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강지혁은 자비 따위 모르는 인간이었다.“뽑아.”“안 돼!”임유진은 강지혁의 앞으로 달려가 그를 막았다.그녀는 이곳이 자신이 있을 자리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다. 그리고 강지혁이 무엇을 하든 말릴 자격 같은 거 없다는 것도 잘 알고 있다.하지만 눈앞에서 누군가의 손톱이 뽑히는 것을 도저히 모른 체할 수가 없었다.그게 얼마나 고통스러운 일인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으니까.당시 그녀가 그렇게 큰 고통을 겪었을 때 그 누구 하나 도와준 사람이 없었다. 그녀는 오직 홀로 감내했어야만 했다.임유진의 말에 강지혁이 싸늘한 시선이 그녀에게로 다시 향했다.임유진은 그와 눈이 마주치고는 몸을 움찔 떨었다. 그의 두 눈이 너무나도 차갑고 또 싸늘해 꼭 끝이 보이지 않는 늪 한가운데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안 된다고?”강지혁은 서서히 소파에서 일어서더니 임유진을 내려다보며 차가운 목소리로 물었다.“네가 뭔데?”임유진은 두 손을 덜덜 떨었다.눈앞에 있는 남자는 그녀가 알던 강지혁도 예전에 다정하기만 했던 혁이도 아니었다.지금의 그는 사람들이 무서워하고 감히 눈도 제대로 마주치지 못하는 S 시의 꼭대기에 있는 남자였다.“너한테는 누군가의 손톱을 뽑게 만드는 게 숨 쉬는 것만큼 그렇게 쉬운 일이야? 그래?”임유진은 숨을 한번 깊게 들이켜고 말을 내뱉었다.불빛 아래, 그녀의 얼굴을 창백하기 그지없었고 몸은 미세하게 떨고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 무서워하면서도 그녀는 강지혁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강지혁은 임유진의 말을 듣고는 흉흉한 기운을 풍기며 미간을 찌푸렸다.이에 이한이 황급히 다가와 먼저 입을 열었다.“참, 아까 이곳으로 오면서 유진 씨한테 물어봤는데 현수랑은 아무 사이도 아니래. 그 영상도 그냥 어쩌다 찍히게 된 것일 뿐이라고 하고.”“그 얘기 하려고 여기까지 얘를 데려온 거야?”분명 이한에게 묻는 말이었지만 강지혁의 시선은 여전히 임유진을 향해 있었다.이한은 그 말을 듣고는 어색하게 웃기만 했다.“이한, 딱 한 번
“아니요. 많이 괜찮아졌어요...”여성은 쑥스러운 듯 얼굴을 붉히며 말했다.“아까 저 남자가 네 손톱을 뽑으려고 했으니 이번에는 네가 저 남자 손톱을 뽑아. 열 손가락 다.”“강 대표님께서 나서주지 않으셨다면 아마 저는 아까 손톱이 다 뽑히고 말았을 거예요. 정말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어요. 하지만... 저 남성분도 반성하고 있는 것 같으니 이제 그만 용서해주세요. 저는 정말 괜찮아요.”여성은 청순한 매력을 내뿜으며 거기에 가해자를 용서해주는 착한 마음씨도 어필했다.아주 남성들의 보호 본능을 마구 자극하는 그런 여자였다.임유진은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는 흠칫했다. 그리고 이 상황이 어이없고 웃기게 느껴졌다.무릎 꿇은 중년 남성은 알고 보니 가해자였고 손가락을 다친 여성은 하나터면 손톱이 다 뽑힐 뻔한 피해자였다.그리고 강지혁은 그 여성을 위해 나서주는 중이었다.임유진은 그 여성을 바라보는 강지혁의 옆모습을 바라보며 주먹을 꽉 말아쥐었다. 강지혁은 그 여성을 바라본 뒤로 임유진에게는 시선도 주지 않았고 꼭 임유진의 존재 자체를 까먹기라도 한 듯 계속 그 여성에게만 말을 걸었다.순간 임유진의 머릿속으로 ‘네 결백은 내가 꼭 찾아줄게.’라고 했던 강지혁의 말이 스쳐 지나갔다.강지혁은 그 말을 증명해 보였고 정말 그녀에게 결백을 찾아주었다.그리고 지금은... 다른 여성을 위해 나서주고 있었다.임유진은 강지혁에게서 서서히 시선을 거두고 이제 이곳의 일은 자신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다며 차가운 바닥을 바라보았다.그녀가 지금 할 수 있는 건 이곳을 조용히 떠나는 일뿐이다.하지만 이제 막 몸을 돌리려던 찰나 누군가가 룸으로 뛰쳐 들어와 그대로 임유진의 앞에 멈춰 섰다.“유진 씨, 괜찮아요?!”이에 임유진이 고개를 들어보니 강현수가 숨을 헐떡인 채 걱정스러운 얼굴을 하고 있었다.“괜... 찮아요. 그런데 현수 씨가 왜 여기 있어요?”임유진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그건 이따 얘기해줄게요.”강현수는 말을 마치고 강지혁 쪽을 바라보았다.그
