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영준이 신비로운 미소를 지으며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아니, 재이야, 서프라이즈를 준비했어. 이번 여행은 우리 둘만 가는 것이 아니야.”호기심이 발동한 송재이가 캐물었다.“무슨 서프라이즈인데? 영준 씨, 빨리 알려줘.”설영준이 일부러 신비감을 조성하며 그녀의 귓가에 나지막이 말했다.“이번에 특별한 사람과 같이 갈 거야.”송재이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특별한 사람? 누군데?”설영준이 한 발짝 물러서며 미소를 지었다.“때가 되면 알게 될 거야. 약간의 신비감을 남겨두는 것이 좋지 않아?”송재이는 화난 척하며 그를 째려보았다.“흥! 뜸 들여? 하지만 서프라이즈라고 하니 참고 기다릴게.”설영준은 웃으며 송재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걱정하지 마. 충분히 기다릴 가치가 있는 서프라이즈니까.”그다음 날부터 설영준은 여행 계획을 짜기 시작했다.그는 인터넷에서 바르셀로나의 역사, 문화, 음식, 관광지까지 모든 것을 망라한 자료를 가득 수집했다.출발하는 날, 하늘이 맑고 햇빛이 화사했다.송재이와 설영준은 흥분해서 이른 아침에 출발했다.공항에 도착한 후 모든 수속이 매우 순조롭게 진행됐다.10여 시간의 비행 끝에 그들은 마침내 바르셀로나에 도착했다.시차 때문에 두 사람은 일단 호텔에서 쉬기로 했다.깨어났을 때는 이미 어둠이 내려앉은 뒤였다.그들이 묵은 곳은 창밖에 도시 야경이 펼쳐지는 호화로운 호텔이었다.오색찬란한 불빛이 밤하늘을 환상적으로 아름답게 수놓았다.창가에 선 송재이는 눈앞의 경치에 깊이 매료되었다.“영준 씨, 빨리 와. 야경이 너무 아름다워.”바르셀로나의 밤은 화려한 드레스로 갈아입은 댄서처럼 우아하고 매력적이었다.석양은 하늘의 구름을 보랏빛으로 물들였고, 가로등이 하나둘 켜지면서 다이아몬드처럼 어두운 하늘을 장식했다.호텔 창문으로 바라본 사그라다 파밀리아는 불빛애 비쳐 거대한 촛불처럼 부드러운 금빛을 발산했다.탑신의 조각은 어둠 속에서 더욱 신비롭게 느껴졌고, 이 도시의 유구한 역사를 말해주는 듯했다.설영
가게를 떠나기 전에 그녀는 가장 마음에 드는 도자기 몇 점을 골랐다.설영준은 옆에서 참을성 있게 기다리며 이들 예술품에 관해 더 자세히 알기 위해 이따금 가게 주인과 몇 마디 주고받았다.수공예품 가게를 떠난 후 두 사람은 계속 고딕지구에서 거닐었다.그들은 분수가 있는 작은 광장에 도착했다. 졸졸 흐르는 물소리가 여름날의 무더위에 한줄기 청량감을 선사했다.광장 주위에는 오후를 즐기는 사람들로 가득 차 있었고, 누군가가 기타를 연주하고 있었는데 은은한 선율이 공중에서 울려 퍼졌다.“여기 너무 기분 좋고 편안해. 이곳 분위기가 마음에 들어.”설영준은 감탄하는 송재이의 어깨를 가볍게 껴안았다.“바르셀로나는 예술과 생활의 정취가 물씬 풍기는 도시야. 곳곳에 독특한 매력이 있지.”그들은 분위기 있어 보이는 카페를 찾아 들어가서 아이스 상그리아 두 잔과 현지 간식들을 시켰다.이곳에서 그들은 속도를 늦추고 간만에 여유와 평온을 즐길 수 있었다.어둠이 내려앉음에 따라 바르셀로나의 밤 생활도 시작됐다.거리의 가로등이 하나둘 켜지고 술집과 식당들이 벅적거리기 시작했다.설영준과 송재이는 현지 밤 생활을 체험해 보기로 하고, 플라멩코 공연이 있는 벅적벅적한 술집에 들어갔다.송재이는 열정 넘치는 춤에 깊이 매료되어 흥분한 나머지 눈이 반짝거렸다.“영준 씨, 저 사람들이 춤을 추는 것을 봐. 동작 하나하나에 힘과 감성이 넘쳐. 너무 아름다워.”송재이가 흥분하며 말했다.“스페인의 문화재인 플라멩코를 직접 보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야.”음악의 리듬이 점점 경쾌해지자, 설영준이 송재이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재이야, 우리도 같이 추자.”송재이는 어리둥절해하다가 미소를 지으며 손을 그의 손바닥에 올려놓았다.두 사람은 댄스홀 한가운데로 가서 플라멩코 댄서의 스텝을 따라하며 춤을 추기 시작했다.송재이는 처음에 동작이 서툴렀지만 설영준이 잘 이끌어 주어 이내 긴장을 풀고 리듬과 열정을 즐기기 시작했다.그들이 동참하는 것을 보고, 주변의 스페인 사람들이 박수와
