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민준도 옆에서 거들었다.“들었어? 내가 사랑하는 사람은 세령이야. 네가 아무리 우연인 척 이렇게 아등바등해봤자 나는 너 안 좋아한다고. 그러니까 추잡스러운 짓 좀 그만해.”“룸을 착각한 거라고 이미 두 번이나 말한 것 같은데, 너 청력에 무슨 문제 있니? 그리고 너는 내가 잊지 못할 정도로 대단한 사람이 아니야. 나는 여전히 널 만난 게 내 인생 최대 실수라고 생각해. 그러니까 너나 추잡스러운 생각 좀 그만해.”임유진의 말에 소민준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지더니 그대로 앞으로 걸어가 임유진에게 손을 올렸다.하지만 뺨을 내리치려는 그때 임유진의 경호원이 소민준 친구를 옆으로 던져버리더니 바로 옆으로 다가와 소민준의 팔을 잡고 바닥에 제압해버렸다.“사모님, 이 남자 어떻게 처리할까요?”경호원이 물었다.“지금 바로 경찰에 신고할 테니 그대로 계속 제압해주세요. 또 달려드는 사람이 있으면 그 사람들도 제압해주시고요.”“네, 알겠습니다.”두 사람의 말에 룸 안에 정적이 흘렀다.소민준을 간단히 제압한 여경호원의 몸놀림에 다들 그대로 굳어버려 소민준을 구할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소민준은 바닥에 얼굴이 찰싹 달라붙은 채로 소리를 지르며 벗어나려고 애썼지만 경호원의 힘에 꼼짝도 하지 못했다.“임유진, 좋은 말로 할 때 빨리 이 사람한테 민준이 풀어주라고 해! 내 말대로 안 하면 소씨 가문과 진씨 가문이 너를 가만두지 않을 거야. 그렇게 되면 너는 이 S 시에서 발도 못 붙이게 될 거라고!”그 말에 임유진이 뭐라 대꾸하려는데 그보다 먼저 웬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어디 한번 해봐. 어떤 방법을 쓸지 궁금하니까.”남자는 말을 마친 후 임유진의 바로 옆에 섰다.남자는 다름 아닌 바로 강지혁이었다.룸에는 또다시 정적이 찾아왔고 강지혁을 아는 사람들은 완전히 굳어버렸다. 그중에는 물론 소민준과 진세령도 있었다.방금까지만 해도 소리를 지르던 소민준은 목소리 내는 법을 잊어버린 듯 입을 꾹 닫았고 진세령은 얼굴이 새하얗게 질려버렸다.“뭐, 뭔가 오해가
강지혁은 말을 마친 후 다시 고개를 돌려 임유진을 바라보았다.“가자. 음식 다 차가워지겠다.”“응.”임유진은 고개를 끄덕이다가 뭔가 생각난 듯 발걸음을 멈추고 말했다.“나 방금 경찰 불렀어. 여기 있는 사람들이 나한테 모욕적인 말을 내뱉었거든. 아마 금방 도착할 거야.”“그건 황채린이 알아서 처리할 테니까 신경 쓰지 않아도 돼.”강지혁이 말한 황채린이라는 여자는 바로 임유진 옆에 있던 여자 경호원이다.임유진은 그 말에 고개를 끄덕인 후 다시 발걸음을 돌렸다.소민준은 경호원의 손에서 풀려난 후 천천히 바닥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러고는 이를 꽉 깨물고 강지혁과 임유진을 바라보았다.한때 마치 장기 말처럼 버렸던 여자가 지금은 그보다 훨씬 더 대단한 남자 옆에 서 있다.그래서 소민준은 지금 이 상황이 상당히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한들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없었다. 상대는 강지혁이니까.한편 진세령은 지금 상당히 놀란 얼굴이었다.한때 형부가 될 뻔했던 남자가, 언니가 미치도록 사랑했던 남자가, 언니 장례식에서는 눈물 한방울 흘리지 않고 내내 냉랭한 얼굴로 있더니 지금은 다른 여자에게 이토록 다정하고 부드러운 눈빛을 지어주고 있었니 말이다.그리고 그 여자는 다름 아닌 소민준의 전 여자친구였던 임유진이다.강지혁은 임유진의 손을 잡은 후 룸을 나가려다가 뭔가 생각난 듯 발걸음을 멈추고 시선을 내려 수중에 있는 삐뚤빼뚤한 여자의 손을 한번 바라보았다.그러고는 다시 고개를 돌려 진세령을 향해 말했다.“그러고 보니 그때 내 와이프가 감옥에서 진씨 가문의 신세를 많이 졌더라고. 그리고 너는 그때 내 와이프가 평생 손을 쓰지 못하게 하려고 했었지, 아마?”그 말에 진세령의 얼굴이 하얘지더니 두 손이 덜덜 떨렸다.강지혁은 그런 진세령을 빤히 바라보고는 다시 아무 일 없다는 듯 임유진과 함께 자리를 벗어났다.두 사람이 떠난 후 진세령은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아버렸다.