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만 이번에는 때린 사람과 맞은 사람이 바뀌었다.김선아는 얼굴을 가린 채 믿기 힘든 표정을 지었다.“지금 날 때린 거야?”“당신도 날 때리는데 난 왜 당신을 때릴 수 없어요?”임유진이 반문했다. 책임을 져야 하더라도 두 사람은 같을 것이다.“네가 뭔데. 고작 삼류스타가 날 때려?”선아는 정말 화가 나서 미칠 지경이다.유진은 비록 선아가 말하는 스타가 아니지만…….“그럼 당신은 무슨 자격으로 날 때려요? 그쪽도 삼류스타였잖아요. 그 당시 강현수 때문이 아니면 오늘이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그쪽이 오늘 이토록 화를 내며 트집을 잡는 것도 강현수와 헤어졌기 때문이잖아요? 모든 걸 잃을까 봐 그러잖아요. 강현수가 당신의 모든 것을 만들어줬잖아요. 그쪽이 진짜 나보다 높은 레벨에 있는 거 같아요?”유진의 말에 선아는 얼굴이 빨개졌다. 특히 다른 사람들이 보고 있어 선아는 도무지 얼굴을 들 수가 없었다. 선아는 화가 치밀어올라 손을 들어 뺨을 때리려고 했다.하지만 그때 누군가가 선아의 손을 잡았다.선아는 흠칫 놀랐다.그때 선아의 뒤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선아야, 지금 뭐 하는 짓이야?”선아가 몸을 부르르 떨며 고개를 돌려보자 잘생기고 차가운 얼굴이 화난 듯한 눈빛으로 선아를 바라보았다.선아는 순간 등골이 오싹한 느낌이 들었다. 선아는 당연히 현수의 눈빛에서 극도의 불쾌감을 느낄 수 있었다.“현수 씨가 이곳에 있다는 것을 듣고 난…… 현수 씨를 찾으러 왔어…….”선아는 말을 더듬거렸다.“날 찾으러 왔다고?”현수는 유진의 빨갛게 부은 뺨을 힐끔 보았다.“맞은 거예요?”현수는 선아의 부은 얼굴은 무시한 채 유진에게 물었다.“저도 때렸어요.”유진이 대답했다.“한 번만 때려도 되겠어요?”현수는 아주 평범한 일을 말하는 것처럼 덤덤하게 말했다.유진과 선아는 멍을 때렸다. 유진이 어리둥절한 사이 선아는 무엇을 알아차린 것처럼 순간 얼굴이 창백해지더니 몸을 떨기 시작했다.“몇 대 더 때리고 화풀이를 하는 게 어때요? 오늘 김선
그 당시 인터넷에서 강현수가 김선아를 아주 아낀다고 했다. 선아가 주연을 하고 싶으면 만들어주고 감독과 사이가 안 좋으면 감독을 바꿔버리고 선아를 위해 S시에서 제일 호화로운 레스토랑을 통째로 빌려 생일파티까지 열어주었다…….이 정도로 선아를 아꼈기에 사람들은 선아가 부잣집 며느리가 될 수 있을 줄 알았다.하지만 누가 이렇게 될 줄 알았겠는가!그 시각 선아가 이토록 애원해도 현수의 얼굴에는 조금의 동정도 없었다. 아니, 조금의 감정도 없다고 말하는 것이 더 정확하다!김선아든 임유진이든 똑같다!지금 현수는 유진의 편을 들면서도 유진을 아주 차갑게 바라보았다.마치 그 누구든 진정으로 현수에게 다가갈 수 없으며 잠시 곁에 머물 수 있지만 영원히 현수의 마음속에 들어갈 수 없는 것 같았다.선아는 현수에게 부탁해도 소용이 없자 유진에게 말했다.“방금은 내가 잘못했어요. 너그럽게 용서해 줘요. 그리고…… 현수에게 사정 좀 해줘요. 내가 이렇게 부탁할게요. 현수 씨가 당신을 이토록 아끼니 당신이 말하면 들어줄 거예요.”선아는 두려웠다. 유진에게 화풀이를 당할까 두려운 게 아니라 현수의 심기를 건드려 연예계에서 끝날까 봐 두려웠다.그때 유진이 선아를 바라보았다.“사람 잘못 봤어요. 저는 강현수의 여자친구가 아니에요. 그러니 내가 사정해도 소용없어요.”말을 하고는 현수에게 말했다.“한 대 맞고 한 대 때렸으니 공평한 셈이에요. 그러니 더 때릴 필요 없어요.”“그래요?”현수는 덤덤하게 말했다. 목소리에는 조금의 감정도 없었다.“강현수 씨, 밥 잘 먹었어요. 대접해 줘서 고마워요. 집에 가서 쉬고 싶으니 이만 갈게요.”유진은 말을 하고는 자리를 떴다.현수는 유진의 뒷모습을 보더니 다시 얼굴에 핏기 하나 없는 선아를 바라보았다.그 시각 선아의 눈동자에는 눈물이 가득 차 있다. 그 눈물은 언제든지 떨어질 것 같았다. 아름다운 얼굴은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고 지금 이 순간 너무 애처로워 보여 사람들의 동정을 산다.현수는 선아의 눈가를 가볍게 닦았다.