이튿날.어젯밤에 춤을 추느라 피곤했는지 송재이는 오후까지 잠을 잤다. 깨어나 보니 해가 중천에 떠 있었다.설영준과 송재이는 간단히 샤워한 후 아래층 식당에서 브런치를 먹고 한가하게 거리를 거닐었다. 발길 닿는 대로 걷다 보니 바르셀로나의 유명 관광지 파세오 데 그라시아에 도착했다.넓은 도로에 햇살이 쏟아지고 양옆의 나무들이 아롱다롱한 그림자를 드리우는 이곳은 오랜 건물과 현대 예술이 잘 조화되어 있었다.송재이는 아름다운 분수 옆에 서서 리드미컬한 물 흐름을 감상하고 있었다.그녀의 얼굴에는 유쾌한 웃음이 넘쳐흘렀다.그때 잘생긴 스페인 남자가 송재이의 아름다운 외모에 끌려 그녀에게 다가왔다.잘생긴 남자는 스페인 억양의 영어로 인사했다.“안녕하세요, 저는 카를로스라고 합니다. 이 분수를 좋아하는가 봐요.”송재이가 미소를 지었다.“네, 정말 아름다워요. 저는 송재이라고 합니다.”카를로스는 더 가까이 다가와 유창한 영어로 대화를 계속했다.“바르셀로나에는 처음 오셨나요? 여기 가볼 만한 아름다운 곳이 많아요.”송재이는 다소 의외였지만 여행의 즐거움을 누군가와 나눌 수 있어서 기뻤다.“네, 처음 왔어요. 다음에 어디로 갈지 생각 중이에요.”바로 그때 설영준이 아이스크림을 사 들고 돌아왔다.송재이와 카를로스가 즐겁게 대화를 나누는 것을 보고, 그는 저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렸다.그는 송재이에게 다가가 아이스크림을 건네주며 약간 불쾌한 말투로 물었다.“재이야, 여기서 새로운 친구를 사귀었어?”아이스크림을 받아 든 송재이는 설영준이 질투한다는 것을 눈치채고 나지막이 설명했다.“카를로스는 지나가던 길이었고 그냥 몇 마디 얘기를 나눴어.”카를로스는 설영준이 언짢아하는 것을 눈치채지 못한 듯 여전히 열정적으로 송재이에게 말했다.“송재이 씨, 관심이 있다면 제가 더 많은 재미있는 곳으로 데려가 줄 수 있어요.”설영준은 표정이 더욱 어두워졌지만 여전히 예의 바르게 말했다.“감사하지만, 저희는 정해진 일정이 있습니다.”카를로스는 설영준의 태도에는
한 젊은 여성이 [지구의 미래를 위해 행동하자!]라는 피켓을 높이 들고 옆 사람에게 힘차게 외쳤다. “우리는 탄소 배출을 줄여야 해요. 기후 변화로부터 우리의 지구를 보호해야 합니다!”옆에 있던 중년 남성은 손으로 그린 지구 모형을 흔들며 답했다. “맞습니다. 우리는 더 많은 친환경 에너지를 도입하고 화석 연료 사용을 줄여야 합니다. 지속 가능한 발전만이 우리 후손들에게 건강한 지구를 남길 수 있어요.”그 근처에서는 학생들 무리가 목소리를 높였다.“친환경 생활을 우리부터 실천합시다!”그들 중 한 대표가 덧붙였다.“모두가 환경 보호를 위해 책임을 져야 해요. 플라스틱 사용을 줄이고 재활용 활동에 동참하는 작은 노력이 모여 세상을 바꿀 수 있습니다.”이때, 감정이 격해진 한 시위자가 경찰의 저지선을 뚫으려 시도했다.그 시위자는 크게 외쳤다.“우리는 가만히 있을 수 없어요! 기후 변화는 이미 우리 눈앞에 다가 왔고 우리는 당장 행동해야 합니다!”경찰들은 질서를 유지하려 애쓰고 있었다.한 경찰관이 확성기로 말했다.“진정해 주십시오. 여러분의 우려는 이해하지만, 법을 준수하며 평화롭게 요구를 전달해 주시기 바랍니다.”설영준은 송재이의 손을 꽉 잡고 인파 속에서 상대적으로 안전한 곳을 찾으려 애썼다.그러나 갑자기 인파가 밀려들었다.몇몇 흥분된 시위자들은 경찰을 향해 물건을 던지기 시작했다.경찰은 최루탄을 사용해 군중을 해산하려 했다.설영준과 송재이는 갑작스러운 혼란에 당황했다.그들은 발걸음을 고정시키려 했지만, 결국 인파 속에서 서로를 놓치고 말았다.설영준이 뒤를 돌아봤을 때, 송재이는 이미 보이지 않았다!그 순간 설영준의 머릿속은 하얗게 비어 버렸다.정신을 차리자마자 설영준은 필사적으로 주위를 둘러보며 송재이를 찾기 시작했다.설영준은 점점 초조해졌다.한편으로는 혼란스러운 상황을 처리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송재이의 안전을 걱정했다.설영준은 끊임없이 송재이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신호 문제로 계속 연결되지 않았다....한편,
