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약 강지혁이 진짜 임유진을 도와 소씨 가문에 복수한다면 소씨 가문은 틀림없이 망하게 될 것이고 S시의 명문 가문에서 소씨 가문은 제명될 것이 분명했다.“강…… 강 대표님, 난…….”소민준은 다급히 변명하려 했다.하지만 임유진이 그의 말을 끊고 강지혁에게 말했다.“그럴 필요 없어. 이미 헤어졌으니 나에게는 모르는 사람이야. 난 교통사고로 저 사람과의 감정을 잘 정리 할 수 있었다는 걸 오히려 다행이라고 생각해.”소민준의 얼굴 표정은 아주 비참했다. 한편 임유진은 말을 하면서 처음부터 끝까지 소민준의 얼굴을 단 한 번도 보지 않았다.“그럼 됐어.”강지혁은 일어나 소민준에게 다가가 그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유진이 복수하길 원하지 않으니 그녀에게 고마워해요. 그렇지 않으면 내년 이맘때면 S시에서 SY그룹을 볼 수 없을 거예요.”소민준은 흠칫 놀라며 임유진에게 감사를 표하고는 재빨리 소민영을 부축하여 병실을 나섰다.병원을 나오자 남매는 마치 다시 살아난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오빠, 강지혁이 임유진 어디가 마음에 들어서 만나는 거 같아?”소민영이 화를 내며 말했다.“내가 지난번에도 말했잖아. 임유진을 건드리지 말라고.”소민준은 화가 치밀어올랐다.“임유진은 강지혁을 내세우면서 위세를 부리는 거야! 만약 강지혁이 옆에 없으면 임유진이 뭐라도 되긴 해?”소민영은 방금 당한 치욕에 임유진이 죽일 듯이 미웠다.“만약 그녀가 복수하겠다고 했으면 우리 가문이 아주 힘들어졌을 거라는건 알아?”적어도 그 점은 임유진에게 정말 고마웠다. 적어도 임유진이 그를 지옥으로 밀지는 않았으니까.“설마 강지혁이 고작 환경미화원 하나 때문에 소씨 가문을 건드릴까?”“네 생각에는?”소민준은 자신의 동생을 노려보았다.“아무튼 넌 우리 가문을 위해서라도 임유진을 건드리지 마. 그렇지 않으면 우리 가족도 널 구하지 못할 거야. 넌 지금 우리 가문을 위험하게 만들고 있어!”소민영은 몇 마디 더 하고 싶었지만 방금 병실에서 있던 일을 생각하니 몸이 움츠러들어 더
“거절하면 안 되지?”그녀가 물었다.그의 눈빛이 반짝이더니 얼굴의 웃음기가 조금씩 사라졌다. 그리고 그는 천천히 몸을 곧게 펴고 위에서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아니, 거절해도 돼. 나는 누나에게 거절할 권리를 줄 거야. 단지…….”그는 머뭇거리다 웃는 듯 마는 듯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누나, 정말 거절할 거야?”임유진은 순간 시간이 멈춘 느낌이 들었다. 만약 승낙한다면 그녀는 많은 것을 얻을 수 있을 것이고 더 나아가 자신의 운명까지도 바꿀 수 있을 것이다.만약 다른 사람이 그녀에게 이런 말을 했다면 그녀는 아마 바로 승낙했을 것이다.하지만 강지혁…… 그녀는 강지혁에게 일종의 두려움을 가지고 있다. 그가 그녀를 괴롭힌 적은 없지만 그의 말 한마디에 그녀는 감옥에 가 온갖 고생을 했다.3년 동안의 지옥 같던 생활, 심지어 법정에서조차 변호사들은 교통사고에서 죽은 사람이 강지혁의 약혼녀라는 사실을 알고 모두 그녀의 변호를 거절했다.게다가 그 사실관계가 증명되지 않은 증거들과 증인들이 모두 그녀가 술을 마셨다고 주장했고 그때 그 모든 것이 그와 관련이 있는지 없는지 그녀는 알 수가 없었다.그는 마치 악몽처럼 그녀를 억누르면서 숨을 쉴 수 없게 만들었고 그의 정체를 알고 난 뒤로 그녀는 그가 다가오기만 하면 몸이 자신도 모르게 굳었다.그가 그녀와 약간의 신체 접촉이라도 하면 그녀의 몸은 주체할 수 없이 떨렸다.어떻게 이런 남자의 곁에 있을 수 있을까?그녀는 깊은숨을 들이쉬고 떨리는 몸을 억지로 버티며 말했다.“응, 거절하고 싶어.”그의 낯이 어두워지고 검은 눈동자가 차갑게 물들었다.“정말 거절할 거야?” “응.”그녀가 대답했다.그러자 그가 차갑게 웃었다.“좋아. 내가 여자에게 거절당할 줄 몰랐네. 임유진, 잘 생각해. 내 보호가 없으면 S시에서 네가 어떻게 될 거 같아? 소씨 가문, 진씨 가문이 널 괴롭히지 않는다고 쳐. 너 정말 한평생을 길거리 청소하며 살 거야?”그녀는 입술을 깨물며 말했다. “그건 내 일이야.”
