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 헤어졌지.”강지혁이 젓가락을 내려놓았다.“너랑 헤어진 게 내 평생 가장 후회되는 일이야. 그래서 더 이상 그런 후회 하고 싶지 않아.”강지혁은 임유진이 그를 너무 많이 사랑해 무슨 일이 있어도 떠날 수 없게 만들 생각이다....저녁이 되고 임유진은 방 안에 있는 소파에 앉아 손에 든 보라색 드레스를 지그시 바라보았다.목 부분부터 팔까지 다 찢겨 있어 수선한다고 해도 처음처럼 그렇게 예쁘지는 않을 것이다.임유진은 너무나도 예뻤던 드레스가 지금 이 지경이 된 것에 죄책감을 느꼈다. 단지 드레스가 훼손돼서가 아닌 ‘현수’가 선물해 준거라서 더 그런 마음이 드는지도 모르겠다.강현수가 어릴 적 여자아이가 그녀라는 걸 모른다고 해도, 강현수가 이 드레스를 선물한 것에 큰 의미가 없다고 해도 결과적으로 그는 어릴 적 두 사람이 했던 약속을 결국 지켜내고야 말았다.임유진은 입술을 살짝 깨물고는 옆에 있는 책상 서랍을 뒤적거리며 반짇고리 함을 꺼내 들었다.사실 그녀는 아까 심심하던 차에 방 이곳저곳을 둘러보았다. 그러다 서랍에서 뜻밖에도 이 반짇고리 함을 발견하게 되었다.막 발견했을 때 케이스 위에는 한 층의 먼지가 쌓여있었다. 안에는 여느 반짇고리 함이 그렇듯 갖가지 색상의 실과 쪽 가위 그리고 여러 가지 길이의 바늘이 있었다. 실의 색상은 조금 바랬지만 끊어질 정도는 아니었고 쪽 가위도 오래된 것 치고는 잘 들었다.새것은 아닌 거로 보아 누군가가 쓴 것은 분명해 보였다.아까 강지혁이 얘기했던 이야기 속의 여자가 남기고 간 것일까?임유진은 색이 바랜 덕에 드레스 색과 흡사하게 되어버린 보라색 실을 집어 들고 바늘을 꺼내 수선을 시작했다.이미 엉망이 된 드레스이고 다시는 입지 못할 드레스였지만 그래도 이 드레스는 ‘현수’의 선물이자 약속이기에 이대로 쓰레기통에 버리고 싶지는 않았다.그녀는 한 땀 한 땀 ‘현수’와의 약속을 떠올리며 정성스럽게 바느질을 했다.그때 방문이 열리고 강지혁이 들어왔다. 그는 소파에 앉아 드레스를 수선하고 있는 그
임유진은 천천히 시선을 내리고는 손에 든 보라색 드레스를 가만히 바라보더니 다시 아무 말도 없이 수선 작업을 하기 시작했다.이에 강지혁의 얼굴에 걸려있던 웃음이 서서히 사라져갔다.“하지 마.”하지만 그녀는 그 말이 들리지 않는 건지 손을 계속 움직였다.강지혁의 얼굴은 점점 더 어두워지고 질투의 감정은 점점 더 강렬하게 그를 지배했다.지금 그녀의 두 눈에는 오직 이 드레스밖에 없는 듯, 아니, 오직 강현수밖에 없는 듯했다.“하지 말라고!”강지혁은 소리를 치며 그녀의 손에 든 드레스를 홱 하고 빼앗았다.“아!”그때 임유진이 외마디 신음을 냈다.강지혁이 거칠게 뺏어 든 바람에 바늘이 왼손 검지에 박혀버렸다. 살을 파고드는 찌릿한 느낌이 드는 순간 빨간 피가 스멀스멀 흘러나왔다.생각보다 세게 찔러 넣어 보통이라면 물방울 정도의 피만 맺혀 있었을 텐데 지금은 검지에서 피가 줄줄 흘러내려 그녀의 손가락을 타고 나무색 바닥에 뚝뚝 떨어졌다.그 모습을 본 강지혁은 얼른 손에 있는 드레스를 아무렇게나 던져버리고 무릎을 꿇은 채 임유진의 손을 잡았다. 그러고는 피가 흐르는 그녀의 검지를 망설임 없이 입에 넣었다.손끝에서 느껴지는 뜨겁고 말캉한 느낌에 임유진은 몸이 뻣뻣하게 굳어버렸다.그녀는 자기 눈앞에 있는 남자를 복잡한 눈길로 바라보았다.