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민건의 죽음 말이야. 정말 너랑 연관 있는 거야?”송재이는 계단 위로도 가지 않았고 그와 함께 길을 걷지도 않았다. 그저 설영준을 뚫어져라 바라보기만 했다.순간 멍해진 설영준이 송재이와 눈을 맞추었다.두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서 맞물리자 설영준은 송재이의 눈빛에서 낯선 냉기를 느꼈다.“없어.”설영준은 피하지 않고 송재이의 시선을 똑바로 마주치며 대답했다.송재이는 무의식적으로 설영준의 시선을 피하더니 자신의 앞에 서 있는 남자를 살짝 밀어내며 말했다.“나 피곤해. 이제 좀 쉬고 싶어. 너도 그만 돌아가.”비록 송재이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설영준은 송재이가 자신을 믿지 않는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문예슬의 사건 이후로 두 사람 사이에는 계속해서 불신의 벽이 존재했다. 이제 지민건의 죽음으로 그 벽이 더 커지고 두꺼워졌다.이번만큼은 설영준도 송재이를 따라가지 않고 그녀의 뒷모습이 조용히 건물 입구에서 사라지는 것을 바라보았다....집에 돌아온 송재이는 그대로 소파에 몸을 던졌다.머릿속이 뒤죽박죽이었다. 지민건을 생각하다가 다시 설영준을 생각했고 설한 그룹을 향한 험담들을 생각했다.그날 밤, 여러 생각으로 머리가 뒤죽박죽된 송재은은 깊게 잠들지 못했다.다음 날 아침, 송재이는 눈을 뜨자마자 베개 밑에서 휴대폰을 꺼냈다.뉴스를 확인해보니 설한 그룹과 지민건에 관한 모든 부정적인 뉴스가 사라졌었다.더 생각할 필요도 없이 설영준의 손길이 닿은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설한 그룹에 더 나쁜 영향을 주기 전에 설영준은 이 시끄러운 여론을 억누르려 했던 것 같았다.곧이어 경찰의 지민건 사건의 조사 결과가 공개되었다. 그 결과는 의외의 사고였다.그 결과를 확인한 송재이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어야 했지만 사실은 여전히 가슴 속에 큰 돌덩이가 얹힌 듯 답답했다.출근할 때에도 송재이의 마음은 계속 심란했다. 결국 참지 못한 송재이는 박윤찬에게 전화를 걸었다.설영준이 자신과 박윤찬 =의 관계를 의심하는 상황을 피하려고 일부러 연락을
송재이는 빌딩 입구에 서 있었다. 얼굴에 눈물 자국을 가득 매단 채 자신을 찾아온 여인의 정체는 바로 지민건의 어머니인 최연희였다.그녀의 등장에 송재이의 마음이 무거워졌다.송재이는 최연희가 아들의 죽음에 대한 진실을 찾으러 온 게 틀림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게다가 본인도 아직 그의 죽음에 여러 의문을 품고 있었으니 말이다.“재이 씨, 재이 씨가 설 대표랑 친한 사이라고 들었어요. 내 아들의 죽음이 정말로 단순 사고였나요?”최연희가 떨리는 목소리로 송재이에게 다가와 물었다. 그 질문을 던지는 최연희의 눈에는 절망과 분노가 가득 차 있었다.송재이는 심장이 마치 칼에 베이는 듯 아파왔다.그녀는 이 질문에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몰랐다.그녀 자신도 설영준에 대한 신뢰가 흔들리고 있는 상황에 자신의 앞에서 서럽게 울고 있는 한 어머니의 희망을 완전히 짓밟고 싶지 않았다.“어머님, 저는 경찰 조사 결과를 믿어요. 새로운 증거가 나타난다면, 영준 씨 역시 진실이 밝혀지길 바랄 겁니다.”송재이는 애써 단호한 목소리로 또박또박 대답했다.최연희의 눈에 복잡한 감정이 담겨있었다.그녀는 송재이의 말에서 조금의 위안을 얻은 것 같아 보였다.최연희는 마지막 지푸라기라도 잡는 듯한 심정으로 송재이의 손을 꽉 잡았다.“재이 씨, 저는 그저 제 아들이 억울하게 안 죽었길 바랄 뿐이에요. 설 대표가 우리 아들 죽음에 대한 어떤 정보라도 갖고 있다면 저는 무슨 대가든 다 치를 겁니다.”최연희의 말에는 엄청난 결의가 느껴졌다.송재이가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더는 도망칠 곳이 없었다.그녀는 꼭 설영준을 찾아가야만 했다. 설영준을 찾아 모든 진실을 밝혀내야 했다....송재이는 설영준에게 전화를 걸었다.수화기 너머로 송재이의 침착한 목소리가 들려왔다.“재이야, 무슨 일이야?”“설영준, 지민건 씨 어머님께서 날 찾아오셨어. 진실을 알고 싶어 하셔.”송재이는 곧장 본론으로 들어갔다.수화기 너머에서는 침묵이 흘렀다. 곧이어 설영준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재이야