“강 대표님만 동의한다면 임유진 씨는 언제든지 퇴원할 수 있어요.”의사가 말했다.임유진은 갑자기 복잡한 생각이 들었다. 이제는 퇴원조차도 강지혁의 동의를 받아야 한다고?“네, 알겠습니다.”그녀가 대답했다.의사와 간호사가 떠난 후 그녀는 화장실에 들어가 거울 속의 자신을 바라보았다. 거울 속 청아한 얼굴, 수려한 눈썹, 살구 같은 눈동자, 오뚝한 코와 분홍색 입술이 불빛 아래에서 한 줄기 빛을 띠고 있었다.일반인들과 비교하면 꽤 괜찮은 얼굴이지만 강지혁의 곁에는 화려한 미인이 많아 그 사람들 비교하면 그렇게 뛰어난 외모도 아니다.강지혁은 도대체 그녀의 무엇이 마음에 들었을까? 임유진은 쓴웃음을 지었다. 그녀가 처음에 그를 노숙자로 오해한 일을 그는 재미있다고 느꼈다. 아무튼 강지혁은 이 남매 게임을 계속하고 싶은 걸까?그녀는 손을 들어 자신의 입술을 가볍게 어루만졌고, 머릿속에는 그가 그녀에게 키스하던 광경이 스쳐 지나갔다.그녀는 지영이가 했던 말이 기억났다.“유진아, 네 입술이 예쁜 거 알아?”“입술이 예쁘다고?”그녀는 지금까지 입술에 신경 쓴 적이 없다. 단지 입술이 못생기지 않았을 뿐 그다지 특별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맞아. 아주 예뻐. 네 입술을 보면 키스하고 싶은 충동이 들어. 음…… 남자들이 원하는 그런 입술 모양이야.”그때 그녀는 웃기만 했다. 정말 이상한 표현이다!그리고 지금, 강지혁과 키스했다는 걸 떠올리면 자연스럽게 입술이 뜨거워졌다.‘더 이상 생각하지 마, 더 이상 생각하지 마!’임유진은 끊임없이 마음속으로 말했다. 그리고 그날 강지혁이 그녀에게 선택의 기회를 주겠다고 말한 건 거짓말이 아닐 것이다.그와 같은 남자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그냥 모든 것을 꿈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단지 꿈일 뿐이다. 꿈속에서 그녀는 혁이라는 남자를 알게 되었고 그들은 서로를 소중히 여기고 행복하게 지냈었다. 하지만 지금은 꿈에서 깨어났으니 그녀는 혼자일 수밖에.임유진은 화장실을 나와 병원으로 온 날 입었던 옷으로 갈아입었다
“네.”고이준은 곧바로 대답하고는 강지혁을 따라 저택에서 나와 병원으로 향했다.강지혁이 병실에 들어서자 임유진은 점잖게 소파에 앉아있었다.그렇다, 말 그대로 정말 점잖다.그녀는 허리를 곧게 펴고 두 손을 무릎에 둔 채 교과서적인 자세로 앉아 있었다.“퇴원하려고?”강지혁이 물었다.“응.”그녀는 대답을 하면서 그의 목에 있는 목도리에 시선이 갔다. 그녀가 직접 짠 목도리이다. 그가 겨울을 따뜻하게 지내길 바라면서 짠 것이다.하지만 그녀는 쓸데없는 짓을 한 거다. 그에겐 목도리도 아주 많고 따뜻한 겨울을 보낼 방법도 아주 많아 그녀가 선물한 목도리 따위 필요 없을 것이다.“다시 한번 선택의 기회를 줄게. 잘 생각하고 대답해 줘. 정말 내 곁에 있지 않을 거야?”그가 물었다.여태껏 그는 다른 사람에게 두 번의 기회는 주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는…… 예외인 것만 같았다.그녀는 머리를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마치 저기압으로 가득 찬 것처럼 주위의 공기와 함께 사람을 갉아먹을 것만 그의 눈빛에 압박감이 느껴졌다.그 순간, 그녀는 일종의 위기감을 느꼈다. 뭔가 대답을 잘못한다면 그녀는 다시 돌아오지 못할 것만 같았다.거절? 아니면 승낙?강지혁의 곁에 남기만 한다면 그녀의 운명은 바뀔 수도 있다.하지만…… 그가 이 관계에 질려버린다면 그녀는 어떤 결말을 맞이할까? 지금보 더 비참해질까?그리고 그는 강지혁이다. 그녀에게는 악몽과 같은 남자였다. 감옥에 있을 때, 심지어 한때는 그의 이름만 들어도 그녀는 몸을 부들부들 떨고 그를 두려워했다.출소 후에 조금 나아졌지만 그의 곁에 계속 있는다면 그 두려움은 그림자처럼 따라다닐 것이고 다시는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응, 난…… 혼자 지내고 싶어. 누구의 곁에도 있고 싶지 않아.”그녀는 침을 꿀꺽 삼키며 대답했다.순식간에 그의 낯은 더 어두워졌고 그의 차가운 눈빛을 본 그녀는 마치 얼어 죽을 것만 같았다.“후회 안 해?”그의 목소리는 위협적이다.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순간 임유진의 몸이 굳었다. 그렇다, 그녀가 아무리 크게 비명을 지른다하더라도 그 누가 들어와서 그녀를 구할 수 있겠는?