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세령은 휴대폰에 재생 되고 있는 동영상과 임유진이 무릎을 꿇는 장면을 보면서 자기도 모르게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어떤 사람은 정말 죽는 걸 자초한다니까.”“그러게 말이에요, 이 엑스트라는 보아하니 임유라의 미움을 샀나 봐요. 그래서 임유라에게 이렇게 당하고 있는 것 같아요. 지금 촬영팀에서 임유라의 미움을 사면 안 된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이 누가 있어요…….”비서는 말하다가 자신이 해서는 안 될 말을 했다는 것을 눈치챘다.순간 비서는 얼굴이 하얗게 질려 진세령을 향해 말했다.“세령 언니, 미안해요. 내가 말을 잘못했어요. 임유라는 그저 그녀가 강 도련님의 여자 친구라는 것만 믿고 이렇게 위세를 부리는 거예요. 나중에 그녀가 강 도련님에게 차이게 된다면 여주인공 2호는커녕 5호도 못 될거예요!”진세령은 담담하게 말했다.“됐어, 이 말들은 네가 말하지 않아도 알아.”임유라는 팀에 들어간 후부터 그녀에게 좋은 내색 한번 한 적이 없었다. 매번 만날 때마다 비꼬거나 싸우려 들었다.진세령은 임유라가 지금 그녀의 앞에서 잘난 척을 하며 이전의 화풀이를 하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이런 임유라에 대해 진세령은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별 볼 일 없는 가문에서 태어나 운이 좋아 강현수의 눈에 들었다. 그러나 상류권에서는 강현수 여자 친구의 유통기한은 항상 짧았다는걸 인지하고 있다. 그렇기에 임유라도 몇 달짜리 여자 친구인지 알 수가 없었다.임유라는 앞으로 점점 더 비참해질 것이다.“내가 말한 그 죽고 싶은 사람은 결코 엑스트라가 아니야.”진세령이 말했다..비서는 의아했다.‘엑스트라가 아니라면? 설마 세령 언니가 말하는 사람이…… 임유라?!’그런데 임유진은 지금 엑스트라가 아닌가? 엑스트라가 무슨 배경이 있어 임유라를 건드릴 수 있겠는가?임유라 뒤에는 연예계의 황태자님이 서 계신 데 말이다!그러나 진세령도 설명할 생각은 하지 않고 비서가 녹화한 동영상을 다시 한번 보았다.이런 동영상은 진세령의 눈과 마음을 즐겁게 했다!어쨌거나, 임유진과
비서가 상황을 보고 얼른 따라갔다.4월 초의 날씨는 아직 좀 쌀쌀했다. 남자 엑스트라들은 연극복 안에 옷을 좀 더 넣을 수 있으니 괜찮았다. 그러나 여자 엑스트라는 오히려 감독이 카메라 효과를 위해 시녀 옷에 다른 옷을 많이 입지 못하게 했다. 영상에 여성의 뚱뚱함이 담기면 안 되기 때문이다.그 때문에 지금 여자 엑스트라들은 모두 추위에 떨며 임유진을 보며 ‘배우는’ 틈을 타 모두 자신의 외투를 걸쳤다.그래서 임유진만이 여전히 연극복을 입고 계속 무릎을 꿇고 절을 하고 있었다.임유라는 아직 본격적인 촬영이 아니었기 때문에 처음부터 촬영 의상에 따뜻한 외투를 걸치고 있었다.“이런, 다들 자세히 보았는지 모르겠네. 다시 무릎을 꿇어봐요. 동작을 좀 천천히 해서 다른 사람이 자세히 볼 수 있도록 해줬으면 좋겠어요.”임유라는 또 한 번 임유진을 향해 말하며 임유진이 멈추지 못하도록 만들었다.임유진은 차갑게 상대방을 흘겨본 다음 담담하게 말했다.“좋아요!”그리고 다시 무릎을 꿇었다.이 정도 되니 다른 사람들도 이 임유라가 일부러 그녀를 괴롭힌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임유라는 그저 지금 임유진의 고통스러운 모습이 보고 싶었다. 이렇게 해야만 그녀의 화가 풀릴 것만 같았다. 그러나 임유진은 상황을 그녀가 원하는 만큼 만족하진 못하게 만들었다.그러자 가만히 생각하던 그녀는 갑자기 손을 느슨하게 풀었다. 원래 그녀의 손에 들고 있던 손난로 하나가 갑자기 그녀의 손에서 떨어졌다. 그리고 ‘펑’ 하는 소리와 임유진의 고통스러운 신음이 들렸다.그 구리로 만든 손난로가 무릎을 꿇고 절을 하는 임유진의 왼손에 떨어졌다. 만약 위치가 조금만 옆으로 옮겨졌더라면 머리를 찧을 것이다!임유진은 몸을 곧게 펴고 왼손에서 심한 통증을 느꼈다. 그리고 임유라를 바라보았는데 상대방 눈빛이 정말 득의양양했다 . 이건 분명히 일부러 한 짓이다.다만 곧, 임유라의 표정이 변했다. 그녀는 걱정과 미안함 가득한 얼굴로 허리를 숙이더니 임유진을 일으키는 척하며 말했다“미안, 미안해
