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강지혁은 소민영을 거들떠보지도 않고 임유진에게 물었다.“누나 생각에는 이 정도면 충분한 거 같아?”일이 지금에 이르자 소민영은 임유진이 아무리 원망스러워도 용서를 빌고 도움을 청할 수밖에 없었다.“임유진 씨, 잘…… 잘못했어요. 당신의 친구에게 그렇게 하면 안 됐어요. 제가…… 당신의 친구에게 사과할게요. 제발요. 용서해 줘요.”임유진은 통곡하며 눈물을 흘리는 소민영을 바라보면서 소민영이 용서를 구하는 것은 강지혁 때문이지 자신 때문은 아니라고 생각했다.그리고 이런 소민영의 모습에도 그녀의 마음에는 조의 동정심조차 생기지 않았다. 오히려 한지영이 소민영에게 이렇게까지 괴롭힘 당했다는 생각을 하자 임유진은 소민영에 대한 증오가 더 깊어졌고 더 나아가 자책감까지 들었다.그녀는 차라리 이런 모욕을 당한 게 지영이가 아니라 자신이으면 좋았을 거라고 생각했다.지영이는 자신 때문에 정말 많은 희생을 했다. 하지만 출소하고 나서 지영에게 제대로 된 보답 한번 하지 못했다. 그런데 한지영이 자신 때문에 또 이런 고생을 하게 되다니.“좋아요. 그럼 그날 이 장면을 본 모든 사람 앞에서 지영이에게 사과하고 지영이에게 의료비와 그에 따른 보상을 해줘요.”임유진이 말했다.소민영은 당연히 재빨리 머리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단지 사과와 보상이라면 손가락뼈가 부러지는 것보다 훨씬 나았다.고이준은 그제야 발을 놓았다. 소민영은 밟힌 손을 다른 한 손으로 붙잡았다. 너무 아파 들고 있던 지팡이를 들 수가 없었다.그때 강지혁이 고이준에게 분부했다.“소민준한테 들어와서 동생을 데려가라고 해.”“네.”고이준이 대답을 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소민준이 고이준을 따라 병실로 들어왔다.자신의 여동생이 한 손을 잡고 눈물을 흘리는 모습을 보자 소민준은 서둘러 여동생을 부축한 뒤 소파에 앉아 있는 강지혁과 임유진을 복잡한 표정으로 쳐다보았다.그는 이미 강지혁과 임유진이 만나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서로 눈을 마주하며 바라보는 두 사람을 보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만약 강지혁이 진짜 임유진을 도와 소씨 가문에 복수한다면 소씨 가문은 틀림없이 망하게 될 것이고 S시의 명문 가문에서 소씨 가문은 제명될 것이 분명했다.“강…… 강 대표님, 난…….”소민준은 다급히 변명하려 했다.하지만 임유진이 그의 말을 끊고 강지혁에게 말했다.“그럴 필요 없어. 이미 헤어졌으니 나에게는 모르는 사람이야. 난 교통사고로 저 사람과의 감정을 잘 정리 할 수 있었다는 걸 오히려 다행이라고 생각해.”소민준의 얼굴 표정은 아주 비참했다. 한편 임유진은 말을 하면서 처음부터 끝까지 소민준의 얼굴을 단 한 번도 보지 않았다.“그럼 됐어.”강지혁은 일어나 소민준에게 다가가 그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유진이 복수하길 원하지 않으니 그녀에게 고마워해요. 그렇지 않으면 내년 이맘때면 S시에서 SY그룹을 볼 수 없을 거예요.”소민준은 흠칫 놀라며 임유진에게 감사를 표하고는 재빨리 소민영을 부축하여 병실을 나섰다.병원을 나오자 남매는 마치 다시 살아난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오빠, 강지혁이 임유진 어디가 마음에 들어서 만나는 거 같아?”소민영이 화를 내며 말했다.“내가 지난번에도 말했잖아. 임유진을 건드리지 말라고.”소민준은 화가 치밀어올랐다.“임유진은 강지혁을 내세우면서 위세를 부리는 거야! 만약 강지혁이 옆에 없으면 임유진이 뭐라도 되긴 해?”소민영은 방금 당한 치욕에 임유진이 죽일 듯이 미웠다.“만약 그녀가 복수하겠다고 했으면 우리 가문이 아주 힘들어졌을 거라는건 알아?”적어도 그 점은 임유진에게 정말 고마웠다. 적어도 임유진이 그를 지옥으로 밀지는 않았으니까.“설마 강지혁이 고작 환경미화원 하나 때문에 소씨 가문을 건드릴까?”“네 생각에는?”소민준은 자신의 동생을 노려보았다.“아무튼 넌 우리 가문을 위해서라도 임유진을 건드리지 마. 그렇지 않으면 우리 가족도 널 구하지 못할 거야. 넌 지금 우리 가문을 위험하게 만들고 있어!”소민영은 몇 마디 더 하고 싶었지만 방금 병실에서 있던 일을 생각하니 몸이 움츠러들어 더
