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록 그녀는 지영이가 그녀에게 돈을 갚으라고 재촉하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지만, 그녀가 지영이에게 빚진 것이 너무 많다고 생각하기에 계속 이렇게 모른 척할 수 없었다.한 번 또 한 번, 임유진은 무릎을 꿇고, 절을 하고, 다시 일어났다…… 이렇게 끊임없이 반복했다.그리고 주위의 다른 엑스트라들도 여러 번 무릎을 꿇는 동안 점점 더 힘들어하고 , 심지어 어떤 사람은 임금을 올려야 한다고 소리 치며 이렇게 사람을 고생시키는 게 어디 있냐고 화를 냈다.감독은 엑스트라들의 감정이 점점 흐트러지는 것을 보고 조감독에게 가서 임유라의 뜻을 물어보라고 했다.임유라는 상황을 보고 일부러 진지하게 생각하는 척했다.“이렇게 해요. 이 사람이 잘하더라고요. 자세가 아주 모범적이고 시간도 잘 맞춰서 끝내던데, 차라리 그녀가 다른 엑스트라들에 시범을 보이고 다시 하는 건 어때요? 이렇게 하면 다른 사람들이 옆에서 다시 잘 보고 연습하기만 하면 일이 번거롭지는 않을 거예요.”그녀가 가리키는 사람은 당연히 임유진이었다.“하지만 이 엑스트라 분께서 여러분을 위해 시범을 보이고 싶은지 모르겠네요. 어쨌거나 이렇게 되면 이분이 다른 사람보다 더 피곤할 테니 말이에요.”임유라는 상대방을 위해 생각하는 척했다.“이게 싫을 게 뭐가 있어요, 돈만 좀 더 주면 문제없어요.”조감독이 기뻐하며 말했다. 어차피 많은 엑스트라들이 전부 힘든 것보다 낫다고 생각했다.이렇게 많은 엑스트라가 불만을 가지고 파업을 하게 되면 한꺼번에 많은 사람을 찾기 어려울 뿐만 아니라 작은 소동 같은 것도 일어나기 쉽다.그냥 한 사람에게 무릎을 꿇고 절을 하게 하는 것이 훨씬 쉬운 일임은 틀림없다.그리하여 조감독은 임유진더러 한걸음 나서라 하고 4만 원을 추가하는 조건으로 그녀가 시범을 보이게 했다. 만약 거부한다면 그녀는 계약위반으로 오늘 한 푼도 받지 못할 것이다.임유진 몇 걸음 떨어진 곳에 서 있는 임유라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얼굴에 띤 미소가 매우 눈부시게 느껴졌다.그녀는 임유라가 일부
진세령은 휴대폰에 재생 되고 있는 동영상과 임유진이 무릎을 꿇는 장면을 보면서 자기도 모르게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어떤 사람은 정말 죽는 걸 자초한다니까.”“그러게 말이에요, 이 엑스트라는 보아하니 임유라의 미움을 샀나 봐요. 그래서 임유라에게 이렇게 당하고 있는 것 같아요. 지금 촬영팀에서 임유라의 미움을 사면 안 된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이 누가 있어요…….”비서는 말하다가 자신이 해서는 안 될 말을 했다는 것을 눈치챘다.순간 비서는 얼굴이 하얗게 질려 진세령을 향해 말했다.“세령 언니, 미안해요. 내가 말을 잘못했어요. 임유라는 그저 그녀가 강 도련님의 여자 친구라는 것만 믿고 이렇게 위세를 부리는 거예요. 나중에 그녀가 강 도련님에게 차이게 된다면 여주인공 2호는커녕 5호도 못 될거예요!”진세령은 담담하게 말했다.“됐어, 이 말들은 네가 말하지 않아도 알아.”임유라는 팀에 들어간 후부터 그녀에게 좋은 내색 한번 한 적이 없었다. 매번 만날 때마다 비꼬거나 싸우려 들었다.진세령은 임유라가 지금 그녀의 앞에서 잘난 척을 하며 이전의 화풀이를 하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이런 임유라에 대해 진세령은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별 볼 일 없는 가문에서 태어나 운이 좋아 강현수의 눈에 들었다. 그러나 상류권에서는 강현수 여자 친구의 유통기한은 항상 짧았다는걸 인지하고 있다. 그렇기에 임유라도 몇 달짜리 여자 친구인지 알 수가 없었다.임유라는 앞으로 점점 더 비참해질 것이다.“내가 말한 그 죽고 싶은 사람은 결코 엑스트라가 아니야.”진세령이 말했다..비서는 의아했다.‘엑스트라가 아니라면? 설마 세령 언니가 말하는 사람이…… 임유라?!’그런데 임유진은 지금 엑스트라가 아닌가? 엑스트라가 무슨 배경이 있어 임유라를 건드릴 수 있겠는가?임유라 뒤에는 연예계의 황태자님이 서 계신 데 말이다!그러나 진세령도 설명할 생각은 하지 않고 비서가 녹화한 동영상을 다시 한번 보았다.이런 동영상은 진세령의 눈과 마음을 즐겁게 했다!어쨌거나, 임유진과