방금 강지혁의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소민준의 집.“뭐? 임유진이 강지혁이랑 결혼했다고?!”소민영이 믿기 힘들다는 얼굴로 물었다.그녀는 강지혁이 그 많은 여자를 다 제쳐두고 임유진과 결혼을 했다는 게 믿어지지 않았다.임유진은 강지혁과 결혼할 자격 같은 게 없는 여자니까.“오빠가 뭐 잘못 들은 건 아니고?”“강지혁이 직접 자기 입으로 자신이 임유진 남편이라고 했어. 그리고 옆에 있던 경호원 여자도 임유진을 사모님이라고 불렀고.”소민준이 다시금 룸에서 있었던 일들을 떠올리며 말했다.사실 지금에 와서 돌이켜보면 경호원에게 제압당한 게 천만다행이었다. 만약 그대로 임유진의 뺨을 내리쳤으면 그때는 멀쩡한 손이 그 자리에서 바로 잘려나갔을 테니까.당시 소민준은 진세령이 감옥에 있는 사람을 시켜 임유진의 손톱을 하나하나 뜯어버리는 모습을 가만히 지켜만 봤었다.임유진이 아프다며 소리를 지르고 눈물을 보이는데도 그저 차가운 눈으로 구경하기만 했다.그러니 아마 강지혁은 그때 임유진이 받았던 고통보다 더한 고통을 진씨 가문과 소씨 가문에게 주려고 할 것이다.“참 운이 좋아? 강지혁이 여자 보는 눈이 없는 덕에 언감생심 바라보지도 못할 곳에 오르게 됐잖아. 길바닥 쓰레기나 줍던 년이.”소민영이 비아냥거렸다.그러자 소민준이 무서운 눈빛으로 소민영을 바라보았다.“남은 한쪽 다리마저 부러지고 싶은 게 아니라면 이제부터 그런 말은 자제해. 특히 밖에서는 더.”이에 소민영이 도끼눈을 뜨며 입술을 꽉 깨물었다.만약 임유진이 아니었으면 멀쩡했던 다리가 부러지지도 않았을 것이다.사실 소민영은 강지혁이 임유진을 완전히 버린 후 기회를 봐 임유진을 완전히 처리해버리려고 했었다.그런데 이제는 임유진에게 가까이 가는 것조차 어려워졌다.“그럼 사돈네는 지금...”소민준의 아버지가 입을 열었다.“아마 지금 상당히 골치 아파하고 있을 거예요. 진씨 가문에서 저지른 일이 있으니 만약 강지혁이 정말 복수하려고 들면 세령이네 집안은 쫄딱 망해버릴지도 몰라요.”“세상에!”소민준의 어머니가 망연자실한 얼굴로 소
“내가 그렇게 내버려 두지 않아. 만약 강지혁이 우리 집 전체를 망하게 하려고 들면 그때는 내가 직접 강지혁을 찾아갈 거다. 그러니 네 일은 네가 알아서 해결해!”진기태는 단호하게 말한 후 서재로 들어가 버렸다.진세령은 얼굴이 잔뜩 일그러진 채 주먹을 꽉 말아쥐었다.다음날, 한때 잘나가던 배우이자 부잣집 딸내미였던 진세령이 발을 헛디뎌 계단에서 굴렀다는 기사가 인터넷에 돌기 시작했다.기사 내용에 따르면 진세령은 양손 모두 골절이라 당분간 병원 신세를 져야 한다고 하며 완치된다고 하더라도 후유증이 남을 거라고 했다.기사가 나간 후 각종 매체에서 진씨 가문에게 연락을 넣어 인터뷰를 요청했지만 전부 다 거절당하고 말았다.임유진은 기사 내용을 확인한 후 고개를 돌려 [행복한 임산부가 되는 방법]을 보고 있는 강지혁을 향해 물었다.“진세령 기사, 너랑 관련 있어?”그 말에 강지혁이 은은하게 웃었다.“왜, 내가 너 때문에 위법적인 일을 했을까 봐 걱정돼?”“...”임유진은 이에 침묵으로 답했다.그러자 강지혁이 손에 든 책을 내려놓고 임유진의 앞으로 다가가더니 그대로 허리를 숙였다.“예전의 나였다면 앞뒤 재지 않고 아무런 거리낌 없이 그렇게 했겠지. 하지만 지금은...”강지혁이 임유진의 두 눈을 빤히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지금은 네가 있으니까 위법적인 일은 안 해. 누군가를 상대해야 할 일이 있어도 법 테두리 안에서 해결할 거야. 그러니까 걱정하지 마.”강지혁은 임유진이 어떤 사람인지 잘 알고 있다. 그녀는 폭력적인 것을 싫어하고 권위를 앞세워 누군가를 짓누르는 것도 싫어하는 사람이다.그러니 그녀가 싫어하는 건 할 이유가 없다.임유진은 마치 자신의 마음을 훤히 들여다보는 듯한 강지혁에 순간 가슴이 일렁거렸다.강지혁이 자신을 위해준다는 것을 그녀 역시 잘 알고 있었다.“고마워.”임유진이 말했다.“고마워할 거 없어. 당연한 거야. 나는 널 사랑하니까.”강지혁은 임유진의 손을 다정하게 잡았다.“나는 진세령에게 네 손을 이렇게 만든 것
