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재이는 단호하면서도 결의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영준 씨, 마지막으로 다시 한번 말할게. 우린 이미 끝난 사이야. 난 더는 영준 씨를 사랑하지 않아. 그러니까 앞으로도 이런 연락 자제해줘.”단호하게 말하긴 했지만, 주위에서 들리는 빗소리가 점차 사라져 자신의 쿵쾅대는 심장 소리가 선명하게 들려왔다. 게다가 자신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도 알 수 없었다.전화기 너머로도 설영준은 그녀의 단호함을 느낄 수 있어 그저 침묵했다.송재이는 더는 말을 하지 않고 전화를 끊었다. 그러자 피곤함이 밀려왔다.빗속에서 몸을 떨고 있었다. 마치 갑작스러운 가을비에 온몸이 쫄딱 젖어버린 것처럼.그녀는 벽에 기대에 눈을 감았다. 빗물이 자신의 몸을 적시고 있어도 가만히 있었다.전화를 끊고 나니 그녀는 자신의 얼굴이 눈물범벅이 된 것을 발견하게 되었다. 눈물이 빗물과 섞여 그녀의 볼을 타고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가슴이 너무도 괴로웠다. 하지만 반드시 마음을 강하게 먹어야 했다. 혼자 이 상황을 끌어안으려면 말이다. 그래도 지금 그녀에겐 기댈 수 있는 사람과 따듯한 포옹이 필요했다.숨을 깊게 들이쉰 그녀는 진정하려고 애를 썼다.계속 이렇게 슬픔과 고통에 빠져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고 있기에 다시 마음을 다잡으려 했다.얼굴 가득 묻은 빗물 섞인 눈물을 닦아내고 고개를 들어 먹구름 가득한 하늘을 보았다. 그리고 속으로 다짐했다. 앞으로 어떤 힘든 일이 있어도, 그녀가 가는 길이 가시밭길일지라도 용감히 헤쳐나가겠다고 말이다.비는 어느새 그쳤다. 송재이는 지붕 아래서 나왔다. 발걸음이 무겁긴 했지만, 아까처럼 비틀대지는 않았다.송재이는 예전에 이원희와 함께 지내던 아파트로 돌아왔다. 그녀의 뒷모습은 유난히도 쓸쓸하고 고독해 보였다.이원희는 송재이를 보더니 미간을 찌푸렸다. 저도 모르게 의아한 기분이 들었다.그녀는 얼른 다가가 걱정이 담긴 목소리로 물었다.“재이 씨, 괜찮아요? 무슨 일이 있었던 거예요?”송재이는 입술을 달싹였다. 무언가 말하려고 했지만 결국 고개만
송재이는 머릿속에서 설영준을 지우려고 했다. 지금 상황에서 설영준을 잊는 가장 빠르고 잔인한 방법은 박윤찬과 결혼하는 것이었다.설영준이 그녀가 박윤찬과 결혼한다는 것을 알게 되면 더는 그녀에게 미련을 보이지 않을 것이다.하지만 이 일은 박윤찬이 아닌 류지안이 제안한 것이다. 박윤찬이 정말로 그러겠다고 할까?전화를 끊은 후 이틀도 지나지 않아 박윤찬이 그녀가 일하는 곳에 나타났다. 그녀와 대화를 나누고 싶다고 했다.두 사람은 어느 한 샤부샤부 맛집으로 왔다. 식사하고 있던 도중에 박윤찬이 그녀에게 결혼하자고 먼저 말을 꺼냈다.그는 송재이가 자신을 친구 이상으로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을 앓고 있었다. 그래서 그저 혼인신고 없는 결혼식만 하자고 했다.그럼에도 송재이는 놀랄 수밖에 없었다.박윤찬이 설명했다. 그저 순수하게 친구로서 도와주고 싶은 마음이라고. 하지만 만약 송재이가 언젠가 그를 사랑하게 된다면 이야기가 달라질 것이다.비록 말은 그렇게 했지만 송재이도 알고 있었다. 