비서가 상황을 보고 얼른 따라갔다.4월 초의 날씨는 아직 좀 쌀쌀했다. 남자 엑스트라들은 연극복 안에 옷을 좀 더 넣을 수 있으니 괜찮았다. 그러나 여자 엑스트라는 오히려 감독이 카메라 효과를 위해 시녀 옷에 다른 옷을 많이 입지 못하게 했다. 영상에 여성의 뚱뚱함이 담기면 안 되기 때문이다.그 때문에 지금 여자 엑스트라들은 모두 추위에 떨며 임유진을 보며 ‘배우는’ 틈을 타 모두 자신의 외투를 걸쳤다.그래서 임유진만이 여전히 연극복을 입고 계속 무릎을 꿇고 절을 하고 있었다.임유라는 아직 본격적인 촬영이 아니었기 때문에 처음부터 촬영 의상에 따뜻한 외투를 걸치고 있었다.“이런, 다들 자세히 보았는지 모르겠네. 다시 무릎을 꿇어봐요. 동작을 좀 천천히 해서 다른 사람이 자세히 볼 수 있도록 해줬으면 좋겠어요.”임유라는 또 한 번 임유진을 향해 말하며 임유진이 멈추지 못하도록 만들었다.임유진은 차갑게 상대방을 흘겨본 다음 담담하게 말했다.“좋아요!”그리고 다시 무릎을 꿇었다.이 정도 되니 다른 사람들도 이 임유라가 일부러 그녀를 괴롭힌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임유라는 그저 지금 임유진의 고통스러운 모습이 보고 싶었다. 이렇게 해야만 그녀의 화가 풀릴 것만 같았다. 그러나 임유진은 상황을 그녀가 원하는 만큼 만족하진 못하게 만들었다.그러자 가만히 생각하던 그녀는 갑자기 손을 느슨하게 풀었다. 원래 그녀의 손에 들고 있던 손난로 하나가 갑자기 그녀의 손에서 떨어졌다. 그리고 ‘펑’ 하는 소리와 임유진의 고통스러운 신음이 들렸다.그 구리로 만든 손난로가 무릎을 꿇고 절을 하는 임유진의 왼손에 떨어졌다. 만약 위치가 조금만 옆으로 옮겨졌더라면 머리를 찧을 것이다!임유진은 몸을 곧게 펴고 왼손에서 심한 통증을 느꼈다. 그리고 임유라를 바라보았는데 상대방 눈빛이 정말 득의양양했다 . 이건 분명히 일부러 한 짓이다.다만 곧, 임유라의 표정이 변했다. 그녀는 걱정과 미안함 가득한 얼굴로 허리를 숙이더니 임유진을 일으키는 척하며 말했다“미안, 미안해
주위의 사람들이 술렁이기 시작했다. 어떤 사람들은 동정 섞인 표정으로 임유라를 보고 있었다. 누군가는 임유라라는 새 여자 친구의 유통기한이 곧 끝나는 것 같다고 느꼈다.방금 강현수는 분명 그 엑스트라 시녀를 더 생각하는 것 같았다!멀지 않은 곳에서 좋은 구경거리를 보고 있는 진세령도 이번에는 깜짝 놀랐다.‘임유진이 왜 강현수와 함께 있는 거지? 이게 무슨 일이지?’설마 강현수도 임유진에 대해 다른 감정이 있단 말인가?방금 강현수는 분명히 임유진을 감싸고 보호하는 모습이었다!그럼 강지혁은? 그는 강현수와 임유진의 관계를 알고 있는 걸까?“세상에, 반전도 이런 반전이 없어요. 강현수가 그 엑스트라와…….”옆에 있던 비서가 비명을 지르며 조롱하며 말했다.“이 임유라, 이번에는 제대로 차이겠는데요? 강현수가 저러는 건 분명히 헤어지자는 거잖아요! 엑스트라가 강현수랑 관계가 있다는 것을 아니까 이렇게 괴롭혔던 거 아닐까요?”비서는 이렇게 추측했다.한편 진세령은 눈을 가볍게 감은 채로 무언가를 깊 생각하고 있는 것 같았다.아직 멍하니 제자리에 서 있는 임유라는 그제야 정신을 차렸다. 주위의 동정과 비웃음, 조롱의 눈빛을 맞이하자 그녀는 수 많은 손바닥들이 그녀의 얼굴을 때리는 것만 같았다.그녀는 마땅히 많은 사람에게 사랑받아야 하지 않은가? 수많은 부러움과 질투의 시선이 그녀에게 집중되어야 하지 않은가?그런데 왜, 지금 사람들이 그녀를 보는 눈빛은 마치 광대를 보는 것 같을까.마치 그녀에게 있던 후광들이 모두 사라진 것 같았다. 그저 불쌍한 벌레가 버린 것만 같았다.임유라는 정말 마음 같아선 큰소리로 자기야말로 강현수의 진짜 여자 친구라고 소리치고 싶었다.그러나 결국 그녀는 아무 소리도 지르지 못하고 얼굴만 빨개진 채로 황급히 떠났다.조감독은 잠시 멍한 표정으로 감독을 쳐다보았다.“이걸…… 어떻게 하죠?”임유라는 어쨌거나 여주인공 2호 역할 인건데 지금 이렇게 가버리면 오늘 촬영은 또 어떻게 한단 말인가? 거기에 하필이면 이 일이 또
휴게실에 들어간 뒤에야 강현수는 임유진을 소파에 내려놓고 오른손에 가볍게 가려진 왼손을 보았다.“많이 아파요?”“좀 아파요.”그녀가 중얼거렸다.그는 지금 그녀의 고통스러운 표정을 보면서 그녀가 아픈데도 크게 내색 하지 않은 걸 알아챘다. 평소에는 청초한 얼굴에 항상 평온하고 담담함이 배어 있는데, 지금 이 순간은 미간을 찌푸리고 안색마저 창백해 말하는 것조차 힘들어 보였다.그런 모습의 그녀를 보며 그의 심장은 점점 그를 조여왔다.이런 느낌은 그에게 낯설었다. 방금 그녀가 무릎을 꿇고 절을 한 다음 그 구리로 만든 난로에 손을 찧는 것을 본 순간, 그는 갑자기 심장이 채찍에 심하게 맞은 것처럼 아팠다.그래서 그는 거의 조건반사처럼 앞으로 달려들어 그녀를 부축했다.왜 그랬을까?강현수는 마음속으로 물었다. 분명 이전에 마을에 있을 때 그녀가 바로 그가 찾으려는 그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했었다. 그러나 그의 마음은 여전히 그녀에게 이끌리고 있는 것 같았다.얼굴 때문에 그런가? 그녀의 얼굴에 기억 속의 그 사람의 그림자가 있기 때문인 걸까? 그의 이성이 그녀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지만, 마음은 오히려 영향을 받는 걸까?얼마 지나지 않아 제작진의 수행 의사가 달려와 황급히 임유진에게 기초적인 검사를 진행했다.