주위의 사람들이 술렁이기 시작했다. 어떤 사람들은 동정 섞인 표정으로 임유라를 보고 있었다. 누군가는 임유라라는 새 여자 친구의 유통기한이 곧 끝나는 것 같다고 느꼈다.방금 강현수는 분명 그 엑스트라 시녀를 더 생각하는 것 같았다!멀지 않은 곳에서 좋은 구경거리를 보고 있는 진세령도 이번에는 깜짝 놀랐다.‘임유진이 왜 강현수와 함께 있는 거지? 이게 무슨 일이지?’설마 강현수도 임유진에 대해 다른 감정이 있단 말인가?방금 강현수는 분명히 임유진을 감싸고 보호하는 모습이었다!그럼 강지혁은? 그는 강현수와 임유진의 관계를 알고 있는 걸까?“세상에, 반전도 이런 반전이 없어요. 강현수가 그 엑스트라와…….”옆에 있던 비서가 비명을 지르며 조롱하며 말했다.“이 임유라, 이번에는 제대로 차이겠는데요? 강현수가 저러는 건 분명히 헤어지자는 거잖아요! 엑스트라가 강현수랑 관계가 있다는 것을 아니까 이렇게 괴롭혔던 거 아닐까요?”비서는 이렇게 추측했다.한편 진세령은 눈을 가볍게 감은 채로 무언가를 깊 생각하고 있는 것 같았다.아직 멍하니 제자리에 서 있는 임유라는 그제야 정신을 차렸다. 주위의 동정과 비웃음, 조롱의 눈빛을 맞이하자 그녀는 수 많은 손바닥들이 그녀의 얼굴을 때리는 것만 같았다.그녀는 마땅히 많은 사람에게 사랑받아야 하지 않은가? 수많은 부러움과 질투의 시선이 그녀에게 집중되어야 하지 않은가?그런데 왜, 지금 사람들이 그녀를 보는 눈빛은 마치 광대를 보는 것 같을까.마치 그녀에게 있던 후광들이 모두 사라진 것 같았다. 그저 불쌍한 벌레가 버린 것만 같았다.임유라는 정말 마음 같아선 큰소리로 자기야말로 강현수의 진짜 여자 친구라고 소리치고 싶었다.그러나 결국 그녀는 아무 소리도 지르지 못하고 얼굴만 빨개진 채로 황급히 떠났다.조감독은 잠시 멍한 표정으로 감독을 쳐다보았다.“이걸…… 어떻게 하죠?”임유라는 어쨌거나 여주인공 2호 역할 인건데 지금 이렇게 가버리면 오늘 촬영은 또 어떻게 한단 말인가? 거기에 하필이면 이 일이 또
휴게실에 들어간 뒤에야 강현수는 임유진을 소파에 내려놓고 오른손에 가볍게 가려진 왼손을 보았다.“많이 아파요?”“좀 아파요.”그녀가 중얼거렸다.그는 지금 그녀의 고통스러운 표정을 보면서 그녀가 아픈데도 크게 내색 하지 않은 걸 알아챘다. 평소에는 청초한 얼굴에 항상 평온하고 담담함이 배어 있는데, 지금 이 순간은 미간을 찌푸리고 안색마저 창백해 말하는 것조차 힘들어 보였다.그런 모습의 그녀를 보며 그의 심장은 점점 그를 조여왔다.이런 느낌은 그에게 낯설었다. 방금 그녀가 무릎을 꿇고 절을 한 다음 그 구리로 만든 난로에 손을 찧는 것을 본 순간, 그는 갑자기 심장이 채찍에 심하게 맞은 것처럼 아팠다.그래서 그는 거의 조건반사처럼 앞으로 달려들어 그녀를 부축했다.왜 그랬을까?강현수는 마음속으로 물었다. 분명 이전에 마을에 있을 때 그녀가 바로 그가 찾으려는 그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했었다. 그러나 그의 마음은 여전히 그녀에게 이끌리고 있는 것 같았다.얼굴 때문에 그런가? 그녀의 얼굴에 기억 속의 그 사람의 그림자가 있기 때문인 걸까? 그의 이성이 그녀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지만, 마음은 오히려 영향을 받는 걸까?얼마 지나지 않아 제작진의 수행 의사가 달려와 황급히 임유진에게 기초적인 검사를 진행했다.의사의 손이 임유진의 다친 위치를 만지고 뼈에 문제가 없는지 확인해야 했기에 손을 이리저리 만져 임유진의 통증도 더 심해졌다.그녀는 아랫입술을 죽을 만큼 아프게 깨물고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힌 채로 의사의 물음에 말 대신 고개를 끄덕이거나 저었다.마침내 의사의 검사가 끝났다. 그녀는 이마와 등이 모두 땀으로 뒤범벅이 된 채로 허탈한 안도감을 느꼈다.“뼈는 큰 문제가 없어요. 멍을 없애는 약을 바르면 나을 거예요. 그동안 이 손을 최대한 많이 아껴야 해요. 이 손으로 무거운 물건을 들고 다니면 안 돼요.”의사가 말했다.“만약 마음이 놓이지 않는다면, 병원에 가서 다시 자세한 검사를 받아봐요.”그는 단지 제작진 쪽의 임시 주치의일