“거절하면 안 되지?”그녀가 물었다.그의 눈빛이 반짝이더니 얼굴의 웃음기가 조금씩 사라졌다. 그리고 그는 천천히 몸을 곧게 펴고 위에서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아니, 거절해도 돼. 나는 누나에게 거절할 권리를 줄 거야. 단지…….”그는 머뭇거리다 웃는 듯 마는 듯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누나, 정말 거절할 거야?”임유진은 순간 시간이 멈춘 느낌이 들었다. 만약 승낙한다면 그녀는 많은 것을 얻을 수 있을 것이고 더 나아가 자신의 운명까지도 바꿀 수 있을 것이다.만약 다른 사람이 그녀에게 이런 말을 했다면 그녀는 아마 바로 승낙했을 것이다.하지만 강지혁…… 그녀는 강지혁에게 일종의 두려움을 가지고 있다. 그가 그녀를 괴롭힌 적은 없지만 그의 말 한마디에 그녀는 감옥에 가 온갖 고생을 했다.3년 동안의 지옥 같던 생활, 심지어 법정에서조차 변호사들은 교통사고에서 죽은 사람이 강지혁의 약혼녀라는 사실을 알고 모두 그녀의 변호를 거절했다.게다가 그 사실관계가 증명되지 않은 증거들과 증인들이 모두 그녀가 술을 마셨다고 주장했고 그때 그 모든 것이 그와 관련이 있는지 없는지 그녀는 알 수가 없었다.그는 마치 악몽처럼 그녀를 억누르면서 숨을 쉴 수 없게 만들었고 그의 정체를 알고 난 뒤로 그녀는 그가 다가오기만 하면 몸이 자신도 모르게 굳었다.그가 그녀와 약간의 신체 접촉이라도 하면 그녀의 몸은 주체할 수 없이 떨렸다.어떻게 이런 남자의 곁에 있을 수 있을까?그녀는 깊은숨을 들이쉬고 떨리는 몸을 억지로 버티며 말했다.“응, 거절하고 싶어.”그의 낯이 어두워지고 검은 눈동자가 차갑게 물들었다.“정말 거절할 거야?” “응.”그녀가 대답했다.그러자 그가 차갑게 웃었다.“좋아. 내가 여자에게 거절당할 줄 몰랐네. 임유진, 잘 생각해. 내 보호가 없으면 S시에서 네가 어떻게 될 거 같아? 소씨 가문, 진씨 가문이 널 괴롭히지 않는다고 쳐. 너 정말 한평생을 길거리 청소하며 살 거야?”그녀는 입술을 깨물며 말했다. “그건 내 일이야.”
“강 대표님만 동의한다면 임유진 씨는 언제든지 퇴원할 수 있어요.”의사가 말했다.임유진은 갑자기 복잡한 생각이 들었다. 이제는 퇴원조차도 강지혁의 동의를 받아야 한다고?“네, 알겠습니다.”그녀가 대답했다.의사와 간호사가 떠난 후 그녀는 화장실에 들어가 거울 속의 자신을 바라보았다. 거울 속 청아한 얼굴, 수려한 눈썹, 살구 같은 눈동자, 오뚝한 코와 분홍색 입술이 불빛 아래에서 한 줄기 빛을 띠고 있었다.일반인들과 비교하면 꽤 괜찮은 얼굴이지만 강지혁의 곁에는 화려한 미인이 많아 그 사람들 비교하면 그렇게 뛰어난 외모도 아니다.강지혁은 도대체 그녀의 무엇이 마음에 들었을까? 임유진은 쓴웃음을 지었다. 그녀가 처음에 그를 노숙자로 오해한 일을 그는 재미있다고 느꼈다. 아무튼 강지혁은 이 남매 게임을 계속하고 싶은 걸까?그녀는 손을 들어 자신의 입술을 가볍게 어루만졌고, 머릿속에는 그가 그녀에게 키스하던 광경이 스쳐 지나갔다.그녀는 지영이가 했던 말이 기억났다.“유진아, 네 입술이 예쁜 거 알아?”“입술이 예쁘다고?”그녀는 지금까지 입술에 신경 쓴 적이 없다. 단지 입술이 못생기지 않았을 뿐 그다지 특별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맞아. 아주 예뻐. 네 입술을 보면 키스하고 싶은 충동이 들어. 음…… 남자들이 원하는 그런 입술 모양이야.”그때 그녀는 웃기만 했다. 정말 이상한 표현이다!그리고 지금, 강지혁과 키스했다는 걸 떠올리면 자연스럽게 입술이 뜨거워졌다.‘더 이상 생각하지 마, 더 이상 생각하지 마!’임유진은 끊임없이 마음속으로 말했다. 그리고 그날 강지혁이 그녀에게 선택의 기회를 주겠다고 말한 건 거짓말이 아닐 것이다.그와 같은 남자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그냥 모든 것을 꿈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단지 꿈일 뿐이다. 꿈속에서 그녀는 혁이라는 남자를 알게 되었고 그들은 서로를 소중히 여기고 행복하게 지냈었다. 하지만 지금은 꿈에서 깨어났으니 그녀는 혼자일 수밖에.임유진은 화장실을 나와 병원으로 온 날 입었던 옷으로 갈아입었다
