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재이는 금방 박윤찬에게 짐을 옮겨갔다. 그녀의 방은 2층에 있었다.박윤찬은 바로 아래층에 살았다. 그녀는 퇴근하는 길에 장을 봐서 저녁 식사를 차리고는 했다. 가끔 그녀가 바쁠 때는 박윤찬이 식사를 차렸다.평화로운 일상에 그녀는 마음이 놓였다. 새로운 일상에 점점 익숙해지기도 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막연한 기분을 품고 살기도 했다. 다행히 박윤찬이 세심하게 챙겨준 덕분에 불안감은 크지 않았다.그래도 가끔 설영준이 생각날 때가 있었다. 지난번 통화한 것을 마지막으로 더 이상의 연락은 없었다. 어쩐지 생각할 시간을 주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누구를 좋아하는지 결정 내리도록 말이다.송재이도 알았다. 침묵은 그의 마지막 배려였다. 그는 그녀를 압박하지도, 감정적으로 힘들게 하지도 않았다.시간의 흐름에 따라 송재이와 박윤찬은 점점 가까워졌다. 그들은 서로 일상생활을 공유하는 사이가 되었다. 함께 영화 보고, 함께 산책하고, 일 얘기도 숨김없이 나눴다.박윤찬은 언제나 그녀의 편에 서줬다. 편안한 느낌에 그녀도 그에 대한 감정을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우정 이상으로 말이다.그러나 설영준의 존재감도 여전히 확실했다. 혼자 남은 밤이 되면 언제나 설영준의 모습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그녀가 설영준에 대한 마음은 실재했다. 동시에 두 사람 사이의 장애물도 선명하게 떠올랐다.결혼 날짜는 점점 가까워졌다. 송재이는 일단 설영준에게 알려주지 않으려고 했다. 불필요한 일을 만들어내지 않기 위해서 말이다. 하지만 설영준은 결국 알게 되었다. 문예슬이 알려준 것이다.문예슬은 문성호에게서 알게 되었다. 그녀는 아주 놀라웠다. 그녀는 송재이의 친구다. 그리고 설영준과 박윤찬 사이에는 복잡한 관계가 있었다.그녀는 송재이가 왜 이런 선택을 했는지 이해가 안 됐다. 어쨌든 문성호가 상기된 채 전해줬을 때 그녀도 아주 기뻤다. 포기하려고 했을 때 이런 반전이 일어났으니 말이다.송재이가 박윤찬과 결혼한다면 가장 큰 걸림돌이 사라지는 셈이다. 그녀는 줄곧 설영준을 좋아했다. 송재이
설영준은 드넓은 사무실에 홀로 앉아 있었다. 창밖의 가로등 불빛이 그의 얼굴에 떨어져 그림자를 만들어냈다. 핸드폰은 사무실 테이블에 놓여 있었다. 문예슬이 보낸 메시지에 핸드폰은 잠깐 반짝였다.처음에 그는 신경 쓰지 않았다. 메시지는 하던 일을 끝낸 다음에야 확인했다. 핸드폰 화면에 뜬 사진을 본 순간 그는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송재이의 결혼식 사진이었기 때문이다.송재이는 순백의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환하게 웃는 그녀의 곁에 있는 사람은 박윤찬이었다. 머리가 핑 돌았던 그는 잠시 눈을 감고 현실을 부정했다.‘결국에는 결혼까지 한 거야? 박윤찬이랑?’그의 손가락은 덜덜 떨리고 있었다. 그런데도 사진을 넘기는 손을 멈추지 못했다. 모든 사진과 영상이 비수가 되어 그의 심장을 찔렀다.영상 속에서 송재이와 박윤찬은 반지를 교환했다. 그러고는 하객들의 함성 속에서 입술을 맞췄다. 잔인하게도 이는 전부 현실이었다.설영준은 너무 고통스러웠다. 기분은 폭풍우라도 만난 것처럼 도무지 진정되지 않았다. 속에는 불만도 있고 의혹도 있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송재이가 왜 이런 선택을 했는지, 왜 박윤찬과 결혼했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우리도 서로 사랑했잖아. 나한테 보여준 감정은 다 가짜였던 거야?’그는 배신당한 기분이 들었다. 송재이에게 행복해질 권력이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충격에서 쉽게 빠져나오지 못했다. 재난 같은 절망과 실망이었다.천천히 눈을 감은 그는 심호흡했다. 이렇게라도 감정을 추스르려고 했다.잠시 후 그는 클럽에 나타났다. 알코올로 감정을 마비시킬 작정이었다. 어두운 클럽 안에 노랫소리는 귀를 찌르게 울렸다. 자리를 찾아서 앉은 그는 쉬지도 않고 연달아 술을 원샷했다. 그러다 보니 금방 취해버리고 말았다.그의 머릿속에는 드레스를 입은 송재이의 모습이 꽉 들어찼다. 행복하게 웃는 두 사람의 표정도 무겁게 자리했다.혼자서 술 마시는 설영준을 발견한 여자는 꽤 되었다. 그의 외모에 혹한 여자들은 가끔 다가와서 마음을 표현했다. 그중 한 명은 유
