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여진은 억울한 얼굴을 하며 자기 자신을 피해자로 만들었다.그녀가 피해자로 있는 한 임유진 일에서 그녀는 제외되게 될 것이고 그렇게 되면 결국은 임유진이 재수가 없어 장이경에게 걸렸다는 거로 결론이 날 것이다.“방금 네가 한 말에 한 치의 거짓도 없어?”강현수는 배여진을 빤히 바라보며 물었다.“그럼요!”배여진은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내가 왜 거짓말을 하겠어요. 현수 씨, 나는 지금 내가 그 대기실에 들어갔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만 하면 소름 끼쳐요. 나는 유진이처럼 똑똑하지 못해서 그렇게 빠르게 대응하지 못했을 게 분명하니까 아마 나는 지금쯤 큰 놀림거리가 되었겠죠...”그녀는 울먹거리며 위로를 얻으려는 듯 강현수의 품으로 다가갔다.하지만 강현수는 그런 그녀를 바로 밀쳐버렸다.“내가 전에 분명히 말하지 않았나? 나는 널 내 목숨을 구해준 은인으로밖에 생각 안 한다고. 그러니까 앞으로 이런 식의 행동은 물론이고 다른 사람 앞에서 괜히 오해 살 만한 말도 하지 마.”배여진은 그 말을 듣고는 아랫입술을 꼭 깨물었다.“그리고 오늘 네가 한 말이 전부 다 진실이어야 할 거야. 경찰 쪽에서 조사를 시작했으니 얼마 안 가 범인이 잡힐 테니까.”배여진은 억지로 미소를 지었다.“잘됐네요. 나도 하루빨리 범인이 잡혔으면 좋겠어요. 그래야 나도 나를 해치려 했던 사람이 누군지 확실히 알 수 있을 테니까요!”배여진은 태연한 얼굴과 달리 그녀의 심장은 지금 세차게 쿵쾅거렸다. 그리고 유례없는 공포가 그녀를 감쌌다.‘만약 내가 한 짓이라는 게 밝혀지면... 그때는 어떡하지?’배여진은 자신의 거짓말이 혹여 들키기라도 할까 봐 몸을 덜덜 떨었다....주말.한지영은 기분전환도 할 겸 임유진을 밖으로 불러냈다.그러고는 차를 몰고 임유진과 함께 유명한 절로 향했다.“여기는 왜 왔어?”임유진은 절에 도착한 후 조금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한지영은 기도드리는 것을 그다지 좋아하는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에 이곳으로 온 것이 의외일 수밖에 없었다.“여기서 기도
하지만 그럼에도 한지영이 이렇게 눈치를 보는 건 얼마 전 임유진에게서 강지혁과 완전히 끝났다는 소리를 들었기 때문이다.임유진이 힘들다고 내색한 적은 없지만 한지영은 지금 이 상황에 결혼한다고 말하는 것이 무척이나 조심스러웠다.“3개월 뒤에 결혼한다고?!”임유진은 한지영의 입에서 이런 빅 뉴스가 나올 줄을 상상도 못 했다.“응, 연신 씨가 3개월 안에 집안 문제를 다 해결하겠대. 그래서 다 해결하고 하면 바로 결혼하재.”한지영도 처음에는 너무 빠른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막상 3개월 뒤에 정말 결혼하게 된다고 생각하니 이상하게 안심이 되었다. 그리고 심지어 이제는 백연신의 아내가 되는 순간이 기다려지기 시작했다.“지영아, 축하해!”임유진은 활짝 웃으며 진심으로 축하해주었다.“네 결혼식인데 당연히 내가 들러리 서줘야지! 너 그 말 안 했으면 오히려 나 섭섭할 뻔했어!”“유진아, 괜히 나 때문에 무리할 필요 없어. 정말이야... 네가 지금 어떤 상황인지...!”임유진은 한지영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그녀를 와락 끌어안았다.“지영아, 난 정말 괜찮아. 내가 강지혁 일 때문에 속상해할까 봐 걱정됐던 거지? 네 마음 다 알아. 하지만 난 정말 괜찮고 네 결혼 소식이 진심으로 기뻐! 그러니까 괜히 마음 쓰지 않아도 돼. 나 네 들러리 무조건 할 거니까!”한지영은 자신이 걱정했던 점을 임유진이 다 알고 있다는 것에 괜히 뭉클해졌다.“나는 네가 연신 씨랑 잘돼서 정말 기뻐. 아마 너희 부모님 다음으로 네 행복을 바라는 사람이 나일 거야. 나는 어쩌면 이번 생은 웨딩드레스를 입지 못할지도 모르지만 너는 꼭 입어줬으면 좋겠어. 그리고 나는 네가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평생을 약속하는 모습을 꼭 보고 싶어!”임유진의 말이 한지영은 괜히 울컥해져 임유진을 꼭 끌어안고 말했다.“너만 일방적으로 축하해줄 생각 하지 마. 나도 네가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하는 거 꼭 축하해 줄 거니까!”임유진은 한지영의 말에 걱정을 끼치지 않으려고 웃으며 답했다.“알
