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지혁은 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몸을 세우고 차 문을 닫은 후 다시 운전석으로 가 차에 시동을 걸었다.임유진은 차를 모는 강지혁을 보며 의외라고 생각했다. 평소에는 보통 운전기사분이 운전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가 차를 운전하고 있으니 임유진은 마침 그의 옆태를 구경할 수 있게 되었다.옆에서 보니 오관이 더욱 입체적으로 보였고 턱선도 더욱 날카로워 보였다. 곧은 콧대와 섹시한 입술까지. 지금의 그는 평소처럼 머리를 깔끔하게 올리지 못했다. 머리카락이 조금 흐트러진 모습이 마치 전에 그녀가 알던 혁이 같았다. 혁이... 이 호칭을 생각해 보니 복잡한 감정이 저도 모르게 북받쳤다. 아까 정신이 없어서 계속 그를 혁이라고 불렀다.혹시 그녀가 무의식 간에 혁이한테 도움을 청하면서 강지혁에게는 도움을 청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 아닐까?사실 혁이든지 강지혁이든지 다 그였지만. 지금 그녀를 도울 수 있는 유일한 사람도 그였다. 경찰에서 찾는다고 했지만... 그녀는 다른 사람들과 함께 직접 한지영을 찾고 싶었다. 사람 일은 어떻게 될지 모르는 거니까.빨리 한지영을 찾는 것이 좋을 것이다. 차가 신호등 앞에 멈춰서자 강지혁이 고개를 돌려 임유진을 보며 물었다.“왜? 왜 계속 그런 눈빛으로 봐?”그녀는 순간 놀랐다. 강지혁이 모르는 줄 알았지만 사실은 임유진이 그를 지켜본다는 것을 다 알고 있었다.“아무것도 아니야. 그냥... 오늘은 왜 네가 직접 운전하나 해서.”그녀는 말을 조금 더듬으면서 입을 열었다. 몰래 지켜보다가 딱 걸리니 왜인지 모르게 부끄러웠다.“그래? 직접 운전하는 게...”재미있다는 듯이 얘기하는 그는 더욱 집요한 시선으로 임유진을 쳐다보았다.그가 전화기 너머로 우는 그녀의 목소리를 듣고 평정심을 잃은 채 운전기사에게 얘기하지도 못하고 키를 잡고 운전했다는 것을 알려줘야 하나. “진짜 알고 싶어?”강진혁이 뜨거운 시선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다. 품에 토끼를 안은 것처럼, 임유진의 심장은 말을 듣지 않고 빠르게 쿵쿵 뛰었다. 그의
강지혁은 임유진의 눈에 다른 사람이 아닌 강지혁만 있었으면 했다.“알고 싶으면 나랑 같이 기다려. 내 사람들이 한지영 씨를 찾으면 바로 연락할 거니까.”강지혁이 얘기했다.이건 임유진에게 당연히 문제없었다. 잠깐, 기다린다고? 어디에서 같이 기다리는 거지? 임유진이 눈을 깜빡였다. 그리고 5분 후, 어디에서 같이 기다리는지 알 수 있었다.바로 강지혁의 방이었다.그의 방에 처음으로 들어온 것은 아니지만 처음으로 이어진 문으로 그의 방에 들어간 것이 아니라 그의 방문으로 걸어 들어간 것이었다.방에 들어온 강지혁은 바로 외투를 벗고 핸드폰을 꺼내 옆의 테이블에 놓았다. 임유진은 그의 핸드폰을 보고 깜짝 놀랐다. 그 핸드폰은 제일 처음 그녀가 강지혁에게 사준 30만 원밖에 하지 않던 낡은 특가 핸드폰이었다. 다른 일반인들이 쓰는 핸드폰도 이것보다는 훨씬 나을 것이다. 그런데 강지혁이 이 핸드폰을 항상 지니고 다닌 건가?그렇지 않으면 오늘 그녀가 전화를 걸었을 때 바로 받을 수가 없었다.그녀가 이 핸드폰에 대해 잘 보지도 못했을 때, 어느새 시야 구석에 있던 강지혁이 옷을 벗기 시작했다. 그러자 임유진의 얼굴이 순식간에 붉어졌다.“너... 너 왜...”“그냥 옷 갈아입는 건데.”강지혁은 눈썹을 치켜뜨며 그녀를 보았다.“누나도 나 옷 갈아입는 거 자주 봤잖아? 왜 지금은 부끄러워?”임유진은 갑자기 뜨끔했다. 전에 셋집에 살 때 강지혁이 옷을 갈아입는 것을 본 적이 있었다. 하지만 그건 그저 스웨터나 외투를 갈아입는 것이었다.안에 입는 옷들은 다 욕실에 들어가서 갈아입던 그였다.지금의 그는 윗옷을 벗어 얇은 셔츠만 남겼다. 더 벗는다면...그생각에 임유진은 저도 모르게 몸을 돌려 강지혁을 등지고 앉았다.어쩔 수가 없었다. 이곳은 그의 방이니 등 돌려 앉는 것은 임유진이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었다.그리고 그녀는 사락사락하는 소리를 들었는데 아마도 강지혁이 옷을 벗는 소리인 듯했다.그가 옷을 갈아입는 데 시간이 얼마나 걸리는 걸까.
