락해요."그 말에 임유진이 잠깐 멈칫하나 싶더니 이내 스쿠터를 타고 떠났다.언젠가 임유진이 강지혁의 곁을 떠나게 되는 날이 와도 강현수를 찾아갈 일은 없을 것이다. 그의 사회적 신분을 생각하면 아마 그는 강지혁보다 더 냉정하고 무정할 것이니까.강현수의 연애사는 꽤 화려한 편이다. 그는 자신의
"너 어디 있냐고 그래서 주방에 있다고 하니까 슬쩍 쳐다보더니 가버리던데?"탁유미 엄마가 대답했다."대체 저 사람이 누군데? 너 아는 사람이야?"필경 자신의 딸이 남자의 얼굴을 본 순간 다급하게 숨어버리는 걸 봐버렸으니 탁유미 엄마도 많이 궁금했을 것이다.그러자 탁유미가 복잡한 얼굴을 하며 말했다."강현수라고 엔터 사업 쪽에서 알아주는 사람이에요. 내가 그 사람... 옆에 있을 때 저 남자하고 몇 번 정도 마주친 적 있었어요.""그럼 너 알아본 거 아니야?"탁유미 엄마가 다급하게 묻자 탁유미는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아마... 알아본 것 같아요."탁유미가 예전과는 많이 다른 모습이라고는 하나 알아보지 못한 거였으면 굳이 떠날 때 그녀에 관해 물어보지는 않았을 것이다.그러자 탁유미 엄마가 표정을 굳히며 물었다."그, 그럼 이제 어떡하지? 너 여기 있다고 얘기라도 하게 되면 어떡해? 아! 아까 유진 씨 보니까 그 남자와 아는 사이인 것 같던데, 유진 씨한테 부탁해 보면 어때? 너 여기 있는 거 말하지 말아 달라고."그에 탁유미가 입술을 깨물었다. 그녀는 솔직히 강현수가 어쩌다 이런 작은 가게까지 오게 됐는지 의문이긴 했었지만, 상황을 보니 임유진을 찾으러 온 것이었다. 하지만...‘그 강현수가 일개 식당 배달원을 찾으러 여기까지 왔다고?’임유진이 배달을 마치고 돌아오자 탁유미가 조심스럽게 물었다."유진 씨, 혹시 강현수 씨랑 아는 사이에요?""언니가 강현수 씨를 어떻게 아세요?"임유진이 놀란 듯 묻자 탁유미가 멋쩍게 웃으며 답했다."매번 여자친구 스캔들로 기사에 대문짝만하게 실리잖아요. 만났던 여자친구들도 다 유명 연예인이라고. 그래서 알죠.""강현수 씨하고는 몇 번 만난 적 있었어요.""그럼 그 사람하고... 아, 아니에요."탁유미가 손사래를 치며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웃어 보였다. 임유진은 잠깐 고개를 갸우뚱하더니 배달음식을 들고 말했다."언니, 그럼 저 배달 다녀올게요.""그래요."탁유미는 역시 자신이 직접 강현수를
‘그러니까 임유진 씨의 마음을 얻고 싶은 게 맞다는 거지...?’고이준은 오래 살고 볼 일이라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강지혁이 여자 하나 때문에 이런 고민을 한다는 게 신기할 따름이었다."임유진 씨는 과거에... 아픈 상처를 지닌 분이셔서 다른 사람들과는 다르게 마음을 사로잡기 쉽지 않을 겁니다. 그래서 아마 억지로 밀어붙인다거나 하면 겉으로는 따를지도 모르겠지만 마음속으로는 점점 더 멀어지게 될 거고요."고이준이 임유진을 냉철하게 분석했다."이건 어디까지나 제 의견이긴 합니다만, 항상 친절하고 부드럽게 대해주고 맞춰주려고 하는 자세로 다가가는 게 제일 좋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래야만 임유진 씨 마음의 벽도 서서히 무너질 테니까요.""그러니까 내가 철저하게 잘 보여야 한다는 거지?"강지혁의 혼잣말에 고이준은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친절하고 부드럽게 대해주고 맞춰주려고 하는 자세로 다가가는 게 좋을 것 같다고 했지 자신이 언제 철저하게 잘 보이라고 했나..."그런데 잘 보이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 거지?"고이준은 한 번도 여자에게 먼저 잘 보이려고 노력해 본 적 없을 것 같은 자신의 대표를 보며 뭐라고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그때 핸드폰이 울렸고 고이준은 발신자를 보더니 이내 신속하게 전화를 받았다. 그렇게 몇 분 정도 지났을까, 고이준이 전화를 끊고는 강지혁에게 말을 전했다."대표님, 누군가가 진애령 씨 사건을 들쑤시고 있다고 합니다."그러자 강지혁의 얼굴이 삽시에 굳었다."누가?""그것까지는 알아내지 못했습니다. 다만 현재 알고 있는 건 꽤 여러 명이 당시 사건자료와 증인들의 행방을 찾고 있다는 겁니다. 또한, 해성시에 있는 증인한테는 현재 사람까지 붙인 것으로 보입니다.""‘갈’씨 성을 가진 그 증인 말하는 거야?"강지혁이 눈썹을 추켜올리며 물었다."네, 그리고 지금 해당 증인을 조사하고 있는 사람은 일전 한지영 씨가 고용한 사립탐정이 아니라고 합니다."고이준은 한지영이 사립탐정을 고용한 시점에서 이미 상황을 다 파악하고 있었다.