강지혁은 바닥에 무릎을 꿇고 미간을 찌푸린 채 시선을 내리고 있었다. 기나긴 속눈썹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그의 눈동자를 반쯤 가려버렸다.그리고 그의 얼굴에는 그녀를 향한 걱정과 속상함이 잔뜩 묻어있었다.강지혁은 지금 그녀를 걱정하고 있다.몇 분 후, 굳게 닫혔던 그의 입술이 천천히 열렸다. 다행히 아까처럼 피가 세게 흐르지는 않았지만 아직 조금씩 피가 올라오고 있었다.“아프지?”강지혁은 고개를 들어 그녀를 바라보았다.검은색 속눈썹이 위로 향하고 예쁜 두 눈동자가 드러났다.임유진은 잠깐 넋이 나갔다가 간신히 정신을 차리고 말했다.“괜찮아.”그러고는 서둘러 손을 빼려고 했다.하지만 강지혁은 그녀의 손을
“강지혁, 나는 네 생각대로만 움직이고 내 생각이나 자아가 있어서는 안 되는 거야. 널 화나게 해서도 안 되고, 그렇지? 너는 말로만 나를 사랑한다고 하면서 나를 한 번도 존중해 준 적이 없어.”임유진의 말에 강지혁이 움직임을 멈추고 고개를 들어 그녀를 바라보았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보였던 속상함 가득했던 얼굴이 지금은 말끔히 다 사라지고 무표정한 얼굴이 되어버렸다.그는 그렇게 한참을 바라보더니 드디어 천천히 입을 열었다.“너를 존중해주길 원해?”청량한 목소리가 방안에서 쓸쓸히 울려 퍼졌다.이에 임유진은 헛웃음을 터트렸다.“내가 바보 같았네. 애초에 네가 나를 여기로 데려와 가둬둔 순간부터 그런 걸 원해서는 안 되는 거였는데.”“존중해줄게. 네가 원하는 거 말만 하면 다 들어줄게. 대신 나만 바라봐. 나만 사랑하고 나만 생각해. 다른 남자 생각 같은 거 단 1초도 하지 마.”강지혁의 입에서 이런 말이 나왔다는 건 자존심이고 뭐고 다 버렸다는 것과 다름없었다.하지만 임유진은 아무런 동요도 없이 담담하게 말을 내뱉었다.“나는 널 사랑해야지만 네 존중을 얻을 수 있는 거야? 너를 사랑하지 않으면 내 자유와 감정 그리고 생각까지 전부 다 너한테 통제받아야 하는 거고? 그런 거야?”강지혁의 입술이 꾹 닫히고 얼굴이 점점 더 어두워져 갔다.임유진은 그런 그의 얼굴을 보고도 전혀 무서워하지도 물러서지도 않았다. 어쩌면 이미 물러설 만큼 물러서 더는 물러설 곳이 없는 것일지도 모르겠다.“만약 네가 줄 수 있는 존중이 그런 거라면, 그것이 전부라면 나는 네 존중 같은 거 필요 없어.”“그래? 필요 없단 말이지.”강지혁은 갑자기 몸을 일으켜 그녀를 번쩍 안아 들더니 침대가 있는 곳으로 성큼성큼 다가갔다.“뭐 하는 거야? 당장 내려놔!”임유진이 그의 품 안에서 발버둥 쳤다.“내 존중 같은 거 필요 없다며. 그러니 나도 이제부터 널 존중할 필요 없는 거 아니야?”강지혁은 이 말을 끝으로 그녀를 침대에 던져버리더니 힘줄이 돋은 손으로 넥타이를 아래
임유진은 지금 무서워하고 있다.그의 행동에 놀랐던 것일까?강지혁은 그녀에게 무서움을 심어주려 했던 게 맞다. 자신이 베푸는 친절이 얼마나 큰 것인지 만약 존중이 섞여 있지 않았더라면 그녀가 이곳에 들어온 순간부터 어떤 상황을 겪게 됐을지 똑똑히 알려줄 생각이었다.하지만 가녀린 몸을 덜덜 떨고 얼굴 가득 두려움이 서려 있는 그녀의 모습을 보자니 심장이 욱신거리고 마치 벌은 자기가 받고 있는 것 같은 느낌마저 들었다.강지혁은 손을 들어 그녀의 얼굴에 있는 눈물을 조심스럽게 닦아주었다.