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 헤어졌지.”강지혁이 젓가락을 내려놓았다.“너랑 헤어진 게 내 평생 가장 후회되는 일이야. 그래서 더 이상 그런 후회 하고 싶지 않아.”강지혁은 임유진이 그를 너무 많이 사랑해 무슨 일이 있어도 떠날 수 없게 만들 생각이다....저녁이 되고 임유진은 방 안에 있는 소파에 앉아 손에 든 보라색 드레스를 지그시 바라보았다.목 부분부터 팔까지 다 찢겨 있어 수선한다고 해도 처음처럼 그렇게 예쁘지는 않을 것이다.임유진은 너무나도 예뻤던 드레스가 지금 이 지경이 된 것에 죄책감을 느꼈다. 단지 드레스가 훼손돼서가 아닌 ‘현수’가 선물해 준거라서 더 그런 마음이 드는지도 모르겠다.강현수가 어릴 적 여자아이가 그녀라는 걸 모른다고 해도, 강현수가 이 드레스를 선물한 것에 큰 의미가 없다고 해도 결과적으로 그는 어릴 적 두 사람이 했던 약속을 결국 지켜내고야 말았다.임유진은 입술을 살짝 깨물고는 옆에 있는 책상 서랍을 뒤적거리며 반짇고리 함을 꺼내 들었다.사실 그녀는 아까 심심하던 차에 방 이곳저곳을 둘러보았다. 그러다 서랍에서 뜻밖에도 이 반짇고리 함을 발견하게 되었다.막 발견했을 때 케이스 위에는 한 층의 먼지가 쌓여있었다. 안에는 여느 반짇고리 함이 그렇듯 갖가지 색상의 실과 쪽 가위 그리고 여러 가지 길이의 바늘이 있었다. 실의 색상은 조금 바랬지만 끊어질 정도는 아니었고 쪽 가위도 오래된 것 치고는 잘 들었다.새것은 아닌 거로 보아 누군가가 쓴 것은 분명해 보였다.아까 강지혁이 얘기했던 이야기 속의 여자가 남기고 간 것일까?임유진은 색이 바랜 덕에 드레스 색과 흡사하게 되어버린 보라색 실을 집어 들고 바늘을 꺼내 수선을 시작했다.이미 엉망이 된 드레스이고 다시는 입지 못할 드레스였지만 그래도 이 드레스는 ‘현수’의 선물이자 약속이기에 이대로 쓰레기통에 버리고 싶지는 않았다.그녀는 한 땀 한 땀 ‘현수’와의 약속을 떠올리며 정성스럽게 바느질을 했다.그때 방문이 열리고 강지혁이 들어왔다. 그는 소파에 앉아 드레스를 수선하고 있는 그
임유진은 천천히 시선을 내리고는 손에 든 보라색 드레스를 가만히 바라보더니 다시 아무 말도 없이 수선 작업을 하기 시작했다.이에 강지혁의 얼굴에 걸려있던 웃음이 서서히 사라져갔다.“하지 마.”하지만 그녀는 그 말이 들리지 않는 건지 손을 계속 움직였다.강지혁의 얼굴은 점점 더 어두워지고 질투의 감정은 점점 더 강렬하게 그를 지배했다.지금 그녀의 두 눈에는 오직 이 드레스밖에 없는 듯, 아니, 오직 강현수밖에 없는 듯했다.“하지 말라고!”강지혁은 소리를 치며 그녀의 손에 든 드레스를 홱 하고 빼앗았다.“아!”그때 임유진이 외마디 신음을 냈다.강지혁이 거칠게 뺏어 든 바람에 바늘이 왼손 검지에 박혀버렸다. 살을 파고드는 찌릿한 느낌이 드는 순간 빨간 피가 스멀스멀 흘러나왔다.생각보다 세게 찔러 넣어 보통이라면 물방울 정도의 피만 맺혀 있었을 텐데 지금은 검지에서 피가 줄줄 흘러내려 그녀의 손가락을 타고 나무색 바닥에 뚝뚝 떨어졌다.그 모습을 본 강지혁은 얼른 손에 있는 드레스를 아무렇게나 던져버리고 무릎을 꿇은 채 임유진의 손을 잡았다. 그러고는 피가 흐르는 그녀의 검지를 망설임 없이 입에 넣었다.손끝에서 느껴지는 뜨겁고 말캉한 느낌에 임유진은 몸이 뻣뻣하게 굳어버렸다.그녀는 자기 눈앞에 있는 남자를 복잡한 눈길로 바라보았다.강지혁은 바닥에 무릎을 꿇고 미간을 찌푸린 채 시선을 내리고 있었다. 기나긴 속눈썹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그의 눈동자를 반쯤 가려버렸다.그리고 그의 얼굴에는 그녀를 향한 걱정과 속상함이 잔뜩 묻어있었다.강지혁은 지금 그녀를 걱정하고 있다.몇 분 후, 굳게 닫혔던 그의 입술이 천천히 열렸다. 다행히 아까처럼 피가 세게 흐르지는 않았지만 아직 조금씩 피가 올라오고 있었다.“아프지?”강지혁은 고개를 들어 그녀를 바라보았다.검은색 속눈썹이 위로 향하고 예쁜 두 눈동자가 드러났다.임유진은 잠깐 넋이 나갔다가 간신히 정신을 차리고 말했다.“괜찮아.”그러고는 서둘러 손을 빼려고 했다.하지만 강지혁은 그녀의 손을