의사의 손이 임유진의 다친 위치를 만지고 뼈에 문제가 없는지 확인해야 했기에 손을 이리저리 만져 임유진의 통증도 더 심해졌다.그녀는 아랫입술을 죽을 만큼 아프게 깨물고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힌 채로 의사의 물음에 말 대신 고개를 끄덕이거나 저었다.마침내 의사의 검사가 끝났다. 그녀는 이마와 등이 모두 땀으로 뒤범벅이 된 채로 허탈한 안도감을 느꼈다.“뼈는 큰 문제가 없어요. 멍을 없애는 약을 바르면 나을 거예요. 그동안 이 손을 최대한 많이 아껴야 해요. 이 손으로 무거운 물건을 들고 다니면 안 돼요.”의사가 말했다.“만약 마음이 놓이지 않는다면, 병원에 가서 다시 자세한 검사를 받아봐요.”그는 단지 제작진 쪽의 임시 주치의일
분명, 계속 땅에 머리를 부딪혀서 생긴 것이다.“정말…… 절하라고 하면 하는 거예요?” 그는 갑자기 화가 났다.“아니면요? 거절해요? 거절하면 오늘 출연료는 한 푼도 못 받아요.”그녀가 말했다.그는 숨이 막혔다. 그는 엑스트라가 촬영팀 중 가장 힘이 없는 역할이란 것을 당연히 잘 알고 있다. 그들이 어떤 역할을 하고 싶던지, 본인의 의지와는 다르다는 것도 잘 알고 있다.“하루 출연료가 얼마나 돼요?”그의 목소리가 나지막하게 들려왔다.“하루에 16000원인데, 오늘 무릎 꿇는 장면이 있어서 10000원을 추가했어요. 그리고 저 혼자 절하는 것을 시범 보이는 거 때문에 40000원을 더 추가했어요." 그녀가 말했다.그는 마음에 열이 나 부글거리는 채로 그녀를 노려보았다. 그렇다면 고작 66000원을 위해 이렇게 무릎을 꿇고 절을 반복했다는 말인가?이 여자, 자기 자신을 보호할 줄은 아는 걸까?“임유라랑 무슨 안 좋은 일이 있었어요?”그가 물었다. 방금 그도 임유라가 고의로 그녀를 괴롭히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제작진은 아무도 감히 나서서 말을 하지 못했다. 이것은 한편으로 엑스트라가 원래 사람들의 큰 관심을 받지 못하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래도 제작진은 너무 얍삽했다. 아무도 엑스트라를 위해 임유라의 미움을 사려하지 않았으니.그건…… 임유라 뒤에는 강현수가 있으니 말이다!이 점을 생각하자 강현수는 가슴이 무엇으로 막힌 것처럼 느껴져 갑자기 숨이 막혔다.“나의 이복동생이에요. 문제가 있긴 하죠. 줄곧 내가 감옥에 간 일 때문에 자신의 앞길을 망쳤다고 생각하거든요.”임유진이 말했다.이 말은 그녀가 말하지 않았어도 현수의 능력으로 쉽게 알아낼 수 있었다. 그래서 굳이 숨길 필요는 없었다.그의 눈에 약간의 의아함이 스쳤다. 그는 일찍이 임유라에 대해 대충 알아본 적이 있다. 그녀에게 이복언니가 있지만 함께 살지 않는다고 했다.그러나 그는 이 언니의 이름이 무엇인지 개의치 않았다. 어차피 강현수도 임유라를 그다지 중요하게 생각하지
‘임유라의 백이 강현수였어?’“좋아요, 제가 약의 리스트랑 결근비 증명서 사본을 보내 줄 테니 그때 돈을 지불하세요.”“오늘 고마웠어요. 먼저 가보겠습니다.”말을 마친 임유진은 대기실에서 나갔고 방에는 강현수와 임유라만 남았다.강현수의 차가운 눈빛은 그녀를 항상 두렵게 했다.임유리는 억지로 미소를 지으며 그에게 물었다.“현수야, 왜 그런 눈빛으로 날 보고 있어? 참, 우리 언니랑은 아는 사이야?”“왜, 뭘 알아보려고?”“아니, 그냥 궁금해서, 언니가 얘기한 적 없었어.”“하긴, 네 언니는 낡고 작은 셋집에 살면서 보잘것없는 일을 하다 지금은 엑스트라를 하고 있지. 고작 몇천 원 때문에 여동생에게 고분고분해야 하는데 어찌 너에게 말하겠어.”강현수의 목소리는 냉혹하고 매서웠다.임유라에게 이렇게 차가운 목소리로 말을 건넨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그녀의 몸은 자신도 모르게 부들부들 떨렸다.“전에 우리 언니랑 오해가 있었던 거야.”“음, 무슨 오해인데 계속 무릎을 꿇게 했어?”임유라는 잠시 당황했다.“나…… 난 그냥 촬영 효과가 더 좋았으면 했어, 언니가 너무 잘해서 시범을 보여달라고 했어, 다른 생각은 전혀 없었어.”그녀는 말을 더듬거리며 억울해 보이려고 애썼지만 강현수의 눈빛은 그녀를 점점 더 긴장하게 했다.“됐어, 그런 말은 더 이상 할 필요 없어, 사람들이 믿을 것 같아?”강현수는 싸늘하게 말했다.“네가 바보인 거야 아니면 날 바보로 생각하는 거야?”그녀는 마치 모든 생각이 들킨 것만 같아 순간 안색이 창백해졌다.강현수는 임유라의 손을 마구 잡아당겼다. 가녀린 손목에는 다이아몬드가 박힌 한정판 명품 시계를 차고 있었다. 이 시계의 가격은 3억이었다.“처지가 바뀐 것 같으니 언니 앞에서 우쭐대고 싶은 거야? 이제 네가 쉽게 무릎도 꿇게 만들 수 있고 제멋대로 할 수 있는데 그녀는 반항조차 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은 거지?”강현수는 마치 별거 아닌 것처럼 말하고 있었지만 임유라는 오히려 거기에 간담이 더 서늘해졌다.