설영준은 매일 같이 출장 갔다. 알코올이 안 되니 일로 마비할 생각이었다.그는 24시간 전부 일하는 데 사용했다. 한 도시에서 다른 도시, 한 프로젝트에서 다른 프로젝트... 일로 가득해서 숨 쉴 틈도 없을 정도였다.동료들도 설영준의 변화를 보아냈다. 그는 완전히 말을 잃었고, 기계라도 된 것처럼 일만 했다. 쉬라고 설득하기도 했지만 그는 바쁘다는 핑계로 어떤 방식의 휴식도 거부했다.“영준아, 너 이러다 과로사해.”한 동료가 걱정하는 표정으로 말했다. 그러나 설영준은 담담하게 웃으며 대답했다.“괜찮아. 아직은 버틸 수 있어.”그의 마음속은 텅 비어 있었다. 매번 고요한 밤이 되면 쓰나미처럼 밀려오는 감정을 감당하기 어려웠다. 잠은 사치에 불과했다.이번 해 설한그룹 3개월의 매출은 지낸 해 반년의 매출을 따라잡았다. 갑작스러운 매출 상승에 상계는 부쩍 떠들썩해졌다.설영준은 모든 정력과 시간을 회사에 투자했다. 그 노력도 이런 식의 보답을 가져다줬다. 매출이 오름과 동시에 설한그룹의 입지도 단단해졌다. 직원들은 젊고 유능한 리더에게 무한한 신뢰를 보였다.송재이도 똑같이 일로 자신을 마비하고 있었다. 그녀는 유산의 고통과 출신의 고통을 잊으려고 했다. 그러나 밤마다 설영준이 떠올라서 미칠 지경이었다.그녀는 이미 박윤찬과 결혼했다. 일상으로 돌아가려고 노력하기도 했다. 그러나 설영준의 그늘에서 벗어나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송재이가 일에 투자한 노력도 헛되지 않았다. 그녀가 회사에서 지위는 점점 올라갔다. 프로젝트도 크게 인정받아서 훌륭한 수익을 냈다.동료들은 저마다 그녀의 업무 능력에 감탄을 보냈다. 오직 송재이만 알았다. 어떤 성과를 이뤄도 마음에 난 구멍을 메꿀 수 없다는 걸 말이다.퇴근 시간이 되면 그녀는 홀로 집에 돌아갔다. 박윤찬과 함께 꾸민 따듯한 집이다. 그러나 어딘가 자꾸 썰렁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박윤찬은 그녀에게 아주 잘해줬다. 두 사람은 꽤 합이 맞았다. 그런데도 설영준을 잊을 수 없었다. 그녀는 이 감정을 억누르려고
설영준은 제자리에 서서 복잡한 눈빛으로 송재이의 뒷모습을 바라봤다.송재이가 떠난 다음 문예슬은 슬슬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그녀는 약간 떨리는 목소리로 설영준에게 호소했다.“쟤야말로 자기가 뭐라도 된 줄 아는 거 아니에요? 저는 억울해요.”설영준은 미간을 찌푸렸다. 송재이가 예상밖의 행동을 한 건 사실이다. 그러나 문예슬의 호소에 그는 짜증만 났다.잠시 숨을 고른 그는 언성을 높였다.“됐어요! 시끄러우니까!”깜짝 놀란 문예슬은 흠칫 떨며 입을 닫았다. 자신이 선 넘었다는 걸 발견했던 것이다. 그녀는 설영준에게 나쁜 인상을 남기고 싶지 않았다.그녀는 금방 감정을 조절하고 설영준에게 사과했다.“죄송해요, 대표님. 제가 경솔했어요. 저는 그냥...”설영준은 담담하면서도 차가운 목소리로 그녀의 말을 끊었다.“문예슬 씨, 다시는 재이 일에 끼어들지 마요. 오늘 같은 일도 없었으면 좋겠어요.”문예슬의 안색은 창백해졌다. 나쁜 인상이 이미 만들어졌다는 것을 깨달았던 것이다.그녀는 애써 미소를 지어 보이며 말했다.“알았어요, 대표님. 앞으로는 조심할게요.”사실상 설영준은 문예슬에게 아무런 인상도 없었다. 그는 한 번도 그녀를 마음에 둔 적이 없었던 것이다. 그의 마음도 예나 지금이나 송재이에게만 있었다.문예슬의 눈물과 사과도 큰 의미가 없었다. 송재이가 떠난 다음 그의 안색은 계속 어두웠다.이때 류지안이 음료수를 사서 돌아왔다. 그녀가 무슨 일이 있었냐고 묻지 송재이가 직접 말해줬다.류지안은 먼저 문예슬의 터무니없는 행동에 욕설을 퍼부었다. 그러고는 다행이라는 듯이 말했다.“설영준 씨가 절 못 봐서 천만다행이에요. 안 그러면 일이 복잡해졌을 거예요.”송재이가 의아한 표정을 짓자 류지안이 설명을 보탰다.“설영준 씨는 재이 씨가 제 남자친구를 빼앗았다고 생각하니까요. 저희가 같이 돌아다니는 걸 보면 분명히 의심할 거예요.”송재이는 일리가 있는 말이라고 생각했다. 그녀는 살짝 풀린 기분으로 말했다.“고마워요, 지안 씨. 오늘 나오길 잘한