“네.”고이준은 곧바로 대답하고는 강지혁을 따라 저택에서 나와 병원으로 향했다.강지혁이 병실에 들어서자 임유진은 점잖게 소파에 앉아있었다.그렇다, 말 그대로 정말 점잖다.그녀는 허리를 곧게 펴고 두 손을 무릎에 둔 채 교과서적인 자세로 앉아 있었다.“퇴원하려고?”강지혁이 물었다.“응.”그녀는 대답을 하면서 그의 목에 있는 목도리에 시선이 갔다. 그녀가 직접 짠 목도리이다. 그가 겨울을 따뜻하게 지내길 바라면서 짠 것이다.하지만 그녀는 쓸데없는 짓을 한 거다. 그에겐 목도리도 아주 많고 따뜻한 겨울을 보낼 방법도 아주 많아 그녀가 선물한 목도리 따위 필요 없을 것이다.“다시 한번 선택의 기회를 줄게. 잘 생각하고 대답해 줘. 정말 내 곁에 있지 않을 거야?”그가 물었다.여태껏 그는 다른 사람에게 두 번의 기회는 주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는…… 예외인 것만 같았다.그녀는 머리를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마치 저기압으로 가득 찬 것처럼 주위의 공기와 함께 사람을 갉아먹을 것만 그의 눈빛에 압박감이 느껴졌다.그 순간, 그녀는 일종의 위기감을 느꼈다. 뭔가 대답을 잘못한다면 그녀는 다시 돌아오지 못할 것만 같았다.거절? 아니면 승낙?강지혁의 곁에 남기만 한다면 그녀의 운명은 바뀔 수도 있다.하지만…… 그가 이 관계에 질려버린다면 그녀는 어떤 결말을 맞이할까? 지금보 더 비참해질까?그리고 그는 강지혁이다. 그녀에게는 악몽과 같은 남자였다. 감옥에 있을 때, 심지어 한때는 그의 이름만 들어도 그녀는 몸을 부들부들 떨고 그를 두려워했다.출소 후에 조금 나아졌지만 그의 곁에 계속 있는다면 그 두려움은 그림자처럼 따라다닐 것이고 다시는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응, 난…… 혼자 지내고 싶어. 누구의 곁에도 있고 싶지 않아.”그녀는 침을 꿀꺽 삼키며 대답했다.순식간에 그의 낯은 더 어두워졌고 그의 차가운 눈빛을 본 그녀는 마치 얼어 죽을 것만 같았다.“후회 안 해?”그의 목소리는 위협적이다.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순간 임유진의 몸이 굳었다. 그렇다, 그녀가 아무리 크게 비명을 지른다하더라도 그 누가 들어와서 그녀를 구할 수 있겠는?그녀를 구하면 강지혁과 대립하는게 된다. 누가 그렇게 멍청할까!그녀가 생각에 빠져있을 때 그의 입술이 그녀의 입술에 닿았다.‘싫어! 그러지 마!’그녀는 거의 무의식적으로 그의 입을 덥석 물었다.그리고 그녀의 입에 갑자기 피비린내가 진동했다. 임유진은 흠칫 놀랐다. 그것은……바로 강지혁의 피였다. 그녀가 방금 그의 혀를 깨물었던 것이었다..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여전히 키스를 하며, 그녀가 억지로라도 그의 피를 삼키도록 강요하고 있었다!얼마나 오래 한 건지 키스가 끝날 쯤에는 그녀 입술이 저리고 입에서는 피비린내가 나 죽을 지경이었다.“맛있어?”강지혁이 가볍게 말하면서 입꼬리를 씩 올리자 입꼬리를 타고 붉은 피가 흘러내렸다.그의 옅은 미소에 선홍빛 피가 더해지자 그가 더 멋져 보였다.그녀의 입에서 나는 피비린내는 정말 강렬했고 피가 섞인 침이 마찬가지로 그녀의 입가를 타고 흘러내렸다.그는 손가락을 들어 그녀 입가의 선홍색 피를 가볍게 닦았다.“내 피를 마신 여자는 처음이야. 누나 덕분에 처음 겪는일들을 정말 여러 번 겪었어.”“날 좀 놓아줘.”그녀가 씁쓸하게 말했다.“그렇게 내 곁에 있는 게 싫어?”강지혁은 질문을 하며 그녀의 머리카락을 가볍게 어루만졌다.그의 행동은 부드러웠지만 그녀는 자기도 모르게 몸을 부들부들 떨었고 약간의 소름이 돋았다.“난 단지…… 편안하게 살고 싶어.”그녀는 매번 침을 삼킬 때마다 그의 피를 마시고 있는 것 같았다.“내 곁에 있는 것이 불편해?”그는 웃으며 말했다.임유진의 몸은 순식간에 굳었고 눈을 감고 꼼짝도 할 수 없었다.몸부림이 소용없다면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감내할 뿐.그녀는 감옥에 있을 때 이걸 깨달았다.강지혁은 임유진의 입술에 키스를 했고 그녀의 목에도 키스를 하고 있다…….‘참자, 참자, 강지혁이 아니라 혁이라고 생각해.’그녀는 마음속으로 끊임
그 긴 그림자는 화장실 밖에 서 있었다. 아름다운 얼굴은 온데간데없고 깊은 어둠만이 드리워져 있었다.강지혁은 칠흑 같은 눈동자, 음산한 얼굴로 그녀를 쳐다보았다.“내가 그 정도로 역겨워?”그녀의 창백한 얼굴과 움츠러든 몸은 마치 그를 엄청 먼 곳으로 밀어 떨어뜨린 것 같았다.강지혁은 얇은 입술을 꼭 오므리고 있었다. 그에게 왜 이런 여자가 필요한 것일까? 그는 강지혁인데 S시에서 어떤 여자든 자신의 여자로 만들어 가질 수 있을 텐데.그녀는 그저 평범한 여자일 뿐이다, 물론 조금 재미는 있지만…… 그리고 그도 자신을 이렇게 싫어하는 여자를 원하지 않을 것이다.“좋아. 임유진, 내가 역겨우면 널 놓아줄게.”강지혁이 말하는 순간 그 복숭아꽃을 닮은 눈동자는 차가움만 가득했다.