한지영은 전에 와봤던 터라 익숙하게 임유진을 데리고 제일 가까운 곳에 있는 법당으로 향했다.해당 법당에는 지금 참배하는 사람이 있었던 터라 임유진과 한지영은 밖에서 주위를 둘러보며 순서를 기다렸다.그리고 드디어 참배를 마친 사람이 나오고 이제 그녀들도 순서대로 안으로 들어가려는데 그때 등 뒤에서 사람들의 대화 소리가 들려왔다.“그거 들었어요? 강지혁도 지금 여기 있대요.”“강지혁이라면 그 강씨 가문의 강지혁 말하는 거예요?”“네. 아까 절 입구에 왜 그렇게 사람이 많나 신기해서 물어보니까 그게 다 강지혁 때문에 그렇게 삼엄하게 경비가 선거래요.”아주머니들의 대화에 임유진은 멈칫했다.그 저택에서 떠난 뒤로 그녀는 강지혁이라는 이름이 더 이상 그녀의 생활 반경 안에서는 들리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예상외의 장소에서 그의 이름을 듣게 되었고 심지어 그와 지금 한 절 안에 있게 되었다.한지영도 그 대화를 듣고는 어색한 얼굴로 임유진을 바라보았다.“유진아, 아니면... 오늘은 이대로 돌아가고 다음에 다시 올래?”“그럴 필요 없어. 난 괜찮으니까 신경 쓰지 마.”임유진은 애써 태연한 척 말했다.“강지혁이 여기 있다고 내가 굳이 자리를 피해야 하는 건 아니잖아. 그렇게 따지면 나는 아예 S 시를 떠나는 게 맞으니까. 살다가 언젠가는 이렇게 만나게 될 줄 알고 있었어. 난 정말 괜찮으니까 이만 들어가자. 우리 차례야.”임유진은 한지영의 손을 끌고 법당 안으로 들어갔다.두 사람은 법당 안으로 들어간 후 먼저 촛불을 켜고 그 불로 향을 켰다. 그러고는 좌복을 가지고 와 무릎을 뚫고 부처님을 향해 참배를 올렸다. 그러고는 각기 오른쪽과 왼쪽으로 돌아 마찬가지로 참배를 올렸다.임유진은 아까 강지혁 때문에 잠깐 심란해졌던 마음이 참배함으로써 많이 가라앉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법당 안의 조용하고 영험한 분위기와 향냄새로 진정이 된 건지도 모르겠다.임유진은 절을 하며 부처님께 한지영의 행복과 탁유미와 윤이가 헤어지지 않고 행복하게 살아가기를 빌었다
한편 이제 막 법당에서 나온 강지혁은 ‘유진’이라는 이름을 듣고는 발걸음을 멈췄다. 그러고는 시선을 돌려 임유진과 한지영 쪽을 바라보았다.강지혁 옆에 서 있던 고이준도 한지영의 외침을 들었기에 마찬가지로 임유진 쪽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곧바로 다시 시선을 돌려 강지혁의 표정을 살폈다.강지혁은 바닥에 넘어진 임유진을 보고는 그저 퉁명스러운 표정만 지었다.“가자.”그러고는 짧은 두 글자와 함께 입구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임유진이 넘어진 곳은 마침 입구 바로 옆이었던 터라 강지혁이 이곳을 나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임유진의 곁을 지나쳐야만 했다.그 시각 임유진의 곁을 스쳐 지나갔던 사람들은 전부 다 마지막 법당으로 향했고 그 덕에 지금 밖은 매우 조용했다.임유진은 자기 쪽으로 향하는 발걸음 소리를 듣고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들었다.그러자 강지혁이 점점 자신과 가까워지는 것이 보였다.임유진은 고개를 든 채 그렇게 강지혁을 가만히 바라보았다.아까 법당에서 그가 나왔을 때는 스치듯이 봤던 게 전부였지만 지금은 바로 코앞에서 똑똑히 그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그는 여전히 잘생겼고 여전히 사람을 홀리는 듯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전과 다른 것이 있다면 그의 얼굴에서는 더 이상 임유진에게만 보여주던 다정함과 애절함이 보이지 않았고 그녀가 저택을 떠났을 당시 보였던 절망스러운 표정도 보이지 않았다.강지혁은 임유진에게 시선조차 주지 않았다. 마치 그의 예쁜 눈에 임유진이라는 여자는 이제 들어올 수 없다는 듯이, 이제 임유진이라는 존재는 완전히 잊었다는 듯이 말이다.임유진은 강지혁이 바로 옆까지 다가왔을 때 저도 모르게 몸을 움찔했다.하지만 강지혁은 처음부터 끝까지 그녀에게 시선 한번 주지 않고 그렇게 옆을 스쳐 지나갔다.“유진아, 너 괜찮아?”한지영은 서둘러 임유진을 일으켜 세웠다.“응, 괜찮아.”임유진은 고개를 저으며 허리를 숙인 채 바지에 묻은 먼지를 털었다. 그러면서 계단을 내려가는 강지혁의 뒷모습을 또 한 번 바라보았다.사람들 위에 군림해
