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긴 그림자는 화장실 밖에 서 있었다. 아름다운 얼굴은 온데간데없고 깊은 어둠만이 드리워져 있었다.강지혁은 칠흑 같은 눈동자, 음산한 얼굴로 그녀를 쳐다보았다.“내가 그 정도로 역겨워?”그녀의 창백한 얼굴과 움츠러든 몸은 마치 그를 엄청 먼 곳으로 밀어 떨어뜨린 것 같았다.강지혁은 얇은 입술을 꼭 오므리고 있었다. 그에게 왜 이런 여자가 필요한 것일까? 그는 강지혁인데 S시에서 어떤 여자든 자신의 여자로 만들어 가질 수 있을 텐데.그녀는 그저 평범한 여자일 뿐이다, 물론 조금 재미는 있지만…… 그리고 그도 자신을 이렇게 싫어하는 여자를 원하지 않을 것이다.“좋아. 임유진, 내가 역겨우면 널 놓아줄게.”강지혁이 말하는 순간 그 복숭아꽃을 닮은 눈동자는 차가움만 가득했다.“하지만 미리 말할게. 앞으로 네가 후회해도 난 널 원하지 않을 거야. 난 강지혁이야. 두 번의 기회는 주지 않아.”말이 끝나자 그는 바로 머리를 돌려 병실을 나갔다.임유진은 여전히 두 팔로 세면대를 받치고 있었다. 마치 모든 힘을 다 써서 이미 녹초가 된 것 같았다.그 말은…… 그녀가 퇴원해도 된다는 의미일까?그녀는 헝클어진 옷을 다시 정리하고 머리를 빗은 뒤 거울 속 창백한 자신을 보며 쓴웃음을 지었다.임유진이 병원 대문까지 걸어갔을 때쯤 갑자기 어떤 사람이 그녀에게로 달려왔다.“저 사람이야. 저 여자가 교통사고로 사람을 죽인 임유진이야!”“세상에, 정말 이 병원에 입원해 있었네! 사람을 죽이고 3년 만에 출소하다니. 목숨 하나에 3년은 너무 짧잖아!”“세령이가 그 당시 언니 때문에 얼마나 많이 슬퍼했다고! 저 여자 때문에 그렇게 슬퍼한 거야! 저 사람이 세령이가 언니를 잃게 만들었어!”사람들은 입으로만 말하는 것이 아니라 손에 들고 있던 나뭇잎과 썩은 계란까지 임유진을 향해 던졌다.임유진은 최선을 다해 피했지만 전부 피하지는 못했다.그리고 옆에서는 기자들이 사진을 찍고 있는데, 마치 기사를 만려고 준비하는 것 같았다.멀지 않은 곳, 검은색 벤틀리 차 안에
임유진은 초라한 모습으로 임대주택에 돌아왔다. 구정 전날 떠났다가 오늘 돌아오기까지 불과 며칠의 짧은 시간이었지만 마치 인생 만사를 다 겪은 것만 같았다.돌아온 좁은 셋방의 공기 중에는 마치 차가운 기운이 배어 있는 것만 같았다. 임유진은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오늘부터 임유진은 혼자다.이제 아무도 그녀와 함께 지내지 않을 것이고 깊은 밤 인적이 드문 시간에도 그녀는 그 누구와도 이야기를 나누지도 못할 것이다. 당연히 웃으면서 그녀를 누나라고 불러 줄 사람도 없을 것이다.그녀는 갈아입을 옷을 챙겨 자신의 초라해진 몰골을 씻고 나서 다시 방을 정리하기 시작했다.물론 강지혁이 이곳에 산 기간은 길지 않지만 방안에는 수 많은 그의 흔적이 남아있었다. 그가 사용했던 그릇과 젓가락, 컵, 수건과 칫솔, 그가 입었던 옷과 신발까지…….그녀는 그 물건들을 하나하나 정리하고 종이 박스에 넣었다.‘왜 버리지 않고?’그녀는 스스로 질문했다.그 물건들은 쌓아두면 자리만 차지할 뿐이다. 하지만 그녀는 이렇게나마 그것들을 쌓아두고 싶다. 이렇게 말하면 웃기겠지만 그녀는 혁이와 같이 지내던 시간이 그립다.분명히 그때 혁이는 허황된 것이고 강지혁이 만들어 낸 허상에 지나지 않지만…… 혁이를 향한 그녀의 마음속 감정은 진심이다!혁이와 있던 날들은 정말 즐거웠고 더 이상 혼자가 아닌 것만 같았다.임유진은 마지막으로 침대 머리에 놓여 있는 만들다 만 장갑을 집어 들었다. 원래 시간을 내서라도 완성하려고 했지만 지금은…… 영원히 완성될 수가 없는 장갑.임유진은 장갑을 만들던 바늘과 털실을 박스에 넣은 다음 테이프로 포장하고 구석에다 보관했다.앞으로 그녀는 혼자 살게 될 것이고 혁이는 그저 꿈속의 한 사람에 불과하다.임유진은 이렇게 자신에게 말했다.저녁이 되자 그녀는 방에 불을 끄지 않고 채로 잠에 들었다. 출소 후 혁이가 없을 때 그녀는 항상 이렇게 불을 켜놓고 잤다. 어둠이 감옥에서의 일을 떠올리게 하기 때문이었다.그러나 혁이와 같이 지내게 된 후 그녀는 언제부
