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자 다 먹을 수 있든 없든 그건 내가 알아서 할 문제야.”이경빈은 말을 마친 후 옆으로 가 비어있는 테이블에 착석했다.양복 차림의 그가 플라스틱 의자에 앉아 있는 모습이 이곳과는 어울리지 않아 조금 웃기기도 했다.탁유미는 이경빈이 이곳까지 직접 걸음을 해 거기에 음식까지 주문할 줄은 몰랐다.여기까지 온 목적이 뭐지?그녀는 고개를 숙인 채 요리를 하면서 생각을 멈추지 못했다.곧 전 메뉴가 준비되고 그녀는 이경빈이 앉은 테이블 위에 하나하나 올리기 시작했다. 얼마 안 가 작은 테이블 위에 메뉴가 넘칠 듯 올려졌다.탁유미는 이 순간 메뉴에 7가지 음식밖에 없는 것을 다행으로 여겼다. 그게 아니라면 테이블을 하나 옆에 붙여야 했을 테니까.“음식 솜씨가 예전보다 좋아졌네.”탁유미가 마지막 메뉴를 테이블에 내려놓았을 때 이경빈이 갑자기 말을 걸어왔다.이에 탁유미의 몸이 움찔 떨렸다.“사람은 변하기 마련이니까.”변하지 않으면 윤이를 먹여 살릴 수도 없었을 것이다. 탁유미는 각종 화장품에 매달렸던 예전과는 달리 지금은 기본적인 스킨케어만 하고 생기있는 얼굴을 위해 옅은 립스틱 정도만 바르고 다닌다.게다가 스킨케어 제품도 최대한 양이 많고 저렴한 것으로 구매하며 립스틱은 이미 몇 년째 한 가지만 쓰고 있다.그리고 그녀의 손은 음식을 해야 했기에 칼에 베이고 굳은살이 생겨 성한 구석 하나 없었다.탁유미는 말을 마치고 나서 다시 새로운 손님을 받으러 갔다.이경빈은 바삐 돌아치는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얼굴이 점점 어두워졌다.피곤한 게 눈에 뻔히 보이는 데도 그녀는 손님들을 상대할 때 언제나 예쁜 미소를 짓고 있었다.하지만 분명히 예쁜 미소였지만 전처럼 마음속 깊이 우러러 나오는 미소와는 달리 오로지 손님을 상대하기 위한 그런 미소였다.이경빈은 젓가락을 들어 앞에 놓인 음식들을 하나하나 먹어보기 시작했다.그는 셰프의 요리를 맛보기라도 하듯 아주 천천히 음미했다.탁유미는 최대한 이경빈의 존재를 무시하며 그를 다른 손님들과 똑같이 대하려고 애
그 여성은 바로 의자에서 일어나 도망치듯 자리를 벗어났다.그 광경을 전부 지켜본 탁유미는 속으로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고고하고 항상 제일 좋은 것만 고집하는 이경빈이 고작 이런 유혹에 쉽게 넘어갈 리가 없었다.전에도 인지도가 없는 여자 연예인이 그의 술잔에 약을 타 그를 어떻게 해보려고 했었다. 하지만 이경빈은 약효가 분명히 약효가 돌고 있음에도 상대방에게 작은 스킨십도 허락하지 않았다.그 뒤로는 예상했던 바와 같이 그 연예인은 더 이상 연예계에 발을 들일 수 없게 됐고 아예 해성시에서 사라져버렸다.탁유미는 그 기억이 떠오르자 소름이 돋아 고개를 세차게 흔들었다.‘그만 생각해. 과거는 악몽일 뿐이야. 그러니까 그만 생각해.’이경빈이 그녀에게 남겨준 유일하게 좋은 건 윤이 뿐이다.탁유미는 떠오르는 기억을 다시 가라앉힌 뒤 이경빈이 있는 쪽을 힐끔 바라보았다.그러다 그의 까만 눈과 그만 딱 마주쳐버리고 말았다.고작 눈이 마주친 것뿐인데 그녀는 몸이 뻣뻣하게 굳어버렸다.마치 시간이 멈춘 듯, 무언가에 홀린 듯 그녀는 그를 빤히 바라본 채로 시선을 뗄 수가 없었다.이경빈은 무슨 생각인 건지 아무런 말도 없이 그저 그녀를 가만히 바라만 보았다.그렇게 얼마만큼의 시간이 흘렀을까, 갑자기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무슨 드라마 찍어? 눈빛이 왜 이렇게 뜨거워? 그 뜨거운 눈빛 우리한테도 주면 안 되나?”지독한 술 냄새가 탁유미의 코를 찔러왔다.고개를 돌려보니 거기에는 이미 거하게 한잔한 두 명의 취객이 서 있었다. 그들은 음흉한 눈길로 그녀를 바라보았고 그중 한 명은 스킨십을 시도하려는 듯 어느새 가까이 다가오고 있었다.이에 그녀가 다급하게 옆으로 피해 거리를 두고 경계심 가득한 얼굴로 두 사람을 훑었다.이들은 가게로 찾아와 행패를 부리던 사람들은 아니었다.아니면 그들만으로는 부족하다고 생각해 사람을 더 고용한 건가?그래서 이제는 성희롱인 건가?“어어? 우리가 뭐 벌레라도 돼? 왜 피하고 그래. 나이도 어린 것 같은데 몇 살이야?