그녀를 구하면 강지혁과 대립하는게 된다. 누가 그렇게 멍청할까!그녀가 생각에 빠져있을 때 그의 입술이 그녀의 입술에 닿았다.‘싫어! 그러지 마!’그녀는 거의 무의식적으로 그의 입을 덥석 물었다.그리고 그녀의 입에 갑자기 피비린내가 진동했다. 임유진은 흠칫 놀랐다. 그것은……바로 강지혁의 피였다. 그녀가 방금 그의 혀를 깨물었던 것이었다..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여전히 키스를 하며, 그녀가 억지로라도 그의 피를 삼키도록 강요하고 있었다!얼마나 오래 한 건지 키스가 끝날 쯤에는 그녀 입술이 저리고 입에서는 피비린내가 나 죽을 지경이었다.“맛있어?”강지혁이 가볍게 말하면서 입꼬리를 씩 올리자 입꼬리를 타고 붉은 피가 흘러내렸다.그의 옅은 미소에 선홍빛 피가 더해지자 그가 더 멋져 보였다.그녀의 입에서 나는 피비린내는 정말 강렬했고 피가 섞인 침이 마찬가지로 그녀의 입가를 타고 흘러내렸다.그는 손가락을 들어 그녀 입가의 선홍색 피를 가볍게 닦았다.“내 피를 마신 여자는 처음이야. 누나 덕분에 처음 겪는일들을 정말 여러 번 겪었어.”“날 좀 놓아줘.”그녀가 씁쓸하게 말했다.“그렇게 내 곁에 있는 게 싫어?”강지혁은 질문을 하며 그녀의 머리카락을 가볍게 어루만졌다.그의 행동은 부드러웠지만 그녀는 자기도 모르게 몸을 부들부들 떨었고 약간의 소름이 돋았다.“난 단지…… 편안하게 살고 싶어.”그녀는 매번 침을 삼킬 때마다 그의 피를 마시고 있는 것 같았다.“내 곁에 있는 것이 불편해?”그는 웃으며 말했다.임유진의 몸은 순식간에 굳었고 눈을 감고 꼼짝도 할 수 없었다.몸부림이 소용없다면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감내할 뿐.그녀는 감옥에 있을 때 이걸 깨달았다.강지혁은 임유진의 입술에 키스를 했고 그녀의 목에도 키스를 하고 있다…….‘참자, 참자, 강지혁이 아니라 혁이라고 생각해.’그녀는 마음속으로 끊임
그 긴 그림자는 화장실 밖에 서 있었다. 아름다운 얼굴은 온데간데없고 깊은 어둠만이 드리워져 있었다.강지혁은 칠흑 같은 눈동자, 음산한 얼굴로 그녀를 쳐다보았다.“내가 그 정도로 역겨워?”그녀의 창백한 얼굴과 움츠러든 몸은 마치 그를 엄청 먼 곳으로 밀어 떨어뜨린 것 같았다.강지혁은 얇은 입술을 꼭 오므리고 있었다. 그에게 왜 이런 여자가 필요한 것일까? 그는 강지혁인데 S시에서 어떤 여자든 자신의 여자로 만들어 가질 수 있을 텐데.그녀는 그저 평범한 여자일 뿐이다, 물론 조금 재미는 있지만…… 그리고 그도 자신을 이렇게 싫어하는 여자를 원하지 않을 것이다.“좋아. 임유진, 내가 역겨우면 널 놓아줄게.”강지혁이 말하는 순간 그 복숭아꽃을 닮은 눈동자는 차가움만 가득했다.“하지만 미리 말할게. 앞으로 네가 후회해도 난 널 원하지 않을 거야. 난 강지혁이야. 두 번의 기회는 주지 않아.”말이 끝나자 그는 바로 머리를 돌려 병실을 나갔다.임유진은 여전히 두 팔로 세면대를 받치고 있었다. 마치 모든 힘을 다 써서 이미 녹초가 된 것 같았다.그 말은…… 그녀가 퇴원해도 된다는 의미일까?그녀는 헝클어진 옷을 다시 정리하고 머리를 빗은 뒤 거울 속 창백한 자신을 보며 쓴웃음을 지었다.임유진이 병원 대문까지 걸어갔을 때쯤 갑자기 어떤 사람이 그녀에게로 달려왔다.“저 사람이야. 저 여자가 교통사고로 사람을 죽인 임유진이야!”“세상에, 정말 이 병원에 입원해 있었네! 사람을 죽이고 3년 만에 출소하다니. 목숨 하나에 3년은 너무 짧잖아!”“세령이가 그 당시 언니 때문에 얼마나 많이 슬퍼했다고! 저 여자 때문에 그렇게 슬퍼한 거야! 저 사람이 세령이가 언니를 잃게 만들었어!”사람들은 입으로만 말하는 것이 아니라 손에 들고 있던 나뭇잎과 썩은 계란까지 임유진을 향해 던졌다.임유진은 최선을 다해 피했지만 전부 피하지는 못했다.그리고 옆에서는 기자들이 사진을 찍고 있는데, 마치 기사를 만려고 준비하는 것 같았다.멀지 않은 곳, 검은색 벤틀리 차 안에