정장 차림에 가죽 구두, 거기에 만화를 막 찢고 나온 것 같은 얼굴까지, 이런 사람을 갑자기 남자친구라고 소개하면 그 누가 믿을 수 있을까.한지영은 하늘을 바라보며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는 요 며칠 일어난 일들을 회상하며 자신이 너무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었다.모든 일의 시작이 된 그 맞선. 한지영은 그날 선 자리를 그렇게 망쳐버린 건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집으로 돌아와 보니 한지영의 엄마가 노발대발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왜 남자친구가 있는데 자기한테 얘기를 안 하냐고, 그것 때문에 자기가 어떤 말을 들었는지 아느냐고. 그러고는 집요하게 남자친구가 누군지 물어보기 시작했다.그에 한지영은 마침 근처에 있던 친구가 자신의 사정을 듣고 일부러 남자친구인 척 도와줬다고 거짓말을 했다. 그러고는 어느 친구냐는 질문에 적당히 자신과 친한 남자애의 이름을 대고 다음 날 말을 맞추려고 했었다.하지만 말을 맞추기도 전에 마침 백연신에게서 전화가 왔고 전화를 받지 않는 한지영이 이상했던 그녀의 엄마가 핸드폰을 낚아채 대신 전화를 받고는 백연신과 얘기를 나누기 시작했다.그렇게 자연스럽게 한지영과의 관계를 물었고 백연신은 당연하다는 듯, 이 한마디를 던졌다."어머님, 제가 바로 그 남자친구입니다."그 한마디에 한지영네 집은 초토화가 됐고 한지영의 엄마는 언제 한번 시간 내서 집으로 오라고 쐐기를 박았다. 한지영이 필사적으로 핸드폰을 잡으려고 했지만, 한지영의 아빠가 그녀를 제지했고 그렇게 그녀는 자신의 엄마와 백연신이 통화하고 있는 걸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여차여차 통화를 끝낸 후 한지영은 엄마와 아빠한테 족히 2시간을 더 잡혀있었다."너는 애가 남자친구가 있으면 있다고 얘기를 하면 될 것을, 뭘 그렇게 꼭꼭 숨기고 그러니? 얼굴이 못생겼든 직장이 변변치 않든 가족들한테는 얘기는 했었어야지. 아니면 덜컥 애라도 생기고 나서야 얘기하려고 했어?!""..."한지영은 맹세코 그런 생각은 한 적이 없었다.하지만 부모님에게 백연신과는 감정 없는 연애를
엘리베이터가 도착하고 문이 열리니 거기에는 한지영의 이웃집 주민이 있었다. 이웃 주민은 한지영을 보더니 반갑게 인사를 했다."지영아, 이제 집에 오는 거니? 그럼 이쪽이 바로 그 남자친구?"이웃 주민은 한지영을 향해 얘기하면서도 연신 백연신 쪽을 쳐다보았다. 그에 한지영이 막 말을 하려고 할 때 백연신이 먼저 입을 열었다."네, 제가 지영 씨 남자친구입니다.""어머나, 그럼 곧 좋은 소식이 들리겠네."이웃 주민은 깍듯하게 인사까지 하는 백연신을 보며 활짝 웃더니 얼른 집으로 올라가라고 재촉했다."이런, 지영아, 얼른 집으로 올라가. 너희 엄마가 오늘 너 남자친구 데리고 온다고 아주 신이 나셨어."한지영은 그제야 왜 이웃 주민이 백연신을 보고 단번에 남자친구냐고 물었는지를 알 것 같았다. 그녀의 엄마가 자신의 딸이 남자친구를 데려온다고 동네방네 소문을 낸 것이었다.엘리베이터 문이 닫히고 한지영은 백연신 쪽을 힐끔 올려다보았다. 그러자 백연신이 곧 웃음이 터질 것 같은 얼굴을 하고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그에 그녀는 밀려오는 부끄러움에 얼른 해명했다."저기, 그게... 우리 부모님이 내가 처음으로 남자친구를 사귀는 거라서 많이 들뜨셨나 봐요. 이따가 대충 고개만 끄덕이면 될 것 같으니까 내가 기회 봐서 연신 씨 데리고 나올게요.""내가 첫 남자친구야?"백연신이 흥미롭다는 듯 허리까지 숙여서 그녀를 바라보았다. 바로 눈앞에 조각 같은 얼굴이 떡하니 놓여있자 한지영은 그만 몸이 굳어버렸다. 