결국, 이 일은 너무나 쉽게 들켜버렸다.“내가 왜 전에 말을 안 했는지 알아? 왜냐하면 그건 나에게 큰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야, 네가 내 앞에서 그렇게 열심히 연기하는데 수고비라도 줘야 하지 않겠어?”그는 담담하게 말했다.놀란 그녀는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얼굴이 마치 누군가에게 뺨을 여러 대 맞은 것처럼 아팠다.“그런데 연기를 과하게 하면서 잘난 척하는 꼴이 너무 보기 싫었어.”강현수는 안색이 어두워지며 3억짜리 시계를 임유라의 손목에서 떼어내었다.“너를 띄워주는 건 네가 제멋대로 해도 된다는 뜻이 아니야, 난 언제나 널 망쳐버릴 수 있어.”말을 마치자 그는 손에 힘을 빼더니 명품 시계는 바닥에 떨어졌다.임유라는 놀란 채 숨을 들이쉬었고 온몸은 뻣뻣하게 굳었다. “그리고, 오늘 밤 연회에 안 가도 돼.”강현수는 말을 마치고 곧장 대기실에서 나갔으며 임유라에게 변명을 할 기회조차 주지 않았다.그녀는 안절부절못하며 바닥에 있는 그 시계를 바라보았다.‘3억짜리 시계인데, 이런 비싼 명품 시계는 차 본 적도 없는데 이걸 이런 식으로 바닥에 버리다니.’임유라는 주먹을 꽉 쥐면서 이 모든 건 임유진의 잘못 때문이라 생각했다.오늘 밤 연회는 S 시의 최고 유명 인사들의 모임이다. 그녀는 특별히 프랑스에서 드레스를 공수 해왔다. 그 만큼 이번 연회를 무척이나 기대했다. 연회를 통해 인지도를 넓히고 각계 유명 인사들을 많이 만나 인맥을 쌓고 싶었다.그러나 임유진 때문에 연회에 못 가게 되였다. ‘반드시 복수할 거야.’S 성 최고 유명 인사들의 연회는 당연히 수많은 기자들을 끌어모았다. 그러나 이런 연회는 아무 기자나 들어갈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래서 많은 기자들은 그저 연회장 입구를 막고 값진 사진을 찍는 것밖에 시도 할 수 있는 게 없었다.고급 차들은 연회장 입구에 줄줄이 세워졌다. 차에서 내리는 사람들은 모두 S 성의 각계각층의 유명 인사들이었다.갑자기 검은색 벤틀리가 입구에 세워졌다. 번호판을 본 일부 베테랑 기자들은 눈치를 챈
강지혁은 임유진의 고집에 결국 알겠다며 그녀와 함께 집에서 나와 병원으로 향했다.병원에 도착한 후 강지혁은 뒤따라온 경호원에게 임유진의 곁을 맡기고 혼자 병실로 들어갔다.안으로 들어가 보니 빼빼 마른 강문철이 흰색 병상 위에 가만히 누워있는 것이 보였다.한 시대를 주름잡았던 남자도 병마와 세월 앞에서는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었다.강문철은 강지혁이 안으로 들어온 것을 보더니 마지막 힘을 쥐어짜 입을 움직였다.“왔... 니...”“네, 저 왔어요.”강지혁이 곁으로 다가오며 대답했다.사실 강지혁은 강문철에게 대단한 가족 간의 정은 느끼지 못했다.실제로 강문철은 강지혁이 할아버지에 대한 애정을 느낄만한 행동을 보여주지 않았으니까.강문철은 언제나 강지혁을 자신의 뒤를 이어 강씨 가문의 모든 것을 물려받을 하나의 장기 말로 여겨왔다. 물론 그 장기 말도 쓸모가 없었다면 진작 버렸을 것이다.“이제는... 강씨 가문의 모든 게 네 손에... 달렸다. 만약... 네가 가문을 망하게 하면... 가만두지 않을 거야.”강문철이 숨을 몰아쉬며 힘겹게 말을 내뱉었다.“할 말은 그게 끝이에요?”강지혁이 강문철을 빤히 바라보았다.이에 강문철은 탁한 눈동자를 옆으로 굴려 병실 문 쪽을 바라보며 말했다.“임유진... 그 아가씨... 밖에 있지? 들어오라고 해...”그 말에 강지혁의 눈썹이 꿈틀거렸다.“유진이 건드릴 생각하지 마세요.”“이 꼴로... 내가 뭘 할 수 있을 것 같으냐? 어차피... 그 아가씨 옆에는... 네 사람 천지일 텐데.”강지혁은 그가 두 손으로 직접 키운 손주이자 가문의 후계자이기에 강지혁의 생각 같은 건 이미 훤히 꿰고 있었다.강지혁이 움직이지 않고 가만히 있자 강문철이 다시 입을 열었다.“그저... 마지막으로 해줄 얘기가... 있어서 그러는 것뿐이다...”호흡이 점점 가빠지고 안색도 창백해진 것이 정말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듯했다.강지혁은 잠깐 고민하다가 결국 발걸음을 옮겨 병실 밖으로 나갔다. 그러고는 곧바로 임유진의 손을