임유진은 초라한 모습으로 임대주택에 돌아왔다. 구정 전날 떠났다가 오늘 돌아오기까지 불과 며칠의 짧은 시간이었지만 마치 인생 만사를 다 겪은 것만 같았다.돌아온 좁은 셋방의 공기 중에는 마치 차가운 기운이 배어 있는 것만 같았다. 임유진은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오늘부터 임유진은 혼자다.이제 아무도 그녀와 함께 지내지 않을 것이고 깊은 밤 인적이 드문 시간에도 그녀는 그 누구와도 이야기를 나누지도 못할 것이다. 당연히 웃으면서 그녀를 누나라고 불러 줄 사람도 없을 것이다.그녀는 갈아입을 옷을 챙겨 자신의 초라해진 몰골을 씻고 나서 다시 방을 정리하기 시작했다.물론 강지혁이 이곳에 산 기간은 길지 않지만 방안에는 수 많은 그의 흔적이 남아있었다. 그가 사용했던 그릇과 젓가락, 컵, 수건과 칫솔, 그가 입었던 옷과 신발까지…….그녀는 그 물건들을 하나하나 정리하고 종이 박스에 넣었다.‘왜 버리지 않고?’그녀는 스스로 질문했다.그 물건들은 쌓아두면 자리만 차지할 뿐이다. 하지만 그녀는 이렇게나마 그것들을 쌓아두고 싶다. 이렇게 말하면 웃기겠지만 그녀는 혁이와 같이 지내던 시간이 그립다.분명히 그때 혁이는 허황된 것이고 강지혁이 만들어 낸 허상에 지나지 않지만…… 혁이를 향한 그녀의 마음속 감정은 진심이다!혁이와 있던 날들은 정말 즐거웠고 더 이상 혼자가 아닌 것만 같았다.임유진은 마지막으로 침대 머리에 놓여 있는 만들다 만 장갑을 집어 들었다. 원래 시간을 내서라도 완성하려고 했지만 지금은…… 영원히 완성될 수가 없는 장갑.임유진은 장갑을 만들던 바늘과 털실을 박스에 넣은 다음 테이프로 포장하고 구석에다 보관했다.앞으로 그녀는 혼자 살게 될 것이고 혁이는 그저 꿈속의 한 사람에 불과하다.임유진은 이렇게 자신에게 말했다.저녁이 되자 그녀는 방에 불을 끄지 않고 채로 잠에 들었다. 출소 후 혁이가 없을 때 그녀는 항상 이렇게 불을 켜놓고 잤다. 어둠이 감옥에서의 일을 떠올리게 하기 때문이었다.그러나 혁이와 같이 지내게 된 후 그녀는 언제부
그 증거들과 증인들의 진술에 대해서는 지금까지도 이해가 되지 않는다.“도대체 그 사람들은 왜 널 괴롭히는 거야. 아무것도 모르면서 비판만 하잖아.”한지영은 분노했다.하지만 임유진은 평온한 거 같았다.“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야.”한지영은 친구의 몸에 생긴 상처를 떠올리고 자신도 모르게 한숨을 쉬었다. 출소한 그녀를 데리러 갔을 때 그녀의 상처를 본 적이 있었다. 새로 생긴 상처도 있고 오래된 상처도 있었다.감옥에서 무슨 일을 겪었는지 모르지만 대충 짐작할 수 있었다.아마 유진이는 감옥에서 엄청나게 고생했을 것이다.“혁이가 진짜 강지혁이야?”한지영은 화제를 바꾸어 물었다.“응.”임유진이 고개를 끄덕였다.“하지만…… 왜 강지혁이 노숙자 행세까지 하면서 너랑 같이 임대주택에서 그렇게 오랫동안 지낸 거야?”한지영은 아무리 생각해도 납득이 가지 않았다. 설마 강지혁에게 특별한 취미가 있는 것일까?“그에게는 게임일 뿐이야.”임유진이 씁쓸하게 말했다. 임유진이 직접 그에게 이런 말을 들었을 때에는 정말 숨이 콱 막혔었다.그녀에게 그렇게 잘해주던 혁이, 그녀의 손을 따뜻하게 해주고, 그녀를 기다리고, 조용하게 그녀의 하소연을 들어주던 혁이가 단지 게임을 위해 만든 캐릭터라는 걸 듣게 된 순간 그녀의 가슴은 쿵 하고 내려앉았다.“게임?”한지영은 이해할 수 없었다.“맞아. 부자들은 일상이 지루해 시간을 보내려고 게임을 하는 거야.”임유진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한지영은 순간 어떻게 친구를 위로해야 할지 고민했다. 그녀는 임유진이 제일 싫어하고 두려워하는 것이 그녀를 속이는 것임을 잘 알고 있었다.강지혁은 유진에게 정말 큰 충격을 가했다.임유진은 머리를 들어 싱긋 웃었다.“난 괜찮아. 걱정하지 마. 그리고 지금은 그와 아무 사이도 아니야. 게임은 이미 끝났어. 어차피 내가 손해 본 것도 없고 그냥 원래 내 혼자의 삶으로 돌아갔을 뿐이야.”하지만 그녀의 미소에 한지영은 눈물이 났다.“그럼 내가 여기로 이사 올게. 나랑 같이 살자.”“
“네.”한지영은 고개를 끄덕이며 연우진을 보냈다.가만히 서서 기다리고 있자니 갑자기 속이 울렁거려 그녀는 근처 쓰레기통 앞으로 가 음식물을 게워냈다.그렇게 한참을 토하던 그녀는 오늘 먹었던 것을 다 비우고서야 주섬주섬 가방을 더듬으며 티슈를 찾았다.하지만 아무리 찾아도 티슈가 손에 잡히지 않았다.그때 웬 손수건 하나가 그녀의 눈앞에 나타났다.“고마워요.”한지영은 눈을 게슴츠레 뜬 채 그것이 손수건인지 티슈인지 확인도 하지 않고 입가를 쓱 닦았다.야무지게 다 닦고서야 그녀는 손에 든 것이 티슈가 아닌 손수건이었다는 것을 알아챘다.“어... 이거는 내가 내일 세탁해서 다시 줄게요.”한지영은 말을 하면서 서서히 고개를 들었다.당연히 연우진이 건넨 손수건이라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눈앞에 있는 사람은 너무나도 익숙한, 5년간 틈틈이 그녀의 꿈에 나타나던 남자의 얼굴이었다.