설영준은 혼자 차 안에 앉아 있었다. 어두운 공간에서 대시보드만 희미한 빛을 내고 있었다.그는 담배에 불을 붙였다. 차 안에서 연기가 피어오르며 그의 표정을 가렸다. 그는 담배를 크게 한 모금 빨아들이고서 뱉어냈다. 연기는 복잡한 그의 생각만큼이나 알 수 없는 패턴으로 퍼져갔다.그의 마음속에는 복잡한 감정들로 가득했다. 송재이에 대한 그리움도 있고, 박윤찬에 대한 실망과 질투도 있었다.설영준은 가볍게 핸들을 두드렸다. 이로써 마음속의 불안을 표출했다. 그의 시선은 차창을 통해 빗줄기에 고정되었다. 무언가 생각하는 모습이었다.박윤찬의 차에 오른 송재이는 가는 길 내내 웃고 있었다. 박윤찬의 배려 덕분에 따듯한 느낌이 들어서 기분이 훌쩍 좋아졌다.차가 신호등에 걸려서 멈춘 찰나 그녀는 무의식적으로 창밖으로 바라봤다. 그렇게 시선은 유아용품 광고에 향하게 되었다.광고에는 단란한 한 가족이 보였다. 어머니는 아이를 안고 있었고, 아버지는 곁에 서서 행복한 미소를 지었다.광고 사진은 마치 바늘처럼 그녀의 심장을 파고들었다. 눈물은 예고 없이 차올라서 눈시울을 붉혔다. 그녀는 곧바로 고개를 숙여서 박윤찬에게 보이지 않으려고 했다.눈치 빠른 박윤찬은 금방 그녀의 이상을 발견하고 걱정하는 표정으로 물었다.“재이 씨, 왜 그래요? 어디 불편해요?”그는 말하며 티슈를 뽑아서 건네줬다. 송재이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면서 나지막하게 말했다.“아니에요. 그냥 살짝 피곤해서요.”그녀는 박윤찬을 걱정시키고 싶지 않았다. 그녀가 얼마나 고통스러운지도 들키고 싶지 않았다.하지만 박윤찬의 시선은 이미 그녀가 바라보고 있던 유아용품 광고에 향했다. 그리고 그녀가 갑자기 변한 이유도 알게 되었다.박윤찬은 걱정되면서도 이해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도 송재이가 아이를 잃었던 것을 알고 있었다. 그게 얼마나 충격적인 일인지도 잘 알았다.일주일이 흐르고 송재이는 출장 갈 일이 생겼다. 박윤찬은 직접 그녀를 공항까지 데려다줬다.공항에서 송재이는 혼자 비행기에서 내렸다. 그녀는
설영준의 앞에서 송재이는 항상 강한 척했다. 그와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며 내면의 나약함을 들키지 않으려고 했다.그러나 택시에 올라서 문이 닫힌 순간, 그녀와 설영준 사이에 가림막이 생긴 순간, 강한 척하던 외면이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그녀는 입을 틀어막고 눈물을 흘렸다. 눈물은 얼굴을 타고 흘러내리며 시선을 가렸다. 복잡한 기분과 무기력함에 빠졌다.설영준의 갑작스러운 등장과 관심은 그녀가 애써 억누르고 있던 감정을 다시 불러일으켰다. 전에 함께 보냈던 행복한 시간이 다시 떠오르면서 심장을 찔러댔다.호텔에 도착한 송재이는 문부터 꾹 닫았다. 감정은 홍수처럼 마음속에서 요동쳤다.그녀는 침대에 엎어져서 더 이상 억누르지 않고 쏟아냈다. 눈물은 베개를 흠뻑 적셨다. 아무도 없는 고요한 공간 속에서 그녀는 모든 방패를 내려놓고 원래의 자신으로 돌아왔다.울고 나니 송재이는 피곤한 기분이 들었다. 그녀는 이제야 몸을 일으켜 욕실에 가서는 세수를 했다. 이로써 슬픔을 씻어내고 싶었던 것이다.샤워까지 하니 기분은 물씬 좋아졌다. 그녀는 잠옷을 입고 침대 가에 가서 진통제를 찾았다. 아까부터 두통이 있어서 말이다. 그러나 가방에서 떨어진 건 진통제가 아닌 엽산이었다.그녀는 잠깐 멈칫했다. 이런 엽산은 언제 샀는지, 그리고 왜 가방 속에 있는지 전혀 기억이 나지 않았다. 찌푸린 미간에는 의혹이 담겨 있었다.잠시 후 그녀는 무언가 떠올랐다. 엽산은 회사에서 일어난 일 때문에 갑자기 나타난 것 같았다. 그날 그녀는 회사 복도에서 동료와 부딪혀 가방을 떨어뜨렸다. 엽산은 떨어진 물건은 줍다가 동료의 것을 실수로 줍게 된 것 같다.송재이는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작은 오해 때문에 기분은 더욱 복잡해졌다. 그녀는 한숨을 쉬며 엽산을 내려놓고 대신 꺼낸 진통제를 물과 함께 먹었다.너무 피곤했던 그녀는 누운 지 얼마 안 돼서 금방 잠들었다. 수면은 그녀에게 도피이자 치유였다.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그녀는 노크하는 소리를 듣고 눈을 떴다. 비몽사몽 창밖을 바라보니 아직
송재이의 의식이 천천히 돌아왔다. 그녀는 설영준의 가슴팍을 밀며 벗어나려고 했다. 그러나 그녀의 반항에 설영준은 더욱 불이 붙은 것 같았다. 그는 꿈적하지 않고 그녀를 안고 있었다.두 사람의 호흡은 점점 거칠어졌다. 설영준은 또다시 거칠게 입을 맞췄다. 그녀의 반항은 그의 열정에 녹아서 없어지고 말았다. 송재이는 너무나도 무기력했다. 밀어내야 한다는 이성과 갈망하는 감성이 싸우고 있었다.이때 핸드폰 벨 소리가 방안에 울려 퍼졌다. 송재이와 설영준은 전기라도 맞은 듯 화들짝 놀라며 거리를 벌렸다. 설영준의 얼굴에 불쾌한 기색이 드리우기는 했지만 금방 사라졌다.송재이는 이 기회에 벗어나서 뒤로 물러섰다. 손등으로 입술을 문지를 때 심장은 세차게 뛰고 있었다.그녀의 시선은 멀지 않은 곳에 놓인 핸드폰으로 향했다. 그 위에는 익숙한 번호가 떠 있었다. 그녀는 심호흡하며 감정을 추스르고는 빠르게 걸어가서 수락 버튼을 눌렀다.