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정호의 표정이 굳더니 그대로 화를 냈다.“이 불효녀 같으니라고! 그때도 감옥에 가서 우리 집안의 얼굴에 먹칠을 해놓고 지금도 우리를 못살게 굴다니!”임원 층의 자리까지 올라가기 위해, 임정호가 얼마나 많은 인맥을 동원하고 얼마나 많은 돈을 퍼부었는지 모른다.하지만 지금 갑자기 일개 직원이 되었으니 얼마나 억울하겠는가.방미령도 당장이라도 나가서 임유진을 갈기갈기 찢어 죽일 것처럼 화를 냈다.“아빠, 엄마. 너무 화내지 마요. 언니는 아직 강지혁이 도와주고 있으니까 막 나가면 안 돼요. 어떻게 손을 봐줄지 생각은 해봐야죠.”임유라가 그들을 말렸다. 그녀도 임유진 때문에 피해를 보았기에 기분은 좋지 않았다.임정호와 방미령은 그것도 맞다고 생각하며 얘기했다.“그럼 지금은 어떡해? 이렇게 피해를 받고만 있으라고?”“제가 더 생각해 볼게요.”임유라가 대답했다. 그녀는 어떻게 임유진에게 복수할지 곰곰히 생각해봐야 했다. 임유진이 강현수의 마음을 차지하게 할 수는 없었다.그렇다면 앞으로 강지혁이 임유진을 차버렸을 때, 임유진은 임유라의 자리를 대체하여 강현수의 여자친구가 될지도 몰랐다.그런 일이 일어나게 해서는 절대 안 됐다!...한지영은 임유진을 불렀다. 그리고 동료한테서 받은 자료를 임유진에게 건네주었다. 증인의 이름과 현재 거주지, 직업 그리고 그의 가족의 이름도 있었다.그리고 증인이 이름을 고쳤었던 기록이 있었다. 성은 여전히 갈 씨였지만 이름은 바뀌었다.“그때 네 사건이 발생했을 때, 저 사람은 그저 평범한 직원이었어. 여자친구도 있었는데 남자가 집을 사지 못해서 헤어졌지. 하지만 네 사건이 끝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이름을 바꾸고 S시를 떠나 해성시에 꽤 좋은 집을 샀어. 그것도 일시불로, 모두 10억을!”“이 자료들은 어디서 난 거야? 동료랑 물어본 거야?”임유진은 조금 의문스러웠다. 이 자료에서 보면 어떤 내용은 그냥 물어본다고 해서 알 수 있는 내용이 아니었다. 심지어 사생활적인 것도 있었다. “동료는 대충 물어본 거고,
삶이 힘들었기에 그녀는 돈의 중요성을 더욱 깨닫게 되었다. 그래서 이러는 건가?그녀의 표정을 본 한지영이 갑자기 임유진을 품에 앉았다.“유진아, 몇 년간 나는 널 도와주지 못해서 후회되었어. 네가 억울하다는 것을 알면서 네게 유리한 증거도 찾지 못하고 사건도 해결하지 못했지.”그녀가 한 글자씩 뱉어내는 이 말은 그녀가 마음속에 오랫동안 감춰두고 있던 말이었다.“네가 감옥에 있을 때도 면회를 가서 널 위로해 주는 것 외에 다른 건 하지 못했어. 난 정말 이런 느낌이 싫어. 지금은 겨우 증거를 찾을까 하는데, 널 도와서 사건을 뒤엎을 수 있다면 난 뭐든지 할 거야. 그러니까 다른 건 신경 쓰지 마. 나중에 갚는다거나 그런 소리도 하지 말고.”한지영의 목소리에는 죄책감이 가득 묻어났다. 그리고 그대로 임유진의 고막을 두드렸다.“지영아, 내가 감옥에 있을 때 네가 자주 와서 봐주지 않았다면, 내 사건을 위해서 애써주지 않았다면 나는 버틸 용기가 없었을 거야. 그러니까 네가 해준 말이 쓸데없는 위로라고 생각하지 마. 그 말들이 나에게 살아갈 용기를 준 거니까.”임유진이 한지영을 꼭 껴안으며 말했다.두 여자의 눈시울이 다 붉어졌다.얼마 지나지 않아 감정을 가라앉힌 후, 한지영이 얘기했다.“내가 사설탐정한테 자료를 더 찾아보라고 할게. 혹시 유용한 자료를 찾을지도 모르니까 일단은 가만히 있어. 그 사람을 방심하게 만들어야 해. 우리가 지금 가서 왜 거짓 증언을 했냐고 물어도 인정하지 않을 거야.”임유진이 고개를 끄덕이며 친구의 말에 동의했다.3년 동안 억울하게 감옥살이도 했는데, 며칠을 기다리는 것쯤이야.임유진은 한지영이 준 자료들을 가방에 넣었다. 이때 한지영이 얘기했다.“오늘은 내가 운전해서 데려다줄게.”임유진은 살짝 머뭇거렸다.“너 혹시 아직도 강지혁네 집에서 살아?”한지영이 그제야 반응하며 물었다.“응.”그녀는 입술을 살짝 달싹였다. 어제의 강지혁이 깨물었던 부위가 살짝 아팠다. “앞으로 얼마나 더 있을 건데?”한지영이 물었다.