설영준은 핸드폰을 손에 쥐고 전화 너머로 들려오는 도경욱의 목소리를 들으며 복잡한 심경에 휩싸였다.도경욱의 목소리에는 기대와 걱정이 묻어 있었다.“영준 씨, 저 이제 바르셀로나에 무사히 도착했어요. 방금 여기에 시위가 있었다는 소식을 들었는데 괜찮은 거죠? 꼭 안전에 유의하세요.”설영준은 깊이 숨을 들이마시고 최대한 차분한 목소리로 답하려 애썼다.“아저씨, 저희 괜찮아요. 시위 중에 잠시 흩어졌지만, 지금은 무사히 다시 만났어요. 걱정하지 마세요. 저희도 안전에 신경 쓸게요.”도경욱은 설영준의 목소리에서 무언가 이상한 기운을 감지한 듯했다.도경욱은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영준 씨, 목소리가 평소랑 다른데 무슨 일 있어요?”설영준은 순간 긴장했지만, 송재이와 카를로스가 가까이 있는 상황에서 느낀 불안을 털어놓고 싶지 않았다.설영준은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별일 없어요. 방금 재이 씨를 찾느라 좀 긴장을 뿐이에요. 아저씨가 바르셀로나에 오셨으니 저희 한번 제대로 축하해야겠어요. 제가 식사 대접할게요.”도경욱은 웃으며 설영준의 제안을 기쁘게 받아들였다.“좋아요. 그럼 기대할게요. 어디서 만날까요?”전화를 끊은 후에 설영준은 송재이에게 돌아서며 말했다.“재이 씨, 제 친구도 스페인에 왔는데 우리 같이 밥 먹어요.”송재이는 기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좋아요!”송재이는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한 후, 다시 카를로스를 바라봤다.“오늘 정말 많이 도와주셔서 감사해요. 저희와 함께 점심 먹을래요?”송재이가 밝은 미소로 말했다.카를로스는 열정적으로 대답했다.“물론이죠. 기꺼이 함께할게요. 오늘 도움이 될 수 있어서 저도 기뻐요.”송재이가 카를로스를 초대한 순간에설영준의 마음속엔 다시금 불쾌감이 치밀어 올랐다.원래 설영준은 도경욱과 송재이와 함께 즐거운 시간을 보내려 했다. 이 식사 자리는 그들 가족이 처음으로 함께하는 자리였다.송재이는 아직 도경욱이 친부라는 사실을 알지 못하고 있었다. 아마 오늘 밤 도경욱은 송재이에게 이 사실
카사모노의 우아한 분위기 속에서 네 사람이 점심을 먹고 있었다.카를로스는 송재이에게 끊임없이 관심을 보이며 송재이의 음식 취향을 물어보거나 편안한지 확인하는 등 자주 신경을 써주었다.설영준은 차가운 태도로 일관하며 카를로스가 송재이에게 호의를 보일 때마다 틈을 놓치지 않고 끼어들어 송재이의 주의를 돌렸다.도경욱은 이 모든 상황을 흥미롭게 지켜보며 때때로 설영준을 놀리며 설영준의 표정을 더욱 어둡게 만들었다.결국 송재이는 참을 수 없었다. 송재이는 설영준에게 다가가 낮게 속삭였다.“설영준, 왜 이러는 거야? 오늘 너 너무 민감해 보여. 카를로스는 그냥 예의상 친절하게 구는 것뿐이야. 그렇게 긴장할 필요 없어.”설영준은 송재이의 말을 듣고 나서 마음속 불쾌감이 더 커졌다.설영준은 목소리를 낮춰 답했다.“민감해? 난 그저 카를로스가 너한테 다른 의도가 있는 걸 보고 싶지 않을 뿐이야.”송재이는 고개를 저으며 무심하게 말했다.“정말 유치해. 우리 둘 다 성인이잖아. 내가 그 정도는 구분할 수 있어. 조금만 진정하고 이 식사를 즐기면 안될까?”설영준은 좌절감을 느꼈다. 송재이를 보호하고 싶었을 뿐인데 오히려 유치하다는 말을 듣고 말았다.설영준은 손에 든 포크를 꽉 쥐며 마음속에서 분노와 무력감이 교차하는 것을 느꼈다.도경욱은 설영준의 불쾌감을 알아차렸다.도경욱은 낮은 소리로 송재이에게 말했다.“송 선생님, 영준 씨를 너무 신경 쓰지 말아요. 아마도 선생님을 걱정하는 것뿐일 거예요. 우리 그냥 이 식사를 즐기자고요.”식사는 계속되었지만, 분위기는 눈에 띄게 어색해졌다.설영준은 자신의 감정을 최대한 억누르려 했지만, 설영준의 시선은 여전히 카를로스와 송재이에게 향했다.설영준은 무언가를 깊이 생각하는 듯하다가 갑자기 손에 든 식기를 내려놓고 도경욱을 바라보며 낮고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사실 계속 생각해 왔습니다. 앞으로 어떻게 불러야 할지 말이죠. 아저씨라 해야 할지 아니면...아버님이라 해야 할지...”이 말은 마치 폭탄과 같았다.