“그녀라면 울지 않았겠지.”강현수가 알 수 없는 말을 했다.두려움이 극도로 향해 결국 김선아가 소리를 질렀다.“도대체 누구야? 그녀가 누구야? 강현수, 넌 그 여자만 사랑하지. 하지만 넌 영원히 그 여자를 가질 수 없을 거야. 넌 항상 다른 사람의 감정을 무시하잖아, 언젠가 그 여자도 네 감정을 무시할 거야!”현수는 갑자기 발걸음을 멈추고 선아를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그 순간 그 차가운 눈동자는 순간 오싹하게 변했다. 하지만 현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다시 고개를 돌리고 자리를 떴다.선아는 순간 다리에 힘이 풀린 채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방금 현수의 눈빛은 마치 선아를 죽이려는 것 같았다.선아는 완전히 끝났다는 것을 직감했다.…….임유진은 레스토랑을 나와 찬바람을 맞으니 얼얼했던 얼굴이 조금 나아지는 것 같았다.오늘 밤은 마치 한바탕의 해프닝인 것 같았다.그때 갑자기 핸드폰이 울리기 시작했다. 어머니의 고향 쪽의 친척이었다.전화를 받자 외할머니가 입원하셨다고 했다.“유진아, 큰삼촌, 둘째 삼촌과 셋째 이모 그리고 네 큰 사촌오빠, 둘째 사촌오빠, 사촌 언니까지 지금 모두 구치소에 있어. 경찰들이 말하는 게 몇 년 동안 감옥살이를 해야 할 수도 있대. 만약 네 할머니가 돌아가신다면 임종을 보낼 자식조차 없어.”친척은 유진이 경찰서에 가서 사건을 철회하라고 한다.“네 할머니를 위해서라도 그들을 풀어줘!”친척이 한마디 더 이었다.“그리고 아무리 그래도 친척인데 너무 극단적으로 행동하면 안 돼!”유진은 어이가 없었다. 친척이면서 큰삼촌은 왜 그렇게 극단적으로 행동했을까?하지만 이제 유진이 인정하는 유일한 가족은 외할머니뿐이다.통화를 마친 후 유진은 곧바로 택시를 잡아 시골 주소를 말했다.“아가씨, 이렇게 늦은 시간에 그쪽으로 가려면 5만 원은 줘야 해요!”기사가 말했다.“알겠으니 출발해요.”유진은 돈이 얼마나 들든지 병원에 가서 외할머니를 직접 봐야 한다고 생각했다.그리고 유진이 병원에 도착했고 병상에 누운 채 링거를 꽂
둘째 외숙모는 큰삼촌의 행동을 정당화하려는 것 같았다.하지만 그 시각 무슨 말을 하든 임유진은 아무것도 듣지 못한 것처럼 멍하니 병상에 누워있는 외할머니를 바라보고 있다.유진이 신경 쓰는 것은 외할머니뿐이다.갑자기 외할머니의 입이 움직이는 것 같았으며 혼수상태에서 무엇인가 말하는 것 같았다.유진이 머리를 외할머니의 입가에 대자 흠칫 놀랐다. 외할머니는 큰삼촌, 둘째 삼촌, 셋째 이모의 이름을 말했다.유진은 덤덤하게 병실을 나섰다. 그때 큰 숙모와 둘째 숙모가 유진을 따라 나오더니 무조건 사건 철회를 약속하라고 했다.유진이 차갑게 말했다.“왜 제가 사건을 철회해야 해요? 먼저 날 가족으로 여기지 않은 건 당신들이에요. 그런데 제가 왜 당신들을 가족으로 여겨야 해요?”“이 양심도 없는 기집애야, 할머니에게 미안하지도 않아?”큰숙모가 화를 내며 말했다.“할머니에게 미안하든 말든 제 일이에요. 적어도 난 당신들에게 미안한 일은 하지 않았어요. 오히려 당신들의 남편, 아들이 나한테 미안한 짓을 했죠. 그렇지 않으면 지금 그들이 경찰서에 있지 않았겠죠!”큰숙모는 너무 화가 나 말을 잇지 못했다.유진이 곧바로 병원을 떠나려던 순간 큰숙모가 쫓아오려 했지만 둘째 숙모가 막았다.“유진이를 건드리지 마요. 유진이를 보호하는 대단한 가문이 있는데 만약 유진이를 화나게 해 형벌을 가중하면 어떻게 해요?”“감히!”큰숙모가 노발대발했다.“휴, 유진이가 그럴 능력이 있든 말든 말할 필요 없어요. 그럼 필사적으로 달려들 거예요? 그러면 형님까지 체포돼요!”둘째 숙모가 말했다.큰숙모는 그 말을 듣더니 흠칫 놀랐다. 화가 났지만 두려워 더 이상 유진을 쫓아가지 못했다.유진은 택시를 타고 다시 S시로 돌아갔다. 하룻밤 동안 대부분의 시간을 길에 허비했다. S시에 도착하자 날이 거의 밝았다.유진은 밤새 잠을 자지 못하고 새벽 5시에 또 도로 청소를 시작했다.“유진 씨, 어제 제대로 못 잤어? 컨디션이 안 좋은 거 같아.”서미옥이 유진을 바라보며 말했다.“