그러다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다."하하하... 그게 내가 일만 하다 보니까.""그래? 나를 못 잊어서 다른 남자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고 했으면 내 기분이 더 좋았을 텐데."진지한 얼굴로 이런 말을 내뱉은 백연신 때문에 한지영은 심장이 터져버릴 것만 같았다.그때, 타이밍 좋게 엘리베이터가 층에 도착했고 한지영은 다행이라는 듯 빠른 걸음으로 엘리베이터에서 빠져나왔다.이윽고 백연신과 함께 집 문 앞까지 도착해버린 한지영은 심호흡을 한 번 뱉더니 천천히 문을
"그, 그래요. 반가워요."한지영의 부모님은 백연신의 말에 그제야 정신을 차린 듯 인사를 했다.한지영의 아버지는 백연신을 거실로 안내했고 한지영의 어머니는 한지영을 불러세우더니 낮게 속삭였다."진짜 너 남자친구 맞아? 어디 업체에 부탁해서 데려온 거 아니야?"그러자 한지영이 째려보며 말했다."그럼 그렇게 생각하시던가요.""어머, 얘 말하는 것 좀 봐. 됐고, 얼른 가서 차나 내와."한지영의 어머니는 자신의 딸을 주방으로 보낸 후 친절한 얼굴을 하고 백연신이 앉아 있는 쪽으로 다가갔다.한지영은 군말 없이 주방으로 가서 분부대로 차를 탔다. 그렇게 거실로 차를 내오니 세 사람은 어느새 화기애애하게 이야기꽃을 피우고 있었다."우리 지영이하고는 해외에 있을 때 알게 됐다고 했는데 그럼 계속 연락을 하고 지낸 건가?"한지영 엄마가 물었다."아니요. 제가 얼마 전에 한국에 귀국하고 우연히 만나게 됐어요. 그때부터 다시 연락하게 된 거고요."백연신은 한지영 쪽을 슬쩍 보더니 살짝 웃으며 말을 이었다."사실은 꽤 오랫동안 지영이를 찾고 있었어요. 그런데 어떻게 우연히 만나게 됐네요."한지영의 부모님은 백연신의 말에 감동한 얼굴을 했고 한지영은 소름이 돋았다."그것 참 인연이로구먼, 허허허."한지영의 아버지가 웃으며 말했다."헌데, 해외에서 만난 지 며칠밖에 안 됐을 텐데 그 짧은 시간 동안 어떻게 우리 딸아이를 좋아하게 됐는가?"한지영의 아버지는 자신이 딸이 고작 해외에 있던 그 며칠 새에 이런 남자를 3년이나 목매게 했다는 사실에 호기심이 일었다. 백연신은 태어나서부터 지금까지 여자가 끊이지 않았을 것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으니까."지영이랑 같이 있으면 마냥 즐거웠어요. 하루는 제가 술에 취해서..."백연신이 두 사람의 스토리를 얘기하려고 하자 한지영이 당황한 듯 손을 떨더니 이내 찻물을 손에 쏟고 말았다."앗!"그녀가 얼른 찻잔을 내려놓았지만, 손등은 이미 빨갛게 부어올랐다. 백연신은 그 모습에 얼굴을 찌푸리더니 얼른 그녀를 일으켜
"해달라는 거 다 해줄게요."한지영은 어차피 자신이 뭘 줘도 백연신의 성에는 차지 않을 거라며 배 째라는 식으로 말했다."그럼 그러지."백연신의 말에 한지영은 그가 이렇게 쉽게 수락할 줄은 몰랐는지 어찌 됐든 간에 다행이라며 안심했다."손은 어때? 아직도 따가워?"백연신이 그녀의 손을 바라보며 물었다."아니요. 이제 좀 괜찮아진 것 같아요."한지영이 괜찮다고 대답을 하고 나서야 백연신은 수도꼭지를 잠그고 몸에 지니고 있던 손수건으로 그녀의 손에 남아있는 물기를 닦아주었다."아직도 조금 빨갛게 달아올랐네, 바르는 약은 있어?""아, 있어요.""그럼 지금 가서 약 가지고 와."백연신의 말에 한지영이 쪼르르 자신의 방으로 달려가 바르는 약을 집어 들었다. 그러고는 자신이 마치 말 잘 듣는 어린애가 된 것만 같은 기분에 머리를 한번 긁적이다 이내 생각을 멈추고 방에서 나왔다.한지영이 약을 가지고 나와보니 백연신은 어느새 거실에 앉아 자신의 부모님과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그녀가 세 사람 쪽으로 가까이 다가가자 마침 그녀의 엄마가 말을 했다."그렇구나, 술에 취해서 우리 지영이가 자네를 밤새 돌봐줬었구나. 