박윤찬이 자신을 위해 이런 제안을 하고 있다는 것을. 만약 혼인신고를 했다가 나중에 사랑하는 사람이 생기고 후회하게 되면 재혼하는 것이 되지 않겠는가.송재이는 기분이 복잡했다. 고마우면서도 망설이는 듯한 눈빛으로 박윤찬을 보았다.박윤찬이 호의로 이런 제안한 것임을 알고 있었지만, 박윤찬에게 불리한 제안이었다.“윤찬 씨, 전...”송재이가 말을 마치기도 전에 박윤찬이 말허리를 잘랐다.“재이 씨, 지금 대답하지 말아줘요.”박윤찬은 아주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이 제안은 제가 먼저 한 거예요. 절 위해서가 아니라 재이 씨를 위한 제안이죠. 재이 씨 상황이 어떤지 아니까 그냥 도와주고 싶어서 한 제안이에요.”송재이는 너무도 고마웠다. 박윤찬이 믿음직스러운 친구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그녀는 고민한 끝에 결국 그 제안을 받아들였다.이것이 임시방편임을 알고 있었지만 설영준을 완전히 떼어낼 방법이기도 했다.자신을 응원해주고 도와주려는 박윤찬이 고마웠고 양측에 공평한 결정임을
송재이는 금방 박윤찬에게 짐을 옮겨갔다. 그녀의 방은 2층에 있었다.박윤찬은 바로 아래층에 살았다. 그녀는 퇴근하는 길에 장을 봐서 저녁 식사를 차리고는 했다. 가끔 그녀가 바쁠 때는 박윤찬이 식사를 차렸다.평화로운 일상에 그녀는 마음이 놓였다. 새로운 일상에 점점 익숙해지기도 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막연한 기분을 품고 살기도 했다. 다행히 박윤찬이 세심하게 챙겨준 덕분에 불안감은 크지 않았다.그래도 가끔 설영준이 생각날 때가 있었다. 지난번 통화한 것을 마지막으로 더 이상의 연락은 없었다. 어쩐지 생각할 시간을 주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누구를 좋아하는지 결정 내리도록 말이다.송재이도 알았다. 침묵은 그의 마지막 배려였다. 그는 그녀를 압박하지도, 감정적으로 힘들게 하지도 않았다.시간의 흐름에 따라 송재이와 박윤찬은 점점 가까워졌다. 그들은 서로 일상생활을 공유하는 사이가 되었다. 함께 영화 보고, 함께 산책하고, 일 얘기도 숨김없이 나눴다.박윤찬은 언제나 그녀의 편에 서줬다. 편안한 느낌에 그녀도 그에 대한 감정을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우정 이상으로 말이다.그러나 설영준의 존재감도 여전히 확실했다. 혼자 남은 밤이 되면 언제나 설영준의 모습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그녀가 설영준에 대한 마음은 실재했다. 동시에 두 사람 사이의 장애물도 선명하게 떠올랐다.결혼 날짜는 점점 가까워졌다. 송재이는 일단 설영준에게 알려주지 않으려고 했다. 불필요한 일을 만들어내지 않기 위해서 말이다. 하지만 설영준은 결국 알게 되었다. 문예슬이 알려준 것이다.문예슬은 문성호에게서 알게 되었다. 그녀는 아주 놀라웠다. 그녀는 송재이의 친구다. 그리고 설영준과 박윤찬 사이에는 복잡한 관계가 있었다.그녀는 송재이가 왜 이런 선택을 했는지 이해가 안 됐다. 어쨌든 문성호가 상기된 채 전해줬을 때 그녀도 아주 기뻤다. 포기하려고 했을 때 이런 반전이 일어났으니 말이다.송재이가 박윤찬과 결혼한다면 가장 큰 걸림돌이 사라지는 셈이다. 그녀는 줄곧 설영준을 좋아했다. 송재이