임유진은 마지막 희망이라고 생각하고 그 전화번호에 전화를 걸어볼 수밖에 없다.통화연결음만 하염없이 들리고 받는 사람이 없다.유진은 포기하지 않고 두 번, 세 번 걸었다…….한편 GH그룹 대표실에는 지금 여러 임원이 조용하게 그 싸구려 핸드폰을 바라보고 있다.회사의 임원들은 대표가 평소 핸드폰을 두 개 갖고 다닌다는 것을 알고 있다. 하나는 평소 대표님이 쓰는 핸드폰이고 하나는 싸구려 구형 핸드폰이다.그리고 그 핸드폰의 출처에 대해서는 아마 대표의 비서인 고이준만 알고 있다. 그들이 너무 궁금하여 고 비서에게 여러 번 물었지만, 고이준은 웃기만 하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하여 임원들은 사석에서 서로 그 핸드폰에 대해 많은 추측을 했다. 이전이라면 강 대표님은 핸드폰이 울리는 동시에 전화를 받았다.하지만 오늘 핸드폰이 여러 번 울렸지만 강 대표님은 바라만 볼 뿐 받지 않았다. 그리고 그 잘생긴 얼굴은 아주 차가웠다.하여 임원들은 호기심에 찬 눈빛으로 고이준을 바라보았다.그리고 강지혁의 옆에 서 있던 고이준도 울리는 핸드폰을 보면서 걱정하기 시작했다.이 핸드폰으로 전화를 걸 수 있는 사람은 아마 유진 혼자일 것이다.그리고 그날 유진이 그렇게 지혁을 거절했다. 고이준은 보스의 곁을 오랫동안 따라다녔기에 그날 이후 강 대표님의 기분이 아주 나쁘다는 것을 눈치채고 있었다.그리고 유진이 갑자기 전화를 걸었지만 강 대표님은 받지 않았다. 이는 또 무엇을 의미하는가?강 대표님은 더 이상 유진을 신경 쓰지 않는 것일까?아니, 고이준은 강 대표님이 자신의 짐작보다 유진을 더 신경 쓴다고 생각했다.만약 정말 유진을 잊었다면 이 핸드폰을 버릴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강 대표님은 여전히 그 핸드폰을 가지고 다니고 있다. 강 대표님이 유진을 잊을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하는가?정말 의외이다.강 대표님 같은 남자가 유진을 원할 줄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하지만 하필 유진이 거절했다.15분 뒤, 드디어 핸드폰이 더 이상 울리지 않았다.지혁은 그제야 나른
오후에 GH그룹 사무실 건물에 가도 강지혁을 만날 수 있을지는 장담할 수 없다. 하지만 그곳에 가는 것 외에는 어디로 가야 지혁을 만날 수 있을지 모른다.생각해 보니 임유진은 지혁에 대해 너무 모른다. 심지어 지혁이 어디에 사는지조차 모른다!오후에 유진이 GH그룹에 도착한 뒤 지혁은커녕 경비원에게 제지당해 문조차 들어갈 수 없었다.그리고 유진이 지혁을 만나겠다고 했을 때, 사람들은 유진을 비웃었다.“강 대표님을 만나고 싶으면 만날 수 있다면 강 대표님은 바빠 죽을 거예요! 당신처럼 강 대표님을 만나고 싶어 하는 사람이 매일 얼마나 많은 줄 알아요?”“다른 사람은 강 대표님을 만나기 전에 꾸미기라도 하는데 당신의 옷차림으로 강 대표님을 안다고 하면 누가 믿겠어요?”유진은 고개를 숙이고 자신의 옷차림을 바라보았다. 싸구려 노점상의 옷이라 아주 투박했다.이 경비원들의 눈에는 단지 일자리를 찾으러 온 사람으로 보일 것이다.그리고 유진이 유일하게 할 수 있는 일은 자리를 지키는 것뿐이다. 유진은 패딩을 입은 채 GH그룹 건물 옆에 서 있었다.겨울의 찬 바람이 쌩쌩 불자 찬바람이 패딩 사이로 들어와 너무 추웠다.유진은 손을 비비며 건물 입구를 바라보았다. 유진은 지혁이 나오기를 간절하게 바랐다.물론 유진은 빌딩의 출입구가 여기 한 곳만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지만, 지금 유진이 할 수 있는 것은 그 출구를 지키는 것일 뿐이다.그때 유진의 눈빛이 초롱초롱해졌다. 고이준이 차에서 내려 건물로 들어가려 했다.“고 비서님!”유진이 다급히 소리 질렀다. 유진은 지혁의 주변 사람이라고는 고 비서밖에 모른다.이준이 소리를 따라 보자 유진이 눈에 들어와 다소 의외인 듯 흠칫 놀랐다.“임유진 씨, 어떻게 여기에 있는 거예요?”이준이 유진에게 다가가 공손하게 말했다.“저는…….”유진은 입술을 살짝 깨물더니 초조하고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강지혁 씨를 만나고 싶어요. 하지만 저는 건물 안으로 들어갈 수가 없어요. 고 비서님, 저를 데리고 강지혁 씨를 만나