“이 안에 우리 아이들이 있어.”강지혁은 임유진의 배가 조금 볼록해지고서야 실감이 났다.이 작은 배속에 새 생명이 자리 잡고 있다는 것과 그가 정말 아빠가 된다는 사실이 말이다.“혁이 너는 좋은 아빠가 될 거야.”임유진이 강지혁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말했다.“정말 그럴까?”사실 강지혁은 아이들에게 좋은 아빠가 될 자신이 없었다. 그저 아이들이 자신처럼 외롭지만은 않기를 바랄 뿐이다.“분명히 그럴 거야.”임유진은 확신을 담아 대답한 다음 풉 하고 웃었다.“왜 웃어?”강지혁이 고개를 들어 임유진을 바라보았다.“그냥, 미래에 아이들이 네 주위에 몰려들어 아빠라고 부르며 안아달라고 할 때 네가 말없이 세 명 다 안아주는 모습이 상상돼서.”임유진의 말에 강지혁이 고개를 갸웃했다.그게 어떤 그림일지 아직 그의 머리로는 상상이 되지 않았다.다만 하나 알 수 있는 건 아이들이 태어나면 이 집안이 3배 더 북적거리고 3배 더 따뜻해질 거라는 것이다.“유진아, 사랑해.”강지혁이 고개를 든 채로 임유진을 바라보며 사랑을 속삭였다.세상에 아름다워 보이기 시작한 건, 누군가가 이렇게 사랑스러워 보이게 된 건 다 임유진 덕이다.임유진이 있어 흑백이던 그의 세상이 채색으로 되었다.“나도.”임유진은 달콤하게 웃더니 고개를 숙여 먼저 강지혁의 입술에 입을 맞췄다.그녀는 제일 힘들었던 시기에 강지혁을 만났고 그와 연애를 하고 이렇게 결혼까지 하게 되었다.자신의 인생에 결혼은 없을 거라고 아이는 없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강지혁을 만난 후 모든 게 달라졌다.가족이 생긴 것도, 이렇게나 마음이 벅차고 포근해진 것도 다 강지혁 덕분이다.강지혁의 사랑이 그녀를 변하게 한 것이다....다음날.임유진은 임산부 교육 프로그램을 듣기 전 정기검진을 받게 되었고 강지혁은 그런 그녀를 따라 함께 병원으로 갔다.임유진은 검진 중 초음파 기기 화면으로 보이는 세 명의 꼬물이들과 그 꼬물이들의 심장 소리를 전해 듣고는 저도 모르게 눈시울이 붉어졌다.“왜 그래?
“태아 상태가 양호한 편이기는 하지만 유산방지 주사는 맞아야 합니다. 하루에 한 번, 일주일을 맞게 될 거예요. 더 맞을지 말지는 일주일 뒤에 다시 판단하게 되고요. 미리 말씀드리면 주사는 복부에 맞게 됩니다. 그래서 팔이나 엉덩이에 맞는 것보다 통증이 조금 있을 거예요. 마음의 준비를 해주세요.”“네, 그럴게요.”임유진은 고개를 끄덕였다.무사히 아이를 낳을 수만 있다면 그 어떤 고통도 다 참을 수 있다.하지만 강지혁은 아니었다.그는 주삿바늘이 임유진의 복부를 향해 천천히 다가올 때 잔뜩 긴장한 채로 간호사의 손을 덥석 잡았다.“이 주삿바늘이 들어가는 겁니까?”“네... 그렇죠?”간호사가 조금 떨리는 목소리로 답했다.“정말 배에 맞아도 괜찮은 겁니까? 확실해요? 이거보다 더 짧은 건 없나요?”“...”간호사는 그 말에 당황한 듯 안절부절못했다.그러자 임유진이 강지혁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혁아, 난 괜찮으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그 말에 강지혁은 그제야 간호사의 손을 풀어주었다. 하지만 표정은 여전히 심각했고 간호사가 손에 든 주삿바늘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이에 간호사는 괜히 긴장돼 강지혁의 눈치를 보며 주사 놓는 것을 망설였다.“혁아, 너 잠깐 나가 있을래? 네가 이렇게 뚫어지게 쳐다보면 이분이 긴장하시잖아.”보다 못한 임유진이 말했다.“여기 있을 거야. 대신 시선은 다른 곳을 볼게.”강지혁은 말을 마친 후 시선을 바로 임유진의 얼굴 쪽으로 돌렸다.간호사는 감시의 시선이 사라지자 그제야 안심하고 주삿바늘을 임유진의 복부로 밀어 넣었다.주삿바늘이 들어온 순간 임유진은 저도 모르게 미간을 찡그리며 이를 꽉 깨물었다.의사 말대로 확실히 다른 곳보다 많이 아팠다. 하지만 이 정도 고통은 그녀에게 아무것도 아니었다.3년이나 감옥에서 버텼는데 이 정도는 충분히 참을 수 있었다.주사를 다 맞은 후 강지혁이 임유진의 손을 꼭 잡고 물었다.“많이 아파?”“괜찮아. 그냥 다른 주사에 비해 조금 더 아팠을 뿐이야.”임유진이 웃으
