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 봐도 돼요. 전에 손 때문에 강지혁이랑 같이 병원에 간 적 있었거든요.”임유진은 그에게 잡힌 손을 빼내며 거절했다.강지혁과 함께 병원에 갔었을 때 의사는 치료 가능한 최적기를 놓쳤다며 그녀에게 통증을 완화하는 약만 처방해주었다. 다만 비 오는 날만 되면 약 효과가 없는 것인지 으슬으슬 아프기는 했지만 말이다.“기왕 여기까지 왔는데 선생님한테 한번 보여요.”강현수는 임유진의 손을 잡고 반강제로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안으로 들어와 보니 안은 훨씬 더 썰렁했고 진료실로 들어가니 백발에 흰 수염을 가진 노인 한 분이 의자에 앉아 있었다.진료실 벽면에는 작은 티비가 걸려 있었고 거기에는 현재 인기리에 방영 중인 드라마가 흘러나오고 있었다.해당 드라마는 임유진도 직장 동료들이 얘기한 적 있어 알고 있었다.감동적이고 재밌는 드라마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의사가 진료시간에 이토록 열심히 보고 있을 줄은 몰랐다. 그 노인은 마치 시사 토론이라도 보는 것처럼 표정이 진지했다.“여사님이 최근 꽂힌 드라마인가 보죠?”강현수가 먼저 입을 열었다. 그러자 소영훈이 고개를 홱 돌리더니 그를 보고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이런 드라마 좀 안 찍을 순 없어? 마누라가 혼자 보면 될 것을 기어코 나와 함께 보겠다고 매일 밤 난리야. 안 보고 잠이라도 들면 다음 날에 재방송으로 꼭 보라고 신신당부까지 해.”어제저녁 많이 피곤했던 터라 드라마 시작과 함께 잠이 드니 오늘 아침 식사 시간에 어떻게 보다가 잠들 수 있냐며, 오늘 내로 재방송을 보고 오라고 출근 때까지 시달렸다.이딴 드라마가 뭐가 그렇게 재밌냐고 묻자 자고로 부부란 취미도 같이 해야 한다며, 그래야 감정이 식지 않고 오래간다고 일리 있는 말을 잔뜩 늘어놓았다.이에 소영훈은 결국 꼬리를 내렸지만 이런 드라마가 눈에 들어올 리가 만무했고 결국 어쩔 수 없이 공부한다 생각하고 열심히 보게 된 것이다.강현수는 피식 웃으며 대꾸했다.“이 드라마 우리 회사 작품 아니에요.”소영훈은 혀를 차더니 티비를 꺼
확실히 강현수 말대로 실력 있는 의사인 듯싶었다.덤덤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임유진의 모습에 강현수의 심장은 한번 또 한 번 내려앉았다.대체 그녀는 그간 어떤 고통을 겪었던 걸까.손톱이 뽑히고 손가락 골절까지... 대체 누가 이딴 짓을 한 거지?!강현수는 순간 그녀의 손을 이렇게 망쳐놓은 이름 모를 상대에게 살인 충동까지 일었다.소영훈은 심각한 얼굴로 임유진의 손가락 마디마디를 매만지더니 한참이 지나고 나서야 입을 열었다.“일단은 어떤 상태인지 정확히 봐야 하니까 먼저 엑스레이부터 찍읍시다.”임유진은 그를 따라 검사실로 향했다. 소영훈은 엑스레이 결과를 보고 정밀 검사를 위해 CT까지 찍게 하였다.임유진은 다 찍은 후 다시 진료실로 돌아왔고 얼마 안 가 소영훈도 다시 진료실로 들어왔다.“손가락을 다치고 나서 제때 치료를 못 한 탓에 치료할 수 있는 최적기를 놓쳤어요.”“네, 알고 있어요.”강지혁과 함께 찾은 의사 역시 이와 똑같은 얘기를 했었다.“습하고 추운 날이면 손가락이 많이 아팠을 겁니다. 정교한 움직임은 그간 하기 힘들었을 거고요. 하지만 치료할 수 없는 건 아니에요.”