“그래? 그럼 만약... 내가 너한테 상처를 줘도 너도 똑같이 나 안 볼 거야? 내가 아무리 용서해달라고 빌어도 나 용서 안 해줄 거야?”강지혁은 목구멍을 쥐어짜는 듯한 목소리로 한마디 한마디 힘겹게 내뱉었다.이에 임유진은 몸을 돌려 이해가 안 간다는 얼굴로 강지혁을 바라보았다.“혁아, 너 대체 왜 그래? 요즘 따라 너무 불안해 보여. 무슨 일 있는 거야?”강지혁은 자신의 불안해 보인다는 말에 고개를 푹 숙였다.확실히 그는 요 며칠 줄곧 불안해하고 있었다.탁유미와 이경빈의 일을 가까이에서 지켜보며 자신과 임유진의 결말도 그들과 똑같을까 봐 불안해하고 있었다.“혹시 방금 내가 한 말이 널 불안하게 만들었어? 혁아, 내가 언니를 이해한다고 했던 건 소민준과의 일이 생각나서 그랬던 거야. 네가 괜한 생각을 할 게 아니라고. 네가 나한테 상처 줄 리가 없잖아. 그리고...”임유진은 손을 들어 조금 우울해 보이는 강지혁의 눈가를 부드럽게 매만졌다.“전에 내가 말했잖아. 네가 정말 나한테 미안해야 할 일을 했다고 해도 울면 봐주겠다고.”그녀는 강지혁의 눈에 담긴 우울함이 사라질 수 있게 일부러 환히 웃으며 얘기했다.그러자 그 말을 들은 강지혁의 눈에 조금씩 빛이 들어오기 시작했다.“유진아, 너를 향한 내 감정은 언제나 그대로일 거야. 앞으로 무슨 일이 생기든 절대 변하지 않을 거야.”강지혁은 임유진의 오른손을 들어 자신의 심장에 가져갔다.“그러니까 너도 약속해. 날 영원히 사랑하겠다고. 절대 변하지 않을 거라고. 약속해.”임유진은 그 말에 눈을 깜빡였다.탁유미와의 대화에서 사람의 감정은 언젠가는 변한다는 말에 깊이 공감했는데 눈앞에 있는 남자는 자신의 감정은 변하지 않을 거라고 하고 있다.소민준과의 관계에서 질릴 대로 질려 그에게 모든 감정이 사라진 건 사실이다. 하지만 지금 눈앞에 있는 남자를 사랑하고 있고 그와 영원히 하고 싶은 것 또한 사실이다.“응, 영원히 너만 사랑할게. 절대 변하지 않을게. 약속해.”임유진은 진지한 얼굴로 그에
임유진은 한지영이 정신을 차린 모습을 떠올리면 마음이 아프다가도 그녀가 활기를 되찾아줘서 참으로 고마웠다.한지영은 백연신과 그렇게 헤어진 후 자포자기하는 것이 아닌 적극적으로 치료에 임하며 회복에 힘썼다. 심지어 며칠 전에는 미소를 지으며 이런 말까지 했다.“고작 남자랑 헤어진 것뿐인데 뭐. 연애가 다 이런 거 아니겠어? 사랑했다가 또 헤어졌다가. 그래서 결혼까지 가는 게 기적이라는 말도 있잖아. 열렬히 사랑했으니 그거로 난 됐어. 혹시 알아? 퇴원한 뒤에 진정한 내 운명이 나를 찾아올지.”“다행이네요.”탁유미는 한지영의 말을 전해 듣고 잔잔한 미소를 지었다.“유진 씨랑 지영 씨는 나처럼 이러지 말고 정말 행복했으면 좋겠어요.”그녀는 자신의 인생에서 더 이상의 사랑은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대화를 나누던 임유진과 탁유미는 병실 밖의 누군가가 그들의 대화를 다 듣고 있는 것을 몰랐다....임유진은 탁유미에게 인사한 후 강지혁과 함께 강씨 저택으로 돌아왔다.찌뿌둥한 몸을 이끌고 2층으로 올라가려는데 강지혁이 뒤에서 그녀를 품에 끌어안았다.“왜 그래?”갑작스러운 포옹에 임유진이 물었다.사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강지혁은 오늘따라 말수가 무척이나 적었고 시선은 거의 창밖에 고정하다시피 했다.그 모습에 임유진이 몇 번이나 무슨 일 때문에 그러는지 물었지만 강지혁은 그때마다 아무것도 아니라며 대답을 피했다.“그냥... 갑자기 안고 싶어져서.”강지혁은 낮게 중얼거리며 아까 병원에서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그는 이경빈을 따라 탁유미의 병실 앞으로 왔다가 비스듬히 열린 문틈 사이로 임유진과 탁유미의 대화 내용을 들었다.탁유미가 자신에게 상처 준 사람은 다시 받아줄 생각이 없다고 했을 때 이경빈은 휘청하며 그대로 주저앉았고 입을 틀어막으며 흐느끼는 소리가 새어나가지 않게 했다.그 순간만큼은 우는 것조차도 그에게는 허락되지 않았다.“맨날 안으면서 아직도 부족해?”임유진이 실소하며 물었다.“응. 부족해.”강지혁에게는 어쩌면 평생 부족할지도 모른다