“가요. 집까지 데려다줄게요.”강현수는 임유진의 손을 잡고 룸 밖으로 걸어 나갔다.강지혁은 떠나는 강현수와 임유진의 뒷모습을 힐끔 보고는 다시 시선을 돌려 이한을 향해 말했다.“네 사람들 내보내.”“응? 그럼 이 둘은...”이한은 손가락이 다친 여성과 아직 바닥에 꿇고 있는 이 사장을 가리키며 물었다.“둘만 빼고 내보내.”그 말에 이한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웨이터들과 다른 여자들에게 전부 다 룸에서 멀리 떨어질 것을 명했다.몇 초 후 룸 안에는 강지혁과 이한, 손가락을 다친 여성과 이 사장, 그리고 고이준과 강지혁의 경호원들만 남았다.강지혁은 여성의 손을 다시금 잡더니 붕대가 감긴 그녀의 손가락을 보며 생각에 잠겼다.이에 여성의 얼굴을 빨갛게 물들었고 그 모습을 지켜보던 이한은 미간을 찌푸렸다.‘설마 진짜 저 여자한테 반하기라도 한 거야?’그때 굳게 닫혔던 강지혁의 입이 열리고 이내 그 입에서 무시무시한 말이 흘러나왔다.“그렇게도 손톱이 뽑히는 게 소원이라면 그렇게 해. 소원대로 해주지.”강지혁은 말을 마치고는 여성의 손을 다시 내려놓았다.그 말에 당황한 여성은 얼굴이 사색이 돼서 물었다.“강 대표님...? 저... 방금 한 말 농담이시죠? 왜 제가 손톱을...”“왜냐고?”강지혁은 그녀에게 되묻고는 이내 시선을 돌려 옆에 있던 고이준을 바라보며 말했다.“고 비서, 왜 손톱이 뽑혀야 하는지 이 여자한테 알려줘.”그 말에 고이준은 고개를 한번 숙이더니 여성의 앞으로 다가가 담담하게 말을 내뱉었다.“친척 중에 감방살이했던 분이 마침 임유진 씨와 같은 방이었죠? 아마 그 친척분한테서 들었을 겁니다. 임유진 씨의 손톱이 뽑힌 적 있었다는 사실을요. 그걸 듣고 기회다 싶어 평소 친분이 있었던 이 사장한테 부탁했겠죠. 강 대표님 눈에 들 수 있게 도와달라고. 어떻게, 이제 그 이유를 아시겠습니까? 이 정도면 충분히 설명된 것 같은데.”강지혁이 임유진과 연인이었다는 건 상류계층 사람들 사이에서는 이미 공공연히 다 알려진 사실이고 서민들도
이한은 이에 조롱 섞인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너는 네 스스로가 대단한 가치라도 있는 줄 아나 보지? 그리고 이따위 멍청한 연극을 계획하기 전에 이런 결말을 맞이하게 될 수도 있다는 것을 단단히 각오했었어야지.”그는 말을 마치고는 여자의 손을 차갑게 뿌리쳐버렸다. 그리고 아무런 미련도 없이 유유하게 룸을 빠져나갔다....임유진을 차에 태워 그녀의 집으로 향하는 길, 강현수는 핸들을 꽉 잡으며 먼저 말을 건넸다.“만약 이한 그놈이 또다시 쓸데없는 일로 유진 씨 찾아가면 그때는 나한테 바로 연락 줘요.”임유진은 그 말에 잠깐 침묵하더니 손가락을 매만지며 입을 열었다.“어제... 버스에서 말이에요. 그냥 날 깨우지 그랬어요.”“아, 영상 봤어요? 곤히 자고 있길래 깨우고 싶지 않았어요. 그런데 설마 그 모습을 누가 찍고 있었을 줄이야. 게다가 그걸 인터넷에 올리기까지... 만약 그 영상이 신경 쓰이면 지금 당장 모든 영상을 내리도록 지시할게요.”강현수는 도촬에 관해서는 누구보다 예민한 사람이었지만 어제 버스 안에서는 온 신경을 전부 다 임유진에게 쏟는 바람에 주변을 전혀 신경 쓰지 못했다.어제 그녀가 버스에서 졸았던 시간은 고작 반 시간 남짓이었지만 강현수에게 그 반 시간은 그 어느 순간보다 더 소중한 시간이었다.심지어 영상을 찍은 사람에게 소중한 추억을 남겨줘서 감사하다는 인사를 해주고 싶은 기분이었다.강현수는 영상 속에 찍힌 자신의 얼굴을 보며 이토록 가슴이 따뜻해지고 또 설렘으로 부풀어 올랐던 순간이 또 있었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네, 그렇게 주세요.”비록 얼굴 전체가 찍힌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생판 모르는 타인이 자신의 모습이 찍힌 영상을 보고 있다는 건 많이 불쾌한 일이었다.그때 임유진의 휴대폰이 울렸다.발신자가 탁유미라는 것을 확인한 임유진은 곧바로 전화를 받았다.“유진 씨, 혹시 지금 40만 원만 송금해줄 수 있어요? 급하게 쓸 데가 있어서요.”“언니, 혹시 무슨 일 있어요?”탁유미는 평소와 달리 목소리에 힘도 없었