강지혁은... 상체를 훤히 드러내고 있었다!“너...!”그녀의 얼굴은 부끄러워서 붉게 물들었고 두 눈을 꼭 감은 채 뜨려고 하지 않았다. 눈을 떴다가 보지 말아야 할 것을 보게 될까 봐 무서웠다.“누나, 눈 안 뜰 거야?”그는 여유롭게 얘기했다. 그 느긋한 말투는 마치 유혹처럼 들리기도 했다.임유진은 여전히 눈을 꼭 감은 채 얼굴을 붉히며 재촉했다.“너, 너 얼른 옷부터 입어!”“하지만 난 누나가 나를 봐줬으면 하는걸?”강지혁이 대답했다.“게다가 난 오늘 누나의 일도 도와줬는데, 누나는 날 보기도 싫은 거야?”그 말에 임유진의 몸이 굳었다. 그리고 입술을 잘근 씹었는데 전에 그가 깨문 상처 부위를 다치게 되자 저도 모르게 낮은 신음을 흘렸다.그러자 귓가에 강지혁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임유진은 그의 손가락이 그녀의 입술을 만지는 것을 느꼈다.“그거 알아? 아까 모습 꽤 귀여웠어.”귀엽다고?임유진이 제대로 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입술 위로 무언가가 닿았다. 바로 그의 입술이었다. 강지혁이 갑자기 임유진에게 키스했다.놀란 임유진이 두 눈을 뜨고 가까이 다가온 얼굴을 쳐다보았다. 하지만 임유진은 그의 얼굴을 보기도 전에 그녀를 잡아먹을 듯한 검은 눈동자를 마주하고 말았다. 마치 금방 피어난 꽃같이, 예쁜 모습으로 모든 사람의 영혼을 끌어당기고 있었다.“읍...”그녀가 입을 열고 뭐라고 얘기하려고 하자 키스가 더욱 격렬해졌다.임유진은 그 키스를 받아들이며 손을 그의 가슴 위에 올려놓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키스가 끝났고 임유진은 숨이 차서 얼굴이 빨갛게 된 채 숨을 몰아쉬었다.강지혁은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여유롭게 웃으며 얘기했다.“이렇게 해야 누나가 날 보는구나?”그녀는 놀라서 사레가 들렸다. 이 말에는 엄중한 착오가 있다. 하지만 임유진은 어떻게 반박해야 할지 몰랐다. 마침 눈을 다시 감으려는데, 강지혁이 얘기했다.“왜, 내가 도와줬는데 날 보는 것도 싫은 거야?”그녀는 입술을 달싹이다가 얘기했다.“옷을 제대로 입으
하지만 그는 듣지 못한 것처럼 임유진만 쳐다보면서 얘기했다.“누나, 누나는 나한테 상처 줄 거야?”그 질문에 임유진은 몸을 흠칫 떨었다. 무슨 말이 나오려다가 성대에 걸려서 나오지 않는 듯했다.강지혁의 두 눈은 그대로 임유진을 바라보며 그녀의 속까지 꿰뚫어 보는 것 같았다.“이 질문이 어려워?”그녀가 긴 시간 동안 침묵하고 있자 강지혁이 낮은 목소리로 얘기했다.“누나가 대답하기 싫다면 됐어. 괜찮아. 그저 얘기해 줄 게 있어.”허리를 숙인 그가 입술을 임유진의 귓가에 대고 낮은 목소리로 얘기했다.“영원히 나한테 상처 주지 마. 알겠어?”상처를 주지 않는다면 그는 임유진을 보물처럼 여기며 평생을 사랑하고 지켜줄 것이다. 그녀가 그에게 상처를 주지 않는다면 말이다....커다란 방안에서 임유진은 가만히 앉아있지 못했다. 핸드폰의 시간을 계속 유심히 지켜보며 언제쯤이면 한지영의 소식을 받을 수 있을까 생각했다. 강지혁은 이미 간편한 홈웨어로 갈아입고 소파에서 전업적인 보고들을 보고 있었다.우아한 자세로 앉은 강지혁을 보며 임유진은 아까 그가 한 말이 떠올랐다.그녀한테 영원히 강지혁에게 상처 주지 말라고 했다. 하지만 임유진은 전혀 그녀에게 상처 줄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강지혁이 한 말은 사실 쓸모없는 말이라고 볼 수 있었다.강지혁 같은 사람을, S시에서 누가 감히 그를 상처 줄 수 있는가. 그녀의 시선을 느낀 것인지, 강지혁이 고개를 들어 그녀를 쳐다보았다.“내 생각해? 아니면 한지영 씨?”당연히 한지영 생각을 한 것이다. 아까는 그저 우연히 그가 한 말이 떠올랐을 뿐이다. 하지만 지금 강지혁이 그녀를 보고 있으니 거짓말을 못 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세상 무서운 줄 모르고 순진하고 온화하며 부드러울 것 같은 강지혁이지만 그를 건드리거나 심기를 거스른다면...그 후과를 상상하기도 싫었다. 지금의 그녀는 절대로 강지혁을 건드리거나 그의 심기를 거슬러서는 안 된다. 아직 한지영을 찾기 위해 그의 도움이 필요하다.이때 강