“하지만 미리 말할게. 앞으로 네가 후회해도 난 널 원하지 않을 거야. 난 강지혁이야. 두 번의 기회는 주지 않아.”말이 끝나자 그는 바로 머리를 돌려 병실을 나갔다.임유진은 여전히 두 팔로 세면대를 받치고 있었다. 마치 모든 힘을 다 써서 이미 녹초가 된 것 같았다.그 말은…… 그녀가 퇴원해도 된다는 의미일까?그녀는 헝클어진 옷을 다시 정리하고 머리를 빗은 뒤 거울 속 창백한 자신을 보며 쓴웃음을 지었다.임유진이 병원 대문까지 걸어갔을 때쯤 갑자기 어떤 사람이 그녀에게로 달려왔다.“저 사람이야. 저 여자가 교통사고로 사람을 죽인 임유진이야!”“세상에, 정말 이 병원에 입원해 있었네! 사람을 죽이고 3년 만에 출소하다니. 목숨 하나에 3년은 너무 짧잖아!”“세령이가 그 당시 언니 때문에 얼마나 많이 슬퍼했다고! 저 여자 때문에 그렇게 슬퍼한 거야! 저 사람이 세령이가 언니를 잃게 만들었어!”사람들은 입으로만 말하는 것이 아니라 손에 들고 있던 나뭇잎과 썩은 계란까지 임유진을 향해 던졌다.임유진은 최선을 다해 피했지만 전부 피하지는 못했다.그리고 옆에서는 기자들이 사진을 찍고 있는데, 마치 기사를 만려고 준비하는 것 같았다.멀지 않은 곳, 검은색 벤틀리 차 안에
임유진은 초라한 모습으로 임대주택에 돌아왔다. 구정 전날 떠났다가 오늘 돌아오기까지 불과 며칠의 짧은 시간이었지만 마치 인생 만사를 다 겪은 것만 같았다.돌아온 좁은 셋방의 공기 중에는 마치 차가운 기운이 배어 있는 것만 같았다. 임유진은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오늘부터 임유진은 혼자다.이제 아무도 그녀와 함께 지내지 않을 것이고 깊은 밤 인적이 드문 시간에도 그녀는 그 누구와도 이야기를 나누지도 못할 것이다. 당연히 웃으면서 그녀를 누나라고 불러 줄 사람도 없을 것이다.그녀는 갈아입을 옷을 챙겨 자신의 초라해진 몰골을 씻고 나서 다시 방을 정리하기 시작했다.물론 강지혁이 이곳에 산 기간은 길지 않지만 방안에는 수 많은 그의 흔적이 남아있었다. 그가 사용했던 그릇과 젓가락, 컵, 수건과 칫솔, 그가 입었던 옷과 신발까지…….그녀는 그 물건들을 하나하나 정리하고 종이 박스에 넣었다.‘왜 버리지 않고?’그녀는 스스로 질문했다.그 물건들은 쌓아두면 자리만 차지할 뿐이다. 하지만 그녀는 이렇게나마 그것들을 쌓아두고 싶다. 이렇게 말하면 웃기겠지만 그녀는 혁이와 같이 지내던 시간이 그립다.분명히 그때 혁이는 허황된 것이고 강지혁이 만들어 낸 허상에 지나지 않지만…… 혁이를 향한 그녀의 마음속 감정은 진심이다!혁이와 있던 날들은 정말 즐거웠고 더 이상 혼자가 아닌 것만 같았다.임유진은 마지막으로 침대 머리에 놓여 있는 만들다 만 장갑을 집어 들었다. 원래 시간을 내서라도 완성하려고 했지만 지금은…… 영원히 완성될 수가 없는 장갑.임유진은 장갑을 만들던 바늘과 털실을 박스에 넣은 다음 테이프로 포장하고 구석에다 보관했다.앞으로 그녀는 혼자 살게 될 것이고 혁이는 그저 꿈속의 한 사람에 불과하다.임유진은 이렇게 자신에게 말했다.저녁이 되자 그녀는 방에 불을 끄지 않고 채로 잠에 들었다. 출소 후 혁이가 없을 때 그녀는 항상 이렇게 불을 켜놓고 잤다. 어둠이 감옥에서의 일을 떠올리게 하기 때문이었다.그러나 혁이와 같이 지내게 된 후 그녀는 언제부
“하지만...”임유진은 말을 하려다가 순간 깜짝 놀라며 두 손으로 자신의 배를 끌어안았다.“왜 그래?”강지혁이 잔뜩 긴장한 채로 물었다.“방금 아이가 내 배를 찼어!”임유진은 이쯤이면 태동이 느껴질 거라는 건 이미 알고 있었다.전까지는 거의 착각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태동이 미약했는데 방금 그건 정말 누가 뭐라 해도 확실한 태동이었다.심지어 지금도 계속해서 배를 차고 있다.“아이가 네 배를 찼다고?”강지혁은 시선을 그녀의 배로 옮겨 조금 얼떨떨한 얼굴로 바라보았다.“응! 한번 만져봐.”임유진은 그의 손을 들어 자신의 복부를 만지게 했다.강지혁은 확실하게 느껴지는 태동에 조금 놀랍기도 하고 또 신기하기도 해 그만 몸이 경직되어버렸다.태동이라는 게 무엇이고 언제쯤 느낄 수 있는지에 대해 그도 임유진 못지않게 잘 알고 있다.하지만 이론은 어디까지나 이론으로 실제로 이렇게 태동을 느끼게 되니 완전히 다른 느낌이었다.이제야 진정으로 이 작은 배속에 생명이 자라고 있다는 것이 확실하게 머리에 박히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이 조그마한 아이들은 머지않아 세상 밖으로 나오게 될 거고 크게 울고 또 활짝 웃으며 서서히 커가게 될 것이다.임유진은 강지혁의 넋을 잃은 표정에 피식 웃었다.