“고맙다라... 난 너한테서 그런 말이 듣고 싶은 게 아니야...”강현수는 언제나 타인과는 늘 일정한 거리를 유지해왔었다. 그 때문에 친구인 이한도 가끔은 그에게 너무 차갑다며 이유 모를 벽이 느껴진다고까지 했었다.하지만 그런 말을 들어도 강현수는 크게 개의치 않았다. 애초에 누군가에게 쉽게 곁을 허락하는 사람이 아니었으니까.그러나 막상 자신이 누군가의 바운더리 밖에서 들어가지 못하자 조바심이 나고 초조해 났다.강현수는 계속해서 임유진에게 가까워지기 위해 노력하고 있지만 임유진은 좀처럼 그와의 거리를 좁히려고 하지 않았고 일정한 선을 그어 그가 더 이상 들어오지 못하게 하고 있다.그에게 지어주는 미소도 그저 예의상 짓는 미소일 뿐 큰 의미는 없었다.“대체 어떻게 해야 너랑 더 가까워질 수 있는지 알려줘, 유진아...”...임유진은 헐레벌떡 병원 안으로 들어가 윤이의 이름을 대고 간호사에게서 병실 번호를 들은 다음 다시 발걸음을 돌려 빠르게 거기로 뛰어갔다.병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 보니 윤이는 이미 곤히 자고 있었다.하지만 평온한 아이 얼굴과는 달리 다리에는 두꺼운 붕대가 감겨 있었고 얼굴에는 멍이 들어있었다.누가 봐도 다른 누군가에게 맞은 얼굴이었다.그리고 병상 바로 옆에는 탁유미의 엄마인 김수영이 빨개진 눈가로 윤이를 바라보고 있었다.임유진은 병상 가까이 다가가 윤이가 깨지 않게 최대한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아주머니,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이에요? 윤이는 괜찮아요?”“왔어요?”김수영은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유치원에서 아이들이랑 싸웠어요. 검사는 했고 의사 선생님도 큰 문제는 없대요.”김수영의 말에 임유진은 조금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온순한 성격의 윤이가 누군가와 싸웠다는 게 믿기지 않았기 때문이다.윤이는 진심으로 누군가를 싫어한다고 해도 기껏해야 그 사람을 무시하는 아이지 손부터 먼저 나갈 아이는 절대 아니었다.“싸운 이유는요?”임유진의 질문에 김수영은 더 크게 한숨을 쉬었다.“유미 때문에요. 유치원
“언니, 아니면 내가 지영이한테 부탁해서 윤이 유치원 바꿔 달라고 할까요?”임유진이 물었다.지금쯤이면 유치원 전체에 탁유미의 일이 다 퍼졌을 것이고 앞으로 또다시 오늘 같은 일이 생길 수 있다.임유진은 윤이가 사람들의 따가운 눈총을 받는 걸 원하지 않는다.이미 벌어진 사실을 바꿀 수 없다면 지금 해야 할 건 윤이의 상황을 바꿔주는 것뿐이다.하지만 임유진의 제안에 탁유미는 대답이 아닌 다른 것을 물었다.“유진 씨, 만약 내가 사건을 뒤집으려고 한다면 결백을 받을 수 있을 확률이 어느 정도 될까요?”임유진은 잠깐 멈칫하다가 이내 진지하게 고민해보았다.“30%일 거예요.”그 말에 탁유미는 쓰게 웃었다.고작 30%...이 적은 확률로 정말 사건을 뒤집을 수 있을까?만약 다른 사람이었다면 단 1%라도 사건을 뒤집기 위해 노력하겠지만 탁유미는 그럴 수 없었다.“시간이 꽤 지난 사건이라 당시 언니한테 유리한 증거들이 다 사라졌을지도 몰라요. 하지만 그렇다고 아예 뒤집지 못하는 건 아니에요. 사건을 다시 자세하게 훑어보고 새로운 증거를 찾아내면 돼요.”임유진은 당시 탁유미의 사건을 머릿속으로 떠올렸다.전에도 생각했던 것이지만 탁유미의 사건은 허술한 구석이 많았고 그 점을 확실하게 찌르면 어쩌면 판도가 바뀔 수도 있다. 만약 거기에 새로운 증거까지 생겨나면 사건을 뒤집을 확률이 더더욱 커지게 되고 말이다.“만약 정말 사건을 뒤집으려 하면 기사화되어 사람들이 다 알게 되겠죠? 그러면 그 영향으로 윤이까지 거론될 수 있고요?”임유진은 잠깐 멈칫했다.“그렇게 되는 건 어떻게 해서든 막아야 하겠지만... 이경빈 씨가 이름이 알려진 사업가라 막는 것이 쉽지는 않을 거예요.”탁유미는 두 손을 꽉 말아 쥐고는 고개를 끄덕였다.“알겠어요. 나한테 생각할 시간을 줘요.”정말 재심 절차를 밟게 된다면 그때는 꼭 무죄를 받아야 내야 한다. 만약 패소하게 되면 그때는 전 국민이 그녀에게 비난을 쏟아낼 테니까.그리고 그렇게 되면 윤이는 아마 지금보다 더 큰 상
