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자 다 먹을 수 있든 없든 그건 내가 알아서 할 문제야.”이경빈은 말을 마친 후 옆으로 가 비어있는 테이블에 착석했다.양복 차림의 그가 플라스틱 의자에 앉아 있는 모습이 이곳과는 어울리지 않아 조금 웃기기도 했다.탁유미는 이경빈이 이곳까지 직접 걸음을 해 거기에 음식까지 주문할 줄은 몰랐다.여기까지 온 목적이 뭐지?그녀는 고개를 숙인 채 요리를 하면서 생각을 멈추지 못했다.곧 전 메뉴가 준비되고 그녀는 이경빈이 앉은 테이블 위에 하나하나 올리기 시작했다. 얼마 안 가 작은 테이블 위에 메뉴가 넘칠 듯 올려졌다.탁유미는 이 순간 메뉴에 7가지 음식밖에 없는 것을 다행으로 여겼다. 그게 아니라면 테이블을 하나 옆에 붙여야 했을 테니까.“음식 솜씨가 예전보다 좋아졌네.”탁유미가 마지막 메뉴를 테이블에 내려놓았을 때 이경빈이 갑자기 말을 걸어왔다.이에 탁유미의 몸이 움찔 떨렸다.“사람은 변하기 마련이니까.”변하지 않으면 윤이를 먹여 살릴 수도 없었을 것이다. 탁유미는 각종 화장품에 매달렸던 예전과는 달리 지금은 기본적인 스킨케어만 하고 생기있는 얼굴을 위해 옅은 립스틱 정도만 바르고 다닌다.게다가 스킨케어 제품도 최대한 양이 많고 저렴한 것으로 구매하며 립스틱은 이미 몇 년째 한 가지만 쓰고 있다.그리고 그녀의 손은 음식을 해야 했기에 칼에 베이고 굳은살이 생겨 성한 구석 하나 없었다.탁유미는 말을 마치고 나서 다시 새로운 손님을 받으러 갔다.이경빈은 바삐 돌아치는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얼굴이 점점 어두워졌다.피곤한 게 눈에 뻔히 보이는 데도 그녀는 손님들을 상대할 때 언제나 예쁜 미소를 짓고 있었다.하지만 분명히 예쁜 미소였지만 전처럼 마음속 깊이 우러러 나오는 미소와는 달리 오로지 손님을 상대하기 위한 그런 미소였다.이경빈은 젓가락을 들어 앞에 놓인 음식들을 하나하나 먹어보기 시작했다.그는 셰프의 요리를 맛보기라도 하듯 아주 천천히 음미했다.탁유미는 최대한 이경빈의 존재를 무시하며 그를 다른 손님들과 똑같이 대하려고 애
그 여성은 바로 의자에서 일어나 도망치듯 자리를 벗어났다.그 광경을 전부 지켜본 탁유미는 속으로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고고하고 항상 제일 좋은 것만 고집하는 이경빈이 고작 이런 유혹에 쉽게 넘어갈 리가 없었다.전에도 인지도가 없는 여자 연예인이 그의 술잔에 약을 타 그를 어떻게 해보려고 했었다. 하지만 이경빈은 약효가 분명히 약효가 돌고 있음에도 상대방에게 작은 스킨십도 허락하지 않았다.그 뒤로는 예상했던 바와 같이 그 연예인은 더 이상 연예계에 발을 들일 수 없게 됐고 아예 해성시에서 사라져버렸다.탁유미는 그 기억이 떠오르자 소름이 돋아 고개를 세차게 흔들었다.‘그만 생각해. 과거는 악몽일 뿐이야. 그러니까 그만 생각해.’이경빈이 그녀에게 남겨준 유일하게 좋은 건 윤이 뿐이다.탁유미는 떠오르는 기억을 다시 가라앉힌 뒤 이경빈이 있는 쪽을 힐끔 바라보았다.그러다 그의 까만 눈과 그만 딱 마주쳐버리고 말았다.고작 눈이 마주친 것뿐인데 그녀는 몸이 뻣뻣하게 굳어버렸다.마치 시간이 멈춘 듯, 무언가에 홀린 듯 그녀는 그를 빤히 바라본 채로 시선을 뗄 수가 없었다.이경빈은 무슨 생각인 건지 아무런 말도 없이 그저 그녀를 가만히 바라만 보았다.그렇게 얼마만큼의 시간이 흘렀을까, 갑자기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무슨 드라마 찍어? 눈빛이 왜 이렇게 뜨거워? 그 뜨거운 눈빛 우리한테도 주면 안 되나?”지독한 술 냄새가 탁유미의 코를 찔러왔다.고개를 돌려보니 거기에는 이미 거하게 한잔한 두 명의 취객이 서 있었다. 그들은 음흉한 눈길로 그녀를 바라보았고 그중 한 명은 스킨십을 시도하려는 듯 어느새 가까이 다가오고 있었다.이에 그녀가 다급하게 옆으로 피해 거리를 두고 경계심 가득한 얼굴로 두 사람을 훑었다.이들은 가게로 찾아와 행패를 부리던 사람들은 아니었다.아니면 그들만으로는 부족하다고 생각해 사람을 더 고용한 건가?그래서 이제는 성희롱인 건가?“어어? 우리가 뭐 벌레라도 돼? 왜 피하고 그래. 나이도 어린 것 같은데 몇 살이야?