마침내 용기를 낸 송재이는 설영준에게 전화를 걸었다.전화를 걸기 전, 그녀는 이미 어떤 결과든 감당할 준비가 되어있었다.송재이는 긴장감 때문에 얼음장처럼 차가워진 손으로 휴대폰을 힘껏 쥐었다.몇 번의 신호음이 들리자 이윽고 설영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송재이가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설영준, 너 그날 밤에 어디 있었던 거야?”그녀의 목소리가 미세하게 떨렸지만 최대한 침착함을 유지하려 애썼다.설영준은 송재이가 여전히 자신을 믿지 않는다는 걸 알고 있었다.잠시 침묵이 흐르고 설영준이 천천히 대답했다.“재이야, 다시 한번 말하지만 나는 지민건의 죽음과는 아무 상관이 없어. 그건 사고였으니까.”정말 그럴까? 정말 아무 상관도 없을까?하지만 송재이의 의심은 마음속에서 잡초처럼 커져만 갔다.그녀는 눈을 힘껏 감았다.그 순간, 초인종 소리가 날카롭게 울리며 송재이의 생각을 방해했다.잠시 망설이던 그녀는 전화를 끊고 문을 열어주었다.문밖에는 최연희가 서 있었다. 그녀는 바로 전에 송재이의 앞에서 눈물을 흘리며 아들의 죽음에 대한 진실을 밝혀달라고 부탁했던 여인이었다.하지만 지금, 그녀의 눈빛은 이상할 정도로 빛나고 있었고 얼굴에는 더 이상 무력함이 아닌 분노와 결연함만 가득 차 있었다.“재이 씨, 당신이 설 대표를 지켜주고 있다는 걸 압니다. 하지만 설 대표는 내 아들을 죽인 살인자예요!”최연희의 목소리는 날카로웠고 그녀의 입에서 나온 말 한마디 한마디가 송재이의 심장을 후벼 팠다. 송재이의 얼굴이 순간적으로 창백해졌다. 그녀는 자신의 귀를 믿고 싶지 않았지만 마음은 통제할 수도 없이 흔들리기 시작했다.“무슨, 무슨 증거라도 있으신 건가요?”송재이의 말 한마디가 최연희의 마음에 대못을 박아버린 듯했다.최연희의 목소리가 힘을 잃더니 문손잡이를 꽉 잡았다. 마치 그것이 그녀의 유일한 버팀목이라도 되는 듯 말이다.최연희는 가방에서 USB를 꺼내며 결연한 눈빛을 보였다. “여기에 그날 밤 CCTV 영상이 있어요. 난 이걸 경찰에 넘길 거
취조실 불빛은 유난히 밝고 눈이 부셨다.차가운 의자에 앉은 송재이는 두 손을 앞으로 모았고 손끝이 하얗게 질렸다.지금 그녀의 마음은 마치 이 밀폐된 방처럼 모순으로 뒤덮였다.하루 꼬박 조사를 받은 송재이는 온몸의 신경이 곤두섰다.자신의 충동이 초래한 결과를 뼛속 깊이 깨우쳤지만, 그녀는 절대 후회하지 않았다.그래도 제 행동에 대한 책임은 지고 싶었다. 그게 법적 처벌이라고 할지라도 그 결심은 달라지지 않았다.…그동안 문예슬은 핸드폰이 손을 떠나지 않았으며 새로운 기삿거리를 하나도 놓치지 않았다.지금껏 송재이를 향한 질투는 불 번지듯이 커졌고 절대 꺼지지 않았다.송재이가 구속당한 소식을 들은 후로는 가뭄의 단비 같은 기분이 들었고, 깨고소한 마음에 환호를 날릴 정도였다.드디어 설영준에게 가깝게 다가갈 절호의 기회가 생겼다. 어쩌면 송재이의 자리를 대체할 수 있을지도 몰랐다.문예슬은 한껏 꾸미기 시작했다. 몸매가 그대로 드러나는 옷차림과 화려한 메이크업을 한 그녀는 바로 설영준의 회사로 향했다.회사 아래에서 심호흡하고 용기를 내어 안으로 들어섰다.“죄송합니다, 들어가실 수 없습니다.”여진이 문 앞을 막아서고 예의 바르지만 단호하게 말했다.문예슬이 자신감 넘치는 미소와 교활한 시선을 날렸다.“아, 저는 설영준 대표와 일 얘기를 하러 온 거에요. 이런 사소한 것까지 신경 쓸 필요는 없지 않나요?”부드럽지만, 꽤 도발적인 목소리였다.그러나 여진은 꿈쩍도 하지 않고 단호하게 말했다.“문예슬 씨, 예약 없이는 절대 안으로 들어가실 수 없습니다.”문예슬은 입꼬리를 올리더니 여진을 살짝 밀어버리고 그 틈을 타 빠르게 설영준의 사무실로 들어갔다.설영준은 사무실 책상 앞에 앉아 인상을 찌푸린 채로 문서를 읽고 있었다.부산스러운 소리에 고개를 들자 문 앞의 문예슬이 보였다.“설영준 대표님, 안녕하세요.”간드러진 목소리가 들려오고 그녀는 요염한 자태로 걸어갔다.도발적인 시선이 설영준을 향했지만, 그는 여전히 아무 감정이 담기지 않은 차가운