“강지혁, 나는 네 생각대로만 움직이고 내 생각이나 자아가 있어서는 안 되는 거야. 널 화나게 해서도 안 되고, 그렇지? 너는 말로만 나를 사랑한다고 하면서 나를 한 번도 존중해 준 적이 없어.”임유진의 말에 강지혁이 움직임을 멈추고 고개를 들어 그녀를 바라보았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보였던 속상함 가득했던 얼굴이 지금은 말끔히 다 사라지고 무표정한 얼굴이 되어버렸다.그는 그렇게 한참을 바라보더니 드디어 천천히 입을 열었다.“너를 존중해주길 원해?”청량한 목소리가 방안에서 쓸쓸히 울려 퍼졌다.이에 임유진은 헛웃음을 터트렸다.“내가 바보 같았네. 애초에 네가 나를 여기로 데려와 가둬둔 순간부터 그런 걸 원해서는 안 되는 거였는데.”“존중해줄게. 네가 원하는 거 말만 하면 다 들어줄게. 대신 나만 바라봐. 나만 사랑하고 나만 생각해. 다른 남자 생각 같은 거 단 1초도 하지 마.”강지혁의 입에서 이런 말이 나왔다는 건 자존심이고 뭐고 다 버렸다는 것과 다름없었다.하지만 임유진은 아무런 동요도 없이 담담하게 말을 내뱉었다.“나는 널 사랑해야지만 네 존중을 얻을 수 있는 거야? 너를 사랑하지 않으면 내 자유와 감정 그리고 생각까지 전부 다 너한테 통제받아야 하는 거고? 그런 거야?”강지혁의 입술이 꾹 닫히고 얼굴이 점점 더 어두워져 갔다.임유진은 그런 그의 얼굴을 보고도 전혀 무서워하지도 물러서지도 않았다. 어쩌면 이미 물러설 만큼 물러서 더는 물러설 곳이 없는 것일지도 모르겠다.“만약 네가 줄 수 있는 존중이 그런 거라면, 그것이 전부라면 나는 네 존중 같은 거 필요 없어.”“그래? 필요 없단 말이지.”강지혁은 갑자기 몸을 일으켜 그녀를 번쩍 안아 들더니 침대가 있는 곳으로 성큼성큼 다가갔다.“뭐 하는 거야? 당장 내려놔!”임유진이 그의 품 안에서 발버둥 쳤다.“내 존중 같은 거 필요 없다며. 그러니 나도 이제부터 널 존중할 필요 없는 거 아니야?”강지혁은 이 말을 끝으로 그녀를 침대에 던져버리더니 힘줄이 돋은 손으로 넥타이를 아래
임유진은 지금 무서워하고 있다.그의 행동에 놀랐던 것일까?강지혁은 그녀에게 무서움을 심어주려 했던 게 맞다. 자신이 베푸는 친절이 얼마나 큰 것인지 만약 존중이 섞여 있지 않았더라면 그녀가 이곳에 들어온 순간부터 어떤 상황을 겪게 됐을지 똑똑히 알려줄 생각이었다.하지만 가녀린 몸을 덜덜 떨고 얼굴 가득 두려움이 서려 있는 그녀의 모습을 보자니 심장이 욱신거리고 마치 벌은 자기가 받고 있는 것 같은 느낌마저 들었다.강지혁은 손을 들어 그녀의 얼굴에 있는 눈물을 조심스럽게 닦아주었다.“다시는 너한테 이렇게 강압적으로 굴지 않을게.”임유진은 조금 놀란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그의 입에서 이런 말이 나올 줄은 몰랐다.그리고 자기가 이렇게 세게 울게 될 줄도 몰랐다.솔직히 이곳으로 들어왔을 때부터 언젠가는 이런 순간이 오지 않을까 생각했었다. 그때가 되면, 만약 정말 그에게 강제로 안긴다고 해도 감정을 싹 다 배제한 채로 있으면 된다고, 그러면 괜찮을 거라고 그렇게 생각했다.하지만... 막상 정말 아무런 반항도 못 하게 되는 지경에 이르자 감옥에 있었을 당시의 광경이 머릿속에 떠올라버렸다. 그때도 그녀는 이렇게 아무런 반항도 하지 못했고 다른 수감자의 발길질을 그저 받아낼 수밖에 없었다.자신이 마치 살아있는 인간이라기보다는 그들이 언제든 분풀이할 수 있는 샌드백이 된 것만 같았고 인간으로서의 존엄이 짓이겨지는 것만 같았다.임유진은 여전히 눈물을 흘리고 있었고 눈물 너머로 그를 바라보았다.강지혁은 그녀와 눈을 맞추고 말했다.“약속할게. 이건 믿어도 돼. 다시는 이런 일 없게 할게.”그녀의 눈물이, 그녀의 두려움이 이토록 무섭게 느껴질 줄은 몰랐다.그녀가 두려움을 멈출 수만 있다면 지금 당장이라도 머리를 조아리고 그녀의 발밑에 깔릴 수 있을 것 같았다....강현수의 본가.강현수의 아버지인 강재호는 눈앞에 있는 아들을 가만히 바라보았다.강현수는 태어난 그 순간부터 강재호의 자랑스러운 아들이었고 언제나 뭐든 척척 해내는 아들 덕에 남들 다