그 증거들과 증인들의 진술에 대해서는 지금까지도 이해가 되지 않는다.“도대체 그 사람들은 왜 널 괴롭히는 거야. 아무것도 모르면서 비판만 하잖아.”한지영은 분노했다.하지만 임유진은 평온한 거 같았다.“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야.”한지영은 친구의 몸에 생긴 상처를 떠올리고 자신도 모르게 한숨을 쉬었다. 출소한 그녀를 데리러 갔을 때 그녀의 상처를 본 적이 있었다. 새로 생긴 상처도 있고 오래된 상처도 있었다.감옥에서 무슨 일을 겪었는지 모르지만 대충 짐작할 수 있었다.아마 유진이는 감옥에서 엄청나게 고생했을 것이다.“혁이가 진짜 강지혁이야?”한지영은 화제를 바꾸어 물었다.“응.”임유진이 고개를 끄덕였다.“하지만…… 왜 강지혁이 노숙자 행세까지 하면서 너랑 같이 임대주택에서 그렇게 오랫동안 지낸 거야?”한지영은 아무리 생각해도 납득이 가지 않았다. 설마 강지혁에게 특별한 취미가 있는 것일까?“그에게는 게임일 뿐이야.”임유진이 씁쓸하게 말했다. 임유진이 직접 그에게 이런 말을 들었을 때에는 정말 숨이 콱 막혔었다.그녀에게 그렇게 잘해주던 혁이, 그녀의 손을 따뜻하게 해주고, 그녀를 기다리고, 조용하게 그녀의 하소연을 들어주던 혁이가 단지 게임을 위해 만든 캐릭터라는 걸 듣게 된 순간 그녀의 가슴은 쿵 하고 내려앉았다.“게임?”한지영은 이해할 수 없었다.“맞아. 부자들은 일상이 지루해 시간을 보내려고 게임을 하는 거야.”임유진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한지영은 순간 어떻게 친구를 위로해야 할지 고민했다. 그녀는 임유진이 제일 싫어하고 두려워하는 것이 그녀를 속이는 것임을 잘 알고 있었다.강지혁은 유진에게 정말 큰 충격을 가했다.임유진은 머리를 들어 싱긋 웃었다.“난 괜찮아. 걱정하지 마. 그리고 지금은 그와 아무 사이도 아니야. 게임은 이미 끝났어. 어차피 내가 손해 본 것도 없고 그냥 원래 내 혼자의 삶으로 돌아갔을 뿐이야.”하지만 그녀의 미소에 한지영은 눈물이 났다.“그럼 내가 여기로 이사 올게. 나랑 같이 살자.”“
“걱정하지 마, 괜찮아.”임유진이 대답했다. 사실 환경위생과도 그녀가 교통사고로 진애령을 죽여 3년 동안 감옥살이를 한 일을 알고 있었다.…….소파에 비스듬히 기대 있던 남자는 한 손은 턱을 받치고 다른 한 손은 술잔을 든 채 와인을 홀짝이고 있다. 남자는 아름답고 순수해 보였다. 가볍게 힐끗 보기만 해도 수많은 여자들을 유혹할 수 있을 거 같았다.그가 나른하게 술에 취해버린 모습은 섹시해 보였다.그렇다. S시에 그렇게 많은 여자들이 그에게 반한 건 다 이유가 있다! 이한은 혼자 술을 마시고 있는 강지혁을 보면서 마음속으로 감탄했다. 그러나 그에게 반하더라도 행동으로 나서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나섰던 사람들은 결국 그를 화나게 만들어 엄청나게 비참한 결말들을 맞이했고 S시의 우스갯소리가 되었기 때문이다.“왜 여기까지 와서 혼자 술 마셔? 친구를 만날거면 여자를 데리고 와야지. 소개 좀 해줘. 구정 전날 할아버지를 버리고 찾아간 여자가 누구인지 궁금해.”이한이 말했다.이한은 그 여자가 너무 궁금하다. 비록 강지혁이 그냥 게임일 뿐 볼 가치는 없다고 말했지만 그는 강지혁이 다른 여자와 그런 게임을 하는 것을 본 적이 없다!그래서 이한은 강지혁이 한 말을 믿지 않았다.강지혁은 술을 마시며 손가락을 까딱거렸다. 그리고 그 복숭아꽃을 닮은 눈동자로 웃는 듯 마는 듯 이한을 바라보았다.“그래? 그렇게 보고 싶어?”이한은 그 말을 듣고 몸에 소름이 돋았고 위기감 같은 비슷한 느낌을 받았다. 뭔가 지금 그가 머리를 끄덕인다면 나쁜 일이 일어날 것만 같았다.그가 방금 한 말이 상대방의 금기의 선을 넘은 거 같았다.여자가 지혁의…… 금기? 그 여자가 강지혁에게 아주 중요한 것일까, 아님 내가 너무 오버하는 것일까?이한은 자신이 너무 오버한다고 생각하고 곧바로 활짝 웃었다.“아니, 아니야. 보고 싶지 않아. 됐지.”두 사람이 말을 하던 도중 이한은 입구에서 다른 두 사람이 걸어들어오는 것을 보며 화제를 바꿨다.“현수 왔네. 또 새 여자친구를 데려