슈트 차림의 남자는 머리를 완전히 빗어 올린 채 훤한 이마를 드러내고 있었다. 환한 달빛 때문인지 원래부터 예뻤던 얼굴이 오늘따라 더더욱 예뻐 보였다.세월의 흔적 같은 게 존재하지 않는 남자의 얼굴을 한지영은 말없이 가만히 바라보았다.“끅...”술 냄새를 가득 담은 딸꾹질과 함께 조용했던 침묵이 깨졌다.“오랜... 만이에요.”한지영의 입에서 먼저 말이 흘러나왔다. 술을 마셨던 터라 말이 느려지고 또 버벅거렸다.“너 취했어.”백연신이 눈을 가늘게 뜨며 말했다.“술을 좀 마셨어요.”한지영은 눈앞의 남자를 두 눈에 똑바로 담으려는 듯 눈을 크게 뜨기 위해 노력했다.“아까 그 남자는... 남자친구야?”백연신이 물었다.“남자친구?”한지영은 눈을 깜빡이다 갑자기 피식 웃었다. 술에 취해있어 그런지 그 웃음이 어쩐지 바보 같아 보였다.“아... 우진 씨는 오늘 소개팅한 남자예요. 괜찮은 사람이었어요. 첫 만남인데도 대화도 잘 통하고...”한지영은 말을 하며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술기운 때문인지 두 눈이 심하게 요동치고 있었다.그간 백연신을 향한 마음을 접으려고
“그건 아니고 이제껏 설렌다는 느낌이 들었던 여성분이 없었어요.”설레는 느낌이라는 걸 누군가는 부질없는 감정이라고 할지 몰라도 적어도 한지영은 그 말을 쉽게 지나칠 수 없었다.이제껏 많은 아이돌과 배우들을 좋아해 왔지만 진정으로 마음이 설레었던 사람은 백연신 한 사람뿐이었으니까.아무리 소개팅을 해봐도 같이 있으면 가슴이 뛴다고 느껴지는 남자는 없었다.“설렌다는 느낌... 중요하죠. 쉽게 느끼기 어려운 감정이잖아요. 그리고 그런 느낌이 들었던 상대를 놓치고 다시 찾으려고 하면 더 힘들고요.”한지영의 말에 연우진이 조금 흠칫했다.“지영 씨는 그런 사람을 만난 적이 있나 봐요?”“네, 딱 한 번 있었어요.”한지영은 솔직하게 대답했다.연우진은 분명히 소개팅 상대였지만 그녀는 얘기를 나누면서 그가 남자로 보이는 것이 아닌 묘하게 친구 같이 느껴졌다.“어떤 사람이었어요?”연우진이 호기심 어린 눈으로 물었다.“그 사람은 일단 너무 예쁜 사람이었어요. 그리고 내 말이라면 뭐든 다 들어주는 그런 착한 사람이었죠.”백연신 얘기에 한지영의 입꼬리가 저도 모르게 위로 말려 올라갔다.이미 헤어졌음에도 백연신과 함께 했던 나날은 여전히 그녀의 마음속에 제일 소중했던 기억으로 자리 잡고 있었다.연우진이 생각보다 편한 말 상대였기 때문인지 아니면 오늘 우연히 백연신의 소식을 들어서인지 한지영은 평소보다 훨씬 더 감정적이고 말이 많았다.그녀는 술을 연거푸 마시며 얘기를 이어갔고 연우진은 그런 그녀의 얘기를 그저 가만히 들어주고만 있었다.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한지영이 앉아있는데도 휘청거리자 연우진은 그제야 술잔을 들어 올리려는 그녀의 손을 제지했다.“이제 그만 마셔요. 이러다 취하겠어요.”“취하는 게 뭐가 나빠요?”한지영이 웅얼거렸다.“지영 씨랑 나 오늘 첫 만남 아닌가요? 내가 어떤 사람인지 제대로 알지 못하면서 이렇게 무방비한 모습을 막 보여줘도 돼요? 내가 나쁜 마음이라도 먹으면 어쩌려고?”연우진의 말에 한지영이 피식 웃었다.“정말 그럴 생각
한지영은 손가락을 억지로 움직이며 소개팅 상대에게 메시지를 보냈다.그녀가 지금 신경 써야 할 사람은 백연신이 아니라 소개팅 상대였다. 어쩌면 이번에야말로 진정으로 그녀를 좋아하고 그녀도 좋아하는 남자가 나올지도 모른다.저녁.한지영은 약속 시간에 맞춰 번화가의 한 카페로 들어섰다.창가 쪽으로 향하니 소개팅 상대가 앉아있는 것이 보였다. 남자의 이름은 연우진이었고 현재 대기업에서 팀장직을 맡고 있는 유능한 사람이었다.한지영은 남자의 겉모습을 확인하고는 저도 모르게 속으로 감탄했다. 스펙이 좋은 사람이라는 건 프로필을 통해 충분히 알고 있었지만 외모까지 훌륭할 줄은 몰랐다.연우진은 깔끔한 정장 차림에 안경을 쓰고 있었다. 지적인 분위기에 앉아있는 자세까지 바른 것이 상당히 인기가 많을 것 같았다. 게다가 35살이라고 들었는데 막상 보니 이제 막 30대가 된 듯한 얼굴이었다.“안녕하세요. 한지영 씨 맞으시죠? 만나서 반가워요.”한지영이 자리에 앉기도 전에 남자가 먼저 인사를 건네왔다.“네, 안녕하세요.”한지영은 서둘러 미소를 지으며 자리에 앉았다.두 사람은 첫 만남에 할법한 얘기를 서로 두어 마디 주고받은 후 곧바로 근처 레스토랑으로 향했다.사실 한지영은 그저 아무런 고깃집이나 들어가 대충 식사를 하고 만남을 끝내려고 했는데 연우진은 원래 성격이 그런 건지 아니면 소개팅하는 여자들과는 항상 레스토랑을 가는 건지 아주 자연스럽게 그녀를 데리고 비싼 레스토랑으로 왔다.