박현재는 임산부와 그 임산부의 남편이 듣는 수업에 왜 강지혁이 버젓이 앉아있는지 이해가 가지 않아 몇 번이고 눈을 질끈 감았다가 다시 떴다.“당신 왜 그래? 눈에 뭐 들어갔어?”박현재의 와이프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응? 아, 아무것도 아니야.”박현재는 쿵쿵 뛰는 가슴을 애써 진정하며 와이프에게 웃어 보였다.그러고는 와이프의 손을 잡고 강지혁의 뒤쪽으로 가서 앉았다.근거리에서 보니 확실히 강지혁이 맞았다. 게다가 상황을 보아하니 옆에 앉은 베이지색 원피스를 입은 여자와 함께 수업을 들으러 온 듯했다.‘임산부 같은데 강 대표랑은 어떤 사이지? 친척 동생인가? 설마 부인일 리는 없고.’만약 강지혁이 결혼을 했으면 이미 기사로 난리가 났을 것이다.그 시각 임유진은 선생님의 말씀을 하나도 놓치지 않겠다는 기세로 노트와 펜을 집어 들었다.강지혁은 진지한 얼굴의 그녀를 보고 저도 모르게 피식 웃었다.“놓친 부분이 있으면 선생님을 집으로 불러 따로 수업해 달라고 할게.”“아니, 나는 지금 이 분위기가 좋아.”임유진이 주위에 앉은 임산부들을 둘러보며 조금 들뜬 얼굴로 말했다.“그래?”강지혁은 임유진이 말한 분위기가 어떤 분위기인지 잘 몰랐지만 그녀가 좋다고 하니 덩달아 기분이 좋아졌다.시간이 되고 수업을 맡게 된 의사가 활짝 웃으며 회의실로 들어왔다.의사는 여유로운 표정으로 걸어들어오다가 바로 앞에 보이는 강지혁의 얼굴에 잠시 흠칫했다.해당 의사는 임유진의 주치의는 아니었지만 당시 강지혁이 의사들을 불러모았을 때 그 자리에 있었다.그래서 그녀는 강지혁이 임유진의 남편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하지만 다 알고 있는데도 아내를 따라 임산부 수업을 들으러 온 강지혁은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강지혁이 여자를 가까이하지 않는다는 건 알만한 사람들은 다 아는 사실이다. 그래서 약혼녀가 죽었을 때도 냉랭한 표정을 지었던 것을 어느 정도 이해할 수는 있었다.하지만 지금 보니 강지혁은 그저 그간 임자를 제대로 만나지 못했을 뿐이었다. 그는 여자들이
“아버님들 중에 또 지원하실 분 없으세요?”간호사는 예비 아빠들을 쭉 훑어보더니 이내 강지혁의 앞에 멈춰 섰다.“잘생긴 아버님, 시범 좀 보여주지 않으시겠어요?”예비 아빠들 중 강지혁의 얼굴은 단연 눈에 띄었다. 그래서 간호사는 분위기도 끌어올릴 겸 바로 강지혁을 지목했다.하지만 간호사의 말에 의사는 안절부절못했다. 아무리 강지혁이 지금 이 자리에 참석했어도 앞으로 나와 사람들 앞에서 시범을 보이는 것까지는 무리라고 생각했으니까.그러나 예상외로 강지혁은 간호사의 말에 바로 거절하지 않고 고개를 돌려 옆에 있는 임유진에게 물었다.“내가 어떻게 했으면 좋겠어?”“너 하고 싶어?”임유진이 되물었다.“네가 원하면 나갈게.”그 말에 임유진은 강지혁을 빤히 바라보았다.솔직히 말하면 강지혁이 아이를 안고 있는 모습이 어떤지 무척이나 궁금했다.그래서 임유진은 잠깐 고민하다가 금방 고개를 끄덕였다.“응, 원해.”“좋아.”강지혁은 피식 웃더니 자리에서 일어나 정장 재킷을 벗은 후 앞으로 유유히 걸어 나갔다.잘생긴 얼굴에 모델 같은 기럭지가 앞으로 걸어 나가자 사람들의 시선이 순식간에 강지혁에게로 쏠렸다.예비 엄마들은 물론이고 예비 아빠들도 입을 떡 벌리고 강지혁을 바라보았다.한편 의사는 강지혁의 행동에 어안이 벙벙해졌다.그도 그럴 것이 아내가 원한다는 한마디에 싫은 내색도 없이 바로 앞으로 걸어 나왔으니까.강지혁의 뒤에 있던 박현재도 깜짝 놀란 얼굴이었다.그 언젠가 의사의 가르침 아래 아이 모형을 안고 있는 강지혁을 보게 될 줄을 그 누가 상상이나 했을까.이건 정말 충격적인 장면이 아닐 수 없었다.지인들에게 지금 보고 있는 광경을 사실 그대로 얘기해도 믿어주지 않을 게 분명했다.“자기야, 저 남자 너무 잘생겼다. 배우일까? 아니면 모델? 한 번도 본 적 없는 얼굴인데 대체 누구지?”박현재의 와이프가 박현재의 팔을 콩콩 두드리며 작게 소리를 질렀다.이에 박현재가 한숨을 길게 내쉬며 말했다.“당연히 한 번도 본 적 없겠지. 쉽게 볼
직장 동료들은 한지영에게 위로를 건네며 은근히 그녀에게 잘 보이려는 듯한 말투로 얘기했다.심지어 어떤 사람은 아예 대놓고 그녀에게 백연신과의 사이를 묻기도 했다.“그럼 지영 씨는 백연신 씨랑 다시 만나는 거예요?”“그날 기자들 무리에서 지영 씨 손을 덥석 잡고 차로 끌고 가는데 내가 다 설렜지 뭐예요? 완전 현실판 왕자님 아니에요?”“그럼 앞으로 지영 씨를 뭐라 불러야 하나?”“백연신 씨가 회장님이니 당연히 회장 사모님 아니겠어요?”한지영은 직원들의 태도가 바뀐 게 전부 백연신 때문이라는 걸 알고 있다. 이런 상황을 처음 겪는 것도 아니었으니까.“아니요. 백연신 씨와는 아무 사이도 아니에요. 그러니까 괜한 추측은 하지 말아주세요. 그리고 저, 사귀는 사람 따로 있어요.”한지영은 차가운 목소리로 대꾸했고 이에 사람들은 어색하게 웃으며 서로 눈빛을 주고받더니 금방 다시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옆에서 떠드는 사람들이 없으니 이제야 살 것 같았다.