“다시는 너한테 이렇게 강압적으로 굴지 않을게.”임유진은 조금 놀란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그의 입에서 이런 말이 나올 줄은 몰랐다.그리고 자기가 이렇게 세게 울게 될 줄도 몰랐다.솔직히 이곳으로 들어왔을 때부터 언젠가는 이런 순간이 오지 않을까 생각했었다. 그때가 되면, 만약 정말 그에게 강제로 안긴다고 해도 감정을 싹 다 배제한 채로 있으면 된다고, 그러면 괜찮을 거라고 그렇게 생각했다.하지만... 막상 정말 아무런 반항도 못 하게 되는 지경에 이르자 감옥에 있었을 당시의 광경이 머릿속에 떠올라버렸다. 그때도 그녀는 이렇게 아무런 반항도 하지 못했고 다른 수감자의 발길질을 그저 받아낼 수밖에 없었다.자신이 마치 살아있는 인간이라기보다는 그들이 언제든 분풀이할 수 있는 샌드백이 된 것만 같았고 인간으로서의 존엄이 짓이겨지는 것만 같았다.임유진은 여전히 눈물을 흘리고 있었고 눈물 너머로 그를 바라보았다.강지혁은 그녀와 눈을 맞추고 말했다.“약속할게. 이건 믿어도 돼. 다시는 이런 일 없게 할게.”그녀의 눈물이, 그녀의 두려움이 이토록 무섭게 느껴질 줄은 몰랐다.그녀가 두려움을 멈출 수만 있다면 지금 당장이라도 머리를 조아리고 그녀의 발밑에 깔릴 수 있을 것 같았다....강현수의 본가.강현수의 아버지인 강재호는 눈앞에 있는 아들을 가만히 바라보았다.강현수는 태어난 그 순간부터 강재호의 자랑스러운 아들이었고 언제나 뭐든 척척 해내는 아들 덕에 남들 다
강재호는 붕대로 감싸져 있는 아들의 손가락을 보고는 혀를 찼다.고작 여자 하나 때문에 골절상을 입다니, 정말 기가 막힐 노릇이 아닐 수 없었다.“그 여자를 찾을 수만 있다면 남은 손가락이 어떻게 되든, 심지어 손 하나가 부러져도 상관없어요.”“너!”강현수의 말에 강재호의 분노가 머리끝까지 치솟았다.이에 한은정이 그의 손을 잡아 분노를 잠재우고 아들을 향해 말했다.“너희 아버지 화나게 하지 마. 그리고 강지혁이 그 여자한테 어떤 감정을 품고 있는지 모르는 것도 아니면서 너는 그 흙탕물에 뛰어들고 싶니?”강지혁의 집안이 S 시에서 절대적인 존재는 맞지만 강현수의 집안도 꿀릴 건 없었다. 한은정은 강지혁의 집안과 마찰을 빚는 게 무서운 것이 아니라 고작 여자 하나 때문에 이러는 아들이 이해가 안 갈 뿐이다. 그것도 수년간 그토록 찾아 헤맨 여자아이도 아니고 이제 알고 지낸 지 1년도 채 안 된 여자를 말이다.솔직히 어렸을 때 강현수를 구해줬던 여자아이가 아니면 임유진의 자리를 대체할 사람은 많았다.멀리 갈 것도 없이 연예계에서 시선 한번 돌리면 널리고 널린 것이 미인들이다.그런데 왜 그 많은 여자는 거들떠보지도 않고 하필이면 강지혁의 여자를 탐내는 것일까.강현수는 한은정을 바라보며 그녀가 경악할 만할 얘기를 꺼냈다.“그 흙탕물에 뛰어들지 않을 수가 없어요. 이미 임유진이라는 여자를 사랑하게 되어버렸으니까요.”“뭐... 너 지금 뭐라고 했니?”한은정은 놀라움 가득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이제껏 수많은 여자를 만나고도 좋아한다는 소리 한번 한 적 없는 강현수의 입에서 처음으로 한 여자를 사랑한다는 말이 튀어나왔다.“저 임유진을 사랑해요. 그 여자가 아니고서는 안 되는 지경까지 와버렸습니다.”강현수는 단호하게 자신의 마음을 고백했다.“그러니 그 여자 옆에 있는 남자가 강지혁이라도 물러서지 않을 거예요.”이미 강지혁에게 몇 번이고 양보했다. 그리고 지금 그는 그 어느 때보다 자기 마음에 확신을 가지고 있는 상태이다. 그러니 더 이상의 양