분명, 계속 땅에 머리를 부딪혀서 생긴 것이다.“정말…… 절하라고 하면 하는 거예요?” 그는 갑자기 화가 났다.“아니면요? 거절해요? 거절하면 오늘 출연료는 한 푼도 못 받아요.”그녀가 말했다.그는 숨이 막혔다. 그는 엑스트라가 촬영팀 중 가장 힘이 없는 역할이란 것을 당연히 잘 알고 있다. 그들이 어떤 역할을 하고 싶던지, 본인의 의지와는 다르다는 것도 잘 알고 있다.“하루 출연료가 얼마나 돼요?”그의 목소리가 나지막하게 들려왔다.“하루에 16000원인데, 오늘 무릎 꿇는 장면이 있어서 10000원을 추가했어요. 그리고 저 혼자 절하는 것을 시범 보이는 거 때문에 40000원을 더 추가했어요." 그녀가 말했다.그는 마음에 열이 나 부글거리는 채로 그녀를 노려보았다. 그렇다면 고작 66000원을 위해 이렇게 무릎을 꿇고 절을 반복했다는 말인가?이 여자, 자기 자신을 보호할 줄은 아는 걸까?“임유라랑 무슨 안 좋은 일이 있었어요?”그가 물었다. 방금 그도 임유라가 고의로 그녀를 괴롭히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제작진은 아무도 감히 나서서 말을 하지 못했다. 이것은 한편으로 엑스트라가 원래 사람들의 큰 관심을 받지 못하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래도 제작진은 너무 얍삽했다. 아무도 엑스트라를 위해 임유라의 미움을 사려하지 않았으니.그건…… 임유라 뒤에는 강현수가 있으니 말이다!이 점을 생각하자 강현수는 가슴이 무엇으로 막힌 것처럼 느껴져 갑자기 숨이 막혔다.“나의 이복동생이에요. 문제가 있긴 하죠. 줄곧 내가 감옥에 간 일 때문에 자신의 앞길을 망쳤다고 생각하거든요.”임유진이 말했다.이 말은 그녀가 말하지 않았어도 현수의 능력으로 쉽게 알아낼 수 있었다. 그래서 굳이 숨길 필요는 없었다.그의 눈에 약간의 의아함이 스쳤다. 그는 일찍이 임유라에 대해 대충 알아본 적이 있다. 그녀에게 이복언니가 있지만 함께 살지 않는다고 했다.그러나 그는 이 언니의 이름이 무엇인지 개의치 않았다. 어차피 강현수도 임유라를 그다지 중요하게 생각하지
‘임유라의 백이 강현수였어?’“좋아요, 제가 약의 리스트랑 결근비 증명서 사본을 보내 줄 테니 그때 돈을 지불하세요.”“오늘 고마웠어요. 먼저 가보겠습니다.”말을 마친 임유진은 대기실에서 나갔고 방에는 강현수와 임유라만 남았다.강현수의 차가운 눈빛은 그녀를 항상 두렵게 했다.임유리는 억지로 미소를 지으며 그에게 물었다.“현수야, 왜 그런 눈빛으로 날 보고 있어? 참, 우리 언니랑은 아는 사이야?”“왜, 뭘 알아보려고?”“아니, 그냥 궁금해서, 언니가 얘기한 적 없었어.”“하긴, 네 언니는 낡고 작은 셋집에 살면서 보잘것없는 일을 하다 지금은 엑스트라를 하고 있지. 고작 몇천 원 때문에 여동생에게 고분고분해야 하는데 어찌 너에게 말하겠어.”강현수의 목소리는 냉혹하고 매서웠다.임유라에게 이렇게 차가운 목소리로 말을 건넨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그녀의 몸은 자신도 모르게 부들부들 떨렸다.“전에 우리 언니랑 오해가 있었던 거야.”“음, 무슨 오해인데 계속 무릎을 꿇게 했어?”임유라는 잠시 당황했다.“나…… 난 그냥 촬영 효과가 더 좋았으면 했어, 언니가 너무 잘해서 시범을 보여달라고 했어, 다른 생각은 전혀 없었어.”그녀는 말을 더듬거리며 억울해 보이려고 애썼지만 강현수의 눈빛은 그녀를 점점 더 긴장하게 했다.“됐어, 그런 말은 더 이상 할 필요 없어, 사람들이 믿을 것 같아?”강현수는 싸늘하게 말했다.“네가 바보인 거야 아니면 날 바보로 생각하는 거야?”그녀는 마치 모든 생각이 들킨 것만 같아 순간 안색이 창백해졌다.강현수는 임유라의 손을 마구 잡아당겼다. 가녀린 손목에는 다이아몬드가 박힌 한정판 명품 시계를 차고 있었다. 이 시계의 가격은 3억이었다.“처지가 바뀐 것 같으니 언니 앞에서 우쭐대고 싶은 거야? 이제 네가 쉽게 무릎도 꿇게 만들 수 있고 제멋대로 할 수 있는데 그녀는 반항조차 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은 거지?”강현수는 마치 별거 아닌 것처럼 말하고 있었지만 임유라는 오히려 거기에 간담이 더 서늘해졌다.