어제 집으로 돌아갔을 때 백연신은 끝까지 나타나지 않았다. 그저 경호원을 통해 그녀에게 전언만 남겼다.“회장님께서 더는 걱정하지 않으셔도 된다고, 앞으로도 쭉 전과 같이 아무 일도 없을 거라고 하셨습니다.”전과 같다는 건 백연신 역시 더는 그녀 앞에 나타나지 않을 거라는 건가?한지영은 그 생각에 갑자기 울컥하며 눈물이 차오르려는 것이 느껴졌다. 하지만 그녀는 곧바로 다시 마음을 다잡으며 스스로에게 되뇌었다.이건 자신이 바란 거라고, 그러니 아무것도 슬퍼할 것 없다고 말이다.‘그래, 잘 된 거야. 이게 제일 좋은 결말이야. 증오도 없고 더 이상의 미움도 없는... 그냥 좋은 추억만 간직한 지금이 제일 좋은 끝이야.’다시 그와 연인이 되었다가 또다시 고난에 부딪혀 헤어지게 되면 그때는 완전히 원수지간이 될지도 모르니 차라리 아무것도 시작하지 않는 게 백배는 더 나았다.한지영은 더 이상 백연신과 함께 할 용기가 없었다. 아무리 그가 사랑을 외쳐도 아무리 줄곧 그녀만 사랑해왔다고 해도 이제는 그 마음을
연우진은 그 어느 날 자신이 백연신의 질투 대상이 될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지영 씨한테 마음이 남은 거라면 내가 아닌 지영 씨와 얘기를 하세요.”연우진이 차분한 목소리로 말을 이어갔다.“그리고 내가 지영 씨와 만나고 싶다고 해도 지영 씨가 받아주지 않으면 함께 하지 못해요. 이건 백연신 씨도 마찬가지고요. 백연신 씨가 여전히 지영 씨를 좋아한다고 해도 지영 씨가 받아주지 않으면 두 사람 역시 함께 못해요. 선택권은 지영 씨한테 있으니까.”백연신은 주먹을 말아쥐며 다시 물었다.“지영이와 만날 건지에 대한 대답만 해.”연우진은 한숨을 한번 내쉬었다. 아무래도 대답을 해주지 않으면 순순히 보내주지 않을 듯하다.“지영 씨는 좋은 사람입니다. 이대로 감정이 싹트면 나로서는 당연히 지영 씨와 함께하고 싶겠죠.”“한지영의 곁에 있을 수 있는 남자는 모든 걸 다 내어줄 수 있을 정도로 한지영을 사랑하는 사람이 아니면 안 돼.”백연신이 경고하듯 낮게 읊조렸다.“어째 내가 모든 걸 다 내어줄 정도로 한지영 씨를 사랑하지 않으면 우리 둘이 함께하는 걸 방해하겠다는 얘기로 들립니다만?”연우진의 질문에 백연신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지만 냉랭하고 차가운 눈빛을 보면 그 대답이 뭔지 알 수 있을 것도 같았다.“백연신 씨는 지영 씨를 위해 모든 걸 다 내어줄 수 있습니까? 그 정도로 사랑한다면 여기서 나한테 이러지 말고 다시 한번 지영 씨 마음에 들기 위해 노력을 해보는 게 어떨까요?”백연신은 그의 말이 끝난 순간 갑자기 손을 뻗어 연우진의 멱살을 잡았다. 그러고는 이대로 갈기갈기 찢어버릴 듯한 눈빛으로 그를 노려보았다.“너는 아무것도 몰라. 나라고...”하지만 그는 말을 다 잇지 못했다. 또한 멱살을 잡았던 손도 힘없이 풀었다.질투와 분노로 가득했던 눈동자가 한순간에 어둠에 잠겨버린 듯 시들어졌다.“한지영한테 잘해. 만약 지영이한테 상처를 주면 그때는 사는 게 사는 것 같지 않다는 게 뭔지 똑똑히 알려주지. 내 말 허투루 듣지 마.”말을 마친 후
백연신은 그 생각에 얼굴을 한껏 일그러트렸다. 질투와 분노, 슬픔과 고통의 감정들이 소용돌이치며 그의 얼굴에 담겼다.한지영의 집에서 나왔을 때 연우진은 꽤 편안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그는 몇 시간 전에 한지영에게 전화를 걸었다가 무사히 집에 도착했다는 말을 듣고 바로 그녀를 찾으러 집까지 왔다.다행히 사건은 무사히 일단락되었고 한지영도 예전의 일상을 다시 되찾은 것처럼 보였다.“우진 씨, 그... 나랑 더는 연락하고 싶지 않으면 언제든지 말해줘요. 난 괜찮으니까.”연우진은 한지영의 집에 도착하자마자 들은 그녀의 말을 떠올리고는 저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가끔 보면 한지영은 꼭 34살이 아닌 4살짜리 아이 같았다. 이런 상황에서도 마음속의 말을 솔직하게 전하며 상대방에게 선택권을 주니 말이다.하지만 그런 투명한 여자이기에 연우진도 그녀와 함께 있으면 더 즐겁고 자꾸 그녀와 연락을 이어나가게 되는 걸 것이다.“나는 지영 씨랑 계속 연락하고 싶은데. 지영 씨는 그저 피해자일 뿐이었잖아요. 그러니까 죄라도 지은 사람처럼 말하지 말아요.”“내가 백연신 씨와 호텔에서 아무 일도 없었다고 하면 믿을 수 있어요?”“네, 지영 씨가 그렇다고 하면 그렇게 믿을게요.”연우진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했다. 