강재호는 붕대로 감싸져 있는 아들의 손가락을 보고는 혀를 찼다.고작 여자 하나 때문에 골절상을 입다니, 정말 기가 막힐 노릇이 아닐 수 없었다.“그 여자를 찾을 수만 있다면 남은 손가락이 어떻게 되든, 심지어 손 하나가 부러져도 상관없어요.”“너!”강현수의 말에 강재호의 분노가 머리끝까지 치솟았다.이에 한은정이 그의 손을 잡아 분노를 잠재우고 아들을 향해 말했다.“너희 아버지 화나게 하지 마. 그리고 강지혁이 그 여자한테 어떤 감정을 품고 있는지 모르는 것도 아니면서 너는 그 흙탕물에 뛰어들고 싶니?”강지혁의 집안이 S 시에서 절대적인 존재는 맞지만 강현수의 집안도 꿀릴 건 없었다. 한은정은 강지혁의 집안과 마찰을 빚는 게 무서운 것이 아니라 고작 여자 하나 때문에 이러는 아들이 이해가 안 갈 뿐이다. 그것도 수년간 그토록 찾아 헤맨 여자아이도 아니고 이제 알고 지낸 지 1년도 채 안 된 여자를 말이다.솔직히 어렸을 때 강현수를 구해줬던 여자아이가 아니면 임유진의 자리를 대체할 사람은 많았다.멀리 갈 것도 없이 연예계에서 시선 한번 돌리면 널리고 널린 것이 미인들이다.그런데 왜 그 많은 여자는 거들떠보지도 않고 하필이면 강지혁의 여자를 탐내는 것일까.강현수는 한은정을 바라보며 그녀가 경악할 만할 얘기를 꺼냈다.“그 흙탕물에 뛰어들지 않을 수가 없어요. 이미 임유진이라는 여자를 사랑하게 되어버렸으니까요.”“뭐... 너 지금 뭐라고 했니?”한은정은 놀라움 가득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이제껏 수많은 여자를 만나고도 좋아한다는 소리 한번 한 적 없는 강현수의 입에서 처음으로 한 여자를 사랑한다는 말이 튀어나왔다.“저 임유진을 사랑해요. 그 여자가 아니고서는 안 되는 지경까지 와버렸습니다.”강현수는 단호하게 자신의 마음을 고백했다.“그러니 그 여자 옆에 있는 남자가 강지혁이라도 물러서지 않을 거예요.”이미 강지혁에게 몇 번이고 양보했다. 그리고 지금 그는 그 어느 때보다 자기 마음에 확신을 가지고 있는 상태이다. 그러니 더 이상의 양
솔직히 눈 딱 감고 강지혁을 사랑하는 척해볼까 생각해 본 적이 있다. 그렇게 하면 어쩌면 이곳에서 나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하지만 그 ‘척’을 언제까지 할 수 있을까?속일 거면 평생을 속여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속았다는 것을 알아챈 그가 그때는 더 한 짓을 할지도 모르니까.게다가 무엇보다 임유진 본인이 그를 속이고 싶지 않았다. 이곳에서 못 나가는 한이 있더라도 감정을 속이고 싶지 않았다.임유진은 한숨을 한번 내쉬고는 저택 내부를 둘러보았다.저택은 무척이나 넓었고 위에는 다락방도 있었다. 마치 사극 드라마에서나 봤던 양반집을 그대로 옮겨온 것 같은 그런 느낌이었다.그리고 집 안에는 연꽃 모양의 물건들이 많이 놓여있었다.연꽃 모양의 도자기를 시작으로 나무 기둥과 벽에도 연꽃 그림이 있었고 가구에도 빠짐없이 연꽃이 그려져 있었다.심지어 뒷마당에는 연꽃이 피어있는 작은 연못도 있었다.연꽃이 필 계절은 이미 지났는데도 여기 있는 연꽃들은 너무 예쁘게 피어있어 조금 이상하기도 했다.집주인이 어지간히도 연꽃을 좋아하는 것 같았다.아니... 어쩌면 이곳에 갇혔던 여자가 연꽃을 좋아했을지도 모른다.임유진도 연꽃을 좋아하고 있고 그 이유는 연꽃이 고귀함과 깨달음의 상징이라서이다.임유진은 구경을 마치고 이리저리 걸어 다니며 강지혁을 찾아다녔다.이 저택에 갇힌 것은 맞지만 집 안에서는 아무런 제약 없이 돌아다닐 수 있다. 즉 이 저택 안에서만큼은 그녀는 ‘자유’였다.긴 복도를 거닐던 그때 제일 끝쪽에 있는 방을 발견하고 임유진의 발걸음이 멈췄다.며칠 전 강지혁이 이 복도에서 걸어 나오는 걸 본 적이 있다.방은 이것뿐이니 혹시 강지혁은 지금 이 방에 있는 건 아닐까?임유진은 일단 가볍게 방문을 두어 번 두드렸다.하지만 아무런 대답도 들려오지 않았고 그녀는 천천히 방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방안은 무척이나 깜깜하고 어두웠다.방은 크지 않았고 창문은 암막 커튼으로 전부 쳐져 있었다.그리고 방안의 인테리어는 무척이나 심플했다. 아니, 지나치게