결국, 이 일은 너무나 쉽게 들켜버렸다.“내가 왜 전에 말을 안 했는지 알아? 왜냐하면 그건 나에게 큰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야, 네가 내 앞에서 그렇게 열심히 연기하는데 수고비라도 줘야 하지 않겠어?”그는 담담하게 말했다.놀란 그녀는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얼굴이 마치 누군가에게 뺨을 여러 대 맞은 것처럼 아팠다.“그런데 연기를 과하게 하면서 잘난 척하는 꼴이 너무 보기 싫었어.”강현수는 안색이 어두워지며 3억짜리 시계를 임유라의 손목에서 떼어내었다.“너를 띄워주는 건 네가 제멋대로 해도 된다는 뜻이 아니야, 난 언제나 널 망쳐버릴 수 있어.”말을 마치자 그는 손에 힘을 빼더니 명품 시계는 바닥에 떨어졌다.임유라는 놀란 채 숨을 들이쉬었고 온몸은 뻣뻣하게 굳었다. “그리고, 오늘 밤 연회에 안 가도 돼.”강현수는 말을 마치고 곧장 대기실에서 나갔으며 임유라에게 변명을 할 기회조차 주지 않았다.그녀는 안절부절못하며 바닥에 있는 그 시계를 바라보았다.‘3억짜리 시계인데, 이런 비싼 명품 시계는 차 본 적도 없는데 이걸 이런 식으로 바닥에 버리다니.’임유라는 주먹을 꽉 쥐면서 이 모든 건 임유진의 잘못 때문이라 생각했다.오늘 밤 연회는 S 시의 최고 유명 인사들의 모임이다. 그녀는 특별히 프랑스에서 드레스를 공수 해왔다. 그 만큼 이번 연회를 무척이나 기대했다. 연회를 통해 인지도를 넓히고 각계 유명 인사들을 많이 만나 인맥을 쌓고 싶었다.그러나 임유진 때문에 연회에 못 가게 되였다. ‘반드시 복수할 거야.’S 성 최고 유명 인사들의 연회는 당연히 수많은 기자들을 끌어모았다. 그러나 이런 연회는 아무 기자나 들어갈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래서 많은 기자들은 그저 연회장 입구를 막고 값진 사진을 찍는 것밖에 시도 할 수 있는 게 없었다.고급 차들은 연회장 입구에 줄줄이 세워졌다. 차에서 내리는 사람들은 모두 S 성의 각계각층의 유명 인사들이었다.갑자기 검은색 벤틀리가 입구에 세워졌다. 번호판을 본 일부 베테랑 기자들은 눈치를 챈
오늘 밤 연회에는 톱스타들도 참석했지만 강지혁은 그들 못지않게 멋진 아우라를 뿜어냈다.그는 예쁜 얼굴과 고혹적인 꽃사슴 같은 눈동자를 가지고 있다. 활짝 웃으며 사람을 바라보면서 입가에 잔잔한 미소가 번진 모습은 표현할 수 없을 만큼 화려하고 남녀를 불문하고 그에게 빠져들게 만들었다.하지만 이 눈동자에 차가운 기운이 돌 때는 사람들로 하여금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묘한 압박감을 느끼게 한다.강지혁은 눈을 반쯤 늘어뜨린 채 경호원과 경비원의 보호를 받고 있었다. 잘 재단된 검은 슈트는 늘씬하고 긴 몸을 감싸고 있어 비율이 좋아 보였고 온몸에는 우아함이 묻어났다.강지혁은 기자들이 인정하는 패니스트이다.그러나 오늘은 예외였다.다른 건 아무 문제 없지만 강지혁이 두른 연보라색 목도리와 손에 낀 같은 색 계열의 장갑은 아무리 봐도 이상한 것 같았다.“저 목도리와 장갑은 강지혁 씨의 평소 스타일이 아닌 것 같네요.”기자들은 속삭이기 시작했다.“좀 거칠어 보이기도 하고 낡아 보이네요, 혹시 어느 브랜드에서 새로 나온 빈티지 스타일인가?”“연보라색은 웬만한 남자와 어울리지 않는데, 강지혁 씨가 하니까 정말 잘 어울리는 것 같네요.”그가 사진 찍히는 것을 싫어한다는 걸 대부분 알고 있었지만 몰래 찍는 기자들도 있었다.그러나 더 수상한 건, 사진을 찍는 것을 본 경호원이 기자에게 다가가려고 할 때 강지혁이 슬쩍 뭐라고 하니 경호원이 다시 걸음을 멈춘 것이었다.강지혁이 회의장에 들어서자 몰래 찍던 기자는 숨을 돌렸다.그는 방금 경호원이 자기 앞으로 다가와 핸드폰에 있는 사진을 삭제해 달라고 할 줄 알았다.강지혁이 회의장에 들어서니 자연히 이슈가 되었고, 굉장히 많은 유명 인사들이 그에게 다가가려고 안간힘을 썼다.이한은 강지혁의 곁으로 다가와 그의 옷차림을 살폈다.“옷은 정말 눈에 띄네, 근데 목도리와 장갑은 너의 스타일이 아닌 것 같네?”강지혁은 눈썹을 치켜세웠다.“내 스타일이 어떤 건데?”‘아무튼 이런 부드러운 색상의 목도리와 장갑은 절대 하지