경찰이 고개를 끄덕이며 석방 서류를 건넸다.“조사 과정에서 새로운 증거가 나타났고 이제 돌아가셔도 됩니다.”송재이는 떨리는 손으로 그 서류를 건네받았고 어느새 눈물이 앞을 가렸다.비틀거리며 몸을 일으킨 송재이는 휘청이며 구치소 밖으로 걸어 나갔다.얼굴을 비추는 햇볕이 유난히 따뜻하고 눈부시게 느껴졌으며 너무 따뜻한 나머지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문밖에는 설영준이 차를 대고 조용히 기다리고 있었다.두 사람은 짧은 거리를 두고 마주했지만, 그 몇 걸음이 유독 멀고 아득하게 느껴졌다.“영준아, 이게 어떻게 된 일이야?”송재이는 물기 여린 목소리로 물었다.설영준은 이런 그녀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며 덤덤하게 대답했다.“며칠 동안 수고 많았어. 우린 USB를 찾아냈는데 그 안에는 텅 비었고 아무것도 없었어.”송재이가 고개를 번쩍 쳐들더니 충격을 받은 듯 말했다.“그런데 왜 지민건 어머니는 그렇게 말했던 거야?”설영준의 얼굴이 갑자기 굳어졌다.“그 사람도 이용당한 거야. 가짜 USB로 널 속이는 게 그들의 목표였던 거지. 넌 내가 걱정할까 봐 나한테 물어보지 않았고 그 함정에 고스란히 빠졌던 거야.”송재이는 어리벙벙한 표정을 지었다. 결국 처음부터 잘못된 단추였다.설영준이 송재이의 손을 꼭 잡았다.“재이야, 이제 모든 게 끝났으니 걱정하지 마.”“그 USB 안에는 정말 아무것도 없었던 거야?”믿을 수 없다는 듯 재차 묻자 설영준이 또박또박 다시 말을 건넸다.“처음부터 증거는 존재하지 않았어. 지민건의 죽음은 그저 의외의 사고였고 모든 게 오해였어.”송재이가 고개를 떨구고 한참 뜸을 들이다가 말했다.“내가 너무 성급했어.”설영준이 그녀의 턱을 잡고 올리며 말했다.“날 위해서 그랬다는 걸 알아.”따스한 햇볕이 이게 꿈이 아니라는 걸 증명했다. 송재이는 여전히 머릿속이 뒤죽박죽이었으나 그동안 긴 악몽을 꿨다는 기분이 들었다.쓴웃음을 지은 송재이가 모든 걸 내려놓은 듯한 얼굴로 말했다.“사고가 우연인지 고의인지 잘 모르겠지만, 세
어두워진 밤, 송재이와 설영준은 식탁을 마주 향해 앉았다.부드러운 무드 등이 비추고, 군침 도는 요리를 마주한 두 사람 사이에는 미묘하고 긴장한 분위기가 맴돌았다.설영준은 짙은 눈동자로 끈질기게 송재이를 쫓았으며 마치 그녀의 영혼마저 탐내는 것 같았다.“재이야, 물어보고 싶은 게 있어.”설영준의 목소리가 침묵을 깨트렸다.고개를 쳐든 송재이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뭔데?”설영준이 조금 뜸을 들이며 말했다.“그때 헤어지자고 했던 건 정말 우리 사이를 끝내고 싶었던 거야?”송재이의 심장 박동이 빨라지고 눈빛에 복잡한 마음이 담겼다.“그때는… 오기로 그렇게 말했던 거야. 자꾸 나한테 다른 사람이 있는지 의심하고 심지어 박윤찬 씨와 엮으니까, 화가 나서 그만…”설영준이 인상을 찌푸렸고, 죄책감이 마음을 졸여왔다.“내가… 너무 예민했던 것 같아. 네가 너무 좋아서 예민해진 거야.”송재이는 조금 힘 빠진 목소리로 말했다.“박윤찬 씨는 네 오랜 친구잖아. 그런데 왜…”설영준은 속으로 이렇게 말했다.‘박윤찬은 처음부터 너한테 관심이 있었어. 너만 모를 뿐이지.’두 사람이 오해로 영영 헤어지게 될 줄 알았지만, 송재이가 자신을 그렇게 걱정했다는 걸 알아버린 설영준은 다시 되돌리고 싶었다.다시 만나게 되면 그 어떤 오해와 의심도 두 사람을 갈라놓을 수 없게 하겠다고 다짐했다.송재이는 조금 의아한 마음이 들었다.설영준과 반복해서 헤어지고 다시 만나기를 반복했지만 송재이는 결국 그를 떠날 수 없었다.어쩌면 마음속엔 그래도 설영준 하나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식사를 마치고 송재이가 설거지를 하겠다고 나섰다.몸을 일으켜 주방으로 향하는데 설영준이 갑자기 백허그를 했다. 전혀 예상치 못한 그의 행동에 송재이는 심장이 내려앉는 것 같았다.몸이 딱딱하게 굳어지고 머릿속이 난장판이 되었다.머리는 거절하고 싶었지만, 몸은 솔직하게 그의 품에 안겼다.설영준의 품 안은 따뜻하고 넓었으며 귓가에 울리는 심장 소리는 안정적이고 거셌다.설영준의 호흡이 귓
이른 아침의 햇빛이 커튼 틈으로 새어 들어와 송재이의 얼굴을 비췄다.천천히 눈을 떠보니 설영준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버렸다.갑자기 알 수 없는 서운함이 밀려왔다.몸을 일으켜 사방을 둘러보니 방안이 너무 조용했다. 시계의 똑딱거리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려왔다.송재이는 핸드폰을 꺼내 들고 시간을 확인했다. 오늘은 출근하지 않아도 되었다.머릿속에는 자꾸 설영준이 자신을 쓰다듬던 그 모습이 떠오르고 마음이 콩닥콩닥 뛰었다.그래서 설영준의 회사로 찾아가기로 했다. 이건 그녀가 처음으로 먼저 그를 찾은 것이었다.조금 기대가 되기도 긴장이 되기도 했다.심플하지만 우아한 원피스로 갈아입고 옅은 메이크업을 마친 후 송재이는 회사로 향했다.회사 입구에서 심호흡하고 용기를 내어 안으로 들어섰다.설영준의 사무실 앞에 다다가서는 먼저 가볍게 노크했다.