임유진은 참배를 올린 다음 자리에서 일어나 눈을 꼭 감은 채 꽤 오랫동안 합장했다.그녀는 부처님을 향해 강지혁을 향한 이 마음을 완전히 내려놓을 수 있게, 강지혁에게 설렜던 이 마음에 고요함이 찾아올 수 있게 해달라고 빌고 또 빌었다.가끔은 사랑하지 않는 것 또한 축복이었다.한편, 산 아래로 내려온 강지혁은 차량 뒷좌석에 타고는 시트에 등을 기댄 채 눈을 지그시 감았다.운전석에 앉아 있던 고이준은 룸미러로 그런 강지혁의 눈치를 보면서 손을 가만히 두지 못했다.아까 강지혁은 완전히 임유진을 내려놓은 것 같았다.물론 겉보기에는 말이다.하지만 과연 정말 그럴까?고이준은 강지혁과 임유진의 첫 만남부터 지금까지 쭉 옆에서 지켜봐 왔던 사람이기에 강지혁이 임유진을 얼마나 아꼈는지, 임유진이 강지혁의 마음속에 얼마나 큰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는지 잘 알고 있었다.아마 강지혁은 임유진이 죽으라고 하면 죽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그런데 그런 사람을 고작 이 며칠 사이에 완전히 내려놓는다는 것이 과연 가능한 일일까?강지혁이 태연해 보이면 보일수록 고이준은 옆에서 점점 더 불안해져 갔다.“이한이 얘기했던 파티, 오늘이라고 했었나?”강지혁이 눈을 계속 감은 채로 물었다.고이준은 그의 질문에 곧바로 대답했다.“네, 오늘 저녁 8시, 골드 클럽이라고 하셨습니다.”골드 클럽은 S 시에서 꽤 이름 있는 클럽이고 재벌 2, 3세들이 남자친구와 여자친구를 찾기 위해 자주 가는 곳이다. 그리고 그들은 가끔 이한처럼 그곳에서 파티를 주최하기도 했다.“저녁에 갈 거니까 이한한테 전화해둬.”강지혁의 말에 고이준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를 바라보았다.강지혁은 평소 시끄러운 곳은 딱 질색이라 클럽은 가지 않는 편이었다.‘하지만 오늘은 왜... 설마 아까 임유진 씨와 만난 것 때문에...?’고이준은 한참을 넋을 잃고 강지혁을 바라보다 이내 다시 정신을 차리고 알겠다고 대답했다.만약 오늘 파티에 강지혁이 온다는 소문이 퍼지면 평소 그를 노리던 여자들이 대거 출몰하게 될
임유진은 웃는 듯 마는듯한 얼굴로 배여진을 바라보았다. 임유진은 배여진이 미안해하고 있다는 말을 믿지 않았다. 대기실 일은 분명히 배여진의 짓일 거라고 거의 확신하고 있었으니까.물론 조사 결과는 경찰들의 말을 들어봐야 알겠지만 말이다.강현수는 자리에서 일어나 임유진을 향해 말했다.“나도 전화 받자마자 바로 왔어요. 유진 씨, 지난번에도 말했지만 그 남자한테 약을 먹인 사람이 누군지 또 누가 대기실 문을 잠갔는지 범인이 밝혀지면 내가 가만두지 않을 거예요. 반드시 그 대가를 치르게 할 생각이니까 너무 걱정하지 말아요.”임유진은 고개를 들어 강현수를 바라보았다.강현수는 임유진이 배여진을 의심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이 자리에서 다시 한번 이 얘기를 전한다는 건 임유진에게 그 범인이 배여진이어도 예외 없이 죗값을 치르게 하겠다고 알려주는 것이나 다름없었다.배여진은 옆에서 그 말을 듣고는 질투가 차올라 주먹을 꽉 말아쥐었다.‘임유진이 뭐라고 이렇게까지 신경 쓰는 건데? 다쳤다고 해도 손목이 세게 잡힌 것뿐이잖아. 그런데 왜 이렇게까지 하는 거야!’“다들 안으로 들어오세요.”그때 경찰이 세 사람을 가리키며 말했다.경찰의 안내에 따라 조사실로 들어가 보니 거기에는 장이경의 가족들이 와 있었다. 장이경 역시 이 사건의 피해자이기에 경찰들이 부른 것이다.장이경의 가족으로 온 사람들은 그의 부모님이었고 이 장씨 부부는 한때 배여진의 시어머니와 시아버지였던 사람들이었다.장씨 부부는 배여진이 들어온 순간부터 그녀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한때 며느리였던 배여진은 지금 비싼 목걸이와 반지를 차고 떵떵거리며 살고 있는데 그에 반해 그들의 아들은 지금 볼품없는 꼴로 병상에 누워있다.너무나도 달라진 두 사람의 처지에 장씨 부부는 속상한 마음을 숨기려 서로의 손을 꽉 잡았다.그들은 마을 사람들에게서 배여진이 연예계 쪽을 꽉 잡고 있는 강현수 옆에 찰싹 달라붙어 있다는 얘기를 들었다. 그리고 배여진이 머지않아 강현수와 결혼해 부잣집 사모님이 된다는