왜 구해준 거지?탁유미가 비참하면 할수록, 고통받으면 받을수록 그 모습을 옆에서 방관하며 좋아해야 하는 거 아닌가?그때 나머지 한 명의 남자가 이경빈에게 주먹을 휘둘렀다.이경빈은 품에 있는 탁유미를 옆으로 밀어버리고는 상대방의 주먹이 꽂히기 전 먼저 주먹을 휘둘러 복부를 세게 가격했다.이경빈은 절대 약하지 않았다. 탁유미와 함께 있을 때 그는 회사 일을 처리하면서도 틈을 내 유명한 복싱 선수를 코치로 두고 몸을 단련했었다.탁유미는 그가 취객 두 명을 상대하는 데 있어 전혀 문제없을 걸 알기에 크게 걱정하지 않았다.그녀의 머릿속은 지금 왜 자신을 구해줬을까 하는 생각만 맴돌 뿐이었다.그녀의 예상대로 두 명의 취객은 2분도 채 버티지 못하고 얼굴이 피떡이 된 채 그의 발아래서 살려달라고 빌었다. 그러고는 술이 다 깬 듯 그가 옷에 묻은 먼지를 털 때 황급히 도망쳤다.이경빈은 탁유미 앞으로 다가왔다.“앞으로 여기서 장사하지 마.”만약 오늘 그가 없었더라면 탁유미는 아마 두 명의 남자에게 잡혀 험한 꼴을 당했을 것이다.이런 일들이 빈번히 일어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자 그는 짜증이 밀려왔다. 심지어 아까 두 남자가 도망친 걸 내버려 둔 것이 후회되기 시작했다.탁유미는 그의 말에 실소했다.“이런 식으로 내 수입원을 완전히 끊어버릴 생각이었어? 사람을 고용해 행패 부리게 한 것도 모자라 이제는 직접 나서서 쇼까지 하는 거야? 차라리 아까 구해주지 말지 그랬어. 그랬다면 내가 트라우마가 생겨 결국 그만뒀을지도 모르잖아.”이경빈은 미간을 꿈틀거렸다.“아까 그 두 사람 공수진이 보낸 거 아니야.”“그럼 전에 행패 부리러 온 사람들은 공수진이 보낸 게 맞다는 소리네?”그 말에 이경빈은 입을 꾹 닫은 채 아무런 변명도 하지 않았다.탁유미는 헛웃음이 튀어나왔다. 그리고 그 모습은 무척이나 쓸쓸해 보였다.공수진이 맞았다. 억울하게 옥살이해 이 지경까지 왔는데도 공수진은 여전히 그녀를 놓아주지 않았다.아니, 진정으로 그녀를 놓아주지 않는 사람은 눈앞
대체 왜 그런 말을 한 거지? 눈앞에 있는 여자가 불쌍해서? 한때는 잘 나갔던 여자가 빛을 잃은 채 이곳에서 힘들게 살고 있는 게 안타까워서?하지만 그녀는 그가 불쌍하다고, 안타깝다고 여기면 안 되는 여자다. 그녀에게는 그럴 자격이 없으니까.“윤이 생각해서 얘기한 것뿐이야. 판결이 나기 전까지 윤이는 너와 함께 있을 거고 나는 그 짧은 순간에도 윤이가 힘들게 사는 거 보고 싶지 않아.”이 말은 탁유미가 아닌 이경빈이 자신에게 들려주는 말이었다.“윤이는 내 아들이야. 네 아들이 아니고.”탁유미는 차갑고 단호하게 말을 내뱉었다.“전에 네가 했던 말 자꾸 잊어버리는 것 같아서 다시 말해주는데, 너는 그때 내가 네 아이를 임신한다고 해도 지우게 하겠다고 했어. 나 같은 여자는 네 아이를 낳을 자격이 없다고도 했고. 그런데 대체 이제 와서 왜 이래? 너야말로 대체 무슨 자격으로 윤이를 데려가려는 건데!”이경빈은 얼굴을 굳힌 채 한 걸음 한 걸음 탁유미의 앞으로 다가왔다.“너는 내 아이를 낳기로 했을 때 이런 날이 올 거라고 예상했었어야 했어.”탁유미의 몸이 움찔 떨렸다.“아이를 그렇게 원하는 것도 아니면서 네 핏줄이 내 옆에 있는 건 싫어?”