설영준은 드넓은 사무실에 홀로 앉아 있었다. 창밖의 가로등 불빛이 그의 얼굴에 떨어져 그림자를 만들어냈다. 핸드폰은 사무실 테이블에 놓여 있었다. 문예슬이 보낸 메시지에 핸드폰은 잠깐 반짝였다.처음에 그는 신경 쓰지 않았다. 메시지는 하던 일을 끝낸 다음에야 확인했다. 핸드폰 화면에 뜬 사진을 본 순간 그는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송재이의 결혼식 사진이었기 때문이다.송재이는 순백의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환하게 웃는 그녀의 곁에 있는 사람은 박윤찬이었다. 머리가 핑 돌았던 그는 잠시 눈을 감고 현실을 부정했다.‘결국에는 결혼까지 한 거야? 박윤찬이랑?’그의 손가락은 덜덜 떨리고 있었다. 그런데도 사진을 넘기는 손을 멈추지 못했다. 모든 사진과 영상이 비수가 되어 그의 심장을 찔렀다.영상 속에서 송재이와 박윤찬은 반지를 교환했다. 그러고는 하객들의 함성 속에서 입술을 맞췄다. 잔인하게도 이는 전부 현실이었다.설영준은 너무 고통스러웠다. 기분은 폭풍우라도 만난 것처럼 도무지 진정되지 않았다. 속에는 불만도 있고 의혹도 있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송재이가 왜 이런 선택을 했는지, 왜 박윤찬과 결혼했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우리도 서로 사랑했잖아. 나한테 보여준 감정은 다 가짜였던 거야?’그는 배신당한 기분이 들었다. 송재이에게 행복해질 권력이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충격에서 쉽게 빠져나오지 못했다. 재난 같은 절망과 실망이었다.천천히 눈을 감은 그는 심호흡했다. 이렇게라도 감정을 추스르려고 했다.잠시 후 그는 클럽에 나타났다. 알코올로 감정을 마비시킬 작정이었다. 어두운 클럽 안에 노랫소리는 귀를 찌르게 울렸다. 자리를 찾아서 앉은 그는 쉬지도 않고 연달아 술을 원샷했다. 그러다 보니 금방 취해버리고 말았다.그의 머릿속에는 드레스를 입은 송재이의 모습이 꽉 들어찼다. 행복하게 웃는 두 사람의 표정도 무겁게 자리했다.혼자서 술 마시는 설영준을 발견한 여자는 꽤 되었다. 그의 외모에 혹한 여자들은 가끔 다가와서 마음을 표현했다. 그중 한 명은 유
남자들은 28살이 넘으면 다들 그쪽으로 욕구가 강렬한 걸까?오늘 밤만 해도 벌써 몇 번째인지 모른다. 송재이는 더 이상 감당이 안 됐다.하지만 그녀는 누구보다 설영준을 잘 알기에 가느다란 손으로 그의 척추를 천천히 쓸어내렸다. 서툰 솜씨로 더듬거리며 끝내 그의 성감대를 찾았고 설영준의 무거운 신음과 함께 뜨거웠던 섹스도 마침내 끝났다.“나 다음 달이면 25살이야.”송재이는 이불을 걷고 침대에서 일어나 바닥에 널브러진 속옷과 원피스를 주워서 하나씩 챙겨입기 시작했다. 뒤에 달린 지퍼가 손이 닿지 않아 고개 돌려 침대 머리맡에 기댄 설영준을 힐긋 쳐다봤는데 그는 한창 담배에 불을 지피고 뽀얀 연기를 내뿜으며 그녀와 시선을 마주쳤다.송재이는 우아한 자태로 자리에 앉아 긴 머리를 쓸어넘기고 새하얀 등을 훤히 드러냈다.설영준의 눈빛이 그녀의 몸에서 맴돌았다.잠시 후 그나마 신사답게 담배를 지그시 물고 몸을 일으키며 제법 자연스럽게 그녀의 지퍼를 올려주었다.“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건데?”공기 속에 고요한 정적이 흘렀다.“나도 이젠 어린 나이가 아니야. 나만의 가정을 차리고 싶어.”그녀가 답했다.