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경찰서에서 현수 씨가 너한테 고백했잖아. 그럼 너는? 너는 어떤데? 그때 보니까 강지혁 씨는 아직 너 좋아하는 것 같던데, 너랑 지혁 씨... 정말 헤어진 거 맞아?”배여진의 질문에 임유진은 그저 그녀를 담담히 바라만 볼 뿐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그러자 배여진은 갑자기 불쌍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너도 알다시피 나는 똑똑하지도 않고 전에는 이상한 사람하고 결혼해 힘들게 살았어. 그러다 현수 씨를 만났고 이제 현수 씨는 내가 기댈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 되어버렸어. 그리고 나는 지금 진심으로 현수 씨를 좋아해.”그녀는 그 말을 하면서 얼굴을 붉혔다.“너한테는 강지혁 씨가 있잖아. 나한테 남은 사람은 현수 씨밖에 없어. 그런 나한테서 현수 씨 빼앗아 갈 건 아니지...?”임유진은 그녀를 계속 바라만 보았다.배여진은 그 시선에 도둑이 제 발 저리듯 자기도 모르게 시선을 피해버렸다. 그러다 다시 마음을 다잡고 임유진을 바라보았다.“왜 그렇게 봐? 혹시 내가 전에 했던 얘기 때문에 아직도 화가 안 풀린 거야? 그랬다면 미안해. 하지만 현수 씨 일은 진심이야.”“그래서? 나는 강현수를 사랑하지 않아. 강현수한테는 아무런 감정도 없어. 뭐, 이런 말을 해주길 원하는 거야? 그러면 언니 마음이 조금 안심될 것 같아? 만약 내가 언젠가 강현수를 좋아하게 되면 지금 한 말을 들먹이며 나를 막아보기라도 하게?”임유진은 기나긴 침묵 끝에 담담하게 말을 내뱉었다.배여진의 뜨끔하는 표정을 보니 그럴 속셈이 맞는 듯했다.“언니, 이러는 건 아무런 의미도 없어. 외할머니 얼굴을 봐서 다시 한번 충고하는데 강현수는 절대 쉬운 남자가 아니야. 지금이라도 사실을 털어놓으면 어쩌면 큰 봉변은 당하지 않을 수 있어. 하지만 여기서 멈추지 않고 계속 헛된 걸 욕심내면 그때는...”만약 강현수가 배여진의 거짓말을 알게 된다면 그는 절대 그녀를 곱게 보내주지 않을 것이다. 아마 그 어느 때보다 더 잔혹해질지도 모른다.“너 그게 무슨 뜻이야?!”배여진의 표정은 삽
고이준은 별다른 질문 없이 바로 차에 시동을 걸어 서서히 단지를 벗어났다.강지혁은 피곤한 듯 천천히 두 눈을 감았다.아까 임유진을 본 순간 줄곧 공허했던 마음이 한순간에 가득 채워진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러다 그녀가 시야에서 사라졌을 때는 또다시 마음이 텅 비어 버린 것 같았다.그녀는 여전히 그의 모든 감정을 이토록 쉽게 쥐고 흔들 수 있다. 임유진은 그저 존재하는 것만으로 그에게 만족감과 실망감을 동시에 안겨줄 수 있는 그런 여자다.강지혁은 자신이 마치 그녀를 사랑하지 않을 수는 없게 설계된 몸이 된 것만 같았다.“고 비서는 내가 아직 임유진을 사랑하는 것 같아?”강지혁의 뜬금없는 질문이 조용한 적막을 깨고 울려 퍼졌다.고이준은 핸들을 꽉 쥔 채 뻣뻣하게 굳어버렸다.대체 저 질문에 어떻게 대답해야 할까.“대표님, 저는 음... 그게...”