“백연신은 백선 그룹의 회장이야. 백씨 가문의 가주이기도 하지.”강지혁이 말했다. 그리고 이상한 표정으로 임유진을 쳐다보았다.“백연신이 누군지 정말 몰라? 전에 한지영 씨가 얘기한 적도 없어?”임유진은 고개를 저었다. 확실히 친구의 입에서 백연신이라는 이름을 들어 본 적이 없었다.하지만 백선 그룹은 알고 있었다. 이곳의 기업은 아니지만 S시에서 합작 프로젝트가 많은 유명한 해운회사다. 하지만 한지영이 왜 백연신과 무슨 관계가 있다고? 더욱 이해가 되지 않는 건 아까 전화에서 얘기한, 백연신이 직접 나서서 손을 썼다는 것이었다.그럼 오늘 본 그 마이바흐에 백연신도 있었다는 것인가?친구가 그저 단순히 납치된 줄 알았는데 지금 보니 그것도 아닌 것 같았다.“그럼... 내가 가서 찾아볼게!”임유진이 갑자기 몸을 돌려 아까 들은 주소로 가서 한지영을 구해주려고 했다.“그곳에 들어갈 수 있다고 생각해?”강지혁이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임유진의 발이 그대로 멈춰 섰다. 그리고 잠시 생각하더니 얘기했다.“그럼... 경찰이랑 얘기해서 나를 데리고 들어가라고 할게.”“그렇다면 내가 장담하는데 100% 못 들어가.”강지혁은 그저 미소를 지으며 천천히 임유진 앞으로 다가왔다.마치 아직 철들지 않은 아이에게 얘기하듯 말했다.“백연신이 어떤 사람인지 알아? 그 사람에게는 누나가 한지영 씨를 만나지 못하게 할 방법이 백 가지는 넘을걸.”임유진은 당연히 백연신이 어떤 사람인지 몰랐기에 그저 간절하게 눈앞의 강지혁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강지혁은 설명하며 얘기했다. “백연신은 원래 백씨 가문의 사생아였어. 그래서 해외로 내쳐졌지. 그의 아버지는 아들이 수두룩했을 뿐만 아니라 적자도 두 명이나 있었어. 그러니 사생아가 얼마나 많은지는 얘기 안 해도 알 거야. 그런 사생아 중 하나였던 백연신이 어떻게 지금의 위치에 오르게 된 것 같아?”임유진은 마음이 무거워졌다. 강지혁이 몇 마디 하지 않았지만 그녀는 백연신이 어떤 사람인지 알 것 같았다.사생아
돈도 없는 임유진에게 자본이라곤 더 없었다.임유진이 몇 해간 배운 것들이 강지혁에겐 더 아무런 쓸모가 없을 것이다. GH 그룹 변호사팀에 그녀보다 경력이 많은 사람은 많고도 많을 것이다.그녀에게 남은 건 그녀 자신뿐이었다.아무 이름이 없는 자신이 그녀가 가진 전부였다.임유진은 시선을 아래로 향한 채 자세를 낮추더니 그대로 강지혁 앞에 무릎을 꿇었다.“제발 부탁이야. 나 백연신 좀 만나게 해줘. 내 눈으로 직접 지영이 만나보고 싶어.”강지혁은 까만 눈동자로 바닥에 무릎을 꿇은 임유진을 노려봤다. 표정은 놀라움과 분노가 섞여있었다...“너 지금 네가 무슨 짓 하는지 알고 있어?”강지혁은 임유진을 노려보며 말했다. 마음속에서 파도가 일렁이는 것 같았다.그는 잘 알고 있었다. 그녀의 마음속에 늘 그녀만의 자존심이 있음을 말이다. 아무리 누가 그녀를 나무란다 해도 그녀는 늘 이미 짓밟힐 대로 짓밟힌 그녀만의 작은 자존심을 지키려고 했다.그렇지 않고서는 계속 강지혁을 그렇게 거절하지 않았을 것이다.하지만 임유진은 지금 한지영을 위해 그에게 무릎을 꿇었다. 그렇다면... 그녀에게 한지영은 자신의 자존심보다 더 중요하다는 게 아닐까?“알아.”그녀는 머리를 수그린 채 아무런 망설임도 없이 말했다.“지영이 만나게만 해준다면, 지영이 무탈하게 지켜준다고 약속하면 어떤 요구를 하든 받아줄게.”이게 그녀가 걸 수 있는 유일한 조건이었다.강지혁은 그녀를 계속 노려보고 있었다. 하지만 강지혁의 눈에는 자기 자신도 알아채지 못한 억울함이 보였다.“만약 내가 싫다고 하면?”강지혁의 목소리는 얼음처럼 차가웠다. 임유진은 몸을 바르르 떨더니 천천히 시선을 그에게로 돌렸다.강지혁은 입을 앙다문 채로 그녀를 쳐다볼 뿐이었다.그녀의 안색이 점점 하얘지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크게 숨을 내쉬며 말했다.“그래, 알았어.”이렇게 말하고는 바닥에서 일어났고 방에서 나가 집 밖으로 향했다.그녀가 유일하게 바꿀 수 있는 것과 바꾸려고 해도 안 되면 직접 해결할 수밖에 없
임유진은 급하게 안전벨트를 하고는 믿기지 않는 듯한 눈빛으로 강지혁이 차를 운전해 강 씨 저택을 빠져나가는 것을 지켜봤다. 게다가 그의 차가 달리는 방향은 전에 전화를 걸어온 사람이 말한 백연신이 한지영을 데리고 간 곳임이 틀림없었다.그러니까... 지금 그녀를 데리고 그쪽으로 가겠다는 건가?하지만 지금 그의 표정은 구겨질 대로 구겨져 있었다. 작은 입술은 앙다물고 있었고 눈빛은 어둡기 그지없었는데 이는 그의 언짢은 기분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었다.임유진은 입을 열어 무언가를 말하고 싶었지만 잘못 말했다가 그를 더 자극할까 봐서 걱정이었다.