진심이었으니까.만약 정말 뭔 일이 있었으면 한지영 쪽에서 먼저 솔직하게 얘기를 해줬을 것이다. 한지영은 그런 여자니까.연우진은 엘리베이터 안에서 문득 백연신의 얼굴을 떠올렸다. 확실히 한지영은 백연신과의 인연을 이미 지난 과거로만 보고 있는 듯했다.하지만 백연신은? 그 역시 그럴까? 이제는 고은채와의 결혼도 파기됐는데?생각에 잠긴 채 엘리베이터에서 나오던 연우진은 아파트 입구에 서 있는 남자를 보고 멈칫하며 발걸음을 멈췄다.잘 뻗은 기럭지에 고고해 보이는 눈앞의 남자는 다름 아닌 백연신이었다.‘이 사람이 왜 여기에...’연우진과 백연신은 어느 정도 거리를 둔 채 서로를 바라보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렇게 침묵이 계속되다 연우진은 놀란 마
한지영의 말대로 백연신은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다른 여자를 곁에 둘 수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예쁜 여자를 곁에 둔다고 해도 그는 그녀가 아니면 안 되는 남자였다. 꼭 한지영이여야만 하는 남자였다.처음 본 순간부터 줄곧 한지영만을 사랑해왔으니까, 이미 모든 마음을 다 그녀에게 줘버렸으니까.사실 5년 전에 한지영이 아닌 고은채의 손을 잡았을 때 속으로 판을 짜고 있었다고는 하나 앞으로가 어떨지는 생각해 본 적도 없었다.그때는 자신에게 미래가 있을지도 없을지도 확신하지 못했거니와 백씨 가문의 모든 걸 되찾고 고씨 가문을 무너뜨리는 데 성공할 수 있을지 말지도 미지수였으니까.당시의 그에게는 한 걸음 한 걸음이 다 깨진 얼음판을 걷는 것 같았다. 그래서 섣불리 한지영에게 약속을 건넬 수도 없었다.지난 5년이라는 시간 동안 백연신은 사람을 은밀히 붙이는 것으로 한지영의 소식을 접할 뿐 그녀의 앞에 나서지는 못했다. 그때는 아무리 보고 싶어도 참아야만 했으니까.그런데 인내의 시간을 겪고 드디어 그녀의 앞에 나설 자격을 갖췄는데 한지영의 마음은 그사이 식어버렸다.백연신은 그 생각에 또 한 번 쓴 미소를 지었다.그녀와 함께하고 싶어 한 선택이, 그녀를 되찾기 위한 인내가 한지영이 거부함으로써 완전히 물거품이 되어버렸다.‘한지영을 살려주는 것만으로도 만족해라 이건가...?’백연신은 어쩌면 당시 한지영을 살려달라고 간절하게 외쳤을 때 모든 소원권을 다 써버린 걸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그는 운전석에 앉은 채 한지영의 모습이 사라질 때까지, 아니, 사라진 뒤에도 여전히 그쪽으로 시선을 고정하며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그러다 얼마나 지났을까, 휴대폰 진동이 울려댔다.“회장님, 고은채 씨가 방금 S 시를 떠났습니다. 그리고 매스컴 쪽에도 더는 한지영 씨의 일상을 방해하지 않게 조치를 해뒀습니다.”“고씨 가문 쪽은 계속해서 지켜봐. 손 내밀어주는 가문이 있나.”“네, 알겠습니다.”백연신은 통화를 마친 후 휴대폰을 다시 집어넣었다.고씨 가문에게
“그럼 어떻게 하면 끝내줄 건데요? 뭐 하룻밤 같이 자 줘요? 아니면 백연신 씨가 만족할 만큼 다시 연애하는 것처럼 연기라도 해줘요?”한지영이 비아냥거리며 말을 이어갔다.“백연신 씨 좋다는 여자들 많잖아요. 그런데 왜 꼭 나여야 해요? 아니, 그건 또 아니었지. 꼭 나여야 하는 사람이었으면 애초에 헤어지자고도 안 했을 테니까.”“너한테 나라는 인간은 대체 뭐야?”백연신이 한지영의 눈을 빤히 바라보며 물었다. 그러자 한지영 역시 그 눈빛을 피하지 않으며 답했다.“한때 사랑했던 사람, 그리고 더는 사랑할 수 없는 사람. 나한테 백연신 씨는 딱 그 정도의 사람이에요. 우리 두 사람은 가는 길이 다른 사람이고 인생관도 너무 다른 사람이에요. 당신은 제일 중요한 게 사업이고 가문이지만 나는 결혼해서 아이를 낳고 평범하고 단란하게 사는 게 더 좋은 사람이에요. 그리고 나는 백연신 씨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나약한 사람이라 같은 고통을 두 번은 못 겪어요.”두 사람은 살아온 환경, 그리고 그로 인한 인생을 대하는 태도, 이런 것들이 너무나도 다르기에 어쩌면 처음부터 이어지지 않을 인연이었는지도 모른다.백연신은 천천히 몸을 일으켜 일어나더니 한 걸음 두 걸음 뒤로 물러섰다. 달빛 아래의 그의 얼굴은 무척이나 창백하고 또 어두웠다.“네 말이 맞아... 나 좋다는 여자들도 많고 꼭 너여야 하는 것도 아니야.”백연신은 시선을 내린 채 입꼬리를 조금씩 위로 올렸다.5년이다. 5년을 숨죽이고 드디어 고씨 가문을 사지까지 내몰았는데 그 시간 동안 한지영은 서서히 그의 존재를 지워가고 있었다.백연신은 분명히 웃고 있었지만 한지영은 그가 꼭 울고 있는 것 같았다. 그래서 마음 한구석이 욱신거리며 숨이 가빠왔다.‘아파하지 마. 백연신 때문에 아파하지 마! 잊기로 했잖아. 이제는 다 잊기로 했잖아. 그러니까 흔들리지 마!’한지영은 속으로 끊임없이 이렇게 되뇌었다. 하지만 여전히 그에게서 두 눈을 떼지 못했고 심장은 계속해서 아파 났다.백연신은 시선을 내린 채 끝까