임유진이 들어가자 고이준이 문을 가볍게 닫았다.유진을 데리고 들어간 것은 유진의 말 몇 마디 때문이 아니라 강지혁이 유진을 아주 중요하게 여기기 때문이다.아마 강 대표님은 단지 유진이 마음을 돌리기를 바랄 수도 있다. 방금 유진의 난처한 얼굴을 보니 강 대표님에게 더할 나위 없이 좋은 기회일 수도 있다.여기까지 생각하니 이준의 기분이 자기도 모르게 좋아졌다.그 시각 비서실에 있던 비서가 호기심에 찬 표정으로 이준에게 물었다.“고 비서님, 방금 대표실로 들어간 여자는 누구예요?”여자의 옷차림으로 보아 대표실에 들어갈 수 있는 사람 같지 않았다.그때 이준이 담담하게 대답했다.“알 필요 없어요. 알아야 할 때가 되면 자연히 알게 될 거예요.”그전에는 함부로 혀를 놀리면 강 대표의 금기를 범하는 것이다.…….사무실 안, 유진은 불안한 모습으로 서서 책상 앞에서 서류를 보고 있는 지혁을 바라보고 있다. 아주 어색한 분위기가 맴돌았다.이전에 유진은 입버릇처럼 지혁의 곁에 있는 것을 거절했고 유진은 그 이후로 두 사람은 더 이상 아무런 관계도 아니라고 생각했다.그러나 그 말을 번복하는 시기가 이렇게 빨리 올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불과 며칠 지나지 않아 유진은 또 지혁의 앞에 섰다.다만 지금의 지혁은 유진이 처음 보는 모습이다.이렇게 큰 사무실에서 지혁은 네이비 색상의 정장을 입고 앞머리를 반듯하게 빗어 포만한 이마를 드러냈다. 긴 속눈썹에 복숭아꽃 눈동자로 열심히 서류를 보고 있다.라인이 아름다운 목에는 하늘색 넥타이가 있다.지혁의 긴 손가락은 검은색 사인펜을 쥐고 있었으며 펜을 잡고 서류에 서명하는 모습이 아주 우아했다.순간 지혁의 목소리가 고요한 분위기를 깼다.“누나는 그렇게 계속 날 보려고 온 거야?”유진은 지혁이 아직도 누나라는 호칭을 부를 줄은 생각지도 못해 흠칫 놀랐다.유진은 그 호칭이 자신을 비웃는 것 같았다. 유진은 아주 순진하게 지혁을 집으로 데려와 동생으로 여겼다.“할 말이 있어.”유진은 메마른 입술을 핥고 말했
“난 단지 경찰이 그들을 풀어주기를 바랄 뿐이야. 네 말 한마디면 가능한 일이잖아.”임유진이 급하게 말했다.“말 한마디로 가능한 일이 맞아. 그런데?”유진의 초조한 모습과 달리 강지혁은 아주 아주 덤덤하게 말했다. 유진은 주먹을 꽉 쥐더니 한숨을 쉬고는 지혁을 바라보았다.“그럼 어떻게 해야 그들을 풀어줄 거야?”지혁의 눈빛이 어두워지더니 잡고 있던 펜을 내려놓고 천천히 유진에게 다가갔다.지혁은 가볍게 유진의 손을 잡았다.“누나, 손이 아주 차가워.”유진의 몸이 굳었다. 지혁의 손과 비교하니 유진의 손은 아주 차가웠다.지혁은 고개를 숙이고 유진의 손을 잡더니 손을 녹여주었다.아주 능숙한 동작이었다. 아주 부드럽고 조심스러운 동작이 마치 아끼는 보물을 다루는 것 같았다.‘맙소사!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유진은 자신에게 잡생각을 하지 말라고 외쳤다.그때 지혁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누나, 손이 따뜻해진 거 같아?”“응…… 좀 따뜻해졌어.”유진은 무의식적으로 손을 빼려고 했지만, 지혁이 유진의 손을 꽉 잡았다.“피하지 마. 조금 더 따뜻하게 해줄게.”지혁이 말했다.유진은 의심스러운 눈빛으로 지혁을 바라보았다. 방금 전의 냉담한 모습과 지금의 부드러운 모습은 마치 두 사람인 것 같다.손은 점점 따뜻해졌지만 유진의 마음은 점점 더 불안해지는 것 같았다.“어떻게 해야 그들을 풀어줄 거야?”유진은 견디지 못하고 다시 물었다.“누나는 왜 갑자기 그들을 풀어주겠다고 생각을 바꾼 거야?”지혁은 대답하지 않고 반문했다.“외할머니의 건강이 좋지 않아 병원에 입원하셨는데 외할머니가 더 이상 이 일로 걱정하는 것을 원하지 않아.”유진이 사실대로 말했다.“그래? 누나는 할머니가 아주 중요한가 봐. 불과 며칠밖에 지나지 않았는데 할머니 때문에 나한테 찾아와서 부탁하네.”지혁은 마치 첼로를 연주하는 것처럼 부드럽게 말했다.유진은 공기에 온통 지혁의 숨결인 것 같았으며 온몸의 피가 지혁이 잡고 있는 두 손으로 솟구치는 것 같았다.