“그래...”강지혁이 낮게 읊조렸다.“그래야 할 거야.”고이준은 저도 모르게 소민준이 매우 가엽게 느껴졌다. 만약 임유진이 정말 소민준을 동정하면 그때는 지금 하고 있는 택배 기사 일도 못 하게 될지도 모르니까.“고 비서, 누가 저 여자한테 돈을 쥐여주고 유진이를 해할 계획을 세운 건지 알아내.”강지혁이 차가운 목소리로 지시했다.“네, 회장님.”고이준이 얼른 답했다.“그리고 S 시에서 제일 실력 좋은 변호사를 고용해서 유진이와 권건우 변호사 고소 건에 붙여. 김승수한테 지시를 내리는 다른 누군가가 있는 건 아닌지도 한번 알아보고.”고이준에게 김승수의 뒷조사를 맡긴 건 이유가 있었다.임유진이 강지혁의 와이프고 현 강씨 가문의 유일한 안주인인 걸 알고도 고소를 한 건 누가 봐도 이상했으니까. 상식적인 인간이라면 강씨 가문을 상대로 덤빌 리가 없다.게다가 김승수가 억울하다는 당시의 사건을 강지혁도 한번 훑어봤지만 임유진의 말대로 증거가 확실했고 결과 역시 납득 가능한 결과였다.즉 그렇다는 건 김승수에게 다른 목적이 있다는 것이다. 또 혹은 김승수를 뒤에서 조종하고 있는 누군가에게 다른 목적이 있을 수도 있고 말이다.하지만 이유가 뭐가 됐든 임유진을 건드린 이상 강지혁이 손을 놓고 있을 리가 없다. 그에게는 임유진이 목숨줄과도 같은 존재니까.“네, 알겠습니다.”임유진이 강지혁에게 있어 얼마나 중요한 사람인지 고이준은 너무나도 잘 알고 있다. 다만 요즘 따라 부쩍 이상한 위화감 같은 것이 느껴졌다.임유진을 대하는 강지혁의 태도가 꼭 기억을 잃기 전의 강지혁 같았기 때문이다. 꼭 기억을 다 되찾은 것처럼 말이다.강씨 저택.강지혁은 현관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가 마침 임유진과 두 아이들이 거실에서 동요에 맞춰 춤을 추고 있는 모습을 보게 되었다.현이는 흥분한 건지 얼굴이 빨개진 채로 깔깔거리며 춤을 추고 있었고 무뚝뚝하던 율이도 볼을 살짝 붉히며 어색하게 몸을 좌우로 흔들고 있었다.몸만 보면 썩 내키지 않아 하는 것 같지만 미소를 띠고
강지혁은 여자를 무섭게 노려보더니 이내 곁에 있는 경호원에게 지시를 내렸다.“두 번 다시 손에 뭘 들 수 없게 만들어놓고 경찰에 넘겨.”“네, 알겠습니다.”청소부는 그들의 대화에 얼굴이 새하얗게 질려버렸다.‘지, 지금 내 손을 부러트리려는 건가?’그녀는 이런 무서운 인간을 만날 줄 알았으면 차라리 경찰에게 잡히는 것이 더 나았겠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잘못했습니다! 다시는 안 그럴게요! 제가... 제가 알아서 경찰서로 가서 자수하겠습니다. 그러니까 제발...!”하지만 간절한 그녀의 부탁에도 강지혁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점점 더 얼굴이 차가워지기만 할 뿐이었다.사실 청소부는 양손만 부러지는 것에 감사해야 한다. 만약 그녀가 던진 화분으로 임유진이 큰 상처를 입었으면 그때는 양손은 물론이고 몸 전체가 너덜너덜해진 채 죽으니만 못한 삶은 살았을 테니까.“으아아악!!”그녀의 절규와 함께 강지혁은 유유히 현장을 빠져나왔다. 그리고 고이준도 곧바로 그의 뒤를 따라나섰다.바로 앞에 세워진 차량에 올라탄 후 고이준은 곧바로 강지혁에게 자료 하나를 건넸다.“소민준 씨의 지난 5년간 행적입니다. 몇 년 전부터 배달 기사 일을 하는 것으로 확인이 됐고 오늘은 우연히 건물 앞을 지나가다 사모님을 구한 것으로 보입니다. 사모님께서는 감사의 뜻으로 소민준 씨를 병원에 보냈고 손목 골절로 인한 치료 비용을 전액 다 부담해주셨습니다.”강지혁은 어둡게 가라앉은 얼굴로 수중의 자료를 훑어보았다. 차 안의 분위기는 그야말로 얼음장 같았다.“참 기막힌 우연이야. 안 그래?”그때 줄곧 입을 다물고 있던 강지혁의 입에서 뜬금없는 한마디가 흘러나왔다.“네... 네.”고이준은 식은땀을 흘리며 룸미러로 강지혁의 눈치를 봤다. ‘혹시 소민준이 사모님을 구해준 것에 질투라도 하는 건가...?’“CCTV는?”“네, 여기 있습니다.”고이준은 얼른 휴대폰을 꺼내 경호원이 보내준 CCTV 영상의 일부를 틀어 강지혁에게 건넸다.영상 속 소민준은 화분이 떨어짐과 동시에
경비원은 그 말에 시선을 내려 바닥에 떨어진 산산조각이 난 화분을 보고는 그제야 얼른 손을 놓아주었다.임유진은 경호원에게 소민준의 손목을 봐달라고 했고 경호원은 알겠다며 그의 손목을 자세히 살폈다.“사모님, 아무래도 골절인 것 같습니다.”“그럼 지금 당장 병원으로 데려가 치료를 받게 하세요.”“네, 알겠습니다.”그때 휴대폰이 울렸고 임유진은 경호원에게 가보라는 손짓을 한 후 이내 전화를 받았다.무슨 얘기를 들은 건지 그녀는 전화를 받은 지 얼마 안 돼 곧바로 심각한 얼굴을 했다.“네,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통화를 마친 후 임유진은 건물이 아닌 법원으로 향했다.잠시 후, 임유진이 법원에서 나왔을 때 마침 소민준을 병원으로 데려간 경호원으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검사를 받아본 결과 다행히 심각한 상처는 아니고 한 달 정도면 완전히 회복될 거라는 내용이었다.“알겠어요. 치료비는 다 제가 책임진다고 하고 혹시 다른 무언가의 보상을 원하면 저한테 따로 연락 주세요.”