“너는 억울한 피해자야!”김수영이 분개하며 말했다.“죄지은 얼굴을 해야 할 건 네가 아니라 공수진이야! 차라리 이럴 거면 그냥 재심 청구해. 유진 씨도 확률이 30%는 된다잖아.”탁유미는 그 말에 그저 가만히 윤이만 바라볼 뿐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그리고 한참 뒤에야 자리에서 일어서며 말했다.“엄마, 내가 지금 좀 많이 피곤해서요. 윤이 옆에는 엄마가 대신 있어 줘요. 나는 이만 쉬러 갈게요.”김수영은 그 말에 조금 의아했다.탁유미라면 아무리 힘들고 피곤해도 윤이 옆에 있어 주려 했을 테니까.하지만 이내 요즘 포장마차 때문에 낮과 밤이 거의 바뀐 것을 생각하면 납득이 가기도 해 김수영은 서둘러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제대로 자지도 못했을 텐데 빨리 돌아가서 쉬어.”“네, 내일 아침에 다시 올게요.”탁유미는 가방을 챙겨 병실을 나왔다.하지만 병원에서 나온 후 그녀는 집 방향이 아닌 반대편으로 걸어가며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었다.“탁유미예요. 윤이 일로 이경빈이랑 할 얘기가 있어요. 연락처를 알려주는 게 불편하시면 제가 만나고 싶어 한다고 대신 전해주세요. 꼭 오늘 만나야 해요.”그녀가 건 번호는 양육권 소송 때문에 고용된 이경빈 쪽 변호사의 번호였다.전에 소장을 받았을 때 이경빈 변호사의 명함도 같이 동봉되어 있었다.“네, 알겠습니다. 금방 다시 연락 드리죠.”변호사는 정중하게 얘기를 건넨 후 전화를 끊었다.탁유미는 버스 정류장에 서서 버스가 한 대 한 대 앞으로 지나가는 것을 텅 빈 눈으로 바라보았다.10월의 찬 바람이 매섭게 불며 그녀의 볼을 스쳐 지나갔다.그렇게 5분 정도 지나자 다시 휴대폰이 울렸다.전화를 건 사람은 아까 그 변호사였다.“이경빈 씨께서 알겠다고 하셨습니다.”변호사는 이경빈이 있는 호텔 이름을 알려주며 거기로 가면 된다고 얘기했다.반 시간 후, 탁유미는 택시를 타고 호텔 앞에 도착했다.이곳은 S 시에서 꽤 이름 있는 호텔이고 지난번 이경빈이 그녀를 데리고 왔던 곳이기도 했다.그리고 오늘,
탁유미는 이를 꽉 깨문채 방문을 닫고 안으로 들어갔다.이경빈은 소파에 앉아 여유롭게 탁자 위에 있는 커피를 마셨다.“그래서, 할 얘기가 뭔데? 설마 양육권 포기해달라고 부탁하러 온 건 아니지?”탁유미는 그와 시선을 마주치며 말했다.“부탁하면 포기해 줄 거야? 윤이만 포기해주면 뭐든 다 할게.”“뭐든 다 하겠다고?”“응.”“네가 지금 나한테 뭘 해줄 수 있는데?”이경빈이 콧방귀를 뀌며 물었다.“불임이 되어버린 수진이한테 아이라도 낳아주게? 하지만 그것도 윤이를 데려오면 해결되는 문제야. 그런데 네가 이 상황에서 뭘 더 할 수 있는데?”탁유미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렸다.지금의 그녀는 그에게 자비를 요구할 명분도 없었고 조건을 내밀 처지도 되지 않았다.탁유미는 잠시 침묵하더니 천천히 다시 입을 열었다.“너 아직 나 원망하잖아. 우리 아빠가 그때 너희 집안을 벼랑 끝으로 내몬 것 때문에. 네가 나한테 접근한 것도 나한테 복수하려고 했던 거 아니야? 아직 복수 다 못한 거면 지금 해. 때리든 뭘 하든 뭐든 받아줄 테니까.”그녀는 윤이만 옆에 둘 수 있다면 무엇이든 할 수 있었다.윤이는 그녀에게 정신적 지주자 다 꺼져가는 생명에 불을 밝혀준 유일한 숨구멍이니까.이경빈은 탁유미를 차가운 눈길로 바라보았다.그의 집안은 그때 탁유미의 아버지 때문에 하마터면 하루아침에 쫄딱 망할 뻔했다.결과적으로는 아무 일도 없었지만 이경빈은 그녀의 아버지를 증오하고 또 증오했다. 그래서 성인이 되고 바로 복수하려고 찾아갔었다.하지만 그가 찾아갔을 때는 이미 늦어버렸다. 탁유미의 아버지는 이미 10년 전에 돌아가셨으니까.결국 복수 대상을 잃은 이경빈은 모든 원망과 분노를 탁유미에게로 돌렸다.하지만 그녀와 연애하는 것으로 시작했던 복수는 마지막이 그렇게 통쾌하지 않았다.이경빈은 차라리 그때 연애가 아닌 다른 방법을 택했으면 지금쯤 복수고 뭐고 다 잊고 탁유미라는 여자도 진작에 머릿속에서 지워버렸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복수? 그럼 윤이를 네 옆에서 강제로
강지혁은 수저를 들고 그녀가 해준 음식을 하나둘 입에 넣었다.분명히 흔히 볼 수 있는 가정 요리고 손에 들고 있는 것도 포크나 나이프가 아닌 그저 숟가락과 젓가락일 뿐인데 상대가 강지혁이라 그런지 꼭 고급스러운 레스토랑에서 식사하고 있는 것 같았다.임유진은 원래 강지혁이 밥을 다 먹은 뒤에 오늘 있었던 일을 얘기하려고 했다. 하지만 강지혁이 밥을 먹으며 먼저 선수를 쳐버렸다.“오늘 하마터면 떨어지는 화분에 다칠 뻔했다는 얘기 들었어. 무사해서 다행이야. 내일부터는 경호원을 두 명 더 붙여줄게.”임유진은 그 말에 눈을 두어 번 깜빡이며 어리둥절해 하다 이내 남편이 강지혁이라는 것을 깨닫고 납득했다는 표정을 지었다.아마 일이 터지고 5분도 안 돼 바로 강지혁에게 보고가 들어갔을 테니까.“응, 알겠어.”임유진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누가 화분을 떨어트린 건지 알아봐 달라고 했어. 