평소에도 물론 상당히 귀엽지만 지금은 평소보다 몇 배는 더 귀여워 보였다.이런 얼굴은 아마 그녀밖에 보지 못했을 것이고 앞으로도 그녀밖에 보지 못할 것이 분명하다.임유진은 소파에 앉아 편한 자세를 취했다. 그리고 본격적으로 아이가 차고 있는 곳이 어딘지 그의 손을 이곳저곳 움직이며 알려주기 시작했다.아이들은 큼지막한 아빠의 손길을 느껴서 그런지 그에 보답하듯 더 세게 발길질을 해댔다.덕분에 임유진의 배는 계속해서 꿈틀거렸다.강지혁은 무릎을 꿇고 그녀의 복부를 쓰다듬으며 진지한 얼굴로 태동을 느꼈다.임유진은 그 모습을 보더니 결국 참지 못하고 휴대폰을 꺼내 사진을 찍기 시작했다.“갑자기 사진은 왜 찍어?”강지혁이 고개를 들며 물었다.“기념하려고. 나중에
강지혁은 꼭 무엇을 무서워하고 있는 것 같았다.대체 뭘?혹시 진기태와 연관이 있는 건가?아까 진기태는 분명...임유진은 순간 뭔가 알아차린 듯 고개를 들며 그에게 물었다.“혁아, 너 혹시 내가 화낼까 봐 무서워서 이러는 거야?”그녀의 말에 강지혁은 몸은 또다시 굳어졌고 호흡도 다시 거칠어졌다.그는 그녀의 질문에 대답을 하는 것이 아닌 조금 더 그녀를 제 품에 끌어안았다.‘정답인가 보네.’강지혁은 지금 진기태가 마지막에 한 말 때문에 그녀의 눈치를 보고 있다.‘하긴 아까 엄청 세게 화를 내기는 했지.’강지혁은 아까 꼭 다른 사람이 된 것 같은 모습으로 진기태를 협박했다.꼭 건드려서는 안 될 것이 건드려진 것 같은 모습이었다.“걱정하지 마. 화 안 낼 거니까.”강지혁이 떨리는 목소리로 임유진에게 물었다.“정말...? 정말 화 안 내?”“응. 안 내.”임유진은 미소를 지으며 두 손으로 그의 얼굴을 감쌌다.“진 회장이 너 찾아온 거 진가원 프로젝트 때문이지? 네가 내 복수를 해주겠다고 이러는 거, 나 알아. 그러니까 걱정하지 마. 고작 그 사람 말 때문에 우리 사이가 흔들릴 일은 없으니까.”강지혁은 흔들리는 눈빛으로 임유진을 바라보았다.“그 인간이 했던 말, 정말 신경 안 써?”“응. 그때는 너도 내가 누군지 몰랐을 때잖아. 그때의 나는 그저 너한테 네 약혼녀를 차로 죽인 사람일 뿐이었어. 너한테 잘 보이겠다고 사람들이 일부러 나를 더 괴롭히기는 했지만 그게 네 탓은 아니니까. 그러니까 너 원망할 생각 없어.”임유진은 강지혁을 빤히 바라보며 그의 눈가를 부드럽게 매만졌다.“사실 너랑 사귀고 너를 정말 사랑하게 됐던 순간부터 나는 그 일을 이미 내 마음속에서 지웠어. 그리고 너도 그랬잖아. 만약 조금만 더 빨리 나를 알게 됐으면 절대 내가 그런 고통을 겪게 하지 않았을 거라고.”그녀의 말에 강지혁의 눈빛이 더욱 심하게 흔들렸다.그녀는 그가 무서워하는 게 그저 그 이유일 뿐일 거라고 생각하고 있다. 방관한 것으로 여태 이렇게까
그때 사무실 문이 열리고 진기태가 안에서 걸어 나왔다.다만 진기태는 몸을 비스듬히 한 채 앞이 아닌 사무실 안을 바라보고 있어 임유진의 존재를 전혀 알아채지 못했다.“강지혁, 네가 뭘 잊고 있는 것 같은데 임유진이 그렇게 된 건 네 탓도 있어!”진기태의 분노 어린 말에 임유진은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으며 저도 모르게 앞으로 두어 걸음 걸어갔다.그러자 그때 사무실 안에서 익숙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거기서 한마디만 더 하면 그때는 진화 그룹과 당신 가문을 완전히 없애버릴 거야.”임유진은 비스듬히 열린 문틈으로 소파에 앉아 있는 남자를 바라보았다.강지혁은 평소와 달리 분노가 가득 찬 얼굴을 하고 있었고 심지어 그 예쁜 두 눈에 살기도 어려 있었다.‘살기...? 내가 뭘 잘 못 본 건가?’진기태는 강지혁의 위협에 겁을 먹고는 그의 눈을 피하려 서둘러 고개를 돌렸다. 그러다 드디어 임유진과 눈이 마주쳤다.그는 임유진의 얼굴을 보더니 금세 험악한 표정을 지었고 곧바로 씩씩거리며 자리를 떠났다.강지혁도 그때쯤 임유진이 밖에 있다는 것을 눈치챘고 그는 그녀를 보더니 그대로 몸이 뻣뻣하게 굳어버렸다.서둘러 분노를 지우고 평소와 다를 것 없는 부드러운 표정을 지으려고 해봤지만 눈가에 서린 당황함과 초조함은 감춰지지 않았다.진기태와의 대화를 들은 걸까?만약 들었으면 어떡하지?임유진이 이상함을 눈치채고 멀리하려고 들면...강지혁은 그 생각에 순간 호흡하는 것조차 곤란해지며 온몸이 차갑게 식었다.임유진은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사무실 안으로 들어왔다.“혁아, 방금 진기태 회장이랑...”“일 얘기 했어. 일 얘기만...”강지혁은 서둘러 대답하며 평정심을 되찾으려고 애썼다.하지만 심장은 여전히 비정상적으로 빨리 뛰고 호흡은 점점 더 딸리기 시작했다.“너 얼굴이 왜 그래? 괜찮아?!”임유진은 창백한 그의 얼굴이 걱정돼 쓰다듬으려 손을 뻗었다.하지만 얼굴에 닿기도 전에 강지혁에 의해 손이 저지당하고 말았다.“난... 괜찮아.”임유진은 강지