방안에서 설영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들어와요.”송재이가 안으로 들어서자, 사무실 책상에 앉아있던 설영준이 그녀를 발견하더니 바로 부드러운 목소리를 장착했다.“재이야, 무슨 일로 왔어?”놀랍기도 하고 반갑기도 한 모습이었다.송재이는 설영준의 앞에 앉아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오늘 출근하지 않아도 돼서 널 보러 온 거야.”설영준이 몸을 일으키더니 사무실 책상을 빙 돌아 송재이의 앞으로 다가가 가볍게 끌어안았다.“와줘서 고마워. 나 너무 기뻐.”두 사람은 서로를 마주 안았다.송재이는 설영준의 품에 안겨 그의 체온과 심장박동을 느꼈다.설영준은 고개를 숙이더니 두 사람이 한 몸으로 겹치도록 꽉 끌어안았다.사무실에서 한참이나 꽁냥거린 두 사람은 온 세상이 두 사람을 위해 존재하는 것 같은 기분에 잠겼다.얼마 뒤, 송재이가 화장실을 다녀왔다.그런데 사무실 문이 닫혀있었고 천천히 다가가니 꾸짖는 소리가 들려왔다.“어떻게 송재이를 내 사무실에 들여보낼 수 있어?”설영준의 갑작스러운 외침에 밖의 송재이마저 깜짝 놀라버렸다.설영준은 분노를 참지 못했고 여진은 긴장한 목소리로 말했다.“죄송합니다, 대표님
눈 깜짝할 사이에 주말이 되었다.설영준은 송재이와 함께 절에 가서 향을 피우며 불운을 씻기로 했다.새벽의 햇살은 나뭇잎 사이로 고즈넉한 절을 비췄고 공기 중에는 은은한 향냄새가 났다.송재이는 설영준의 뒤에서 청석이 깔린 계단을 차근차근 올랐지만, 마음은 여전히 뒤죽박죽이었다.운을 점칠 수 있는 곳에서 송재이는 신중히 패를 뽑아 손에 들었다.확인해 보니 불길한 징조를 가리키는 패였다.“모든 게 추억이 되고 망연자실에 잠기다.”송재이는 마음이 가라앉았다.설영준과 자신의 앞길이 벌써 예상이 되었다.절을 떠날 때까지도 송재이는 여전히 우울하고 마음이 가라앉아 있었다.이 모든 걸 설영준은 말없이 지켜보았다.어느덧 산 아래턱에 다다른 설영준이 갑자기 걸음을 세우고 송재이를 품에 넣더니 꼭 끌어안았다.산바람이 살랑살랑 불고 나뭇잎이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그들 마음속의 불안을 대신 말해 주는 듯했다.설영준은 고개를 숙이고 송재이와 입을 맞췄다.그 순간 주변 모든 게 멈춰졌다.노을이 두 사람을 비추고 황금빛이 주변의 초록색과 어울려 아름다운 한 장면을 연출했다.키스는 뜨겁고 애틋했으며 지금 그들의 마음 같았다.송재이는 눈물을 글썽이며 설영준의 품에 안겼고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영준아, 우리가... 그렇게 될까 봐 너무 무서워.”설영준이 단호하게 말했다.“무서워하지 마. 무슨 일이 생긴다고 해도 난 네 옆을 지킬 거야.”송재이는 마음의 안정을 되찾고 설영준을 꼭 껴안았다.두 사람의 대화는 다시 예전처럼 사랑이 가득했으며 세상의 어둠과 차가움을 모두 털어내려 애쓰는 것 같았다.하산하는 길에 설영준이 갑자기 허리를 숙이더니 송재이더러 업히라는 시늉을 했다.송재이는 조금 얼떨떨한 표정을 지었지만 바로 그 뜻을 알아채고 얼굴에 홍조를 띠었다.그리고 얌전히 설영준의 등에 몸을 대고 그의 힘과 따뜻함을 느꼈다.설영준은 든든하게 그녀를 업고 천천히 산을 내려갔다....설영준의 설득하에 송재이는 다시 그의 별장으로 돌아왔다.문 앞에서 짐가
통화가 종료된 후 설영준은 더 마음이 무거워졌다.그는 다시 한번 송재이 병실로 가 침대 끝에 앉았다. 그리곤 창백한 얼굴로 고요히 잠든 송재이의 얼굴을 보았다.설영준은 마치 송재이에게 자신이 한 말이 들리는 것처럼 나직하게 말했다.“재이야, 내 말 들려? 나 여기 있어. 네 옆에 있어.”그는 조심스럽게 송재이의 손을 잡으며 미약해진 체온을 느꼈다.“어쩌면 지금 내 말이 안 들릴 수도 있다는 걸 알아. 하지만 그것만은 알아줬으면 좋겠어. 내가 널 얼마나 사랑하는지 말이야.”설영준은 이내 심호흡을 하면서 감정을 갈무리하려고 애를 썼다.“우리 아직 함께 해보진 못한 일들이 많아. 혹시 기억해? 우리 그때 그랬었잖아. 함께 세계 곳곳에 있는 나라로 여행 가서 우리와 다른 사람들의 문화를 체험해 보고 그곳의 음식을 먹어보자고. 네가 지금 눈만 떠준다면 난 지금 당장 너랑 함께 그 떠날 거야.”이때 누군가 노크하더니 도정원이 들어왔다. 그는 아주 엄숙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영준 씨, 경찰들이 지금 출동했다고 하네요. 곧 도진욱의 거처로 들이닥칠 거예요.”설영준은 자리에서 일어난 뒤 고개를 끄덕였지만 여전히 아쉬움이 가득한 눈길로 송재이를 보았다.“정원 씨, 부탁 하나만 들어줄래요?”“말씀하세요. 