아직 따로 연락이 오지는 않았지만.”“청소부가 한 짓이야.”“청소부?”임유진이 깜짝 놀라며 물었다.“벌써 조사를 마쳤어?”“당연한 거 아니야? 네 일인데.”만약 임유진의 몸에 생채기라도 났으면 강지혁은 아마 이성을 잃고 건물 전체를 폭파하고 관계자들까지 다 처리해버렸을 것이다.강지혁은 갑자기 젓가락을 내려놓더니 임유진의 양손을 덥석 잡았다.그녀의 손가락은 여전히 삐뚤빼뚤했다.임유진의 손을 이렇게 만든 사람은 진세령이고 소민준은 당시 진세령의 곁에서 가만히 구경만 했다.강지혁은 임유진의 손을 매만지다 문득 1시간 전에 봤던 청소부의 피범벅이 된 두 손을 떠올렸다.그는 다른 사람의 손은 피가 나든 잔인하게 잘리든 아주 조금의 연민도 들지 않았다. 하지만 임유진의 손은 볼 때마다 가슴이 아프고 또 울컥했다.“왜? 왜 그렇게 봐?”임유진은 강지혁이 손가락을 뚫어지게 보는 게 불편한지 손을 뒤로 빼며 거두어들이려고 했다.그녀 역시 다를 것 없는 여자라 사랑하는 사람 앞에서는 자신의 좋은 것만 보여주고 싶었다.“내 손 안 예뻐... 보지 마.”임유진의 손
“그래...”강지혁이 낮게 읊조렸다.“그래야 할 거야.”고이준은 저도 모르게 소민준이 매우 가엽게 느껴졌다. 만약 임유진이 정말 소민준을 동정하면 그때는 지금 하고 있는 택배 기사 일도 못 하게 될지도 모르니까.“고 비서, 누가 저 여자한테 돈을 쥐여주고 유진이를 해할 계획을 세운 건지 알아내.”강지혁이 차가운 목소리로 지시했다.“네, 회장님.”고이준이 얼른 답했다.“그리고 S 시에서 제일 실력 좋은 변호사를 고용해서 유진이와 권건우 변호사 고소 건에 붙여. 김승수한테 지시를 내리는 다른 누군가가 있는 건 아닌지도 한번 알아보고.”고이준에게 김승수의 뒷조사를 맡긴 건 이유가 있었다.임유진이 강지혁의 와이프고 현 강씨 가문의 유일한 안주인인 걸 알고도 고소를 한 건 누가 봐도 이상했으니까. 상식적인 인간이라면 강씨 가문을 상대로 덤빌 리가 없다.게다가 김승수가 억울하다는 당시의 사건을 강지혁도 한번 훑어봤지만 임유진의 말대로 증거가 확실했고 결과 역시 납득 가능한 결과였다.즉 그렇다는 건 김승수에게 다른 목적이 있다는 것이다. 또 혹은 김승수를 뒤에서 조종하고 있는 누군가에게 다른 목적이 있을 수도 있고 말이다.하지만 이유가 뭐가 됐든 임유진을 건드린 이상 강지혁이 손을 놓고 있을 리가 없다. 그에게는 임유진이 목숨줄과도 같은 존재니까.“네, 알겠습니다.”임유진이 강지혁에게 있어 얼마나 중요한 사람인지 고이준은 너무나도 잘 알고 있다. 다만 요즘 따라 부쩍 이상한 위화감 같은 것이 느껴졌다.임유진을 대하는 강지혁의 태도가 꼭 기억을 잃기 전의 강지혁 같았기 때문이다. 꼭 기억을 다 되찾은 것처럼 말이다.강씨 저택.강지혁은 현관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가 마침 임유진과 두 아이들이 거실에서 동요에 맞춰 춤을 추고 있는 모습을 보게 되었다.현이는 흥분한 건지 얼굴이 빨개진 채로 깔깔거리며 춤을 추고 있었고 무뚝뚝하던 율이도 볼을 살짝 붉히며 어색하게 몸을 좌우로 흔들고 있었다.몸만 보면 썩 내키지 않아 하는 것 같지만 미소를 띠고
강지혁은 여자를 무섭게 노려보더니 이내 곁에 있는 경호원에게 지시를 내렸다.“두 번 다시 손에 뭘 들 수 없게 만들어놓고 경찰에 넘겨.”“네, 알겠습니다.”청소부는 그들의 대화에 얼굴이 새하얗게 질려버렸다.‘지, 지금 내 손을 부러트리려는 건가?’그녀는 이런 무서운 인간을 만날 줄 알았으면 차라리 경찰에게 잡히는 것이 더 나았겠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잘못했습니다! 다시는 안 그럴게요! 제가... 제가 알아서 경찰서로 가서 자수하겠습니다. 그러니까 제발...!”하지만 간절한 그녀의 부탁에도 강지혁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점점 더 얼굴이 차가워지기만 할 뿐이었다.사실 청소부는 양손만 부러지는 것에 감사해야 한다. 만약 그녀가 던진 화분으로 임유진이 큰 상처를 입었으면 그때는 양손은 물론이고 몸 전체가 너덜너덜해진 채 죽으니만 못한 삶은 살았을 테니까.“으아아악!!”그녀의 절규와 함께 강지혁은 유유히 현장을 빠져나왔다. 그리고 고이준도 곧바로 그의 뒤를 따라나섰다.바로 앞에 세워진 차량에 올라탄 후 고이준은 곧바로 강지혁에게 자료 하나를 건넸다.“소민준 씨의 지난 5년간 행적입니다. 몇 년 전부터 배달 기사 일을 하는 것으로 확인이 됐고 오늘은 우연히 건물 앞을 지나가다 사모님을 구한 것으로 보입니다. 사모님께서는 감사의 뜻으로 소민준 씨를 병원에 보냈고 손목 골절로 인한 치료 비용을 전액 다 부담해주셨습니다.”강지혁은 어둡게 가라앉은 얼굴로 수중의 자료를 훑어보았다. 차 안의 분위기는 그야말로 얼음장 같았다.“참 기막힌 우연이야. 안 그래?”그때 줄곧 입을 다물고 있던 강지혁의 입에서 뜬금없는 한마디가 흘러나왔다.“네... 네.”고이준은 식은땀을 흘리며 룸미러로 강지혁의 눈치를 봤다. ‘혹시 소민준이 사모님을 구해준 것에 질투라도 하는 건가...?’“CCTV는?”“네, 여기 있습니다.”고이준은 얼른 휴대폰을 꺼내 경호원이 보내준 CCTV 영상의 일부를 틀어 강지혁에게 건넸다.영상 속 소민준은 화분이 떨어짐과 동시에