“맞아. 그 두 사람이 널 찾으러 이곳에 온다고 해도 널 데려가지는 못해.”강지혁은 말을 마친 후 바지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고 그녀에게 건네주었다.이건 그녀의 것이 아니라 강지혁의 휴대폰이었다.다행히 임유진은 기억력이 좋았기에 한지영과 탁유미의 전화번호를 기억하고 있었다.임유진은 먼저 한지영에게 전화를 걸었다.한지영은 전화기 너머로 임유진의 목소리가 들리자마자 화들짝 놀라며 하마터면 휴대폰을 떨어트릴 뻔했다.“유진아, 너 지금 어디야?! 강지혁이 너 데려갔다는 말을 들었을 때 내가 얼마나 놀랐는지 알아? 강지혁 그 자식이 너한테 뭔 짓 한 거 아니지?! 그 개자식이 진짜! 이거 납치야, 납치! 범죄라고!”임유진은 한지영의 폭풍 욕설에 무척이나 당황하며 어쩔 줄을 몰랐다.전화를 걸기 전 강지혁은 그녀에게 스피커폰으로 전화하는 것을 요구했다. 즉 방금 한지영이 한 말을 강지혁이 전부 다 들었다는 소리였다.강지혁은 웃는 듯 마는 듯한 눈길로 휴대폰을 바라보았다.임유진은 한지영의 말이 혹시라도 그의 심기를 건드리게 될까 봐 서둘러 입을 열었다.“지영아, 나 괜찮아. 아무 일도 없어. 그러니까 내 걱정하지 말라고 전화한 거야. 그리고 내가 유미 언니 양육권 소송 맡기로 했는데 지금은 할 수 있을지 잘 모르겠어. 그래서 말인데 만약 일주일 뒤에도 나한테서 연락이 없으면 그때는 백연신 씨한테 부탁해서 유미 언니한테 변호사 붙여줄 수 있어?”임유진의 말에 한지영이 다급하게 물었다.“그게 무슨 소리야? 너 지금 대체 어디 있는 건데! 일주일 뒤에 연락이 없을 수도 있다는 말은 또 뭐고. 너 설마 지금 강지혁한테 감금이라도 당한 거야?”한지영의 연이은 질문에 임유진은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모르고 있다가 깊게 숨을 한번 들이견 후 최대한 침착하게 얘기했다.“지영아, 강지혁과의 일은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 그리고... 시간 날 때 유미 언니한테 신경 많이 써줘.”그 말을 끝으로 임유진은 전화를 끊어버렸다.그걸 본 강지혁이 그녀에
강지혁은 손을 내밀어 검을 꺼내 들었다.그 순간 임유진은 화들짝 놀라고 말았다. 그저 거치대에 놓여있을 때와 달리 사람 손에 들리자 어쩐지 한층 더 오싹한 한기 같은 것이 느껴졌기 때문이다.“전에 내가 너한테 얘기했지? 강씨 가문의 한 남자가 여자 한 명을 이곳에 가뒀다고. 그러다 그 여자가 자기를 가둔 그 남자를 사랑하게 됐다고. 하지만 그 이야기는 거기서 끝이 아니야. 그 여자가 남자를 사랑하게 된 건 맞지만 이곳에서 그 남자를 찔렀어. 그래서 이 저택에서 나간 거야.”강지혁은 또다시 담담하게 얘기를 꺼냈다.임유진은 심장이 철렁했다. 그 이야기에 이런 반전이 있었을 줄은 몰랐다.전에 그 얘기를 들었을 때는 그 여자가 강씨 가문의 남자를 사랑하게 돼서, 그래서 남자와 함께 이곳을 떠난 줄 알았다. 하지만 아니었다...왜일까? 왜 찔렀을까? 자책감 때문에? 정혼자와 좋은 연인 관계였지만 결국 자기를 가둔 남자를 사랑하게 돼서? 그래서 그런 선택을 했던 건가?임유진은 다시 한번 검을 바라보았다.역시 날 위에 있는 검은색 반점은 녹이 슨 것이 아니었다.이건 남자를 찔렀을 당시 튀었던 피가 분명했다.“날에 피가 튄 것 때문에... 피의 방인 거야?”“그것 때문만이 아니야.”강지혁은 맞은편 벽으로 걸어가 검은색 천을 아래로 세게 끌어내렸다.그러자 천 뒤에 가려져 있던 벽이 임유진의 앞에 드러났다.이 벽은 다른 벽과 달랐다. 오랜 기간 그대로 방치되어 당시 모습 그대로 남아 있었다. 그리고 그 벽 위에는 이미 변색한 핏자국들이 그대로 묻어 있었다.임유진은 순간 속이 울렁거려 금방이라도 토할 것만 같았다.이 벽은 여전히 그날을 기억하고 있었다.마치 오래된 증거처럼 그대로 남아 있었다.이 벽 때문에, 피 칠갑이 된 벽 때문에 이 방이 피의 방으로 불리게 된 걸까?“만약 너도 여기서 떠나고 싶으면 그 여자가 했던 것처럼 나를 찌르고 여기서 나가면 돼.”강지혁은 다시 임유진 쪽으로 걸어와 검의 손잡이 부분을 그녀 쪽으로 건넸다.“어떡할래?