제가 도울 수 있는 거면 도와드릴게요.”“저 대신 재이 좀 잘 챙겨주세요. 전 누구 만나러 가야 할 것 같아서 그래요. 그 사람이 아마 이 사건에 아주 큰 도움을 줄 수 있을 거예요.”“걱정하지 말고 가봐요. 여긴 제가 꼭 붙어 있을 테니까 아무도 재이를 건들지 못할 거예요.”설영준은 고마운 눈빛으로 도정원을 힐끗 보곤 몸을 돌려 병실을 나섰다.떠나기 전 설영준은 나직하게 송재이의 귓가에 대고 말했다.“재이야, 나 얼른 돌아올게. 그러니까 나 꼭 기다려줘야 해.”송재이의 병실에선 도정원만이 묵묵히 곁을 지키며 그녀가 깨어나길 기다리고 있었다. 설영준은 이미 진상을 찾으러 떠났다.그는 오랜 친구를 만나러 갈 생각이다. 그 친구는 의학 부문에서 아
그러자 보안 요원이 말했다.“여긴 병원 CCTV를 관리하는 곳입니다. 외부인에게 함부로 영상을 보여줄 수 없습니다.”설영준은 확고한 어투로 말했다.“전 송재이 씨 약혼자입니다. 전 반드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아야겠으니 협조 부탁드립니다.”보안 요원은 다소 망설이더니 결국 그에게 영상을 보여주었다.영상 속에서 설영준은 세세한 부분까지 발견했다. 송재이가 쓰러지기 전 도진욱은 물잔을 송재이에게 건넸다. 그 순간 설영준은 의심을 하게 되었다.같은 시각 도정원은 병실에서 쪽지 한 장을 발견했다. 쪽지엔 갈겨 쓴 글씨가 있었다. 약물의 이름과 사용량이 적힌 쪽지였다. 그는 발견하자마자 바로 설영준에게도 알렸다.두 사람은 각자 발견한 것을 공유하곤 분석하기 시작했다. 설영준은 도진욱이 송재이에게 건넨 물잔과 쪽지 위에 쓴 약물의 명칭을 보았다. 그는 순간 무언가 깨닫게 되었다.송재이가 검사실로 들어간 뒤 설영준과 도정원은 각자 단서를 찾으러 움직였기에 설영준은 다시 돌아와 송재이를 기다려 보기로 했다. 그러나 도정원은 쪽지에 적힌 약물 이름을 보면서 조사하기 시작했다.설영준은 초조한 얼굴로 검사실 밖에서 송재이를 기다렸다.“재이야, 꼭 버텨야 해. 내가 여기서 기다리고 있을게.”시간이 1분 1초 흘러갔다. 설영준은 마음이 점점 더 무거워졌다. 머릿속에 송재이의 미소와 웃음소리, 그리고 함께 보냈던 즐거운 시간들이 떠올랐다. 그는 속으로 기도했다. 송재이가 무사히 나오길 바라며 말이다.설영준은 혼잣말로 중얼거렸다.“재이야,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를 기억해? 네가 그때 엄청 찬란한 미소를 지었었어. 네 찬란한 웃음이 온통 어둠뿐이던 내 세상을 환하게 빛내주었지. 그때 널 지켜주겠다고 다짐했었는데... 지금은...”바로 이때 문이 스르륵 열리고 의사가 나왔다. 설영준은 바로 다가가 물었다.“선생님, 재이는 어때요?”“저희가 최선을 다해 독이 퍼지는 것을 막고 있습니다. 하지만 너무 희귀한 독에 중독된 거라 독 분석하고 해독제를 만드는 데 시간이
송재이의 말은 청천벽력이었다. 도정원과 도진욱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수사관이 빠르게 다가와 상태를 살폈다. 그도 사태의 심각성을 알게 되어 얼른 입을 열었다.“저희가 바로 의사를 불러오겠습니다.”도정원은 빠르게 긴급 호출 벨을 누르면서 송재이를 부축한 채 옆에 있던 의자에 조심스럽게 앉혔다.의자에 앉히자마자 도정원은 초조한 마음으로 송재이를 어깨에 기대게 했다.“재이야, 조금만 버텨줘. 의사가 금방 도착할 거야.”도진욱은 다소 복잡한 감정이 담긴 얼굴로 송재이를 보았다. 속으로 뭔가 갈등하고 있는 듯했다.그러더니 혼잣말로 중얼거렸다.“독에 중독됐다고? 그럴 리가... 난 아무것도 하지 않았어...”예리한 수사관은 그런 도진욱의 상태를 눈치채고 바로 심문했다.“도진욱 씨, 이 상황에 관해 설명하세요. 송재이 씨가 왜 갑자기 중독된 거죠?”도진욱의 안색은 더 창백해졌다. 그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전... 전 정말로 모릅니다. 제가 왜 제 조카를 죽이겠습니까?”바로 이때, 의사와 간호사가 병실로 들어오며 송재이를 살펴보았다.의사가 엄숙하게 말했다.“아무래도 정밀 검사를 해봐야 알 것 같습니다. 어떤 독에 중독되었는지 확인할 수 없습니다.”송재이는 급하게 검사받으러 갔다. 도정원과 도진욱이 그 뒤를 따라갔다. 수사관은 묵묵히 이 상황을 지켜보았다. 머릿속에 이미 사건의 윤곽이 그려지기 시작했다.도정원이 밖에서 초조한 마음으로 송재이를 기다렸다. 그러나 도진욱은 홀로 구석으로 간 뒤 손을 주머니에 찔러넣은 채 안에 있는 핸드폰만 불안한 마음으로 만지작거렸다.그러더니 낮은 목소리로 누군가와 통화했다.“나야. 일이 복잡하게 됐어. 송재이가 갑자기 독에 중독되어서 경찰이 개입하게 되었어. 나도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인지 몰라. 하지만 우린 지금 반드시 움직여야 해.”전화기 너머로 잔뜩 가라앉은 목소리가 들려왔다.“우리 계획을 수정할 필요가 있군요. 일단 절대 증거를 찾게 해서는 안 돼요. 안 그러면 우리 모두 끝장나게 되니까