그녀는 차량번호도 앞 세 자리와 마지막 하나밖에 기억하지 못했다.임유진은 순간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이게 무슨 일인지. 차량의 사람들은 무슨 사람들인지. 왜 한지영을 데려가는 건지.한지영은 괜찮은 건지.이건 납치가 맞는가? 아니면...임유진은 핸드폰을 꺼내 그녀의 번호를 걸어보려고 했지만 또 현재 그녀의 상황을 생각하니 진짜 전화를 걸면 그쪽의 상황이 더욱 안 좋아질까 봐 걱정되었다.임유진의 손은 점점 떨려왔다. 마지막에는 핸드폰도 제대로 잡지 못할 만큼 손이 떨렸다.어렵게 경찰 신고 번호를 누른 그녀는 또 빠르게 지하 주차장 경비실에 갔다. 아까 그 차가 한유진을 데려가는 상황이 CCTV에 찍혔을 것이다! 한지영... 그녀에게 일이 생기면 절대 안 된다! 지금 임유진의 머릿속에는 그 생각뿐이었다. ...임유진의 전화를 받은 강지혁은 전화기 너머로 들리는 울음소리밖에 듣지 못했다.하지만 그 울음에 강지혁의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무슨 일이야? 말을 해!”“혁아, 나 좀 도와줘... 우리 지영이 좀 찾아줘... 제발 부탁이야. 우리 지영이...”임유진은 울면서 겨우 얘기했다. 경찰에 신고한 후 누구에게 또 얘기해야 하는지 몰랐다.하지만 그녀의 손은 저도 모르게 강지혁의 번호를 눌렀다. 그녀가 예전에 그에게 핸드폰을 사주며 만들어 준 전화번호였다.강지혁의 미간이 찌푸려졌다.“한지영 씨한테 무슨 일이 일어난 거야?”“납치된 것 같아. 어디로 갔는지 모르겠어. 경찰... 경찰도 왔는데 지하 주차장의 CCTV가 고장나서... 혁아, 제발 도와줘. 우리 지영이 좀 찾아줘...”그녀는 말을 제대로 하지는 못했지만 끝까지 했다.강지혁은 현재 임유진이 어떤 마음인지 상상할 수도 없었다. 평소에는 강지혁 씨라고 부르던 그녀가 지금은 “혁아”라고 부르는 것을 보니 멘탈이 나간 모양이었다.“지금 어딘데?”강지혁이 물었다.“나... 난 지금 경찰서 입구...”그녀가 울면서 대답했다. 그녀는 신고하고 간단한 기록을 한 후 떠나도 된다는 말
그녀의 몸이 바르르 떨렸다. 겨우 고개를 천천히 들어 올려 눈앞의 사람을 보고 있었다. 하지만 눈물에 젖은 눈동자는 초점을 잃은 듯했다. “혁아, 나 좀 도와서 같이 지영이 찾아주면 안 돼?”임유진은 그제야 정신을 차린 듯 빠르게 얘기했다.“경찰은 그저 신고 접수만 했어. 사람을 시켜 찾을 거라는데 언제 찾을 수 있는지는 모른대! 내가 그 차 번호를 기억할 수 있었으면 좋겠는데 왜 다 기억하지 못한 걸까.”그녀의 말투에서 죄책감이 묻어났다.강지혁은 임유진의 얼굴을 보았다. 이렇게 조급한 표정은 그녀의 외할머니께 문제가 생겼을 때 봤던 표정이다. 외할머니는 그래도 그녀의 혈육이지만 한지영은 아니었다. 하지만 임유진은 피가 섞이지 않은 사람을 위해서 이렇게까지 조급해질 수 있었다.그의 마음속에는 이유를 알 수 없는 질투심이 피어올랐다. 그녀를 이렇게 조급하게 만든 한지영에게 나는 질투였다. 만약 그였다면? 그에게 무슨 일이 생겨도 이렇게 조급해할 건가?“일단 돌아가자. 여기 추워.”강지혁이 얘기했다.“이거 봐, 손 차가운 거.”추운가? 그녀는 감각을 잃은 것 같았다. 그녀의 머릿속에는 어떻게 한지영을 찾아야 하는가 하는 생각뿐이었다.“그럼... 그럼 넌 한지영을 찾는 걸 도와줄 거야?”임유진이 확실한 대답을 원한다는 듯 물었다. 경찰은 기다릴 수밖에 없으나 강지혁은... 그가 도와준다면 빠르게 찾을 수 있을지도 몰랐다.그는 S시에 수많은 인맥과 자원이 있으니까.“일단 돌아가서 얘기해. 내가 도와준다고 해도 돌아가서 자세한 이야기를 들어야 할 것 아니야. 그 후에 또 사람들한테 연락을 돌려서 도와주고. 안 그래?”그가 얘기했다.“하지만 늦으면... 지영이가 위험할 수도 있잖아.”어슴푸레한 달빛 아래서, 그녀는 그렇게 물에 젖은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불안해 보이는 표정과 파리해진 얼굴을 보니 마치 여러 개의 바늘이 그의 심장을 찌르는 것 같았다.“제발, 지금, 지금 당장 사람을 시켜서 지영이를 찾아줘... 만약 지영이한테 무슨 일