경비원은 그 말에 시선을 내려 바닥에 떨어진 산산조각이 난 화분을 보고는 그제야 얼른 손을 놓아주었다.임유진은 경호원에게 소민준의 손목을 봐달라고 했고 경호원은 알겠다며 그의 손목을 자세히 살폈다.“사모님, 아무래도 골절인 것 같습니다.”“그럼 지금 당장 병원으로 데려가 치료를 받게 하세요.”“네, 알겠습니다.”그때 휴대폰이 울렸고 임유진은 경호원에게 가보라는 손짓을 한 후 이내 전화를 받았다.무슨 얘기를 들은 건지 그녀는 전화를 받은 지 얼마 안 돼 곧바로 심각한 얼굴을 했다.“네,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통화를 마친 후 임유진은 건물이 아닌 법원으로 향했다.잠시 후, 임유진이 법원에서 나왔을 때 마침 소민준을 병원으로 데려간 경호원으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검사를 받아본 결과 다행히 심각한 상처는 아니고 한 달 정도면 완전히 회복될 거라는 내용이었다.“알겠어요. 치료비는 다 제가 책임진다고 하고 혹시 다른 무언가의 보상을 원하면 저한테 따로 연락 주세요.”“네, 사모님.”임유진은 전화를 끊은 후 휴대폰을 집어넣는 것이 아닌 권건우에게 전화를 걸었다.“스승님, 죄송해요. 아무래도 당분간은 좀 시끄러워질 것 같아요.”“들었다. 김승수가 우리 둘을 고소했다지? 걱정할 것 없어. 우리는 그 사건에 한 점 부끄럼 없이 임했으니까. 그보다 요즘 인터넷에 떠드는 루머 말인데 나야 다 늙어서 그런 건 전혀 신경이 안 쓰인다고 하지만 너는 남편과 재회한 지도 얼마 안 됐는데...”“걱정하지 마세요. 혁이는 스승님과 제 사이 오해 안 해요.”임유진의 말에 권건우는 안심한 듯 미소를 지었다.“그럼 다행이고.”그날 저녁, 임유진이 집에 돌아오자마자 집사가 다가와 말했다.“회장님은 오늘 일 때문에 조금 늦으신다고 먼저 아이들과 식사를 하시라고 하셨습니다.”“네, 알겠어요.”임유진은 대수롭지 않게 고개를 끄덕이며 아이들과 밥 먹을 준비를 했다. 일 때문에 늦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니까.그 시각, 강지혁은 냉기를 풍기며 차가운 시선으로 눈앞
“위험해!”등 뒤로 누군가의 다급한 외침이 들려왔다.임유진은 미처 상황을 파악하지도 못한 채 누군가의 품에 안겨 바닥에 나뒹굴었다. 그녀를 구해준 누군가는 쓰러지는 그 순간에도 양손으로 그녀를 지켜주고 있었다.“사모님!”“사모님!”다급한 발걸음 소리와 함께 경호원과 기사들이 큰소리로 외치며 다가왔다.임유진은 그들의 소리에 그제야 정신을 차렸고 경호원의 부축으로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난 괜찮아요.”그녀는 말을 마치고는 고개를 옆으로 돌려 고개를 숙인 채 자리에서 일어나며 몸에 묻은 먼지를 툭툭 털어내는 남자를 바라보았다.“괜찮으세요? 구해주셔서 정말 감사...”임유진은 말을 하다가 남자가 고개를 드는 것을 보고 저도 모르게 흠칫하며 말을 멈추고 말았다.그녀를 구해준 건 다름 아닌 소민준이었다.소씨 가문의 장남이자 한때는 그녀의 남자친구였으며 진세령의 약혼자이기도 했던 그 소민준 말이다.하지만 지금의 그는 5년 전과는 완전히 다른 모습을 하고 있었다.색이 다 바랜 낡아빠진 옷에 더러운 운동화, 세월을 정통으로 맞은 것 같은 얼굴에 새치 가득한 머리까지, 지금의 그는 도무지 30대 중반이라고는 믿기지 않는 모습을 하고 있었다.그래도 한때는 상류층에 있었던 사람인데 지금은 일반 시민도 아닌 제일 아래 계층에 있는 사람처럼 보였다.고개를 든 소민준은 눈앞에 있는 사람이 임유진이라는 것을 보고는 마찬가지로 조금 놀란 듯 움찔했다. 그러고는 곧바로 쓴웃음을 지었다.“너였구나. 다시 이곳으로 돌아왔다는 기사를 봤어. 이런 식으로 만나게 될 줄은 몰랐는데.”“너...”임유진은 뭐라 말을 하고 싶었지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소민준은 당시 그녀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줬고 그녀가 절망의 끝에 자살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궁지까지 몰아붙였으며 두 번 다시 사랑 같은 건 하고 싶지 않게끔 만들어놓기도 했다.아마 강지혁이 아니었다면 임유진은 지금도 여전히 과거의 상처에 매달려 스스로를 고립시키며 살았을 것이다.하지만...하지만