결국 임유진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지금 제일 중요한 건 지영이를 만나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인지 알아내야 해. 그러다 강지혁의 기분이 조금 괜찮아지면... 고맙다고 해야지.’임유진이 속으로 이렇게 생각했다.차가 홍월동에 도착하자 경비가 막아섰다.“백연신 씨한테 전하세요. 강지혁이 만나자고 하는데 만날지 말지.”강지혁이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몇몇 경비들이 듣더니 경악스러운 눈빛이었다. 강지혁이라는 이름 석 자가 S시에서 어떤 의미인지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하지만 아무리 경비들이 강지혁을 모른다 해도 강지혁이 갖고 온 차는 벤틀리였다. 차를 아는 사람이라면 다 알아볼 수 있는 외제 차였다. 20억을 호가하는 차인데 일반인이 타고 다닐 차는 아니었다.경비 중 한 명이 그들의 팀장에게 연락하기 시작했다...한편, 홍월동 별장에서 한지영은 조급한 얼굴로 눈앞의 남자를 노려보고 있었다. 벌건 대낮에 자신을 차로 납치한 것도 모자라 이렇게... 핸드폰을 뺏고 전원을 끌 줄은 몰랐다.말하지 않아도 한지영은 임유진이 얼마나 걱정할지 알 수 있었다. 하지만 그녀에게 전화를 걸려고 해도 방법이 없었다.지금으로서는 핸드폰을 다시 손에 넣을 방법이 없었다.임유진뿐만 아니라 한지영의 부모님도 이렇게 늦게까지 집에 돌아가지 않았으니, 전화할 수도 있는데 핸드폰이 꺼졌다고 나오면 부모님도 엄청나게 걱정하실 것이다.한지영은
‘그걸 말이라고.’한지영은 지금 아주 조급한 상태였다. 그리고 지금은 이 사람이 도대체 언제 자신을 놓아줄지 알 수 없었다.“친구랑 부모님 걱정하게 하고 싶지 않아요.”한지영이 대답했다.이 말은 마치 백연신의 금기라도 건드린 듯 눈빛이 확 차가워지더니 입가에 냉소가 걸렸다.“걱정할까 봐 두렵다고? 그럼, 그때 내가 걱정할 거라고는 생각 못 한 거야?”한지영이 멈칫하더니 켕기는 게 있는 듯한 표정이었다.“나는... 나는 급한 일이 있어서...”“급한 일?”백연신이 콧방귀를 끼었다.“급한 일이라는 게 귀국해서 친구 재판 도와주는 건가? 귀국하는 건 그렇다 쳐도 나한테 아무 얘기도 없이 그렇게 가는 게 어딨어? 아니면... 처음부터 어쩔 수 없이 나랑 쇼한 거야?”한지영도 자신이 잘못한 걸 알고 있었다. 그때 해외로 여행을 갔다가 곧 다니게 될 학교를 참관하는데 백연신을 우연히 마주치게 되었다.그때는 둘 사이가 어떻게 될지 생각해 본 적이 없었고 그저 자연스럽게 동행자가 된 타지에서 만난 동포라고만 생각했다.백연신은 한지영을 데리고 그 지역의 관광명소를 돌아다녔고 그 지역 특유의 먹거리를 먹으러 다녔다.그 며칠간 한지영은 꽤 즐겁게 보냈다. 귀국해서 유학 수속만 끝나면 다시 백연신을 찾으러 오려고 했다. 그때가 되면 그녀는 외국에서 4년간 머물 수 있게 된다.하지만 한지영은 백연신을 그저 친구라고만 정의했다. 돌이켜보면 설렌 적도 있었다. 생긴 게 너무 그녀 스타일이긴 했다. 예쁜 얼굴에 약간은 이상하고 부드러운 미감, 정교한 이목구비와 하얀 피부 그리고 까만 눈썹, 그저 이렇게 차갑게 쳐다보기만 해도 사람을 설레게 했다.‘이런 남자는 여자한테 직방인데!’한지영이 속으로 이렇게 구시렁댔다. 그해의 한지영도 하마터면 백연신에게 넘어갈 뻔했다. 하지만 다행히 뒤에 정신을 차렸고 설렘에서 그쳤을 뿐 다음 액션을 하지 않았다.한지영은 롱디를 할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다. 그녀는 백연신이 어릴 때부터 외국에서 지내는 걸 알고 있었다. 하지만
임유진은 갑작스러운 소민준의 등장에 깜짝 놀랐다.오늘 장례식 참석 목록에 소씨 가문은 없었다. 그런데도 소민준이 이렇게 들어와 있다는 건 이곳 직원을 매수했던가 참석 인원에게 간절히 부탁한 게 틀림없다.소민준의 뒤로 소민영도 다리를 절룩거리며 다가왔다.“그런데 솔직히 우리 오빠한테 감사해야 하는 거 알죠? 오빠가 헤어져 주지 않았으면 강지혁 씨랑 결혼하지도 못했을 거 아니에요. 안 그래...”“소민영!”소민준은 소민영이 쓸데없는 소리로 임유진의 심기를 건드릴까 봐 크게 호통쳤다.“빨리 유진이한테 사과해!”그러고는 임유진을 바라보며 말했다.“유진아, 미안해. 민영이가 철이 없는 거 너도 알잖아. 그리고 다시 한번 사과할게. 정말 미안해. 나나 우리 집안이나 너한테는 미안한 마음뿐이야. 한 번만 봐주라... 제발...”임유진은 그 말에 문득 일전 강지혁이 진씨 가문을 상대하려 했던 것이 떠올랐다.