설영준은 담뱃재를 톡톡 털었다.“우리가 처음 섹스할 때 내가 했던 말을 까맣게 잊었나 봐?”“안 잊었어. 나랑 결혼 안 한다고 했잖아.”송재이는 치맛자락을 꽉 잡고는 애써 담담한 척 웃어 보였다.“사실 이 3년 동안 너에게 무척 고마웠어. 내가 가장 힘들 때 나 대신 중병에 걸린 우리 엄마를 위해 신장을 찾아주고 병원비도 대줬잖아. 비록 살려내진 못했지만...”여기까지 말한 그녀는 목소리가 슬픔에 잠겼다.6개월 전, 그녀는 엄마의 장례식을 마치면서 설영준과 이별할 결심을 했지만 마음속에 줄곧 일말의 미련이 남아 있었다. 그러다가 어제 그가 조건이 비슷한 집안의 주현아 씨와 함께 반지를 고르는 모습을 보고 나서야 완전히 단념했다.애초에 송재이가 설영준과의 이런 관계를 시작하기로 했을 때 두 사람 다 솔로였다. 설영준은 의젓했고 그녀는 돈이 시급했기에
미행은 절대 아니다. 송재이는 자신이 그럴만한 매력이 없다는 걸 잘 아니까.설영준을 본 순간 그녀는 왜 가슴이 찔리는지 이해되지 않았다.일정한 거리를 사이에 두고 그녀는 설영준의 눈에 담긴 웃을 듯 말 듯한 기운을 바로 알아챘고 왠지 모르게 등골이 오싹해났다.“아는 사이에요?”맞은편에 앉은 지민건도 그녀의 시선을 따라 뒤쪽을 바라봤다.하지만 그는 근시이고 오늘 급하게 나오느라 깜빡하고 렌즈를 착용하지 못해서 눈앞이 희미할 뿐 아무것도 안 보였다.송재이는 아무렇지 않은 척하며 전화를 끊었다.“아니요, 몰라요.”곧이어 저번에 쥬얼리샵에서 본 주현아 씨가 나타났다.이제 막 화장실을 다녀온 모양인지 하이힐을 신고 새하얀 롱 원피스를 하늘거리며 설영준의 옆으로 걸어갔다.설영준도 송재이한테서 시선을 거두고는 맞은편에 앉은 주현아만 쳐다볼 뿐 더는 곁눈질하지 않았다.방금 마신 커피가 입맛에 안 맞았던지 혹은 또 설영준을 마주쳐서 너무 긴장했던 탓인지 별안간 속이 울렁거리기 시작했다.지민건은 그녀의 안색이 안 좋은 걸 보더니 집으로 바래다주겠다고 했다.마침 그녀도 같은 생각인지라 가방을 챙기고 그와 함께 자리를 떠났다.가게 문 앞까지 가려면 설영준과 주현아를 스쳐 지나야 하니 그녀는 무심코 두 사람을 힐긋 쳐다봤는데 주현아가 한창 수줍은 표정으로 테이블 위에 놓인 설영준의 손가락을 매만졌다.설영준도 거침없이 바로 주현아의 손을 꼭 잡았다....돌아가는 길에서 송재이는 유은정의 전화를 받았다. 그녀는 싱글벙글 웃으며 소개팅을 잘했냐고 물었다.“어때 재이야? 마음에 들어?”지민건은 옆에서 운전에만 집중했다.송재이는 그를 힐긋 쳐다보다가 입을 막고 솔직하게 대답했다.“괜찮은 분 같아. 성실하고 착해 보여.”적어도 처음 봤을 때 도망치고 싶은 마음은 없었으니까. 어차피 그녀도 결혼할 생각이 있었던지라 인연이 닿으면 지민건과 더 가깝게 지내볼 의향도 있었다.여기서 제일 뿌듯한 건 당연히 유은정이다. 그녀는 먼저 설영준의 험담을 잔뜩 늘려놓고
그 생각이 든 순간 송재이는 온몸에 소름이 쫙 돋고 벼락을 맞은 것만 같았다.지금 이 추측을 입증하기 위해 송재이는 당일 밤에 바로 약국에 가서 임테기를 샀다.빨간 줄 두 줄이라니!그녀는 어안이 벙벙해졌다.몇 번이고 더 테스트했지만 결과는 똑같았다.이게 무슨 운명의 장난이란 말인가.이제 막 힘겹게 설영준을 단념하고 그와의 관계에 마침표를 찍었는데 왜 또 이런 치명타를 주는 걸까?임신한 몸으로 남자의 집까지 찾아가 결혼을 다그치는 파격적인 스토리는 많이 들어봤지만 그녀는 늘 그런 방식이 존엄도 없고 멍청해 보였다.게다가 그녀가 마주해야 하는 건 설씨 일가와 같은 재벌 가문이다.