왜 구해준 거지?탁유미가 비참하면 할수록, 고통받으면 받을수록 그 모습을 옆에서 방관하며 좋아해야 하는 거 아닌가?그때 나머지 한 명의 남자가 이경빈에게 주먹을 휘둘렀다.이경빈은 품에 있는 탁유미를 옆으로 밀어버리고는 상대방의 주먹이 꽂히기 전 먼저 주먹을 휘둘러 복부를 세게 가격했다.이경빈은 절대 약하지 않았다. 탁유미와 함께 있을 때 그는 회사 일을 처리하면서도 틈을 내 유명한 복싱 선수를 코치로 두고 몸을 단련했었다.탁유미는 그가 취객 두 명을 상대하는 데 있어 전혀 문제없을 걸 알기에 크게 걱정하지 않았다.그녀의 머릿속은 지금 왜 자신을 구해줬을까 하는 생각만 맴돌 뿐이었다.그녀의 예상대로 두 명의 취객은 2분도 채 버티지 못하고 얼굴이 피떡이 된 채 그의 발아래서 살려달라고 빌었다. 그러고는 술이 다 깬 듯 그가 옷에 묻은 먼지를 털 때 황급히 도망쳤다.이경빈은 탁유미 앞으로 다가왔다.“앞으로 여기서 장사하지 마.”만약 오늘 그가 없었더라면 탁유미는 아마 두 명의 남자에게 잡혀 험한 꼴을 당했을 것이다.이런 일들이 빈번히 일어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자 그는 짜증이 밀려왔다. 심지어 아까 두 남자가 도망친 걸 내버려 둔 것이 후회되기 시작했다.탁유미는 그의 말에 실소했다.“이런 식으로 내 수입원을 완전히 끊어버릴 생각이었어? 사람을 고용해 행패 부리게 한 것도 모자라 이제는 직접 나서서 쇼까지 하는 거야? 차라리 아까 구해주지 말지 그랬어. 그랬다면 내가 트라우마가 생겨 결국 그만뒀을지도 모르잖아.”이경빈은 미간을 꿈틀거렸다.“아까 그 두 사람 공수진이 보낸 거 아니야.”“그럼 전에 행패 부리러 온 사람들은 공수진이 보낸 게 맞다는 소리네?”그 말에 이경빈은 입을 꾹 닫은 채 아무런 변명도 하지 않았다.탁유미는 헛웃음이 튀어나왔다. 그리고 그 모습은 무척이나 쓸쓸해 보였다.공수진이 맞았다. 억울하게 옥살이해 이 지경까지 왔는데도 공수진은 여전히 그녀를 놓아주지 않았다.아니, 진정으로 그녀를 놓아주지 않는 사람은 눈앞
대체 왜 그런 말을 한 거지? 눈앞에 있는 여자가 불쌍해서? 한때는 잘 나갔던 여자가 빛을 잃은 채 이곳에서 힘들게 살고 있는 게 안타까워서?하지만 그녀는 그가 불쌍하다고, 안타깝다고 여기면 안 되는 여자다. 그녀에게는 그럴 자격이 없으니까.“윤이 생각해서 얘기한 것뿐이야. 판결이 나기 전까지 윤이는 너와 함께 있을 거고 나는 그 짧은 순간에도 윤이가 힘들게 사는 거 보고 싶지 않아.”이 말은 탁유미가 아닌 이경빈이 자신에게 들려주는 말이었다.“윤이는 내 아들이야. 네 아들이 아니고.”탁유미는 차갑고 단호하게 말을 내뱉었다.“전에 네가 했던 말 자꾸 잊어버리는 것 같아서 다시 말해주는데, 너는 그때 내가 네 아이를 임신한다고 해도 지우게 하겠다고 했어. 나 같은 여자는 네 아이를 낳을 자격이 없다고도 했고. 그런데 대체 이제 와서 왜 이래? 너야말로 대체 무슨 자격으로 윤이를 데려가려는 건데!”이경빈은 얼굴을 굳힌 채 한 걸음 한 걸음 탁유미의 앞으로 다가왔다.“너는 내 아이를 낳기로 했을 때 이런 날이 올 거라고 예상했었어야 했어.”탁유미의 몸이 움찔 떨렸다.“아이를 그렇게 원하는 것도 아니면서 네 핏줄이 내 옆에 있는 건 싫어?”“네 옆에서 윤이가 행복할 것 같아? 네가 윤이한테 해줄 수 있는 게 뭔데.”이경빈은 그녀의 아픈 구석을 콕콕 찔렀다.“왜, 윤이가 크면 이 포장마차에서 서빙이라도 시키게? 그리고 엄마가 했다는 걸 사람들한테 들켜서 애가 평생 주눅 들어 살았으면 좋겠어?”탁유미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려버렸다.하지만 야속하게도 그의 말은 계속되었다.“소송이 끝나면 바로 윤이를 해성시로 데려갈 거야. 너한테 애를 맡기는 것보다 수진이한테 맡기는 게 훨씬 나아. 해성시로 가면 윤이는 더 좋은 환경에서 더 좋은 것들을 누리며 살 수 있게 돼. 너, 윤이한테 그런 거 줄 수 있어? 없잖아.”탁유미는 입술을 파르르 떨며 반박할 말을 골랐지만 결국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그러고는 묵묵히 발걸음을 돌려 식자재를 실은 작은 차에 올라