우리 지영이 얘가 어릴 때부터 마음이 착하고 여려서 꼭 그렇게 힘든 사람을 보면 도와줘야 직성이 풀리곤 했어. 호호호."한지영은 그 말에 하마터면 발을 접지를 뻔했다. 마음이 착하고 여려? 힘든 사람을 보면 꼭 도와줘야 직성이 풀린다고?한지영은 진실을 모른 채 백연신이 들려주는 얘기에 그녀를 잘 포장하고 있는 자신의 엄마를 보며 양심의 가책을 느꼈다."네, 그때 지영이가 옆에서 절 밤새 돌봐주지 않았더라면 술 취한 제가 어디 길가에 널브러져 그대로 나쁜 사람들한테 시비라도 당했을 거예요."백연신은 말을 한 후 한지영을 쳐다보며 살인미소를 날렸다."지금도 그때 생각만 하면 얼마나 고마운지 몰라요."한지영은 양심을 콕콕 찌르는 그의 말에 차마 그쪽으로 고개를 돌릴 수가 없었다.하지만 한지영의 부모님은 자신의 딸이 대견한지 거기에 한 술
그런데 아직 스킨십이든 뭐든 하기도 전에 강지혁의 입에서 냉랭한 말이 흘러나왔다.“난 누가 멋대로 내 몸 만지는 거 질색이야. 만약 거기서 한 걸음만 더 가까이 다가와 기어코 내 몸에 손을 대면 그때는 두 번 다시 그 손을 볼 수 없을 거야.”화를 내는 것도 아니었고 경고하는 말투도 아니었다. 그저 일상적인 말투인데 내용이 너무 소름 끼쳐 저도 모르게 손이 덜덜 떨렸다.그리고 그때 그의 눈빛은 단 한 번도 그녀에게 옮겨지지 않았다. 그저 고개를 숙인 채 일에만 몰두해있었다. 마치 그녀에게는 1초라도 허비하고 싶지 않다는 것처럼 말이다.소민아는 당시 그 말을 듣고 조용히 방에서 나왔다. 하루아침에 손이 없어지는 경험은 겪고 싶지 않았으니까. 만약 다른 사람이 그런 말을 했다면 분명히 농담이었겠지만 상대는 강지혁이라 농담이라고 생각할 수가 없었다.그런데 그랬던 강지혁이 여자가 앞으로 바짝 다가와 말을 건 것도 모자라 사람들 다 보는 앞에서 볼까지 만지작거리고 있는데 아무런 위협도 가하지 않고 있다.소민아는 그 모습에 질투와 분노가 동시에 치솟았고 강지혁에게 속으로 얼른 그 여자의 손을 자르라는 신호를 보냈다.하지만 그때 들려온 고이준의 한마디에 그녀는 그만 생각이 멈춰버렸다.“사모님!”소민아는 얼이 빠진 얼굴로 고이준을 바라보았다.사모님이라니? 누가? 강지혁의 아내는 이미 오래전에 죽었는데?그때 소민아의 머릿속으로 눈앞에 있는 여자의 이름이 강지혁의 죽은 아내의 이름과 똑같다는 것이 떠올랐다.‘서, 설마 사모님이라는게... 아니... 설마...’소민아가 경악하며 손바닥으로 입을 틀어막았다.‘아니야. 아닐 거야! 말이 안 되잖아!’임유진은 시선을 돌려 고이준을 바라보았다.“고 비서님! 오랜만이에요!”이건 분명히 아까 고이준이 불렀던 ‘사모님’에 대한 대답이었다.고이준은 잔뜩 격앙된 얼굴로 임유진을 바라보았다.“살아계셨군요! 저희가 얼마나 사모님께서 살아계시길 바랐는지 아십니까! 5년이나 지나서 드디어... 드디어 실현되었네요!”“
아이의 얼굴은 얼마 전에 봤던 사진 속 여자의 얼굴과 너무나도 닮아있었다.게다가 아빠라니, 그 여자를 쏙 빼닮은 얼굴로 아빠라니.강지혁과 현이는 그렇게 서로의 눈을 계속해서 바라보고 있었다.그시각 놀란 건 비난 강지혁뿐만이 아니었다. 고이준은 거의 넋을 잃은 채로 아이를 바라보았다.아이는 완전히 리틀 임유진이었으니까. 하지만 다시 자세히 보면 어딘가 강지혁의 느낌도 있었다.‘이 아이 설마...!’그때 아이가 미간을 찌푸리더니 이내 고개를 돌려 임유진이 있는 곳을 바라보았다.“엄마, 아빠가 나 좋아할 거라며? 왜 현이 안 안아줘? 아빠 정말 엄마 좋아했던 거 맞아? 정말 엄마 때문에 울었던 거 맞아?”아이는 진지하게 임유진이 해줬던 말을 의심하기 시작했다.하지만 임유진은 아이의 질문에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고 오로지 강지혁만 바라보고 있었다.자신이 무슨 이유로 강지혁의 곁을 떠났는지, 왜 S 시에서는 죽은 상태가 되어 있는 건지, 그녀는 아직 모르는 게 너무나도 많았지만 둘이 어떻게 사랑했는지, 어떤 사랑을 했는지, 어떤 맹세를 하고 어떤 약속을 했는지는 하나하나 다 기억이 났다.