강지혁은 수저를 들고 그녀가 해준 음식을 하나둘 입에 넣었다.분명히 흔히 볼 수 있는 가정 요리고 손에 들고 있는 것도 포크나 나이프가 아닌 그저 숟가락과 젓가락일 뿐인데 상대가 강지혁이라 그런지 꼭 고급스러운 레스토랑에서 식사하고 있는 것 같았다.임유진은 원래 강지혁이 밥을 다 먹은 뒤에 오늘 있었던 일을 얘기하려고 했다. 하지만 강지혁이 밥을 먹으며 먼저 선수를 쳐버렸다.“오늘 하마터면 떨어지는 화분에 다칠 뻔했다는 얘기 들었어. 무사해서 다행이야. 내일부터는 경호원을 두 명 더 붙여줄게.”임유진은 그 말에 눈을 두어 번 깜빡이며 어리둥절해 하다 이내 남편이 강지혁이라는 것을 깨닫고 납득했다는 표정을 지었다.아마 일이 터지고 5분도 안 돼 바로 강지혁에게 보고가 들어갔을 테니까.“응, 알겠어.”임유진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누가 화분을 떨어트린 건지 알아봐 달라고 했어. 아직 따로 연락이 오지는 않았지만.”“청소부가 한 짓이야.”“청소부?”임유진이 깜짝 놀라며 물었다.“벌써 조사를 마쳤어?”“당연한 거 아니야? 네 일인데.”만약 임유진의 몸에 생채기라도 났으면 강지혁은 아마 이성을 잃고 건물 전체를 폭파하고 관계자들까지 다 처리해버렸을 것이다.강지혁은 갑자기 젓가락을 내려놓더니 임유진의 양손을 덥석 잡았다.그녀의 손가락은 여전히 삐뚤빼뚤했다.임유진의 손을 이렇게 만든 사람은 진세령이고 소민준은 당시 진세령의 곁에서 가만히 구경만 했다.강지혁은 임유진의 손을 매만지다 문득 1시간 전에 봤던 청소부의 피범벅이 된 두 손을 떠올렸다.그는 다른 사람의 손은 피가 나든 잔인하게 잘리든 아주 조금의 연민도 들지 않았다. 하지만 임유진의 손은 볼 때마다 가슴이 아프고 또 울컥했다.“왜? 왜 그렇게 봐?”임유진은 강지혁이 손가락을 뚫어지게 보는 게 불편한지 손을 뒤로 빼며 거두어들이려고 했다.그녀 역시 다를 것 없는 여자라 사랑하는 사람 앞에서는 자신의 좋은 것만 보여주고 싶었다.“내 손 안 예뻐... 보지 마.”임유진의 손
“그래...”강지혁이 낮게 읊조렸다.“그래야 할 거야.”고이준은 저도 모르게 소민준이 매우 가엽게 느껴졌다. 만약 임유진이 정말 소민준을 동정하면 그때는 지금 하고 있는 택배 기사 일도 못 하게 될지도 모르니까.“고 비서, 누가 저 여자한테 돈을 쥐여주고 유진이를 해할 계획을 세운 건지 알아내.”강지혁이 차가운 목소리로 지시했다.“네, 회장님.”고이준이 얼른 답했다.“그리고 S 시에서 제일 실력 좋은 변호사를 고용해서 유진이와 권건우 변호사 고소 건에 붙여. 김승수한테 지시를 내리는 다른 누군가가 있는 건 아닌지도 한번 알아보고.”고이준에게 김승수의 뒷조사를 맡긴 건 이유가 있었다.임유진이 강지혁의 와이프고 현 강씨 가문의 유일한 안주인인 걸 알고도 고소를 한 건 누가 봐도 이상했으니까. 상식적인 인간이라면 강씨 가문을 상대로 덤빌 리가 없다.게다가 김승수가 억울하다는 당시의 사건을 강지혁도 한번 훑어봤지만 임유진의 말대로 증거가 확실했고 결과 역시 납득 가능한 결과였다.즉 그렇다는 건 김승수에게 다른 목적이 있다는 것이다. 또 혹은 김승수를 뒤에서 조종하고 있는 누군가에게 다른 목적이 있을 수도 있고 말이다.하지만 이유가 뭐가 됐든 임유진을 건드린 이상 강지혁이 손을 놓고 있을 리가 없다. 그에게는 임유진이 목숨줄과도 같은 존재니까.“네, 알겠습니다.”임유진이 강지혁에게 있어 얼마나 중요한 사람인지 고이준은 너무나도 잘 알고 있다. 다만 요즘 따라 부쩍 이상한 위화감 같은 것이 느껴졌다.임유진을 대하는 강지혁의 태도가 꼭 기억을 잃기 전의 강지혁 같았기 때문이다. 꼭 기억을 다 되찾은 것처럼 말이다.강씨 저택.강지혁은 현관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가 마침 임유진과 두 아이들이 거실에서 동요에 맞춰 춤을 추고 있는 모습을 보게 되었다.현이는 흥분한 건지 얼굴이 빨개진 채로 깔깔거리며 춤을 추고 있었고 무뚝뚝하던 율이도 볼을 살짝 붉히며 어색하게 몸을 좌우로 흔들고 있었다.몸만 보면 썩 내키지 않아 하는 것 같지만 미소를 띠고
강지혁은 여자를 무섭게 노려보더니 이내 곁에 있는 경호원에게 지시를 내렸다.“두 번 다시 손에 뭘 들 수 없게 만들어놓고 경찰에 넘겨.”“네, 알겠습니다.”청소부는 그들의 대화에 얼굴이 새하얗게 질려버렸다.‘지, 지금 내 손을 부러트리려는 건가?’그녀는 이런 무서운 인간을 만날 줄 알았으면 차라리 경찰에게 잡히는 것이 더 나았겠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잘못했습니다! 다시는 안 그럴게요! 제가... 제가 알아서 경찰서로 가서 자수하겠습니다. 그러니까 제발...!”하지만 간절한 그녀의 부탁에도 강지혁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점점 더 얼굴이 차가워지기만 할 뿐이었다.