심지어 임유라가 강현수에게 키스하려 할 때도 현수는 거절했다.이것 때문에 유라는 불안했다. 유라는 현수의 여자친구를 바꾸는 속도를 알고 있으며 사람들이 현수가 여자를 짧게 만나고 몇 개월 사이에 질려한다고 했다.유라는 어떻게든 현수의 마음을 잡아야 하고 자신을 질리게 해서는 안 된다. 유라는 고작 몇 개월 동안만 여자친구가 될 생각이 없다. 하지만 이런 남자 곁에 있을수록 더 많은 것을 원하게 되었다.이렇게 좋은 생활을 하게 되었는데 누가 다시 예전으로 돌아가고 싶을까?하물며…… 유라는 자신의 옆에 있는 현수의 준수한 옆모습을 바라보았다. 이 남자는 아주 쉽게 여자를 홀릴 수 있으며 유라도 쉽게 다른 남자를 홀릴 수 있다.유라가 현수와 친해지고 싶은 건 현수가 유라에게 준 부귀영화뿐만 아니라 진정 현수를 원하기 때문이다.현수의 날카로운 눈빛이 유라를 바라볼 때 유라는 주체할 수 없이 설렜다.하여 유라는 어떻게든 현수를 잡아야 한다.“오늘 친구를 소개해 줄게.”유라의 귓가에 현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그래.”유라는 점잖게 대답했다.현수의 친구는 당연히 부자다!다만 유라가 현수가 말한 친구를 보았을 때 순간 멍을 때렸다.이 남자가 현수의 친구란 말인가? 하지만 왜 임유진의 월세방에서 본 그 남자랑 닮은 것일까?비록 옷차림도 다르고 월세방 남자는 두꺼운 앞머리가 있지만, 눈앞에 있는 강지혁은 앞머리를 반듯하게 빗고 반들반들한 이마를 드러냈다.설마 같은 사람이 아닐까?유라가 생각에 잠겼을 때 현수가 말했다.“유라야, 강지혁이야. S시에서 누구든 건드려도 되는데 강지혁은 건드리지 마. 강지혁을 건드렸다가는 나도 널 못 지켜줘.”현수는 아주 평범한 일을 말하는 것처럼 덤덤한 어투였지만 유라는 번개를 맞은 것 같았다.그동안 두 사람이 지내면서 현수는 항상 유라를 지켜줄 수 있다고 했지만, 처음으로 지켜주지 못한다고 했다.그리고 눈앞에 있는 남자가 강지혁이란 말인가? S시 사람들은 모두 알지만 인터넷에서는 정면 사진도 찾을 수 없는 강지
임유라의 등골이 싸늘했다. 이 사람은…… 설마 진짜……. “왜, 지혁아, 아는 사이야?”옆에 있던 이한은 이상했다. 유라는 삼류스타일 뿐이니 두 사람은 만날 기회가 없을 것이다.“응, 전에 한 번 봤어.”강지혁은 담담하게 말했다.유라는 눈을 부릅뜨고 심장이 목구멍에서 튀어나올 뻔했다. 정말 강지혁이었다…… 임유진과 동거하는 그 남자? 당시 유라의 가족들은 유진이 감옥에서 알게 된 남자라고 생각했다.누가 알았을까, 그 사람이 한 손으로 S시를 가릴 수 있는 강지혁이라는 걸 누가 생각이나 했을까!유라는 순간 머리가 어지러웠다.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일까? 왜 지혁이 유진과 함께 그 초라한 월세방에서 동거한 것일까?강현수는 기이한 눈빛으로 지혁과 유라를 바라보더니 물었다.“유라야, 지혁이와 아는 사이라고 왜 얘기 안 했어?”유라는 흠칫하더니 머쓱하게 웃었다.“난 그때 강지혁 씨가 누구인지도 몰랐어.”유라는 말을 하더니 지혁에게 사과했다.“강지혁 씨, 그때는 조금의 오해가 있었어요. 정말 죄송합니다.”하지만 지혁은 유라를 거들떠보지도 않고 현수에게 말했다.“앞으로 네 여자친구 내 눈앞에 끌어들이지 마. 저 여자 보기 싫어.”유라의 얼굴은 하얗게 질렸지만 감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현수는 순간 생각에 잠긴 듯한 눈빛을 하였다.현수와 유라가 떠난 후 이한이 흥미진진한 표정으로 지혁에게 다가가 물었다.“왜, 현수 여자친구가 네 심기를 건드린 적이 있어?”지혁은 손에 든 채 마시지 않은 남은 술을 단숨에 다 마셨다.유라를 보자 오히려 그 여자가 떠올랐다. 분명 자신의 곁에 있기만 하면 더 좋은 생활을 할 수 있고 더럽고 힘든 일도 할 필요가 없고 남의 눈치를 볼 필요도 없다. 하지만…… 왜 굳이 거절하는 것일까?심지어…… 자신의 스킨십이 역겨운 것 같았다.‘단지 여자 하나일 뿐이니 신경 쓸 필요도 없어!’지혁은 마음속으로 끊임없이 자기에게 이렇게 말했지만, 마음속의 그 답답함은 오히려 점점 더 강렬해지고 있다.한편 유라는 불안한