“네 옆에서 윤이가 행복할 것 같아? 네가 윤이한테 해줄 수 있는 게 뭔데.”이경빈은 그녀의 아픈 구석을 콕콕 찔렀다.“왜, 윤이가 크면 이 포장마차에서 서빙이라도 시키게? 그리고 엄마가 했다는 걸 사람들한테 들켜서 애가 평생 주눅 들어 살았으면 좋겠어?”탁유미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려버렸다.하지만 야속하게도 그의 말은 계속되었다.“소송이 끝나면 바로 윤이를 해성시로 데려갈 거야. 너한테 애를 맡기는 것보다 수진이한테 맡기는 게 훨씬 나아. 해성시로 가면 윤이는 더 좋은 환경에서 더 좋은 것들을 누리며 살 수 있게 돼. 너, 윤이한테 그런 거 줄 수 있어? 없잖아.”탁유미는 입술을 파르르 떨며 반박할 말을 골랐지만 결국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그러고는 묵묵히 발걸음을 돌려 식자재를 실은 작은 차에 올라
호기롭게 회사로 찾아간 건 좋았지만 두 사람은 강현수를 만나기도 전에 프런트 데스크에서 막혀버렸다. 한지영이 이곳으로 온 목적을 설명하고 백연신이 누군지 얘기했는데도 소용이 없었다. 직원은 그저 강현수가 현재 회사에 없다고만 전할 뿐 어디로 갔는지는 입을 꾹 닫고 알려주지 않았다.한지영이 다급한 마음에 발만 동동 구르고 있자 백연신이 그녀를 진정시키며 말했다.“전화해 보면 되는 일이야.”“강현수 번호 있어요?”한지영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없어. 하지만 연락처를 알아내는 게 어려운 일은 아니지.”백연신은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어 뭐라고 얘기하더니 5분도 안 돼 강현수의 연락처를 알아냈다.이에 한지영은 감탄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강현수의 전화번호는 절대 쉽게 알아낼 수 있는 것이 아닐 텐데 백연신은 너무나도 쉽게 알아내 버렸다.역시 백연신이라고 해야 할까?백연신은 곧바로 강현수에게 전화를 걸었고 그대로 휴대폰을 한지영에게 넘겨주었다.한지영은 전화기 너머에서 강현수의 목소리가 들리자마자 다급하게 물었다.“안녕하세요. 강현수 씨 맞죠? 저 유진이 친구인 한지영이라고 해요. 혹시 강지혁 씨가 유진이를 어디로 데려갔는지 알고 있어요?”한지영이라는 이름이 들리자마자 강현수의 표정이 미세하게 변했다. 그는 한지영을 기억하고 있다.그녀는 임유진이 감옥에 가게 생겼을 때 유일하게 발 벗고 도와준 사람이며 임유진이 형을 살게 됐을 때는 면회하러 자주 갔었던 사람이다.그리고 바로 엊그제 자선 파티에서 얼굴도 봤었다.“아직 알아내지 못했어요. 하지만 계속 찾을 겁니다.”강현수가 대답했다.“그러시구나... 저희도 아직 알아내지 못했어요. 혹시 강현수 씨 쪽에서 먼저 알아내게 되면 이 번호로 전화 한 통 해주실 수 있으세요?”“그러죠.”강현수는 순순히 알겠다고 한 뒤 전화를 끊었다. 그러고는 고개를 들어 앞을 바라보았다.그의 앞에는 수많은 모니터가 놓여 있었고 화면 속에는 그날 밤의 도로 CCTV 영상이 흘러나오고 있었다.다만 강지혁의 차량