소민준이 장례식까지 찾아와 이렇게 비는 걸 보면 아마 진씨 가문을 건드리는 동시에 소씨 가문도 건드린 것 같다.“사실 나도 그때 너 그렇게 보내고 마음이 편치 않았어. 특히 네가 억울했다는 게 밝혀진 뒤로는 더더욱. 만약 내가 그때 널 위해서 진실을 밝히려고 했으면 네가 그런 고생은 하지 않아도 됐을 거야. 정말... 너를 볼 면목이 없어.”소민준의 얼굴에는 후회의 감정이 잔뜩 서려 있었다. 게다가 눈시울까지 붉어진 것이 아마 다른 여성들이 봤으면 그가 잘못한 게 무엇이든 바로 용서해주려고 했을지도 모른다.하지만 임유진은 아니었다. 그녀는 그의 열연에도 표정 하나 변하지 않았다.그녀는 당시 진세령의 옆에 딱 붙어 서서 그녀의 손톱이 하나하나 뽑히는 걸 그저 지켜봤을 뿐만 아니라 피가 흥건한데도 표정 하나 변하지 않았던 소민준의 모습이 여전히 눈앞에 선했다.심지어 그는 고통스러워하는 그녀를 보며 제일 후회되는 일이 바로 그녀와 함께했었던 일이라고까지 했다.그렇게도 차갑고 태도가 손바닥 뒤집듯 바뀌는 남자인데 임유진이 지금 그의 아련한 얼굴을 좀
강현수의 시선이 너무 지독하게 한곳에 꽂혀있던 탓인지 조문객들이 하나둘 이쪽을 쳐다보며 수군거리기 시작했다.“강현수, 뭐 할 말 있어?”그때 강지혁이 임유진의 손을 잡으며 강현수를 노려보았다. 꼭 이 여자는 내 것이니 이만 꺼지라는 것 같았다.강현수는 잘 포개져 있는 두 사람의 손을 가만히 바라보더니 결국 끝까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시선을 떼고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한은정은 그 광경에 그제야 안도한 듯 표정이 풀어졌다.물론 안도한 건 한은정뿐만이 아니었다. 임유진 역시 다행이라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걱정하지 마. 아무 일도 없을 거야.”강지혁의 목소리가 귓가에 낮게 울려 퍼졌다. 그 소리에 임유진이 고개를 옆으로 돌리자 강지혁이 그녀의 두 눈을 바라보며 계속해서 말을 이어갔다.“오늘은 할아버지 장례식이라 강현수도 뭔 짓을 하지는 않을 거야. 여기서 일을 벌이면 그건 집안 간의 대립으로 이어질 테니까.”강지혁은 잠깐 머뭇거리더니 이내 임유진의 손을 더 꽉 잡았다.“강현수도 알 거야. 자기한테는 이제 그 어떤 기회도 없다는 걸.”그 뒤로 장례식은 순탄하게 진행됐다.임유진은 큰 배를 손으로 지탱하며 계속해서 강지혁의 곁을 지키다 조문객들이 조금 빠지고 나서야 밖에 있는 휴식 구역으로 가 휴식을 취했다.배 속의 아이들도 오늘은 분위기가 무거운 날인 걸 아는지 작은 태동만 있을 뿐 크게 그녀를 불편하게 만들지는 않았다.임유진은 의자에 앉아 습관적으로 자신의 배를 어루만지며 아이들에게 오늘 있었던 일들을 얘기해주었다.그때 그녀의 곁을 지키고 있던 경호원 몇몇이 부산스럽게 움직이기 시작했다.임유진이 고개를 돌려보니 멀지 않은 곳에 강현수가 서 있는 것이 보였다.경호원은 그가 임유진의 곁으로 다가오지 못하게 적당히 거리를 두고 그를 제지했다.“나한테 뭐 할 말 있어요?”임유진이 먼저 물었다.강현수는 임유진의 얼굴을 보며 방금 그녀가 배 속의 아이들과 다정하게 얘기를 나누던 장면을 떠올렸다.무척이나 낯선 모습이었지만 그
게다가 이제는 강문철도 없으니 임유진이 강씨 가문이 안주인이라는 건 그 누구도 반박할 수 없는 사실이 되었다.또한 임유진은 임신까지 했으니 아이들이 무사히 태어나면 그때는 그 누구도 그 자리를 감히 탐낼 수 없게 된다.장례식에 참석한 사람들 모두 그 사실을 인지하고 있기에 강지혁을 대하는 것처럼 그녀를 대했다.임유진은 강지혁의 아내로서 줄곧 강지혁의 곁에 있었다.강씨 가문은 S 시에서 가장 뿌리가 깊고 또 유명한 가문이라 장례식장도 컸고 조문객들도 훨씬 많았다.강지혁은 임유진이 무리라도 할까 봐 몇 번이나 그녀에게 이만 쉬라고 했지만 임유진은 고개를 저으며 계속해서 그의 곁을 지켰다.“나 아직 괜찮아. 진짜 힘들면 너한테 얘기할게. 나도 내 몸 귀한 줄 알아. 그러니까 걱정하지 마.”임유진도 자신이 아이셋을 가진 임산부라는 사실을 잘 인지하고 있었다.그때 조문객들이 입구를 바라보며 강현수의 이름을 불렀다.이에 임유진은 살짝 움찔하더니 저도 모르게 시선을 돌려 입구 쪽을 바라보았다.그러자 익숙한 남자의 실루엣이 천천히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는 것이 보였다.강현수와 마지막으로 본 것도 이제는 몇 달 전이었다.한때는 생사를 함께 했던 친구였는데 결국에는 썩 유쾌하지 않은 방식으로 헤어지게 되었다.강현수는 오늘 부모님과 함께 장례식에 참석했다.임유진이 그를 바라봤을 때 그의 시선 역시 임유진에게 닿아있었다.강현수는 임유진을 보자마자 옆으로 늘어트린 손을 살짝 움켜쥐었다.그토록 오래 찾아 헤맸던 사람을, 오랜 기간 마치 습관처럼 떠올렸던 사람을 그는 번번이 놓쳐버렸다.임유진과 다른 방식으로 다시 시작할 수도 있었는데 그는 그 가능성마저도 자기 손으로 부숴버렸다.그 결과 그녀는 다른 남자의 아내가 되었고 다른 남자의 아이를 임신했으며 지금 그 남자의 곁에 서 있게 되었다.강현수는 이제 영원히 그녀 곁에는 있을 수 없게 되었다.강현수네 가족이 강지혁과 임유진의 앞으로 다가왔을 때 강현수는 위로의 말을 건네는 부모님과 달리 아무 말도 하지