“네, 사모님.”임유진은 전화를 끊은 후 휴대폰을 집어넣는 것이 아닌 권건우에게 전화를 걸었다.“스승님, 죄송해요. 아무래도 당분간은 좀 시끄러워질 것 같아요.”“들었다. 김승수가 우리 둘을 고소했다지? 걱정할 것 없어. 우리는 그 사건에 한 점 부끄럼 없이 임했으니까. 그보다 요즘 인터넷에 떠드는 루머 말인데 나야 다 늙어서 그런 건 전혀 신경이 안 쓰인다고 하지만 너는 남편과 재회한 지도 얼마 안 됐는데...”“걱정하지 마세요. 혁이는 스승님과 제 사이 오해 안 해요.”임유진의 말에 권건우는 안심한 듯 미소를 지었다.“그럼 다행이고.”그날 저녁, 임유진이 집에 돌아오자마자 집사가 다가와 말했다.“회장님은 오늘 일 때문에 조금 늦으신다고 먼저 아이들과 식사를 하시라고 하셨습니다.”“네, 알겠어요.”임유진은 대수롭지 않게 고개를 끄덕이며 아이들과 밥 먹을 준비를 했다. 일 때문에 늦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니까.그 시각, 강지혁은 냉기를 풍기며 차가운 시선으로 눈앞
“위험해!”등 뒤로 누군가의 다급한 외침이 들려왔다.임유진은 미처 상황을 파악하지도 못한 채 누군가의 품에 안겨 바닥에 나뒹굴었다. 그녀를 구해준 누군가는 쓰러지는 그 순간에도 양손으로 그녀를 지켜주고 있었다.“사모님!”“사모님!”다급한 발걸음 소리와 함께 경호원과 기사들이 큰소리로 외치며 다가왔다.임유진은 그들의 소리에 그제야 정신을 차렸고 경호원의 부축으로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난 괜찮아요.”그녀는 말을 마치고는 고개를 옆으로 돌려 고개를 숙인 채 자리에서 일어나며 몸에 묻은 먼지를 툭툭 털어내는 남자를 바라보았다.“괜찮으세요? 구해주셔서 정말 감사...”임유진은 말을 하다가 남자가 고개를 드는 것을 보고 저도 모르게 흠칫하며 말을 멈추고 말았다.그녀를 구해준 건 다름 아닌 소민준이었다.소씨 가문의 장남이자 한때는 그녀의 남자친구였으며 진세령의 약혼자이기도 했던 그 소민준 말이다.하지만 지금의 그는 5년 전과는 완전히 다른 모습을 하고 있었다.색이 다 바랜 낡아빠진 옷에 더러운 운동화, 세월을 정통으로 맞은 것 같은 얼굴에 새치 가득한 머리까지, 지금의 그는 도무지 30대 중반이라고는 믿기지 않는 모습을 하고 있었다.그래도 한때는 상류층에 있었던 사람인데 지금은 일반 시민도 아닌 제일 아래 계층에 있는 사람처럼 보였다.고개를 든 소민준은 눈앞에 있는 사람이 임유진이라는 것을 보고는 마찬가지로 조금 놀란 듯 움찔했다. 그러고는 곧바로 쓴웃음을 지었다.“너였구나. 다시 이곳으로 돌아왔다는 기사를 봤어. 이런 식으로 만나게 될 줄은 몰랐는데.”“너...”임유진은 뭐라 말을 하고 싶었지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소민준은 당시 그녀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줬고 그녀가 절망의 끝에 자살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궁지까지 몰아붙였으며 두 번 다시 사랑 같은 건 하고 싶지 않게끔 만들어놓기도 했다.아마 강지혁이 아니었다면 임유진은 지금도 여전히 과거의 상처에 매달려 스스로를 고립시키며 살았을 것이다.하지만...하지만
직장 동료들은 한지영에게 위로를 건네며 은근히 그녀에게 잘 보이려는 듯한 말투로 얘기했다.심지어 어떤 사람은 아예 대놓고 그녀에게 백연신과의 사이를 묻기도 했다.“그럼 지영 씨는 백연신 씨랑 다시 만나는 거예요?”“그날 기자들 무리에서 지영 씨 손을 덥석 잡고 차로 끌고 가는데 내가 다 설렜지 뭐예요? 완전 현실판 왕자님 아니에요?”“그럼 앞으로 지영 씨를 뭐라 불러야 하나?”“백연신 씨가 회장님이니 당연히 회장 사모님 아니겠어요?”한지영은 직원들의 태도가 바뀐 게 전부 백연신 때문이라는 걸 알고 있다. 이런 상황을 처음 겪는 것도 아니었으니까.“아니요. 백연신 씨와는 아무 사이도 아니에요. 그러니까 괜한 추측은 하지 말아주세요. 그리고 저, 사귀는 사람 따로 있어요.”한지영은 차가운 목소리로 대꾸했고 이에 사람들은 어색하게 웃으며 서로 눈빛을 주고받더니 금방 다시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옆에서 떠드는 사람들이 없으니 이제야 살 것 같았다.어제 집으로 돌아갔을 때 백연신은 끝까지 나타나지 않았다. 그저 경호원을 통해 그녀에게 전언만 남겼다.“회장님께서 더는 걱정하지 않으셔도 된다고, 앞으로도 쭉 전과 같이 아무 일도 없을 거라고 하셨습니다.”전과 같다는 건 백연신 역시 더는 그녀 앞에 나타나지 않을 거라는 건가?한지영은 그 생각에 갑자기 울컥하며 눈물이 차오르려는 것이 느껴졌다. 하지만 그녀는 곧바로 다시 마음을 다잡으며 스스로에게 되뇌었다.이건 자신이 바란 거라고, 그러니 아무것도 슬퍼할 것 없다고 말이다.‘그래, 잘 된 거야. 이게 제일 좋은 결말이야. 증오도 없고 더 이상의 미움도 없는... 그냥 좋은 추억만 간직한 지금이 제일 좋은 끝이야.’다시 그와 연인이 되었다가 또다시 고난에 부딪혀 헤어지게 되면 그때는 완전히 원수지간이 될지도 모르니 차라리 아무것도 시작하지 않는 게 백배는 더 나았다.한지영은 더 이상 백연신과 함께 할 용기가 없었다. 아무리 그가 사랑을 외쳐도 아무리 줄곧 그녀만 사랑해왔다고 해도 이제는 그 마음을
