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다 지난 일이라는 그 말이 강현수에게는 아픔으로 다가왔다.“그럼 나는...? 나랑 만난 것도 이제는 다 지난 일이야?”임유진이 고개를 돌려 옆에 앉은 남자를 빤히 바라보았다.“네, 나한테는 이미 지난 일이에요. 그러니까 현수 씨도 이제 과거가 아닌 현재를 사세요.”그 말에 강현수가 가볍게 웃었다.“현재를 살라고...?”그의 고통, 그의 후회, 그리고 그의 자책은 이제 그녀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일까?그때 차량이 멈춰서고 강현수가 말했다.“내려. 너한테 보여줄 게 있어.”임유진은 강현수를 따라 그의 화실로 들어갔다.화실 안에는 온통 어릴 적 임유진의 얼굴이 그려진 그림들이었다.그날 임유진은 산속에서 강현수를 만났고 강현수가 절벽 아래로 떨어지지 않게 손을 꼭 잡아주었으며 강현수를 업고 산 아래까지 내려왔다.강현수는 그날의 기억을 그림으로 그려 이 방 안에 간직해 두고 있었다.그림은 정말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았다.“이거 모두 내가 그린 거야.”강현수가 씁쓸한 얼굴로 그림을 보며 말했다.“네가 생각날 때마다 여기로 와서 그림을 그렸어. 그림을 그릴 때만큼은 지독한 그리움이 가라앉는 것 같았거든.”그는 잠시 멈칫하더니 시선을 천천히 임유진에게로 주었다.“유진아, 나는 그날 이후로 너를 줄곧 찾아다녔어. 그리고 지금 드디어 너와 만나게 됐어. 그런데 하늘은 내 편이 아닌가 봐. 자꾸 널 앞에 두고 널 놓쳐버리게 해. 만약 내가 그때 네 이름을 물어봤더라면, 네가 어디 사는지, 네가 어디 초등학교에 다니는지 물어봤었더라면... 그랬더라면 애초에 몇 년이나 널 놓치는 일은 없었지 않았을까?”임유진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저 듣고만 있었다.“사실 너도 조금은 나 좋아하잖아. 그래서 나 입원했을 때 매일 찾아오고 걱정해준 거잖아.”강현수가 계속 말을 이어갔다.“만약 네가 날 찾아온 그날 밤 내가 집에서 나왔더라면, 네 친구가 치료를 받을 수 있게 조치를 해줬더라면 넌 강지혁과 결혼하지 않았을 거야. 그리고 우리 둘도 지금과
임유진은 어쩐지 코끝이 시큰해지는 느낌이었다.강현수가 해준 것에 감동했을 때도 있었다. 하지만 어렸을 적 그를 만났을 때는 아직 사랑이라는 감정이 뭔지 몰랐고 그와 함께했던 기억을 완전히 기억해냈을 때는 이미 다른 사람으로 마음이 가득 차 그를 사랑할 여유가 없었다.“네.”임유진은 단호하게 그에게 답을 내렸다.강현수는 꼭 심장에 큰 타격이라도 입은 듯 얼굴이 고통으로 일그러졌다.“어떻게 그렇게 확신해? 지금 나 마음 접으라고 일부러 이러는 거지? 이제는 강지혁의 아내라서, 강지혁의 아이를 임신해서, 어쩔 수 없이 그렇게 말하는 거지?”“아니요. 강지혁과 결혼하지 않았다고 해도, 강지혁의 아이를 임신하지 않았다고 해도 내 대답은 다르지 않았을 거예요.”“그럼 대답해봐. 강지혁을 사랑해?”강현수가 임유진을 빤히 바라보며 물었다.그녀가 사랑하지 않는다고 말하길 간절하게 바라면서 말이다.그런데 임유진이 채 입을 열기도 전에 누군가의 목소리가 화실에 울려 퍼졌다.“유진이가 날 사랑하든 사랑하지 않든, 그게 너랑 무슨 상관이 있다고 그런 걸 물어봐?”