메뉴판을 들어 가격을 보니 헙 하는 소리가 절로 나왔다.“드시고 싶은 거 마음껏 주문하세요.”연우진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한지영은 잠깐 고민하더니 결국에는 상대적으로 저렴한 음식들을 주문했다.이에 연우진은 그녀를 잠시 바라보더니 별다른 말 없이 다른 음식도 주문한 다음 웨이터에게 메뉴판을 건넸다.“실례가 안 된다면 지영 씨가 소개팅에 나온 이유를 물어도 될까요? 혹시 나이 압박 때문에 결혼을 서두르고 싶은 건가요?”음식을 먹던 중에 연우진이 먼저 질문을 건네왔다.“그렇지
설마 재벌과 사귀었던 신데렐라가 주변에 있을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으니까.한지영은 천천히 정신을 차리고 조나연을 바라보았다. 조나연이 무슨 의도로 이런 말을 하는지 생각해볼 필요도 없었다. 이 번기 회에 자신을 깎아내리며 조롱하려는 게 분명했으니까.조나연은 예전에도 이런 식으로 묘하게 그녀를 깎아내렸다. 게다가 한지영이 없을 때면 다른 동료에게 두 사람은 얼마 안 가 반드시 헤어지게 될 거라며 저주 아닌 저주를 퍼붓기도 했다.그러다 정말 헤어졌을 때는 한껏 기분 좋은 얼굴로 한지영에게 이런 말을 건넸다.“나는 두 사람 오래 못 갈 줄 알았어요. 솔직히 백연신 씨가 아무것도 없는 지영 씨와 진심으로 사귈 리가 없잖아요. 요즘은 남자들도 여자 배경을 본다고요.”진심이 아니었다고? 그럴 리는 없다.한지영과 사귀었을 당시 백연신은 늘 그녀에게 진심을 다해 행동했고 자신의 사랑을 가감 없이 보여주었다. 그러니 진심이 아니었다는 말은 틀렸다.하지만 조나연의 말에 맞는 말도 있었다. 결과적으로 한지영은 백연신이 원하는 것을 주지 못했으니까.“지금 돌이켜봐도 참 안타까워요. 만약 헤어지지 않았으면 지금쯤 사모님 소리 들으며 편히 살고 있을 텐데.”조나연이 안타까운 척 그녀를 비꼬았다.한지영은 그런 그녀를 차가운 눈길로 빤히 바라보더니 갑자기 피식 웃었다.“그렇게 안타까우면 백연신 씨와 나 사이에 다리 좀 놔주지 그래요? 말로만 계속 안타깝다고 하니까 괜히 놀림 받는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요. 물론 제 착각이겠죠, 안 그래요?”한지영의 뼈 있는 말에 조나연의 얼굴이 한순간에 일그러졌다.그리고 가만히 구경하던 동료들 역시 그제야 분위기를 파악한 듯 이상한 눈길로 조나연을 바라보았다.조나연은 조금 머쓱한 얼굴로 웃더니 별다른 대답 없이 자리를 벗어났다.한지영은 자리로 돌아간 후 소개팅 상대와 약속 시간을 잡으려고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가 잠깐 멈칫하더니 저도 모르게 백연신의 기사를 검색했다.지난 5년간 그녀는 백연신을 완전히 내려놓을 작정으로 그와 관련
한지영은 한숨을 한번 내뱉더니 이내 사무실 밖으로 나갔다.“엄마, 소개팅 같은 거 하기 싫다고 내가 분명히 말했잖아요. 남자는 내가 알아서 찾을 테니까 나 좀 가만히 내버려 둬요. 이게 대체 몇 번째야.”“네가 어련히 알아서 잘하면 내가 이러지 않겠지. 너 이제 20대 아니고 30대야. 34살이나 돼서 남자친구 한 명 없다는 게 말이 돼? 내일모레면 당장 노산에 진입하는데 그때 되면 점점 더 좋은 남자 찾는 게 어려워져!”이해영이 속사포로 말을 뱉어냈다.한지영도 그녀가 왜 이렇게까지 소개팅을 주선하는지 잘 알고 있다. 34살이나 된 딸이 이대로 계속 남자와의 교제를 피하다 결국에는 남자도 자식도 없이 홀로 인생을 마감할까 봐 걱정되고 또 불안한 거겠지.사실 한지영은 혼자서도 얼마든지 잘 살 수 있다고 생각하는 주의였다. 게다가 요즘은 실버타운도 잘 되어있어 정말 혼자가 된다고 해도 크게 문제 될 건 없었다.하지만 부모님들은 그런 걸 바라지도 않거나와 그래도 결혼은 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는 분들이었다.그래서 한지영은 결국 오늘도 소개팅을 수락하고 말았다.더 이상 부모님께 걱정을 끼쳐드리고 싶지 않았기도 했고 말이다.“아, 알겠어요. 만나면 되잖아요. 톡으로 연락처 보내세요. 이따 연락할게요.”이해영은 딸의 말에 그제야 만족하며 전화를 끊었다.몇 초 후 한지영의 휴대폰에 메시지 하나가 도착했다. 보낸 사람은 이해영이었고 내용은 소개팅할 남자의 프로필과 연락처였다.한지영은 메시지를 보고는 다시 한번 한숨을 내뱉었다. 이해영의 말대로 그녀도 이제는 34살로 절대 마냥 어리기만 한 나이는 아니었다.지난 5년이라는 시간 동안 그녀는 백연신을 천천히 마음속에서 내려놓았다....정말?문득 마음속 깊은 속에서 이러한 의문이 떠올랐다.정말 백연신을 향한 마음을 완전히 접어버린 게 맞나?한지영은 입술을 살짝 깨물더니 이내 잡생각을 털어버리듯 머리를 흔들며 다시 사무실 안으로 들어갔다.자리로 돌아가려는데 웬 동료 한 명이 그녀를 불렀다.“지영 씨,