답답함에 가슴이 먹먹했다. 딱 가슴 쪽에 무언가가 막혀서 내려가지도 않았고 뱉어내지도 못했다.강지혁이 언제 여자를 이리도 걱정했던가. 아마도 임유진이니, 오직 그녀에게만 이러는 것이다.강지혁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이 한숨은 어쩔 수 없이 그녀의 말을 들어주겠다는 뜻이었다. 그는 바로 핸드폰을 꺼내 전화를 걸었다.“사람 한 명 지금 어디 있는지 찾아줘. 그리고 안전한지도. 이름은 한지영. 오늘 오후에 어떤 차량에 납치되었대. 차는...”말하던 강지혁은 핸드폰을 임유진 앞에 가져다주며 얘기하라고 했다.정신을 차린 임유진이 얼른 얘기했다.“검은색 마이바흐예요. 차량 번호는...”그녀는 자신이 기억한 숫자를 다 얘기했다. 그리고 주차장의 위치, 몇 시에 발생했는지 등 디테일도 빠짐없이 얘기했다.임유진이 말을 마치자 강지혁이 또 핸드폰에 대고 얘기했다.“들었지? 얼른 이 사람이 어디 있는지 알아내.”통화를 끝낸 그는 또 임유진을 바라보았다.“됐지? 이제 제발 돌아가자.”그녀는 그제야 발을 옮겨 그의 차 앞으로 갔다. 강지혁은 조수석의 문을 열어주었고 그녀가 차에 탄 후 또 허리를 숙여왔다.놀란 임유진이 굳어버렸다. 그의 상반신이 임유진과 가까워지고 있었다. 그 아름다운 얼굴이 가까이 오더니 호흡마저 느낄 수 있을 정도의 거리가 되었다.그녀는 어쩔 줄 모르고 강지혁을 바라보았다. 얼마나 가까운지, 그의 기다란 속눈썹과 검은 눈동자, 높은 코의 날카로운 선, 지어 이마 앞의 잔머리까지 다 볼 수 있었다. 곧게 뻗은 코 아래는 그의 입술이었다. 그의 입술은 부정할 수 없을 만큼 예뻤다. 윗입술은 살짝 얇았는데 섹시한 느낌을 주었다. 그리고 이 입술이 말아질 때, 사람에게 이유 모를 압박감을 준다. 하지만 입꼬리가 올라가며 웃음을 지을 때는 또 그의 미소를 더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S시에서 가장 건드리면 안 되는 사람이 웃음을 지을 때는 얼마나 순진한 얼굴인지, 누가 알겠는가! 임유진의 시선이 계속해서 강지혁의 입술을 계속 쳐다보았다
강지혁은 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몸을 세우고 차 문을 닫은 후 다시 운전석으로 가 차에 시동을 걸었다.임유진은 차를 모는 강지혁을 보며 의외라고 생각했다. 평소에는 보통 운전기사분이 운전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가 차를 운전하고 있으니 임유진은 마침 그의 옆태를 구경할 수 있게 되었다.옆에서 보니 오관이 더욱 입체적으로 보였고 턱선도 더욱 날카로워 보였다. 곧은 콧대와 섹시한 입술까지. 지금의 그는 평소처럼 머리를 깔끔하게 올리지 못했다. 머리카락이 조금 흐트러진 모습이 마치 전에 그녀가 알던 혁이 같았다. 혁이... 이 호칭을 생각해 보니 복잡한 감정이 저도 모르게 북받쳤다. 아까 정신이 없어서 계속 그를 혁이라고 불렀다.혹시 그녀가 무의식 간에 혁이한테 도움을 청하면서 강지혁에게는 도움을 청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 아닐까?사실 혁이든지 강지혁이든지 다 그였지만. 지금 그녀를 도울 수 있는 유일한 사람도 그였다. 경찰에서 찾는다고 했지만... 그녀는 다른 사람들과 함께 직접 한지영을 찾고 싶었다. 사람 일은 어떻게 될지 모르는 거니까.빨리 한지영을 찾는 것이 좋을 것이다. 차가 신호등 앞에 멈춰서자 강지혁이 고개를 돌려 임유진을 보며 물었다.“왜? 왜 계속 그런 눈빛으로 봐?”그녀는 순간 놀랐다. 강지혁이 모르는 줄 알았지만 사실은 임유진이 그를 지켜본다는 것을 다 알고 있었다.“아무것도 아니야. 그냥... 오늘은 왜 네가 직접 운전하나 해서.”그녀는 말을 조금 더듬으면서 입을 열었다. 몰래 지켜보다가 딱 걸리니 왜인지 모르게 부끄러웠다.“그래? 직접 운전하는 게...”재미있다는 듯이 얘기하는 그는 더욱 집요한 시선으로 임유진을 쳐다보았다.그가 전화기 너머로 우는 그녀의 목소리를 듣고 평정심을 잃은 채 운전기사에게 얘기하지도 못하고 키를 잡고 운전했다는 것을 알려줘야 하나. “진짜 알고 싶어?”강진혁이 뜨거운 시선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다. 품에 토끼를 안은 것처럼, 임유진의 심장은 말을 듣지 않고 빠르게 쿵쿵 뛰었다. 그의