임유진이 흠칫하며 고개를 홱 돌리자 강지혁이 화실 중앙으로 성큼성큼 걸어오고 있는 것이 보였다.늘 무표정하던 얼굴에 지금은 분노가 깔려있었다.“강현수, 누가 내 아내를 멋대로 데려가도 된다고 했지? 이 일로 내가 너희 집안을 어떻게 할지 두렵지도 않나 봐?”강현수는 강지혁이 별장 안으로 들어와 이곳에까지 도착한 것이 크게 놀랍지도 않은 듯 여전히 임유진만 뚫어지게 보고 있었다.“대답해. 강지혁을 사랑하는지 아닌지.”강지혁은 상대할 가치도 없다는 듯 임유진의 손을 잡았다.“가자.”하지만 앞으로 걸어 나가려는데 임유진이 제자리에 버틴 채 가만히 서 있었다. 그리고 두 눈은 오로지 강현수밖에 보이지 않는 것처럼 미동도 하지 않았다.순간 강지혁은 심장이 욱신거려 그녀를 잡은 손에 힘을 가했다.울렁거리고 정의할 수 없는 혼란스러운 감정이 마음속 깊은 곳에서 솟구쳤다.하지만 그때 임유진의 입이 천
임유진은 그녀의 그림들로 꽉 채워진 화실을 삥 둘러보며 말을 이었다.“현수 씨가 이러는 건 우리가 어릴 때 했던 약속을 지키기 위한 일종의 집념 같은 것뿐이에요. 그리고 원래 사람이라는 게 그렇잖아요. 얻지 못하면 더 얻고 싶고... 그래서 더 나를 찾는 것에 집착했는지도 몰라요. 게다가 무의식중에 나를 너무 미화하기도 했고요. 그런데 나는 대단히 가치 있는 사람이 아니고 그냥 별다를 거 없는 사람이에요.”말을 마친 후 임유진은 고개를 돌려 강지혁을 바라보며 그에게 잡힌 손을 빼더니 두 손을 뻗어 강지혁의 목을 감았다.강지혁은 임유진의 행동에 순간 얼굴이 어두워졌지만 그녀가 발꿈치를 들고 자신의 입술에 입을 맞출 때까지 그저 가만히 서 있기만 했다.임유진은 눈을 감은 채 그렇게 먼저 강지혁에게 입을 맞췄다.그리고 강지혁은 점점 더 어두워지는 눈빛으로 3초간 가만히 서 있더니 서서히 눈을 감고 응하기 시작했다.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임유진은 조금 달뜬 호흡을 내쉬며 입을 떼고는 강현수 쪽을 바라보았다.“내가 사랑하는 사람은 강지혁뿐이에요. 현수 씨는 어릴 때 나랑 한 약속 지켰으니까 이제 더 이상 과거에 미련 가지지 마세요.”강현수의 눈동자가 서서히 어둠으로 잠식되어 갔다.임유진의 입에서 약속을 지켰으니 이제 그만하라는 말이 나왔다.그렇게 오랜 시간 찾아 헤맨 것이 그녀에게는 그저 한낱 약속일 뿐이었다....강현수의 별장에서 나온 임유진은 눈 앞에 펼쳐진 광경에 깜짝 놀라고 말았다.문 바로 앞에 강지혁의 부하로 보이는 사람들이 마치 조직 보스를 기다리는 듯한 엄숙한 자세로 고개를 숙였기 때문이다.강현수 별장에 있던 도우미와 경비원들은 그 사람들에게 완전히 제압돼 있었다.강지혁이 그 누구의 제지도 받지 않고 당당하게 화실까지 들어올 수 있었던 이유가 바로 이거였다.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사람들이 너무 많았다.“왜... 이렇게 많이 데려왔어?”임유진이 벙찐 얼굴로 물었다.“...”그녀의 질문에 강지혁은 한마디 말도 하지 않고 임유