한지영의 목소리를 참 좋아했던 백연신이었지만 오늘은, 지금은, 그녀의 목소리가 너무나도 밉고 잔혹하게 들려와 귀를 막고 싶을 정도였다.충격이 컸던 건지 백연신의 얼굴은 서서히 하얗게 질려갔다.“날... 안 좋아해?”고작 다섯 글자를 내뱉는 건데도 그는 무척이나 힘이 들어 보였다.“백연신 씨를 계속 사랑하고 있었으면 소개팅 같은 건 나가지도 않았겠죠. 다시 연애할 생각 같은 것도 안 했을 거고요.”한지영이 말했다.“백연신 씨를 좋아했던 건 맞아요. 사랑도 했고요. 하지만 헤어졌잖아요. 우리는 더 이상 어린애가 아니에요. 어른이면 어른답게 질척거리지 말고 깔끔하게 끝내요.”“깔끔하게 끝내자고?”백연신이 쓰게 웃었다.‘네가 어떻게 나한테 그런 말을 해? 아무것도 모르면서... 네가 다쳤을 때 내가 널 살리겠다고 무슨 짓을 했는지, 네 안전을 위해서 내가 어떤 일까지 했는지 아무것도 모르면서...’“내가 틀린 말 했어요?”“날 안 좋아하면 연우진 그놈을 좋아하는 건가?”백연신은 자기가 물어봐 놓고 한지영이 대답하기도 전에 자기가 다시 확신을 가지며 답했다.“아니. 넌 연우진 안 좋아해. 연우진에게 조금이라도 마음이 있었으면 내가 너한테 키스했을 때 내 따귀를 때리고 살점을 물어뜯어서라도 날 멈추게 했을 거야.”한지영은 그 말에 아랫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꼭 맹수에게 쫓기다 궁지에 몰린 아기 고양이 같았다.하지만 심적으로 궁지에 몰린 건 그녀가 아닌 백연신이었다.“한지영, 너는 한순간도 연우진을 좋아해 본 적 없어. 아니야?”백연신은 얼른 그렇다고 말하라는 듯한 눈빛으로 한지영을 빤히 바라보았다.이에 한지영은 숨을 한번 들이켜더니 곧바로 그의 눈을 똑바로 마주 보며 말했다.“그래서? 우진 씨를 좋아하지 않는 게 뭐? 내가 우진 씨를 좋아하지 않는다고 해서 백연신 씨를 좋아할 거라고 생각하지는 말아요.”한지영은 말을 마친 후 갑자기 두 팔을 뻗어 그의 목을 감싸 안았다.백연신은 그녀의 행동에 몸이 뻣뻣하게 굳어버렸고 얼굴은 더 하얗게
백연신은 침대 바로 옆에까지 다가오더니 갑자기 몸을 아래로 기울이며 한지영을 가두듯 양손을 그녀의 몸 바로 옆에 올려놓았다.그러고는 타버릴 것 같은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한지영, 나는 단 한 번도 너를 쉬운 여자라고 생각해 본 적 없고 단 한 번도 너를 멋대로 휘둘러도 되는 여자라고 생각해본 적 없어!”누가 감히 자기 목숨을 쉬운 거라고, 언제든지 휘두를 수 있는 거라고 생각할 수 있을까.한지영은 갑자기 코앞까지 다가온 그의 얼굴에 순간 몸이 굳으며 이성을 놓칠 뻔했다가 간신히 다시 정신을 다잡고 뒤로 몸을 움직였다.하지만 얼마 움직이지도 못하고 금방 벽에 부딪혀버렸다. 그리고 백연신은 벌어진 거리 만큼 다시 앞으로 몸을 움직이며 더 바짝 다가왔다.“하... 내가 널 얼마나 그리워했는지 알아?”낮게 깔린 목소리가 한지영의 귀를 간지럽히며 이내 그녀의 마음마저 뒤흔들려고 했다.그래서 한지영은 얼른 고개를 옆으로 돌리며 그와 눈을 마주하는 것을 피했다. 이대로 계속 그와 눈을 마주쳤다가는 저도 모르게 심장이 뛰어버릴 것 같았으니까.백연신은 한지영의 옆얼굴을 보며 계속해서 말을 이어갔다.“지난 5년간, 단 하루도 네 생각을 안 했던 날이 없었어. 단 하루도 후회하지 않았던 날이 없었어. 내가 조금만 더 신중했더라면, 조금만 더 주의를 기울였다면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테니까. 그때 내가 제대로 해결했으면 우리는 지금쯤 무사히 결혼도 하고 아이도 낳고 행복하게 살았을 테니까...”한지영은 그 말에 흠칫하더니 곧바로 다시 퉁명스럽게 말을 내뱉었다.“그만 해요. 이제 와서 그런 말이 무슨 의미가 있어요?”“지영아, 나는 단 한 번도, 아니, 단 한 순간도 고은채를 사랑한 적이 없어. 좋아한 적도 없어. 내가 좋아하고 사랑하는 사람은 언제나 한지영 너였어.”백연신은 5년을 꾹 참았던 말을 드디어 입 밖으로 꺼냈다.지난 5년간은 아무리 한지영이 보고 싶어도, 아무리 한지영을 안고 싶어도 그저 마음속으로만 그녀를 그리워하고 그녀를 껴