배여진은 그 말에 안심했다.4시 12분에 그녀는 한창 메이크업을 받고 있었으니까. 그 모습을 본 사람 또한 많았었기에 알리바이는 문제없었다.“CCTV를 건드린 사람은요?”강현수가 물었다.“그건 현장을 더 조사해봐야 알 수 있을 겁니다. 미리 말씀드리면 조사하는데 시간이 오래 걸릴지도 모릅니다. 당시 대기실 근처에 있었던 사람들을 일일이 조사해 이상한 점은 없었는지 물어봐야 하니까요.”경찰은 질문에 대답하고는 바로 장이경의 이야기로 넘어갔다.장이경의 말로는 그날 배여진을 찾으러 간 것이 맞고 배여진이 대기실에서 잠깐 기다려 달라고 한 것도 맞다고 했다. 그리고 대기실에서 기다리는데 10분 정도 뒤에 갑자기 몸이 이상해졌고 그 뒤로는 기억이 전혀 나지 않는다고 했다.병원 쪽에서는 장이경의 혈액에서 성적흥분을 하게 만드는 약 성분이 검출됐다고 했다. 하지만 이런 약은 요즘 인터넷만 이용하면 어디서든, 누구든 살 수 있었기에 구매자를 찾아내는 것이 상당히 어려워지게 된다.“저희도 조사는 계속하겠지만 단시간 안에 범인을 색출하는 것은 좀 어려울 수도 있습니다.”경찰의 말에 배여진은 한시름 놓았다. 단시간 안에 알아내지 못하면 이런 사건은 결국 흐지부지되기 일쑤니까.경찰서에서 나온 후 배여진은 임유진을 향해 말했다.“유진아, 너무 걱정하지 마. 범인은 꼭 잡힐 거야. 정말 어떤 파렴치한 인간이 이런 짓을 했는지! 잡히면 내가 가만 놔두지 않을 거야!”“응, 나도 범인은 꼭 잡힐 거라고 생각해.”임유진은 배여진에게 의미심장한 눈길을 보내고는 이곳을 떠나기 위해 발걸음을 옮겼다.그러자 강현수가 그녀를 따라 걸으며 말했다.“데려다줄게요.”“아니요. 나는 버스 탈 거라서. 그럼 이만.”임유진은 강현수가 자신에게 어떤 마음을 품고 있는지 잘 알고 있기에 최대한 그와 거리를 뒀다.배여진은 그녀의 말에 피식 웃더니 강현수 옆으로 다가와 다정하게 말했다.“현수 씨, 우리도 이제 가요.”하지만 강현수는 배여진의 말은 무시한 채 임유진의 뒷모습만 바라보
“하마터면 놓칠 뻔했네요.”청량한 목소리가 임유진의 귓가에 울려 퍼졌다.이에 고개를 홱 돌려보니 강현수가 바로 뒤에 서 있었다.“왜... 여기 있어요?”“유진 씨 집까지 데려다주려고요. 내 차에 앉는 건 싫은 것 같으니 이렇게 내가 유진 씨 따라 버스에 탈 수밖에 없겠죠?”강현수의 말에 임유진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설마 강현수가 자신을 따라 버스에 오를 줄을 몰랐다.“젊은이, 돈 내야지.”그때 버스 기사가 그에게 말을 걸었다.강현수는 그 말에 지갑을 꺼내더니 당당하게 수표를 꺼냈다. 그러고는 자연스럽게 요금통을 향해 손을 뻗었다.“잠깐만요!”하지만 그때 임유진이 그의 팔을 덥석 잡았다.“설마 수표 넣으려는 건 아니죠?”“맞는데요?”강현수의 말에 임유진은 한숨을 한번 내쉬더니 아까 지갑에 넣어뒀던 카드를 다시 꺼내 들었다.“내가 찍어줄 테니까 돈은 넣어둬요.”그러고는 다시 한번 카드를 찍고 버스 중간으로 걸어갔다.출퇴근 시간이 아니라 붐빌 정도는 아니었지만 자리는 이미 사람들이 다 앉고 없었다.결국 임유진은 적당한 곳에서 손잡이를 잡았다. 그리고 강현수는 그녀 바로 옆에 섰다.“버스 타니 옛날 생각나고 좋네요.”강현수가 웃으며 말했다.“앞으로는 집까지 데려다주지 않아도 돼요. 혼자 집으로 돌아가는 거 익숙하거든요.”“데려다주는 사람이 나라서 불편한 건 아니고?”강현수는 임유진의 두 눈을 빤히 바라보며 물었다.이에 임유진은 찔리는 게 있는 듯 서둘러 그의 눈을 피했다.“다시 한번 말하지만 이러는 거 시간 낭비에요.”그 말에 강현수의 속눈썹이 살짝 떨렸다.그는 한참을 임유진을 바라보더니 갑자기 입꼬리를 올리며 웃었다.“더는 시간 낭비하고 싶지 않아서 이러는 거예요. 전까지 너무 많은 시간을 허비했거든요.”강현수는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혹시 내가 계속 다가가는 게 두려워요? 나를 어느 순간 받아주게 될까 봐, 그래서 자꾸 시간 낭비라고 하는 거예요?”“그게 무슨...!”임유진은 그의 말에 발끈하고는 이내 한숨
강지혁은 수저를 들고 그녀가 해준 음식을 하나둘 입에 넣었다.분명히 흔히 볼 수 있는 가정 요리고 손에 들고 있는 것도 포크나 나이프가 아닌 그저 숟가락과 젓가락일 뿐인데 상대가 강지혁이라 그런지 꼭 고급스러운 레스토랑에서 식사하고 있는 것 같았다.임유진은 원래 강지혁이 밥을 다 먹은 뒤에 오늘 있었던 일을 얘기하려고 했다. 하지만 강지혁이 밥을 먹으며 먼저 선수를 쳐버렸다.“오늘 하마터면 떨어지는 화분에 다칠 뻔했다는 얘기 들었어. 무사해서 다행이야. 내일부터는 경호원을 두 명 더 붙여줄게.”임유진은 그 말에 눈을 두어 번 깜빡이며 어리둥절해 하다 이내 남편이 강지혁이라는 것을 깨닫고 납득했다는 표정을 지었다.아마 일이 터지고 5분도 안 돼 바로 강지혁에게 보고가 들어갔을 테니까.“응, 알겠어.”임유진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누가 화분을 떨어트린 건지 알아봐 달라고 했어. 