호기롭게 회사로 찾아간 건 좋았지만 두 사람은 강현수를 만나기도 전에 프런트 데스크에서 막혀버렸다. 한지영이 이곳으로 온 목적을 설명하고 백연신이 누군지 얘기했는데도 소용이 없었다. 직원은 그저 강현수가 현재 회사에 없다고만 전할 뿐 어디로 갔는지는 입을 꾹 닫고 알려주지 않았다.한지영이 다급한 마음에 발만 동동 구르고 있자 백연신이 그녀를 진정시키며 말했다.“전화해 보면 되는 일이야.”“강현수 번호 있어요?”한지영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없어. 하지만 연락처를 알아내는 게 어려운 일은 아니지.”백연신은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어 뭐라고 얘기하더니 5분도 안 돼 강현수의 연락처를 알아냈다.이에 한지영은 감탄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강현수의 전화번호는 절대 쉽게 알아낼 수 있는 것이 아닐 텐데 백연신은 너무나도 쉽게 알아내 버렸다.역시 백연신이라고 해야 할까?백연신은 곧바로 강현수에게 전화를 걸었고 그대로 휴대폰을 한지영에게 넘겨주었다.한지영은 전화기 너머에서 강현수의 목소리가 들리자마자 다급하게 물었다.“안녕하세요. 강현수 씨 맞죠? 저 유진이 친구인 한지영이라고 해요. 혹시 강지혁 씨가 유진이를 어디로 데려갔는지 알고 있어요?”한지영이라는 이름이 들리자마자 강현수의 표정이 미세하게 변했다. 그는 한지영을 기억하고 있다.그녀는 임유진이 감옥에 가게 생겼을 때 유일하게 발 벗고 도와준 사람이며 임유진이 형을 살게 됐을 때는 면회하러 자주 갔었던 사람이다.그리고 바로 엊그제 자선 파티에서 얼굴도 봤었다.“아직 알아내지 못했어요. 하지만 계속 찾을 겁니다.”강현수가 대답했다.“그러시구나... 저희도 아직 알아내지 못했어요. 혹시 강현수 씨 쪽에서 먼저 알아내게 되면 이 번호로 전화 한 통 해주실 수 있으세요?”“그러죠.”강현수는 순순히 알겠다고 한 뒤 전화를 끊었다. 그러고는 고개를 들어 앞을 바라보았다.그의 앞에는 수많은 모니터가 놓여 있었고 화면 속에는 그날 밤의 도로 CCTV 영상이 흘러나오고 있었다.다만 강지혁의 차량
한편 그시각, 임유진은 의자에 앉아 식탁 위에 차려진 음식들을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총 세 가지 음식에 국 하나, 음식 모양새로 보아 셰프 요리는 아닌 것 같았다.“내가 만든 거야. 먹어봐.”그녀의 의문을 눈치챈 것인지 맞은 편에 앉은 강지혁이 먼저 입을 열었다.이에 임유진은 조금 놀란 듯 보였다.강지혁이 직접 요리를 했다고?“그때, 작은 원룸에 있을 때 너도 나한테 요리 많이 해줬잖아. 그래서 나도 널 위해 해봤어. 맛이 없으면 없다고 솔직하게 말해. 다음에 더 맛있게 해볼 테니까.”그는 말을 마친 후 예쁜 두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예쁘게 웃었다.마치 아직 연인인 것처럼, 한 번도 헤어진 적 없는 것처럼, 제일 행복했었던 그 시간으로 다시 돌아가기라도 한 것처럼 말이다.임유진은 어딘가 불편한 느낌에 그의 시선을 피해버리고 최대한 그와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고 애썼다.그의 두 눈은 꼭 블랙홀과도 같아 마주치는 순간 속절없이 빠져들게 되고 자꾸 고요한 마음에 파도가 인다.“도우미는 없어? 한 번도 못 본 것 같은데.”임유진은 화제를 돌렸다.“정기적으로 와서 냉장고 채워주고 청소해주고 있어. 하지만 네가 다른 사람과 만날 일은 없을 거야. 그냥 여기 너랑 나만 있다고 생각해.”이에 임유진의 몸이 움찔했다.하지만 강지혁은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 말을 이었다.“그러니까 나만 바라보고 언제 날 다시 사랑해줄 건지만 생각해.”“그럴 일 없다고 난 분명히 말했어.”“나도 말했어. 넌 분명히 다시 날 사랑하게 될 거라고.”강지혁은 그녀를 똑바로 보며 말했다.“날 다시 사랑하게 될 일 없다면서 왜 지금은 내 눈도 못 쳐다보는데?”임유진은 입술을 꼭 깨물고는 고개를 홱 하고 들어 그의 눈을 빤히 바라보았다.두 사람의 시선이 공중에서 부딪혔다.임유진은 그를 한껏 노려보고 있었고 강지혁은 그런 그녀를 향해 미소를 지었다.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강지혁이 먼저 입을 열었다.“이제 밥 먹어. 차가워지면 맛없어.”그는 먼저 시선을 내려 젓가락