얘기가 일단락되자 강지혁은 아들의 손을 잡고, 임유진은 딸의 손을 잡고, 그리고 두 아이는 서로의 손을 꼭 잡은 채 유치원 안으로 들어갔다.소민아는 그런 네 사람의 뒤를 따라 딸과 함께 조용히 앞으로 걸어갔다.만약 전이였다면 어떻게 해서든지 강지혁의 옆에 서며 사람들의 뇌리에 그 모습을 각인하려고 했을 텐데 지금은 그럴 수가 없어 그저 고개를 푹 숙인 채 얼굴을 가릴 수밖에 없었다.소민아의 손을 잡고 안으로 들어가던 소안나는 강선현과 강선율이 맞잡고 있는 손을 빤히 바라보며 미간을 찡그렸다.강선율이 그녀의 손을 잡아준 건 첫 만남뿐으로 그 뒤로는 한번도 손을 잡아주려고 하지 않았다. 분명히 전보다 훨씬 예뻐지고 공주 옷도 입고 머리도 예쁘게 했는데 강선율은 다른 이들처럼 그녀에게 예쁘다고 칭찬해주기는커녕 점점 더 거리를 두며 이제는 말도 잘 섞으려고 하지 않았다.소안나는 그런 강선율의 행동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왜 자신의 손은 잡아주려 하지 않는 거지?결국에는 양녀라 정을 주지 않는 건가?경찰서 앞에서의 일이 있고 난 뒤 소민아는 강지혁의 사진을 들고 있던 여자아이가 바로 강씨 가문의 진정한 딸이고 강선율의 친여동생이라는 것을 소안나에게 얘기해주었다.소안나는 그 말을 듣고는 더욱더 기분이 나빠졌다. 갑자기 나타난 강선현에게 아빠와 오빠를 빼앗기는 것 같았으니까.유치원 입구에 다다른 임유진은 먼저 아이들을 안으로 들여보내고 선생님들과 얘기를 나눴다. 그리고 강지혁은 그런 그녀의 옆에 선 채 가만히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강선율은 안으로 들어간 후에도 강선현의 손을 꼭 잡은 채 자리까지 이동했다. 그러고는 듬직한 오빠의 얼굴로 동생의 가방을 직접 옆에 내려놓아 주기도 했다.그 장면을 바라보던 소안나는 질투심에 씩씩거렸다.‘나한테는 한번도 그렇게 해주지 않았으면서! 오빠랑 먼저 알게 된 건 쟤가 아니라 안나잖아!’“엄마, 나도 율이 오빠 친동생 하면 안 돼요?”소안나가 고개를 홱 들며 소민아에게 물었다.소민아는 딸의 말에 서둘러 주위
소씨 모녀의 등장에 사람들의 두 눈은 금세 흥미로움으로 가득 찼다. 그도 그럴 것이 강지혁이 또다시 결혼하게 된다면 그 상대는 분명히 양녀의 어머니인 소민아라고 생각했으니까.임유진은 포르쉐에서 내린 소민아를 발견하고는 저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렸다. 그간 집사와 고이준으로부터 전해 들은 말에 의하면 소민아는 소소하게 인기를 얻고 있던 인플루언서였다가 재벌 2세의 아이를 배고 그 집의 며느리로 들어가려다가 철저하게 버림을 받고 홀로 아이를 키우며 그간 힘든 나날을 보냈다고 한다.소안나가 강씨 가문에 입양된 건 2년 전의 일로 강지혁은 소안나와 소민아를 위해 집도 주고 생활비도 다달이 보내주며 그 외의 큰 지출도 부담해주었다고 한다. 즉 소씨 모녀는 하루아침에 강지혁이라는 든든한 백을 둔 신데렐라 모녀가 됐다는 뜻이었다.지금 소민아가 입고 있는 옷이나 타고 있는 차량만 봐도 그간 얼마나 호의호식하며 지냈는지 충분히 알 수 있었다.임유진이 소민아를 훑어보고 있을 때 소민아도 마찬가지로 임유진을 훑어보고 있었다. 설마 레스토랑에서 언쟁을 벌였던 별 볼 일 없는 여자가 강지혁의 사망한 아내라고 그 누가 상상이나 할 수 있었겠는가.소민아는 강지혁과 함께 나란히 서 있는 임유진을 바라보며 입술을 깨물었다. 질투의 감정이 몸 곳곳에 퍼지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하지만 그 감정을 겉으로 내비칠 수는 없었기에 소민아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임유진 씨 맞으시죠? 그날은 죄송했어요. 딸 일이라 괜히 흥분해서 언성을 좀 높였어요. 용서해주세요...”그 말에 임유진이 뭐라 대꾸하려는데 강지혁이 먼저 입을 열었다.“호칭 똑바로 해. 임유진 씨가 아니라 사모님.”차가운 그의 말에 주변 공기가 한순간에 얼어붙었다. 임유진이 강지혁의 아내였다는 것을 알고 있던 사람들은 임유진의 위치를 똑똑히 전하고자 하는 강지혁의 의도를 바로 알아챘다.5년 만에 돌아왔어도 임유진은 여전히 강지혁의 아내였고 강씨 가문의 안주인이었다.하지만 임유진이 누군지 모르고 있는 사람들은 강지혁의 말에
