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영준과 손재이가 헤어졌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당사자 외에 이 사실을 아는 사람은 이원희와 박윤찬뿐이었다.박윤찬이 알게 된 것도 단순히 우연에 불과했다.그날 저녁, 술에 취한 설영준은 화장실에서 돌아오다가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갑자기 같은 룸에 함께 있던 박윤찬의 멱살을 잡았다.두 사람은 긴 세월을 함께 해온 오랜 친구로서 둘 다 이성적이고 절제적인 성격의 소유자였던 탓에 단 한 번도 이렇게 충동적으로 행동한 적은 없었다.자리에 있던 다른 사람들도 깜짝 놀라 황급히 두 사람을 떼어놓았다.뒤늦게 술이 깼을 때는 설영준이 그 일을 기억해내지 못했다.다행히 박윤찬도 깊게 따지지 않았지만 그 일 이후로 두 사람의 연락이 줄어들었다.송재이는 쭉 남도에 머물렀다. 특별한 일이 있지 않은 이상 경주로 다시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어쩌면 그녀와 설영준의 관계는 이렇게 끝나버린 것일지도 모른다...그날 밤, 송재이가 집에 돌아왔을 때는 이미 10시가 다 되어 있었다.아파트 아래에 익숙한 벤틀리가 주차된 게 어렴풋이 보였다.주변 가로등이 너무 어두웠던 탓에 그녀는 자신이 잘못 본 것이라 생각했다.송재이가 저도 모르게 걸음을 늦추었다.설영준이 차에서 내리는 모습이 그녀의 눈에 들어왔다.그의 훤칠하고 당당한 모습은 알아보기 너무 쉬웠다.하지만 그러면서도 희미한 불빛 때문에 송재이는 자신이 잘못 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설영준의 얼굴에서 피곤한 기색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자신을 바라보던 그 설영준의 눈빛은 이상할 정도로 어딘가 낯설었다.손재이의 기억 속에서 설영준은 항상 당당하고 지칠 줄 모르는 사람이었다. 그런 사람이 어떻게 저런 피곤할 얼굴을 할 수 있단 말인가?손재이는 설영준과 2미터 정도의 거리를 두고 계속 침묵만 유지한 채 그를 바라보았다.그녀 역시 설영준은 지금 그녀가 먼저 다가가 주길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평소 같았으면 손재이가 먼저 다가갔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둘은 이미 헤어진 연인 사이였다.설영
송재이의 미간이 찌푸려졌다.그녀는 정아현과 설영준이 어떤 관계인지 정확히 알지 못했다.다만 설영준의 어머니인 오서희가 정아현을 이용해 송재이와 설영준의 사이를 이간질한 적은 있었다.어쩌면 정아현이 설영준의 진짜 첫사랑이 아니었을 수도 있다.하지만 둘의 관계가 애매모호한 것도 사실이었다.그래봤자 이미 송재이와 설영준은 헤어진 사이였다.그가 어떤 여자와 어울리든 이제 송재이와는 아무 상관없는 일이었다.그녀는 아랫입술을 깨문 채 1층에 있는 엘리베이터로 걸어가 버튼을 눌렀다.설영준은 엘리베이터의 문이 닫힐 때까지 들어오지 않았다.아마 정아현의 전화나 받고 있겠지.송재이의 입가에 자조적인 미소가 번졌다.정말 웃긴 일이었다. 무엇을 기대하고 있었던 걸까?