“강씨 집안 사람들만 아는 옛 저택이야. 대외적으로 한 번도 공개된 적 없는 곳이기도 하지.”강지혁은 딱히 숨길 생각이 없는 듯 바로 대답해주었다.하지만 그 말을 듣고 임유진은 미간을 찌푸렸다.방금 그 말은 두 사람이 이곳에 있는 걸 그 누구도 찾아내지 못할 거라는 뜻인가?“그리고 한 가지 더 알려주자면 이 저택에 갇혔던 사람, 너뿐만이 아니야.”임유진이 눈을 깜빡거리며 그를 바라보았다.무슨 뜻이지?“너 말고 여기 갇혔던 여자 한 명 더 있어. 애초에 이 저택을 사들인 것도 그 여자를 가두기 위해서니까.”강지혁은 표정 변화 하나 없이 너무나도 태연하게 무서운 말을 꺼냈다.임유진은 순간 한기에 뒤덮인 듯 소름이 돋았다.전에도 이곳에 갇혀버린 여자가 있었다고?“70년 전쯤이었을 거야. 강씨 가문에 한 남자가 한눈에 반한 여자가 있었어. 하지만 그 여자는 당시 정혼자가 있었고 그 정혼자와는 예쁜 사랑을 나누던 연인이기도 했지. 그래서 남자는 그 여자를 이곳으로 납치해왔어. 이곳에 가둬놓고 매일 자기만 보게 했지. 언젠가는 자기를 사랑하게 될 거라고 믿으면서.”강지혁의 목소리는 원래 부드러운 편이 아니었지만 이 넓은 공간에서 듣게 되니 어딘가 무섭게 들려왔다.조금 전까지만 해도 이곳이 그저 나무 향이 솔솔 풍겨오는 운치 있는 곳이라고만 생각했는데 그의 말을 듣고 나니 괜히 오싹해졌다.“그래서...? 그 뒤로는 어떻게 됐는데?”임유진의 목소리는 조금 잠겨있었다.“그 여자는 너무 자연스럽게 남자를 사랑하게 됐어. 그리고 이곳에서 나갈 수 있게 됐지.”강지혁은 임유진의 두 눈을 빤히 바라보며 물었다.“너는 어때? 너도 여기서 나가고 싶어?”임유진은 순간 입술이 바싹 말라오는 느낌이 들었다.“너를 사랑하지 않으면 나 정말 여기서 못 나가?”“네가 날 다시 사랑할 때까지 나는 계속 네 옆에 있을 거야.”이곳을 나가기 위해서는 정말 강지혁을 사랑할 수밖에 없는 것일까?마치 이곳에 갇혀있던 그 여자처럼?사랑하던 정혼자가 있음에도 자기를
“그래, 헤어졌지.”강지혁이 젓가락을 내려놓았다.“너랑 헤어진 게 내 평생 가장 후회되는 일이야. 그래서 더 이상 그런 후회 하고 싶지 않아.”강지혁은 임유진이 그를 너무 많이 사랑해 무슨 일이 있어도 떠날 수 없게 만들 생각이다....저녁이 되고 임유진은 방 안에 있는 소파에 앉아 손에 든 보라색 드레스를 지그시 바라보았다.목 부분부터 팔까지 다 찢겨 있어 수선한다고 해도 처음처럼 그렇게 예쁘지는 않을 것이다.임유진은 너무나도 예뻤던 드레스가 지금 이 지경이 된 것에 죄책감을 느꼈다. 단지 드레스가 훼손돼서가 아닌 ‘현수’가 선물해 준거라서 더 그런 마음이 드는지도 모르겠다.강현수가 어릴 적 여자아이가 그녀라는 걸 모른다고 해도, 강현수가 이 드레스를 선물한 것에 큰 의미가 없다고 해도 결과적으로 그는 어릴 적 두 사람이 했던 약속을 결국 지켜내고야 말았다.임유진은 입술을 살짝 깨물고는 옆에 있는 책상 서랍을 뒤적거리며 반짇고리 함을 꺼내 들었다.사실 그녀는 아까 심심하던 차에 방 이곳저곳을 둘러보았다. 그러다 서랍에서 뜻밖에도 이 반짇고리 함을 발견하게 되었다.막 발견했을 때 케이스 위에는 한 층의 먼지가 쌓여있었다. 안에는 여느 반짇고리 함이 그렇듯 갖가지 색상의 실과 쪽 가위 그리고 여러 가지 길이의 바늘이 있었다. 실의 색상은 조금 바랬지만 끊어질 정도는 아니었고 쪽 가위도 오래된 것 치고는 잘 들었다.새것은 아닌 거로 보아 누군가가 쓴 것은 분명해 보였다.아까 강지혁이 얘기했던 이야기 속의 여자가 남기고 간 것일까?임유진은 색이 바랜 덕에 드레스 색과 흡사하게 되어버린 보라색 실을 집어 들고 바늘을 꺼내 수선을 시작했다.이미 엉망이 된 드레스이고 다시는 입지 못할 드레스였지만 그래도 이 드레스는 ‘현수’의 선물이자 약속이기에 이대로 쓰레기통에 버리고 싶지는 않았다.그녀는 한 땀 한 땀 ‘현수’와의 약속을 떠올리며 정성스럽게 바느질을 했다.그때 방문이 열리고 강지혁이 들어왔다. 그는 소파에 앉아 드레스를 수선하고 있는 그
“내가... 그렇게도 싫어?”이경빈은 속으로 그녀가 아니라고 하기를 간절히 바랐다. 하지만 그의 귓가에 들려온 말은...“응. 더 이상 네 얼굴 보고 싶지 않아.”“만약... 그날 내가 너를 병원으로 끌고 가지 않고 너를 공수진 앞에서 무릎을 꿇리고 머리를 조아리게 시키지 않았으면 나에게도 기회가 있었을까? 너한테 용서를 빌 기회가 있었을까...?”잔뜩 잠긴 그의 목소리가 애처롭게 들려왔다.하지만 탁유미의 얼굴은 표정 변화 하나 없었다.“네가 겪은 수모와 고통... 내가 돌려받을게. 내가 다 돌려받을 테니까 한 번만 용서해줘... 아니, 최소한 내 간을 거절하지는 말아줘!”이경빈은 말을 마친 후 차가운 바닥에 털썩 무릎을 꿇었다.탁유미는 갑작스러운 그의 행동에 눈을 크게 뜨며 그를 내려다보았다.