이경빈은 이제야 그날 탁유미가 웃으며 고맙다고 했던 말의 의미가 뭔지 알아챘다.아주 조금의 감정마저 남지 않게 만든 그에게 철저하게 실망하고 그로 인해 그를 완전히 내려놓게 된 게 틀림없었다.정말 그는 너무나도 멍청한 사람이었다!차량이 멈춘 후 기사는 이경빈에게 도착했다고 하려다가 그의 얼굴을 보고 깜짝 놀랐다.“대표님, 입술에 피가...!”이경빈은 그 말에 천천히 눈을 뜨더니 기사의 시선을 따라 손으로 입술을 매만졌다.얼마나 세게 깨물었던 건지 입술에 피가 흥건했다.하지만 그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손으로 피를 닦아내더니 아무 말 없이 문을 열고 차에서 내렸다.입원 병동으로 들어가려는 그때 탁유미와 김수영, 그리고 일전 그녀의 병실을 지켰던 경호원 두 명이 함께 병동에서 나오는 모습이 보였다.경호원들의 손에 짐이 들려있는 것으로 보아 퇴원하려는 것 같았다.이경빈은 서둘러 그들 앞으로 다가가 탁유미에게 물었다.“퇴원하려고? 벌써?”탁유미에게 가까이 다가가려는데 경호원들이 빠르게 그를 제지했다.탁유미는 이경빈의 얼굴을 보고는 금방 미간을 찌푸렸다.‘그날 알아듣게 얘기한 것 같은데 왜 또 여기 있는 거야?’“너랑 상관없는 일이니까 비켜.”“하지만 네 몸은 아직 입원해있는 게...!”이경빈은 말을 끝까지 하려다가 멈칫했다.입술이 파르르 떨리고 안색이 갑자기 안 좋아진 것이 이 이상 말을 하고 싶어 하지 않는 것 같았다.그녀가 아프다는 걸 인정하고 싶지 않았으니까.“며칠 더 입원해있는 게 좋지 않을까? 치료도 안 끝났을 것 같은데.”이경빈은 억지로 말을 끝마쳤다.“필요 없어. 내 몸이 어떤지는 내가 제일 잘 아니까.”탁유미는 싸늘하게 말을 내뱉은 후 다시 앞으로 걸어갔다.“잘 안다고? 그런 사람이 이렇게 빨리 퇴원하려고 해? 너 정말 이대로 죽고 싶기라도 한 거야?!”이경빈이 다급하게 그녀의 팔을 잡으려 하자 경호원들이 더 빨리 다가와 그의 어깨를 잡았다.탁유미는 발걸음을 멈추고 조금 의아한 눈으로 이경빈을 바라보더니 이내
철썩.둔탁한 마찰음 소리에 공수진은 휘청거리며 다시 바닥에 쓰러졌다.옆으로 힘껏 돌아간 그녀의 얼굴에는 빨간 손자국이 그대로 나 있었다.하지만 공수진은 아픔을 못 느끼는 건지 빈정거림을 멈추지 않았다.“그 여자 결백을 찾아주고 싶지? 하지만 그럴 시간은 없을 거야. 네가 찾아주기도 전에 저세상으로 가버릴 테니까!”이경빈은 그 말에 눈을 부릅뜨고 공수진을 노려보았다.“유미가 병에 걸린 걸 알고 있었어? 언제부터?”공수진은 이경빈의 얼굴을 보며 미친 듯이 웃어댔다.“하하하하. 이경빈 너 진짜 등신이구나? 너 정말 그 여자 좋아하는 거 맞아? 그런데 어떻게 나보다 더 몰라?”그녀의 말대로 이경빈은 등신이 맞다. 누가 진정한 은인인지도 모르는데 등신이 아니고 뭘까?그래서 지금 벌을 받는 것이다. 멍청했던 대가를 이제야 받고 있는 것이다.“그래, 나 등신 맞아. 하지만 그렇다고 네 죄가 사라지는 건 아니지. 너희 집안은 평생 감옥에서 썩게 될 거야.”이경빈은 말을 마친 후 공수진의 얼굴을 더 보고 싶지 않다는 듯 성큼성큼 차로 다가갔다.공수진은 그의 뒷모습을 보며 마치 미친 사람처럼 외쳐댔다.“이경빈, 탁유미가 죽는 날 네가 어떤 얼굴을 하고 있을지 내가 꼭 지켜볼 거야! 네가 어떤 말로는 맞이하는...”탁.이경빈은 평소보다 세게 차 문을 닫으며 공수진의 목소리를 차단했다.그는 천천히 눈을 감은 후 기사에게 지시를 내렸다.“병원으로 가지.”“네, 대표님.”차량에 시동이 걸리자 그는 시트에 등을 기댔다.“간암 3기예요. 현재로서는 간이식 수술을 받는 것밖에 언니 목숨을 살릴 길이 없어요. 만약 언니한테 사죄하고 싶다면 언니한테 이경빈 씨 간 일부를 기증해주세요.”임유진의 목소리가 귓가에 맴돌았다.간 일부를 기증하라고? 탁유미를 위해서라면 그는 간 전부를 기증할 수도 있다.간암 3기가 어떤 상태인지, 그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이경빈은 알고 있다.그간 탁유미가 보였던 고통을 참는 듯한 증상은 모두 간에 암이 퍼지고 있는 신호였다.