고이준은 어떻게 말을 해야 할지 몰라 대답을 망설이며 최대한 시간을 끌었다.“쓸데없이 머리 굴리지 말고 솔직하게 대답해.”강지혁은 그의 의도를 파악한 듯 싸늘한 목소리로 명령했다.고이준은 결국 속으로 한숨을 쉬고는 입을 열었다.“제가 느끼기에 대표님께서는 아직 임유진 씨를 사랑하시는 거로 보입니다. 아니면 강현수 씨가 임유진 씨에게 사랑을 고백한 후 그렇게 화를 내지도 않았을 테니까요.”예전에는 여자들이 어떻게든 강지혁의 옆에 있으려고 매달렸다면 지금은 강지혁이 어떻게든 임유진의 옆에 있으려고 매달리는 것 같았다.“그러니까 내가 유진이를 누나라고 부르는 게 다 부질없는 짓이었다는 말이네?”어쩐지 허탈한 듯한 강지혁의 목소리가 들려왔다.고이준은 잠깐 멈칫하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대표님께서는 임유진 씨가 대표님을 노숙자로 알던 시절이 그리웠던 건 아닐까요?”그 시절이 그리운 거라고?강지혁의 눈이 흠칫 떨렸다.확실히 그는 그때를 그리워하고 있다.그때의 임유진은 강지혁을 완전히 믿고 있었으며 그에게 가족이라는 따뜻함도 주었으니까.그런 따뜻함은 그의 어머니도, 그의 할아버지도 심지어는 그
소지혜가 다시 끌려간 후 임유진은 그 자리에 멈춰 움직일 수가 없었다.소지혜가 그토록 순순히 인정한 게 강현수와 관련 있다는 건가?한편 차 변호사는 소지혜의 말을 듣더니 잠깐 생각에 잠겼다.법원에서 나와보니 입구 쪽에 마세라티 한 대가 세워져 있었고 그 안에서 강현수가 내리더니 임유진을 바라보았다.차 변호사는 그를 보고는 임유진의 어깨를 톡톡 두드렸다.“강현수 씨한테는 유진 씨가 대신 감사 인사를 전해주세요. 아마 강현수 씨 아니었으면 이렇게 쉽게 끝나지 못했을 테니까요.”차 변호사는 임유진이 뭐라고 대답하기도 전에 계단을 내려갔다. 그러고는 강현수와 짧게 인사를 나눈 후 차를 타고 가버렸다.임유진은 계단 위에 멈춰선 채 시선을 내려 강현수를 가만히 바라보았다.그리고 강현수는 고개를 들어 그런 임유진을 보며 웃었다.법원에서 나오던 사람들은 강현수의 얼굴을 알아봤는지 내려가던 걸음을 멈추고 두 사람을 바라보며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연예인보다 훨씬 더 얼굴이 많이 알려진 사람이라 어디로 가든지 항상 이목이 쏠렸다.임유진은 숨을 한번 깊게 들이켜고는 계단을 내려가 천천히 그에게로 다가갔다.“사건 무사히 해결된 거 축하해요.”강현수가 먼저 입을 열었다.임유진은 아무것도 묻지 않은 채 대뜸 이런 말을 내뱉는 그를 보며 잠깐 멈칫했다.이것으로 소지혜가 태도를 바꾼 이유가 그와 연관이 있는 게 확실시되었다.“사건 담당 변호사는 내가 아니라 차정훈 변호사예요.”그 말에 강현수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뭐가 됐든 잘된 거잖아요.”“소지혜 씨가 죄를 인정하게 한 거 현수 씨예요?”임유진이 물었다.“그 여자가 그래요?”“네.”“나한테는 어려운 일이 아니니까요.”강현수는 마치 이런 건 지극히 간단한 일처럼 얘기했다.임유진은 그가 어떤 방법을 써서 소지혜가 인정하도록 한 건지는 모른다. 다만 해당 사건으로 소지혜는 더 이상 연예계에 발을 붙이지 못할 것이라는 건 잘 알고 있다.“도와줘서 고마워요.”“고마우면 지금 나랑 어디 같이 가줘요.”