“지혁아, 아무리 그래도 너랑 우리랑은 사돈이 될 뻔했던 집안이잖냐. 그간의 정도 있는데 꼭 이렇게까지 해야겠어?”진기태가 먼저 말을 꺼냈다.“진가원 프로젝트는 우리한테 아주 중요한 프로젝트야. 너희가 가져가봤자 사업에 크게 도움이 되지도 않을 텐데 굳이 왜 그걸 가져가려고 해.”“진화 그룹도 이제는 슬슬 무대 아래로 내려가야 하지 않겠어요?”강지혁이 담담하게 말하며 그를 바라보았다.잔뜩 긴장한 진기태와 달리 그는 아주 여유롭다 못해 느긋해 보이기까지 했다.“우리 그간 사업 파트너로서 좋은 관계를 잘 이어왔잖아. 뭐 서운한 거 있으면 그냥 나한테 직접 얘기해. 내가 해줄 수 있는 거라면 뭐든...”“그럼 진화 그룹과 진화 그룹 산하의 모든 회사를 다 저한테로 넘기세요.”강지혁의 말에 진기태의 얼굴이 한순간에 변했다.모든 회사를 다 넘기라니, 그건 헐벗고 거지가 되라는 말과도 같았다.“너...!”진기태는 주먹을 꽉 말아쥐며 강지혁을 바라보았다.“너 대체 왜 이렇게까지 하는 거니? 설마...”그때 그의 머릿속으로 한가지 이유가 떠올랐다. 하지만 몇 초도 안 돼 아무리 강지혁이 미친놈이라고는 해도 그 이유는 아닐 것이라고 생각했다.‘그래.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강지혁이 여자 하나 때문에 멀쩡한 가문 하나를 없애버리려 한다는 게 말이나 되는 소리야? 하지만...’하지만 그거 말고는 강지혁이 갑자기 이러는 게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진씨 가문과 강지혁 사이에 갈등이 있다고 하면 그건 임유진이 감옥에 간 일밖에 없으니까.“너 혹시... 임유진 때문은 아니지?”진기태는 설마 하는 마음으로 이 말을 입밖에 내뱉었다.“왜 아닐 거라고 생각하세요?”강지혁은 아주 빠르게 인정했다.“허...!”진기태는 강지혁이 정말 임유진 하나 때문에 이런다는 얘기를 듣고 기가 막혀 말도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하, 하지만 그 일은 그때 세령이가 이미 대가를 치렀잖아!”일전 진세령은 임유진을 건드렸다는 이유로 강지혁에 의해 어쩔 수 없이 연예계에서
하지만 아무리 내리쳐도 고통은 가실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윽...”이경빈의 머릿속으로 당시의 장면이 하나둘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탁유미는 그때 이경빈에게 자신은 억울하다고, 자신이 그런 게 아니라고 수백 번을 더 말했다.하지만 그 말을 들었음에도 그는 전혀 믿어주지 않았고 오로지 탁씨 가문에 복수할 것만을 생각하며 공수진이 그렇게 된 게 전부 탁유미 때문이라고 확정을 지었다.그때는 그렇게 해야만 모든 게 끝날 줄 알았다. 비참한 그녀의 말로를 봐야만 가슴속의 응어리가 다 사라질 줄 알았다.그는 법을 무기로 그녀의 몸을 잔인하게 찔러댔다.그리고 이윽고 그녀의 자존심과 순박함 그리고 세상을 믿는 그 맑은 눈을 완전히 부숴버렸다.“경빈이 너는 운명을 믿어?”“글쎄. 너는?”“나는 믿어. 그리고 그 운명과 평생 함께한다는 얘기도 믿어. 운명이라면 서로 말고는 눈에 들어오는 사람이 없을 거야. 만약 다른 누군가가 눈에 들어오면 이전 사람은 운명이 아니었던 거지. 경빈아, 나는 네가 내 운명의 사람이라고 믿어.”“날 진심으로 사랑한다는 말이 하고 싶은 거야?”“응. 나는 이번 생에 이경빈이 아닌 다른 남자를 좋아하고 사랑할 계획은 없거든. 난 너만 사랑할 거야!”너만 사랑할 거라는 말을 했던 탁유미의 얼굴은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그녀는 정말 자신의 모든 것을 다 그에게 내어줄 수 있을 정도로 그를 사랑했다.하지만 그는 그런 그녀의 사랑을 짓밟고 더럽히고 또 처참하게 버렸다.임유진은 면회실에서 나와 천천히 이경빈의 앞으로 다가갔다.바닥에 엎드린 채 몸을 덜덜 떠는 그를 보며 그녀는 담담한 목소리로 물었다.“이경빈 씨는 언니한테 목숨을 한번 빚졌어요. 그 목숨 다시 언니한테 줄 수 있어요?”이경빈은 그 말에 고개를 들더니 처연하게 웃었다.“내 목숨 같은 거 유미한테 큰 가치가 없을 거예요... 하지만 만약 유미가 원한다면 내 목숨 따위 언제든지 내어줄 수 있어요.”만약 탁유미가 그의 목숨을 원한다면 그는 몇백 번이고 죽어줄 수 있다.