임유진은 눈물을 가득 맺힌 채로 한 걸음 한 걸음 강지혁에게로 걸어갔다.지난날의 두 사람이 어땠는지 마치 파노라마처럼 그녀의 머리를 스쳤다.강지혁을 월세방에 데리고 와 그에게 라면을 끓여줬던 것도, 친척들이 그녀를 바보에게 팔아넘기려 했을 때 강지혁이 그녀를 구하기 위해 찾아왔던 것도, 그녀가 임신했다는 사실을 알고 결혼하자고 했던 것도, 그가 영원히 내 곁에서 떠나지 말라는 말을 했던 것도 전부 다 떠올랐다.곁에 있어 주겠다고 약속했는데 5년이나 그를 떠나버렸다. 그리고 지금 5년 만에 드디어 그의 앞에 서게 되었다.“혁아, 나 돌아왔어.”임유진은 울먹거리는 목소리로 그에게 말을 건네고는 손을 들어 강지혁의 볼을 쓰다듬었다.아, 조금 차가운 이 체온은 확실히 그의 체온이 맞다. 눈앞에 있는 남자는 그녀가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남자고 또 세상에서 그녀를
임유진은 기억을 다 잃어버렸지만 그간 축적해온 지식은 아직 그녀의 머릿속에 남아있었다.그녀는 자신이 변호사였다는 걸 아예 기억하지 못했다. 하지만 기억을 잃고도 그녀는 또다시 변호사라는 직업을 택했고 자격증 시험도 단번에 통과했다.“네, 오랜만이네요...”이현우는 인사를 하다가 뭔가를 깨달은 듯 표정을 바꿨다.‘혹시 소민아 씨와 싸웠다는 여자가 유진 씨인 건가?’이현우는 순간 이길 자신이 먼지 사라지듯 사라졌다. 그도 그럴 게 임유진을 가르쳤던 사람은 바로 그 유명한 승률 99%를 자랑하는 법조계의 대선배 변호사였으니까.그리고 임유진은 그 대선배 변호사의 그냥 제자도 아니고 애제자였다. 지난번 행사에서 그는 임유진을 마지막으로 더는 제자를 받지 않겠다는 선언까지 했다.이현우는 자신만만한 임유진의 얼굴을 보고는 머리가 다 지끈해 났다.“꼴에 진짜 변호사였네?”그때 소민아가 한껏 비아냥거리며 말했다.“이 변호사님, 불편하시면 의뢰 거절하셔도 되죠. 하지만 이 여자가 건드린 건 내가 아니라 강 회장님이세요. 자기 딸한테 강 회장님 사진 보여주고 아빠라고 부르라고 했다니까요? 이거 소문 잘못 나면 사생아다 뭐다 엄청난 스캔들 되는 거 아시죠? 만약 정말 스캔들 터지면 그때는 회장님 사업 전체에 영향이 갈 겁니다.”소민아는 일부러 강지혁을 끌어들였고 아니나 다를까 그 말을 들은 이현우의 표정은 한순간에 흙빛이 되었다.임유진이 결혼은 안 했지만 딸이 하나 있다는 건 이미 들어서 알고 있다. 그런데 그 딸에게 강지혁의 사진을 보여주며 아빠라고 하라니?!아무리 딸에게 아빠를 만들어주고 싶어도 그렇지 강지혁의 사진을 이용하면 안 되는 것이었다.‘혹시 S 시에서 강지혁 회장이 어느 정도 위치에 있는지 모르나? 아니면... 그냥 딸이 너무 아빠를 찾아서 인터넷에서 아무 남자 사진이나 보여준 건가?’이현우가 조용히 머리를 굴리고 있던 그때 임유진이 입을 열었다.“우리 딸은 사생아 따위가 아닌 강씨 가문의 유일한 딸이에요.”“하, 유일한 딸? 강씨 가문
레스토랑은 계속 영업을 해야 하기에 경찰들은 도착한 후 그대로 소씨 모녀와 임유진 쪽의 세 사람을 경찰서에 태웠다.차 안에서 임유진이 경찰에게 이름을 얘기할 때 소민아는 저도 모르게 흠칫했다.그도 그럴 게 강지혁의 와이프와 똑같은 이름이었으니까.하지만 소민아는 아주 잠깐 놀라기만 했을 뿐 눈앞에 있는 임유진과 죽은 강지혁의 와이프를 굳이 연결 지으려고 하지는 않았다. 강지혁의 와이프가 5년 전에 죽었다는 것을 S 시의 모두가 다 알고 있으니까.‘이제 알겠네. 이름이 같다고 자기가 회장님 와이프인 줄 아는 리플리증후군 환자였잖아?’강지혁과 엮이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알기에 소민아는 임유진이 아이까지 이용해 이러는 게 무척이나 같잖았다.이 세상에서 강지혁을 아빠라고 부를 수 있는 사람은 그의 아들인 강선율을 제외하고 그녀의 딸인 소안나밖에 없었다.한편 현이는 아직도 찢어진 반쪽짜리 사진이 신경 쓰였다. 