설마 이경빈이 이렇게도 쉽게 무릎을 꿇을 줄은 몰랐다. 그것도 사람들이 언제 지나갈지도 모르는 밖에서 말이다.하지만 이내 그녀를 더 놀라게 하는 일이 벌어졌다.이경빈이 무릎을 꿇은 것에서 멈추지 않고 그대로 바닥에 머리를 조아렸기 때문이다.한 번, 두 번, 세 번....바닥과 부딪히는 소리가 끊임없이 들려왔다.오후 3시가 조금 넘은 시간이라 사람들이 많지는 않았지만 주민들이 아예 없는 건 아니었다.주민들은 두 사람 근처를 지나가다가 이경빈이 머리를 조아린 것을 보고는 발걸음을 멈추며 자기들끼리 수군거렸다.탁유미는 아직도 머리를 조아리는 이경빈의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았다.솔직히 놀랍지 않다고 하면 거짓말일 것이다.그도 그럴 것이 이경빈처럼 자존심이 강한 남자가 이런 행동을 한다는 게 말이 되는 소리는 아니니까.하지만 그 말도 안 되는 것이 바로 눈앞에 펼쳐졌다.얼마나 세게 머리를 박은 건지 처음에는 그저 이마 쪽에 스치듯 껍질이 까지기만 했는데 이제는 슬슬 피가 나기 시작하더니 이윽고 바닥으로 피가 뚝뚝 떨어지기까지 했다.탁유미는 그 모습을 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네가 이런다고 내 마음이 달라지지는 않아. 나한테 정말 미안하다면
그 모든 것들이 다 그녀를 향한 사랑의 감정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걸 당시의 이경빈은 몰랐다.“유미야, 사랑해.”그리고 지금 이 순간 그는 드디어 줄곧 마음속에 품어왔던 마음을 입 밖으로 꺼냈다.탁유미는 힘껏 반항하다가 그 말에 저도 모르게 움직임을 멈췄다. 그러고는 마치 인형처럼 그의 품에도 미동도 하지 않았다.이에 이경빈은 더욱더 그녀를 세게 끌어안았다.마치 예전에 그랬던 것처럼...“사랑해. 줄곧 사랑하고 있었어. 이제야 전해서 미안해. 그때 네가 유리 파편을 네 복부에 찔러넣었을 때 눈앞이 깜깜해지는 기분이었어. 피를 흘리는 게 네가 아닌 나였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들면서 너무 무서웠어.”사실 그는 그때 자신의 마음을 깨달았어야 했다.“복수 때문에 눈이 멀어서 너를 향한 내 마음이 얼마나 큰지 몰랐어. 앞으로는 잘할게. 내 모든 걸 걸고 너를 지켜줄게! 네 억울함도 풀어주고 내 간도 너한테 줄게! 한 번으로 안 된다면 될 때까지 너한테 간을 기증할게!”이경빈은 탁유미가 더 이상 아프지 않고 멀쩡하게 살 수만 있다면 뭐든 해주고 싶었다.탁유미는 간 얘기에 조금 흠칫했다.‘...다 알고 온 거네.’사실 그녀도 이경빈에게 희망을 걸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그래도 어쩌면 이라는 기대를 아주 조금은 하고 있었다.하지만 그의 말과 행동으로 그건 잘못된 기대고 잘못된 희망이라는 것을 금방 깨달았다.“나 이제 너 안 사랑해.”차가운 목소리가 이경빈의 귓가에 들려왔다.그 말을 듣는 순간 이경빈은 온몸이 굳어지며 심장 고동이 멈춘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이경빈, 나 너 안 사랑해.”탁유미는 두 손으로 이경빈의 가슴팍을 밀어내며 두 걸음 뒤로 물러섰다.이경빈을 바라보는 그녀의 두 눈은 무서울 정도로 차분했다.“너는 그때 복수 때문에 나를 사랑하는 척했어. 그리고 지금은 네 목숨을 구해줬다고 또다시 나를 사랑한다고 말하고 있어. 네 기분 하나로 쉽게 바뀔 사랑을 내가 원할 거라고 생각해?”이경빈의 얼굴은 무척이나 창백했다.“아니야...
탁유미는 몇 번이고 미안하다고 말하는 이경빈의 모습이 그저 우습게만 느껴졌다.모든 걸 망쳐놓고 이제 와서 미안하다고 해봤자 무슨 소용이 있을까?“날 때려도 돼. 욕해도 돼. 벌을 줘도 돼. 네가 주는 벌이라면 달갑게 받을게. 과거의 내 행동과 언행에 대해 제대로 사과하고 싶어. 나한테 그럴 기회를 줘. 그리고 널 곁에서 지켜주줄 수 있는 기회도...”“그만!”탁유미가 이경빈의 말을 끊었다.“이경빈, 네가 인간이면 나한테 그런 말을 하면 안 되지. 공수진을 밀지 않았다고 내가 몇백 번을 말했는데도 너는 결국 내 말을 믿어주지 않았어. 들어주려고 하지도 않았지. 네가 지금 이러는 건 골수를 기증해준 게 공수진이 아닌 나라는 걸 알아서야. 만약 널 구한 게 정말 공수진이었으면 너는 지금도 여전히 나한테 죄가 있다고 생각했을 거잖아. 내 말이 틀려?”이경빈은 그 말에 순간 뭐라고 대꾸해야 할지 몰라 말문이 막혔다.