“네, 윤찬 씨.”송재이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그래도 그녀는 애써 덤덤한 척 입을 열었다.전화 건너편에서는 박윤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재이 씨 괜찮아요? 아까부터 왜 문자에 답장 안 해요?”박윤찬은 걱정하는 모습이었다.송재이는 고개를 돌려서 설영준을 힐끗 봤다. 설영준은 방의 한쪽 끝에 서서 그녀를 주시하고 있었다.그녀는 빠르게 시선을 피하며 답했다.“괜찮아요. 씻고 있어서 핸드폰을 못 봤어요.”“그럼 다행이고요. 저 지금 만날 사람이 있는데 혹시 같이 가줄 수 있어요?”박윤찬의 초대에 송재이는 잠깐 머뭇거렸다. 지금의 기분으로 사람은 만날 수 있을지 의문이었다. 하지만 그렇기에 더 주의를 분산해야 할 것 같아서 나가기를 선택했다.“좋아요. 시간이랑 장소 알려줘요. 맞춰서 갈게요.”전화를 끊은 다음 송재이는 몸을 돌려 설영준을 바라봤다. 지금은 이성이 우세를 차지하고 있었다.“우리 서로 진정할 필요가 있을 것 같네. 오늘 일은 없던 거로 할게. 앞으로 선은 넘지 말자.”설영준은 제자리에 멍하니 서 있었다. 그는
밖으로 나간 송재이는 한참이나 진정하지 못했다. 감정은 파도처럼 자꾸 밀려왔다.잠시 후, 송재이는 약속대로 박윤찬이 알려준 장소에 갔다. 차분한 분위기의 카페였다. 박윤찬은 이미 도착해서 기다리고 있었다. 캐주얼한 셔츠를 입은 그는 아주 편안해 보였다.“재이 씨, 눈 왜 그래요? 무슨 일 있었어요?”박윤찬의 목소리는 아주 부드러웠다. 쉽게 알 수 없는 긴장감이 섞여 있기도 했다.송재이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이로써 감정을 숨기고 싶었지만 눈물은 저도 모르게 흘러내리고 있었다.그녀는 입술을 깨물었다. 뭐라도 말하고 싶었지만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이 모습을 보고 박윤찬은 한없이 속상하기만 했다.그는 몸을 일으켜 송재이의 곁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손을 뻗어 그녀를 품에 앉았다.몸이 경직된 것도 잠시 송재이는 금방 힘을 풀었다. 눈물은 박윤찬의 셔츠를 하염없이 적셔갔다.“괜찮아요, 재이 씨. 무슨 일이 있어도 제가 같이 있어 줄게요.” 송재이의 어깨는 약간 떨리고 있었다. 마음속에는 복잡한 감정 덩어리가 자리 잡았다.설영준의 모습은 아직도 머릿속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그녀는 친구의 응원과 위로가 절실히 필요했다. 박윤찬의 품은 그녀에게 안정감을 줬다. 혼자가 아니라는 느낌도 들었다.카페에는 부드러운 음악이 흘러나왔다. 주변에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대화를 주고받는 사람들뿐이었다. 이 작은 세상은 외세와 완전히 단절된 것 같았다.송재이는 설영준의 품에서 서서히 진정했다. 그녀는 고맙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며 이제 괜찮아진 것을 어필했다. 박윤찬 덕분에 되찾은 평정심이다. 그러나 그의 따듯한 품에서도 가슴 통증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그녀는 일에 집중하는 것으로 복잡한 감정을 잊으려고 했다. 앞으로 며칠 동안 그녀는 일에 완전히 몰두했다. 분주함으로 감각을 마비하려고 했던 것이다.피아노 앞에서 연주를 하다 보면 잠시나마 설영준이 가져다준 고통을 잊을 수 있었다. 그러나 삶에는 언제나 서프라이즈가 숨어있기 마련이다.오후, 송재이는 금방 피
통화가 종료된 후 설영준은 더 마음이 무거워졌다.그는 다시 한번 송재이 병실로 가 침대 끝에 앉았다. 그리곤 창백한 얼굴로 고요히 잠든 송재이의 얼굴을 보았다.설영준은 마치 송재이에게 자신이 한 말이 들리는 것처럼 나직하게 말했다.“재이야, 내 말 들려? 나 여기 있어. 네 옆에 있어.”그는 조심스럽게 송재이의 손을 잡으며 미약해진 체온을 느꼈다.“어쩌면 지금 내 말이 안 들릴 수도 있다는 걸 알아. 하지만 그것만은 알아줬으면 좋겠어. 내가 널 얼마나 사랑하는지 말이야.”설영준은 이내 심호흡을 하면서 감정을 갈무리하려고 애를 썼다.“우리 아직 함께 해보진 못한 일들이 많아. 혹시 기억해? 우리 그때 그랬었잖아. 함께 세계 곳곳에 있는 나라로 여행 가서 우리와 다른 사람들의 문화를 체험해 보고 그곳의 음식을 먹어보자고. 네가 지금 눈만 떠준다면 난 지금 당장 너랑 함께 그 떠날 거야.”이때 누군가 노크하더니 도정원이 들어왔다. 