아직 따로 연락이 오지는 않았지만.”“청소부가 한 짓이야.”“청소부?”임유진이 깜짝 놀라며 물었다.“벌써 조사를 마쳤어?”“당연한 거 아니야? 네 일인데.”만약 임유진의 몸에 생채기라도 났으면 강지혁은 아마 이성을 잃고 건물 전체를 폭파하고 관계자들까지 다 처리해버렸을 것이다.강지혁은 갑자기 젓가락을 내려놓더니 임유진의 양손을 덥석 잡았다.그녀의 손가락은 여전히 삐뚤빼뚤했다.임유진의 손을 이렇게 만든 사람은 진세령이고 소민준은 당시 진세령의 곁에서 가만히 구경만 했다.강지혁은 임유진의 손을 매만지다 문득 1시간 전에 봤던 청소부의 피범벅이 된 두 손을 떠올렸다.그는 다른 사람의 손은 피가 나든 잔인하게 잘리든 아주 조금의 연민도 들지 않았다. 하지만 임유진의 손은 볼 때마다 가슴이 아프고 또 울컥했다.“왜? 왜 그렇게 봐?”임유진은 강지혁이 손가락을 뚫어지게 보는 게 불편한지 손을 뒤로 빼며 거두어들이려고 했다.그녀 역시 다를 것 없는 여자라 사랑하는 사람 앞에서는 자신의 좋은 것만 보여주고 싶었다.“내 손 안 예뻐... 보지 마.”임유진의 손
“그래...”강지혁이 낮게 읊조렸다.“그래야 할 거야.”고이준은 저도 모르게 소민준이 매우 가엽게 느껴졌다. 만약 임유진이 정말 소민준을 동정하면 그때는 지금 하고 있는 택배 기사 일도 못 하게 될지도 모르니까.“고 비서, 누가 저 여자한테 돈을 쥐여주고 유진이를 해할 계획을 세운 건지 알아내.”강지혁이 차가운 목소리로 지시했다.“네, 회장님.”고이준이 얼른 답했다.“그리고 S 시에서 제일 실력 좋은 변호사를 고용해서 유진이와 권건우 변호사 고소 건에 붙여. 김승수한테 지시를 내리는 다른 누군가가 있는 건 아닌지도 한번 알아보고.”고이준에게 김승수의 뒷조사를 맡긴 건 이유가 있었다.임유진이 강지혁의 와이프고 현 강씨 가문의 유일한 안주인인 걸 알고도 고소를 한 건 누가 봐도 이상했으니까. 상식적인 인간이라면 강씨 가문을 상대로 덤빌 리가 없다.게다가 김승수가 억울하다는 당시의 사건을 강지혁도 한번 훑어봤지만 임유진의 말대로 증거가 확실했고 결과 역시 납득 가능한 결과였다.즉 그렇다는 건 김승수에게 다른 목적이 있다는 것이다. 또 혹은 김승수를 뒤에서 조종하고 있는 누군가에게 다른 목적이 있을 수도 있고 말이다.하지만 이유가 뭐가 됐든 임유진을 건드린 이상 강지혁이 손을 놓고 있을 리가 없다. 그에게는 임유진이 목숨줄과도 같은 존재니까.“네, 알겠습니다.”임유진이 강지혁에게 있어 얼마나 중요한 사람인지 고이준은 너무나도 잘 알고 있다. 다만 요즘 따라 부쩍 이상한 위화감 같은 것이 느껴졌다.임유진을 대하는 강지혁의 태도가 꼭 기억을 잃기 전의 강지혁 같았기 때문이다. 꼭 기억을 다 되찾은 것처럼 말이다.강씨 저택.강지혁은 현관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가 마침 임유진과 두 아이들이 거실에서 동요에 맞춰 춤을 추고 있는 모습을 보게 되었다.현이는 흥분한 건지 얼굴이 빨개진 채로 깔깔거리며 춤을 추고 있었고 무뚝뚝하던 율이도 볼을 살짝 붉히며 어색하게 몸을 좌우로 흔들고 있었다.몸만 보면 썩 내키지 않아 하는 것 같지만 미소를 띠고
강지혁은 여자를 무섭게 노려보더니 이내 곁에 있는 경호원에게 지시를 내렸다.“두 번 다시 손에 뭘 들 수 없게 만들어놓고 경찰에 넘겨.”“네, 알겠습니다.”청소부는 그들의 대화에 얼굴이 새하얗게 질려버렸다.‘지, 지금 내 손을 부러트리려는 건가?’그녀는 이런 무서운 인간을 만날 줄 알았으면 차라리 경찰에게 잡히는 것이 더 나았겠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잘못했습니다! 다시는 안 그럴게요! 제가... 제가 알아서 경찰서로 가서 자수하겠습니다. 그러니까 제발...!”하지만 간절한 그녀의 부탁에도 강지혁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점점 더 얼굴이 차가워지기만 할 뿐이었다.사실 청소부는 양손만 부러지는 것에 감사해야 한다. 만약 그녀가 던진 화분으로 임유진이 큰 상처를 입었으면 그때는 양손은 물론이고 몸 전체가 너덜너덜해진 채 죽으니만 못한 삶은 살았을 테니까.“으아아악!!”그녀의 절규와 함께 강지혁은 유유히 현장을 빠져나왔다. 그리고 고이준도 곧바로 그의 뒤를 따라나섰다.바로 앞에 세워진 차량에 올라탄 후 고이준은 곧바로 강지혁에게 자료 하나를 건넸다.“소민준 씨의 지난 5년간 행적입니다. 몇 년 전부터 배달 기사 일을 하는 것으로 확인이 됐고 오늘은 우연히 건물 앞을 지나가다 사모님을 구한 것으로 보입니다. 사모님께서는 감사의 뜻으로 소민준 씨를 병원에 보냈고 손목 골절로 인한 치료 비용을 전액 다 부담해주셨습니다.”강지혁은 어둡게 가라앉은 얼굴로 수중의 자료를 훑어보았다. 차 안의 분위기는 그야말로 얼음장 같았다.“참 기막힌 우연이야. 안 그래?”그때 줄곧 입을 다물고 있던 강지혁의 입에서 뜬금없는 한마디가 흘러나왔다.“네... 네.”고이준은 식은땀을 흘리며 룸미러로 강지혁의 눈치를 봤다. ‘혹시 소민준이 사모님을 구해준 것에 질투라도 하는 건가...?’“CCTV는?”“네, 여기 있습니다.”고이준은 얼른 휴대폰을 꺼내 경호원이 보내준 CCTV 영상의 일부를 틀어 강지혁에게 건넸다.영상 속 소민준은 화분이 떨어짐과 동시에