화가 난 도정원은 이를 빠득 갈았다.“그게 무슨 의미죠? 설마 아버지 병이 당신과 연관이 있다는 건가요?”정체 모를 남자는 웃음을 터뜨렸다.“곧 알게 될 거야. 참, 도진욱. 가문의 이익을 위해 네 동생 행복을 희생했었지? 이젠 네가 희생할 차례야.”전화는 그렇게 끊겼다. 송재이와 도정원은 고개를 돌려 도진욱을 보며 설명을 바랐다.그러자 도진욱이 말했다.“난... 난 정말 몰랐어. 그때 일이 이렇게 될 줄은 몰랐다고. 그때 내가 그런 선택을 한 건 인정해. 하지만 전부 가문을 위해서였어. 난 너희들을 해칠 생각한 적 없다고.”송재이는 무력감이 들었다. 거짓과 배신으로 가득한 이 가족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몰랐다.절망에 빠진 송재이가 이마를 짚으며 말했다.“우리 이제 어떻게 해야 해요? 대체 누굴 믿어야 하는 거예요?”도정원도 다소 괴로운 눈빛을 하고 있었다. 그는 주먹을 꽉 움켜쥐며 감정을 갈무리하려고 애를 썼다.“가문의 이익을 위해서 그러셨다고요. 우리 도씨 가문이 언제부터 이익에만 눈멀어 가족을 버리는 가문이 된 거죠?”도진욱의 얼굴엔 죄책감이 가득했다. 그는 힘이 없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정원아, 그땐 내 잘못이 맞아. 나도 인정해. 난 내 선택으로 우리 가문이 더 힘이 있는 가문이 될 줄 알았고 가족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어. 난... 난 정말 미안하구나.”옆에서 듣고 있던 송재이는 막막하면서도 불안했다.“두 사람은 전부 제 가족이에요. 전 대체 누굴 믿어야 할지 모르겠다고요.”송재이의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그 순간 문밖에서 다급한 발걸음 소리가 들려오면서 이 숨 막히는 침묵을 깨버렸다.세 사람은 동시에 고개를 돌려 문 쪽을 보았다. 제복을 입은 남자들이 엄숙한 얼굴로 들어왔다.“안녕하세요. 저희는 경찰서 수사과에서 나왔습니다. 몇 가지 당신들이 조사에 협조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도정원과 도진욱은 서로 마주 보았다. 그들은 알고 있었다. 이것이 진상을 알아내는 데 중요한 조사라는 것을“네, 협조하겠습니다.
전화기 너머로 침묵이 흘렀다. 그리고 이내 짙은 한숨 소리가 들렸다.도진욱이 입을 열었다.“그래, 알았다. 너희들한테... 해줄 얘기가 있단다. 네 아버지의 과거와 어머니에 관한 얘기란다.”도정원과 송재이는 서로 눈빛을 주고받았다. 두 사람은 의아하면서도 초조했다.“큰아버지,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뭔가 알고 계신 거예요?”도진욱은 미간을 찌푸렸다.“곧 도착하니 얼굴을 보면서 얘기하자꾸나. 이 일은 내가 너희들 얼굴을 보면서 직접 말해줘야 할 것 같구나.”전화를 끊은 후 도정원과 송재이는 생각에 잠겼다. 두 사람은 도진욱이 어떤 얘기를 들려줄지 몰랐고 도진욱이 그들에게 해줄 얘기가 그들 가족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지도 몰랐다.얼마 지나지 않아 도진욱이 병원에 도착했다. 그의 얼굴엔 초조함과 죄책감이 담겨 있었다.그는 송재이와 도정원의 얼굴을 보더니 심호흡을 한 후 천천히 입을 열었다.“지금 마음이 얼마나 혼란스러운지 알고 있단다. 하지만 더는 너희에게 숨길 수 없을 것 같구나. 너희들이 모르는 사실은 더 많단다.”송재이는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머리가 어질거렸다.“큰아버지,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저희가 아직도 모르는 비밀이 있는 건가요?”“그래, 그때 당시 나와 네 엄마는 확실히 그런 사이였었지. 하지만 그건 다 지나간 일이란다. 나중에 난 그 삼각관계에 빠지기로 했고 네 엄마랑 네 아빠를 이어주기로 했었지. 그때의 난 그게 옳은 일이라고 생각했단다. 지금까지도 말이야.”송재이와 도정원은 충격받은 얼굴로 도진욱을 보았다. 그가 꺼낸 얘기는 도경욱이 꺼낸 얘기보다 더 충격적이었다.“큰아버지, 정말로... 정말로 그러셨어요?”“나도 알고 있단다. 내가 무슨 말을 하든 과거의 일을 없던 일로 할 수는 없겠지. 하지만 난 아직 살아 있을 때 너희들에게 진실을 말해주고 싶구나.”바로 이때 병실 안에서는 긴급 호출 벨이 울렸다.의사와 간호사들이 급하게 병실로 달려왔고 송재이와 도정원도 얼른 병실 안으로 들어갔다.의사는 그들을 보더니 고