“거짓말을 안 했다고?”강지혁이 비아냥거리며 웃었다.“그럼 강현수 앞에서 네가 사랑하는 사람이 나뿐이라는 것도 다 진짜라는 소리네? 줄곧 날 마음속에 두고 있었다는 것도 진짜고?”“맞아.”임유진이 대답에 강지혁이 말도 안 되는 헛소리를 들은 사람처럼 피식 웃었다.“그럼 어디 증명해봐. 네 마음속에 정말 내가 있는지, 나를 어떻게, 얼마만큼 사랑하는지.”임유진은 눈앞에 있는 남자를 빤히 바라보았다.사실 그녀도 오늘 강현수의 손에 이끌려 별장으로 와 입 밖으로 강지혁을 향한 감정을 내뱉고서야 지금도 여전히 강지혁이라는 남자를 좋아하고 또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임유진이 강현수에게 품은 감정은 어릴 때 함께 했던 그 짧은 시간의 우정과 목숨을 살려준 것에 대한 고마움 그리고 감동뿐이지 거기에 사랑은 없었다.하지만 강지혁에게는 달랐다. 그와 함께 하기로 한 이유가 뱃속 아이들과 한지영 때문인 것도 있지만 자기 자신을 위한 것도 있었다.만약 강지혁을 향한 마음이 없었더라면 이 결혼생활에 충실해지려는 마음도 없었을 것이고 그와 앞으로 좋은 관계가 되면 좋을 것 같다는 바람도 품지 않았을 것이며 강현수가 ‘만약’이라고 가정까지 해가며 애절하게 마음을 고백했을 때 망설임 없이 거절하지도 못했을 것이다.강현수 같은 남자가 줄곧 너 하나만 생각하며 찾아 헤맸다고 하는데 심장이 떨리지 않을 여자가 세상에 어디 있을까.그런데도 임유진의 심장에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는 건 이미 그 심장의 주인이 다른 사람에게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임유진은 손을 들어 천천히 강지혁의 얼굴을 감쌌다.강지혁을 보는 그녀의 눈빛에 뭔가 결심한 듯한 결연함이 묻어있었다.임유진은 서서히 자신의 얼굴을 가져가더니 다시 한번 먼저 그에게 입을 맞췄다.강현수에게 보여주기 위해 했던 키스와 달리 지금 하고 있는 키스는 조금 더 농밀하고 부드러우며 강지혁의 분노를 잠재울만한 그런 키스였다.강지혁은 다시 한번 입을 맞춰온 그녀의 행동에 몸이 움찔 떨리며 눈이 조금 커졌다.하지만 임유
조수석에 앉아 있던 여자 경호원이 강지혁에게 전화를 걸어 상황을 보고하는 걸 바로 뒤에서 들었음에도, 강지혁이라면 분명히 임유진을 무사히 데리고 올 것을 알고 있음에도 임유진의 목소리를 직접 들어야만 걱정이 가실 것 같았다.“난 괜찮아요, 언니. 걱정하지 마세요.”“그럼 다행이고요.”임유진의 말에 탁유미는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참, 윤이는 요즘 어때요? 다음에 시간 있을 때 윤이 보러 가고 싶은데.”윤이를 못 본 지 꽤 되었기에 임유진이 조금 들뜬 목소리로 물었다.이에 탁유미는 조금 멈칫하다가 웃으며 말했다.“윤이는 잘 있어요. 안 그래도 유진 씨 엄청 보고 싶어하더라고요. 아, 손님 왔다. 그럼 먼저 끊을게요.”그녀는 서둘러 전화를 끊고 휴대폰을 주머니 속에 집어넣었다.하지만 말과는 달리 새 손님 같은 건 없었다.아까는 그저 임유진에게 뭐라 해야 할지 몰라 아무렇게나 둘러댄 것뿐이다.요 며칠 일이 많기도 했고 현재 임신 중인 사람에게 괜한 말로 걱정을 끼치고 싶지 않았으니까.사실 윤이는 퇴원한 후 여전히 자주 몸에 멍과 자잘한 상처를 달고 집으로 왔다.유치원 선생님은 윤이가 다른 아이들과 하루가 멀다고 자주 다툰다고 하며 그 이유에 관해서 조금 난감한 얼굴로 탁유미의 일 때문이라고 했다.그 말에 탁유미는 바로 깨달았다. 자신이 감옥살이하다 나온 경력 때문에 윤이가 친구들과 다툰다는 것을 말이다.감옥살이한 그 일은 그녀에게 지우지 못할 낙인이 됐을 뿐만이 아니라 윤이의 상처가 되기도 했다.그녀는 그저 다른 엄마들이 그러하듯 윤이가 다른 아이들처럼 건강하게 잘 자라기를 바라는 것뿐인데 그 소원이 그녀에게는 왜 그렇게도 어려운 걸까.그리고 양육권 분쟁에서는 정말 이길 수 있을까?탁유미의 눈빛이 어둡게 가라앉았다.한편, 임유진은 전화를 끊은 후 고개를 돌려 집사를 바라보았다.“혁이는요?”“별채에 계십니다.”그 말에 임유진은 자리에서 일어나 현관 쪽으로 걸어갔다.하지만 문을 열고 막 나가려는 그때 집사가 그녀를 불러