경비원은 그 말에 시선을 내려 바닥에 떨어진 산산조각이 난 화분을 보고는 그제야 얼른 손을 놓아주었다.임유진은 경호원에게 소민준의 손목을 봐달라고 했고 경호원은 알겠다며 그의 손목을 자세히 살폈다.“사모님, 아무래도 골절인 것 같습니다.”“그럼 지금 당장 병원으로 데려가 치료를 받게 하세요.”“네, 알겠습니다.”그때 휴대폰이 울렸고 임유진은 경호원에게 가보라는 손짓을 한 후 이내 전화를 받았다.무슨 얘기를 들은 건지 그녀는 전화를 받은 지 얼마 안 돼 곧바로 심각한 얼굴을 했다.“네,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통화를 마친 후 임유진은 건물이 아닌 법원으로 향했다.잠시 후, 임유진이 법원에서 나왔을 때 마침 소민준을 병원으로 데려간 경호원으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검사를 받아본 결과 다행히 심각한 상처는 아니고 한 달 정도면 완전히 회복될 거라는 내용이었다.“알겠어요. 치료비는 다 제가 책임진다고 하고 혹시 다른 무언가의 보상을 원하면 저한테 따로 연락 주세요.”“네, 사모님.”임유진은 전화를 끊은 후 휴대폰을 집어넣는 것이 아닌 권건우에게 전화를 걸었다.“스승님, 죄송해요. 아무래도 당분간은 좀 시끄러워질 것 같아요.”“들었다. 김승수가 우리 둘을 고소했다지? 걱정할 것 없어. 우리는 그 사건에 한 점 부끄럼 없이 임했으니까. 그보다 요즘 인터넷에 떠드는 루머 말인데 나야 다 늙어서 그런 건 전혀 신경이 안 쓰인다고 하지만 너는 남편과 재회한 지도 얼마 안 됐는데...”“걱정하지 마세요. 혁이는 스승님과 제 사이 오해 안 해요.”임유진의 말에 권건우는 안심한 듯 미소를 지었다.“그럼 다행이고.”그날 저녁, 임유진이 집에 돌아오자마자 집사가 다가와 말했다.“회장님은 오늘 일 때문에 조금 늦으신다고 먼저 아이들과 식사를 하시라고 하셨습니다.”“네, 알겠어요.”임유진은 대수롭지 않게 고개를 끄덕이며 아이들과 밥 먹을 준비를 했다. 일 때문에 늦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니까.그 시각, 강지혁은 냉기를 풍기며 차가운 시선으로 눈앞
“위험해!”등 뒤로 누군가의 다급한 외침이 들려왔다.임유진은 미처 상황을 파악하지도 못한 채 누군가의 품에 안겨 바닥에 나뒹굴었다. 그녀를 구해준 누군가는 쓰러지는 그 순간에도 양손으로 그녀를 지켜주고 있었다.“사모님!”“사모님!”다급한 발걸음 소리와 함께 경호원과 기사들이 큰소리로 외치며 다가왔다.임유진은 그들의 소리에 그제야 정신을 차렸고 경호원의 부축으로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난 괜찮아요.”그녀는 말을 마치고는 고개를 옆으로 돌려 고개를 숙인 채 자리에서 일어나며 몸에 묻은 먼지를 툭툭 털어내는 남자를 바라보았다.“괜찮으세요? 구해주셔서 정말 감사...”임유진은 말을 하다가 남자가 고개를 드는 것을 보고 저도 모르게 흠칫하며 말을 멈추고 말았다.그녀를 구해준 건 다름 아닌 소민준이었다.소씨 가문의 장남이자 한때는 그녀의 남자친구였으며 진세령의 약혼자이기도 했던 그 소민준 말이다.하지만 지금의 그는 5년 전과는 완전히 다른 모습을 하고 있었다.색이 다 바랜 낡아빠진 옷에 더러운 운동화, 세월을 정통으로 맞은 것 같은 얼굴에 새치 가득한 머리까지, 지금의 그는 도무지 30대 중반이라고는 믿기지 않는 모습을 하고 있었다.그래도 한때는 상류층에 있었던 사람인데 지금은 일반 시민도 아닌 제일 아래 계층에 있는 사람처럼 보였다.고개를 든 소민준은 눈앞에 있는 사람이 임유진이라는 것을 보고는 마찬가지로 조금 놀란 듯 움찔했다. 그러고는 곧바로 쓴웃음을 지었다.“너였구나. 다시 이곳으로 돌아왔다는 기사를 봤어. 이런 식으로 만나게 될 줄은 몰랐는데.”“너...”임유진은 뭐라 말을 하고 싶었지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소민준은 당시 그녀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줬고 그녀가 절망의 끝에 자살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궁지까지 몰아붙였으며 두 번 다시 사랑 같은 건 하고 싶지 않게끔 만들어놓기도 했다.아마 강지혁이 아니었다면 임유진은 지금도 여전히 과거의 상처에 매달려 스스로를 고립시키며 살았을 것이다.하지만...하지만