게다가 5년 만에 돌아온 거라 그간 많이 변한 저택의 상황도 알아야 했고 새로운 사람들과도 익숙해져야만 했다.그래서 아이들 일에는 조금 소홀해졌다. 딸이 아버지를 원했던 만큼 아들도 마찬가지로 엄마를 원했을 텐데 말이다.저택 고용인들에게 듣기로 강지혁은 매일 아침 율이와 함께 저택을 나서기는 하지만 나가서는 서로 다른 차를 타고 각자의 목적지로 향한다고 한다.즉, 강선율은 그간 아버지가 아닌 도우미나 기사의 보호 아래 유치원에 갔다는 소리였다.임유진은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자 또다시 죄책감이 피어올랐다. 또한 바쁘다는 이유로 율이에게 소홀했던 자신에게 화가 나기도 했다.강선율은 임유진의 팔이 더 세게 자신을 끌어안자 조금 움찔했다. 여전히 누군가에게 안기는 일은 익숙지 않았지만 상대가 엄마라서 그런지 이런 식의 포옹도 이제는 받아들일 수 있을 것 같았다. 아니, 솔직히 말하면 기분이 좋았다.게다가 앞으로는 하루도 빠짐없이 함께 유치원으로 가주겠다는 말 또한 기분 좋게 귓가에서 맴돌았다....다음날.강선현이 유치원으로 가는 날, 임유진은 율이와 현이에게 똑같은 옷을 입혔다. 다른 점이 있다면 강선율은 바지고 강선현은 치마라는 것이다. 엇비슷한 키의 두 아이가 똑같은 옷에 똑같은 신발을 신은 채 가방을 메고 있는 모습을 보니 절로 마음이 녹는 기분이었다.임유진은 결국 참지 못하고 두 아이를 품에 끌어안고 뽀뽀 세례를 퍼부었다.강선현은 그녀의 이런 행동에 이미 습관이 되었던 터라 꺄르르 웃으며 뽀뽀로 회답했지만 강선율은 별다른 반응 없이 그저 그녀의 행동을 받고만 있었다. 분명히 무표정한 얼굴이었지만 귀가 살짝 빨개진 것을 보니 기분이 나쁜 건 아닌 듯했다.강지혁은 세 사람이 다정하게 스킨십하는 걸 보면서 저도 모르게 슬쩍 입꼬리를 위로 올렸다.유치원에 도착한 후, 강지혁과 임유진은 각자 아이의 손을 잡고 차에서 내렸다. 아이를 등원시키러 온 학부모들은 네 사람의 등장에 입을 떡 벌리며 그대로 굳어버렸다.강지혁은 좀처럼 유치원에 얼굴을 내비치
하지만 남매 사이가 하루가 다르게 좋은 것 같아 보이니 임유진은 괜히 뿌듯해 나며 기분이 좋았다.“내일 유치원 갈 때 아빠도 엄마랑 함께 현이 데려다주면 안 돼?”현이가 눈을 반짝이며 강지혁을 바라보았다. 어지간히도 같이 가고 싶은 듯했다.강지혁은 아이가 이런 요구를 해올 줄은 몰랐는지 미간을 살짝 꿈틀거렸다.“유치원에 같이 가달라고?”“응! 원래 유치원 가는 첫날은 엄마랑 아빠가 함께 가줘야 하는 거야!”현이는 이번이 첫 유치원은 아니었지만 이제는 아빠도 찾았으니 강지혁과 함께 등원하고 싶었다. 아빠가 있다는 기분을 마음껏 누리고 싶었다.사실 지금껏 아빠의 부재에도 잘 자라왔던 아이였지만 아무래도 아빠의 빈자리가 꽤 컸던 모양이다.“그래, 그럼 내일 유치원에 같이 가줄게.”강지혁의 말에 현이는 활짝 웃더니 곧바로 팔을 쭉 내밀었다. 품에 안기고 싶다는 뜻이었다.강지혁은 스킨십 많은 딸이 아직도 잘 적응이 되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아들인 율이는 이제껏 이런 식의 요구를 해오지 않았으니까.하지만 임유진과 쏙 빼닮은 두 눈을 보고 있자니 저도 모르게 아이에게로 팔이 뻗어졌다.현이는 강지혁에게 안긴 후 그의 목을 꼭 끌어안으며 지난번 서재에서처럼 볼에 쪽 하고 뽀뽀를 했다.“아빠가 최고야!”진심으로 기뻐 보이는 딸의 모습에 임유진은 괜스레 코끝이 찡해 났다.딸이 아빠의 존재를 그리워한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새삼 이렇게 좋아하는 걸 보니 조금 더 빨리 기억을 회복하지 못했던 것에 죄책감이 일었다.임유진은 눈물을 감추기 위해 서둘러 시선을 돌렸다. 그러다 바로 옆에 서 있는 아들을 발견했다.혹시 율이도 엄마를 그리워하고 있지는 않았을까? 엄마가 있어야 하는 상황에 항상 없었던 것에 쓸쓸해 하지는 않았을까?“율아.”임유진은 그 생각에 강선율을 향해 팔을 활짝 열었다.“엄마가 안아줄까?”아이는 그 말에 어색해하며 답했다.“전 어린애가 아니에요. 동생이나 안아주세요.”말은 이렇게 하지만 은근히 원하고 있다는 눈빛을 보냈다.임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