강지혁은 임유진의 눈에 다른 사람이 아닌 강지혁만 있었으면 했다.“알고 싶으면 나랑 같이 기다려. 내 사람들이 한지영 씨를 찾으면 바로 연락할 거니까.”강지혁이 얘기했다.이건 임유진에게 당연히 문제없었다. 잠깐, 기다린다고? 어디에서 같이 기다리는 거지? 임유진이 눈을 깜빡였다. 그리고 5분 후, 어디에서 같이 기다리는지 알 수 있었다.바로 강지혁의 방이었다.그의 방에 처음으로 들어온 것은 아니지만 처음으로 이어진 문으로 그의 방에 들어간 것이 아니라 그의 방문으로 걸어 들어간 것이었다.방에 들어온 강지혁은 바로 외투를 벗고 핸드폰을 꺼내 옆의 테이블에 놓았다. 임유진은 그의 핸드폰을 보고 깜짝 놀랐다. 그 핸드폰은 제일 처음 그녀가 강지혁에게 사준 30만 원밖에 하지 않던 낡은 특가 핸드폰이었다. 다른 일반인들이 쓰는 핸드폰도 이것보다는 훨씬 나을 것이다. 그런데 강지혁이 이 핸드폰을 항상 지니고 다닌 건가?그렇지 않으면 오늘 그녀가 전화를 걸었을 때 바로 받을 수가 없었다.그녀가 이 핸드폰에 대해 잘 보지도 못했을 때, 어느새 시야 구석에 있던 강지혁이 옷을 벗기 시작했다. 그러자 임유진의 얼굴이 순식간에 붉어졌다.“너... 너 왜...”“그냥 옷 갈아입는 건데.”강지혁은 눈썹을 치켜뜨며 그녀를 보았다.“누나도 나 옷 갈아입는 거 자주 봤잖아? 왜 지금은 부끄러워?”임유진은 갑자기 뜨끔했다. 전에 셋집에 살 때 강지혁이 옷을 갈아입는 것을 본 적이 있었다. 하지만 그건 그저 스웨터나 외투를 갈아입는 것이었다.안에 입는 옷들은 다 욕실에 들어가서 갈아입던 그였다.지금의 그는 윗옷을 벗어 얇은 셔츠만 남겼다. 더 벗는다면...그생각에 임유진은 저도 모르게 몸을 돌려 강지혁을 등지고 앉았다.어쩔 수가 없었다. 이곳은 그의 방이니 등 돌려 앉는 것은 임유진이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었다.그리고 그녀는 사락사락하는 소리를 들었는데 아마도 강지혁이 옷을 벗는 소리인 듯했다.그가 옷을 갈아입는 데 시간이 얼마나 걸리는 걸까.
강지혁은... 상체를 훤히 드러내고 있었다!“너...!”그녀의 얼굴은 부끄러워서 붉게 물들었고 두 눈을 꼭 감은 채 뜨려고 하지 않았다. 눈을 떴다가 보지 말아야 할 것을 보게 될까 봐 무서웠다.“누나, 눈 안 뜰 거야?”그는 여유롭게 얘기했다. 그 느긋한 말투는 마치 유혹처럼 들리기도 했다.임유진은 여전히 눈을 꼭 감은 채 얼굴을 붉히며 재촉했다.“너, 너 얼른 옷부터 입어!”“하지만 난 누나가 나를 봐줬으면 하는걸?”강지혁이 대답했다.“게다가 난 오늘 누나의 일도 도와줬는데, 누나는 날 보기도 싫은 거야?”그 말에 임유진의 몸이 굳었다. 그리고 입술을 잘근 씹었는데 전에 그가 깨문 상처 부위를 다치게 되자 저도 모르게 낮은 신음을 흘렸다.그러자 귓가에 강지혁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임유진은 그의 손가락이 그녀의 입술을 만지는 것을 느꼈다.“그거 알아? 아까 모습 꽤 귀여웠어.”귀엽다고?임유진이 제대로 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입술 위로 무언가가 닿았다. 바로 그의 입술이었다. 강지혁이 갑자기 임유진에게 키스했다.놀란 임유진이 두 눈을 뜨고 가까이 다가온 얼굴을 쳐다보았다. 하지만 임유진은 그의 얼굴을 보기도 전에 그녀를 잡아먹을 듯한 검은 눈동자를 마주하고 말았다. 마치 금방 피어난 꽃같이, 예쁜 모습으로 모든 사람의 영혼을 끌어당기고 있었다.“읍...”그녀가 입을 열고 뭐라고 얘기하려고 하자 키스가 더욱 격렬해졌다.임유진은 그 키스를 받아들이며 손을 그의 가슴 위에 올려놓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키스가 끝났고 임유진은 숨이 차서 얼굴이 빨갛게 된 채 숨을 몰아쉬었다.강지혁은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여유롭게 웃으며 얘기했다.“이렇게 해야 누나가 날 보는구나?”그녀는 놀라서 사레가 들렸다. 이 말에는 엄중한 착오가 있다. 하지만 임유진은 어떻게 반박해야 할지 몰랐다. 마침 눈을 다시 감으려는데, 강지혁이 얘기했다.“왜, 내가 도와줬는데 날 보는 것도 싫은 거야?”그녀는 입술을 달싹이다가 얘기했다.“옷을 제대로 입으
강지혁은 수저를 들고 그녀가 해준 음식을 하나둘 입에 넣었다.분명히 흔히 볼 수 있는 가정 요리고 손에 들고 있는 것도 포크나 나이프가 아닌 그저 숟가락과 젓가락일 뿐인데 상대가 강지혁이라 그런지 꼭 고급스러운 레스토랑에서 식사하고 있는 것 같았다.임유진은 원래 강지혁이 밥을 다 먹은 뒤에 오늘 있었던 일을 얘기하려고 했다. 하지만 강지혁이 밥을 먹으며 먼저 선수를 쳐버렸다.“오늘 하마터면 떨어지는 화분에 다칠 뻔했다는 얘기 들었어. 무사해서 다행이야. 내일부터는 경호원을 두 명 더 붙여줄게.”임유진은 그 말에 눈을 두어 번 깜빡이며 어리둥절해 하다 이내 남편이 강지혁이라는 것을 깨닫고 납득했다는 표정을 지었다.아마 일이 터지고 5분도 안 돼 바로 강지혁에게 보고가 들어갔을 테니까.“응, 알겠어.”임유진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누가 화분을 떨어트린 건지 알아봐 달라고 했어. 아직 따로 연락이 오지는 않았지만.”