직장 동료들은 한지영에게 위로를 건네며 은근히 그녀에게 잘 보이려는 듯한 말투로 얘기했다.심지어 어떤 사람은 아예 대놓고 그녀에게 백연신과의 사이를 묻기도 했다.“그럼 지영 씨는 백연신 씨랑 다시 만나는 거예요?”“그날 기자들 무리에서 지영 씨 손을 덥석 잡고 차로 끌고 가는데 내가 다 설렜지 뭐예요? 완전 현실판 왕자님 아니에요?”“그럼 앞으로 지영 씨를 뭐라 불러야 하나?”“백연신 씨가 회장님이니 당연히 회장 사모님 아니겠어요?”한지영은 직원들의 태도가 바뀐 게 전부 백연신 때문이라는 걸 알고 있다. 이런 상황을 처음 겪는 것도 아니었으니까.“아니요. 백연신 씨와는 아무 사이도 아니에요. 그러니까 괜한 추측은 하지 말아주세요. 그리고 저, 사귀는 사람 따로 있어요.”한지영은 차가운 목소리로 대꾸했고 이에 사람들은 어색하게 웃으며 서로 눈빛을 주고받더니 금방 다시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옆에서 떠드는 사람들이 없으니 이제야 살 것 같았다.어제 집으로 돌아갔을 때 백연신은 끝까지 나타나지 않았다. 그저 경호원을 통해 그녀에게 전언만 남겼다.“회장님께서 더는 걱정하지 않으셔도 된다고, 앞으로도 쭉 전과 같이 아무 일도 없을 거라고 하셨습니다.”전과 같다는 건 백연신 역시 더는 그녀 앞에 나타나지 않을 거라는 건가?한지영은 그 생각에 갑자기 울컥하며 눈물이 차오르려는 것이 느껴졌다. 하지만 그녀는 곧바로 다시 마음을 다잡으며 스스로에게 되뇌었다.이건 자신이 바란 거라고, 그러니 아무것도 슬퍼할 것 없다고 말이다.‘그래, 잘 된 거야. 이게 제일 좋은 결말이야. 증오도 없고 더 이상의 미움도 없는... 그냥 좋은 추억만 간직한 지금이 제일 좋은 끝이야.’다시 그와 연인이 되었다가 또다시 고난에 부딪혀 헤어지게 되면 그때는 완전히 원수지간이 될지도 모르니 차라리 아무것도 시작하지 않는 게 백배는 더 나았다.한지영은 더 이상 백연신과 함께 할 용기가 없었다. 아무리 그가 사랑을 외쳐도 아무리 줄곧 그녀만 사랑해왔다고 해도 이제는 그 마음을
연우진은 그 어느 날 자신이 백연신의 질투 대상이 될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지영 씨한테 마음이 남은 거라면 내가 아닌 지영 씨와 얘기를 하세요.”연우진이 차분한 목소리로 말을 이어갔다.“그리고 내가 지영 씨와 만나고 싶다고 해도 지영 씨가 받아주지 않으면 함께 하지 못해요. 이건 백연신 씨도 마찬가지고요. 백연신 씨가 여전히 지영 씨를 좋아한다고 해도 지영 씨가 받아주지 않으면 두 사람 역시 함께 못해요. 선택권은 지영 씨한테 있으니까.”백연신은 주먹을 말아쥐며 다시 물었다.“지영이와 만날 건지에 대한 대답만 해.”연우진은 한숨을 한번 내쉬었다. 아무래도 대답을 해주지 않으면 순순히 보내주지 않을 듯하다.“지영 씨는 좋은 사람입니다. 이대로 감정이 싹트면 나로서는 당연히 지영 씨와 함께하고 싶겠죠.”“한지영의 곁에 있을 수 있는 남자는 모든 걸 다 내어줄 수 있을 정도로 한지영을 사랑하는 사람이 아니면 안 돼.”백연신이 경고하듯 낮게 읊조렸다.“어째 내가 모든 걸 다 내어줄 정도로 한지영 씨를 사랑하지 않으면 우리 둘이 함께하는 걸 방해하겠다는 얘기로 들립니다만?”연우진의 질문에 백연신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지만 냉랭하고 차가운 눈빛을 보면 그 대답이 뭔지 알 수 있을 것도 같았다.“백연신 씨는 지영 씨를 위해 모든 걸 다 내어줄 수 있습니까? 그 정도로 사랑한다면 여기서 나한테 이러지 말고 다시 한번 지영 씨 마음에 들기 위해 노력을 해보는 게 어떨까요?”백연신은 그의 말이 끝난 순간 갑자기 손을 뻗어 연우진의 멱살을 잡았다. 그러고는 이대로 갈기갈기 찢어버릴 듯한 눈빛으로 그를 노려보았다.“너는 아무것도 몰라. 나라고...”하지만 그는 말을 다 잇지 못했다. 또한 멱살을 잡았던 손도 힘없이 풀었다.질투와 분노로 가득했던 눈동자가 한순간에 어둠에 잠겨버린 듯 시들어졌다.“한지영한테 잘해. 만약 지영이한테 상처를 주면 그때는 사는 게 사는 것 같지 않다는 게 뭔지 똑똑히 알려주지. 내 말 허투루 듣지 마.”말을 마친 후