설영준은 조금 전 송재이의 태도로 그녀의 화가 아직 풀리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분노에 가득 차 내뱉었던 “줏대 없는 여자”라는 말이 송재이의 밑바닥을 건드려 버린 것이다.지금이라도 같이 올라가봤자 냉대만 당할 뿐, 딱히 좋은 결과를 얻지는 못할 것이다.설영준은 다시 차 문을 열고 운전석에 올라탔다.정아현에게서 걸려오는 전화 때문에 벨 소리가 몇 번이나 더 울렸지만 설영준은 받지 않았다.계속해서 울리는 전화에 결국 설영준은 휴대폰을 무음으로 설정해놓았다.이 세상이 드디어 다시 조용해졌다.그는 입술에 물고 있던 담배 필터를 짓씹으며 한창 실랑이를 벌일 때 송재이가 지었던 표정을 떠올려 보았다. 그녀의 표정은 분명한 거부와 혐오감이었다.그리고 설영준이 만지려던 찰나에 정확히 그의 손길을 피하던 송재이의 모습까지.모든 장면이 그의 머릿속에 밀물처럼 밀려들었다.설영준은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들어 이미 불이 켜져 있는 위층의 창문을 올려다보았다.그의 깊고도 복잡한 눈빛에는 도무지 읽어낼 수 없는 감정이 담겨있었다.하지만 설영준의 머릿속에서는 송재이가 반복적으로 강조하던 말만 계속 맴돌았다.“우리 이미 헤어졌잖아.”헤어졌다.맞다, 지금 둘은 헤어진 사이다.하지만 설영준은 차로
송재이는 도경진, 도경진의 딸과 함께 식사하고 있었다.도경진은 여느 때와 다름없이 친절했다.하지만 송재이는 그와 나눌 대화가 별로 없었다. 곁에 어린 소녀가 있는 것이 오히려 다행으로 느껴졌다.송재이는 소녀에게 여러 반찬을 덜어주며 학교에서의 공부나 친구 관계에 대해 물어보았다.그러다 보니 한 끼 식사 자리가 생각보다 어색하지는 않았다.식사가 거의 끝나갈 무렵, 도경진이 갑자기 질문을 던졌다.“최근에 설 대표님이 회사에서 큰 프로젝트를 진행했거든요. 그래서 월말에 파티를 할 예정인데 송재이 씨도 오실 건가요?”“...네?”송재이가 뒤늦게 고개를 들었다.그녀는 도경진이 여전히 자신을 설영준의 여자친구로 생각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그래서 당연히 자신도 그 파티에 참석하리라 생각했을 것이다.“사실 저희... 이미 헤어졌어요.”송재이가 해명했다.도경진의 미소가 순식간에 굳어지더니 자신의 귀를 의심하듯 다시 물었다.“뭐라고요?”그 질문에 송재이가 또박또박 다시 대답해주었다.“저랑 설 대표님은 이제 아무 사이도 아니에요. 남도에 지사가 있는 건 이미 알고 있지만 저를 초대하지는 않을 겁니다.”도경진은 한동안 멍해 있더니 길게 “오”라는 감탄사를 내뱉었다. 그런 그의 표정은 어딘가 모르게 조금 일그러져 있었다.하지만 곧이어 미소를 되찾은 도경진이 말했다.“잘 사귀고 계셨으면서 왜 헤어지셨어요? 전에 설 대표님이 재이 씨 데리고 나타났을 때부터 두 분 다 선남선녀라서 어울린다고 생각했었는데...”송재이가 아무렇지 않은 듯 웃어 보였다.선남선녀라고? 어울린다고?송재이는 전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다만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에게 더 말해줄 필요는 없었다.식사를 마치고 송재이는 레스토랑 앞에서 그들에게 작별인사를 건넸다.송재이가 자신과 설영준의 이별 소식을 얘기해줬지만 도경진은 여전히 공손하게 행동했다.그는 송재이를 직장까지 데려다주고 나서야 차를 몰고 자리를 떴다.돌아가는 길에 도경진의 휴대폰 벨 소리가 울렸다.전화를 걸어온 사