그리고 어쩌면 무의식 속에서 그 언젠가 임유진이 모든 진실을 알게 되고 그를 떠나면 그때 누군가가 이렇게 도움의 손길을 내밀어줬으면 해서 일지도 모른다....탁유미는 이틀 정도 중환자실에 있다가 모든 수치가 안정된 후 바로 일반 병실로 옮겨졌다.다만 수술은 성공적이었지만 앞으로 정기적으로 검진을 받아야만 했다.탁유미는 간호사가 들어와 약을 갈아줄 때마다 보이는 수술 자국을 보면서 조금 복잡한 마음이 들었다.그녀가 아무리 원치 않았다고 해도 지금 그녀의 몸 안에 있는 간은 이경빈의 간이었다.어쩌면 하늘이 조금은 그녀를 가엽게 여겨준 걸지도 모른다. 그래서 이런 방식으로 살게 된 건지도 모른다.윤이와 김수영은 요 며칠 거의 탁유미 곁에서 떨어지지 않다시피 했고 임유진도 자주 탁유미를 보러 병원에 왔다.“유진 씨, 미안해요. 괜히 나 때문에 힘들게 왔다 갔다 하고...”탁유미는 미안한 얼굴로 임유진의 큰 배를 바라보았다.지금쯤 집에서 태교나 들으며 휴식을 취해도 모자란 데 괜히 자신 때문에 임유진이 고생하고 있는 것 같았다.“언니, 그게 무슨 말이에요. 언니가 나였으면 안 이랬을까요? 그러니까 너무 그러지 않아도 돼요.”임유진은 말을 하며 의자에 앉았다.“나 윤이 데리고 나갈 테니까 둘이서 얘기하고 있어.”김수영이 꾸벅꾸벅 졸고 있는 윤이를 안아 들며 보호자가 쉴 수 있는 방으로 들어갔다.임유진은 두 사람이 들어간 것을 확인한 후 탁유미를 바라보며 조심스럽게 물었다.“혁이가 그러는데 이경빈 씨도 며칠 전부터는 걸어 다닐 수 있게 됐대요. 그런데... 언니 병실까지 왔다가 매번 들어오지는 못하고 다시 돌아가나 봐요.”그 말에 탁유미는 담담하게 대꾸했다.“이경빈과의 인연은 여기서 끝이에요. 어차피 이경빈도 몸이 다 나아지면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갈 거고 나는 계속 여기서 살게 되겠죠. 물론 나랑은 끝이라도 윤이랑은 부자간의 정이 있으니까 둘이서는 만나게 될지도 모르겠네요.”“이경빈 씨와는 정말 일말의 가능성도 없는 거예요?”임유진의
다시 눈을 뜬 이경빈이 보게 된 건 의사와 간호사, 그리고 강지혁이었다.마취가 아직 완전히 풀리지 않아서 그런지 통증 같은 건 없었다.“유미는... 어떻게 됐습니까?”이경빈이 힘겹게 입을 열며 물었다.“수술은 성공적으로 끝났고 탁유미 시는 지금 중환자실에 있어요. 이틀 정도 경과를 지켜봐야 한대요.”그의 말에 대답해준 건 강지혁이었다.이경빈은 그 말에 안도의 한숨을 쉬며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수술이 무사히 끝났으니 된 거다.앞으로 두 번 다시 탁유미 곁에 모습을 드러낼 수는 없지만 적어도 그녀의 몸 안에 그의 일부가 살아 숨 쉬고 있으니까, 그녀가 죽을 때까지 줄곧 함께하게 될 거니까 그것으로 됐다.그리고 그녀가 준 골수도 평생 그와 함께 할 테니 그 역시 이것으로 그녀와 평생 함께하고 있다고 생각하면 된다.이경빈은 탁유미의 상태 외에 아무런 질문도 하지 않았다. 마치 자기 몸은 어찌 되든 상관없다는 듯한 태도였다.의사가 수술 후 주의사항과 나타날 수 있는 증상들에 관해 설명해주는데도 그는 시큰둥한 얼굴로 침묵만 고수할 뿐이었다.강지혁은 그런 그를 빤히 바라보다가 의사와 간호사가 전부 다 나간 뒤 천천히 입을 열었다.“탁유미 씨 사건을 뒤엎으려고 한다고 들었는데 그렇게 되면 이강 그룹이 큰 타격을 입게 될 겁니다. 어쩌면 판결 결과에 따라 이경빈 씨는 감방살이하게 될지도 모르고요.”“알고 있어요.”이경빈이 담담하게 말했다.자신의 결정으로 그룹에 어떤 파문이 일지 그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 역시 그가 받아야 할 벌이다.복수하겠다는 생각에 매몰돼 공수진의 말만 믿고 거짓 증언한 그의 업보다.탁유미가 형을 살게 된 것에 제일 큰 공헌을 한 건 바로 그의 증언이었다.그러니 그녀를 감옥으로 보낸 건 그나 다름없었다.“정말 앞으로는 탁유미 씨 앞에 나타나지 않을 생각입니까?”강지혁이 물었다.“내가 유미를 위해 해줄 수 있는 건 많지 않아요. 그런데 유미가 그걸 원한다고 하니 나로서는 들어줄 수밖에요.”그 소원을