레스토랑 한 구석에서 카를로스는 계속 자리에 앉아 있었다. 카를로스의 미간은 깊게 찌푸려졌고 눈빛에는 혼란스러움이 보였다.비록 카를로스는 한국어를 알아듣지 못했지만, 송재이의 감정 변화를 예리하게 감지했다. 송재이의 미묘한 표정 하나하나가 처음의 가벼운 즐거움에서부터 충격과 고통에 이르기까지 카를로스의 마음을 흔들었다.송재이가 갑자기 일어나 급하게 자리를 떠나자 카를로스는 본능적으로 따라가려 했다. 카를로스의 손이 막 의자 등받이에 닿으려는 순간에 설영준이 카를로스를 단단히 붙잡았다. 설영준은 유창한 스페인어로 말했다.“재이 씨를 혼자 두세요. 지금은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합니다.”카를로스는 발걸음을 멈췄다. 이해하지 못한 채 걱정이 가득한 눈빛을 보였지만, 순순히 다시 자리에 앉았다.잠시 침묵이 흘렀고 식기들이 가끔 부딪치는 소리만이 정적을 깼다. 도경욱은 시선을 돌려 설영준을 질책하는 눈빛으로 바라보았다.도경욱의 낮고 약간의 불만이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재이 씨와 진실을 마주하고 싶어 하는 건 이해하지만, 재이 씨의 감정도 고려했어야 했어요. 이렇게 갑작스럽게 하지 말고 차근차근 접근했어야죠.”설영준은 자신의 충동적인 행동을 깨달으며 마음속으로 죄책감을 느꼈다. 다시 침묵한 후, 사과하는 어조로 말했다.“제가 잘못했어요. 재이 씨의 감정을 충분히 고려하지 못했어요. 더 신중했어야 했어요.”도경욱은 설영준의 사과를 들었지만,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도경욱은 고개를 돌려 설영준의 시선을 피했다.식탁 위의 분위기는 더욱 무거워졌고 세 사람은 각자 생각에 잠겼다. 공기에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긴장감이 감돌았다....한편, 송재이는 무심코 바르셀로나의 유명한 라스 람블라스 거리로 발걸음을 옮겼다.이 거리는 도시의 중심축 역할을 하는 활기찬 길이었고 양옆에는 울창한 오동나무들이 가득 심겨 있었다. 햇빛은 나뭇잎 사이로 비집고 들어와 바닥에 얼룩진 그림자를 만들어 냈다.거리는 사람들로 붐볐고 거리 예술가들의 공연이 수많은 관광객의
재이는 조심스럽게 손을 내밀었고 고양이는 잠시 머뭇거리더니 천천히 다가와 송재이의 손에 머리를 비볐다. 송재이의 얼굴에는 부드러운 미소가 번졌고 송재이는 고양이의 따뜻하고 부드러운 털을 살며시 쓰다듬었다.그때, 한 덩치 있는 스페인 남자가 그의 아들과 함께 다가왔다. 남자는 짙은 검은 머리와 깊은 갈색 눈을 가지고 있었으며 온화한 미소가 그의 얼굴에 떠올라 있었다. 작은 소년은 곱슬곱슬한 금발 머리와 호기심 넘치는 큰 눈을 가지고 있었다.남자는 서툰 영어로 송재이에게 말했다. “죄송해요. 이 고양이는 제 고양이예요. 그런데 이 고양이가 당신을 많이 좋아하나 봐요.”송재이는 고개를 들어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괜찮아요. 저도 이 고양이가 마음에 들어요. 아주 친근한 아이네요.”남자의 아들은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송재이와 고양이의 상호작용을 지켜보며 말했다. “엄마가 항상 말했어요. 동물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좋은 사람이라고요.”송재이는 소년의 말에 웃음을 터뜨리고 소년의 머리를 살짝 쓰다듬었다.“엄마가 맞는 말을 했군요. 이름이 뭐예요?” “미겔이에요.”소년은 또렷하고 청량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미겔, 만나서 반가워요.” 송재이는 말했다. 이 우연한 만남 덕분에 송재이의 기분은 더욱 좋아졌다.남자는 송재이와 미겔의 상호작용을 보며 얼굴에 더욱 따뜻한 미소를 지었다. “미겔은 쉽게 다른 사람들과 친해지지 않는데, 보아하니 둘이 잘 맞는 것 같아요.”송재이는 웃으며 대답했다. “아마 우리가 친구라서 그런 것 같아요.”남자의 영어가 유창하지는 않았지만, 남자의 눈빛과 몸짓에는 따뜻함과 사랑이 가득 담겨 있었다.스페인 남자는 둥근 테이블에 앉았고, 그의 아들 미겔도 남자의 옆에 자리를 잡았다. 두 사람 사이에는 온정과 즐거움이 넘쳤다. 남자는 커피 두 잔을 주문했는데 한 잔은 자신을 위한 것이었고 다른 한 잔은 미겔을 위해 특별히 준비된 것이었다. 그 위에는 우유 거품과 초콜릿 조각이 얹혀 있어 마치 예술 작품처럼 보였다.