직장 동료들은 한지영에게 위로를 건네며 은근히 그녀에게 잘 보이려는 듯한 말투로 얘기했다.심지어 어떤 사람은 아예 대놓고 그녀에게 백연신과의 사이를 묻기도 했다.“그럼 지영 씨는 백연신 씨랑 다시 만나는 거예요?”“그날 기자들 무리에서 지영 씨 손을 덥석 잡고 차로 끌고 가는데 내가 다 설렜지 뭐예요? 완전 현실판 왕자님 아니에요?”“그럼 앞으로 지영 씨를 뭐라 불러야 하나?”“백연신 씨가 회장님이니 당연히 회장 사모님 아니겠어요?”한지영은 직원들의 태도가 바뀐 게 전부 백연신 때문이라는 걸 알고 있다. 이런 상황을 처음 겪는 것도 아니었으니까.“아니요. 백연신 씨와는 아무 사이도 아니에요. 그러니까 괜한 추측은 하지 말아주세요. 그리고 저, 사귀는 사람 따로 있어요.”한지영은 차가운 목소리로 대꾸했고 이에 사람들은 어색하게 웃으며 서로 눈빛을 주고받더니 금방 다시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옆에서 떠드는 사람들이 없으니 이제야 살 것 같았다.어제 집으로 돌아갔을 때 백연신은 끝까지 나타나지 않았다. 그저 경호원을 통해 그녀에게 전언만 남겼다.“회장님께서 더는 걱정하지 않으셔도 된다고, 앞으로도 쭉 전과 같이 아무 일도 없을 거라고 하셨습니다.”전과 같다는 건 백연신 역시 더는 그녀 앞에 나타나지 않을 거라는 건가?한지영은 그 생각에 갑자기 울컥하며 눈물이 차오르려는 것이 느껴졌다. 하지만 그녀는 곧바로 다시 마음을 다잡으며 스스로에게 되뇌었다.이건 자신이 바란 거라고, 그러니 아무것도 슬퍼할 것 없다고 말이다.‘그래, 잘 된 거야. 이게 제일 좋은 결말이야. 증오도 없고 더 이상의 미움도 없는... 그냥 좋은 추억만 간직한 지금이 제일 좋은 끝이야.’다시 그와 연인이 되었다가 또다시 고난에 부딪혀 헤어지게 되면 그때는 완전히 원수지간이 될지도 모르니 차라리 아무것도 시작하지 않는 게 백배는 더 나았다.한지영은 더 이상 백연신과 함께 할 용기가 없었다. 아무리 그가 사랑을 외쳐도 아무리 줄곧 그녀만 사랑해왔다고 해도 이제는 그 마음을
연우진은 그 어느 날 자신이 백연신의 질투 대상이 될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지영 씨한테 마음이 남은 거라면 내가 아닌 지영 씨와 얘기를 하세요.”연우진이 차분한 목소리로 말을 이어갔다.“그리고 내가 지영 씨와 만나고 싶다고 해도 지영 씨가 받아주지 않으면 함께 하지 못해요. 이건 백연신 씨도 마찬가지고요. 백연신 씨가 여전히 지영 씨를 좋아한다고 해도 지영 씨가 받아주지 않으면 두 사람 역시 함께 못해요. 선택권은 지영 씨한테 있으니까.”백연신은 주먹을 말아쥐며 다시 물었다.“지영이와 만날 건지에 대한 대답만 해.”연우진은 한숨을 한번 내쉬었다. 아무래도 대답을 해주지 않으면 순순히 보내주지 않을 듯하다.“지영 씨는 좋은 사람입니다. 이대로 감정이 싹트면 나로서는 당연히 지영 씨와 함께하고 싶겠죠.”“한지영의 곁에 있을 수 있는 남자는 모든 걸 다 내어줄 수 있을 정도로 한지영을 사랑하는 사람이 아니면 안 돼.”백연신이 경고하듯 낮게 읊조렸다.“어째 내가 모든 걸 다 내어줄 정도로 한지영 씨를 사랑하지 않으면 우리 둘이 함께하는 걸 방해하겠다는 얘기로 들립니다만?”연우진의 질문에 백연신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지만 냉랭하고 차가운 눈빛을 보면 그 대답이 뭔지 알 수 있을 것도 같았다.“백연신 씨는 지영 씨를 위해 모든 걸 다 내어줄 수 있습니까? 그 정도로 사랑한다면 여기서 나한테 이러지 말고 다시 한번 지영 씨 마음에 들기 위해 노력을 해보는 게 어떨까요?”백연신은 그의 말이 끝난 순간 갑자기 손을 뻗어 연우진의 멱살을 잡았다. 그러고는 이대로 갈기갈기 찢어버릴 듯한 눈빛으로 그를 노려보았다.“너는 아무것도 몰라. 나라고...”하지만 그는 말을 다 잇지 못했다. 또한 멱살을 잡았던 손도 힘없이 풀었다.질투와 분노로 가득했던 눈동자가 한순간에 어둠에 잠겨버린 듯 시들어졌다.“한지영한테 잘해. 만약 지영이한테 상처를 주면 그때는 사는 게 사는 것 같지 않다는 게 뭔지 똑똑히 알려주지. 내 말 허투루 듣지 마.”말을 마친 후