송재이는 설영준의 남도 지사에 있는 축하 파티에 애초부터 참석할 생각이 없었다.도경진의 말을 들은 다음에도 그 일에 대해서는 자세히 생각하지 않았다. 이제 송재이와는 전혀 상관없는 일이 되어버렸기 때문이다.어느덧 벌써 월말이 다가왔다.집으로 돌아오던 송재이의 눈에는 집 앞에 주차된 그 검은색 벤틀리가 또 한 번 눈에 들어왔다.그녀는 싸운 그 날 이후로 저 차가 다시는 나타나지 않을 줄 알았다.하지만 송재이가 이해할 수 없는 포인트가 하나 있었다. 그 차는 자신이 예전부터 봐오던 설영준의 벤틀리와 어딘가 달랐다.그녀가 제자리에서 멍하니 서 있던 그때, 차 문이 열리더니 설영준이 차에서 내렸다.송재이가 순간적으로 정신이 멍해졌다.하지만 곧이어 송재이는 6개월 전 그날이 떠올랐다. 그녀는 도경진이 분명 설영준에게 무슨 말을 해준 게 틀림없다고 확신했다.송재이가 숨을 깊이 들이쉬고는 발걸음을 옮겨 설영준이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설영준의 앞에 멈춰선 송재이가 입을 열었다.“왜 또 왔어?”설영준은 송재이의 말투에서 불쾌함이 묻어나오자 미간을 좁혔다.설영준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저 송재이의 손을 잡아 차 뒷좌석으로 데려갔다.“어디로 데려가려는 거야?”송재이는 두려움을 느끼지 못했지만 더는 이 남자와 얽히고 싶지 않았다.하지만 설영준에게는 그런 생각이 전혀 없어 보였다.아무 대답도 하지 않은 설영준은 운전석 문을 열어 시동을 걸었다. 마치 뒷좌석에 앉은 송재이에게는 아무런 관심도 없어 보였다.그렇게 송재이는 설영준에 의해 명품샵에 도착했다.입구에 도착하자 직원들이 문을 열어주더니 두 줄로 서서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사장님, 사모님. 안으로 모시겠습니다.”송재이는 더욱 혼란스러워졌다. 그녀는 무의식적으로 설영준을 올려다보며 물었다.“여긴 왜 데리고 온 거야?”“도와달라고. 여자 파트너 한 명이 필요했어.”설영준은 아주 당연하다는 듯 대답했다. 마치 설영준을 도와주는 게 송재이의 당연한 의무인 것처럼.그녀가 멍해 있는 사이에 설
차가 도로를 달리는 동안 송재이는 계속 창밖만 뚫어져라 응시했다.설영준은 그녀가 여전히 자신에게 화가 나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오늘 밤의 송재이는 유독 아름다웠다. 옅은 메이크업이 오히려 그녀의 화려한 이목구비와 하얀 피부를 더 돋보이게 했다.설영준의 각도에서는 송재이의 옆모습이 더 잘 보였다. 긴 속눈썹에 크고 밝은 눈, 앙증맞은 턱과 선명한 턱선까지.설영준은 본능적으로 손을 뻗어 송재이의 얼굴을 어루만졌다.낯선 남자의 손길에 송재이가 재빨리 얼굴을 돌렸다.이미 은밀한 관계는 여러 번 가져봤던 탓에 설영준의 소유욕 가득한 눈빛만 봐도 송재이는 지금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그 모습에 송재이는 사냥꾼을 경계하는 사슴처럼 빠르게 뒤로 물러났다.그녀의 반응에 설영준은 오히려 웃으며 물었다.“내가 그렇게 무서워?”“응.”