이건 어렵게 구한 아빠의 사진이었으니까.“현아, 괜찮아. 너무 속상해하지 마. 이따 엄마랑 같이 아빠 보러 가면 그때 마음껏 사진 찍어.”그 말에 현이는 일리가 있다며 금방 활짝 웃었다.“그건 네 아빠 아니고 내 아빠야! 그리고 아빠는 사진 찍는 거 싫어해!”소안나가 볼을 부풀리며 말했다.“흥! 엄마가 그랬어. 아빠는 내가 엄마를 쏙 빼닮아서 분명히 날 좋아할 거라고!”현이가 지지 않고 대꾸했다.그러자 그걸 들은 한지영이 임유진의 귓가에 대고 물었다.“네가 정말 현이한테 그랬어?”“응.”임유진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사실 이 말을 한 건 아빠가 자리를 안 좋아하면 어떡하냐고 현이가 너무 걱정하고 있길래 뻔뻔하게 해본 말이었다.“5년 만에 아주 사람이 달라졌어? 응?”한지영이 능글거리며 임유진의 옆꾸리를 툭툭 쳤다.그러자 옆에 있던 소민아가 콧방귀를 뀌었다.“그 엄마에 그 딸이라고 뻔뻔함이 아주 하늘을 찌르네. 회장님이 당신 같은 여자를 왜 좋아해? 웃기고 있어!”“남의 말 엿듣는 게 취미인가 봐요?”한지영이 가볍게
매니저는 소민아가 강지혁과 연관 있는 여자라는 걸 아주 잘 알고 있었다. 그녀의 기사가 한두 개가 아니었으니까. 심지어 최근에는 에스테 삽까지 열었다고 했으며 상류층 귀부인들과도 사이가 매우 좋다고 했다. 그러니 만약 이런 사람을 건드리면 장사는 거의 접어야 한다고 봐도 무방했다.‘안돼! 어떻게 버텨낸 건데 이럴 순 없어!’매니저는 얼른 소민아에게로 다가갔다.“괜찮으십니까?”그러자 소민아가 레스토랑이 다 떠나가라 소리를 질러댔다.“대체 손님 관리를 어떻게 하는 거야? 내 딸이 여기서 다쳤으면 당신이 책임질 거야? 우리 딸의 아빠가 누군지 몰라?!”매니저는 이에 허리가 부러질 정도로 연신 사과해댔다.한편 현이는 고개를 들어 임유진과 한지영을 바라보며 물었다.“엄마랑 이모는 왜 싸웠어? 싸우는 건 나쁜 거라고 했잖아.”현이는 아까 임유진이 다가왔을 때 여자아이랑 싸운 것으로 꾸중을 들을 줄 알았다.그런데 갑자기 어른들 셋이서 싸움을 해댔다.임유진은 딸의 머리를 다정하게 쓰다듬어 주었다.“우리 현이, 엄마가 한 말 기억하고 있었구나? 싸우는 게 나쁜 건 맞지만 괴롭힘을 당했을 때는 당당하게 맞서 싸워야 해. 그리고 우리는 이걸 정당방위라고 해.”“정당방위!”현이가 눈을 반짝이며 고개를 세게 끄덕였다.“정당방위?”그런데 그때 소민아가 그걸 듣더니 기가 찬다는 표정을 지었다.그녀는 오늘 제대로 개망신을 당했다. 그것도 사람들이 잔뜩 있는 데서 말이다.그래서 그녀는 자신의 체면을 다시 주워 담으려고 일부러 더 큰소리로 외쳤다.“난 절대 이대로 안 넘어가. 변호사 고용해서 오늘 나한테 이딴 짓 한 거 후회하게 해줄 거야!”소민아의 말에 소안나가 턱을 치켜 든 채 현이 쪽으로 다가갔다.“우리 엄마가 변호사 아저씨 부르면 너랑 너희 엄마는 아주 큰 벌이 내려질 거야!”이에 현이는 소안나보다 더 고개를 치켜들며 더 큰 목소리로 말했다.“너희 엄마는 변호사 아저씨를 불러야 하지만 우리는 우리 엄마가 변호사야!”“우리 엄마 엄청 돈 많아서
현이를 거칠게 밀어버린 건 소민아였고 나머지 반쪽짜리 사진을 손에 꽉 쥐고 있는 건 그녀의 딸이자 강씨 가문의 양녀인 소안나였다.임유진은 인터넷에서 해당 모녀를 본 적이 있기에 그들이 누군지 바로 알아보았다.그때 임유진이 뭐라 하기도 전에 소민아가 표독스러운 눈으로 그녀를 쏘아보았다.“아빠? 기가 막혀서! 대체 애 교육을 어떻게 하는 거야? 누구더러 아빠래? 감히 주제도 모르고! 그리고 당장 내 딸한테 사과해! 내 딸이 누군 줄 알고 감히 손을 올려?!”소민아는 고개를 빳빳이 치켜들고 마치 사과를 받는 게 당연하다는 듯이 말했다.사실 이곳은 소안나가 티비에서 보고 가고 싶다고 하도 졸라서 온 곳이었다. 만약 소안나가 아니었으면 애초에 이따위 곳에는 발을 들이지도 않았다.서민 레스토랑은 그녀와 그녀의 딸 급과 전혀 맞지 않았으니까.