심지어 임유라의 입술을 만진 후에도 강현수는 마치 유라에게 더러운 것이 있는 것처럼 깨끗한 수건으로 자신의 손을 닦았다.유라는 이 모순된 행동을 아주 이상해했지만 아무것도 묻지 못했다.“사과할 필요 없어. 넌 내 여자친구야. 넌 나만 신경 쓰면 돼. 다른 건 신경 쓸 필요 없어.”현수가 말했다.현수의 동작은 가볍고 부드러워 마치 보물을 어루만지는 것 같았지만, 현수의 목소리는 또 이렇게 차갑고 낯설었다.가끔 유라는 정말 현수를 이해할 수 없다. 현수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무엇을 원하는지 알 수가 없다.“그, 그래…… 알았어.”유라는 더듬거리며 말했다.강현수는 손을 내리고 평소와 같이 손수건으로 자신의 손을 닦았다.유라는 입술을 깨물고 언젠가 현수를 완전히 가질 것이라고 다짐했다. 유라는 현수의 마지막 여자친구가 될 것이고 강씨 가문에 시집갈 것이다!그 시각 유라는 마음속으로 맹세했다!…….구정은 빠르게 지나갔다. 휴가 기간이 지나자 임유진은 환경위생과에 출근했다. 적지 않은 동료들이 병원 앞에서 유진에게 계란을 던진 기사를 보고는 말했다.“임유진, 진세령 팬들이 환경위생과까지 와서 계란을 던지지는 않겠지? 환경위생과 사람들에게 폐 끼치지 마.”“맞아, 우리 부모님이 내가 감옥살이 한 사람과 동료라는 걸 알고 날 얼마나 걱정하는지 몰라!”“진세령의 팬이 얼마나 많은데. 하필 임유진이 그때 진세령의 언니를 죽였잖아. 진세령은 언니랑 아주 사이가 좋아서 팬들도 마음 아파했다니까. 앞으로 어떤 과격한 행위가 있을지 몰라. 만약 우리가 다친다면 정말 재수 없는 일이야.”환경위생과에는 빈정거리는 소리가 들렸다.유진은 묵묵히 참고 웃어넘겼다. 이 일은 유진에게 매우 중요하다. 유진은 이 일에 의지하여 살아야 한다. 만약 정말 해고된다면 아마도 얼마 동안은 할 수 있는 일을 찾을 수 없을 것이다.그때 서미옥이 유진에게 말했다.“신경 쓰지 마. 저 사람들은 네가 퇴사하기를 기다리는 거야. 지금 당장 일자리 찾기도 힘드니 직장을 바꾸더라도 저런
임유진은 이미 이런 상황이 익숙했다. 많은 사람이 환경미화원을 무시하고 심지어 본인의 부주의로 환경미화원과 부딪쳤으면서 책임을 환경미화원에게 씌우기도 했다.“괜찮아요. 미옥 언니, 그냥 사소한 일이에요.”유진은 말하더니 다시 서미옥과 도로를 쓸었다. 일을 마치고 유진이 작업복을 갈아입을 때 우연히 작업복 주머니에 작은 은팔찌가 있는 걸 발견했다.이 팔찌는 언제 유진의 주머니에 들어간 것일까? 유진은 의심스럽게 생각했지만 야간근무인 관계로 환경위생과에 아무런 사람이 없어 일단 팔찌를 잘 보관하여 내일 다시 분실물등록을 하려고 했다.월세방으로 돌아오니 월세방은 아주 어두컴컴하고 고요했다.예전에 유진이 야간근무를 하고 돌아왔을 때는 밝은 방에 혁이가 유진을 기다리고 있었지만, 지금은…… 유진은 불을 켜고 썰렁한 방을 보면서 쓴웃음을 지었다.저녁에 침대에 누워있을 때 유진은 팔찌를 만져보았다. 아이의 은팔찌 같았고 디자인이 아주 흔했다. 유진은 어릴 때 자신도 비슷한 팔찌가 있었다는 게 떠올랐다.이 팔찌는 도대체 어떻게 유진의 작업복 주머니로 들어간 것일까? 순간 유진의 머릿속에 오늘 부딪친 남자가 떠올랐다. 설마 그 남자가 실수로 떨어뜨린 건가?그러나 이 팔찌는 딱히 비싸지 않아 보여 그 남자가 다시 찾지 않을지도 모른다. 순간 유진은 한숨을 내쉬었다. 왜 그런 쓸데없는 생각을 하는 것일까? 내일 일단 환경위생과에 가서 분실물 등록부터 하고 보면 된다.그리고 한편, 유진과 부딪친 그 남자는 호텔 룸에서 상처투성이가 된 채로 고문을 당하고 있다.남자는 지금 아주 후회하고 있다. 진작 알았더라면 그의 물건을 훔치지 않았을 것이다. 그의 옷차림으로 보아 부자 같아 보여 운이 좋아 대어를 낚았다고 생각했지만 아주 잔인한 사람을 건드린 것이다.“형님, 진짜 팔찌 어딨는지 몰라요! 저는…… 그 팔찌를 제 주머니에 넣었지만 저도 방금 형님이 제 주머니를 뒤졌을 때 왜 팔찌가 없는지 몰라요! 맹세해요!”남자는 피투성이가 된 얼굴로 강현수에게 무릎을 꿇고 소리