“안 봐도 돼요. 전에 손 때문에 강지혁이랑 같이 병원에 간 적 있었거든요.”임유진은 그에게 잡힌 손을 빼내며 거절했다.강지혁과 함께 병원에 갔었을 때 의사는 치료 가능한 최적기를 놓쳤다며 그녀에게 통증을 완화하는 약만 처방해주었다. 다만 비 오는 날만 되면 약 효과가 없는 것인지 으슬으슬 아프기는 했지만 말이다.“기왕 여기까지 왔는데 선생님한테 한번 보여요.”강현수는 임유진의 손을 잡고 반강제로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안으로 들어와 보니 안은 훨씬 더 썰렁했고 진료실로 들어가니 백발에 흰 수염을 가진 노인 한 분이 의자에 앉아 있었다.진료실 벽면에는 작은 티비가 걸려 있었고 거기에는 현재 인기리에 방영 중인 드라마가 흘러나오고 있었다.해당 드라마는 임유진도 직장 동료들이 얘기한 적 있어 알고 있었다.감동적이고 재밌는 드라마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의사가 진료시간에 이토록 열심히 보고 있을 줄은 몰랐다. 그 노인은 마치 시사 토론이라도 보는 것처럼 표정이 진지했다.“여사님이 최근 꽂힌 드라마인가 보죠?”강현수가 먼저 입을 열었다. 그러자 소영훈이 고개를 홱 돌리더니 그를 보고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이런 드라마 좀 안 찍을 순 없어? 마누라가 혼자 보면 될 것을 기어코 나와 함께 보겠다고 매일 밤 난리야. 안 보고 잠이라도 들면 다음 날에 재방송으로 꼭 보라고 신신당부까지 해.”어제저녁 많이 피곤했던 터라 드라마 시작과 함께 잠이 드니 오늘 아침 식사 시간에 어떻게 보다가 잠들 수 있냐며, 오늘 내로 재방송을 보고 오라고 출근 때까지 시달렸다.이딴 드라마가 뭐가 그렇게 재밌냐고 묻자 자고로 부부란 취미도 같이 해야 한다며, 그래야 감정이 식지 않고 오래간다고 일리 있는 말을 잔뜩 늘어놓았다.이에 소영훈은 결국 꼬리를 내렸지만 이런 드라마가 눈에 들어올 리가 만무했고 결국 어쩔 수 없이 공부한다 생각하고 열심히 보게 된 것이다.강현수는 피식 웃으며 대꾸했다.“이 드라마 우리 회사 작품 아니에요.”소영훈은 혀를 차더니 티비를 꺼
확실히 강현수 말대로 실력 있는 의사인 듯싶었다.덤덤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임유진의 모습에 강현수의 심장은 한번 또 한 번 내려앉았다.대체 그녀는 그간 어떤 고통을 겪었던 걸까.손톱이 뽑히고 손가락 골절까지... 대체 누가 이딴 짓을 한 거지?!강현수는 순간 그녀의 손을 이렇게 망쳐놓은 이름 모를 상대에게 살인 충동까지 일었다.소영훈은 심각한 얼굴로 임유진의 손가락 마디마디를 매만지더니 한참이 지나고 나서야 입을 열었다.“일단은 어떤 상태인지 정확히 봐야 하니까 먼저 엑스레이부터 찍읍시다.”임유진은 그를 따라 검사실로 향했다. 소영훈은 엑스레이 결과를 보고 정밀 검사를 위해 CT까지 찍게 하였다.임유진은 다 찍은 후 다시 진료실로 돌아왔고 얼마 안 가 소영훈도 다시 진료실로 들어왔다.“손가락을 다치고 나서 제때 치료를 못 한 탓에 치료할 수 있는 최적기를 놓쳤어요.”“네, 알고 있어요.”강지혁과 함께 찾은 의사 역시 이와 똑같은 얘기를 했었다.“습하고 추운 날이면 손가락이 많이 아팠을 겁니다. 정교한 움직임은 그간 하기 힘들었을 거고요. 하지만 치료할 수 없는 건 아니에요.”소영훈의 소견에 임유진은 깜짝 놀랐다.“제 손, 치료할 수 있다는 말씀이세요?”“아마 대학 병원으로 가면 통증 완화 약 처방만 내려줄 겁니다. 하지만 나한테서 치료받으면 손가락 움직임을 조금 더 원활하게 해줄 수 있어요. 