송재이는 얼른 도경욱의 손을 꼭 잡았다. 눈물이 그녀의 눈 앞을 가렸다.옆에서 두 사람의 모습을 보던 도정원도 눈시울이 붉어졌다.병실 안에는 무거운 분위기가 감돌았다. 그저 일정한 의료 기기 소리만 들려오며 시간이 흘렀다.도경욱은 송재이를 빤히 보았다. 그의 두 눈엔 아쉬움과 죄책감만 남아 있었다.자신에게 남은 시간이 얼마 없다는 것을 그는 알고 있었다. 하지만 죽기 전 꼭 해야 할 말이 있었다.미약한 목소리지만 그는 확고한 어투로 말했다.“재이야, 내 딸. 너에게 꼭 해줄 말이 있단다. 네 출생의 비밀과 네 엄마에 관한 얘기야.”송재이는 고개를 들었다. 눈물 그렁그렁 맺힌 그녀는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아빠,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제 엄마가 왜요?”도경욱은 숨을 깊이 들이쉬었다. 마치 온몸의 힘을 모으고 있는 것 같았다. 깊이 숨겨둔 진실을 정확하게 말해주기 위해서 말이다.“그때 네 엄마, 그러니까 서지원의 약혼 상대는 내 형이었단다. 네 큰아버지지. 하지만 운명이 장난을 쳤지. 서지원이... 네 엄마가 진심으로 사랑한 사람은 나였단다.”송재이는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너무도 충격적인 진실이었다. 그녀는 단 한 번도 자신의 출생에 이런 비밀이 숨겨져 있을 거라곤 상상도 못 했다.그녀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어...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었던 거죠?”도정원도 놀란 표정인 것을 보아 처음 알게 된 사실인 것 같았다.도경욱은 다소 괴로운 표정을 지었다.“네가 이 사실을 받아들이기 힘들어한다는 것을 나도 안다. 그렇지만 전부 사실이란다. 난 지원이를 단 한 번도 강요한 적 없었어. 우리는 서로 진심으로 사랑했어. 하지만 그때는 이런 추문을 받아들이지 않던 시절이었지.”송재이는 마음이 복잡했다. 이렇게까지 혼란스러운 감정은 처음이었다.그녀는 이렇게나 갑작스러운 사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몰랐다.“아빠, 그럼 대체 왜 일찍 말씀해 주지 않으신 거예요? 왜 그동안 숨기고 계셨던 거예요?”도경욱은 덜덜 떨리는 손으로 송
박정후는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다소 고통스러운 기억을 떠올리고 있는 듯한 눈빛으로 박윤찬을 보았다.“그때 내가 한 여자를 사랑하게 되었어. 아주 똑똑하고 예쁘고 착한 사람이었지. 나한테 아주 특별한 사람이기도 했어. 하지만 어머니가... 어머니가 우리 사이를 반대하셨어.”박윤찬은 미간을 찌푸렸다. 여전히 이해가 가지 않았다.“어머니가 왜 반대하셨는데? 어머니는 아무 이유도 없이 그러실 분이 아니잖아.”박정후가 대답했다.“처음엔 나도 이해하지 못했어. 그때의 난 분명 어머니가 그 여자에 대해 오해하고 있다고 생각했었지. 또 어쩌면 내가 사랑놀이에 푹 빠져 일을 제대로 하지 않을까 봐 걱정하시는 건 줄 알았어. 하지만 나중에 알고 보니 전혀 아니었어.”박윤찬은 초조하게 한숨을 내쉬었다.“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건데? 어머니가 아무 이유도 없이 반대하실 분은 아니야.”박정후의 낮게 깔린 목소리에선 슬픔이 느껴졌다.“그 여자는 성이 임 씨였어. 임씨 가문은 우리 성씨 가문과 오래전부터 원한이 있었지. 이 원한은 우리가 태어나기 전부터 있었던 거라 저주와도 같은 것이었어. 두 가문의 후대에도 아주 큰 영향을 주고 있어.”박윤찬은 놀란 모습이었다.“난 임씨 가문에 대해 들어본 적 단 한 번도 없었어. 어머니도 나한테 한 번도 말씀하신 적 없었다고.”박정후가 말했다.“어머니는 이 원한이 시간이 지나면서 잊히길 바라셨던 거야. 하지만 사실상 잊히지 않았지. 임씨 가문과 성씨 가문은 지난 세대에서도 심각한 충돌이 있었어. 두 가문은 사업 경쟁을 벌이다가 더 틀어지게 되었지.”박윤찬은 이해가 되지 않았다.“사업 경쟁이라니? 그게 언제 일인데 아직도 신경 쓰고 있다는 거야?”“그래, 하지만 지난번 경쟁에서 임씨 가문은 파산당하게 되었지. 그 가문 어르신도 결국 그때 세상을 뜨게 되신 거야. 임씨 가문에서는 우리 성씨 가문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경쟁을 벌여 그런 비극을 만든 것으로 생각하고 있어.”박윤찬은 한참 침묵하다가 입을 열었다.“그러