공한철은 이경빈의 기에 눌려 손에 땀이 차기 시작했다.“경빈 씨, 혹시 아직도 화 나 있는 거예요? 기증 일은 내가 거짓말한 게 맞지만 그건 다 경빈 씨를 사랑해서 그런 거예요. 나는 경빈 씨가 나를 모르고 있을 때부터 쭉 경빈 씨를 좋아하고 있었어요. 아니, 사랑하고 있었어요. 그래서 거짓말도 무릅쓰고 내가 기증해줬다고 한 거예요! 내가 경빈 씨를 속인 건 맞지만... 그게 범법 행위까지는 아니잖아요...”공수진은 자신은 잘못한 게 없다는 얼굴로 당당하게 말을 했다.이에 이경빈은 시선을 돌려 공수진을 빤히 바라보았다.“내가 아닌 우리 집안을 사랑하는 거겠지. 더 정확히는 우리 집 재산을. 공수진, 네 그 욕심 때문에 나는 인생이 망가졌어!”“거짓말한 건 미안하게 생각해요. 사과할게요. 그러니까 우리 다시 시작해요. 네?”공수진은 전과 같은 유약한 얼굴을 하며 그를 붙잡았다.“나 정말 경빈 씨 사랑해요. 경빈 씨 속상하게 만든 거 내가 다 잘못했어요. 탁유미 씨한테 사과하라고 하면 얼마든지 사과할게요. 보상도 할게요! 그러니까 우리 다시 잘해봐요. 나 정말 경빈 씨 없으면 못살아요!”“사랑이라고? 사랑한다는 사람을 그렇게도 감쪽같이 속여? 다른 사람에게 피해까지 주면서? 탁유미를 범죄자로 몰아가 결국 감방에까지 보낸 게 나를 향한 사랑의 표현이야? 탁유미만 사라지면 우리 집 며느리로 들어오는 게 쉬울 것 같았어? 그래?!”이경빈은 공수진을 턱을 으스러질 듯 잡으며 분노를 표출했다.손아귀 힘이 어찌나 센지 공수진은 자신의 턱뼈가 이대로 부서질 수도 있겠다는 느낌이 들었다.하지만 고통도 고통이지만 이경빈이 그때 당시의 진상을 모두 알아버렸다는 것에 그녀는 심장이 쿵 하고 떨어졌다.‘어떻게 된 거지? 이경빈이 그때 일을 다 알아버렸다고? 증거는 이미 내가 다 소거했는데?! 그래, 그냥 추측일 뿐일 거야. 실질적인 증거는 없는 게 분명해!’“오, 오해예요.”공수진이 힘겹게 말을 이어갔다.“나는 탁유미 씨를 범죄자로 몰아간 적 없어요. 나는
네티즌들은 공수진과 주원호에게 각종 비난과 욕을 해댔고 대대적으로 기사가 난 탓에 병원 관계자들도 공수진의 병실을 지나칠 때마다 한심하다는 눈빛을 보냈다.공수진은 그들의 눈빛에 제대로 고개를 들 수 가 없었고 이를 깨물며 하루빨리 퇴원하기만을 기다렸다.하지만 드디어 다가온 퇴원하는 날, 한결 가벼운 마음으로 병원을 나섰지만 그녀를 기다리는 건 아침부터 진을 치고 기다린 기자들이었다.“공수진 씨, 현재 인터넷에서 떠돌고 있는 동영상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이강 그룹 대표의 약혼녀로 알고 있는데 이경빈 씨는 동영상에 대해 뭐라고 하던가요? 결혼식은 예정대로 진행하시는 겁니까?”“유산한 아이가 이경빈 씨의 아이가 아니라 영상 속 남자분의 아이라는 소문이 있던데 맞습니까?”“탁유미 씨를 음해하려고 일부러 밀쳐진 척 넘어져 유산했다고 들었는데 사실입니까?”연이은 날카로운 질문에 공수진의 얼굴은 흙빛이 되어버렸다.“찍지 마세요! 찍지 마시라고요!”공씨 부부는 공수진이 지나갈 수 있게 고용한 경호원들과 함께 그녀의 앞을 막아섰다.기자들을 뚫고 간신히 차에 오른 후 공수진은 이를 바득바득 갈았다.“탁유미 때문에 이게 뭐야!”만약 탁유미가 아니었으면 자신이 이런 꼴을 당할 일도 없었을 거라며 그녀는 모든 걸 다 탁유미 탓으로 돌렸다.“일단 S 시를 떠나는 게 좋겠다. 며칠 뒤에 사태가 조금 잠잠해지면 그때 다시 경빈이 불러서 얘기하는 거로 해.”공한철의 말에 차량은 고속도로로 향했다.그렇게 20분쯤 달렸을까, 갑자기 어디서 나타난 건지도 모를 검은 차들이 거리를 바짝 좁혀오며 공수진네 차를 에워싸기 시작했다.끼익.“뭐야, 저것들은!”공한철이 눈을 부릅뜨며 화를 냈다.하지만 그것도 잠시 그는 정차된 앞차에서 내린 사람을 보고는 그대로 몸이 굳어버렸다.공씨 일가를 막아선 건 다름 아닌 이경빈이었다.이경빈이 내리자 검은 차에서 내린 부하직원들이 하나둘 공수진 일가를 차에서 끌어내기 시작했다.“경, 경빈 씨, 이게 지금 뭐 하는 거예요?