소영훈의 소견에 임유진은 깜짝 놀랐다.“제 손, 치료할 수 있다는 말씀이세요?”“아마 대학 병원으로 가면 통증 완화 약 처방만 내려줄 겁니다. 하지만 나한테서 치료받으면 손가락 움직임을 조금 더 원활하게 해줄 수 있어요. 젓가락을 쥐거나 글을 쓰는 일상적인 행동을 무리 없이 할 수 있게 되겠죠. 다만 치료과정이 매우 고통스러울 거예요. 마취를 할 수 없거든요. 그러니 한번 잘 생각해보세요.”임유진은 이제까지 손가락은 평생 이럴 수밖에 없다고 포기하고 살았다.“괜찮아요. 아픈 건 참을 수 있어요.”3년간 옥살이하고 나니 웬만한 고통은 다 참을 수 있게 되었다.“그렇다면 다행이네요. 앞으로 일주일에 한 번씩 찾아오세요. 아, 다음에 언제 올 수 있을지는 미리 얘기해 줘요. 그래야 나도 준비를 해둘 수 있으니까.”“저... 비용은 어느 정도 들까요?”임유진이
“고마워할 필요 없어요. 나도 혹시 하는 마음에 데려온 거고 마침 운 좋게 치료할 수 있다고 하니 다행인 거죠.”강현수는 임유진을 차에 태운 뒤 자신도 운전석에 올랐다. 그러고는 천천히 시동을 걸며 그녀에게 물었다.“손은 언제 다친 거예요?”“이렇게 된 지 한 4년 정도 되네요.”4년이라...그렇다는 건 이제 막 감방에 들어갈 때 생긴 일일 것이다.“감옥에 있을 때 누군가가 일부러 그런 건가요?”임유진은 그 질문에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지만 그녀의 표정이 이미 모든 걸 말해주고 있었다.“누가 그랬어요? 대체 누가 손을 그렇게 만들었어요?”강현수의 낮은 목소리에는 분노가 묻어 있었다.대체 누가 그녀에게 이런 잔인한 짓을 저질렀을까.임유진이 옥살이를 했다는 건 이미 알고 있었지만 그 안에서 그녀가 어떤 상황이었는지 어떤 고통을 겪었는지까지는 깊게 생각해본 적이 없다.그러다 오늘 처음으로 그녀가 겪은 고통의 한 조각을 엿보게 되었다.임유진은 자신의 손을 바라보며 담담하게 대답했다.“이제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아요.”“누가 그랬는지 물었어요.”강현수가 다시 한번 물었다.“그걸 지금 말해준다고 한들 무슨 의미가 있는데요? 내가 겪은 고통을 그들에게 똑같이 갚아 주기라도 할 거예요?”“그래 줄까요?”강현수의 눈이 무섭게 가라앉았다.그는 그녀에게 이런 짓을 한 놈들을 전부 다 찾아내 그녀가 겪었던 고통 그 이상을 맛보게 해주고 싶었다.임유진은 강현수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차량이 신호등에 걸렸을 때 강현수는 고개를 돌려 임유진을 바라보며 진지한 얼굴로 얘기했다.“난 진심이에요. 유진 씨가 원한다면 당신에게 고통을 준 인간들을 전부 다 찾아내 똑같이 갚아 줄 수 있어요. 그게 누구라도 상관없어요. 유진 씨의 분이 풀린다면 기꺼이 해줄 수 있어요.”그는 진심이었다.그의 눈빛이 그의 입술이 전부 그녀에게 그는 진심이라고 얘기해 주고 있었다.임유진은 순간 어린 시절 자신의 등에 업힌 채로 얘기했던 남자아이의 얼굴이 떠올라 코끝이 찡해졌