통화가 종료된 후 설영준은 더 마음이 무거워졌다.그는 다시 한번 송재이 병실로 가 침대 끝에 앉았다. 그리곤 창백한 얼굴로 고요히 잠든 송재이의 얼굴을 보았다.설영준은 마치 송재이에게 자신이 한 말이 들리는 것처럼 나직하게 말했다.“재이야, 내 말 들려? 나 여기 있어. 네 옆에 있어.”그는 조심스럽게 송재이의 손을 잡으며 미약해진 체온을 느꼈다.“어쩌면 지금 내 말이 안 들릴 수도 있다는 걸 알아. 하지만 그것만은 알아줬으면 좋겠어. 내가 널 얼마나 사랑하는지 말이야.”설영준은 이내 심호흡을 하면서 감정을 갈무리하려고 애를 썼다.“우리 아직 함께 해보진 못한 일들이 많아. 혹시 기억해? 우리 그때 그랬었잖아. 함께 세계 곳곳에 있는 나라로 여행 가서 우리와 다른 사람들의 문화를 체험해 보고 그곳의 음식을 먹어보자고. 네가 지금 눈만 떠준다면 난 지금 당장 너랑 함께 그 떠날 거야.”이때 누군가 노크하더니 도정원이 들어왔다. 그는 아주 엄숙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영준 씨, 경찰들이 지금 출동했다고 하네요. 곧 도진욱의 거처로 들이닥칠 거예요.”설영준은 자리에서 일어난 뒤 고개를 끄덕였지만 여전히 아쉬움이 가득한 눈길로 송재이를 보았다.“정원 씨, 부탁 하나만 들어줄래요?”“말씀하세요. 제가 도울 수 있는 거면 도와드릴게요.”“저 대신 재이 좀 잘 챙겨주세요. 전 누구 만나러 가야 할 것 같아서 그래요. 그 사람이 아마 이 사건에 아주 큰 도움을 줄 수 있을 거예요.”“걱정하지 말고 가봐요. 여긴 제가 꼭 붙어 있을 테니까 아무도 재이를 건들지 못할 거예요.”설영준은 고마운 눈빛으로 도정원을 힐끗 보곤 몸을 돌려 병실을 나섰다.떠나기 전 설영준은 나직하게 송재이의 귓가에 대고 말했다.“재이야, 나 얼른 돌아올게. 그러니까 나 꼭 기다려줘야 해.”송재이의 병실에선 도정원만이 묵묵히 곁을 지키며 그녀가 깨어나길 기다리고 있었다. 설영준은 이미 진상을 찾으러 떠났다.그는 오랜 친구를 만나러 갈 생각이다. 그 친구는 의학 부문에서 아
그러자 보안 요원이 말했다.“여긴 병원 CCTV를 관리하는 곳입니다. 외부인에게 함부로 영상을 보여줄 수 없습니다.”설영준은 확고한 어투로 말했다.“전 송재이 씨 약혼자입니다. 전 반드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아야겠으니 협조 부탁드립니다.”보안 요원은 다소 망설이더니 결국 그에게 영상을 보여주었다.영상 속에서 설영준은 세세한 부분까지 발견했다. 송재이가 쓰러지기 전 도진욱은 물잔을 송재이에게 건넸다. 그 순간 설영준은 의심을 하게 되었다.같은 시각 도정원은 병실에서 쪽지 한 장을 발견했다. 쪽지엔 갈겨 쓴 글씨가 있었다. 약물의 이름과 사용량이 적힌 쪽지였다. 그는 발견하자마자 바로 설영준에게도 알렸다.두 사람은 각자 발견한 것을 공유하곤 분석하기 시작했다. 설영준은 도진욱이 송재이에게 건넨 물잔과 쪽지 위에 쓴 약물의 명칭을 보았다. 그는 순간 무언가 깨닫게 되었다.송재이가 검사실로 들어간 뒤 설영준과 도정원은 각자 단서를 찾으러 움직였기에 설영준은 다시 돌아와 송재이를 기다려 보기로 했다. 그러나 도정원은 쪽지에 적힌 약물 이름을 보면서 조사하기 시작했다.설영준은 초조한 얼굴로 검사실 밖에서 송재이를 기다렸다.“재이야, 꼭 버텨야 해. 내가 여기서 기다리고 있을게.”시간이 1분 1초 흘러갔다. 설영준은 마음이 점점 더 무거워졌다. 머릿속에 송재이의 미소와 웃음소리, 그리고 함께 보냈던 즐거운 시간들이 떠올랐다. 그는 속으로 기도했다. 송재이가 무사히 나오길 바라며 말이다.설영준은 혼잣말로 중얼거렸다.“재이야,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를 기억해? 네가 그때 엄청 찬란한 미소를 지었었어. 네 찬란한 웃음이 온통 어둠뿐이던 내 세상을 환하게 빛내주었지. 그때 널 지켜주겠다고 다짐했었는데... 지금은...”바로 이때 문이 스르륵 열리고 의사가 나왔다. 설영준은 바로 다가가 물었다.“선생님, 재이는 어때요?”“저희가 최선을 다해 독이 퍼지는 것을 막고 있습니다. 하지만 너무 희귀한 독에 중독된 거라 독 분석하고 해독제를 만드는 데 시간이
송재이의 말은 청천벽력이었다. 도정원과 도진욱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수사관이 빠르게 다가와 상태를 살폈다. 그도 사태의 심각성을 알게 되어 얼른 입을 열었다.“저희가 바로 의사를 불러오겠습니다.”도정원은 빠르게 긴급 호출 벨을 누르면서 송재이를 부축한 채 옆에 있던 의자에 조심스럽게 앉혔다.의자에 앉히자마자 도정원은 초조한 마음으로 송재이를 어깨에 기대게 했다.“재이야, 조금만 버텨줘. 의사가 금방 도착할 거야.”도진욱은 다소 복잡한 감정이 담긴 얼굴로 송재이를 보았다. 속으로 뭔가 갈등하고 있는 듯했다.그러더니 혼잣말로 중얼거렸다.“독에 중독됐다고? 그럴 리가... 난 아무것도 하지 않았어...”예리한 수사관은 그런 도진욱의 상태를 눈치채고 바로 심문했다.