“이경빈, 네가 지금 이러는 건 그저 자기만족일 뿐이야. 나한테 사과라도 해야 네 마음이 편할 것 같아서 이러는 거잖아. 내가 모를 것 같아? 난 너 용서 안 해. 네가 날 감옥에 보낸 것도 그 일로 감옥에서 감기에 걸려 어쩔 수 없이 감기약을 먹어 윤이가 청력을 잃은 것도, 나는 용서할 생각이 없어.”탁유미의 말에 이경빈은 휘청이며 옆에 있는 벽을 짚었다.당시 그녀를 감옥에 보낸 건 그에게는 그저 간단한 복수에 불과했지만 그녀에게는 모든 고난의 시작이었다.게다가 그 일 때문에 윤이의 청력이 사라진 거라니...‘대체 나는 무슨 짓을 저지른 거야...!’“보상하겠다고 했지? 아니, 넌 보상 못 해. 네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어. 네가 하는 사과도 나한테는 그저 역겨울 뿐이야!”탁유미는 말을 마친 후 그를 지나쳐 빠르게 걸어갔다.하지만 얼마 못 가 이경빈에게 팔이 잡혀 그대로 그의 품속에 안기고 말았다.탁유미는 그의 냄새가 코를 확 덮치는 순간 마치 그에게 꽁꽁 둘러싸인 기분이 들었다.“뭐 하는 짓이야! 이거 안 놔?!”놓아
지금의 그는 탁유미에게 사과하고 용서를 받고 싶었지만 어떻게 하면 그녀에게 용서를 받을 수 있을지를 몰랐다....탁유미는 김수영과 함께 집으로 돌아온 후 강지혁이 붙여준 경호원 두 명에게 집을 지킬 필요는 없다고, 이만 가봐도 된다고 했다.작은 집이라 건장한 남성 두 명까지 들이게 되면 집이 꽉 찰 테니까.경호원 두 명이 떠난 후 김수영은 창밖을 힐끔 바라보았다.“저거 설마...”그녀는 창밖으로 보이는 이경빈의 차량에 미간을 찌푸렸다.“저거 이경빈 차 아니야? 기어이 여기까지 따라온 거야?!”“엄마, 신경 쓸 필요 없어요. 여기서 밤을 새우든 말든 우리랑은 상관없는 일이잖아요.”탁유미의 태도는 무척이나 태연했다.“그래, 네 말이 맞아. 그런데 갑자기 왜 저래? 뭐 잘못 먹기라도 한 거야?”김수영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공수진이 유산한 게 네 탓이 아니라는 걸 알았다고 해도 사과하려고 이렇게까지 할 인간은 아니잖아.”공수진 일은 비단 인터넷에서만 뜨거운 일이 아니었기에 가십거리에는 일절 관심이 없는 김수영도 공수진과 주원호 일에 대해 아주 잘 알게 되었다.“그것도 그거지만 아마 몇 년 전에 골수를 기증해준 게 나라는 걸 알게 돼서 저러는 걸 거예요.”“뭐?!”김수영은 그 말에 깜짝 놀라더니 이내 이를 바득바득 갈았다.“이경빈이었어? 네가 골수를 기증해준 사람이?! 너한테서 받을 건 다 받아놓고 간 기증 좀 해달라니까 딱 잘라 거절한 인간이 쟤라고? 뭐 이런 배은망덕한 인간이 다 있어?!”김수영은 화가 머리끝까지 나 이경빈에게 따지려는 듯 현관문 쪽으로 향했다.“엄마!”그러자 탁유미가 서둘러 그녀의 팔을 잡아당겼다.“난 괜찮으니까 그러지 마세요. 기증하겠다고 한 건 나예요. 대가를 바라고 한 일이 아니라고요. 이경빈이 간 기증을 거절했다고 한들 배신감이 들 이유는 아무것도 없어요. 그리고 간이식 수술을 받는다고 해서 꼭 살 수 있는 것도 아니잖아요. 수술을 받고 또다시 재발해 수명이 오히려 단축된 케이스도 많아요.”탁유
이경빈은 이제야 그날 탁유미가 웃으며 고맙다고 했던 말의 의미가 뭔지 알아챘다.아주 조금의 감정마저 남지 않게 만든 그에게 철저하게 실망하고 그로 인해 그를 완전히 내려놓게 된 게 틀림없었다.정말 그는 너무나도 멍청한 사람이었다!차량이 멈춘 후 기사는 이경빈에게 도착했다고 하려다가 그의 얼굴을 보고 깜짝 놀랐다.“대표님, 입술에 피가...!”이경빈은 그 말에 천천히 눈을 뜨더니 기사의 시선을 따라 손으로 입술을 매만졌다.얼마나 세게 깨물었던 건지 입술에 피가 흥건했다.하지만 그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손으로 피를 닦아내더니 아무 말 없이 문을 열고 차에서 내렸다.입원 병동으로 들어가려는 그때 탁유미와 김수영, 그리고 일전 그녀의 병실을 지켰던 경호원 두 명이 함께 병동에서 나오는 모습이 보였다.경호원들의 손에 짐이 들려있는 것으로 보아 퇴원하려는 것 같았다.이경빈은 서둘러 그들 앞으로 다가가 탁유미에게 물었다.“퇴원하려고? 벌써?”탁유미에게 가까이 다가가려는데 경호원들이 빠르게 그를 제지했다.탁유미는 이경빈의 얼굴을 보고는 금방 미간을 찌푸렸다.‘그날 알아듣게 얘기한 것 같은데 왜 또 여기 있는 거야?’“너랑 상관없는 일이니까 비켜.”“하지만 네 몸은 아직 입원해있는 게...!”