박정후는 시선을 돌려 창밖을 내다보았다. 바쁘게 움직이는 사람들을 보더니 생각에 잠겨 버렸다.그는 나직하게 말했다.“제가 멀리 떠나기로 결정한 건 저와 윤찬이 사이에... 오해가 있기 때문이에요. 저랑 윤찬이 사이에 갈등이 있었는데 전 제가 원하는 것을 이루기 위해 윤찬이 곁을 떠났죠. 하지만 혈연관계는 영원히 끊을 수 없는 거잖아요.”묵묵히 박정후가 하는 얘기를 듣고 있던 송재이는 박정후의 안타까움과 죄책감을 고스란히 느꼈다.송재이가 말했다.“가족 사이에 확실히 갈등이 생길 수도 있죠. 하지만 제일 중요한 건 서로 항상 응원하고 있음을 알고 있는 것이죠.”설영준은 진지한 얼굴로 박정후를 보았다.“정후 씨는 정의를 위해, 동생을 위해 이미 많은 것을 했으니 윤찬 씨도 이해해줄 거예요.”장주영도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맞아요. 정후 씨가 한 모든 것을 박윤찬 씨가 알게 된다면 분명 아주 자랑스러워할 거예요.”박정후는 한숨을 내쉬었다. 고개를 돌려 확고함이 가득한 눈빛으로 그들을 보았다.“그랬으면 좋겠네요. 이번에 돌아온 것도 윤찬이에게 뭐라도 도움이 되어주고 싶어서였어요. 그리고 윤찬이와 화해할 기회도 있었으면 좋겠네요.”그들을 도와준 정체 모를 인물은 바로 박정후였다.그는 마음이 너무도 복잡했다.이번 일로 동생과 무너진 관계를 회복하고 다시 화목하게 지내고 싶었다.박정후가 말했다.“관계를 회복하는 데 시간이 필요하다는 걸 알아요. 하지만 전 기다릴 수 있어요. 윤찬이가 저한테 기회만 준다면 형으로서 책임을 다할 거예요.”그는 확고한 눈빛으로 말했다. 박윤찬과의 거리감을 하루아침에 줄일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자리에서 일어난 그는 다시 창밖을 보았다. 꼭 사람들 속에서 누군가를 찾는 듯한 모습이었다.“전 반드시 윤찬이한테 찾아가야 해요.”박정후는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윤찬이가 저를 만나고 싶어 하든 말든 상관없이 알려주고 싶어요. 전 단 한순간도 윤찬이를 포기한 적 없다고 말이에요.”송재이는 박정후의 손을 잡아
설영준과 송재이는 서도재의 비웃음에도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저 빠르게 방 안의 상황을 살펴본 뒤 도망칠 길이나 반격할 기회가 없는지 파악했다.정체를 알 수 없는 인물은 조용히 숨어서 행동을 개시하려고 했다.설영준은 차갑게 피식 웃었다.“서도재, 이러면 네가 정말로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야? 네가 저지른 범죄는 이미 전부 드러났어. 밖엔 경찰들이 깔려 있다고.”서도재의 웃음이 사라지고 표정이 굳어졌지만 빠르게 다시 자신만만한 모습으로 돌아왔다.“경찰이 깔려 있다고? 넌 내가 아무 준비도 하지 않은 거로 보이나 봐? 이 아지트는 아주 단단하게 만들었거든. 너희들은 도망칠 수 없어.”송재이는 설영준이 방 한구석에 있는 창문에 힐끗 본 것을 발견하곤 바로 그의 의도를 눈치챘다.그녀는 일부러 서도재를 향해 목소리를 높였다.“그럼 우린 여기서 그쪽과 시간을 끌 수밖에 없겠네요. 그쪽 아지트가 먼저 무너질지 아니면 밖에 경찰들이 먼저 쓰러지게 될지 한 번 지켜보자고요.”서도재는 손을 들어 올리며 부하들에게 준비하라는 사인을 보냈다. 하지만 이때 방 안의 불빛이 꺼지더니 어둠이 내려앉았다.정체를 알 수 없는 인물은 확성기로 말했다.“꼼짝 마!”설영준과 송재이는 어둠 속에서 빠르게 창문이 있는 쪽으로 움직였다.설영준은 있는 힘껏 발로 창문을 깨버렸다. 두 사람은 거의 동시에 창문에서 뛰어내렸다. 바깥엔 이미 에어매트가 준비되어 있었다.서도재는 갑자기 어두워진 주위에 당황스러워하면서 미처 반응하지 못했다.불빛이 다시 켜졌을 땐 설영준과 송재이는 이미 사라졌다.그는 잔뜩 화가 난 목소리로 말했다.“쫓아가! 반드시 두 사람 내 앞에 잡아 와!”그러나 서도재의 부하들이 아지트에서 나가자마자 이미 밖을 포위하고 있는 경찰들을 발견하게 되었다.알고 보니 정체를 알 수 없는 인물이 미리 익명으로 경찰에 신고한 것이다.경찰은 확성기로 말했다.“안에 있는 사람 모두 들으세요. 당신들은 포위되었습니다. 당장 손에 든 무기를 내려놓고 항복하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