그는 아주 엄숙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영준 씨, 경찰들이 지금 출동했다고 하네요. 곧 도진욱의 거처로 들이닥칠 거예요.”설영준은 자리에서 일어난 뒤 고개를 끄덕였지만 여전히 아쉬움이 가득한 눈길로 송재이를 보았다.“정원 씨, 부탁 하나만 들어줄래요?”“말씀하세요. 제가 도울 수 있는 거면 도와드릴게요.”“저 대신 재이 좀 잘 챙겨주세요. 전 누구 만나러 가야 할 것 같아서 그래요. 그 사람이 아마 이 사건에 아주 큰 도움을 줄 수 있을 거예요.”“걱정하지 말고 가봐요. 여긴 제가 꼭 붙어 있을 테니까 아무도 재이를 건들지 못할 거예요.”설영준은 고마운 눈빛으로 도정원을 힐끗 보곤 몸을 돌려 병실을 나섰다.떠나기 전 설영준은 나직하게 송재이의 귓가에 대고 말했다.“재이야, 나 얼른 돌아올게. 그러니까 나 꼭 기다려줘야 해.”송재이의 병실에선 도정원만이 묵묵히 곁을 지키며 그녀가 깨어나길 기다리고 있었다. 설영준은 이미 진상을 찾으러 떠났다.그는 오랜 친구를 만나러 갈 생각이다. 그 친구는 의학 부문에서 아
그러자 보안 요원이 말했다.“여긴 병원 CCTV를 관리하는 곳입니다. 외부인에게 함부로 영상을 보여줄 수 없습니다.”설영준은 확고한 어투로 말했다.“전 송재이 씨 약혼자입니다. 전 반드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아야겠으니 협조 부탁드립니다.”보안 요원은 다소 망설이더니 결국 그에게 영상을 보여주었다.영상 속에서 설영준은 세세한 부분까지 발견했다. 송재이가 쓰러지기 전 도진욱은 물잔을 송재이에게 건넸다. 그 순간 설영준은 의심을 하게 되었다.같은 시각 도정원은 병실에서 쪽지 한 장을 발견했다. 쪽지엔 갈겨 쓴 글씨가 있었다. 약물의 이름과 사용량이 적힌 쪽지였다. 그는 발견하자마자 바로 설영준에게도 알렸다.두 사람은 각자 발견한 것을 공유하곤 분석하기 시작했다. 설영준은 도진욱이 송재이에게 건넨 물잔과 쪽지 위에 쓴 약물의 명칭을 보았다. 그는 순간 무언가 깨닫게 되었다.송재이가 검사실로 들어간 뒤 설영준과 도정원은 각자 단서를 찾으러 움직였기에 설영준은 다시 돌아와 송재이를 기다려 보기로 했다. 그러나 도정원은 쪽지에 적힌 약물 이름을 보면서 조사하기 시작했다.설영준은 초조한 얼굴로 검사실 밖에서 송재이를 기다렸다.“재이야, 꼭 버텨야 해. 내가 여기서 기다리고 있을게.”시간이 1분 1초 흘러갔다. 설영준은 마음이 점점 더 무거워졌다. 머릿속에 송재이의 미소와 웃음소리, 그리고 함께 보냈던 즐거운 시간들이 떠올랐다. 그는 속으로 기도했다. 송재이가 무사히 나오길 바라며 말이다.설영준은 혼잣말로 중얼거렸다.“재이야,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를 기억해? 네가 그때 엄청 찬란한 미소를 지었었어. 네 찬란한 웃음이 온통 어둠뿐이던 내 세상을 환하게 빛내주었지. 그때 널 지켜주겠다고 다짐했었는데... 지금은...”바로 이때 문이 스르륵 열리고 의사가 나왔다. 설영준은 바로 다가가 물었다.“선생님, 재이는 어때요?”“저희가 최선을 다해 독이 퍼지는 것을 막고 있습니다. 하지만 너무 희귀한 독에 중독된 거라 독 분석하고 해독제를 만드는 데 시간이
송재이의 말은 청천벽력이었다. 도정원과 도진욱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수사관이 빠르게 다가와 상태를 살폈다. 그도 사태의 심각성을 알게 되어 얼른 입을 열었다.“저희가 바로 의사를 불러오겠습니다.”도정원은 빠르게 긴급 호출 벨을 누르면서 송재이를 부축한 채 옆에 있던 의자에 조심스럽게 앉혔다.의자에 앉히자마자 도정원은 초조한 마음으로 송재이를 어깨에 기대게 했다.“재이야, 조금만 버텨줘. 의사가 금방 도착할 거야.”도진욱은 다소 복잡한 감정이 담긴 얼굴로 송재이를 보았다. 속으로 뭔가 갈등하고 있는 듯했다.그러더니 혼잣말로 중얼거렸다.“독에 중독됐다고? 그럴 리가... 난 아무것도 하지 않았어...”예리한 수사관은 그런 도진욱의 상태를 눈치채고 바로 심문했다.“도진욱 씨, 이 상황에 관해 설명하세요. 송재이 씨가 왜 갑자기 중독된 거죠?”도진욱의 안색은 더 창백해졌다. 그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전... 전 정말로 모릅니다. 제가 왜 제 조카를 죽이겠습니까?”바로 이때, 의사와 간호사가 병실로 들어오며 송재이를 살펴보았다.의사가 엄숙하게 말했다.“아무래도 정밀 검사를 해봐야 알 것 같습니다. 어떤 독에 중독되었는지 확인할 수 없습니다.”송재이는 급하게 검사받으러 갔다. 도정원과 도진욱이 그 뒤를 따라갔다. 수사관은 묵묵히 이 상황을 지켜보았다. 머릿속에 이미 사건의 윤곽이 그려지기 시작했다.도정원이 밖에서 초조한 마음으로 송재이를 기다렸다. 그러나 도진욱은 홀로 구석으로 간 뒤 손을 주머니에 찔러넣은 채 안에 있는 핸드폰만 불안한 마음으로 만지작거렸다.그러더니 낮은 목소리로 누군가와 통화했다.“나야. 일이 복잡하게 됐어. 송재이가 갑자기 독에 중독되어서 경찰이 개입하게 되었어. 나도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인지 몰라. 하지만 우린 지금 반드시 움직여야 해.”전화기 너머로 잔뜩 가라앉은 목소리가 들려왔다.“우리 계획을 수정할 필요가 있군요. 일단 절대 증거를 찾게 해서는 안 돼요. 안 그러면 우리 모두 끝장나게 되니까