솔직히 눈 딱 감고 강지혁을 사랑하는 척해볼까 생각해 본 적이 있다. 그렇게 하면 어쩌면 이곳에서 나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하지만 그 ‘척’을 언제까지 할 수 있을까?속일 거면 평생을 속여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속았다는 것을 알아챈 그가 그때는 더 한 짓을 할지도 모르니까.게다가 무엇보다 임유진 본인이 그를 속이고 싶지 않았다. 이곳에서 못 나가는 한이 있더라도 감정을 속이고 싶지 않았다.임유진은 한숨을 한번 내쉬고는 저택 내부를 둘러보았다.저택은 무척이나 넓었고 위에는 다락방도 있었다. 마치 사극 드라마에서나 봤던 양반집을 그대로 옮겨온 것 같은 그런 느낌이었다.그리고 집 안에는 연꽃 모양의 물건들이 많이 놓여있었다.연꽃 모양의 도자기를 시작으로 나무 기둥과 벽에도 연꽃 그림이 있었고 가구에도 빠짐없이 연꽃이 그려져 있었다.심지어 뒷마당에는 연꽃이 피어있는 작은 연못도 있었다.연꽃이 필 계절은 이미 지났는데도 여기 있는 연꽃들은 너무 예쁘게 피어있어 조금 이상하기도 했다.집주인이 어지간히도 연꽃을 좋아하는 것 같았다.아니... 어쩌면 이곳에 갇혔던 여자가 연꽃을 좋아했을지도 모른다.임유진도 연꽃을 좋아하고 있고 그 이유는 연꽃이 고귀함과 깨달음의 상징이라서이다.임유진은 구경을 마치고 이리저리 걸어 다니며 강지혁을 찾아다녔다.이 저택에 갇힌 것은 맞지만 집 안에서는 아무런 제약 없이 돌아다닐 수 있다. 즉 이 저택 안에서만큼은 그녀는 ‘자유’였다.긴 복도를 거닐던 그때 제일 끝쪽에 있는 방을 발견하고 임유진의 발걸음이 멈췄다.며칠 전 강지혁이 이 복도에서 걸어 나오는 걸 본 적이 있다.방은 이것뿐이니 혹시 강지혁은 지금 이 방에 있는 건 아닐까?임유진은 일단 가볍게 방문을 두어 번 두드렸다.하지만 아무런 대답도 들려오지 않았고 그녀는 천천히 방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방안은 무척이나 깜깜하고 어두웠다.방은 크지 않았고 창문은 암막 커튼으로 전부 쳐져 있었다.그리고 방안의 인테리어는 무척이나 심플했다. 아니, 지나치게
“맞아. 그 두 사람이 널 찾으러 이곳에 온다고 해도 널 데려가지는 못해.”강지혁은 말을 마친 후 바지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고 그녀에게 건네주었다.이건 그녀의 것이 아니라 강지혁의 휴대폰이었다.다행히 임유진은 기억력이 좋았기에 한지영과 탁유미의 전화번호를 기억하고 있었다.임유진은 먼저 한지영에게 전화를 걸었다.한지영은 전화기 너머로 임유진의 목소리가 들리자마자 화들짝 놀라며 하마터면 휴대폰을 떨어트릴 뻔했다.“유진아, 너 지금 어디야?! 강지혁이 너 데려갔다는 말을 들었을 때 내가 얼마나 놀랐는지 알아? 강지혁 그 자식이 너한테 뭔 짓 한 거 아니지?! 그 개자식이 진짜! 이거 납치야, 납치! 범죄라고!”임유진은 한지영의 폭풍 욕설에 무척이나 당황하며 어쩔 줄을 몰랐다.전화를 걸기 전 강지혁은 그녀에게 스피커폰으로 전화하는 것을 요구했다. 