공한철은 이경빈의 기에 눌려 손에 땀이 차기 시작했다.“경빈 씨, 혹시 아직도 화 나 있는 거예요? 기증 일은 내가 거짓말한 게 맞지만 그건 다 경빈 씨를 사랑해서 그런 거예요. 나는 경빈 씨가 나를 모르고 있을 때부터 쭉 경빈 씨를 좋아하고 있었어요. 아니, 사랑하고 있었어요. 그래서 거짓말도 무릅쓰고 내가 기증해줬다고 한 거예요! 내가 경빈 씨를 속인 건 맞지만... 그게 범법 행위까지는 아니잖아요...”공수진은 자신은 잘못한 게 없다는 얼굴로 당당하게 말을 했다.이에 이경빈은 시선을 돌려 공수진을 빤히 바라보았다.“내가 아닌 우리 집안을 사랑하는 거겠지. 더 정확히는 우리 집 재산을. 공수진, 네 그 욕심 때문에 나는 인생이 망가졌어!”“거짓말한 건 미안하게 생각해요. 사과할게요. 그러니까 우리 다시 시작해요. 네?”공수진은 전과 같은 유약한 얼굴을 하며 그를 붙잡았다.“나 정말 경빈 씨 사랑해요. 경빈 씨 속상하게 만든 거 내가 다 잘못했어요. 탁유미 씨한테 사과하라고 하면 얼마든지 사과할게요. 보상도 할게요! 그러니까 우리 다시 잘해봐요. 나 정말 경빈 씨 없으면 못살아요!”“사랑이라고? 사랑한다는 사람을 그렇게도 감쪽같이 속여? 다른 사람에게 피해까지 주면서? 탁유미를 범죄자로 몰아가 결국 감방에까지 보낸 게 나를 향한 사랑의 표현이야? 탁유미만 사라지면 우리 집 며느리로 들어오는 게 쉬울 것 같았어? 그래?!”이경빈은 공수진을 턱을 으스러질 듯 잡으며 분노를 표출했다.손아귀 힘이 어찌나 센지 공수진은 자신의 턱뼈가 이대로 부서질 수도 있겠다는 느낌이 들었다.하지만 고통도 고통이지만 이경빈이 그때 당시의 진상을 모두 알아버렸다는 것에 그녀는 심장이 쿵 하고 떨어졌다.‘어떻게 된 거지? 이경빈이 그때 일을 다 알아버렸다고? 증거는 이미 내가 다 소거했는데?! 그래, 그냥 추측일 뿐일 거야. 실질적인 증거는 없는 게 분명해!’“오, 오해예요.”공수진이 힘겹게 말을 이어갔다.“나는 탁유미 씨를 범죄자로 몰아간 적 없어요. 나는
네티즌들은 공수진과 주원호에게 각종 비난과 욕을 해댔고 대대적으로 기사가 난 탓에 병원 관계자들도 공수진의 병실을 지나칠 때마다 한심하다는 눈빛을 보냈다.공수진은 그들의 눈빛에 제대로 고개를 들 수 가 없었고 이를 깨물며 하루빨리 퇴원하기만을 기다렸다.하지만 드디어 다가온 퇴원하는 날, 한결 가벼운 마음으로 병원을 나섰지만 그녀를 기다리는 건 아침부터 진을 치고 기다린 기자들이었다.“공수진 씨, 현재 인터넷에서 떠돌고 있는 동영상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이강 그룹 대표의 약혼녀로 알고 있는데 이경빈 씨는 동영상에 대해 뭐라고 하던가요? 결혼식은 예정대로 진행하시는 겁니까?”“유산한 아이가 이경빈 씨의 아이가 아니라 영상 속 남자분의 아이라는 소문이 있던데 맞습니까?”“탁유미 씨를 음해하려고 일부러 밀쳐진 척 넘어져 유산했다고 들었는데 사실입니까?”연이은 날카로운 질문에 공수진의 얼굴은 흙빛이 되어버렸다.“찍지 마세요! 찍지 마시라고요!”공씨 부부는 공수진이 지나갈 수 있게 고용한 경호원들과 함께 그녀의 앞을 막아섰다.기자들을 뚫고 간신히 차에 오른 후 공수진은 이를 바득바득 갈았다.“탁유미 때문에 이게 뭐야!”만약 탁유미가 아니었으면 자신이 이런 꼴을 당할 일도 없었을 거라며 그녀는 모든 걸 다 탁유미 탓으로 돌렸다.“일단 S 시를 떠나는 게 좋겠다. 며칠 뒤에 사태가 조금 잠잠해지면 그때 다시 경빈이 불러서 얘기하는 거로 해.”공한철의 말에 차량은 고속도로로 향했다.그렇게 20분쯤 달렸을까, 갑자기 어디서 나타난 건지도 모를 검은 차들이 거리를 바짝 좁혀오며 공수진네 차를 에워싸기 시작했다.끼익.“뭐야, 저것들은!”공한철이 눈을 부릅뜨며 화를 냈다.하지만 그것도 잠시 그는 정차된 앞차에서 내린 사람을 보고는 그대로 몸이 굳어버렸다.공씨 일가를 막아선 건 다름 아닌 이경빈이었다.이경빈이 내리자 검은 차에서 내린 부하직원들이 하나둘 공수진 일가를 차에서 끌어내기 시작했다.“경, 경빈 씨, 이게 지금 뭐 하는 거예요?
“하지만...”임유진은 말을 하려다가 순간 깜짝 놀라며 두 손으로 자신의 배를 끌어안았다.“왜 그래?”강지혁이 잔뜩 긴장한 채로 물었다.“방금 아이가 내 배를 찼어!”임유진은 이쯤이면 태동이 느껴질 거라는 건 이미 알고 있었다.전까지는 거의 착각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태동이 미약했는데 방금 그건 정말 누가 뭐라 해도 확실한 태동이었다.심지어 지금도 계속해서 배를 차고 있다.“아이가 네 배를 찼다고?”강지혁은 시선을 그녀의 배로 옮겨 조금 얼떨떨한 얼굴로 바라보았다.“응! 한번 만져봐.”임유진은 그의 손을 들어 자신의 복부를 만지게 했다.강지혁은 확실하게 느껴지는 태동에 조금 놀랍기도 하고 또 신기하기도 해 그만 몸이 경직되어버렸다.태동이라는 게 무엇이고 언제쯤 느낄 수 있는지에 대해 그도 임유진 못지않게 잘 알고 있다.하지만 이론은 어디까지나 이론으로 실제로 이렇게 태동을 느끼게 되니 완전히 다른 느낌이었다.이제야 진정으로 이 작은 배속에 생명이 자라고 있다는 것이 확실하게 머리에 박히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이 조그마한 아이들은 머지않아 세상 밖으로 나오게 될 거고 크게 울고 또 활짝 웃으며 서서히 커가게 될 것이다.