또한 금방이라도 떨어질 것 같은 벼랑 끝에 서 있는 기분이었다.“돈을 받아? 공수진이 원하는 대로 해줘?”이경빈은 분노에 찬 눈빛으로 의사를 바라보았다.“당신 의사잖아. 사람 목숨을 살리는 의사잖아! 그런데 그 간사한 혀로 죄 없는 사람을 감옥으로 보내?!”의사는 이경빈의 호통에 깜짝 놀란 듯 몸을 웅크리며 그의 눈을 피했다.“제가 보냈다뇨. 저... 저는 그냥 공수진 씨가 유산했다는 말밖에 안 했어요. 그 여자가 공수진 씨를 계단에서 밀었다고 증언한 건... 이경빈 씨잖아요.”그의 말에 이경빈은 순간 할 말이 없어졌다.의사 말대로 탁유미가 공수진을 계단에서 밀었다고 증언한 사람은 다른 누구도 아닌 그였으니까.그 어떤 증거보다 그의 한마디가 제일 크게 작용했다.이경빈은 한순간 꿀 먹은 벙어리가 되어 버렸고 은이 얼어붙은 것처럼 미동도 하지 않았다.“이경빈 씨는 그때 공수진 씨의 치마가 피로 물든 것을 봤다고 했어요. 그런데 공수진 씨는 임신하지 않았죠. 그러니 유산은 더더욱 없을 일이고요. 그렇다면 그 피는 대체 뭐였을까요?”임유진이 이경빈을 빤히 바라보며 말했다.이경빈은 덜덜 떨리는 입술을 꽉 깨물며 눈을 질끈 감았다.눈을 감자마자 당시의 화면이 하나둘 스쳐 지나가기 시작했다.“어떻게 임신도 아니고 유산도 아닌데 피를 흘릴 수 있었을까요. 그것도 하필 유미 언니랑 얘기하다가 마침 계단에서 떨어져서요. 제 생각은 이래요. 애초에 공수진 씨는 유미 언니를 모함하기 위해 미리 피가 든 팩을 준비했고 언니를 계단으로 불러 일부러 마치 언니한테 밀쳐진 것처럼 계단에서 구른 거죠.”임유진은 계속해서 이경빈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을 이어갔다.“이경빈 씨, 그날 정말 유미 언니가 공수진 씨를 밀었나요? 그걸 확실히 두 눈으로 보셨어요? 사실은 공수진 씨가 언니가 밀었다고 하니까 그렇겠거니 한 건 아니고요? 사실 그 사건은 조금만 제대로 조사해보면 금방 진실이 뭔지 알 수 있는 사건이에요. 그런데 이경빈 씨는 그때 복수심에 눈이 멀었고 마침
“가 보면 알아요.”임유진은 담담하게 대꾸했다.조금 있으면 이경빈도 모든 진실을 알게 된다. 그리고 그가 탁유미에게 얼마나 큰 잘못을 했는지, 얼마나 멍청한 짓을 저질렀는지 역시 알게 된다.그때가 되면 이번에는 뭐로 보상하겠다고 할까.어쩌면 강지혁의 말대로 모든 진실을 알게 되면 그는 남은 생을 평생 후회 속에서 고통스럽게 살게 살아갈지도 모른다.병원에서 나온 후 이경빈은 임유진을 따라 차에 올라탔다.가는 길, 이경빈이 임유진을 보며 물었다.“주원호를 병실로 보낸 것도 임유진 씹니까?”“네.”임유진은 그간 줄곧 강지혁의 도움으로 주원호의 동태를 파악하고 있었기에 공항에 간다는 것을 듣자마자 바로 그를 잡아 왔다.사실 그녀의 계획대로라면 주원호를 등장시킬 필요도 없었다. 이경빈에게만 조용히 따로 진실을 얘기해주려고 했었으니까.그런데 그사이 공수진이 또다시 일을 저질렀고 탁유미는 그로 인해 큰 상처를 입게 됐다.이경빈은 가만히 있다가 다시 물었다.“그럼 유미가 나한테 골수를 기증해줬다는 것도 훨씬 전에 이미 알고 있었겠네요.”“네. 사실은 그걸 알게 되고 나서 유미 언니한테 얘기를 했었어요. 어쩌면 이경빈 씨를 구한 사람이 언니일지도 모른다고, 그러니 이경빈 씨한테 얘기해보는 건 어떻겠냐고. 그런데 언니가 그러더라고요. 어차피 자신이 말해봤자 이경빈 씨는 믿지 않을 거라고요.”이경빈은 그 말에 심장이 또다시 욱신거리며 아파 났다.탁유미는 이미 모든 걸 다 파악하고 있었다.그가 믿지 않을 거라는 걸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대체 탁유미는 어떤 기분이었을까. 자기가 구한 사람이 화를 내고 사과하라고 윽박지르고 강제로 무릎까지 꿇으라고 명령하는 걸 보며.이경빈이 또다시 자책하고 있을 그때 차량이 드디어 목적지인 구치소 앞에 도착했다.이경빈은 차에서 내린 후 의문 섞인 얼굴로 임유진을 바라보았다.여기는 왜 온 거지?대체 누가 있길래?이경빈은 임유진을 따라 구치소 안 면회실에 도착했다.안으로 들어가 보니 어딘가 낯이 익은 한 남자