어쩌면 강지혁은 줄곧 할아버지의 사랑을 받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그 어린 나이에 아버지를 잃고 돌아온 그에게 유일한 버팀목이라고는 강문철밖에 없었으니까.“나는 솔직히 네 할아버지가 고마워. 혁이 너를 이렇게 멋있게 키워줬잖아. 그리고 나랑 만나게 해줬고.”임유진은 계속해서 그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을 이어갔다.“혁아, 네가 원하는 가족 간의 사랑은 앞으로 내가 줄게. 그리고 우리 아이들도 줄 거야.”그 말에 강지혁의 눈동자가 흔들렸다.임유진은 모든 걸 알고 있었다. 그가 무엇을 가장 원하는지 이미 다 알고 있었다.“아까 네가 그랬지? 사람마다 중요하게 여기는 게 다 다르다고. 그럼 너는? 네가 중요하게 여기는 건 뭔데?”강지혁이 임유진의 체향을 들이마시며 물었다.그녀의 냄새를 맡고 있으면 늘 이렇게 마음이 진정되고 몸이 편안해졌다.“나?”임유진은 그 말에 잠시 생각하다가 답했다.“내가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건 혁이 너랑 우리 아이들이야.”“유진아, 나는 욕심이 많아. 나는 너를 그 누구와도 나누고 싶지 않아. 그게 우리 아이들이라고 해도 나는 싫어. 나는 내가 네 마음속 1순위였으면 좋겠고 너한테 가장 중요한 사람이었으면 좋겠어.”강지혁의 말에 임유진이 눈을 깜빡였다.설마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아이들을 질투하는 건가?“혁아, 너는 내 마음속 1순위야. 물론 아이들도 너무 중요하고 소중하지만 너랑은 결이 조금 달라. 혁이 너는 나한테 유일무이한 존재잖아.”임유진은 두 손을 둘러 가볍게 강지혁을 끌어안았다.이미 배가 불러올 대로 불러와 완전히 꼭 끌어안지는 못했지만 싸늘한 방 공기를 녹이기에는 충분했다.“내가 너한테 유일무이한 존재라고?”“응. 널 대신할 사람은 그 어디에도 없어. 물론 아이들을 낳고 진정한 엄마가 되면 어쩔 수 없이 아이들에게 더 신경을 쓰고 더 관심을 쏟을 수밖에 없겠지.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네가 중요하지 않은 건 아니야. 이건 장담해. 그리고 네가 원하면 네가 원하는 방식대로 더 많이 널 사랑해줄게. 혁아,
별채로 가는 길에는 늘 조명이 켜져 있기에 어두운 저녁이라도 전혀 무섭지 않았다.임유진이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 보니 강지혁이 방 한가운데 멀뚱히 서 있는 것이 보였다.강지혁은 불빛을 받으며 시선을 내린 채 바로 앞에 있는 냉동관을 그저 가만히 바라만 보고 있었다.“혁아.”임유진은 그를 부르며 천천히 옆으로 다가갔다.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강지혁은 상념에서 빠져나와 고개를 돌렸다.“오지 말라니까. 여기는 나 혼자 있으면 돼.”“너랑 같이 있고 싶어서 왔어.”임유진은 강지혁의 바로 앞에 서서 그의 볼을 매만졌다.지금은 1월이라 날씨가 무척이나 추웠다. 게다가 지금은 밤이고 별채 쪽에는 보일러도 없었기에 바깥과 거의 비슷할 정도로 추웠다.“오늘 밤도 여기 있을 거야?”임유진이 물었다.“응. 그래도 날 키워주셨으니 할 도리는 다해야지. 내일 할아버지 장례식에 사람들 많이 올 거야. 너는 몸이 불편하니까 가지 말고 그냥 집에 있어.”“출산할 시기가 임박한 것도 아닌데 뭐. 내일 할아버지 장례식에 나도 참석할 거야. 만약 몸이 불편하거나 하면 바로 너한테 얘기할게.”강지혁은 그 말에 임유진의 손을 살짝 잡았다.“너한테는 좋은 기억 하나 없는 사람이잖아. 그런데 왜...”“네 할아버지잖아. 네 유일한 가족이잖아. 그러니까 아무리 나를 마음에 들지 않아 했어도, 아무리 끝까지 나를 손주며느리로 받아들이지 않았어도 나는 할아버지 가시는 길을 너와 같이 보내드려야 할 의무가 있어.”다른 건 없었다.그저 강지혁의 어린 시절을 곁에서 지켜줬다는 사실만으로도 임유진은 충분히 감사했다.강지혁은 그 말에 그녀의 손을 조금 세게 쥐었다.“할아버지가 마지막에 한 말은 신경 쓰지 마. 그 말은 그냥...”“알아. 네 할아버지는 그저 누군가를 깊게 사랑하는 것으로 행복한 결과를 낳을 거라는 걸 믿지 못하시는 분이었던 거지. 네 증조할아버지와 증조할머니 일도 있고 네 아버지 일도 있어서 많이 무서우셨을 거야. 너도 나중에 불행하게 될까 봐.”임유진이 말했