다만 그때는 강현수에 관한 기억이 없어 두 사람이 그런 약속을 한 것을 기억하지 못한 채로 이곳에 와 돈가스를 먹었었다.임유진은 젓가락을 들어 돈가스를 소스에 찍어 한입 베어 물었다.‘오늘은 어릴 적 현수와 같이 밥 먹으러 온 셈 치지 뭐.’이미 어른이 되어버렸지만 강현수가 어릴 적 했던 약속대로 두 사람은 지금 이곳에서 함께 돈가스를 먹고 있다....어느새 날이 어두워지고 마세라티 한 대가 서서히 단지 앞에 멈춰 섰다.집에 도착한 임유진이 차에서 내려 이제 막 두어 걸음 나아가려는데 등 뒤에서 강현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잠깐 기다려요.”그는 뒷좌석에서 일식집 로고가 박힌 포장 봉투를 들고나오더니 임유진에게 건네주었다.“아까 돈가스 꽤 좋아하는 것 같길래 나오기 전에 일 인분 더 주문했어요.”임유진은 조금 머뭇거리더니 결국 포장 봉투를 건네받았다.“고마워요.”안에 든 것이 돈가스라서 그런 것인지, 아니면 어릴 적 현수가 떠올라서 그런 것인지 그녀는 예상외로 순순히 건네받았다.다만 손으로 건네받을 때 강현수가 그녀의 손을 꼭 잡더니 시선을 떨구고 얘기했다.“많이 아팠죠?”임유진은 순간 몸이 움찔 떨렸다.“이미 지난 일이에요.”“내가 유진 씨와 좀 더 빨리 만났으면, 그랬으면 이런 일을 당하지 않아도 됐을 텐데.”이토록 한 여자가 안쓰러운 건 임유진이 처음이다. 강현수는 심지어 그녀의 고통을 전부 자신이 가져가고 싶다는 생각마저 들었다.당시 진애령 사망 사건은 그에게 있어 그저 흔한 기사 한 줄일 뿐이었다. 죽은 사람이 강지혁의 약혼녀가 아니었다면 기억 속에서 벌써 지워버렸을지도 모른다.그 사건에서 3년 형을 받은 여자를 이토록 좋아하고 또 사랑까지 하게 될 줄 그 역시 몰랐을 것이다.만약 알았다면 무슨 수를 써서든 그녀를 지켜주고 힘든 일 하나 없게 해줬을 테니까.임유진은 강현수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았다.사실 두 사람은 이미 어릴 때 만난 적 있는 사이이고 다만 그녀가 그와 함께 한 시간을 잊어버린 것뿐이다.만약 그
임유진은 요 며칠 줄곧 혼자 돌아오다가 오늘 하필이면 강현수의 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왔다. 게다가 지금 강현수는 임유진의 두 손을 꼭 잡고 있었고 두 사람은 서로 시선을 마주한 채 마치... 연인처럼 서로를 바라보았다.고이준은 두 사람이 한시라도 빨리 떨어지길 바라고 또 바랐다....임유진은 강현수에게서 받은 돈가스 포장 봉투를 들고 현관문 앞에 도착했다. 가방에서 열쇠를 꺼내 문을 열고 들어가려는 순간 누군가의 큰손이 그녀보다 먼저 문을 확 열여 제쳤다.이에 임유진이 화들짝 놀라 뒤를 돌아보니 강지혁이 어느샌가 그녀의 뒤에 서 있었다.“깜짝이야. 언제 왔어?”그녀는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며 그를 바라보았다.오늘 강지혁은 얇은 베이지색 스웨터에 검은색 바지를 입고 있었다. 귀공자 같은 그의 얼굴은 오늘도 역시 무척이나 잘생겼지만 어쩐지 임유진은 그의 얼굴이 오늘따라 더 무섭게 느껴졌다.그녀는 본능적으로 지금의 강지혁은 위험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치 조금이라도 그의 심기를 건드렸다가는 시한폭탄처럼 폭발할 것 같은 그런 느낌이었다.“왜 들어가라고 안 해?”청량한 목소리가 복도에 울려 퍼졌다.“오늘은 시간도 늦었고...”임유진이 거절하려 하자 강지혁이 그녀에게로 몸을 기울여왔다.임유진은 자기도 모르게 뒷걸음질을 쳤고 강지혁은 한 걸음 한 걸음 앞으로 다가가더니 이윽고 그녀와 함께 집 안으로 들어와 문을 닫아버렸다.쾅!문이 닫히자 방안은 쥐죽은 듯이 조용해졌다.임유진은 깊게 한번 숨을 들이켜고 물었다.“왜 왔어?”강지혁은 그녀가 들고 있던 포장 봉투 쪽을 보더니 물었다.“그거 강현수가 준거지? 오늘 둘이 같이 있었어?”임유진은 그 말에 흠칫했다가 곧바로 알아챘다. 방금 강현수와 함께 있는 모습을 그에게 들켰다는 것을.“둘이서 밥이라도 먹고 온 거야?”강지혁은 또다시 질문하며 그녀를 몰아세웠다.임유진은 뒤로 계속 한 걸음 한 걸음 물러서다가 이윽고 벽에 부딪혔고 이제는 갈 곳도 없었다.강지혁은 두 손으로 벽을 짚고 그 안에 그