이경빈이 손을 다쳤나 하는 의문이 아주 잠깐 들었지만 탁유미는 이내 고개를 저으며 생각을 멈췄다.이경빈과 관련된 일은 이제 그 무엇도 생각하고 싶지 않으니까.“언니를 찾아와서 뭐라 하던가요?”임유진이 의자에 앉으며 물었다.“골수를 기증해준 사람이 나라는 걸 아는 눈치였어요. 그리고 공수진이 유산한 게 나 때문이 아니라 공수진의 자작극 때문이라는 것도요.”탁유미가 담담하게 말했다.“보상을 해주겠다고는 하는데 이경빈한테는 그 어떤 것도 받고 싶지 않아요.”태연한 얼굴로 얘기하고 있지만 임유진은 알고 있다.이 반응은 상처를 너무나도 많이 받아 모든 것이 공허해진 표현이라는 것을.“공수진은 언니를 모함한 것뿐만이 아니라 이경빈도 속였어요. 몇 년을 속았으니 이경빈은 무조건 공씨 일가에게 자신의 당한 것의 몇 배를 갚아줄 거예요.”“나랑은 상관없는 일이에요.”임유진은 탁유미가 이경빈의 얘기를 썩 반기지 않자 얼른 화제를 바꿨다.“윤이는 유치원에 갔나 봐요?”“네. 엄마가 등원시켜줬어요.”요 며칠 김수영은 매일 밤 윤이와 함께 이곳으로 와 탁유미의 곁을 지켰다.‘아주머니랑 윤이도 이경빈이 병실 밖에 있는 걸 봤을 텐데... 아주머니는 보나 마나 화를 내셨겠지만 윤이는...’임유진은 속으로 생각하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언니, 정말 항암치료 안 받을 거예요?”“네, 항암 치료를 시작하면 그때는 정말 병원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될 거예요. 얼마 남지 않은 시간을 이곳에서 보내고 싶지는 않아요. 참, 나 내일이면 퇴원할 수 있대요. 유진 씨, 그날은 정말 고마웠어요.”만약 임유진이 타이밍 좋게 쳐들어오지 않았더라면 더 끔찍한 일을 당했을 것이다.“벌써요?”임유진이 깜짝 놀라며 물었다.“언니, 그러지 말고 며칠 더 입원하는 게 어때요?”아무래도 병원에 있으면 의료진들의 케어를 바로바로 받을 수 있을 테니까.“아니요. 그냥 퇴원할래요. 계속 입원해 있으면...”계속 입원해 있으면 생명의 카운트다운이 더 빨리 흘러가는 느낌이니까.탁유미는
“응. 친구가 앞으로는 건강하게 살게 해달라고 기도했어. 간절하게 기도했으니 부처님도 분명히 들어주실 거야.”“친구? 친구 누구?”“나도 아직 본 적 없는 친구야. 아마 기회가 되면 그 어디선가 만날 수도 있겠다.”탁유미가 환하게 웃었다.“친군데 한 번도 본 적이 없다고? 뭐 인터넷으로만 아는 친구야?”“비밀. 나중에 얘기해줄게.”탁유미는 그날 미소를 지으며 끝내 친구에 관해서 얘기해주지 않았다.지금에 와서 돌이켜보면 그녀가 말한 친구는 바로 그였다.탁유미는 기증을 하고 나서도 여전히 이름도 모르는 그 젊은이를 위해 건강해지기를 빌어주고 있었다.정작 그 기도 덕에 살아난 그는 그녀의 인생을 처참하게 무너트렸는데 말이다.어쩌면 그날 그녀에게 친구가 누군지 조금만 더 자세하게 물어봤더라면 기증 사실에 대해 알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하지만 이경빈은 당시 그녀를 그저 복수의 대상으로만 생각하고 있었고 그녀와는 미래를 꿈 꿀 생각조차 하지 않았기에 그 친구에 관해서도 크게 관심이 없었다.그때 이경빈의 경호원이 다가와 그를 부축했다.“대표님, 괜찮으십...”경호원은 말을 하다 말고 조금 벙찐 얼굴로 이경빈을 바라보았다.그도 그럴 것이 이경빈의 모습이 꼭 영혼이 다 빠져나간 듯한 사람 같아 보였기 때문이다....임유진이 탁유미를 보러 찾아왔을 때도 이경빈은 여전히 병실 앞을 떠나지 않고 있었다.아무런 움직임도 없는 것이 꼭 죽은 사람 같았다.임유진은 그 모습을 보며 속으로 짧은 한숨을 내뱉었다.‘아주 조금이라도 공수진을 의심했으면 이렇게까지는 안 됐을 텐데.’하지만 그의 초췌한 모습을 보고 있자니 어쩌면 이경빈은 정말 탁유미를 진심으로 사랑했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사랑이 아니면 이렇게까지 고통스러워하지 않았을 테니까.“언제부터 이러고 있었어요?”임유진이 병실을 지키고 있는 경호원들에게 물었다.“어젯밤부터 줄곧 이곳에 있으셨습니다.”임유진은 이경빈을 힐끔 보더니 별말 없이 병실 안으로 들어갔다.병실 안에는 탁유미 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