“무슨 일 있었어?”임유진이 물었다.“다시 한번 말해봐. 아까 차 안에서 나한테 했던 말, 다시 한번 말해봐.”강지혁의 낮은 목소리에 임유진은 눈을 두어 번 깜빡이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혁아, 나는 널 사랑해. 네가 그럴 생각 아니면 오해 살 행동하지 말라고 했는데 나는 지금 너한테 닿고 싶어. 이 말, 말하는 거야?”“응, 한 번 더 해봐.”강지혁이 다시 한번 요구했다.이에 임유진은 거절하지 않고 또다시 같은 말을 반복했다.게다가 그 뒤로도 몇 번을 더 반복했다.강지혁은 그녀가 하는 말을 줄곧 듣기만 하다가 한참 뒤에야 천천히 입을 열었다.“너는 아직도 나를 좋아하고, 아직도 나를 사랑해. 한 번도 나에 대한 마음을 접은 적이 없어. 맞아?”“응. 네가 나한테 키스했을 때 싫지 않았던 것도... 아니, 가슴이 뛰었던 것도 다 너를 여전히 사랑하고 있어서였어. 솔직히 내가 널 아직 사랑하는 게 맞는지 직접 내 입으로 얘기하기 전까지는 나도 잘 몰랐었어. 그런데 입 밖에 내고 보니 알겠더라. 내 마음속에는 여전히 네가 있었다는 걸.”임유진은 담담하게 자신의 본심을 늘어놓았다.“혁아, 우리는 그간 너무 많은 일이 있었고 서로에게 실망도 하고 마음도 많이 다쳤어. 솔직히 아무 일도 없었던 그때처럼 다시 돌아갈 수 있을지는 아직 의문이야. 하지만 나는 노력해보고 싶고 이 감정에 최선을 다하고 싶어. 너는? 너는 어떻게 생각해?”그 말에 강지혁의 몸이 조금 굳었다.“네 말은 나도 널 사랑하기를 바란다는 말이야?”“응.”임유진이 고개를 끄덕였다.그녀가 그에게 품은 감정이 사랑이기에 그가 그녀에게 품은 감정도 사랑이기를 바라는 건 아주 당연한 일이었다.강지혁은 천천히 몸을 바로 세우더니 짙은 눈동자로 임유진을 빤히 바라보았다.“물론 전처럼 나를 사랑할 수는 없겠지. 이해해. 하지만 네가 나한테 품고 있는 감정 중에 사랑이 아예 없다고는 생각 안 해. 나한테 먼저 키스한 게 바로 그 증거일 테니까.”임유진은 강지혁의 시선에 조금 긴장한
강지혁은 지금 자신이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알기나 할까?가뜩이나 올곧게 마주쳐 오는 눈빛 때문에 심장이 남아나지 않는데 입다 만 셔츠 사이로 보이는 탄탄한 몸이 웬만한 광고보다 더 자극적이라 이대로 눈앞에 있는 남자를 침대에 눕혀 제 것으로 만들어 버리고 싶은 충동이 들었다.“나... 아직 임신 중이야.”임유진이 침을 꼴깍 삼키며 말했다.즉 아무리 네가 매력적이어도 지금은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뜻이었다.“그럼 지금부터 계속해서 나에 대한 사랑을 더 키워봐. 아이 낳고 나면 마음대로 하게 해줄 테니까.”강지혁의 말에 임유진은 순간 코피를 쏟을 뻔했다.대체 이 요망한 말은 뭐란 말인가.하지만 그만큼 가슴이 설레고 마음이 들떴다. 마음속에 있던 말을 입 밖으로 전부 내뱉고 나니 강지혁과의 사이가 많이 풀어진 듯했다....