화가 난 도정원은 이를 빠득 갈았다.“그게 무슨 의미죠? 설마 아버지 병이 당신과 연관이 있다는 건가요?”정체 모를 남자는 웃음을 터뜨렸다.“곧 알게 될 거야. 참, 도진욱. 가문의 이익을 위해 네 동생 행복을 희생했었지? 이젠 네가 희생할 차례야.”전화는 그렇게 끊겼다. 송재이와 도정원은 고개를 돌려 도진욱을 보며 설명을 바랐다.그러자 도진욱이 말했다.“난... 난 정말 몰랐어. 그때 일이 이렇게 될 줄은 몰랐다고. 그때 내가 그런 선택을 한 건 인정해. 하지만 전부 가문을 위해서였어. 난 너희들을 해칠 생각한 적 없다고.”송재이는 무력감이 들었다. 거짓과 배신으로 가득한 이 가족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몰랐다.절망에 빠진 송재이가 이마를 짚으며 말했다.“우리 이제 어떻게 해야 해요? 대체 누굴 믿어야 하는 거예요?”도정원도 다소 괴로운 눈빛을 하고 있었다. 그는 주먹을 꽉 움켜쥐며 감정을 갈무리하려고 애를 썼다.“가문의 이익을 위해서 그러셨다고요. 우리 도씨 가문이 언제부터 이익에만 눈멀어 가족을 버리는 가문이 된 거죠?”도진욱의 얼굴엔 죄책감이 가득했다. 그는 힘이 없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정원아, 그땐 내 잘못이 맞아. 나도 인정해. 난 내 선택으로 우리 가문이 더 힘이 있는 가문이 될 줄 알았고 가족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어. 난... 난 정말 미안하구나.”옆에서 듣고 있던 송재이는 막막하면서도 불안했다.“두 사람은 전부 제 가족이에요. 전 대체 누굴 믿어야 할지 모르겠다고요.”송재이의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그 순간 문밖에서 다급한 발걸음 소리가 들려오면서 이 숨 막히는 침묵을 깨버렸다.세 사람은 동시에 고개를 돌려 문 쪽을 보았다. 제복을 입은 남자들이 엄숙한 얼굴로 들어왔다.“안녕하세요. 저희는 경찰서 수사과에서 나왔습니다. 몇 가지 당신들이 조사에 협조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도정원과 도진욱은 서로 마주 보았다. 그들은 알고 있었다. 이것이 진상을 알아내는 데 중요한 조사라는 것을“네, 협조하겠습니다.
전화기 너머로 침묵이 흘렀다. 그리고 이내 짙은 한숨 소리가 들렸다.도진욱이 입을 열었다.“그래, 알았다. 너희들한테... 해줄 얘기가 있단다. 네 아버지의 과거와 어머니에 관한 얘기란다.”도정원과 송재이는 서로 눈빛을 주고받았다. 두 사람은 의아하면서도 초조했다.“큰아버지,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뭔가 알고 계신 거예요?”도진욱은 미간을 찌푸렸다.“곧 도착하니 얼굴을 보면서 얘기하자꾸나. 이 일은 내가 너희들 얼굴을 보면서 직접 말해줘야 할 것 같구나.”전화를 끊은 후 도정원과 송재이는 생각에 잠겼다. 두 사람은 도진욱이 어떤 얘기를 들려줄지 몰랐고 도진욱이 그들에게 해줄 얘기가 그들 가족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지도 몰랐다.얼마 지나지 않아 도진욱이 병원에 도착했다. 그의 얼굴엔 초조함과 죄책감이 담겨 있었다.그는 송재이와 도정원의 얼굴을 보더니 심호흡을 한 후 천천히 입을 열었다.“지금 마음이 얼마나 혼란스러운지 알고 있단다. 하지만 더는 너희에게 숨길 수 없을 것 같구나. 너희들이 모르는 사실은 더 많단다.”송재이는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머리가 어질거렸다.“큰아버지,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저희가 아직도 모르는 비밀이 있는 건가요?”“그래, 그때 당시 나와 네 엄마는 확실히 그런 사이였었지. 하지만 그건 다 지나간 일이란다. 나중에 난 그 삼각관계에 빠지기로 했고 네 엄마랑 네 아빠를 이어주기로 했었지. 그때의 난 그게 옳은 일이라고 생각했단다. 지금까지도 말이야.”송재이와 도정원은 충격받은 얼굴로 도진욱을 보았다. 그가 꺼낸 얘기는 도경욱이 꺼낸 얘기보다 더 충격적이었다.“큰아버지, 정말로... 정말로 그러셨어요?”“나도 알고 있단다. 내가 무슨 말을 하든 과거의 일을 없던 일로 할 수는 없겠지. 하지만 난 아직 살아 있을 때 너희들에게 진실을 말해주고 싶구나.”바로 이때 병실 안에서는 긴급 호출 벨이 울렸다.의사와 간호사들이 급하게 병실로 달려왔고 송재이와 도정원도 얼른 병실 안으로 들어갔다.의사는 그들을 보더니 고