연우진은 그 어느 날 자신이 백연신의 질투 대상이 될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지영 씨한테 마음이 남은 거라면 내가 아닌 지영 씨와 얘기를 하세요.”연우진이 차분한 목소리로 말을 이어갔다.“그리고 내가 지영 씨와 만나고 싶다고 해도 지영 씨가 받아주지 않으면 함께 하지 못해요. 이건 백연신 씨도 마찬가지고요. 백연신 씨가 여전히 지영 씨를 좋아한다고 해도 지영 씨가 받아주지 않으면 두 사람 역시 함께 못해요. 선택권은 지영 씨한테 있으니까.”백연신은 주먹을 말아쥐며 다시 물었다.“지영이와 만날 건지에 대한 대답만 해.”연우진은 한숨을 한번 내쉬었다. 아무래도 대답을 해주지 않으면 순순히 보내주지 않을 듯하다.“지영 씨는 좋은 사람입니다. 이대로 감정이 싹트면 나로서는 당연히 지영 씨와 함께하고 싶겠죠.”“한지영의 곁에 있을 수 있는 남자는 모든 걸 다 내어줄 수 있을 정도로 한지영을 사랑하는 사람이 아니면 안 돼.”백연신이 경고하듯 낮게 읊조렸다.“어째 내가 모든 걸 다 내어줄 정도로 한지영 씨를 사랑하지 않으면 우리 둘이 함께하는 걸 방해하겠다는 얘기로 들립니다만?”연우진의 질문에 백연신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지만 냉랭하고 차가운 눈빛을 보면 그 대답이 뭔지 알 수 있을 것도 같았다.“백연신 씨는 지영 씨를 위해 모든 걸 다 내어줄 수 있습니까? 그 정도로 사랑한다면 여기서 나한테 이러지 말고 다시 한번 지영 씨 마음에 들기 위해 노력을 해보는 게 어떨까요?”백연신은 그의 말이 끝난 순간 갑자기 손을 뻗어 연우진의 멱살을 잡았다. 그러고는 이대로 갈기갈기 찢어버릴 듯한 눈빛으로 그를 노려보았다.“너는 아무것도 몰라. 나라고...”하지만 그는 말을 다 잇지 못했다. 또한 멱살을 잡았던 손도 힘없이 풀었다.질투와 분노로 가득했던 눈동자가 한순간에 어둠에 잠겨버린 듯 시들어졌다.“한지영한테 잘해. 만약 지영이한테 상처를 주면 그때는 사는 게 사는 것 같지 않다는 게 뭔지 똑똑히 알려주지. 내 말 허투루 듣지 마.”말을 마친 후
백연신은 그 생각에 얼굴을 한껏 일그러트렸다. 질투와 분노, 슬픔과 고통의 감정들이 소용돌이치며 그의 얼굴에 담겼다.한지영의 집에서 나왔을 때 연우진은 꽤 편안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그는 몇 시간 전에 한지영에게 전화를 걸었다가 무사히 집에 도착했다는 말을 듣고 바로 그녀를 찾으러 집까지 왔다.다행히 사건은 무사히 일단락되었고 한지영도 예전의 일상을 다시 되찾은 것처럼 보였다.“우진 씨, 그... 나랑 더는 연락하고 싶지 않으면 언제든지 말해줘요. 난 괜찮으니까.”연우진은 한지영의 집에 도착하자마자 들은 그녀의 말을 떠올리고는 저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가끔 보면 한지영은 꼭 34살이 아닌 4살짜리 아이 같았다. 이런 상황에서도 마음속의 말을 솔직하게 전하며 상대방에게 선택권을 주니 말이다.하지만 그런 투명한 여자이기에 연우진도 그녀와 함께 있으면 더 즐겁고 자꾸 그녀와 연락을 이어나가게 되는 걸 것이다.“나는 지영 씨랑 계속 연락하고 싶은데. 지영 씨는 그저 피해자일 뿐이었잖아요. 그러니까 죄라도 지은 사람처럼 말하지 말아요.”“내가 백연신 씨와 호텔에서 아무 일도 없었다고 하면 믿을 수 있어요?”“네, 지영 씨가 그렇다고 하면 그렇게 믿을게요.”연우진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했다. 진심이었으니까.만약 정말 뭔 일이 있었으면 한지영 쪽에서 먼저 솔직하게 얘기를 해줬을 것이다. 한지영은 그런 여자니까.연우진은 엘리베이터 안에서 문득 백연신의 얼굴을 떠올렸다. 확실히 한지영은 백연신과의 인연을 이미 지난 과거로만 보고 있는 듯했다.하지만 백연신은? 그 역시 그럴까? 이제는 고은채와의 결혼도 파기됐는데?생각에 잠긴 채 엘리베이터에서 나오던 연우진은 아파트 입구에 서 있는 남자를 보고 멈칫하며 발걸음을 멈췄다.잘 뻗은 기럭지에 고고해 보이는 눈앞의 남자는 다름 아닌 백연신이었다.‘이 사람이 왜 여기에...’연우진과 백연신은 어느 정도 거리를 둔 채 서로를 바라보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렇게 침묵이 계속되다 연우진은 놀란 마