백연신은 앞머리를 전부 깔끔하게 뒤로 넘긴 채 검은색 슈트 셋업을 입고 있었다. 아까 한지영이 인터넷을 검색하며 봤던 기자들 앞에서의 모습과 똑같은 모습이었다.그래서일까, 한지영은 백연신이 눈앞에 있는 게 어쩐지 조금 현실감이 없게 느껴지기도 하고 또 이상한 느낌도 들었다.백연신과 한지영은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그저 서로를 바라보고만 있었다.그러기를 몇 분, 더는 못 참겠던지 한지영이 먼저 입을 열었다.“...12시가 넘었어요.”“알아.”그리고 곧이어 백연신의 입에서도 말이 흘러나왔다.‘안다고? 아는 사람이 왜 안 나가고 계속 거기 앉아있어? 아니, 애초에 내 방에는 왜 들어온 거야?’한지영은 이해를 못한 채로 그를 바라보다 이내 이 집은 원래 그의 것이라는 깨닫고 다시 말을 이어갔다.“늦었는데 여기까지는 무슨 일로 왔어요?”“너 보러.”백연신은 이 방에 들어온 뒤로 미동도 하지 않은 채 거의 한 시간 가까이 한지영을 바라보았다. 그저 자는 얼굴을 바라만 보는 건데도 마음이 녹고 또 행복했다.한지영의 잠버릇은 여전했다. 또 어떤 기이한 꿈을 꾸는지 다리를 이리저리 움직이며 왔다 갔다 했다가 갑자기 이를 갈고, 또 어느 순간에는 헤벌쭉 웃어댔다.전에 그와 함께 취침했을 때와 다를 거 하나 없었다.그래서 더 좋았다.“잘 자더라.”백연신이 말을 이어갔다.“그런데 하마터면 떨어질 뻔했어. 다음에는 킹사이즈 침대로 주문할까 봐. 그러면 쉽게 떨어지지 못하겠지.”한지영은 그의 말에 땀이 삐질 흘렀다.‘고작 나 자는 거 보려고 이 늦은 시간에 여기까지 왔단 말이야...?’“낮에 고은채 씨 기자회견 봤어요. 이제 다 해결됐으니까 이만 집으로 돌아가도 되죠?”한지영은 화제를 돌렸다. 언제쯤 돌아갈 수 있는지 물어보고 싶기도 했고 말이다.“그렇게도 빨리 집으로 돌아가고 싶어?”“당연한 거 아니에요? 행동을 제한받은 채로 생활하는 걸 즐기는 사람은 없잖아요.”백연신은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그러자 한지영이 다시금 입을 열었다.
백연신과 고은채가 진작 헤어진 거라면 한지영은 파렴치한 상간녀도 아니고 염치없는 세컨드도 아니니까.“응, 아마도.”한종훈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지영아, 이제 사건도 일단락됐으니까 밖에 있는 사람들한테 물어봐. 언제쯤 집에 갈 수 있는지.”“근데 여보, 연신이 말이에요. 혹시 우리 지영이한테 아직 마음이 남아있는 거 아닐까요? 지영아, 너 혹시 연신이랑 다시 잘해볼...”“엄마, 전에도 말했잖아요. 백연신 씨와는 두 번 다시 사귈 일 없다고. 그러니까 괜한 생각하지 마세요.”한지영이 단호한 목소리로 이해영의 말을 자르며 말했다.이해영은 그런 딸의 태도에 저도 모르게 한숨을 한번 내쉬었다. 사실 그녀는 처음 봤을 때부터 백연신을 꽤 좋게 보고 있었으니까. 물론 한지영이 아플 때 헤어짐을 고한 건 지금 생각해도 괘씸하지만 근 5년간 딸이 남자와의 만남을 피해온 것도 그렇고 백연신이 얼마 전에 한지영의 손을 사라진 것도 그렇고 어쩌면 두 사람 모두 아직 서로를 마음에 두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으니까.“그래, 그만해. 그놈이 뭐가 좋다고 다시 우리 지영이와 이어주려고 그래? 지영이가 병상 위에 있을 때 헤어지자고 했던 놈이야. 아무리 지금 잘나간다고 해도 나는 그놈한테 우리 지영이 못 줘! 그놈 아니면 우리 딸이 시집 못 간다고 해도 평생 내가 끼고 살고 말지 그놈한테는 안 줘!”한종훈이 미간을 찌푸리며 근엄한 목소리로 말했다.“나도 그냥 해본 말이에요. 나라고 뭐 우리 지영이 안 소중한 줄 알아요?”한종훈과 이해영 사이에 팽팽한 분위기가 형성되자 한지영은 얼른 자리에서 일어나 두 사람을 말렸다.“자자, 그만 해요. 두 분 다 이곳에 오래 갇혀 있어서 지금 많이 예민해진 것 같아요. 아빠 말대로 이제 사건도 일단락됐으니까 내가 이따 밖에 있는 경호원한테 언제쯤 나갈 수 있는지 물어볼게요. 내 생각에는 아마 내일쯤이면 다시 집으로 돌아갈 수 있을 것 같아요.”하지만 저녁 식사를 마치고 경호원에게 언제쯤이면 이곳에서 나갈 수 있냐고 묻