“도진욱 씨, 이 상황에 관해 설명하세요. 송재이 씨가 왜 갑자기 중독된 거죠?”도진욱의 안색은 더 창백해졌다. 그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전... 전 정말로 모릅니다. 제가 왜 제 조카를 죽이겠습니까?”바로 이때, 의사와 간호사가 병실로 들어오며 송재이를 살펴보았다.의사가 엄숙하게 말했다.“아무래도 정밀 검사를 해봐야 알 것 같습니다. 어떤 독에 중독되었는지 확인할 수 없습니다.”송재이는 급하게 검사받으러 갔다. 도정원과 도진욱이 그 뒤를 따라갔다. 수사관은 묵묵히 이 상황을 지켜보았다. 머릿속에 이미 사건의 윤곽이 그려지기 시작했다.도정원이 밖에서 초조한 마음으로 송재이를 기다렸다. 그러나 도진욱은 홀로 구석으로 간 뒤 손을 주머니에 찔러넣은 채 안에 있는 핸드폰만 불안한 마음으로 만지작거렸다.그러더니 낮은 목소리로 누군가와 통화했다.“나야. 일이 복잡하게 됐어. 송재이가 갑자기 독에 중독되어서 경찰이 개입하게 되었어. 나도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인지 몰라. 하지만 우린 지금 반드시 움직여야 해.”전화기 너머로 잔뜩 가라앉은 목소리가 들려왔다.“우리 계획을 수정할 필요가 있군요. 일단 절대 증거를 찾게 해서는 안 돼요. 안 그러면 우리 모두 끝장나게 되니까
화가 난 도정원은 이를 빠득 갈았다.“그게 무슨 의미죠? 설마 아버지 병이 당신과 연관이 있다는 건가요?”정체 모를 남자는 웃음을 터뜨렸다.“곧 알게 될 거야. 참, 도진욱. 가문의 이익을 위해 네 동생 행복을 희생했었지? 이젠 네가 희생할 차례야.”전화는 그렇게 끊겼다. 송재이와 도정원은 고개를 돌려 도진욱을 보며 설명을 바랐다.그러자 도진욱이 말했다.“난... 난 정말 몰랐어. 그때 일이 이렇게 될 줄은 몰랐다고. 그때 내가 그런 선택을 한 건 인정해. 하지만 전부 가문을 위해서였어. 난 너희들을 해칠 생각한 적 없다고.”송재이는 무력감이 들었다. 거짓과 배신으로 가득한 이 가족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몰랐다.절망에 빠진 송재이가 이마를 짚으며 말했다.“우리 이제 어떻게 해야 해요? 대체 누굴 믿어야 하는 거예요?”도정원도 다소 괴로운 눈빛을 하고 있었다. 그는 주먹을 꽉 움켜쥐며 감정을 갈무리하려고 애를 썼다.“가문의 이익을 위해서 그러셨다고요. 우리 도씨 가문이 언제부터 이익에만 눈멀어 가족을 버리는 가문이 된 거죠?”도진욱의 얼굴엔 죄책감이 가득했다. 그는 힘이 없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정원아, 그땐 내 잘못이 맞아. 나도 인정해. 난 내 선택으로 우리 가문이 더 힘이 있는 가문이 될 줄 알았고 가족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어. 난... 난 정말 미안하구나.”옆에서 듣고 있던 송재이는 막막하면서도 불안했다.“두 사람은 전부 제 가족이에요. 전 대체 누굴 믿어야 할지 모르겠다고요.”송재이의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그 순간 문밖에서 다급한 발걸음 소리가 들려오면서 이 숨 막히는 침묵을 깨버렸다.세 사람은 동시에 고개를 돌려 문 쪽을 보았다. 제복을 입은 남자들이 엄숙한 얼굴로 들어왔다.“안녕하세요. 저희는 경찰서 수사과에서 나왔습니다. 몇 가지 당신들이 조사에 협조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도정원과 도진욱은 서로 마주 보았다. 그들은 알고 있었다. 이것이 진상을 알아내는 데 중요한 조사라는 것을“네, 협조하겠습니다.
전화기 너머로 침묵이 흘렀다. 그리고 이내 짙은 한숨 소리가 들렸다.도진욱이 입을 열었다.“그래, 알았다. 너희들한테... 해줄 얘기가 있단다. 네 아버지의 과거와 어머니에 관한 얘기란다.”도정원과 송재이는 서로 눈빛을 주고받았다. 두 사람은 의아하면서도 초조했다.“큰아버지,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뭔가 알고 계신 거예요?”도진욱은 미간을 찌푸렸다.“곧 도착하니 얼굴을 보면서 얘기하자꾸나. 이 일은 내가 너희들 얼굴을 보면서 직접 말해줘야 할 것 같구나.”전화를 끊은 후 도정원과 송재이는 생각에 잠겼다. 두 사람은 도진욱이 어떤 얘기를 들려줄지 몰랐고 도진욱이 그들에게 해줄 얘기가 그들 가족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지도 몰랐다.얼마 지나지 않아 도진욱이 병원에 도착했다. 그의 얼굴엔 초조함과 죄책감이 담겨 있었다.그는 송재이와 도정원의 얼굴을 보더니 심호흡을 한 후 천천히 입을 열었다.“지금 마음이 얼마나 혼란스러운지 알고 있단다. 하지만 더는 너희에게 숨길 수 없을 것 같구나. 너희들이 모르는 사실은 더 많단다.”송재이는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머리가 어질거렸다.