강지혁은 마치 강문철에게 자신이 임유진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보여주려는지 조금 격앙된 목소리로 얘기했다.강문철은 그 말에 눈동자를 돌려 자신의 유일한 손주를 노려보았다. 그러다 몇 초 후 이제는 모든 게 다 피곤한 듯 천천히 눈을 감으며 입을 열었다.“우리 집안에서... 여자한테 미친 인간 치고... 멀쩡한 사람을 못 봤다. 네가... 계속해서 이러면 너도 언젠가는...”강문철의 목소리가 점점 작아지는가 싶더니 이내 옆에 있던 종합모니터에서 삐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임유진은 그 소리에 강문철이 세상을 떠났다는 것을 바로 알았다.누군가의 생명이 바로 눈앞에서 멎었다.조금은 무서웠던 노인이, 강지혁의 유일한 가족이었던 노인이 이렇게 세상에서 사라졌다고 생각하니 어쩐지 모든 게 다 비현실적으로 다가왔다.강지혁은 삐 소리가 들린 뒤로 임유진의 손을 꽉 잡았다. 그렇게 계속 힘을 주다가 임유진의 입에서 아프다는 소리가 들리고서야 비로소 정신을 차리며 손을 놓아주었다.“미안. 아팠지?”강지혁은 어느새 빨개진 그녀의 손을 다시 잡으며 초조한 눈길로 물었다.“괜찮아. 그것보다 할아버지...”“응. 가셨어.”강지혁의 얼굴은 가족을 잃은 사람 같지 않게 무척이나 평온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정말 아무런 감정도 없는 게 아니라는 걸 임유진은 알고 있다.아무리 살가운 사이가 아니었어도 강문철은 강지혁의 할아버지고 유일한 가족이었다. 강선우가 죽은 뒤로 그의 곁을 지켜줬던 유일한 사람이었다.강지혁은 몸을 돌려 편히 잠든 강문철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았다.그리고 임유진은 그런 강지혁의 옆에 서서 그의 손을 꽉 잡아주었다....강문철의 장례식은 3일 뒤로 정했다.그 3일 동안 시신은 냉동관에 넣은 채 강씨 저택의 별채에 두기로 했다.그리고 그 3일 동안 강지혁은 그 어떤 외부인도 별채에 들이지 않았다.별채는 강씨 가문 사람 외에는 허락하지 않는 특별한 곳이었으니까.강선우가 죽었을 때도 그의 시신은 잠시 이 별채에 놓여 있었다. 그리고 지금은 그의
강지혁은 임유진의 고집에 결국 알겠다며 그녀와 함께 집에서 나와 병원으로 향했다.병원에 도착한 후 강지혁은 뒤따라온 경호원에게 임유진의 곁을 맡기고 혼자 병실로 들어갔다.안으로 들어가 보니 빼빼 마른 강문철이 흰색 병상 위에 가만히 누워있는 것이 보였다.한 시대를 주름잡았던 남자도 병마와 세월 앞에서는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었다.강문철은 강지혁이 안으로 들어온 것을 보더니 마지막 힘을 쥐어짜 입을 움직였다.“왔... 니...”“네, 저 왔어요.”강지혁이 곁으로 다가오며 대답했다.사실 강지혁은 강문철에게 대단한 가족 간의 정은 느끼지 못했다.실제로 강문철은 강지혁이 할아버지에 대한 애정을 느낄만한 행동을 보여주지 않았으니까.강문철은 언제나 강지혁을 자신의 뒤를 이어 강씨 가문의 모든 것을 물려받을 하나의 장기 말로 여겨왔다. 물론 그 장기 말도 쓸모가 없었다면 진작 버렸을 것이다.“이제는... 강씨 가문의 모든 게 네 손에... 달렸다. 만약... 네가 가문을 망하게 하면... 가만두지 않을 거야.”강문철이 숨을 몰아쉬며 힘겹게 말을 내뱉었다.“할 말은 그게 끝이에요?”강지혁이 강문철을 빤히 바라보았다.이에 강문철은 탁한 눈동자를 옆으로 굴려 병실 문 쪽을 바라보며 말했다.“임유진... 그 아가씨... 밖에 있지? 들어오라고 해...”그 말에 강지혁의 눈썹이 꿈틀거렸다.“유진이 건드릴 생각하지 마세요.”“이 꼴로... 내가 뭘 할 수 있을 것 같으냐? 어차피... 그 아가씨 옆에는... 네 사람 천지일 텐데.”강지혁은 그가 두 손으로 직접 키운 손주이자 가문의 후계자이기에 강지혁의 생각 같은 건 이미 훤히 꿰고 있었다.강지혁이 움직이지 않고 가만히 있자 강문철이 다시 입을 열었다.“그저... 마지막으로 해줄 얘기가... 있어서 그러는 것뿐이다...”호흡이 점점 가빠지고 안색도 창백해진 것이 정말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듯했다.강지혁은 잠깐 고민하다가 결국 발걸음을 옮겨 병실 밖으로 나갔다. 그러고는 곧바로 임유진의 손을