“청소부가 한 짓이야.”“청소부?”임유진이 깜짝 놀라며 물었다.“벌써 조사를 마쳤어?”“당연한 거 아니야? 네 일인데.”만약 임유진의 몸에 생채기라도 났으면 강지혁은 아마 이성을 잃고 건물 전체를 폭파하고 관계자들까지 다 처리해버렸을 것이다.강지혁은 갑자기 젓가락을 내려놓더니 임유진의 양손을 덥석 잡았다.그녀의 손가락은 여전히 삐뚤빼뚤했다.임유진의 손을 이렇게 만든 사람은 진세령이고 소민준은 당시 진세령의 곁에서 가만히 구경만 했다.강지혁은 임유진의 손을 매만지다 문득 1시간 전에 봤던 청소부의 피범벅이 된 두 손을 떠올렸다.그는 다른 사람의 손은 피가 나든 잔인하게 잘리든 아주 조금의 연민도 들지 않았다. 하지만 임유진의 손은 볼 때마다 가슴이 아프고 또 울컥했다.“왜? 왜 그렇게 봐?”임유진은 강지혁이 손가락을 뚫어지게 보는 게 불편한지 손을 뒤로 빼며 거두어들이려고 했다.그녀 역시 다를 것 없는 여자라 사랑하는 사람 앞에서는 자신의 좋은 것만 보여주고 싶었다.“내 손 안 예뻐... 보지 마.”임유진의 손
“그래...”강지혁이 낮게 읊조렸다.“그래야 할 거야.”고이준은 저도 모르게 소민준이 매우 가엽게 느껴졌다. 만약 임유진이 정말 소민준을 동정하면 그때는 지금 하고 있는 택배 기사 일도 못 하게 될지도 모르니까.“고 비서, 누가 저 여자한테 돈을 쥐여주고 유진이를 해할 계획을 세운 건지 알아내.”강지혁이 차가운 목소리로 지시했다.“네, 회장님.”고이준이 얼른 답했다.“그리고 S 시에서 제일 실력 좋은 변호사를 고용해서 유진이와 권건우 변호사 고소 건에 붙여. 김승수한테 지시를 내리는 다른 누군가가 있는 건 아닌지도 한번 알아보고.”고이준에게 김승수의 뒷조사를 맡긴 건 이유가 있었다.임유진이 강지혁의 와이프고 현 강씨 가문의 유일한 안주인인 걸 알고도 고소를 한 건 누가 봐도 이상했으니까. 상식적인 인간이라면 강씨 가문을 상대로 덤빌 리가 없다.게다가 김승수가 억울하다는 당시의 사건을 강지혁도 한번 훑어봤지만 임유진의 말대로 증거가 확실했고 결과 역시 납득 가능한 결과였다.즉 그렇다는 건 김승수에게 다른 목적이 있다는 것이다. 또 혹은 김승수를 뒤에서 조종하고 있는 누군가에게 다른 목적이 있을 수도 있고 말이다.하지만 이유가 뭐가 됐든 임유진을 건드린 이상 강지혁이 손을 놓고 있을 리가 없다. 그에게는 임유진이 목숨줄과도 같은 존재니까.“네, 알겠습니다.”임유진이 강지혁에게 있어 얼마나 중요한 사람인지 고이준은 너무나도 잘 알고 있다. 다만 요즘 따라 부쩍 이상한 위화감 같은 것이 느껴졌다.임유진을 대하는 강지혁의 태도가 꼭 기억을 잃기 전의 강지혁 같았기 때문이다. 꼭 기억을 다 되찾은 것처럼 말이다.강씨 저택.강지혁은 현관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가 마침 임유진과 두 아이들이 거실에서 동요에 맞춰 춤을 추고 있는 모습을 보게 되었다.현이는 흥분한 건지 얼굴이 빨개진 채로 깔깔거리며 춤을 추고 있었고 무뚝뚝하던 율이도 볼을 살짝 붉히며 어색하게 몸을 좌우로 흔들고 있었다.몸만 보면 썩 내키지 않아 하는 것 같지만 미소를 띠고
강지혁은 여자를 무섭게 노려보더니 이내 곁에 있는 경호원에게 지시를 내렸다.“두 번 다시 손에 뭘 들 수 없게 만들어놓고 경찰에 넘겨.”“네, 알겠습니다.”청소부는 그들의 대화에 얼굴이 새하얗게 질려버렸다.‘지, 지금 내 손을 부러트리려는 건가?’그녀는 이런 무서운 인간을 만날 줄 알았으면 차라리 경찰에게 잡히는 것이 더 나았겠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잘못했습니다! 다시는 안 그럴게요! 제가... 제가 알아서 경찰서로 가서 자수하겠습니다. 그러니까 제발...!”하지만 간절한 그녀의 부탁에도 강지혁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점점 더 얼굴이 차가워지기만 할 뿐이었다.사실 청소부는 양손만 부러지는 것에 감사해야 한다. 만약 그녀가 던진 화분으로 임유진이 큰 상처를 입었으면 그때는 양손은 물론이고 몸 전체가 너덜너덜해진 채 죽으니만 못한 삶은 살았을 테니까.“으아아악!!”그녀의 절규와 함께 강지혁은 유유히 현장을 빠져나왔다. 그리고 고이준도 곧바로 그의 뒤를 따라나섰다.바로 앞에 세워진 차량에 올라탄 후 고이준은 곧바로 강지혁에게 자료 하나를 건넸다.“소민준 씨의 지난 5년간 행적입니다. 몇 년 전부터 배달 기사 일을 하는 것으로 확인이 됐고 오늘은 우연히 건물 앞을 지나가다 사모님을 구한 것으로 보입니다. 사모님께서는 감사의 뜻으로 소민준 씨를 병원에 보냈고 손목 골절로 인한 치료 비용을 전액 다 부담해주셨습니다.”강지혁은 어둡게 가라앉은 얼굴로 수중의 자료를 훑어보았다. 차 안의 분위기는 그야말로 얼음장 같았다.“참 기막힌 우연이야. 안 그래?”그때 줄곧 입을 다물고 있던 강지혁의 입에서 뜬금없는 한마디가 흘러나왔다.“네... 네.”고이준은 식은땀을 흘리며 룸미러로 강지혁의 눈치를 봤다. ‘혹시 소민준이 사모님을 구해준 것에 질투라도 하는 건가...?’“CCTV는?”“네, 여기 있습니다.”고이준은 얼른 휴대폰을 꺼내 경호원이 보내준 CCTV 영상의 일부를 틀어 강지혁에게 건넸다.영상 속 소민준은 화분이 떨어짐과 동시에