송재이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했다.“재이야, 너 오늘따라 정말 예쁘다.”설영준은 보기 드물게 부드러운 목소리로 송재이를 바라보며 칭찬을 늘어놓았다.그 말에 송재이가 잠시 멍해졌다. 설영준의 눈빛에서 마치 봄날의 햇살 같은 따뜻한 기운을 읽어낼 수 있는 것도 드문 일이었으니 말이다.“너랑 도경진이 무슨 얘기를 나눴는지, 오늘 밤에 나한테 자세히 얘기해줄래?”설영준이 덧붙였다.송재이가 당황한 기색을 내비쳤다.“뭘 얘기해?”설영준이 가늘게 실눈을 뜨더니 말했다.“그건 네가 알아서 생각해봐!”말을 마친 그는 더 이상 송재이는 신경 쓰지 않겠다는 듯 얼굴을 다른 쪽으로 돌려 버렸다.뒤늦게 송재이도 설영준이 했던 말을 이해했다. 자신과 설영준이 헤어졌다는 사실을 도경진에게 얘기했던 것에 대해 해명을 하라는 뜻이었다.하지만 이런 것도 해명이 필요할까? 이건 정말 팩트인데.송재이는 여태껏 두 사람이 헤어진 것은 이미 합의된 사안이었고 그러니 아무런 오해도 생기지 않으리라 여겼다.차에서 내리자 송재이는 설영준의 팔짱을 낀 채 파티장 안으로 들어섰다.안으로 들어서는 순간, 송재이는 자신이
설영준이 공식 석상에서 이렇게 여자를 데리고 참석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언론 기자들이 이 특종을 절대 놓칠 리 없었다.다음 날 아침이 되자 두 사람이 찍힌 사진이 모든 주류 웹사이트들에 등장했다.송재이가 눈을 떠 휴대폰을 확인했을 때는 이미 많은 사람들이 그녀에게 메시지를 보낸 상황이었다. 그 메시지들 전부 다 그녀와 설영준의 사이를 묻는 내용들이었다.그중에는 문예슬도 있었다.[재이야, 너 설 대표님이랑 헤어진 거 아니었어?]이런 비슷한 질문만 서너 번 반복해서 와있는 걸 보니 적잖이 놀란 모양이었다.문예슬은 이미 송재이에게 설영준에 대한 자신의 마음을 명확하게 표현한 적이 있었다.문예슬은 송재이의 성격상 다시는 설영준과 얽히지 않으리라 생각했다.더군다나 송재이는 이미 자신이 설영준 때문에 간접적으로 얼마나 많은 상처를 입었는지 알고 있었다.그러니 예상 밖일 수밖에...점심시간이 거의 다 되어서야 송재이가 문예슬에게 답장을 한 줄 보냈다.[너랑 설 대표님은 안 어울려.]그 후로 더 이상의 대화는 이어지지 않았다.하지만 문예슬이 여기서 쉽게 포기할 사람이 아니라는 것쯤은 송재이도 알고 있었다.역시, 몇 분도 지나지 않아 문예슬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재이야, 너 그게 무슨 뜻이야? 너도 알다시피 난 설 대표님 좋아해. 게다가 넌 지금 설 대표님이랑 헤어져서 아무 사이도 아니잖아. 그런데 왜 계속 설 대표님 잡고 안 놔주는 거야?”평소 문예슬은 이렇게까지 직설적인 사람이 아니었다. 그런 그녀가 이렇게 단도직입적으로 말할 정도니 아마 최후의 방어막까지 자극받은 모양이었다,하지만 설영준의 성격을 잘 아는 문예슬이라면 공식 석상에 여자를 데리고 나타날 정도면 그 여성이 설영준에게 어떤 존재인지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계속 소리를 지르던 문예슬은 오히려 더 평온해졌다.잠시 침묵을 지킨 송재이가 입을 열었다.“문예슬, 너도 스스로를 속이려 하지 마, 자꾸. 너도 알 거 아니야. 너랑 설 대표는 절대 안 돼.