“하지만...”임유진은 말을 하려다가 순간 깜짝 놀라며 두 손으로 자신의 배를 끌어안았다.“왜 그래?”강지혁이 잔뜩 긴장한 채로 물었다.“방금 아이가 내 배를 찼어!”임유진은 이쯤이면 태동이 느껴질 거라는 건 이미 알고 있었다.전까지는 거의 착각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태동이 미약했는데 방금 그건 정말 누가 뭐라 해도 확실한 태동이었다.심지어 지금도 계속해서 배를 차고 있다.“아이가 네 배를 찼다고?”강지혁은 시선을 그녀의 배로 옮겨 조금 얼떨떨한 얼굴로 바라보았다.“응! 한번 만져봐.”임유진은 그의 손을 들어 자신의 복부를 만지게 했다.강지혁은 확실하게 느껴지는 태동에 조금 놀랍기도 하고 또 신기하기도 해 그만 몸이 경직되어버렸다.태동이라는 게 무엇이고 언제쯤 느낄 수 있는지에 대해 그도 임유진 못지않게 잘 알고 있다.하지만 이론은 어디까지나 이론으로 실제로 이렇게 태동을 느끼게 되니 완전히 다른 느낌이었다.이제야 진정으로 이 작은 배속에 생명이 자라고 있다는 것이 확실하게 머리에 박히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이 조그마한 아이들은 머지않아 세상 밖으로 나오게 될 거고 크게 울고 또 활짝 웃으며 서서히 커가게 될 것이다.임유진은 강지혁의 넋을 잃은 표정에 피식 웃었다.평소에도 물론 상당히 귀엽지만 지금은 평소보다 몇 배는 더 귀여워 보였다.이런 얼굴은 아마 그녀밖에 보지 못했을 것이고 앞으로도 그녀밖에 보지 못할 것이 분명하다.임유진은 소파에 앉아 편한 자세를 취했다. 그리고 본격적으로 아이가 차고 있는 곳이 어딘지 그의 손을 이곳저곳 움직이며 알려주기 시작했다.아이들은 큼지막한 아빠의 손길을 느껴서 그런지 그에 보답하듯 더 세게 발길질을 해댔다.덕분에 임유진의 배는 계속해서 꿈틀거렸다.강지혁은 무릎을 꿇고 그녀의 복부를 쓰다듬으며 진지한 얼굴로 태동을 느꼈다.임유진은 그 모습을 보더니 결국 참지 못하고 휴대폰을 꺼내 사진을 찍기 시작했다.“갑자기 사진은 왜 찍어?”강지혁이 고개를 들며 물었다.“기념하려고. 나중에
강지혁은 꼭 무엇을 무서워하고 있는 것 같았다.대체 뭘?혹시 진기태와 연관이 있는 건가?아까 진기태는 분명...임유진은 순간 뭔가 알아차린 듯 고개를 들며 그에게 물었다.“혁아, 너 혹시 내가 화낼까 봐 무서워서 이러는 거야?”그녀의 말에 강지혁은 몸은 또다시 굳어졌고 호흡도 다시 거칠어졌다.그는 그녀의 질문에 대답을 하는 것이 아닌 조금 더 그녀를 제 품에 끌어안았다.‘정답인가 보네.’강지혁은 지금 진기태가 마지막에 한 말 때문에 그녀의 눈치를 보고 있다.‘하긴 아까 엄청 세게 화를 내기는 했지.’강지혁은 아까 꼭 다른 사람이 된 것 같은 모습으로 진기태를 협박했다.꼭 건드려서는 안 될 것이 건드려진 것 같은 모습이었다.“걱정하지 마. 화 안 낼 거니까.”강지혁이 떨리는 목소리로 임유진에게 물었다.“정말...? 정말 화 안 내?”“응. 안 내.”임유진은 미소를 지으며 두 손으로 그의 얼굴을 감쌌다.“진 회장이 너 찾아온 거 진가원 프로젝트 때문이지? 네가 내 복수를 해주겠다고 이러는 거, 나 알아. 그러니까 걱정하지 마. 고작 그 사람 말 때문에 우리 사이가 흔들릴 일은 없으니까.”강지혁은 흔들리는 눈빛으로 임유진을 바라보았다.“그 인간이 했던 말, 정말 신경 안 써?”“응. 그때는 너도 내가 누군지 몰랐을 때잖아. 그때의 나는 그저 너한테 네 약혼녀를 차로 죽인 사람일 뿐이었어. 너한테 잘 보이겠다고 사람들이 일부러 나를 더 괴롭히기는 했지만 그게 네 탓은 아니니까. 그러니까 너 원망할 생각 없어.”임유진은 강지혁을 빤히 바라보며 그의 눈가를 부드럽게 매만졌다.“사실 너랑 사귀고 너를 정말 사랑하게 됐던 순간부터 나는 그 일을 이미 내 마음속에서 지웠어. 그리고 너도 그랬잖아. 만약 조금만 더 빨리 나를 알게 됐으면 절대 내가 그런 고통을 겪게 하지 않았을 거라고.”그녀의 말에 강지혁의 눈빛이 더욱 심하게 흔들렸다.그녀는 그가 무서워하는 게 그저 그 이유일 뿐일 거라고 생각하고 있다. 방관한 것으로 여태 이렇게까
그때 사무실 문이 열리고 진기태가 안에서 걸어 나왔다.다만 진기태는 몸을 비스듬히 한 채 앞이 아닌 사무실 안을 바라보고 있어 임유진의 존재를 전혀 알아채지 못했다.“강지혁, 네가 뭘 잊고 있는 것 같은데 임유진이 그렇게 된 건 네 탓도 있어!”진기태의 분노 어린 말에 임유진은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으며 저도 모르게 앞으로 두어 걸음 걸어갔다.그러자 그때 사무실 안에서 익숙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거기서 한마디만 더 하면 그때는 진화 그룹과 당신 가문을 완전히 없애버릴 거야.”임유진은 비스듬히 열린 문틈으로 소파에 앉아 있는 남자를 바라보았다.강지혁은 평소와 달리 분노가 가득 찬 얼굴을 하고 있었고 심지어 그 예쁜 두 눈에 살기도 어려 있었다.‘살기...? 내가 뭘 잘 못 본 건가?’진기태는 강지혁의 위협에 겁을 먹고는 그의 눈을 피하려 서둘러 고개를 돌렸다. 그러다 드디어 임유진과 눈이 마주쳤다.그는 임유진의 얼굴을 보더니 금세 험악한 표정을 지었고 곧바로 씩씩거리며 자리를 떠났다.강지혁도 그때쯤 임유진이 밖에 있다는 것을 눈치챘고 그는 그녀를 보더니 그대로 몸이 뻣뻣하게 굳어버렸다.