사실 청소부는 양손만 부러지는 것에 감사해야 한다. 만약 그녀가 던진 화분으로 임유진이 큰 상처를 입었으면 그때는 양손은 물론이고 몸 전체가 너덜너덜해진 채 죽으니만 못한 삶은 살았을 테니까.“으아아악!!”그녀의 절규와 함께 강지혁은 유유히 현장을 빠져나왔다. 그리고 고이준도 곧바로 그의 뒤를 따라나섰다.바로 앞에 세워진 차량에 올라탄 후 고이준은 곧바로 강지혁에게 자료 하나를 건넸다.“소민준 씨의 지난 5년간 행적입니다. 몇 년 전부터 배달 기사 일을 하는 것으로 확인이 됐고 오늘은 우연히 건물 앞을 지나가다 사모님을 구한 것으로 보입니다. 사모님께서는 감사의 뜻으로 소민준 씨를 병원에 보냈고 손목 골절로 인한 치료 비용을 전액 다 부담해주셨습니다.”강지혁은 어둡게 가라앉은 얼굴로 수중의 자료를 훑어보았다. 차 안의 분위기는 그야말로 얼음장 같았다.“참 기막힌 우연이야. 안 그래?”그때 줄곧 입을 다물고 있던 강지혁의 입에서 뜬금없는 한마디가 흘러나왔다.“네... 네.”고이준은 식은땀을 흘리며 룸미러로 강지혁의 눈치를 봤다. ‘혹시 소민준이 사모님을 구해준 것에 질투라도 하는 건가...?’“CCTV는?”“네, 여기 있습니다.”고이준은 얼른 휴대폰을 꺼내 경호원이 보내준 CCTV 영상의 일부를 틀어 강지혁에게 건넸다.영상 속 소민준은 화분이 떨어짐과 동시에
경비원은 그 말에 시선을 내려 바닥에 떨어진 산산조각이 난 화분을 보고는 그제야 얼른 손을 놓아주었다.임유진은 경호원에게 소민준의 손목을 봐달라고 했고 경호원은 알겠다며 그의 손목을 자세히 살폈다.“사모님, 아무래도 골절인 것 같습니다.”“그럼 지금 당장 병원으로 데려가 치료를 받게 하세요.”“네, 알겠습니다.”그때 휴대폰이 울렸고 임유진은 경호원에게 가보라는 손짓을 한 후 이내 전화를 받았다.무슨 얘기를 들은 건지 그녀는 전화를 받은 지 얼마 안 돼 곧바로 심각한 얼굴을 했다.“네,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통화를 마친 후 임유진은 건물이 아닌 법원으로 향했다.잠시 후, 임유진이 법원에서 나왔을 때 마침 소민준을 병원으로 데려간 경호원으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검사를 받아본 결과 다행히 심각한 상처는 아니고 한 달 정도면 완전히 회복될 거라는 내용이었다.“알겠어요. 치료비는 다 제가 책임진다고 하고 혹시 다른 무언가의 보상을 원하면 저한테 따로 연락 주세요.”“네, 사모님.”임유진은 전화를 끊은 후 휴대폰을 집어넣는 것이 아닌 권건우에게 전화를 걸었다.“스승님, 죄송해요. 아무래도 당분간은 좀 시끄러워질 것 같아요.”“들었다. 김승수가 우리 둘을 고소했다지? 걱정할 것 없어. 우리는 그 사건에 한 점 부끄럼 없이 임했으니까. 그보다 요즘 인터넷에 떠드는 루머 말인데 나야 다 늙어서 그런 건 전혀 신경이 안 쓰인다고 하지만 너는 남편과 재회한 지도 얼마 안 됐는데...”“걱정하지 마세요. 혁이는 스승님과 제 사이 오해 안 해요.”임유진의 말에 권건우는 안심한 듯 미소를 지었다.“그럼 다행이고.”그날 저녁, 임유진이 집에 돌아오자마자 집사가 다가와 말했다.“회장님은 오늘 일 때문에 조금 늦으신다고 먼저 아이들과 식사를 하시라고 하셨습니다.”“네, 알겠어요.”임유진은 대수롭지 않게 고개를 끄덕이며 아이들과 밥 먹을 준비를 했다. 일 때문에 늦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니까.그 시각, 강지혁은 냉기를 풍기며 차가운 시선으로 눈앞
“위험해!”등 뒤로 누군가의 다급한 외침이 들려왔다.임유진은 미처 상황을 파악하지도 못한 채 누군가의 품에 안겨 바닥에 나뒹굴었다. 그녀를 구해준 누군가는 쓰러지는 그 순간에도 양손으로 그녀를 지켜주고 있었다.“사모님!”“사모님!”다급한 발걸음 소리와 함께 경호원과 기사들이 큰소리로 외치며 다가왔다.임유진은 그들의 소리에 그제야 정신을 차렸고 경호원의 부축으로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난 괜찮아요.”그녀는 말을 마치고는 고개를 옆으로 돌려 고개를 숙인 채 자리에서 일어나며 몸에 묻은 먼지를 툭툭 털어내는 남자를 바라보았다.“괜찮으세요? 구해주셔서 정말 감사...”임유진은 말을 하다가 남자가 고개를 드는 것을 보고 저도 모르게 흠칫하며 말을 멈추고 말았다.그녀를 구해준 건 다름 아닌 소민준이었다.소씨 가문의 장남이자 한때는 그녀의 남자친구였으며 진세령의 약혼자이기도 했던 그 소민준 말이다.하지만 지금의 그는 5년 전과는 완전히 다른 모습을 하고 있었다.색이 다 바랜 낡아빠진 옷에 더러운 운동화, 세월을 정통으로 맞은 것 같은 얼굴에 새치 가득한 머리까지, 지금의 그는 도무지 30대 중반이라고는 믿기지 않는 모습을 하고 있었다.그래도 한때는 상류층에 있었던 사람인데 지금은 일반 시민도 아닌 제일 아래 계층에 있는 사람처럼 보였다.