지금 문예슬은 문씨 가문의 관리직에까지 올라 남도에 지사를 설립하자는 기획안까지 제출하고 있었다.다른 사람들은 몰라도 문예슬의 아버지인 문성호는 딸의 진짜 의도가 술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하지만 만약 문예슬이 정말로 설영준과 사귀고 문씨 가문의 사위가 된다면 아무리 간절히 바라도 얻을 수 없는 일이었다.그 때문에 딸의 의도를 뻔히 파악하고 있었음에도 뭐라 더 말을 얹지 않았다.문예슬이 이사회에서 제안했던 모든 것을 오히려 순순히 받아들여 주었다.문예슬은 주로 외국 무역 업무를 맡고 있었다. 그런 그녀가 생각해주었던 첫 번째 협력사의 대표는 바로 설영준이었다.설영준의 회사로 가기 전, 문예슬은 따로 그에게 연락을 주지 않았다.여진이 설영준에게 문예슬이 사무실 앞에서 기다리고 있다는 말을 전하자 설영준은 반감을 드러내며 눈살을 찌푸렸다. 누가 봐도 전혀 반기지 않는 표정이었다.“예슬 씨는 공적인 일로 찾아왔다고 하셨습니다.”공적인 일이라는 명목으로 사적인 욕심을 채우려는 문예슬의 태도에 설영준은 역겨움을 느꼈다.그는 손에 들고 있던 펜을 내려놓으며 말했다.“바쁘다고 전하세요. 무슨 일 있으면 비서님 찾아서 얘기하라고 하시고요.”“하지만...”문 하나만을 사이에 두고 있었다.문예슬은 밖에서 기다릴 때 일부러 문을 살짝 열어두고 있었다.안에서 들려오는 설영준의 말에 문예슬은 이를 꽉 깨물더니 불쾌하다는 듯한 표정으로 문을 벌컥 열고 들어갔다.인기척에 고개를 든 설영준의 눈에 초대받지 않은 손님이 들어왔다.“누가 들어오라고 했어요?”“설 대표님, 아무리 저를 싫어하신다고 해도 그렇지, 적어도 저랑 얘기는 할 수 있잖아요.”문예슬은 설영준의 눈빛에 담긴 짜증을 애써 무시하며 그에게 억지 미소를 지어 보였다.설영준은 어쩔 수 없다는 듯 이마를 매만졌다. 잠시 후, 설영준이 말했다.“제 기억으로는 그 어떤 공적인 일이든 다 먼저 저희 아버지부터 만나고 오던데요. 정말 그 정도로 중요한 일이라면 제가 직접 문 대표님 찾아가서
송재이는 설영준이 최근 들어 계속 난도에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하지만 송재이가 설영준에게 메시지를 보낸 이후로 설영준은 그녀를 먼저 찾지 않았다.그 대신 양은서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지난번 설영준은 송재이에게 농담조로 양은서에게서 마사지를 배우라는 말을 꺼냈다. 송재이는 그 말을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하지만 양은서가 자신에게 먼저 연락을 할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마침 그날은 송재이가 출근을 하지 않은 덕분에 집에서 빈둥거리고 있던 날이었다.그래서인지 충동적으로 양은서의 초대에 응해 그녀가 일하는 한의원에 가서 수업을 듣게 되었다.마침 양은서도 한가했다.송재이가 도착했을 때는 양은서가 마침 점심 식사를 끝낸 참이었다.두 사람은 간단한 인사만 나누고는 곧장 옆의 진료실로 이동했다.마사지 수업의 1교시는 인체의 혈 자리에 대해 가르치는 것이었다.필기 노트까지 챙겨온 송재이는 양은서가 하는 말을 필기하며 열심히 수업에 집중했다.송재이가 고개를 숙이고 뭔가를 쓰고 있던 그때, 머리 위로 누군가의 시선이 느껴졌다.고개를 들어보자 양은서의 웃음기 가득한 눈빛이 보였다.송재이는 얼굴까지 만지며 놀란 눈으로 물었다.