“그래? 그럼 만약... 내가 너한테 상처를 줘도 너도 똑같이 나 안 볼 거야? 내가 아무리 용서해달라고 빌어도 나 용서 안 해줄 거야?”강지혁은 목구멍을 쥐어짜는 듯한 목소리로 한마디 한마디 힘겹게 내뱉었다.이에 임유진은 몸을 돌려 이해가 안 간다는 얼굴로 강지혁을 바라보았다.“혁아, 너 대체 왜 그래? 요즘 따라 너무 불안해 보여. 무슨 일 있는 거야?”강지혁은 자신의 불안해 보인다는 말에 고개를 푹 숙였다.확실히 그는 요 며칠 줄곧 불안해하고 있었다.탁유미와 이경빈의 일을 가까이에서 지켜보며 자신과 임유진의 결말도 그들과 똑같을까 봐 불안해하고 있었다.“혹시 방금 내가 한 말이 널 불안하게 만들었어? 혁아, 내가 언니를 이해한다고 했던 건 소민준과의 일이 생각나서 그랬던 거야. 네가 괜한 생각을 할 게 아니라고. 네가 나한테 상처 줄 리가 없잖아. 그리고...”임유진은 손을 들어 조금 우울해 보이는 강지혁의 눈가를 부드럽게 매만졌다.“전에 내가 말했잖아. 네가 정말 나한테 미안해야 할 일을 했다고 해도 울면 봐주겠다고.”그녀는 강지혁의 눈에 담긴 우울함이 사라질 수 있게 일부러 환히 웃으며 얘기했다.그러자 그 말을 들은 강지혁의 눈에 조금씩 빛이 들어오기 시작했다.“유진아, 너를 향한 내 감정은 언제나 그대로일 거야. 앞으로 무슨 일이 생기든 절대 변하지 않을 거야.”강지혁은 임유진의 오른손을 들어 자신의 심장에 가져갔다.“그러니까 너도 약속해. 날 영원히 사랑하겠다고. 절대 변하지 않을 거라고. 약속해.”임유진은 그 말에 눈을 깜빡였다.탁유미와의 대화에서 사람의 감정은 언젠가는 변한다는 말에 깊이 공감했는데 눈앞에 있는 남자는 자신의 감정은 변하지 않을 거라고 하고 있다.소민준과의 관계에서 질릴 대로 질려 그에게 모든 감정이 사라진 건 사실이다. 하지만 지금 눈앞에 있는 남자를 사랑하고 있고 그와 영원히 하고 싶은 것 또한 사실이다.“응, 영원히 너만 사랑할게. 절대 변하지 않을게. 약속해.”임유진은 진지한 얼굴로 그에
임유진은 한지영이 정신을 차린 모습을 떠올리면 마음이 아프다가도 그녀가 활기를 되찾아줘서 참으로 고마웠다.한지영은 백연신과 그렇게 헤어진 후 자포자기하는 것이 아닌 적극적으로 치료에 임하며 회복에 힘썼다. 심지어 며칠 전에는 미소를 지으며 이런 말까지 했다.“고작 남자랑 헤어진 것뿐인데 뭐. 연애가 다 이런 거 아니겠어? 사랑했다가 또 헤어졌다가. 그래서 결혼까지 가는 게 기적이라는 말도 있잖아. 열렬히 사랑했으니 그거로 난 됐어. 혹시 알아? 퇴원한 뒤에 진정한 내 운명이 나를 찾아올지.”“다행이네요.”탁유미는 한지영의 말을 전해 듣고 잔잔한 미소를 지었다.“유진 씨랑 지영 씨는 나처럼 이러지 말고 정말 행복했으면 좋겠어요.”그녀는 자신의 인생에서 더 이상의 사랑은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대화를 나누던 임유진과 탁유미는 병실 밖의 누군가가 그들의 대화를 다 듣고 있는 것을 몰랐다....임유진은 탁유미에게 인사한 후 강지혁과 함께 강씨 저택으로 돌아왔다.찌뿌둥한 몸을 이끌고 2층으로 올라가려는데 강지혁이 뒤에서 그녀를 품에 끌어안았다.“왜 그래?”갑작스러운 포옹에 임유진이 물었다.사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강지혁은 오늘따라 말수가 무척이나 적었고 시선은 거의 창밖에 고정하다시피 했다.그 모습에 임유진이 몇 번이나 무슨 일 때문에 그러는지 물었지만 강지혁은 그때마다 아무것도 아니라며 대답을 피했다.“그냥... 갑자기 안고 싶어져서.”강지혁은 낮게 중얼거리며 아까 병원에서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그는 이경빈을 따라 탁유미의 병실 앞으로 왔다가 비스듬히 열린 문틈 사이로 임유진과 탁유미의 대화 내용을 들었다.탁유미가 자신에게 상처 준 사람은 다시 받아줄 생각이 없다고 했을 때 이경빈은 휘청하며 그대로 주저앉았고 입을 틀어막으며 흐느끼는 소리가 새어나가지 않게 했다.그 순간만큼은 우는 것조차도 그에게는 허락되지 않았다.“맨날 안으면서 아직도 부족해?”임유진이 실소하며 물었다.“응. 부족해.”강지혁에게는 어쩌면 평생 부족할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