“큰아버지,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저희가 아직도 모르는 비밀이 있는 건가요?”“그래, 그때 당시 나와 네 엄마는 확실히 그런 사이였었지. 하지만 그건 다 지나간 일이란다. 나중에 난 그 삼각관계에 빠지기로 했고 네 엄마랑 네 아빠를 이어주기로 했었지. 그때의 난 그게 옳은 일이라고 생각했단다. 지금까지도 말이야.”송재이와 도정원은 충격받은 얼굴로 도진욱을 보았다. 그가 꺼낸 얘기는 도경욱이 꺼낸 얘기보다 더 충격적이었다.“큰아버지, 정말로... 정말로 그러셨어요?”“나도 알고 있단다. 내가 무슨 말을 하든 과거의 일을 없던 일로 할 수는 없겠지. 하지만 난 아직 살아 있을 때 너희들에게 진실을 말해주고 싶구나.”바로 이때 병실 안에서는 긴급 호출 벨이 울렸다.의사와 간호사들이 급하게 병실로 달려왔고 송재이와 도정원도 얼른 병실 안으로 들어갔다.의사는 그들을 보더니 고
송재이는 얼른 도경욱의 손을 꼭 잡았다. 눈물이 그녀의 눈 앞을 가렸다.옆에서 두 사람의 모습을 보던 도정원도 눈시울이 붉어졌다.병실 안에는 무거운 분위기가 감돌았다. 그저 일정한 의료 기기 소리만 들려오며 시간이 흘렀다.도경욱은 송재이를 빤히 보았다. 그의 두 눈엔 아쉬움과 죄책감만 남아 있었다.자신에게 남은 시간이 얼마 없다는 것을 그는 알고 있었다. 하지만 죽기 전 꼭 해야 할 말이 있었다.미약한 목소리지만 그는 확고한 어투로 말했다.“재이야, 내 딸. 너에게 꼭 해줄 말이 있단다. 네 출생의 비밀과 네 엄마에 관한 얘기야.”송재이는 고개를 들었다. 눈물 그렁그렁 맺힌 그녀는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아빠,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제 엄마가 왜요?”도경욱은 숨을 깊이 들이쉬었다. 마치 온몸의 힘을 모으고 있는 것 같았다. 깊이 숨겨둔 진실을 정확하게 말해주기 위해서 말이다.“그때 네 엄마, 그러니까 서지원의 약혼 상대는 내 형이었단다. 네 큰아버지지. 하지만 운명이 장난을 쳤지. 서지원이... 네 엄마가 진심으로 사랑한 사람은 나였단다.”송재이는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너무도 충격적인 진실이었다. 그녀는 단 한 번도 자신의 출생에 이런 비밀이 숨겨져 있을 거라곤 상상도 못 했다.그녀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어...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었던 거죠?”도정원도 놀란 표정인 것을 보아 처음 알게 된 사실인 것 같았다.도경욱은 다소 괴로운 표정을 지었다.“네가 이 사실을 받아들이기 힘들어한다는 것을 나도 안다. 그렇지만 전부 사실이란다. 난 지원이를 단 한 번도 강요한 적 없었어. 우리는 서로 진심으로 사랑했어. 하지만 그때는 이런 추문을 받아들이지 않던 시절이었지.”송재이는 마음이 복잡했다. 이렇게까지 혼란스러운 감정은 처음이었다.그녀는 이렇게나 갑작스러운 사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몰랐다.“아빠, 그럼 대체 왜 일찍 말씀해 주지 않으신 거예요? 왜 그동안 숨기고 계셨던 거예요?”도경욱은 덜덜 떨리는 손으로 송
박정후는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다소 고통스러운 기억을 떠올리고 있는 듯한 눈빛으로 박윤찬을 보았다.“그때 내가 한 여자를 사랑하게 되었어. 아주 똑똑하고 예쁘고 착한 사람이었지. 나한테 아주 특별한 사람이기도 했어. 하지만 어머니가... 어머니가 우리 사이를 반대하셨어.”박윤찬은 미간을 찌푸렸다. 여전히 이해가 가지 않았다.“어머니가 왜 반대하셨는데? 어머니는 아무 이유도 없이 그러실 분이 아니잖아.”박정후가 대답했다.“처음엔 나도 이해하지 못했어. 그때의 난 분명 어머니가 그 여자에 대해 오해하고 있다고 생각했었지. 또 어쩌면 내가 사랑놀이에 푹 빠져 일을 제대로 하지 않을까 봐 걱정하시는 건 줄 알았어. 하지만 나중에 알고 보니 전혀 아니었어.”박윤찬은 초조하게 한숨을 내쉬었다.“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건데? 어머니가 아무 이유도 없이 반대하실 분은 아니야.”박정후의 낮게 깔린 목소리에선 슬픔이 느껴졌다.“그 여자는 성이 임 씨였어. 임씨 가문은 우리 성씨 가문과 오래전부터 원한이 있었지. 이 원한은 우리가 태어나기 전부터 있었던 거라 저주와도 같은 것이었어. 두 가문의 후대에도 아주 큰 영향을 주고 있어.”박윤찬은 놀란 모습이었다.“난 임씨 가문에 대해 들어본 적 단 한 번도 없었어. 어머니도 나한테 한 번도 말씀하신 적 없었다고.”박정후가 말했다.“어머니는 이 원한이 시간이 지나면서 잊히길 바라셨던 거야. 하지만 사실상 잊히지 않았지. 임씨 가문과 성씨 가문은 지난 세대에서도 심각한 충돌이 있었어. 두 가문은 사업 경쟁을 벌이다가 더 틀어지게 되었지.”박윤찬은 이해가 되지 않았다.“사업 경쟁이라니? 그게 언제 일인데 아직도 신경 쓰고 있다는 거야?”“그래, 하지만 지난번 경쟁에서 임씨 가문은 파산당하게 되었지. 그 가문 어르신도 결국 그때 세상을 뜨게 되신 거야. 임씨 가문에서는 우리 성씨 가문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경쟁을 벌여 그런 비극을 만든 것으로 생각하고 있어.”박윤찬은 한참 침묵하다가 입을 열었다.“그러