젓가락을 쥐거나 글을 쓰는 일상적인 행동을 무리 없이 할 수 있게 되겠죠. 다만 치료과정이 매우 고통스러울 거예요. 마취를 할 수 없거든요. 그러니 한번 잘 생각해보세요.”임유진은 이제까지 손가락은 평생 이럴 수밖에 없다고 포기하고 살았다.“괜찮아요. 아픈 건 참을 수 있어요.”3년간 옥살이하고 나니 웬만한 고통은 다 참을 수 있게 되었다.“그렇다면 다행이네요. 앞으로 일주일에 한 번씩 찾아오세요. 아, 다음에 언제 올 수 있을지는 미리 얘기해 줘요. 그래야 나도 준비를 해둘 수 있으니까.”“저... 비용은 어느 정도 들까요?”임유진이
“고마워할 필요 없어요. 나도 혹시 하는 마음에 데려온 거고 마침 운 좋게 치료할 수 있다고 하니 다행인 거죠.”강현수는 임유진을 차에 태운 뒤 자신도 운전석에 올랐다. 그러고는 천천히 시동을 걸며 그녀에게 물었다.“손은 언제 다친 거예요?”“이렇게 된 지 한 4년 정도 되네요.”4년이라...그렇다는 건 이제 막 감방에 들어갈 때 생긴 일일 것이다.“감옥에 있을 때 누군가가 일부러 그런 건가요?”임유진은 그 질문에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지만 그녀의 표정이 이미 모든 걸 말해주고 있었다.“누가 그랬어요? 대체 누가 손을 그렇게 만들었어요?”강현수의 낮은 목소리에는 분노가 묻어 있었다.대체 누가 그녀에게 이런 잔인한 짓을 저질렀을까.임유진이 옥살이를 했다는 건 이미 알고 있었지만 그 안에서 그녀가 어떤 상황이었는지 어떤 고통을 겪었는지까지는 깊게 생각해본 적이 없다.그러다 오늘 처음으로 그녀가 겪은 고통의 한 조각을 엿보게 되었다.임유진은 자신의 손을 바라보며 담담하게 대답했다.“이제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아요.”“누가 그랬는지 물었어요.”강현수가 다시 한번 물었다.“그걸 지금 말해준다고 한들 무슨 의미가 있는데요? 내가 겪은 고통을 그들에게 똑같이 갚아 주기라도 할 거예요?”“그래 줄까요?”강현수의 눈이 무섭게 가라앉았다.그는 그녀에게 이런 짓을 한 놈들을 전부 다 찾아내 그녀가 겪었던 고통 그 이상을 맛보게 해주고 싶었다.임유진은 강현수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차량이 신호등에 걸렸을 때 강현수는 고개를 돌려 임유진을 바라보며 진지한 얼굴로 얘기했다.“난 진심이에요. 유진 씨가 원한다면 당신에게 고통을 준 인간들을 전부 다 찾아내 똑같이 갚아 줄 수 있어요. 그게 누구라도 상관없어요. 유진 씨의 분이 풀린다면 기꺼이 해줄 수 있어요.”그는 진심이었다.그의 눈빛이 그의 입술이 전부 그녀에게 그는 진심이라고 얘기해 주고 있었다.임유진은 순간 어린 시절 자신의 등에 업힌 채로 얘기했던 남자아이의 얼굴이 떠올라 코끝이 찡해졌
다만 그때는 강현수에 관한 기억이 없어 두 사람이 그런 약속을 한 것을 기억하지 못한 채로 이곳에 와 돈가스를 먹었었다.임유진은 젓가락을 들어 돈가스를 소스에 찍어 한입 베어 물었다.‘오늘은 어릴 적 현수와 같이 밥 먹으러 온 셈 치지 뭐.’이미 어른이 되어버렸지만 강현수가 어릴 적 했던 약속대로 두 사람은 지금 이곳에서 함께 돈가스를 먹고 있다....어느새 날이 어두워지고 마세라티 한 대가 서서히 단지 앞에 멈춰 섰다.집에 도착한 임유진이 차에서 내려 이제 막 두어 걸음 나아가려는데 등 뒤에서 강현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잠깐 기다려요.”그는 뒷좌석에서 일식집 로고가 박힌 포장 봉투를 들고나오더니 임유진에게 건네주었다.