이경빈은 말을 끝까지 하려다가 멈칫했다.입술이 파르르 떨리고 안색이 갑자기 안 좋아진 것이 이 이상 말을 하고 싶어 하지 않는 것 같았다.그녀가 아프다는 걸 인정하고 싶지 않았으니까.“며칠 더 입원해있는 게 좋지 않을까? 치료도 안 끝났을 것 같은데.”이경빈은 억지로 말을 끝마쳤다.“필요 없어. 내 몸이 어떤지는 내가 제일 잘 아니까.”탁유미는 싸늘하게 말을 내뱉은 후 다시 앞으로 걸어갔다.“잘 안다고? 그런 사람이 이렇게 빨리 퇴원하려고 해? 너 정말 이대로 죽고 싶기라도 한 거야?!”이경빈이 다급하게 그녀의 팔을 잡으려 하자 경호원들이 더 빨리 다가와 그의 어깨를 잡았다.탁유미는 발걸음을 멈추고 조금 의아한 눈으로 이경빈을 바라보더니 이내
철썩.둔탁한 마찰음 소리에 공수진은 휘청거리며 다시 바닥에 쓰러졌다.옆으로 힘껏 돌아간 그녀의 얼굴에는 빨간 손자국이 그대로 나 있었다.하지만 공수진은 아픔을 못 느끼는 건지 빈정거림을 멈추지 않았다.“그 여자 결백을 찾아주고 싶지? 하지만 그럴 시간은 없을 거야. 네가 찾아주기도 전에 저세상으로 가버릴 테니까!”이경빈은 그 말에 눈을 부릅뜨고 공수진을 노려보았다.“유미가 병에 걸린 걸 알고 있었어? 언제부터?”공수진은 이경빈의 얼굴을 보며 미친 듯이 웃어댔다.“하하하하. 이경빈 너 진짜 등신이구나? 너 정말 그 여자 좋아하는 거 맞아? 그런데 어떻게 나보다 더 몰라?”그녀의 말대로 이경빈은 등신이 맞다. 누가 진정한 은인인지도 모르는데 등신이 아니고 뭘까?그래서 지금 벌을 받는 것이다. 멍청했던 대가를 이제야 받고 있는 것이다.“그래, 나 등신 맞아. 하지만 그렇다고 네 죄가 사라지는 건 아니지. 너희 집안은 평생 감옥에서 썩게 될 거야.”이경빈은 말을 마친 후 공수진의 얼굴을 더 보고 싶지 않다는 듯 성큼성큼 차로 다가갔다.공수진은 그의 뒷모습을 보며 마치 미친 사람처럼 외쳐댔다.“이경빈, 탁유미가 죽는 날 네가 어떤 얼굴을 하고 있을지 내가 꼭 지켜볼 거야! 네가 어떤 말로는 맞이하는...”탁.이경빈은 평소보다 세게 차 문을 닫으며 공수진의 목소리를 차단했다.그는 천천히 눈을 감은 후 기사에게 지시를 내렸다.“병원으로 가지.”“네, 대표님.”차량에 시동이 걸리자 그는 시트에 등을 기댔다.“간암 3기예요. 현재로서는 간이식 수술을 받는 것밖에 언니 목숨을 살릴 길이 없어요. 만약 언니한테 사죄하고 싶다면 언니한테 이경빈 씨 간 일부를 기증해주세요.”임유진의 목소리가 귓가에 맴돌았다.간 일부를 기증하라고? 탁유미를 위해서라면 그는 간 전부를 기증할 수도 있다.간암 3기가 어떤 상태인지, 그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이경빈은 알고 있다.그간 탁유미가 보였던 고통을 참는 듯한 증상은 모두 간에 암이 퍼지고 있는 신호였다.
공한철은 이경빈의 기에 눌려 손에 땀이 차기 시작했다.“경빈 씨, 혹시 아직도 화 나 있는 거예요? 기증 일은 내가 거짓말한 게 맞지만 그건 다 경빈 씨를 사랑해서 그런 거예요. 나는 경빈 씨가 나를 모르고 있을 때부터 쭉 경빈 씨를 좋아하고 있었어요. 아니, 사랑하고 있었어요. 그래서 거짓말도 무릅쓰고 내가 기증해줬다고 한 거예요! 내가 경빈 씨를 속인 건 맞지만... 그게 범법 행위까지는 아니잖아요...”공수진은 자신은 잘못한 게 없다는 얼굴로 당당하게 말을 했다.이에 이경빈은 시선을 돌려 공수진을 빤히 바라보았다.“내가 아닌 우리 집안을 사랑하는 거겠지. 더 정확히는 우리 집 재산을. 공수진, 네 그 욕심 때문에 나는 인생이 망가졌어!”“거짓말한 건 미안하게 생각해요. 사과할게요. 그러니까 우리 다시 시작해요. 네?”공수진은 전과 같은 유약한 얼굴을 하며 그를 붙잡았다.“나 정말 경빈 씨 사랑해요. 경빈 씨 속상하게 만든 거 내가 다 잘못했어요. 탁유미 씨한테 사과하라고 하면 얼마든지 사과할게요. 보상도 할게요! 그러니까 우리 다시 잘해봐요. 나 정말 경빈 씨 없으면 못살아요!”“사랑이라고? 사랑한다는 사람을 그렇게도 감쪽같이 속여? 다른 사람에게 피해까지 주면서? 탁유미를 범죄자로 몰아가 결국 감방에까지 보낸 게 나를 향한 사랑의 표현이야? 탁유미만 사라지면 우리 집 며느리로 들어오는 게 쉬울 것 같았어? 그래?!”이경빈은 공수진을 턱을 으스러질 듯 잡으며 분노를 표출했다.손아귀 힘이 어찌나 센지 공수진은 자신의 턱뼈가 이대로 부서질 수도 있겠다는 느낌이 들었다.하지만 고통도 고통이지만 이경빈이 그때 당시의 진상을 모두 알아버렸다는 것에 그녀는 심장이 쿵 하고 떨어졌다.‘어떻게 된 거지? 이경빈이 그때 일을 다 알아버렸다고? 증거는 이미 내가 다 소거했는데?! 그래, 그냥 추측일 뿐일 거야. 실질적인 증거는 없는 게 분명해!’“오, 오해예요.”공수진이 힘겹게 말을 이어갔다.“나는 탁유미 씨를 범죄자로 몰아간 적 없어요. 나는