경비원은 그 말에 시선을 내려 바닥에 떨어진 산산조각이 난 화분을 보고는 그제야 얼른 손을 놓아주었다.임유진은 경호원에게 소민준의 손목을 봐달라고 했고 경호원은 알겠다며 그의 손목을 자세히 살폈다.“사모님, 아무래도 골절인 것 같습니다.”“그럼 지금 당장 병원으로 데려가 치료를 받게 하세요.”“네, 알겠습니다.”그때 휴대폰이 울렸고 임유진은 경호원에게 가보라는 손짓을 한 후 이내 전화를 받았다.무슨 얘기를 들은 건지 그녀는 전화를 받은 지 얼마 안 돼 곧바로 심각한 얼굴을 했다.“네,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통화를 마친 후 임유진은 건물이 아닌 법원으로 향했다.잠시 후, 임유진이 법원에서 나왔을 때 마침 소민준을 병원으로 데려간 경호원으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검사를 받아본 결과 다행히 심각한 상처는 아니고 한 달 정도면 완전히 회복될 거라는 내용이었다.“알겠어요. 치료비는 다 제가 책임진다고 하고 혹시 다른 무언가의 보상을 원하면 저한테 따로 연락 주세요.”“네, 사모님.”임유진은 전화를 끊은 후 휴대폰을 집어넣는 것이 아닌 권건우에게 전화를 걸었다.“스승님, 죄송해요. 아무래도 당분간은 좀 시끄러워질 것 같아요.”“들었다. 김승수가 우리 둘을 고소했다지? 걱정할 것 없어. 우리는 그 사건에 한 점 부끄럼 없이 임했으니까. 그보다 요즘 인터넷에 떠드는 루머 말인데 나야 다 늙어서 그런 건 전혀 신경이 안 쓰인다고 하지만 너는 남편과 재회한 지도 얼마 안 됐는데...”“걱정하지 마세요. 혁이는 스승님과 제 사이 오해 안 해요.”임유진의 말에 권건우는 안심한 듯 미소를 지었다.“그럼 다행이고.”그날 저녁, 임유진이 집에 돌아오자마자 집사가 다가와 말했다.“회장님은 오늘 일 때문에 조금 늦으신다고 먼저 아이들과 식사를 하시라고 하셨습니다.”“네, 알겠어요.”임유진은 대수롭지 않게 고개를 끄덕이며 아이들과 밥 먹을 준비를 했다. 일 때문에 늦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니까.그 시각, 강지혁은 냉기를 풍기며 차가운 시선으로 눈앞
“위험해!”등 뒤로 누군가의 다급한 외침이 들려왔다.임유진은 미처 상황을 파악하지도 못한 채 누군가의 품에 안겨 바닥에 나뒹굴었다. 그녀를 구해준 누군가는 쓰러지는 그 순간에도 양손으로 그녀를 지켜주고 있었다.“사모님!”“사모님!”다급한 발걸음 소리와 함께 경호원과 기사들이 큰소리로 외치며 다가왔다.임유진은 그들의 소리에 그제야 정신을 차렸고 경호원의 부축으로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난 괜찮아요.”그녀는 말을 마치고는 고개를 옆으로 돌려 고개를 숙인 채 자리에서 일어나며 몸에 묻은 먼지를 툭툭 털어내는 남자를 바라보았다.“괜찮으세요? 구해주셔서 정말 감사...”임유진은 말을 하다가 남자가 고개를 드는 것을 보고 저도 모르게 흠칫하며 말을 멈추고 말았다.그녀를 구해준 건 다름 아닌 소민준이었다.소씨 가문의 장남이자 한때는 그녀의 남자친구였으며 진세령의 약혼자이기도 했던 그 소민준 말이다.하지만 지금의 그는 5년 전과는 완전히 다른 모습을 하고 있었다.색이 다 바랜 낡아빠진 옷에 더러운 운동화, 세월을 정통으로 맞은 것 같은 얼굴에 새치 가득한 머리까지, 지금의 그는 도무지 30대 중반이라고는 믿기지 않는 모습을 하고 있었다.그래도 한때는 상류층에 있었던 사람인데 지금은 일반 시민도 아닌 제일 아래 계층에 있는 사람처럼 보였다.고개를 든 소민준은 눈앞에 있는 사람이 임유진이라는 것을 보고는 마찬가지로 조금 놀란 듯 움찔했다. 그러고는 곧바로 쓴웃음을 지었다.“너였구나. 다시 이곳으로 돌아왔다는 기사를 봤어. 이런 식으로 만나게 될 줄은 몰랐는데.”“너...”임유진은 뭐라 말을 하고 싶었지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소민준은 당시 그녀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줬고 그녀가 절망의 끝에 자살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궁지까지 몰아붙였으며 두 번 다시 사랑 같은 건 하고 싶지 않게끔 만들어놓기도 했다.아마 강지혁이 아니었다면 임유진은 지금도 여전히 과거의 상처에 매달려 스스로를 고립시키며 살았을 것이다.하지만...하지만