송재이는 얼른 도경욱의 손을 꼭 잡았다. 눈물이 그녀의 눈 앞을 가렸다.옆에서 두 사람의 모습을 보던 도정원도 눈시울이 붉어졌다.병실 안에는 무거운 분위기가 감돌았다. 그저 일정한 의료 기기 소리만 들려오며 시간이 흘렀다.도경욱은 송재이를 빤히 보았다. 그의 두 눈엔 아쉬움과 죄책감만 남아 있었다.자신에게 남은 시간이 얼마 없다는 것을 그는 알고 있었다. 하지만 죽기 전 꼭 해야 할 말이 있었다.미약한 목소리지만 그는 확고한 어투로 말했다.“재이야, 내 딸. 너에게 꼭 해줄 말이 있단다. 네 출생의 비밀과 네 엄마에 관한 얘기야.”송재이는 고개를 들었다. 눈물 그렁그렁 맺힌 그녀는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아빠,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제 엄마가 왜요?”도경욱은 숨을 깊이 들이쉬었다. 마치 온몸의 힘을 모으고 있는 것 같았다. 깊이 숨겨둔 진실을 정확하게 말해주기 위해서 말이다.“그때 네 엄마, 그러니까 서지원의 약혼 상대는 내 형이었단다. 네 큰아버지지. 하지만 운명이 장난을 쳤지. 서지원이... 네 엄마가 진심으로 사랑한 사람은 나였단다.”송재이는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너무도 충격적인 진실이었다. 그녀는 단 한 번도 자신의 출생에 이런 비밀이 숨겨져 있을 거라곤 상상도 못 했다.그녀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어...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었던 거죠?”도정원도 놀란 표정인 것을 보아 처음 알게 된 사실인 것 같았다.도경욱은 다소 괴로운 표정을 지었다.“네가 이 사실을 받아들이기 힘들어한다는 것을 나도 안다. 그렇지만 전부 사실이란다. 난 지원이를 단 한 번도 강요한 적 없었어. 우리는 서로 진심으로 사랑했어. 하지만 그때는 이런 추문을 받아들이지 않던 시절이었지.”송재이는 마음이 복잡했다. 이렇게까지 혼란스러운 감정은 처음이었다.그녀는 이렇게나 갑작스러운 사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몰랐다.“아빠, 그럼 대체 왜 일찍 말씀해 주지 않으신 거예요? 왜 그동안 숨기고 계셨던 거예요?”도경욱은 덜덜 떨리는 손으로 송
박정후는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다소 고통스러운 기억을 떠올리고 있는 듯한 눈빛으로 박윤찬을 보았다.“그때 내가 한 여자를 사랑하게 되었어. 아주 똑똑하고 예쁘고 착한 사람이었지. 나한테 아주 특별한 사람이기도 했어. 하지만 어머니가... 어머니가 우리 사이를 반대하셨어.”박윤찬은 미간을 찌푸렸다. 여전히 이해가 가지 않았다.“어머니가 왜 반대하셨는데? 어머니는 아무 이유도 없이 그러실 분이 아니잖아.”박정후가 대답했다.“처음엔 나도 이해하지 못했어. 그때의 난 분명 어머니가 그 여자에 대해 오해하고 있다고 생각했었지. 또 어쩌면 내가 사랑놀이에 푹 빠져 일을 제대로 하지 않을까 봐 걱정하시는 건 줄 알았어. 하지만 나중에 알고 보니 전혀 아니었어.”박윤찬은 초조하게 한숨을 내쉬었다.“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건데? 어머니가 아무 이유도 없이 반대하실 분은 아니야.”박정후의 낮게 깔린 목소리에선 슬픔이 느껴졌다.“그 여자는 성이 임 씨였어. 임씨 가문은 우리 성씨 가문과 오래전부터 원한이 있었지. 이 원한은 우리가 태어나기 전부터 있었던 거라 저주와도 같은 것이었어. 두 가문의 후대에도 아주 큰 영향을 주고 있어.”박윤찬은 놀란 모습이었다.“난 임씨 가문에 대해 들어본 적 단 한 번도 없었어. 어머니도 나한테 한 번도 말씀하신 적 없었다고.”박정후가 말했다.“어머니는 이 원한이 시간이 지나면서 잊히길 바라셨던 거야. 하지만 사실상 잊히지 않았지. 임씨 가문과 성씨 가문은 지난 세대에서도 심각한 충돌이 있었어. 두 가문은 사업 경쟁을 벌이다가 더 틀어지게 되었지.”박윤찬은 이해가 되지 않았다.“사업 경쟁이라니? 그게 언제 일인데 아직도 신경 쓰고 있다는 거야?”“그래, 하지만 지난번 경쟁에서 임씨 가문은 파산당하게 되었지. 그 가문 어르신도 결국 그때 세상을 뜨게 되신 거야. 임씨 가문에서는 우리 성씨 가문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경쟁을 벌여 그런 비극을 만든 것으로 생각하고 있어.”박윤찬은 한참 침묵하다가 입을 열었다.“그러