백연신은 그 생각에 얼굴을 한껏 일그러트렸다. 질투와 분노, 슬픔과 고통의 감정들이 소용돌이치며 그의 얼굴에 담겼다.한지영의 집에서 나왔을 때 연우진은 꽤 편안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그는 몇 시간 전에 한지영에게 전화를 걸었다가 무사히 집에 도착했다는 말을 듣고 바로 그녀를 찾으러 집까지 왔다.다행히 사건은 무사히 일단락되었고 한지영도 예전의 일상을 다시 되찾은 것처럼 보였다.“우진 씨, 그... 나랑 더는 연락하고 싶지 않으면 언제든지 말해줘요. 난 괜찮으니까.”연우진은 한지영의 집에 도착하자마자 들은 그녀의 말을 떠올리고는 저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가끔 보면 한지영은 꼭 34살이 아닌 4살짜리 아이 같았다. 이런 상황에서도 마음속의 말을 솔직하게 전하며 상대방에게 선택권을 주니 말이다.하지만 그런 투명한 여자이기에 연우진도 그녀와 함께 있으면 더 즐겁고 자꾸 그녀와 연락을 이어나가게 되는 걸 것이다.“나는 지영 씨랑 계속 연락하고 싶은데. 지영 씨는 그저 피해자일 뿐이었잖아요. 그러니까 죄라도 지은 사람처럼 말하지 말아요.”“내가 백연신 씨와 호텔에서 아무 일도 없었다고 하면 믿을 수 있어요?”“네, 지영 씨가 그렇다고 하면 그렇게 믿을게요.”연우진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했다. 진심이었으니까.만약 정말 뭔 일이 있었으면 한지영 쪽에서 먼저 솔직하게 얘기를 해줬을 것이다. 한지영은 그런 여자니까.연우진은 엘리베이터 안에서 문득 백연신의 얼굴을 떠올렸다. 확실히 한지영은 백연신과의 인연을 이미 지난 과거로만 보고 있는 듯했다.하지만 백연신은? 그 역시 그럴까? 이제는 고은채와의 결혼도 파기됐는데?생각에 잠긴 채 엘리베이터에서 나오던 연우진은 아파트 입구에 서 있는 남자를 보고 멈칫하며 발걸음을 멈췄다.잘 뻗은 기럭지에 고고해 보이는 눈앞의 남자는 다름 아닌 백연신이었다.‘이 사람이 왜 여기에...’연우진과 백연신은 어느 정도 거리를 둔 채 서로를 바라보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렇게 침묵이 계속되다 연우진은 놀란 마
한지영의 말대로 백연신은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다른 여자를 곁에 둘 수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예쁜 여자를 곁에 둔다고 해도 그는 그녀가 아니면 안 되는 남자였다. 꼭 한지영이여야만 하는 남자였다.처음 본 순간부터 줄곧 한지영만을 사랑해왔으니까, 이미 모든 마음을 다 그녀에게 줘버렸으니까.사실 5년 전에 한지영이 아닌 고은채의 손을 잡았을 때 속으로 판을 짜고 있었다고는 하나 앞으로가 어떨지는 생각해 본 적도 없었다.그때는 자신에게 미래가 있을지도 없을지도 확신하지 못했거니와 백씨 가문의 모든 걸 되찾고 고씨 가문을 무너뜨리는 데 성공할 수 있을지 말지도 미지수였으니까.당시의 그에게는 한 걸음 한 걸음이 다 깨진 얼음판을 걷는 것 같았다. 그래서 섣불리 한지영에게 약속을 건넬 수도 없었다.지난 5년이라는 시간 동안 백연신은 사람을 은밀히 붙이는 것으로 한지영의 소식을 접할 뿐 그녀의 앞에 나서지는 못했다. 그때는 아무리 보고 싶어도 참아야만 했으니까.그런데 인내의 시간을 겪고 드디어 그녀의 앞에 나설 자격을 갖췄는데 한지영의 마음은 그사이 식어버렸다.백연신은 그 생각에 또 한 번 쓴 미소를 지었다.그녀와 함께하고 싶어 한 선택이, 그녀를 되찾기 위한 인내가 한지영이 거부함으로써 완전히 물거품이 되어버렸다.‘한지영을 살려주는 것만으로도 만족해라 이건가...?’백연신은 어쩌면 당시 한지영을 살려달라고 간절하게 외쳤을 때 모든 소원권을 다 써버린 걸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그는 운전석에 앉은 채 한지영의 모습이 사라질 때까지, 아니, 사라진 뒤에도 여전히 그쪽으로 시선을 고정하며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그러다 얼마나 지났을까, 휴대폰 진동이 울려댔다.“회장님, 고은채 씨가 방금 S 시를 떠났습니다. 그리고 매스컴 쪽에도 더는 한지영 씨의 일상을 방해하지 않게 조치를 해뒀습니다.”“고씨 가문 쪽은 계속해서 지켜봐. 손 내밀어주는 가문이 있나.”“네, 알겠습니다.”백연신은 통화를 마친 후 휴대폰을 다시 집어넣었다.고씨 가문에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