즉 방금 한지영이 한 말을 강지혁이 전부 다 들었다는 소리였다.강지혁은 웃는 듯 마는 듯한 눈길로 휴대폰을 바라보았다.임유진은 한지영의 말이 혹시라도 그의 심기를 건드리게 될까 봐 서둘러 입을 열었다.“지영아, 나 괜찮아. 아무 일도 없어. 그러니까 내 걱정하지 말라고 전화한 거야. 그리고 내가 유미 언니 양육권 소송 맡기로 했는데 지금은 할 수 있을지 잘 모르겠어. 그래서 말인데 만약 일주일 뒤에도 나한테서 연락이 없으면 그때는 백연신 씨한테 부탁해서 유미 언니한테 변호사 붙여줄 수 있어?”임유진의 말에 한지영이 다급하게 물었다.“그게 무슨 소리야? 너 지금 대체 어디 있는 건데! 일주일 뒤에 연락이 없을 수도 있다는 말은 또 뭐고. 너 설마 지금 강지혁한테 감금이라도 당한 거야?”한지영의 연이은 질문에 임유진은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모르고 있다가 깊게 숨을 한번 들이견 후 최대한 침착하게 얘기했다.“지영아, 강지혁과의 일은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 그리고... 시간 날 때 유미 언니한테 신경 많이 써줘.”그 말을 끝으로 임유진은 전화를 끊어버렸다.그걸 본 강지혁이 그녀에
강지혁은 손을 내밀어 검을 꺼내 들었다.그 순간 임유진은 화들짝 놀라고 말았다. 그저 거치대에 놓여있을 때와 달리 사람 손에 들리자 어쩐지 한층 더 오싹한 한기 같은 것이 느껴졌기 때문이다.“전에 내가 너한테 얘기했지? 강씨 가문의 한 남자가 여자 한 명을 이곳에 가뒀다고. 그러다 그 여자가 자기를 가둔 그 남자를 사랑하게 됐다고. 하지만 그 이야기는 거기서 끝이 아니야. 그 여자가 남자를 사랑하게 된 건 맞지만 이곳에서 그 남자를 찔렀어. 그래서 이 저택에서 나간 거야.”강지혁은 또다시 담담하게 얘기를 꺼냈다.임유진은 심장이 철렁했다. 그 이야기에 이런 반전이 있었을 줄은 몰랐다.전에 그 얘기를 들었을 때는 그 여자가 강씨 가문의 남자를 사랑하게 돼서, 그래서 남자와 함께 이곳을 떠난 줄 알았다. 하지만 아니었다...왜일까? 왜 찔렀을까? 자책감 때문에? 정혼자와 좋은 연인 관계였지만 결국 자기를 가둔 남자를 사랑하게 돼서? 그래서 그런 선택을 했던 건가?임유진은 다시 한번 검을 바라보았다.역시 날 위에 있는 검은색 반점은 녹이 슨 것이 아니었다.이건 남자를 찔렀을 당시 튀었던 피가 분명했다.“날에 피가 튄 것 때문에... 피의 방인 거야?”“그것 때문만이 아니야.”강지혁은 맞은편 벽으로 걸어가 검은색 천을 아래로 세게 끌어내렸다.그러자 천 뒤에 가려져 있던 벽이 임유진의 앞에 드러났다.이 벽은 다른 벽과 달랐다. 오랜 기간 그대로 방치되어 당시 모습 그대로 남아 있었다. 그리고 그 벽 위에는 이미 변색한 핏자국들이 그대로 묻어 있었다.임유진은 순간 속이 울렁거려 금방이라도 토할 것만 같았다.이 벽은 여전히 그날을 기억하고 있었다.마치 오래된 증거처럼 그대로 남아 있었다.이 벽 때문에, 피 칠갑이 된 벽 때문에 이 방이 피의 방으로 불리게 된 걸까?“만약 너도 여기서 떠나고 싶으면 그 여자가 했던 것처럼 나를 찌르고 여기서 나가면 돼.”강지혁은 다시 임유진 쪽으로 걸어와 검의 손잡이 부분을 그녀 쪽으로 건넸다.“어떡할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