강지혁은 흐르는 물에 그녀의 두 손을 넣고 옆에 있는 핸드 워시로 그녀의 손을 박박 문지르더니 거품이 잔뜩 나게 한 다음 물에 헹궜다.마치 강현수가 그녀의 손에 남겨놓은 무형의 흔적을, 온기를 전부 지워버리려는 듯 몇 번을 더 씻어내렸다.임유진은 강지혁의 손에서 자신의 손을 빼고 싶었지만 그의 힘을 이길 수는 없었다.그녀는 두 손의 자유를 빼앗긴 채 강지혁에 의해 몇 번이고 손을 씻게 되었고 이제는 슬슬 두 손이 아파 나기 시작했다.“강지혁, 그만해. 대체 왜 이러는 거야!”강지혁은 그녀의 외침에 그제야 옆에 있던 타올을 들어 그녀의 손에 있는 물기를 닦아주었다.“앞으로는 강현수가 이손 못 잡게 해.”아까 단지 입구에서 두 사람이 손잡고 있는 모습을 봤을 때 강지혁은 순간 이성이 끊어지는 줄 알았다.질투하는 한편 무서웠다. 그녀가 정말 강현수를 좋아하게 될까 봐 너무나도 무서웠다.“그리고 앞으로는 날 화나게 하는 말도 하지 말고.”이에 임유진은 잠깐 벙쪄 있다가 곧바로 실소를 터트렸다.“그러면 헤어진 마당에 내가 널 계속 좋아하기라도 해야 해?”그 말에 강지혁은 움직임을 멈추더니 그녀의 담담한 두 눈과 눈을 마주쳤다.예쁜 그녀의 눈동자 속에는 아까 현관문 앞에서 봤던 당황함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고 그저 태연함만이 자리 잡았다.그리고 그녀가 태연하면 할수록 그는 점점 더 마음이 불안해졌다.임유진은 천천히 입을 열어 평온하기 그지없는 목소리로 얘기했다.“강지혁, 우리는 이미 헤어졌고 나는 더 이상 너한테 설렐 일도, 너를 좋아하지도 일도 나아가서 널 사랑하는 일도 없을 거야. 그리고 너를 위해 뭔가를 하려 들지도 않을 거고. 만약 이런 내 말이 널 화나게 하는 거라면 나는 아마 계속 너를 화나게 할 수밖에 없을 거야.”강지혁은 입술을 꾹 닫은 채 그녀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임유진은 아직 할 말이 남은 듯 계속 말을 이어갔다.“네가 누나 동생 놀이를 원하는 거면 원하는 대로 해줄게. 하지만 이거 하나는 확실하게 얘기해야겠어. 나는
임유진은 눈앞에 있는 남자를 빤히 바라보았다.이건 또 무슨 소리일까.“우리가 헤어진 것 때문에 네가 나를 사랑하지 않고 나를 잊으려고 하는 거라면, 그러면 다시 사귀어, 전처럼.”강지혁은 한번 내린 결정을 번복하는 사람이 아니다. 하지만 그는 지금 자신이 내렸던 결정을 번복하고 그녀와 다시 전처럼 돌아가기를 원하고 있다. 상대가 사랑해 마지않는 임유진이라서.그녀에게 사랑받지 못하는 것이, 그녀에게 잊혀지는 것이 그는 생각만 해도 너무나도 괴로워 미칠 지경이다.임유진은 그의 말에 결국 소리 내어 웃었다. 그리고 코끝이 찡해지는 것이 곧 눈물이 쏟아질 것 같았다.그날, 그녀의 생일날 그는 너무나도 쉽게 헤어짐을 입에 올렸고 그녀를 한순간에 절벽 아래로 밀어버렸다.그랬던 사람이 이제 와서 다시 사귀자고, 다시 전처럼 돌아가자고 한다.전처럼이라니... 그런 게 가능할 리가 없는데!“왜, 이제는 또 날 사랑하고 싶어졌어?”