한지영의 말대로 백연신은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다른 여자를 곁에 둘 수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예쁜 여자를 곁에 둔다고 해도 그는 그녀가 아니면 안 되는 남자였다. 꼭 한지영이여야만 하는 남자였다.처음 본 순간부터 줄곧 한지영만을 사랑해왔으니까, 이미 모든 마음을 다 그녀에게 줘버렸으니까.사실 5년 전에 한지영이 아닌 고은채의 손을 잡았을 때 속으로 판을 짜고 있었다고는 하나 앞으로가 어떨지는 생각해 본 적도 없었다.그때는 자신에게 미래가 있을지도 없을지도 확신하지 못했거니와 백씨 가문의 모든 걸 되찾고 고씨 가문을 무너뜨리는 데 성공할 수 있을지 말지도 미지수였으니까.당시의 그에게는 한 걸음 한 걸음이 다 깨진 얼음판을 걷는 것 같았다. 그래서 섣불리 한지영에게 약속을 건넬 수도 없었다.지난 5년이라는 시간 동안 백연신은 사람을 은밀히 붙이는 것으로 한지영의 소식을 접할 뿐 그녀의 앞에 나서지는 못했다. 그때는 아무리 보고 싶어도 참아야만 했으니까.그런데 인내의 시간을 겪고 드디어 그녀의 앞에 나설 자격을 갖췄는데 한지영의 마음은 그사이 식어버렸다.백연신은 그 생각에 또 한 번 쓴 미소를 지었다.그녀와 함께하고 싶어 한 선택이, 그녀를 되찾기 위한 인내가 한지영이 거부함으로써 완전히 물거품이 되어버렸다.‘한지영을 살려주는 것만으로도 만족해라 이건가...?’백연신은 어쩌면 당시 한지영을 살려달라고 간절하게 외쳤을 때 모든 소원권을 다 써버린 걸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그는 운전석에 앉은 채 한지영의 모습이 사라질 때까지, 아니, 사라진 뒤에도 여전히 그쪽으로 시선을 고정하며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그러다 얼마나 지났을까, 휴대폰 진동이 울려댔다.“회장님, 고은채 씨가 방금 S 시를 떠났습니다. 그리고 매스컴 쪽에도 더는 한지영 씨의 일상을 방해하지 않게 조치를 해뒀습니다.”“고씨 가문 쪽은 계속해서 지켜봐. 손 내밀어주는 가문이 있나.”“네, 알겠습니다.”백연신은 통화를 마친 후 휴대폰을 다시 집어넣었다.고씨 가문에게
“그럼 어떻게 하면 끝내줄 건데요? 뭐 하룻밤 같이 자 줘요? 아니면 백연신 씨가 만족할 만큼 다시 연애하는 것처럼 연기라도 해줘요?”한지영이 비아냥거리며 말을 이어갔다.“백연신 씨 좋다는 여자들 많잖아요. 그런데 왜 꼭 나여야 해요? 아니, 그건 또 아니었지. 꼭 나여야 하는 사람이었으면 애초에 헤어지자고도 안 했을 테니까.”“너한테 나라는 인간은 대체 뭐야?”백연신이 한지영의 눈을 빤히 바라보며 물었다. 그러자 한지영 역시 그 눈빛을 피하지 않으며 답했다.“한때 사랑했던 사람, 그리고 더는 사랑할 수 없는 사람. 나한테 백연신 씨는 딱 그 정도의 사람이에요. 우리 두 사람은 가는 길이 다른 사람이고 인생관도 너무 다른 사람이에요. 당신은 제일 중요한 게 사업이고 가문이지만 나는 결혼해서 아이를 낳고 평범하고 단란하게 사는 게 더 좋은 사람이에요. 그리고 나는 백연신 씨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나약한 사람이라 같은 고통을 두 번은 못 겪어요.”두 사람은 살아온 환경, 그리고 그로 인한 인생을 대하는 태도, 이런 것들이 너무나도 다르기에 어쩌면 처음부터 이어지지 않을 인연이었는지도 모른다.백연신은 천천히 몸을 일으켜 일어나더니 한 걸음 두 걸음 뒤로 물러섰다. 달빛 아래의 그의 얼굴은 무척이나 창백하고 또 어두웠다.“네 말이 맞아... 나 좋다는 여자들도 많고 꼭 너여야 하는 것도 아니야.”백연신은 시선을 내린 채 입꼬리를 조금씩 위로 올렸다.5년이다. 5년을 숨죽이고 드디어 고씨 가문을 사지까지 내몰았는데 그 시간 동안 한지영은 서서히 그의 존재를 지워가고 있었다.백연신은 분명히 웃고 있었지만 한지영은 그가 꼭 울고 있는 것 같았다. 그래서 마음 한구석이 욱신거리며 숨이 가빠왔다.‘아파하지 마. 백연신 때문에 아파하지 마! 잊기로 했잖아. 이제는 다 잊기로 했잖아. 그러니까 흔들리지 마!’한지영은 속으로 끊임없이 이렇게 되뇌었다. 하지만 여전히 그에게서 두 눈을 떼지 못했고 심장은 계속해서 아파 났다.백연신은 시선을 내린 채 끝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