임유진은 강지혁의 넋을 잃은 표정에 피식 웃었다.평소에도 물론 상당히 귀엽지만 지금은 평소보다 몇 배는 더 귀여워 보였다.이런 얼굴은 아마 그녀밖에 보지 못했을 것이고 앞으로도 그녀밖에 보지 못할 것이 분명하다.임유진은 소파에 앉아 편한 자세를 취했다. 그리고 본격적으로 아이가 차고 있는 곳이 어딘지 그의 손을 이곳저곳 움직이며 알려주기 시작했다.아이들은 큼지막한 아빠의 손길을 느껴서 그런지 그에 보답하듯 더 세게 발길질을 해댔다.덕분에 임유진의 배는 계속해서 꿈틀거렸다.강지혁은 무릎을 꿇고 그녀의 복부를 쓰다듬으며 진지한 얼굴로 태동을 느꼈다.임유진은 그 모습을 보더니 결국 참지 못하고 휴대폰을 꺼내 사진을 찍기 시작했다.“갑자기 사진은 왜 찍어?”강지혁이 고개를 들며 물었다.“기념하려고. 나중에
강지혁은 꼭 무엇을 무서워하고 있는 것 같았다.대체 뭘?혹시 진기태와 연관이 있는 건가?아까 진기태는 분명...임유진은 순간 뭔가 알아차린 듯 고개를 들며 그에게 물었다.“혁아, 너 혹시 내가 화낼까 봐 무서워서 이러는 거야?”그녀의 말에 강지혁은 몸은 또다시 굳어졌고 호흡도 다시 거칠어졌다.그는 그녀의 질문에 대답을 하는 것이 아닌 조금 더 그녀를 제 품에 끌어안았다.‘정답인가 보네.’강지혁은 지금 진기태가 마지막에 한 말 때문에 그녀의 눈치를 보고 있다.‘하긴 아까 엄청 세게 화를 내기는 했지.’강지혁은 아까 꼭 다른 사람이 된 것 같은 모습으로 진기태를 협박했다.꼭 건드려서는 안 될 것이 건드려진 것 같은 모습이었다.“걱정하지 마. 화 안 낼 거니까.”강지혁이 떨리는 목소리로 임유진에게 물었다.“정말...? 정말 화 안 내?”“응. 안 내.”임유진은 미소를 지으며 두 손으로 그의 얼굴을 감쌌다.“진 회장이 너 찾아온 거 진가원 프로젝트 때문이지? 네가 내 복수를 해주겠다고 이러는 거, 나 알아. 그러니까 걱정하지 마. 고작 그 사람 말 때문에 우리 사이가 흔들릴 일은 없으니까.”강지혁은 흔들리는 눈빛으로 임유진을 바라보았다.“그 인간이 했던 말, 정말 신경 안 써?”“응. 그때는 너도 내가 누군지 몰랐을 때잖아. 그때의 나는 그저 너한테 네 약혼녀를 차로 죽인 사람일 뿐이었어. 너한테 잘 보이겠다고 사람들이 일부러 나를 더 괴롭히기는 했지만 그게 네 탓은 아니니까. 그러니까 너 원망할 생각 없어.”임유진은 강지혁을 빤히 바라보며 그의 눈가를 부드럽게 매만졌다.“사실 너랑 사귀고 너를 정말 사랑하게 됐던 순간부터 나는 그 일을 이미 내 마음속에서 지웠어. 그리고 너도 그랬잖아. 만약 조금만 더 빨리 나를 알게 됐으면 절대 내가 그런 고통을 겪게 하지 않았을 거라고.”그녀의 말에 강지혁의 눈빛이 더욱 심하게 흔들렸다.그녀는 그가 무서워하는 게 그저 그 이유일 뿐일 거라고 생각하고 있다. 방관한 것으로 여태 이렇게까
그때 사무실 문이 열리고 진기태가 안에서 걸어 나왔다.다만 진기태는 몸을 비스듬히 한 채 앞이 아닌 사무실 안을 바라보고 있어 임유진의 존재를 전혀 알아채지 못했다.“강지혁, 네가 뭘 잊고 있는 것 같은데 임유진이 그렇게 된 건 네 탓도 있어!”진기태의 분노 어린 말에 임유진은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으며 저도 모르게 앞으로 두어 걸음 걸어갔다.그러자 그때 사무실 안에서 익숙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거기서 한마디만 더 하면 그때는 진화 그룹과 당신 가문을 완전히 없애버릴 거야.”임유진은 비스듬히 열린 문틈으로 소파에 앉아 있는 남자를 바라보았다.강지혁은 평소와 달리 분노가 가득 찬 얼굴을 하고 있었고 심지어 그 예쁜 두 눈에 살기도 어려 있었다.‘살기...? 내가 뭘 잘 못 본 건가?’진기태는 강지혁의 위협에 겁을 먹고는 그의 눈을 피하려 서둘러 고개를 돌렸다. 그러다 드디어 임유진과 눈이 마주쳤다.그는 임유진의 얼굴을 보더니 금세 험악한 표정을 지었고 곧바로 씩씩거리며 자리를 떠났다.강지혁도 그때쯤 임유진이 밖에 있다는 것을 눈치챘고 그는 그녀를 보더니 그대로 몸이 뻣뻣하게 굳어버렸다.서둘러 분노를 지우고 평소와 다를 것 없는 부드러운 표정을 지으려고 해봤지만 눈가에 서린 당황함과 초조함은 감춰지지 않았다.진기태와의 대화를 들은 걸까?만약 들었으면 어떡하지?임유진이 이상함을 눈치채고 멀리하려고 들면...강지혁은 그 생각에 순간 호흡하는 것조차 곤란해지며 온몸이 차갑게 식었다.임유진은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사무실 안으로 들어왔다.“혁아, 방금 진기태 회장이랑...”“일 얘기 했어. 일 얘기만...”강지혁은 서둘러 대답하며 평정심을 되찾으려고 애썼다.하지만 심장은 여전히 비정상적으로 빨리 뛰고 호흡은 점점 더 딸리기 시작했다.“너 얼굴이 왜 그래? 괜찮아?!”임유진은 창백한 그의 얼굴이 걱정돼 쓰다듬으려 손을 뻗었다.하지만 얼굴에 닿기도 전에 강지혁에 의해 손이 저지당하고 말았다.“난... 괜찮아.”임유진은 강지