한편 그시각, 임유진은 의자에 앉아 식탁 위에 차려진 음식들을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총 세 가지 음식에 국 하나, 음식 모양새로 보아 셰프 요리는 아닌 것 같았다.“내가 만든 거야. 먹어봐.”그녀의 의문을 눈치챈 것인지 맞은 편에 앉은 강지혁이 먼저 입을 열었다.이에 임유진은 조금 놀란 듯 보였다.강지혁이 직접 요리를 했다고?“그때, 작은 원룸에 있을 때 너도 나한테 요리 많이 해줬잖아. 그래서 나도 널 위해 해봤어. 맛이 없으면 없다고 솔직하게 말해. 다음에 더 맛있게 해볼 테니까.”그는 말을 마친 후 예쁜 두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예쁘게 웃었다.마치 아직 연인인 것처럼, 한 번도 헤어진 적 없는 것처럼, 제일 행복했었던 그 시간으로 다시 돌아가기라도 한 것처럼 말이다.임유진은 어딘가 불편한 느낌에 그의 시선을 피해버리고 최대한 그와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고 애썼다.그의 두 눈은 꼭 블랙홀과도 같아 마주치는 순간 속절없이 빠져들게 되고 자꾸 고요한 마음에 파도가 인다.“도우미는 없어? 한 번도 못 본 것 같은데.”임유진은 화제를 돌렸다.“정기적으로 와서 냉장고 채워주고 청소해주고 있어. 하지만 네가 다른 사람과 만날 일은 없을 거야. 그냥 여기 너랑 나만 있다고 생각해.”이에 임유진의 몸이 움찔했다.하지만 강지혁은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 말을 이었다.“그러니까 나만 바라보고 언제 날 다시 사랑해줄 건지만 생각해.”“그럴 일 없다고 난 분명히 말했어.”“나도 말했어. 넌 분명히 다시 날 사랑하게 될 거라고.”강지혁은 그녀를 똑바로 보며 말했다.“날 다시 사랑하게 될 일 없다면서 왜 지금은 내 눈도 못 쳐다보는데?”임유진은 입술을 꼭 깨물고는 고개를 홱 하고 들어 그의 눈을 빤히 바라보았다.두 사람의 시선이 공중에서 부딪혔다.임유진은 그를 한껏 노려보고 있었고 강지혁은 그런 그녀를 향해 미소를 지었다.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강지혁이 먼저 입을 열었다.“이제 밥 먹어. 차가워지면 맛없어.”그는 먼저 시선을 내려 젓가락
“강씨 집안 사람들만 아는 옛 저택이야. 대외적으로 한 번도 공개된 적 없는 곳이기도 하지.”강지혁은 딱히 숨길 생각이 없는 듯 바로 대답해주었다.하지만 그 말을 듣고 임유진은 미간을 찌푸렸다.방금 그 말은 두 사람이 이곳에 있는 걸 그 누구도 찾아내지 못할 거라는 뜻인가?“그리고 한 가지 더 알려주자면 이 저택에 갇혔던 사람, 너뿐만이 아니야.”임유진이 눈을 깜빡거리며 그를 바라보았다.무슨 뜻이지?“너 말고 여기 갇혔던 여자 한 명 더 있어. 애초에 이 저택을 사들인 것도 그 여자를 가두기 위해서니까.”강지혁은 표정 변화 하나 없이 너무나도 태연하게 무서운 말을 꺼냈다.임유진은 순간 한기에 뒤덮인 듯 소름이 돋았다.전에도 이곳에 갇혀버린 여자가 있었다고?“70년 전쯤이었을 거야. 강씨 가문에 한 남자가 한눈에 반한 여자가 있었어. 