“뭘 보고 계신 거예요”양은서는 그 질문에 고개를 가로저으며 의미심장한 미소만 지었다. 송재이는 마음 한구석이 왠지 불편해졌지만 딱히 무어라 말은 하지 않았다.수업 하나를 끝내자 양은서가 입을 열었다.“설영준이 왜 재이 씨를 그렇게 좋아하는지 이제 좀 알 것 같네요.”갑작스러운 양은서의 말에 송재이가 당황한 기색을 보였다.그녀는 그 자리에서 바로 질문을 던졌다.“그게 무슨 뜻이에요?”“설영준이 공개적인 행사에도 재이 씨 데려갔잖아요. 그게 무슨 의미겠어요. 게다가 이번에 한의원까지 데려온 걸 보면 겉으로만 봤을 땐 마사지를 배우라는 것처럼 보이겠지만 사실을 재이 씨 몸 조절이나 잘하라는 뜻이에요.”“몸 조절이요?”“네, 제가 한의학을 배워서 산부인과 쪽으로도 빠삭하거든요.”양은서가 입술을 물며 어떻게 얘기해줘야
통화가 종료된 후 설영준은 더 마음이 무거워졌다.그는 다시 한번 송재이 병실로 가 침대 끝에 앉았다. 그리곤 창백한 얼굴로 고요히 잠든 송재이의 얼굴을 보았다.설영준은 마치 송재이에게 자신이 한 말이 들리는 것처럼 나직하게 말했다.“재이야, 내 말 들려? 나 여기 있어. 네 옆에 있어.”그는 조심스럽게 송재이의 손을 잡으며 미약해진 체온을 느꼈다.“어쩌면 지금 내 말이 안 들릴 수도 있다는 걸 알아. 하지만 그것만은 알아줬으면 좋겠어. 내가 널 얼마나 사랑하는지 말이야.”설영준은 이내 심호흡을 하면서 감정을 갈무리하려고 애를 썼다.“우리 아직 함께 해보진 못한 일들이 많아. 혹시 기억해? 우리 그때 그랬었잖아. 함께 세계 곳곳에 있는 나라로 여행 가서 우리와 다른 사람들의 문화를 체험해 보고 그곳의 음식을 먹어보자고. 네가 지금 눈만 떠준다면 난 지금 당장 너랑 함께 그 떠날 거야.”이때 누군가 노크하더니 도정원이 들어왔다. 그는 아주 엄숙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영준 씨, 경찰들이 지금 출동했다고 하네요. 곧 도진욱의 거처로 들이닥칠 거예요.”설영준은 자리에서 일어난 뒤 고개를 끄덕였지만 여전히 아쉬움이 가득한 눈길로 송재이를 보았다.“정원 씨, 부탁 하나만 들어줄래요?”“말씀하세요. 제가 도울 수 있는 거면 도와드릴게요.”“저 대신 재이 좀 잘 챙겨주세요. 전 누구 만나러 가야 할 것 같아서 그래요. 그 사람이 아마 이 사건에 아주 큰 도움을 줄 수 있을 거예요.”“걱정하지 말고 가봐요. 여긴 제가 꼭 붙어 있을 테니까 아무도 재이를 건들지 못할 거예요.”설영준은 고마운 눈빛으로 도정원을 힐끗 보곤 몸을 돌려 병실을 나섰다.떠나기 전 설영준은 나직하게 송재이의 귓가에 대고 말했다.“재이야, 나 얼른 돌아올게. 그러니까 나 꼭 기다려줘야 해.”송재이의 병실에선 도정원만이 묵묵히 곁을 지키며 그녀가 깨어나길 기다리고 있었다. 설영준은 이미 진상을 찾으러 떠났다.그는 오랜 친구를 만나러 갈 생각이다. 그 친구는 의학 부문에서 아
그러자 보안 요원이 말했다.“여긴 병원 CCTV를 관리하는 곳입니다. 외부인에게 함부로 영상을 보여줄 수 없습니다.”설영준은 확고한 어투로 말했다.“전 송재이 씨 약혼자입니다. 전 반드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아야겠으니 협조 부탁드립니다.”보안 요원은 다소 망설이더니 결국 그에게 영상을 보여주었다.영상 속에서 설영준은 세세한 부분까지 발견했다. 송재이가 쓰러지기 전 도진욱은 물잔을 송재이에게 건넸다. 그 순간 설영준은 의심을 하게 되었다.같은 시각 도정원은 병실에서 쪽지 한 장을 발견했다. 쪽지엔 갈겨 쓴 글씨가 있었다. 