그런데 이런 수준 낮은 곳에 온 것도 마음에 안 드는데 갑자기 딸이 웬 이상한 여자애랑 싸우고 게다가 그 싸움의 원인은 다른 것도 아닌 바로 강지혁의 사진이었다.소민아는 단호한 눈으로 아빠라고 외치는 아이가 기가 차고 어이가 없었다.강지혁에게는 소안나라는 딸밖에 없고 그건 앞으로도 그러할 게 분명했다.임유진은 차가운 눈빛으로 소민아를 바라보며 말했다.“그쪽 딸이 누군지 당연히 알죠. 강씨 가문의 양녀 잖아요. 안 그래요? 그리고 내 딸의 주제는 내가 판단해요.”임유진은 레스토랑이기도 하고 아이들도 있었기에 최대한 차분한 말투로 얘기했다.하지만 그녀가 입밖에 내뱉은 ‘양녀’라는 두 글자가 소민아의 심기를 건드리고 말았다.소민아는 다른 사람들이 소안나를 양녀라고 부르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래서 소민아에게 아부하고 싶어 안달이 난 사람들은 그녀가 딸의 호칭에 예민하다는 것을 알고 항상 ‘아가씨’라고 불렀다.“이봐, 미친 거야? 아니면 상황 파악이 안 돼? 고작 이딴 사진을 가지고 있으면 네가 뭐 진짜 이 남자 와이프라도 된 것 같아? 그리고 이 사진은 또 어디서 났어? 음습하고 음침하게 이게 뭐 하는 짓이야?
“응, 기사로 봤어.”임유진이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만약 혁이가 정말 날 잊고 그 여자를 좋아한다면 나도 깨끗하게 포기할 거야. 하지만... 만약 혁이가 여전히 내가 알던 혁이고 나만 사랑해주는 혁이면 나는 절대 포기 안 해.”지금은 거의 모든 사람이 다 그녀가 다 죽었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러니 만약 강지혁이 정말 이제는 그녀를 잊고 다른 사람을 사랑하게 됐다고 하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사별한 아내를 위해 아무도 만나지 말라고 강요하는 건 이상한 일이니까.하지만 임유진은 왜인지 모르겠지만 강지혁은 쉽게 다른 사람에게 흔들릴 것 같지 않았다. 여전히 그녀처럼 딱 한 사람만 바라보고 있을 것 같았다.기억을 잃은 요 몇 년간 임유진에게 들이대는 남자는 꽤 많았다. 심지어 하나같이 스펙이 좋고 얼굴도 훈훈했으며 다정다감했다. 하지만 그 어떤 사람을 만나도 심장이 떨리는 느낌은 받지 못했다.그러다 기억이 차츰 회복되고 나서야 임유진은 그 이유를 깨달았다. 그녀의 심장은 이미 강지혁이라는 남자에게 줘버려서 더 이상 나눌 것이 없다는 것을 말이다.“참, 지영이 너는? 남자친구 생겼어?”임유진이 화제를 바꾸며 물었다.“없어. 안 그래도 노처녀라면서 엄마가 얼마나 재촉을 해대는지.”한지영이 어깨를 으쓱하며 조금 쓰게 웃었다.지난 5년간 오로지 백연신만 떠올리며 일부러 다른 사람을 멀리했던 건 아니었다. 그저 백연신은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그녀의 머릿속에 이따금 나타나 있었다.그리고 백연신과 함께 있었을 때가 너무 행복해서 이제는 그 어떤 남자를 봐도 연애하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래서 소개팅은 볼 때마다 큰 수확이 없었다.“아직 마음을 접지 못한 거구나...”임유진이 한지영의 손을 잡아주며 말했다.“접으려고 노력해야지.”한지영이 웃었다.“만약 노력했는데도 정 안되면 그때는 그냥 혼자 살지 뭐! 아니지. 우리 현이랑 선율이 둘을 보고 살면 되지.”한지영은 말을 내뱉었다가 아차 싶은 마음에 미안한 얼굴로 임유진을 바라보았다.아니나