고개를 든 소민준은 눈앞에 있는 사람이 임유진이라는 것을 보고는 마찬가지로 조금 놀란 듯 움찔했다. 그러고는 곧바로 쓴웃음을 지었다.“너였구나. 다시 이곳으로 돌아왔다는 기사를 봤어. 이런 식으로 만나게 될 줄은 몰랐는데.”“너...”임유진은 뭐라 말을 하고 싶었지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소민준은 당시 그녀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줬고 그녀가 절망의 끝에 자살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궁지까지 몰아붙였으며 두 번 다시 사랑 같은 건 하고 싶지 않게끔 만들어놓기도 했다.아마 강지혁이 아니었다면 임유진은 지금도 여전히 과거의 상처에 매달려 스스로를 고립시키며 살았을 것이다.하지만...하지만
직장 동료들은 한지영에게 위로를 건네며 은근히 그녀에게 잘 보이려는 듯한 말투로 얘기했다.심지어 어떤 사람은 아예 대놓고 그녀에게 백연신과의 사이를 묻기도 했다.“그럼 지영 씨는 백연신 씨랑 다시 만나는 거예요?”“그날 기자들 무리에서 지영 씨 손을 덥석 잡고 차로 끌고 가는데 내가 다 설렜지 뭐예요? 완전 현실판 왕자님 아니에요?”“그럼 앞으로 지영 씨를 뭐라 불러야 하나?”“백연신 씨가 회장님이니 당연히 회장 사모님 아니겠어요?”한지영은 직원들의 태도가 바뀐 게 전부 백연신 때문이라는 걸 알고 있다. 이런 상황을 처음 겪는 것도 아니었으니까.“아니요. 백연신 씨와는 아무 사이도 아니에요. 그러니까 괜한 추측은 하지 말아주세요. 그리고 저, 사귀는 사람 따로 있어요.”한지영은 차가운 목소리로 대꾸했고 이에 사람들은 어색하게 웃으며 서로 눈빛을 주고받더니 금방 다시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옆에서 떠드는 사람들이 없으니 이제야 살 것 같았다.어제 집으로 돌아갔을 때 백연신은 끝까지 나타나지 않았다. 그저 경호원을 통해 그녀에게 전언만 남겼다.“회장님께서 더는 걱정하지 않으셔도 된다고, 앞으로도 쭉 전과 같이 아무 일도 없을 거라고 하셨습니다.”전과 같다는 건 백연신 역시 더는 그녀 앞에 나타나지 않을 거라는 건가?한지영은 그 생각에 갑자기 울컥하며 눈물이 차오르려는 것이 느껴졌다. 하지만 그녀는 곧바로 다시 마음을 다잡으며 스스로에게 되뇌었다.이건 자신이 바란 거라고, 그러니 아무것도 슬퍼할 것 없다고 말이다.‘그래, 잘 된 거야. 이게 제일 좋은 결말이야. 증오도 없고 더 이상의 미움도 없는... 그냥 좋은 추억만 간직한 지금이 제일 좋은 끝이야.’다시 그와 연인이 되었다가 또다시 고난에 부딪혀 헤어지게 되면 그때는 완전히 원수지간이 될지도 모르니 차라리 아무것도 시작하지 않는 게 백배는 더 나았다.한지영은 더 이상 백연신과 함께 할 용기가 없었다. 아무리 그가 사랑을 외쳐도 아무리 줄곧 그녀만 사랑해왔다고 해도 이제는 그 마음을
연우진은 그 어느 날 자신이 백연신의 질투 대상이 될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지영 씨한테 마음이 남은 거라면 내가 아닌 지영 씨와 얘기를 하세요.”연우진이 차분한 목소리로 말을 이어갔다.“그리고 내가 지영 씨와 만나고 싶다고 해도 지영 씨가 받아주지 않으면 함께 하지 못해요. 이건 백연신 씨도 마찬가지고요. 백연신 씨가 여전히 지영 씨를 좋아한다고 해도 지영 씨가 받아주지 않으면 두 사람 역시 함께 못해요. 선택권은 지영 씨한테 있으니까.”백연신은 주먹을 말아쥐며 다시 물었다.“지영이와 만날 건지에 대한 대답만 해.”연우진은 한숨을 한번 내쉬었다. 아무래도 대답을 해주지 않으면 순순히 보내주지 않을 듯하다.“지영 씨는 좋은 사람입니다. 이대로 감정이 싹트면 나로서는 당연히 지영 씨와 함께하고 싶겠죠.”“한지영의 곁에 있을 수 있는 남자는 모든 걸 다 내어줄 수 있을 정도로 한지영을 사랑하는 사람이 아니면 안 돼.”백연신이 경고하듯 낮게 읊조렸다.“어째 내가 모든 걸 다 내어줄 정도로 한지영 씨를 사랑하지 않으면 우리 둘이 함께하는 걸 방해하겠다는 얘기로 들립니다만?”연우진의 질문에 백연신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지만 냉랭하고 차가운 눈빛을 보면 그 대답이 뭔지 알 수 있을 것도 같았다.“백연신 씨는 지영 씨를 위해 모든 걸 다 내어줄 수 있습니까? 그 정도로 사랑한다면 여기서 나한테 이러지 말고 다시 한번 지영 씨 마음에 들기 위해 노력을 해보는 게 어떨까요?”백연신은 그의 말이 끝난 순간 갑자기 손을 뻗어 연우진의 멱살을 잡았다. 그러고는 이대로 갈기갈기 찢어버릴 듯한 눈빛으로 그를 노려보았다.“너는 아무것도 몰라. 나라고...”하지만 그는 말을 다 잇지 못했다. 또한 멱살을 잡았던 손도 힘없이 풀었다.질투와 분노로 가득했던 눈동자가 한순간에 어둠에 잠겨버린 듯 시들어졌다.“한지영한테 잘해. 만약 지영이한테 상처를 주면 그때는 사는 게 사는 것 같지 않다는 게 뭔지 똑똑히 알려주지. 내 말 허투루 듣지 마.”말을 마친 후