“임유진 씨한테 맡기려고 했는데 너를 설득하지 못할까 봐... 그래서 너와 직접 얘기하려고 들어왔어. 내 얼굴 보고 싶지 않다는 거 알아. 내 간이 너한테는 달갑게 느껴지지 않을 거라는 것도 알아. 하지만...”이경빈은 주먹을 꽉 말아쥐더니 탁유미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그래도 수술은 받아줘. 네가 수술을 받으면 그때는 두 번 다시 네 앞에 나타나지 않을게. 네가 원하는 건 뭐든 다 해줄게.”이경빈은 지금 오직 그녀가 살기만을 바랐다.그녀만 살 수 있다면 뭐든 좋았다.탁유미는 그런 그를 빤히 바라보며 물었다.“만약 나한테 간을 기증해주면 수술 후에 후유증 같은 게 생길 수도 있어. 그래도 괜찮아?”평온한 그녀의 말투에 이경빈은 잠시 얼떨떨한 표정을 짓다가 이내 눈을 크게 뜨며 물었다.“수, 수술받으려고?!”“...응.”윤이와 김수영을 위해 그녀는 한번 희망을 걸어보고 싶었다.“간을 기증해주는 대신에 뭐 바라는 거 있으면 지금 여기서 확실하게 얘기해. 너한테 빚지는 건 싫으니까. 물론 내가 수술대 위에서 죽게 되면 그때는 네가 바라는 게 뭐든 간에 들어줄 수 없게 되겠지만.”“아니! 넌 죽지 않아!”이경빈이 흥분해서 외쳤다.“분명히 괜찮을 거야. 네 골수를 이식받았을 때 나는 아무런 거부반응도 없었어. 그러니까 내가 너한테 주는 것도 괜찮을 거야. 걱정하지 마!”이경빈은 확신에 찬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았다.“그래서 조건은? 그것부터 말해.”탁유미의 말에 이경빈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조건이라니, 그녀에게 간을 기증해주는 대신 바라는 게 있다고 하면 그녀가 멀쩡히 살아 숨 쉬는 것밖에 없다.그녀가 살 수 있다면 간 따위 몇 번이고 더 기증해줄 수 있다.“바라는 거 없어. 그리고 나한테 빚진다고 생각하지 않아도 돼. 오히려 지금은 내가 너한테 빚진 걸 갚는 거니까. 너도 그때 나한테 골수를 기증해줬잖아.”“그래? 그럼 서로 빚진 게 없는 거네? 알았어. 수술 무사히 끝나면... 우리 더는 보지 말자. 나는 더 이상 너랑
“유진 씨? 유진 씨가 여기는 어떻게 왔어요?”탁유미가 깜짝 놀라며 임유진에게 물었다.“이경빈 씨 전화를 받고 왔어요.”임유진은 탁유미의 곁으로 다가가며 말했다.“언니, 수술해요. 지금이 마지막 기회예요. 이 기회를 포기하면 그때는 정말 돌이킬 수 없어져요.”“유진 씨!”탁유미는 갑작스러운 임유진의 말에 당황해하며 그녀의 이름을 크게 불렀다. 그러고는 서둘러 윤이를 바라보았다.임유진은 윤이가 바로 그녀의 마음을 돌릴 수 있는 마지막 희망이라는 것을 알기에 태연한 표정이었다.“언니가 남은 시간을 편히 보내고 싶은 건 알겠어요. 그리고 수술 결과가 안 좋으면 그 남은 시간마저 사라지게 될까 봐 두려워하는 것도 알겠고요. 하지만 언니... 만약 수술에 성공하면 그때는 윤이가 어른이 되는 모습까지 볼 수 있어요.”임유진은 말을 하며 자신의 복부를 쓰다듬었다.“언니, 만약 그때 내가 배 속의 아이를 한 명 지우는 걸 택했으면 어쩌면 아이들이나 나나 조금 더 안전했을 수도 있어요. 하지만 그랬으면 결코 지금 같은 행복감은 느끼지 못했을 거예요. 나는 그때 의사 선생님들의 권고에도, 혁이의 반대에도 결국 아이를 포기하지 않았어요. 아이들과 함께 이겨내고 싶었어요. 그러니까 언니도 할 수 있는 건 다 해봤으면 좋겠어요. 쉽게 이번 기회를 놓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윤이도 언니가 그러기를 바랄 거예요. 세상에 엄마를 일찍 보내고 싶어 하는 자식은 없으니까요. 윤이를 위해서라도 포기하지 말아줘요.”탁유미는 그 말에 몸을 움찔하더니 시선을 돌려 어리둥절한 표정의 아들을 바라보았다.윤이는 임유진의 말을 다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한 가지만은 본능적으로 알아들었다.“엄마, 윤이는 엄마가 아무 데도 가지 말고 윤이랑 함께 있었으면 좋겠어요. 이제 윤이가 키도 크고 힘도 세지면 그때는 윤이가 엄마를 지켜줄게요!”탁유미는 그 말에 결국 눈물을 보였다.윤이는 서둘러 침대 위로 올라가더니 앙증맞은 손으로 하염없이 흐르는 그녀의 눈물을 부드럽게 닦아주었다.그때 병실