“하지만 나는 임현이 좋아. 엄마, 나 계속 임현 할래. 그렇게 해줘.”아이가 눈을 반짝이며 임유진에게 말했다.“오빠는 강선율이고 현이는 강선현이면 얼마나 좋아. 사람들이 오빠랑 남매인 거 바로 알게 될걸? 현이 오빠 갖고 싶어 했잖아.”임유진이 아이를 설득했다.“그럼 오빠한테 임율로 바꾸라고 하면 안 돼?”아이가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그럼 오빠 만나고 현이가 직접 물어봐. 어때?”“좋아!”현이는 뭔가를 굳게 결심한 듯 이를 앙다물고 눈을 부릅떴다.한지영은 아이의 표정과 행동에 소리 내 웃었다.“현이는 임현이라는 이름이 그렇게도 좋아?”“네, 좋아요!”현이가 고개를 끄덕였다.“왜? 엄마가 계속 그렇게 불러줘서 그게 더 좋은 거야?”한지영이 궁금하다는 듯 물었다.그러자 임유진이 딸 대신 대답했다.“아니, 두 글자 이름이 더 멋있다고 생각해서 임현이 더 좋다고 하는 거야. 만약 강현으로 하라고 했으면 바로 동의했을걸?”“뭐? 하하하. 그런데 강현은 조금 남자애 이름 같잖아.”“현이는 그런 거 상관 안 해. 오히려 멋있다면서 좋아할걸? 그냥 두 글자 이름이 더 좋은 거야.”한지영은 그 말에 크게 웃으면 현이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그때 음식이 도착하고 세 사람은 식사부터 했다.현이는 밥을 먹은 후 키즈 존으로 달려가 신나게 놀았다. 이곳은 어린아이들을 위한 레스토랑이라 다른 곳보다 놀 수 있는 공간이 크고 그 덕에 또래 아이들도 더 많았다.키즈 존은 테이블과 멀리 않은 곳에 있어 임유진과 한지영은 편하게 식사를 하며 이따금 시선을 옆으로 돌려 한번씩 확인만 했다.“이따 현이 데리고 강지혁 만나러 갈 거야?”한지영이 물었다.“응, 먼저 집으로 가보려고.”사실 임유진은 기억을 회복한 다음 바로 강지혁에게 전화를 걸었다.하지만 두 개의 번호 중 하나는 전원이 꺼져있다는 음성이 흘러나왔고 다른 한 개 번호는 아예 신호음조차 가지 않았다.아무래도 낯선 번호는 걸려오지 못하게 제안해 놓은 것 같았다.그래서 임유진은 차라
“아니야. 아빠가 그간 우리를 찾으러 오지 않았던 건 분명히 이유가 있어서일 거야.”임유진이 말했다.“현이 보게 되면 아마 엄청 좋아할 거야!”‘날 찾지 않은 이유는 아마... 내가 죽었다고 생각해서겠지?’임유진은 강지혁을 기억해낸 후 그의 기사를 찾아보다 그녀가 강지혁의 ‘사망한 아내’로 나온 것을 봤었다.열차가 S 시에 도착하고 임유진은 딸의 손을 잡고 출구 쪽으로 천천히 걸어 나갔다.그렇게 걸어 나가보니 가장 먼저 조금은 초조한 얼굴로 발을 동동 구르며 기다리고 있는 익숙한 누군가의 모습이 눈에 띄었다.한지영이었다.임유진은 그녀를 본 순간 눈시울이 빨개졌다.그간 기억을 아예 통째로 잃었던 터라 그녀는 한지영도 까맣게 잊어버리고 있었다. 그러다 최근 기억이 회복된 후에야 급하게 한지영에게 전화를 걸었다.임유진은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그날 기억이 돌아오자마자 한지영에게 전화를 걸었을 때 한지영이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목소리를 덜덜 떨었던 것을 말이다.그러다 영상 통화를 걸고서야 한지영은 그녀가 정말 살아있다는 것을 실감했다.“지영아!”임유진이 큰소리로 외치자 한지영이 고개를 홱 돌렸다. 한지영은 임유진을 보자마자 눈가가 빨개지더니 눈물을 글썽였다.임유진이 딸의 손을 잡고 그녀 앞에 섰을 때 한지영의 얼굴은 이미 눈물범벅이었다.“너 진짜... 살아있었어. 네가 그렇게 쉽게 죽지 않을 거라는 거 난 알고 있었어. 알고 있었다고! 유진아!!”한지영은 임유진을 와락 끌어안으며 엉엉 울었다.그리고 임유진도 그녀를 꽉 끌어안으며 눈물을 글썽였다.“미안해... 많이 걱정했지.”“그걸 말이라고!”한지영은 울먹거리며 말하다가 이내 임유진의 옆에 있는 아이를 바라보았다.임유진과 판박이였지만 언뜻 강지혁의 모습도 보였다.일전 영상 통화로 이미 얼굴을 봤었지만 실물로 보니 또 느낌이 달랐다.“이모, 안녕하세요!”현이가 똘망한 눈으로 한지영을 바라보며 예의 바르게 인사를 건넸다.이에 한지영은 마음이 사르르 녹는 걸 느끼며 아이의 말랑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