서둘러 분노를 지우고 평소와 다를 것 없는 부드러운 표정을 지으려고 해봤지만 눈가에 서린 당황함과 초조함은 감춰지지 않았다.진기태와의 대화를 들은 걸까?만약 들었으면 어떡하지?임유진이 이상함을 눈치채고 멀리하려고 들면...강지혁은 그 생각에 순간 호흡하는 것조차 곤란해지며 온몸이 차갑게 식었다.임유진은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사무실 안으로 들어왔다.“혁아, 방금 진기태 회장이랑...”“일 얘기 했어. 일 얘기만...”강지혁은 서둘러 대답하며 평정심을 되찾으려고 애썼다.하지만 심장은 여전히 비정상적으로 빨리 뛰고 호흡은 점점 더 딸리기 시작했다.“너 얼굴이 왜 그래? 괜찮아?!”임유진은 창백한 그의 얼굴이 걱정돼 쓰다듬으려 손을 뻗었다.하지만 얼굴에 닿기도 전에 강지혁에 의해 손이 저지당하고 말았다.“난... 괜찮아.”임유진은 강지
“지혁아, 아무리 그래도 너랑 우리랑은 사돈이 될 뻔했던 집안이잖냐. 그간의 정도 있는데 꼭 이렇게까지 해야겠어?”진기태가 먼저 말을 꺼냈다.“진가원 프로젝트는 우리한테 아주 중요한 프로젝트야. 너희가 가져가봤자 사업에 크게 도움이 되지도 않을 텐데 굳이 왜 그걸 가져가려고 해.”“진화 그룹도 이제는 슬슬 무대 아래로 내려가야 하지 않겠어요?”강지혁이 담담하게 말하며 그를 바라보았다.잔뜩 긴장한 진기태와 달리 그는 아주 여유롭다 못해 느긋해 보이기까지 했다.“우리 그간 사업 파트너로서 좋은 관계를 잘 이어왔잖아. 뭐 서운한 거 있으면 그냥 나한테 직접 얘기해. 내가 해줄 수 있는 거라면 뭐든...”“그럼 진화 그룹과 진화 그룹 산하의 모든 회사를 다 저한테로 넘기세요.”강지혁의 말에 진기태의 얼굴이 한순간에 변했다.모든 회사를 다 넘기라니, 그건 헐벗고 거지가 되라는 말과도 같았다.“너...!”진기태는 주먹을 꽉 말아쥐며 강지혁을 바라보았다.“너 대체 왜 이렇게까지 하는 거니? 설마...”그때 그의 머릿속으로 한가지 이유가 떠올랐다. 하지만 몇 초도 안 돼 아무리 강지혁이 미친놈이라고는 해도 그 이유는 아닐 것이라고 생각했다.‘그래.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강지혁이 여자 하나 때문에 멀쩡한 가문 하나를 없애버리려 한다는 게 말이나 되는 소리야? 하지만...’하지만 그거 말고는 강지혁이 갑자기 이러는 게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진씨 가문과 강지혁 사이에 갈등이 있다고 하면 그건 임유진이 감옥에 간 일밖에 없으니까.“너 혹시... 임유진 때문은 아니지?”진기태는 설마 하는 마음으로 이 말을 입밖에 내뱉었다.“왜 아닐 거라고 생각하세요?”강지혁은 아주 빠르게 인정했다.“허...!”진기태는 강지혁이 정말 임유진 하나 때문에 이런다는 얘기를 듣고 기가 막혀 말도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하, 하지만 그 일은 그때 세령이가 이미 대가를 치렀잖아!”일전 진세령은 임유진을 건드렸다는 이유로 강지혁에 의해 어쩔 수 없이 연예계에서
하지만 아무리 내리쳐도 고통은 가실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윽...”이경빈의 머릿속으로 당시의 장면이 하나둘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탁유미는 그때 이경빈에게 자신은 억울하다고, 자신이 그런 게 아니라고 수백 번을 더 말했다.하지만 그 말을 들었음에도 그는 전혀 믿어주지 않았고 오로지 탁씨 가문에 복수할 것만을 생각하며 공수진이 그렇게 된 게 전부 탁유미 때문이라고 확정을 지었다.그때는 그렇게 해야만 모든 게 끝날 줄 알았다. 비참한 그녀의 말로를 봐야만 가슴속의 응어리가 다 사라질 줄 알았다.그는 법을 무기로 그녀의 몸을 잔인하게 찔러댔다.그리고 이윽고 그녀의 자존심과 순박함 그리고 세상을 믿는 그 맑은 눈을 완전히 부숴버렸다.“경빈이 너는 운명을 믿어?”“글쎄. 너는?”“나는 믿어. 그리고 그 운명과 평생 함께한다는 얘기도 믿어. 운명이라면 서로 말고는 눈에 들어오는 사람이 없을 거야. 만약 다른 누군가가 눈에 들어오면 이전 사람은 운명이 아니었던 거지. 경빈아, 나는 네가 내 운명의 사람이라고 믿어.”“날 진심으로 사랑한다는 말이 하고 싶은 거야?”“응. 나는 이번 생에 이경빈이 아닌 다른 남자를 좋아하고 사랑할 계획은 없거든. 난 너만 사랑할 거야!”너만 사랑할 거라는 말을 했던 탁유미의 얼굴은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그녀는 정말 자신의 모든 것을 다 그에게 내어줄 수 있을 정도로 그를 사랑했다.하지만 그는 그런 그녀의 사랑을 짓밟고 더럽히고 또 처참하게 버렸다.임유진은 면회실에서 나와 천천히 이경빈의 앞으로 다가갔다.바닥에 엎드린 채 몸을 덜덜 떠는 그를 보며 그녀는 담담한 목소리로 물었다.“이경빈 씨는 언니한테 목숨을 한번 빚졌어요. 그 목숨 다시 언니한테 줄 수 있어요?”이경빈은 그 말에 고개를 들더니 처연하게 웃었다.“내 목숨 같은 거 유미한테 큰 가치가 없을 거예요... 하지만 만약 유미가 원한다면 내 목숨 따위 언제든지 내어줄 수 있어요.”만약 탁유미가 그의 목숨을 원한다면 그는 몇백 번이고 죽어줄 수 있다.