직장 동료들은 한지영에게 위로를 건네며 은근히 그녀에게 잘 보이려는 듯한 말투로 얘기했다.심지어 어떤 사람은 아예 대놓고 그녀에게 백연신과의 사이를 묻기도 했다.“그럼 지영 씨는 백연신 씨랑 다시 만나는 거예요?”“그날 기자들 무리에서 지영 씨 손을 덥석 잡고 차로 끌고 가는데 내가 다 설렜지 뭐예요? 완전 현실판 왕자님 아니에요?”“그럼 앞으로 지영 씨를 뭐라 불러야 하나?”“백연신 씨가 회장님이니 당연히 회장 사모님 아니겠어요?”한지영은 직원들의 태도가 바뀐 게 전부 백연신 때문이라는 걸 알고 있다. 이런 상황을 처음 겪는 것도 아니었으니까.“아니요. 백연신 씨와는 아무 사이도 아니에요. 그러니까 괜한 추측은 하지 말아주세요. 그리고 저, 사귀는 사람 따로 있어요.”한지영은 차가운 목소리로 대꾸했고 이에 사람들은 어색하게 웃으며 서로 눈빛을 주고받더니 금방 다시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옆에서 떠드는 사람들이 없으니 이제야 살 것 같았다.어제 집으로 돌아갔을 때 백연신은 끝까지 나타나지 않았다. 그저 경호원을 통해 그녀에게 전언만 남겼다.“회장님께서 더는 걱정하지 않으셔도 된다고, 앞으로도 쭉 전과 같이 아무 일도 없을 거라고 하셨습니다.”전과 같다는 건 백연신 역시 더는 그녀 앞에 나타나지 않을 거라는 건가?한지영은 그 생각에 갑자기 울컥하며 눈물이 차오르려는 것이 느껴졌다. 하지만 그녀는 곧바로 다시 마음을 다잡으며 스스로에게 되뇌었다.이건 자신이 바란 거라고, 그러니 아무것도 슬퍼할 것 없다고 말이다.‘그래, 잘 된 거야. 이게 제일 좋은 결말이야. 증오도 없고 더 이상의 미움도 없는... 그냥 좋은 추억만 간직한 지금이 제일 좋은 끝이야.’다시 그와 연인이 되었다가 또다시 고난에 부딪혀 헤어지게 되면 그때는 완전히 원수지간이 될지도 모르니 차라리 아무것도 시작하지 않는 게 백배는 더 나았다.한지영은 더 이상 백연신과 함께 할 용기가 없었다. 아무리 그가 사랑을 외쳐도 아무리 줄곧 그녀만 사랑해왔다고 해도 이제는 그 마음을
연우진은 그 어느 날 자신이 백연신의 질투 대상이 될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지영 씨한테 마음이 남은 거라면 내가 아닌 지영 씨와 얘기를 하세요.”연우진이 차분한 목소리로 말을 이어갔다.“그리고 내가 지영 씨와 만나고 싶다고 해도 지영 씨가 받아주지 않으면 함께 하지 못해요. 이건 백연신 씨도 마찬가지고요. 백연신 씨가 여전히 지영 씨를 좋아한다고 해도 지영 씨가 받아주지 않으면 두 사람 역시 함께 못해요. 선택권은 지영 씨한테 있으니까.”백연신은 주먹을 말아쥐며 다시 물었다.“지영이와 만날 건지에 대한 대답만 해.”연우진은 한숨을 한번 내쉬었다. 아무래도 대답을 해주지 않으면 순순히 보내주지 않을 듯하다.“지영 씨는 좋은 사람입니다. 이대로 감정이 싹트면 나로서는 당연히 지영 씨와 함께하고 싶겠죠.”“한지영의 곁에 있을 수 있는 남자는 모든 걸 다 내어줄 수 있을 정도로 한지영을 사랑하는 사람이 아니면 안 돼.”백연신이 경고하듯 낮게 읊조렸다.“어째 내가 모든 걸 다 내어줄 정도로 한지영 씨를 사랑하지 않으면 우리 둘이 함께하는 걸 방해하겠다는 얘기로 들립니다만?”연우진의 질문에 백연신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지만 냉랭하고 차가운 눈빛을 보면 그 대답이 뭔지 알 수 있을 것도 같았다.“백연신 씨는 지영 씨를 위해 모든 걸 다 내어줄 수 있습니까? 그 정도로 사랑한다면 여기서 나한테 이러지 말고 다시 한번 지영 씨 마음에 들기 위해 노력을 해보는 게 어떨까요?”백연신은 그의 말이 끝난 순간 갑자기 손을 뻗어 연우진의 멱살을 잡았다. 그러고는 이대로 갈기갈기 찢어버릴 듯한 눈빛으로 그를 노려보았다.“너는 아무것도 몰라. 나라고...”하지만 그는 말을 다 잇지 못했다. 또한 멱살을 잡았던 손도 힘없이 풀었다.질투와 분노로 가득했던 눈동자가 한순간에 어둠에 잠겨버린 듯 시들어졌다.“한지영한테 잘해. 만약 지영이한테 상처를 주면 그때는 사는 게 사는 것 같지 않다는 게 뭔지 똑똑히 알려주지. 내 말 허투루 듣지 마.”말을 마친 후