네티즌들은 공수진과 주원호에게 각종 비난과 욕을 해댔고 대대적으로 기사가 난 탓에 병원 관계자들도 공수진의 병실을 지나칠 때마다 한심하다는 눈빛을 보냈다.공수진은 그들의 눈빛에 제대로 고개를 들 수 가 없었고 이를 깨물며 하루빨리 퇴원하기만을 기다렸다.하지만 드디어 다가온 퇴원하는 날, 한결 가벼운 마음으로 병원을 나섰지만 그녀를 기다리는 건 아침부터 진을 치고 기다린 기자들이었다.“공수진 씨, 현재 인터넷에서 떠돌고 있는 동영상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이강 그룹 대표의 약혼녀로 알고 있는데 이경빈 씨는 동영상에 대해 뭐라고 하던가요? 결혼식은 예정대로 진행하시는 겁니까?”“유산한 아이가 이경빈 씨의 아이가 아니라 영상 속 남자분의 아이라는 소문이 있던데 맞습니까?”“탁유미 씨를 음해하려고 일부러 밀쳐진 척 넘어져 유산했다고 들었는데 사실입니까?”연이은 날카로운 질문에 공수진의 얼굴은 흙빛이 되어버렸다.“찍지 마세요! 찍지 마시라고요!”공씨 부부는 공수진이 지나갈 수 있게 고용한 경호원들과 함께 그녀의 앞을 막아섰다.기자들을 뚫고 간신히 차에 오른 후 공수진은 이를 바득바득 갈았다.“탁유미 때문에 이게 뭐야!”만약 탁유미가 아니었으면 자신이 이런 꼴을 당할 일도 없었을 거라며 그녀는 모든 걸 다 탁유미 탓으로 돌렸다.“일단 S 시를 떠나는 게 좋겠다. 며칠 뒤에 사태가 조금 잠잠해지면 그때 다시 경빈이 불러서 얘기하는 거로 해.”공한철의 말에 차량은 고속도로로 향했다.그렇게 20분쯤 달렸을까, 갑자기 어디서 나타난 건지도 모를 검은 차들이 거리를 바짝 좁혀오며 공수진네 차를 에워싸기 시작했다.끼익.“뭐야, 저것들은!”공한철이 눈을 부릅뜨며 화를 냈다.하지만 그것도 잠시 그는 정차된 앞차에서 내린 사람을 보고는 그대로 몸이 굳어버렸다.공씨 일가를 막아선 건 다름 아닌 이경빈이었다.이경빈이 내리자 검은 차에서 내린 부하직원들이 하나둘 공수진 일가를 차에서 끌어내기 시작했다.“경, 경빈 씨, 이게 지금 뭐 하는 거예요?
“하지만...”임유진은 말을 하려다가 순간 깜짝 놀라며 두 손으로 자신의 배를 끌어안았다.“왜 그래?”강지혁이 잔뜩 긴장한 채로 물었다.“방금 아이가 내 배를 찼어!”임유진은 이쯤이면 태동이 느껴질 거라는 건 이미 알고 있었다.전까지는 거의 착각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태동이 미약했는데 방금 그건 정말 누가 뭐라 해도 확실한 태동이었다.심지어 지금도 계속해서 배를 차고 있다.“아이가 네 배를 찼다고?”강지혁은 시선을 그녀의 배로 옮겨 조금 얼떨떨한 얼굴로 바라보았다.“응! 한번 만져봐.”임유진은 그의 손을 들어 자신의 복부를 만지게 했다.강지혁은 확실하게 느껴지는 태동에 조금 놀랍기도 하고 또 신기하기도 해 그만 몸이 경직되어버렸다.태동이라는 게 무엇이고 언제쯤 느낄 수 있는지에 대해 그도 임유진 못지않게 잘 알고 있다.하지만 이론은 어디까지나 이론으로 실제로 이렇게 태동을 느끼게 되니 완전히 다른 느낌이었다.이제야 진정으로 이 작은 배속에 생명이 자라고 있다는 것이 확실하게 머리에 박히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이 조그마한 아이들은 머지않아 세상 밖으로 나오게 될 거고 크게 울고 또 활짝 웃으며 서서히 커가게 될 것이다.임유진은 강지혁의 넋을 잃은 표정에 피식 웃었다.평소에도 물론 상당히 귀엽지만 지금은 평소보다 몇 배는 더 귀여워 보였다.이런 얼굴은 아마 그녀밖에 보지 못했을 것이고 앞으로도 그녀밖에 보지 못할 것이 분명하다.임유진은 소파에 앉아 편한 자세를 취했다. 그리고 본격적으로 아이가 차고 있는 곳이 어딘지 그의 손을 이곳저곳 움직이며 알려주기 시작했다.아이들은 큼지막한 아빠의 손길을 느껴서 그런지 그에 보답하듯 더 세게 발길질을 해댔다.덕분에 임유진의 배는 계속해서 꿈틀거렸다.강지혁은 무릎을 꿇고 그녀의 복부를 쓰다듬으며 진지한 얼굴로 태동을 느꼈다.임유진은 그 모습을 보더니 결국 참지 못하고 휴대폰을 꺼내 사진을 찍기 시작했다.“갑자기 사진은 왜 찍어?”강지혁이 고개를 들며 물었다.“기념하려고. 나중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