요 며칠 미처 마무리 짓지 못했던 일을 하나하나 다 하고 보니 이제는 탁유미의 양육권 싸움만 남아 있었다.솔직히 감옥살이 경력 때문에 질 가능성이 현저히 더 큰 싸움이었지만 그렇다고 쉽게 포기할 수는 없기에 끝까지 싸워야만 했다.임유진은 지금 임신 중이고 강지혁이 붙여둔 경호원도 있는 탓에 사무소 쪽은 그녀에게 작은 사무실을 내줬다.어차피 임유진은 탁유미의 재판만 끝이 나면 회사를 그만둘 것이기에 잠깐이라면 사무소 쪽에서도 흔쾌히 내어줄 수 있었다.물론 사무소 대표의 본심은 임유진을 계속 회사에 붙잡아 두고 싶었다. 자기 회사 직원의 남편이 강지혁이었으니까.임유진이 한창 일을 하고 있던 그때, 갑자기 탁유미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전화를 받아보자 다급한 탁유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유진 씨, 우리 윤이 좀 같이 찾아주면 안 될까요? 얘가 어디로 갔는지... 갑자기 사라졌어요!”“네? 윤이가 사라져요?!”임유진이 깜짝 놀라며 물었다.“오늘 유치원에서 나들이를 갔는데 친구랑 싸우고 어디론가 사라져버렸대요. 얘기를 듣고 바로 달려갔는데 아무리 찾아봐도 보이지 않았고 지금은 경찰에 신고까지 한 상태예요. 선생님도 윤이가
하지만 그 부탁이 통할 리가 없었다.“이 대표님이 당신 같은 여자가 만나고 싶어 한다고 쉽게 만나줄 분인 줄 알아요? 자꾸 이러면 신고합니다?”경비원이 짜증을 내며 탁유미를 쫓았다.하지만 그때 누군가가 두 사람 곁으로 다가와 말했다.“그 여자 풀어주세요. 대표님께서 허락하셨습니다.”탁유미는 조금 놀란 얼굴로 눈앞에 있는 사람을 바라보았다. 이 사람은 이경빈의 비서 중 한 명으로 한때는 탁유미의 직장동료이기도 했었다.당시 두 사람은 사이가 좋았던 직장동료이자 친구였기에 비서는 몇 번이나 탁유미에게 경고했었다. 이경빈이 진짜로 좋아하는 사람은 따로 있으니 절대 진심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적당히 헤어지라고 말이다.하지만 탁유미는 그 경고를 무시했고 온 마음을 다해 이경빈을 사랑해 결국 비참한 끝을 맺었다.사랑에 미쳐 이성적인 판단이 아예 되지 않았던 것이다.탁유미를 막고 있던 경비원은 비서의 말에 어리둥절한 채로 일단 뒤로 물러섰다.그러다 탁유미가 비서와 함께 자리를 떠나고서야 다른 경비원과 함께 수군거렸다.엘리베이터를 타고 대표이사실로 향하는 길, 두 사람은 아무 말도 주고받지 않았다. 그러다 문 앞까지 다 와서야 비서가 한마디 했다.“대표님께 부탁할 일이 있으면 대표님 성질 긁는 일 없게 말조심해.”그러고는 대답을 듣지도 않고 문을 두드린 후 말했다.“들어가세요.”탁유미는 그게 자신을 도와주기 위해 한 말이라는 걸 알기에 들어가기 전 비서에게 작게 속삭였다.“고마워.”아마 그때도 비서의 말을 새겨들었으면 지금쯤 다른 인생을 살고 있었을지도 모른다.하지만 그렇게 되면 사랑해 마지않는 윤이의 존재를 보지도 못했을 테지...이경빈은 그녀에게 제일 큰 고통도 줬지만 제일 큰 행복도 줬다.탁유미가 안으로 들어가 보자 이경빈이 의자에 앉은 채 서류를 훑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날 만나러 온 이유는?”이경빈이 시선을 들어 그녀를 바라보며 물었다.아까 그는 비서에게서 탁유미가 1층 로비에서 자신을 만나고 싶어 한다는 얘기를 듣고 몇