하지만 그 여자는 당시 정혼자가 있었고 그 정혼자와는 예쁜 사랑을 나누던 연인이기도 했지. 그래서 남자는 그 여자를 이곳으로 납치해왔어. 이곳에 가둬놓고 매일 자기만 보게 했지. 언젠가는 자기를 사랑하게 될 거라고 믿으면서.”강지혁의 목소리는 원래 부드러운 편이 아니었지만 이 넓은 공간에서 듣게 되니 어딘가 무섭게 들려왔다.조금 전까지만 해도 이곳이 그저 나무 향이 솔솔 풍겨오는 운치 있는 곳이라고만 생각했는데 그의 말을 듣고 나니 괜히 오싹해졌다.“그래서...? 그 뒤로는 어떻게 됐는데?”임유진의 목소리는 조금 잠겨있었다.“그 여자는 너무 자연스럽게 남자를 사랑하게 됐어. 그리고 이곳에서 나갈 수 있게 됐지.”강지혁은 임유진의 두 눈을 빤히 바라보며 물었다.“너는 어때? 너도 여기서 나가고 싶어?”임유진은 순간 입술이 바싹 말라오는 느낌이 들었다.“너를 사랑하지 않으면 나 정말 여기서 못 나가?”“네가 날 다시 사랑할 때까지 나는 계속 네 옆에 있을 거야.”이곳을 나가기 위해서는 정말 강지혁을 사랑할 수밖에 없는 것일까?마치 이곳에 갇혀있던 그 여자처럼?사랑하던 정혼자가 있음에도 자기를
“그래, 헤어졌지.”강지혁이 젓가락을 내려놓았다.“너랑 헤어진 게 내 평생 가장 후회되는 일이야. 그래서 더 이상 그런 후회 하고 싶지 않아.”강지혁은 임유진이 그를 너무 많이 사랑해 무슨 일이 있어도 떠날 수 없게 만들 생각이다....저녁이 되고 임유진은 방 안에 있는 소파에 앉아 손에 든 보라색 드레스를 지그시 바라보았다.목 부분부터 팔까지 다 찢겨 있어 수선한다고 해도 처음처럼 그렇게 예쁘지는 않을 것이다.임유진은 너무나도 예뻤던 드레스가 지금 이 지경이 된 것에 죄책감을 느꼈다. 단지 드레스가 훼손돼서가 아닌 ‘현수’가 선물해 준거라서 더 그런 마음이 드는지도 모르겠다.강현수가 어릴 적 여자아이가 그녀라는 걸 모른다고 해도, 강현수가 이 드레스를 선물한 것에 큰 의미가 없다고 해도 결과적으로 그는 어릴 적 두 사람이 했던 약속을 결국 지켜내고야 말았다.임유진은 입술을 살짝 깨물고는 옆에 있는 책상 서랍을 뒤적거리며 반짇고리 함을 꺼내 들었다.사실 그녀는 아까 심심하던 차에 방 이곳저곳을 둘러보았다. 그러다 서랍에서 뜻밖에도 이 반짇고리 함을 발견하게 되었다.막 발견했을 때 케이스 위에는 한 층의 먼지가 쌓여있었다. 안에는 여느 반짇고리 함이 그렇듯 갖가지 색상의 실과 쪽 가위 그리고 여러 가지 길이의 바늘이 있었다. 실의 색상은 조금 바랬지만 끊어질 정도는 아니었고 쪽 가위도 오래된 것 치고는 잘 들었다.새것은 아닌 거로 보아 누군가가 쓴 것은 분명해 보였다.아까 강지혁이 얘기했던 이야기 속의 여자가 남기고 간 것일까?임유진은 색이 바랜 덕에 드레스 색과 흡사하게 되어버린 보라색 실을 집어 들고 바늘을 꺼내 수선을 시작했다.이미 엉망이 된 드레스이고 다시는 입지 못할 드레스였지만 그래도 이 드레스는 ‘현수’의 선물이자 약속이기에 이대로 쓰레기통에 버리고 싶지는 않았다.그녀는 한 땀 한 땀 ‘현수’와의 약속을 떠올리며 정성스럽게 바느질을 했다.그때 방문이 열리고 강지혁이 들어왔다. 그는 소파에 앉아 드레스를 수선하고 있는 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