임유진의 질문에 강지혁의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그리고 검은 눈동자가 점점 더 어둡게 가라앉았다.사실 그는 한 번도 그녀를 사랑하지 않은 적이 없다.한때는 사랑하지 않는 게 가능할 줄 알았지만 아니었다. 오히려 쉽게 사랑을 끝낼 수 있는 건 그가 아니라 그녀였다.“만약 내가 너를 사랑한다고 하면? 그러면 다시 날 사랑해 줄래?”강지혁은 목이 멘듯한 목소리로 물었다.그는 그녀를 사랑하고 있다. 그의 목숨, 그의 희로애락을 전부 다 그녀에게 쥐여줄 수 있을 정도로 그는 그녀를 사랑하고 있다.요 며칠 강지혁은 드디어 깨달았다. 그녀를 사랑하게 된 순간부터 그는 그녀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일은 할 수 없다는 것을.아무리 발버둥 쳐봐도 부질없는 짓이라는 것을.하지만 그의 귓가에 그녀의 한마디가 들려왔다.“내가 널 다시 사랑하게 될 일은 없을 거야.”순간 강지혁은 온몸의 피가 멈춘 듯 몸이 굳어버렸다....강현수는 휴대폰으로 부하 직원이 보내준 자료를 바라보았다.만약 옆에 임유진이 있었다면 아마 깜짝 놀랄 것이다. 그가
억울하게 쓴 누명, 감방에서 받은 고통, 만약 다른 사람이었다면 진작에 멘탈이 무너져 삶을 포기해버렸을지도 모른다.하지만 임유진은 무너지지 않았다. 살기 위해, 다시 미래를 그리기 위해 지옥 속에서 발버둥 쳤다.억울하게 누명 쓴 것으로 창창한 미래를 잃었음에도 그럼에도 그녀는 다시 시작하려고 했다.임유진이라는 여자는 유약해 보이는 겉모습으로 누구보다 더 강인한 마음을 가지고 있다.강현수는 이런 그녀의 모습에 또다시 어릴 적 그 여자아이가 떠올랐다. 심지어 가끔은 그 여자아이가 배여진이 아닌 임유진이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고는 한다.여태 찾아 헤맸던 아이가 배여진이라는 걸 알게 된 후로 그는 한가지 깨달은 것이 있는데 그건 바로 상상과 현실은 결국 다른 범주의 것이고 사람은 변한다는 것이다.어릴 때의 그 여자아이는 정의감이 넘치고 타인을 위하는 그런 아이였지만 지금의 배여진은 돈을 밝히고 자신의 이익만을 내세우는 그런 여자가 되어버렸다.하지만 상관은 없다. 지금의 모습이 어떠하든 그를 구해준 건 사실이니 지금의 그녀가 그런 생활을 원한다면 그는 그녀에게 줄 수 있다. 무리한 요구가 아니라면 뭐든지 들어줄 수 있다.강현수는 서서히 몸을 일으키더니 서재에서 나와 거실에 도착했다.배여진은 강현수를 보더니 할 말 가득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현수 씨, 사실 현수 씨한테 할 말이 있어서 찾아오기는 했지만... 이걸 얘기해야 하는 게 맞을지 조금 고민돼요.”강현수는 퉁명스러운 눈빛으로 배여진을 바라보았다.그녀는 결국 얘기를 할 것이고 지금 잠깐 망설이는 건 그에게 그를 위해서 그런다는, 다른 뜻은 없다는 것을 어필하기 위해서이다.강현수는 배여진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눈에 훤히 보였다.사실 그는 여자들이 자신의 앞에서 어떻게 머리를 굴리든 전까지는 크게 상관이 없었다. 어차피 조만간 헤어질 여자들이니 재미있는 구경거리 한다고 치부하면 되는 일이었으니까.하지만 줄곧 찾아 헤맸던 배여진마저 이런 모습을 보이니 변해버린 그녀의 모습에 어쩔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