박정후는 시선을 돌려 창밖을 내다보았다. 바쁘게 움직이는 사람들을 보더니 생각에 잠겨 버렸다.그는 나직하게 말했다.“제가 멀리 떠나기로 결정한 건 저와 윤찬이 사이에... 오해가 있기 때문이에요. 저랑 윤찬이 사이에 갈등이 있었는데 전 제가 원하는 것을 이루기 위해 윤찬이 곁을 떠났죠. 하지만 혈연관계는 영원히 끊을 수 없는 거잖아요.”묵묵히 박정후가 하는 얘기를 듣고 있던 송재이는 박정후의 안타까움과 죄책감을 고스란히 느꼈다.송재이가 말했다.“가족 사이에 확실히 갈등이 생길 수도 있죠. 하지만 제일 중요한 건 서로 항상 응원하고 있음을 알고 있는 것이죠.”설영준은 진지한 얼굴로 박정후를 보았다.“정후 씨는 정의를 위해, 동생을 위해 이미 많은 것을 했으니 윤찬 씨도 이해해줄 거예요.”장주영도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맞아요. 정후 씨가 한 모든 것을 박윤찬 씨가 알게 된다면 분명 아주 자랑스러워할 거예요.”박정후는 한숨을 내쉬었다. 고개를 돌려 확고함이 가득한 눈빛으로 그들을 보았다.“그랬으면 좋겠네요. 이번에 돌아온 것도 윤찬이에게 뭐라도 도움이 되어주고 싶어서였어요. 그리고 윤찬이와 화해할 기회도 있었으면 좋겠네요.”그들을 도와준 정체 모를 인물은 바로 박정후였다.그는 마음이 너무도 복잡했다.이번 일로 동생과 무너진 관계를 회복하고 다시 화목하게 지내고 싶었다.박정후가 말했다.“관계를 회복하는 데 시간이 필요하다는 걸 알아요. 하지만 전 기다릴 수 있어요. 윤찬이가 저한테 기회만 준다면 형으로서 책임을 다할 거예요.”그는 확고한 눈빛으로 말했다. 박윤찬과의 거리감을 하루아침에 줄일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자리에서 일어난 그는 다시 창밖을 보았다. 꼭 사람들 속에서 누군가를 찾는 듯한 모습이었다.“전 반드시 윤찬이한테 찾아가야 해요.”박정후는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윤찬이가 저를 만나고 싶어 하든 말든 상관없이 알려주고 싶어요. 전 단 한순간도 윤찬이를 포기한 적 없다고 말이에요.”송재이는 박정후의 손을 잡아
설영준과 송재이는 서도재의 비웃음에도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저 빠르게 방 안의 상황을 살펴본 뒤 도망칠 길이나 반격할 기회가 없는지 파악했다.정체를 알 수 없는 인물은 조용히 숨어서 행동을 개시하려고 했다.설영준은 차갑게 피식 웃었다.“서도재, 이러면 네가 정말로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야? 네가 저지른 범죄는 이미 전부 드러났어. 밖엔 경찰들이 깔려 있다고.”서도재의 웃음이 사라지고 표정이 굳어졌지만 빠르게 다시 자신만만한 모습으로 돌아왔다.“경찰이 깔려 있다고? 넌 내가 아무 준비도 하지 않은 거로 보이나 봐? 이 아지트는 아주 단단하게 만들었거든. 너희들은 도망칠 수 없어.”송재이는 설영준이 방 한구석에 있는 창문에 힐끗 본 것을 발견하곤 바로 그의 의도를 눈치챘다.그녀는 일부러 서도재를 향해 목소리를 높였다.“그럼 우린 여기서 그쪽과 시간을 끌 수밖에 없겠네요. 그쪽 아지트가 먼저 무너질지 아니면 밖에 경찰들이 먼저 쓰러지게 될지 한 번 지켜보자고요.”서도재는 손을 들어 올리며 부하들에게 준비하라는 사인을 보냈다. 하지만 이때 방 안의 불빛이 꺼지더니 어둠이 내려앉았다.정체를 알 수 없는 인물은 확성기로 말했다.“꼼짝 마!”설영준과 송재이는 어둠 속에서 빠르게 창문이 있는 쪽으로 움직였다.설영준은 있는 힘껏 발로 창문을 깨버렸다. 두 사람은 거의 동시에 창문에서 뛰어내렸다. 바깥엔 이미 에어매트가 준비되어 있었다.서도재는 갑자기 어두워진 주위에 당황스러워하면서 미처 반응하지 못했다.불빛이 다시 켜졌을 땐 설영준과 송재이는 이미 사라졌다.그는 잔뜩 화가 난 목소리로 말했다.“쫓아가! 반드시 두 사람 내 앞에 잡아 와!”그러나 서도재의 부하들이 아지트에서 나가자마자 이미 밖을 포위하고 있는 경찰들을 발견하게 되었다.알고 보니 정체를 알 수 없는 인물이 미리 익명으로 경찰에 신고한 것이다.경찰은 확성기로 말했다.“안에 있는 사람 모두 들으세요. 당신들은 포위되었습니다. 당장 손에 든 무기를 내려놓고 항복하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