백연신은 그 생각에 얼굴을 한껏 일그러트렸다. 질투와 분노, 슬픔과 고통의 감정들이 소용돌이치며 그의 얼굴에 담겼다.한지영의 집에서 나왔을 때 연우진은 꽤 편안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그는 몇 시간 전에 한지영에게 전화를 걸었다가 무사히 집에 도착했다는 말을 듣고 바로 그녀를 찾으러 집까지 왔다.다행히 사건은 무사히 일단락되었고 한지영도 예전의 일상을 다시 되찾은 것처럼 보였다.“우진 씨, 그... 나랑 더는 연락하고 싶지 않으면 언제든지 말해줘요. 난 괜찮으니까.”연우진은 한지영의 집에 도착하자마자 들은 그녀의 말을 떠올리고는 저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가끔 보면 한지영은 꼭 34살이 아닌 4살짜리 아이 같았다. 이런 상황에서도 마음속의 말을 솔직하게 전하며 상대방에게 선택권을 주니 말이다.하지만 그런 투명한 여자이기에 연우진도 그녀와 함께 있으면 더 즐겁고 자꾸 그녀와 연락을 이어나가게 되는 걸 것이다.“나는 지영 씨랑 계속 연락하고 싶은데. 지영 씨는 그저 피해자일 뿐이었잖아요. 그러니까 죄라도 지은 사람처럼 말하지 말아요.”“내가 백연신 씨와 호텔에서 아무 일도 없었다고 하면 믿을 수 있어요?”“네, 지영 씨가 그렇다고 하면 그렇게 믿을게요.”연우진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했다. 진심이었으니까.만약 정말 뭔 일이 있었으면 한지영 쪽에서 먼저 솔직하게 얘기를 해줬을 것이다. 한지영은 그런 여자니까.연우진은 엘리베이터 안에서 문득 백연신의 얼굴을 떠올렸다. 확실히 한지영은 백연신과의 인연을 이미 지난 과거로만 보고 있는 듯했다.하지만 백연신은? 그 역시 그럴까? 이제는 고은채와의 결혼도 파기됐는데?생각에 잠긴 채 엘리베이터에서 나오던 연우진은 아파트 입구에 서 있는 남자를 보고 멈칫하며 발걸음을 멈췄다.잘 뻗은 기럭지에 고고해 보이는 눈앞의 남자는 다름 아닌 백연신이었다.‘이 사람이 왜 여기에...’연우진과 백연신은 어느 정도 거리를 둔 채 서로를 바라보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렇게 침묵이 계속되다 연우진은 놀란 마
한지영의 말대로 백연신은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다른 여자를 곁에 둘 수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예쁜 여자를 곁에 둔다고 해도 그는 그녀가 아니면 안 되는 남자였다. 꼭 한지영이여야만 하는 남자였다.처음 본 순간부터 줄곧 한지영만을 사랑해왔으니까, 이미 모든 마음을 다 그녀에게 줘버렸으니까.사실 5년 전에 한지영이 아닌 고은채의 손을 잡았을 때 속으로 판을 짜고 있었다고는 하나 앞으로가 어떨지는 생각해 본 적도 없었다.그때는 자신에게 미래가 있을지도 없을지도 확신하지 못했거니와 백씨 가문의 모든 걸 되찾고 고씨 가문을 무너뜨리는 데 성공할 수 있을지 말지도 미지수였으니까.당시의 그에게는 한 걸음 한 걸음이 다 깨진 얼음판을 걷는 것 같았다. 그래서 섣불리 한지영에게 약속을 건넬 수도 없었다.지난 5년이라는 시간 동안 백연신은 사람을 은밀히 붙이는 것으로 한지영의 소식을 접할 뿐 그녀의 앞에 나서지는 못했다. 그때는 아무리 보고 싶어도 참아야만 했으니까.그런데 인내의 시간을 겪고 드디어 그녀의 앞에 나설 자격을 갖췄는데 한지영의 마음은 그사이 식어버렸다.백연신은 그 생각에 또 한 번 쓴 미소를 지었다.그녀와 함께하고 싶어 한 선택이, 그녀를 되찾기 위한 인내가 한지영이 거부함으로써 완전히 물거품이 되어버렸다.‘한지영을 살려주는 것만으로도 만족해라 이건가...?’백연신은 어쩌면 당시 한지영을 살려달라고 간절하게 외쳤을 때 모든 소원권을 다 써버린 걸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그는 운전석에 앉은 채 한지영의 모습이 사라질 때까지, 아니, 사라진 뒤에도 여전히 그쪽으로 시선을 고정하며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그러다 얼마나 지났을까, 휴대폰 진동이 울려댔다.“회장님, 고은채 씨가 방금 S 시를 떠났습니다. 그리고 매스컴 쪽에도 더는 한지영 씨의 일상을 방해하지 않게 조치를 해뒀습니다.”“고씨 가문 쪽은 계속해서 지켜봐. 손 내밀어주는 가문이 있나.”“네, 알겠습니다.”백연신은 통화를 마친 후 휴대폰을 다시 집어넣었다.고씨 가문에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