박정후는 시선을 돌려 창밖을 내다보았다. 바쁘게 움직이는 사람들을 보더니 생각에 잠겨 버렸다.그는 나직하게 말했다.“제가 멀리 떠나기로 결정한 건 저와 윤찬이 사이에... 오해가 있기 때문이에요. 저랑 윤찬이 사이에 갈등이 있었는데 전 제가 원하는 것을 이루기 위해 윤찬이 곁을 떠났죠. 하지만 혈연관계는 영원히 끊을 수 없는 거잖아요.”묵묵히 박정후가 하는 얘기를 듣고 있던 송재이는 박정후의 안타까움과 죄책감을 고스란히 느꼈다.송재이가 말했다.“가족 사이에 확실히 갈등이 생길 수도 있죠. 하지만 제일 중요한 건 서로 항상 응원하고 있음을 알고 있는 것이죠.”설영준은 진지한 얼굴로 박정후를 보았다.“정후 씨는 정의를 위해, 동생을 위해 이미 많은 것을 했으니 윤찬 씨도 이해해줄 거예요.”장주영도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맞아요. 정후 씨가 한 모든 것을 박윤찬 씨가 알게 된다면 분명 아주 자랑스러워할 거예요.”박정후는 한숨을 내쉬었다. 고개를 돌려 확고함이 가득한 눈빛으로 그들을 보았다.“그랬으면 좋겠네요. 이번에 돌아온 것도 윤찬이에게 뭐라도 도움이 되어주고 싶어서였어요. 그리고 윤찬이와 화해할 기회도 있었으면 좋겠네요.”그들을 도와준 정체 모를 인물은 바로 박정후였다.그는 마음이 너무도 복잡했다.이번 일로 동생과 무너진 관계를 회복하고 다시 화목하게 지내고 싶었다.박정후가 말했다.“관계를 회복하는 데 시간이 필요하다는 걸 알아요. 하지만 전 기다릴 수 있어요. 윤찬이가 저한테 기회만 준다면 형으로서 책임을 다할 거예요.”그는 확고한 눈빛으로 말했다. 박윤찬과의 거리감을 하루아침에 줄일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자리에서 일어난 그는 다시 창밖을 보았다. 꼭 사람들 속에서 누군가를 찾는 듯한 모습이었다.“전 반드시 윤찬이한테 찾아가야 해요.”박정후는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윤찬이가 저를 만나고 싶어 하든 말든 상관없이 알려주고 싶어요. 전 단 한순간도 윤찬이를 포기한 적 없다고 말이에요.”송재이는 박정후의 손을 잡아
설영준과 송재이는 서도재의 비웃음에도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저 빠르게 방 안의 상황을 살펴본 뒤 도망칠 길이나 반격할 기회가 없는지 파악했다.정체를 알 수 없는 인물은 조용히 숨어서 행동을 개시하려고 했다.설영준은 차갑게 피식 웃었다.“서도재, 이러면 네가 정말로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야? 네가 저지른 범죄는 이미 전부 드러났어. 밖엔 경찰들이 깔려 있다고.”서도재의 웃음이 사라지고 표정이 굳어졌지만 빠르게 다시 자신만만한 모습으로 돌아왔다.“경찰이 깔려 있다고? 넌 내가 아무 준비도 하지 않은 거로 보이나 봐? 이 아지트는 아주 단단하게 만들었거든. 너희들은 도망칠 수 없어.”송재이는 설영준이 방 한구석에 있는 창문에 힐끗 본 것을 발견하곤 바로 그의 의도를 눈치챘다.그녀는 일부러 서도재를 향해 목소리를 높였다.“그럼 우린 여기서 그쪽과 시간을 끌 수밖에 없겠네요. 그쪽 아지트가 먼저 무너질지 아니면 밖에 경찰들이 먼저 쓰러지게 될지 한 번 지켜보자고요.”서도재는 손을 들어 올리며 부하들에게 준비하라는 사인을 보냈다. 하지만 이때 방 안의 불빛이 꺼지더니 어둠이 내려앉았다.정체를 알 수 없는 인물은 확성기로 말했다.“꼼짝 마!”설영준과 송재이는 어둠 속에서 빠르게 창문이 있는 쪽으로 움직였다.설영준은 있는 힘껏 발로 창문을 깨버렸다. 두 사람은 거의 동시에 창문에서 뛰어내렸다. 바깥엔 이미 에어매트가 준비되어 있었다.서도재는 갑자기 어두워진 주위에 당황스러워하면서 미처 반응하지 못했다.불빛이 다시 켜졌을 땐 설영준과 송재이는 이미 사라졌다.그는 잔뜩 화가 난 목소리로 말했다.“쫓아가! 반드시 두 사람 내 앞에 잡아 와!”그러나 서도재의 부하들이 아지트에서 나가자마자 이미 밖을 포위하고 있는 경찰들을 발견하게 되었다.알고 보니 정체를 알 수 없는 인물이 미리 익명으로 경찰에 신고한 것이다.경찰은 확성기로 말했다.“안에 있는 사람 모두 들으세요. 당신들은 포위되었습니다. 당장 손에 든 무기를 내려놓고 항복하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