“지혁아, 아무리 그래도 너랑 우리랑은 사돈이 될 뻔했던 집안이잖냐. 그간의 정도 있는데 꼭 이렇게까지 해야겠어?”진기태가 먼저 말을 꺼냈다.“진가원 프로젝트는 우리한테 아주 중요한 프로젝트야. 너희가 가져가봤자 사업에 크게 도움이 되지도 않을 텐데 굳이 왜 그걸 가져가려고 해.”“진화 그룹도 이제는 슬슬 무대 아래로 내려가야 하지 않겠어요?”강지혁이 담담하게 말하며 그를 바라보았다.잔뜩 긴장한 진기태와 달리 그는 아주 여유롭다 못해 느긋해 보이기까지 했다.“우리 그간 사업 파트너로서 좋은 관계를 잘 이어왔잖아. 뭐 서운한 거 있으면 그냥 나한테 직접 얘기해. 내가 해줄 수 있는 거라면 뭐든...”“그럼 진화 그룹과 진화 그룹 산하의 모든 회사를 다 저한테로 넘기세요.”강지혁의 말에 진기태의 얼굴이 한순간에 변했다.모든 회사를 다 넘기라니, 그건 헐벗고 거지가 되라는 말과도 같았다.“너...!”진기태는 주먹을 꽉 말아쥐며 강지혁을 바라보았다.“너 대체 왜 이렇게까지 하는 거니? 설마...”그때 그의 머릿속으로 한가지 이유가 떠올랐다. 하지만 몇 초도 안 돼 아무리 강지혁이 미친놈이라고는 해도 그 이유는 아닐 것이라고 생각했다.‘그래.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강지혁이 여자 하나 때문에 멀쩡한 가문 하나를 없애버리려 한다는 게 말이나 되는 소리야? 하지만...’하지만 그거 말고는 강지혁이 갑자기 이러는 게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진씨 가문과 강지혁 사이에 갈등이 있다고 하면 그건 임유진이 감옥에 간 일밖에 없으니까.“너 혹시... 임유진 때문은 아니지?”진기태는 설마 하는 마음으로 이 말을 입밖에 내뱉었다.“왜 아닐 거라고 생각하세요?”강지혁은 아주 빠르게 인정했다.“허...!”진기태는 강지혁이 정말 임유진 하나 때문에 이런다는 얘기를 듣고 기가 막혀 말도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하, 하지만 그 일은 그때 세령이가 이미 대가를 치렀잖아!”일전 진세령은 임유진을 건드렸다는 이유로 강지혁에 의해 어쩔 수 없이 연예계에서
하지만 아무리 내리쳐도 고통은 가실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윽...”이경빈의 머릿속으로 당시의 장면이 하나둘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탁유미는 그때 이경빈에게 자신은 억울하다고, 자신이 그런 게 아니라고 수백 번을 더 말했다.하지만 그 말을 들었음에도 그는 전혀 믿어주지 않았고 오로지 탁씨 가문에 복수할 것만을 생각하며 공수진이 그렇게 된 게 전부 탁유미 때문이라고 확정을 지었다.그때는 그렇게 해야만 모든 게 끝날 줄 알았다. 비참한 그녀의 말로를 봐야만 가슴속의 응어리가 다 사라질 줄 알았다.그는 법을 무기로 그녀의 몸을 잔인하게 찔러댔다.그리고 이윽고 그녀의 자존심과 순박함 그리고 세상을 믿는 그 맑은 눈을 완전히 부숴버렸다.“경빈이 너는 운명을 믿어?”“글쎄. 너는?”“나는 믿어. 그리고 그 운명과 평생 함께한다는 얘기도 믿어. 운명이라면 서로 말고는 눈에 들어오는 사람이 없을 거야. 만약 다른 누군가가 눈에 들어오면 이전 사람은 운명이 아니었던 거지. 경빈아, 나는 네가 내 운명의 사람이라고 믿어.”“날 진심으로 사랑한다는 말이 하고 싶은 거야?”“응. 나는 이번 생에 이경빈이 아닌 다른 남자를 좋아하고 사랑할 계획은 없거든. 난 너만 사랑할 거야!”너만 사랑할 거라는 말을 했던 탁유미의 얼굴은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그녀는 정말 자신의 모든 것을 다 그에게 내어줄 수 있을 정도로 그를 사랑했다.하지만 그는 그런 그녀의 사랑을 짓밟고 더럽히고 또 처참하게 버렸다.임유진은 면회실에서 나와 천천히 이경빈의 앞으로 다가갔다.바닥에 엎드린 채 몸을 덜덜 떠는 그를 보며 그녀는 담담한 목소리로 물었다.“이경빈 씨는 언니한테 목숨을 한번 빚졌어요. 그 목숨 다시 언니한테 줄 수 있어요?”이경빈은 그 말에 고개를 들더니 처연하게 웃었다.“내 목숨 같은 거 유미한테 큰 가치가 없을 거예요... 하지만 만약 유미가 원한다면 내 목숨 따위 언제든지 내어줄 수 있어요.”만약 탁유미가 그의 목숨을 원한다면 그는 몇백 번이고 죽어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