백연신은 그 생각에 얼굴을 한껏 일그러트렸다. 질투와 분노, 슬픔과 고통의 감정들이 소용돌이치며 그의 얼굴에 담겼다.한지영의 집에서 나왔을 때 연우진은 꽤 편안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그는 몇 시간 전에 한지영에게 전화를 걸었다가 무사히 집에 도착했다는 말을 듣고 바로 그녀를 찾으러 집까지 왔다.다행히 사건은 무사히 일단락되었고 한지영도 예전의 일상을 다시 되찾은 것처럼 보였다.“우진 씨, 그... 나랑 더는 연락하고 싶지 않으면 언제든지 말해줘요. 난 괜찮으니까.”연우진은 한지영의 집에 도착하자마자 들은 그녀의 말을 떠올리고는 저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가끔 보면 한지영은 꼭 34살이 아닌 4살짜리 아이 같았다. 이런 상황에서도 마음속의 말을 솔직하게 전하며 상대방에게 선택권을 주니 말이다.하지만 그런 투명한 여자이기에 연우진도 그녀와 함께 있으면 더 즐겁고 자꾸 그녀와 연락을 이어나가게 되는 걸 것이다.“나는 지영 씨랑 계속 연락하고 싶은데. 지영 씨는 그저 피해자일 뿐이었잖아요. 그러니까 죄라도 지은 사람처럼 말하지 말아요.”“내가 백연신 씨와 호텔에서 아무 일도 없었다고 하면 믿을 수 있어요?”“네, 지영 씨가 그렇다고 하면 그렇게 믿을게요.”연우진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했다. 진심이었으니까.만약 정말 뭔 일이 있었으면 한지영 쪽에서 먼저 솔직하게 얘기를 해줬을 것이다. 한지영은 그런 여자니까.연우진은 엘리베이터 안에서 문득 백연신의 얼굴을 떠올렸다. 확실히 한지영은 백연신과의 인연을 이미 지난 과거로만 보고 있는 듯했다.하지만 백연신은? 그 역시 그럴까? 이제는 고은채와의 결혼도 파기됐는데?생각에 잠긴 채 엘리베이터에서 나오던 연우진은 아파트 입구에 서 있는 남자를 보고 멈칫하며 발걸음을 멈췄다.잘 뻗은 기럭지에 고고해 보이는 눈앞의 남자는 다름 아닌 백연신이었다.‘이 사람이 왜 여기에...’연우진과 백연신은 어느 정도 거리를 둔 채 서로를 바라보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렇게 침묵이 계속되다 연우진은 놀란 마
한지영의 말대로 백연신은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다른 여자를 곁에 둘 수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예쁜 여자를 곁에 둔다고 해도 그는 그녀가 아니면 안 되는 남자였다. 꼭 한지영이여야만 하는 남자였다.처음 본 순간부터 줄곧 한지영만을 사랑해왔으니까, 이미 모든 마음을 다 그녀에게 줘버렸으니까.사실 5년 전에 한지영이 아닌 고은채의 손을 잡았을 때 속으로 판을 짜고 있었다고는 하나 앞으로가 어떨지는 생각해 본 적도 없었다.그때는 자신에게 미래가 있을지도 없을지도 확신하지 못했거니와 백씨 가문의 모든 걸 되찾고 고씨 가문을 무너뜨리는 데 성공할 수 있을지 말지도 미지수였으니까.당시의 그에게는 한 걸음 한 걸음이 다 깨진 얼음판을 걷는 것 같았다. 그래서 섣불리 한지영에게 약속을 건넬 수도 없었다.지난 5년이라는 시간 동안 백연신은 사람을 은밀히 붙이는 것으로 한지영의 소식을 접할 뿐 그녀의 앞에 나서지는 못했다. 그때는 아무리 보고 싶어도 참아야만 했으니까.그런데 인내의 시간을 겪고 드디어 그녀의 앞에 나설 자격을 갖췄는데 한지영의 마음은 그사이 식어버렸다.백연신은 그 생각에 또 한 번 쓴 미소를 지었다.그녀와 함께하고 싶어 한 선택이, 그녀를 되찾기 위한 인내가 한지영이 거부함으로써 완전히 물거품이 되어버렸다.‘한지영을 살려주는 것만으로도 만족해라 이건가...?’백연신은 어쩌면 당시 한지영을 살려달라고 간절하게 외쳤을 때 모든 소원권을 다 써버린 걸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그는 운전석에 앉은 채 한지영의 모습이 사라질 때까지, 아니, 사라진 뒤에도 여전히 그쪽으로 시선을 고정하며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그러다 얼마나 지났을까, 휴대폰 진동이 울려댔다.“회장님, 고은채 씨가 방금 S 시를 떠났습니다. 그리고 매스컴 쪽에도 더는 한지영 씨의 일상을 방해하지 않게 조치를 해뒀습니다.”“고씨 가문 쪽은 계속해서 지켜봐. 손 내밀어주는 가문이 있나.”“네, 알겠습니다.”백연신은 통화를 마친 후 휴대폰을 다시 집어넣었다.고씨 가문에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