임유진은 그 말에 깜짝 놀라며 얼른 답했다.“알겠어요. 지금 당장 병원으로 갈게요!”“임유진 씨...”전화를 끊으려던 그때 기어들어 갈 듯한 이경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내가 웬만하면 이런 부탁을 하지 않는데 지금은 임유진 씨 말고는 부탁할 사람이 없어서 이렇게 부탁 좀 할게요. 제발... 제발 유미 좀 설득해주세요. 유미가 내 간을 받고 수술할 수 있게 제발 도와주세요...”임유진은 그의 간절한 부탁에 저도 모르게 멈칫했다.그간 자주는 아니지만 그래도 이경빈과는 몇 번 만난 적이 있다. 그래서 그가 얼마나 자존심이 강한 남자인지 임유진은 아주 잘 알고 있다.그런데 그런 남자가 지금 탁유미의 목숨 때문에 제발이라는 말까지 하며 그녀에게 간절히 부탁하고 있다.만약 이대로 탁유미가 죽게 되면 이경빈은 어쩌면 평생 지옥 속에서 살지도 모른다.“알겠어요.”“무슨 일이야?”전화를 끊자마자 옆에 있던 강지혁이 물었다.“유미 언니 지금 병원에 있대. 지금 바로 간이식 수술을 받지 않으면 언니가 위험하대.”임유진은 자리에서 일어나며 외투를 챙겼다.“언니가 수술받을 수 있게 설득하러 가야겠어.”“같이 가.”“너는 아직 처리해야 할 일이...”“저녁에 다시 하면 돼. 너 혼자 보내는 게 걱정돼서 그래.”“내가 왜 혼자야. 네가 붙여둔 경호원분들이 있는데. 걱정하지 마.”“그래도 걱정돼.”강지혁이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솔직히 그는 마음 같아서는 외딴 섬을 하나 사들여 임유진을 그 섬에 데리고 가 자신의 시야 안에서만 있게 하고 싶었다.임유진은 그의 고집스러운 말에 결국 알겠다며 같이 밖으로 향했다.병원.탁유미가 있는 병실 앞으로 뛰어와 보니 문밖 의자에 앉아 고개를 푹 숙인 채 머리를 꽉 쥐고 있는 이경빈의 모습이 보였다.“언니는 어떻게 됐어요?”임유진이 다가와 물었다.이경빈은 그 말에 고개를 번쩍 들고 임유진을 쳐다보았다.임유진은 이경빈과 눈이 마주친 순간 몸이 움찔했다.이경빈이 지독하게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있었기 때문이다.
이경빈은 더 이상 시간을 지체할 수 없어 그대로 탁유미를 안아 들고 윤이에게 말했다.“지금 당장 엄마 데리고 병원으로 갈 거야. 윤이도 엄마 아픈 거 싫지?”윤이는 그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이경빈을 따라 차량 쪽으로 달려갔다.차 문이 열린 후 이경빈은 탁유미를 조수석에 내려놓았고 윤이는 아무 말 없이 서둘러 뒷좌석에 올라탔다.아이는 시트에 편히 등을 기대는 것이 아닌 몸을 앞으로 하며 잔뜩 긴장한 얼굴로 탁유미를 바라보며 말했다.“엄마, 조금만 참아요. 병원에 가면 의사 선생님들이 엄마 구해줄 거예요. 그러면 하나도 안 아플 거예요!”탁유미는 그 말에 남은 힘을 끌어다 애써 웃어 보였다. 아들의 걱정 가득한 얼굴을 보고 싶지 않았다.“엄마는 괜찮아... 조금만 있으면 금방 괜찮아져.”모자의 대화에 이경빈은 가슴이 미어져 서둘러 시동을 걸고 병원으로 향했다.가는 길 그는 혹여 아픈 소리를 내면 윤이가 걱정할까 봐 이를 꽉 깨물고 참는 그녀를 보며 문득 과거의 한 장면이 떠올랐다.그날 탁유미는 그와 나란히 걷던 도중 울퉁불퉁한 바닥에 그만 넘어지고 말았다. 분명히 아플 텐데도 그녀는 괜찮다며 엉덩이를 툭툭 털고 일어서더니 아무렇지도 않은 척 다시 걸었다.그러다 날이 어두워지고 집에 거의 도착할 때쯤 그녀의 발걸음은 티가 나게 느려졌고 이에 이상함은 여긴 이경빈은 그녀의 발을 힐끔 봤다가 그제야 퍼렇게 멍든 그녀의 발목을 발견했다.“바보야? 왜 아프다고 말을 안 해?”이경빈의 추궁에 탁유미는 그의 눈빛을 피하며 우물쭈물 답했다.“아프다 그러면 또 걱정할 거잖아. 그리고 솔직히 이 정도는 집에 가서 약 바르면 금방 나아.”탁유미는 늘 이랬다. 늘 이렇게 자기보다는 옆에 사람을 더 위하며 자기가 받는 고통은 아무렇지 않은 것으로 치부해버렸다.그녀는 그런 여자였다.이경빈은 차량이 빨간 불에 멈출 틈을 타 티슈를 꺼내 탁유미의 땀을 닦아주었다.많이 아픈 건지 그녀의 얼굴은 어느새 땀 범벅이 되었고 고통을 참느라 이빨에게 혹사당한 입술은 빨갛