또한 금방이라도 떨어질 것 같은 벼랑 끝에 서 있는 기분이었다.“돈을 받아? 공수진이 원하는 대로 해줘?”이경빈은 분노에 찬 눈빛으로 의사를 바라보았다.“당신 의사잖아. 사람 목숨을 살리는 의사잖아! 그런데 그 간사한 혀로 죄 없는 사람을 감옥으로 보내?!”의사는 이경빈의 호통에 깜짝 놀란 듯 몸을 웅크리며 그의 눈을 피했다.“제가 보냈다뇨. 저... 저는 그냥 공수진 씨가 유산했다는 말밖에 안 했어요. 그 여자가 공수진 씨를 계단에서 밀었다고 증언한 건... 이경빈 씨잖아요.”그의 말에 이경빈은 순간 할 말이 없어졌다.의사 말대로 탁유미가 공수진을 계단에서 밀었다고 증언한 사람은 다른 누구도 아닌 그였으니까.그 어떤 증거보다 그의 한마디가 제일 크게 작용했다.이경빈은 한순간 꿀 먹은 벙어리가 되어 버렸고 은이 얼어붙은 것처럼 미동도 하지 않았다.“이경빈 씨는 그때 공수진 씨의 치마가 피로 물든 것을 봤다고 했어요. 그런데 공수진 씨는 임신하지 않았죠. 그러니 유산은 더더욱 없을 일이고요. 그렇다면 그 피는 대체 뭐였을까요?”임유진이 이경빈을 빤히 바라보며 말했다.이경빈은 덜덜 떨리는 입술을 꽉 깨물며 눈을 질끈 감았다.눈을 감자마자 당시의 화면이 하나둘 스쳐 지나가기 시작했다.“어떻게 임신도 아니고 유산도 아닌데 피를 흘릴 수 있었을까요. 그것도 하필 유미 언니랑 얘기하다가 마침 계단에서 떨어져서요. 제 생각은 이래요. 애초에 공수진 씨는 유미 언니를 모함하기 위해 미리 피가 든 팩을 준비했고 언니를 계단으로 불러 일부러 마치 언니한테 밀쳐진 것처럼 계단에서 구른 거죠.”임유진은 계속해서 이경빈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을 이어갔다.“이경빈 씨, 그날 정말 유미 언니가 공수진 씨를 밀었나요? 그걸 확실히 두 눈으로 보셨어요? 사실은 공수진 씨가 언니가 밀었다고 하니까 그렇겠거니 한 건 아니고요? 사실 그 사건은 조금만 제대로 조사해보면 금방 진실이 뭔지 알 수 있는 사건이에요. 그런데 이경빈 씨는 그때 복수심에 눈이 멀었고 마침
“가 보면 알아요.”임유진은 담담하게 대꾸했다.조금 있으면 이경빈도 모든 진실을 알게 된다. 그리고 그가 탁유미에게 얼마나 큰 잘못을 했는지, 얼마나 멍청한 짓을 저질렀는지 역시 알게 된다.그때가 되면 이번에는 뭐로 보상하겠다고 할까.어쩌면 강지혁의 말대로 모든 진실을 알게 되면 그는 남은 생을 평생 후회 속에서 고통스럽게 살게 살아갈지도 모른다.병원에서 나온 후 이경빈은 임유진을 따라 차에 올라탔다.가는 길, 이경빈이 임유진을 보며 물었다.“주원호를 병실로 보낸 것도 임유진 씹니까?”“네.”임유진은 그간 줄곧 강지혁의 도움으로 주원호의 동태를 파악하고 있었기에 공항에 간다는 것을 듣자마자 바로 그를 잡아 왔다.사실 그녀의 계획대로라면 주원호를 등장시킬 필요도 없었다. 이경빈에게만 조용히 따로 진실을 얘기해주려고 했었으니까.그런데 그사이 공수진이 또다시 일을 저질렀고 탁유미는 그로 인해 큰 상처를 입게 됐다.이경빈은 가만히 있다가 다시 물었다.“그럼 유미가 나한테 골수를 기증해줬다는 것도 훨씬 전에 이미 알고 있었겠네요.”“네. 사실은 그걸 알게 되고 나서 유미 언니한테 얘기를 했었어요. 어쩌면 이경빈 씨를 구한 사람이 언니일지도 모른다고, 그러니 이경빈 씨한테 얘기해보는 건 어떻겠냐고. 그런데 언니가 그러더라고요. 어차피 자신이 말해봤자 이경빈 씨는 믿지 않을 거라고요.”이경빈은 그 말에 심장이 또다시 욱신거리며 아파 났다.탁유미는 이미 모든 걸 다 파악하고 있었다.그가 믿지 않을 거라는 걸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대체 탁유미는 어떤 기분이었을까. 자기가 구한 사람이 화를 내고 사과하라고 윽박지르고 강제로 무릎까지 꿇으라고 명령하는 걸 보며.이경빈이 또다시 자책하고 있을 그때 차량이 드디어 목적지인 구치소 앞에 도착했다.이경빈은 차에서 내린 후 의문 섞인 얼굴로 임유진을 바라보았다.여기는 왜 온 거지?대체 누가 있길래?이경빈은 임유진을 따라 구치소 안 면회실에 도착했다.안으로 들어가 보니 어딘가 낯이 익은 한 남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