막강한 권력으로 서민의 삶을 처참하게 짓밟는 건 식은 죽 먹기나 다름없다.만약 설영준이 그녀가 임신한 걸 알면 기뻐할까?어휴, 당연히 아니겠지.그와 함께한 3년 동안 이 남자가 처음부터 섹스와 결혼을 철저하게 갈라놓는 인간이란 걸 그녀는 누구보다 잘 안다.설영준의 아내가 될 사람은 오직 그와 조건이 대등한 정략결혼 상대일 것이다. 주현아와 같은 재벌가 따님이 제격이다.송재이처럼 바람이 불면 휙 쓰러지는 하찮은 존재는 가당치도 않다.그녀는 설영준에게 끌려가 낙태를 당하고 싶지 않았다. 이 세상에 그녀의 가족은 단 한 명도 없다.배 속에 아이는 유일한 핏줄이니 그녀는 더 이상 잃고 싶지 않았다....설도영의 과외를 관둔 송재이는 친한 선배에게 또 다른 학생들을 소개해달라고 부탁했다.선배는 아주 열성적으로 곧장 그녀에게 학생을 찾아줬다.이런 1대1 레슨은 시간을 많이 차지하지 않아 낮에는 밴드에 가서 공연 리허설을 하고 밤에는 또 아르바이트를 한 건 할 수 있다.그녀는 배를 가볍게 어루만졌다. 어쩌면 요 녀석을 위해서라도 게으름을 피우지 말고 더 열심히 살아가야 할 듯싶다.지민건은 송재이가 새로운 아르바이트를 구했다고 하니 축하하는 의미로 밥 한 끼 사주겠다고 했다.송재이는 수업을 마친 후에야 그 문자를 확인했다. 그녀는 잠시 망설이다가 알겠다며 단답형으
서로 눈이 마주친 순간, 송재이는 짜증이 확 밀려와 고개를 돌리고 거들떠보지 않았다.이에 설영준은 아무렇지 않은 듯 휴대폰을 거둬들이고는 거만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타!”전 애인을 마주할 때 누군들 화려하게 빛나고 싶지 않을까?하지만 오늘 밤 룸에서 그와 마주친 광경은 더할 나위 없이 초라하고 난감했다!송재이는 입술을 꼭 깨물고 휴대폰 앱을 열어서 콜택시를 부르려고 했는데 설영준이 차에서 내려와 긴 다리를 내뻗으며 그녀에게 성큼성큼 다가왔다.그의 손에 검은색 큰 우산이 쥐어져 있었다.계단 위에 서 있는 송재이는 그를 내려다보고 있지만 남자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강압적인 포스에 뒤로 몇 걸음 물러섰다. 이때 설영준이 그녀의 손목을 덥석 잡았다.“말 안 들어?”거만하기 짝이 없고 뭐든 당연하다는 듯한 이 말투, 그녀는 순간 두 사람이 이별하지 않은 줄로 착각할 뻔했다.다만 송재이는 곧바로 사색을 가다듬고 말했다.“설영준 대표님, 고맙지만 나 혼자 할게...”“새 남친 별로던데.”설영준의 감미로운 목소리에 야유의 뜻이 살짝 담겨 있었다.그는 송재이의 다른 한 손을 잡아당겨 그녀를 더 가까이 다가오게 했지만 송재이는 여전히 머리를 높이 들었다.“나랑 헤어지고 결혼한다더니 고작 저딴 자식을 찾아? 재이 쌤, 누굴 엿 먹이는 거야?”설영준은 지금 그녀를 비웃기도 하고 방금 그녀의 처지를 비웃기도 했다.송재이의 얼굴이 처참할 정도로 벌게졌다.그녀는 발끈 화내며 설영준을 째려봤다.“내가 어떤 사람을 찾든 너랑 뭔 상관인데? 오늘 밤에 네가 여기 있단 걸 알았다면 오지도 않았어.”그녀는 지민건에게 속아서 이리로 왔다.다만 이 점은 굳이 설영준에게 설명할 필요가 없다.말이 떨어지기 바쁘게 설영준이 그녀의 손목을 확 잡고 두말없이 차 쪽으로 끌어갔다.아무리 몸부림을 쳐봐도 그에겐 전혀 소용이 없었다.정신을 차려보니 어느덧 조수석에 앉아 있었고 설영준은 안으로 차 문을 잠가버렸다.설영준은 줄곧 차가운 표정이었다.매번 이런 표정을 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