“아까 돈가스 꽤 좋아하는 것 같길래 나오기 전에 일 인분 더 주문했어요.”임유진은 조금 머뭇거리더니 결국 포장 봉투를 건네받았다.“고마워요.”안에 든 것이 돈가스라서 그런 것인지, 아니면 어릴 적 현수가 떠올라서 그런 것인지 그녀는 예상외로 순순히 건네받았다.다만 손으로 건네받을 때 강현수가 그녀의 손을 꼭 잡더니 시선을 떨구고 얘기했다.“많이 아팠죠?”임유진은 순간 몸이 움찔 떨렸다.“이미 지난 일이에요.”“내가 유진 씨와 좀 더 빨리 만났으면, 그랬으면 이런 일을 당하지 않아도 됐을 텐데.”이토록 한 여자가 안쓰러운 건 임유진이 처음이다. 강현수는 심지어 그녀의 고통을 전부 자신이 가져가고 싶다는 생각마저 들었다.당시 진애령 사망 사건은 그에게 있어 그저 흔한 기사 한 줄일 뿐이었다. 죽은 사람이 강지혁의 약혼녀가 아니었다면 기억 속에서 벌써 지워버렸을지도 모른다.그 사건에서 3년 형을 받은 여자를 이토록 좋아하고 또 사랑까지 하게 될 줄 그 역시 몰랐을 것이다.만약 알았다면 무슨 수를 써서든 그녀를 지켜주고 힘든 일 하나 없게 해줬을 테니까.임유진은 강현수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았다.사실 두 사람은 이미 어릴 때 만난 적 있는 사이이고 다만 그녀가 그와 함께 한 시간을 잊어버린 것뿐이다.만약 그
임유진은 요 며칠 줄곧 혼자 돌아오다가 오늘 하필이면 강현수의 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왔다. 게다가 지금 강현수는 임유진의 두 손을 꼭 잡고 있었고 두 사람은 서로 시선을 마주한 채 마치... 연인처럼 서로를 바라보았다.고이준은 두 사람이 한시라도 빨리 떨어지길 바라고 또 바랐다....임유진은 강현수에게서 받은 돈가스 포장 봉투를 들고 현관문 앞에 도착했다. 가방에서 열쇠를 꺼내 문을 열고 들어가려는 순간 누군가의 큰손이 그녀보다 먼저 문을 확 열여 제쳤다.이에 임유진이 화들짝 놀라 뒤를 돌아보니 강지혁이 어느샌가 그녀의 뒤에 서 있었다.“깜짝이야. 언제 왔어?”그녀는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며 그를 바라보았다.오늘 강지혁은 얇은 베이지색 스웨터에 검은색 바지를 입고 있었다. 귀공자 같은 그의 얼굴은 오늘도 역시 무척이나 잘생겼지만 어쩐지 임유진은 그의 얼굴이 오늘따라 더 무섭게 느껴졌다.그녀는 본능적으로 지금의 강지혁은 위험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치 조금이라도 그의 심기를 건드렸다가는 시한폭탄처럼 폭발할 것 같은 그런 느낌이었다.“왜 들어가라고 안 해?”청량한 목소리가 복도에 울려 퍼졌다.“오늘은 시간도 늦었고...”임유진이 거절하려 하자 강지혁이 그녀에게로 몸을 기울여왔다.임유진은 자기도 모르게 뒷걸음질을 쳤고 강지혁은 한 걸음 한 걸음 앞으로 다가가더니 이윽고 그녀와 함께 집 안으로 들어와 문을 닫아버렸다.쾅!문이 닫히자 방안은 쥐죽은 듯이 조용해졌다.임유진은 깊게 한번 숨을 들이켜고 물었다.“왜 왔어?”강지혁은 그녀가 들고 있던 포장 봉투 쪽을 보더니 물었다.“그거 강현수가 준거지? 오늘 둘이 같이 있었어?”임유진은 그 말에 흠칫했다가 곧바로 알아챘다. 방금 강현수와 함께 있는 모습을 그에게 들켰다는 것을.“둘이서 밥이라도 먹고 온 거야?”강지혁은 또다시 질문하며 그녀를 몰아세웠다.임유진은 뒤로 계속 한 걸음 한 걸음 물러서다가 이윽고 벽에 부딪혔고 이제는 갈 곳도 없었다.강지혁은 두 손으로 벽을 짚고 그 안에 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