백연신은 그 생각에 얼굴을 한껏 일그러트렸다. 질투와 분노, 슬픔과 고통의 감정들이 소용돌이치며 그의 얼굴에 담겼다.한지영의 집에서 나왔을 때 연우진은 꽤 편안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그는 몇 시간 전에 한지영에게 전화를 걸었다가 무사히 집에 도착했다는 말을 듣고 바로 그녀를 찾으러 집까지 왔다.다행히 사건은 무사히 일단락되었고 한지영도 예전의 일상을 다시 되찾은 것처럼 보였다.“우진 씨, 그... 나랑 더는 연락하고 싶지 않으면 언제든지 말해줘요. 난 괜찮으니까.”연우진은 한지영의 집에 도착하자마자 들은 그녀의 말을 떠올리고는 저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가끔 보면 한지영은 꼭 34살이 아닌 4살짜리 아이 같았다. 이런 상황에서도 마음속의 말을 솔직하게 전하며 상대방에게 선택권을 주니 말이다.하지만 그런 투명한 여자이기에 연우진도 그녀와 함께 있으면 더 즐겁고 자꾸 그녀와 연락을 이어나가게 되는 걸 것이다.“나는 지영 씨랑 계속 연락하고 싶은데. 지영 씨는 그저 피해자일 뿐이었잖아요. 그러니까 죄라도 지은 사람처럼 말하지 말아요.”“내가 백연신 씨와 호텔에서 아무 일도 없었다고 하면 믿을 수 있어요?”“네, 지영 씨가 그렇다고 하면 그렇게 믿을게요.”연우진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했다. 진심이었으니까.만약 정말 뭔 일이 있었으면 한지영 쪽에서 먼저 솔직하게 얘기를 해줬을 것이다. 한지영은 그런 여자니까.연우진은 엘리베이터 안에서 문득 백연신의 얼굴을 떠올렸다. 확실히 한지영은 백연신과의 인연을 이미 지난 과거로만 보고 있는 듯했다.하지만 백연신은? 그 역시 그럴까? 이제는 고은채와의 결혼도 파기됐는데?생각에 잠긴 채 엘리베이터에서 나오던 연우진은 아파트 입구에 서 있는 남자를 보고 멈칫하며 발걸음을 멈췄다.잘 뻗은 기럭지에 고고해 보이는 눈앞의 남자는 다름 아닌 백연신이었다.‘이 사람이 왜 여기에...’연우진과 백연신은 어느 정도 거리를 둔 채 서로를 바라보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렇게 침묵이 계속되다 연우진은 놀란 마
한지영의 말대로 백연신은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다른 여자를 곁에 둘 수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예쁜 여자를 곁에 둔다고 해도 그는 그녀가 아니면 안 되는 남자였다. 꼭 한지영이여야만 하는 남자였다.처음 본 순간부터 줄곧 한지영만을 사랑해왔으니까, 이미 모든 마음을 다 그녀에게 줘버렸으니까.사실 5년 전에 한지영이 아닌 고은채의 손을 잡았을 때 속으로 판을 짜고 있었다고는 하나 앞으로가 어떨지는 생각해 본 적도 없었다.그때는 자신에게 미래가 있을지도 없을지도 확신하지 못했거니와 백씨 가문의 모든 걸 되찾고 고씨 가문을 무너뜨리는 데 성공할 수 있을지 말지도 미지수였으니까.당시의 그에게는 한 걸음 한 걸음이 다 깨진 얼음판을 걷는 것 같았다. 그래서 섣불리 한지영에게 약속을 건넬 수도 없었다.지난 5년이라는 시간 동안 백연신은 사람을 은밀히 붙이는 것으로 한지영의 소식을 접할 뿐 그녀의 앞에 나서지는 못했다. 그때는 아무리 보고 싶어도 참아야만 했으니까.그런데 인내의 시간을 겪고 드디어 그녀의 앞에 나설 자격을 갖췄는데 한지영의 마음은 그사이 식어버렸다.백연신은 그 생각에 또 한 번 쓴 미소를 지었다.그녀와 함께하고 싶어 한 선택이, 그녀를 되찾기 위한 인내가 한지영이 거부함으로써 완전히 물거품이 되어버렸다.‘한지영을 살려주는 것만으로도 만족해라 이건가...?’백연신은 어쩌면 당시 한지영을 살려달라고 간절하게 외쳤을 때 모든 소원권을 다 써버린 걸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그는 운전석에 앉은 채 한지영의 모습이 사라질 때까지, 아니, 사라진 뒤에도 여전히 그쪽으로 시선을 고정하며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그러다 얼마나 지났을까, 휴대폰 진동이 울려댔다.“회장님, 고은채 씨가 방금 S 시를 떠났습니다. 그리고 매스컴 쪽에도 더는 한지영 씨의 일상을 방해하지 않게 조치를 해뒀습니다.”“고씨 가문 쪽은 계속해서 지켜봐. 손 내밀어주는 가문이 있나.”“네, 알겠습니다.”백연신은 통화를 마친 후 휴대폰을 다시 집어넣었다.고씨 가문에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