약물의 이름과 사용량이 적힌 쪽지였다. 그는 발견하자마자 바로 설영준에게도 알렸다.두 사람은 각자 발견한 것을 공유하곤 분석하기 시작했다. 설영준은 도진욱이 송재이에게 건넨 물잔과 쪽지 위에 쓴 약물의 명칭을 보았다. 그는 순간 무언가 깨닫게 되었다.송재이가 검사실로 들어간 뒤 설영준과 도정원은 각자 단서를 찾으러 움직였기에 설영준은 다시 돌아와 송재이를 기다려 보기로 했다. 그러나 도정원은 쪽지에 적힌 약물 이름을 보면서 조사하기 시작했다.설영준은 초조한 얼굴로 검사실 밖에서 송재이를 기다렸다.“재이야, 꼭 버텨야 해. 내가 여기서 기다리고 있을게.”시간이 1분 1초 흘러갔다. 설영준은 마음이 점점 더 무거워졌다. 머릿속에 송재이의 미소와 웃음소리, 그리고 함께 보냈던 즐거운 시간들이 떠올랐다. 그는 속으로 기도했다. 송재이가 무사히 나오길 바라며 말이다.설영준은 혼잣말로 중얼거렸다.“재이야,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를 기억해? 네가 그때 엄청 찬란한 미소를 지었었어. 네 찬란한 웃음이 온통 어둠뿐이던 내 세상을 환하게 빛내주었지. 그때 널 지켜주겠다고 다짐했었는데... 지금은...”바로 이때 문이 스르륵 열리고 의사가 나왔다. 설영준은 바로 다가가 물었다.“선생님, 재이는 어때요?”“저희가 최선을 다해 독이 퍼지는 것을 막고 있습니다. 하지만 너무 희귀한 독에 중독된 거라 독 분석하고 해독제를 만드는 데 시간이
송재이의 말은 청천벽력이었다. 도정원과 도진욱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수사관이 빠르게 다가와 상태를 살폈다. 그도 사태의 심각성을 알게 되어 얼른 입을 열었다.“저희가 바로 의사를 불러오겠습니다.”도정원은 빠르게 긴급 호출 벨을 누르면서 송재이를 부축한 채 옆에 있던 의자에 조심스럽게 앉혔다.의자에 앉히자마자 도정원은 초조한 마음으로 송재이를 어깨에 기대게 했다.“재이야, 조금만 버텨줘. 의사가 금방 도착할 거야.”도진욱은 다소 복잡한 감정이 담긴 얼굴로 송재이를 보았다. 속으로 뭔가 갈등하고 있는 듯했다.그러더니 혼잣말로 중얼거렸다.“독에 중독됐다고? 그럴 리가... 난 아무것도 하지 않았어...”예리한 수사관은 그런 도진욱의 상태를 눈치채고 바로 심문했다.“도진욱 씨, 이 상황에 관해 설명하세요. 송재이 씨가 왜 갑자기 중독된 거죠?”도진욱의 안색은 더 창백해졌다. 그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전... 전 정말로 모릅니다. 제가 왜 제 조카를 죽이겠습니까?”바로 이때, 의사와 간호사가 병실로 들어오며 송재이를 살펴보았다.의사가 엄숙하게 말했다.“아무래도 정밀 검사를 해봐야 알 것 같습니다. 어떤 독에 중독되었는지 확인할 수 없습니다.”송재이는 급하게 검사받으러 갔다. 도정원과 도진욱이 그 뒤를 따라갔다. 수사관은 묵묵히 이 상황을 지켜보았다. 머릿속에 이미 사건의 윤곽이 그려지기 시작했다.도정원이 밖에서 초조한 마음으로 송재이를 기다렸다. 그러나 도진욱은 홀로 구석으로 간 뒤 손을 주머니에 찔러넣은 채 안에 있는 핸드폰만 불안한 마음으로 만지작거렸다.그러더니 낮은 목소리로 누군가와 통화했다.“나야. 일이 복잡하게 됐어. 송재이가 갑자기 독에 중독되어서 경찰이 개입하게 되었어. 나도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인지 몰라. 하지만 우린 지금 반드시 움직여야 해.”전화기 너머로 잔뜩 가라앉은 목소리가 들려왔다.“우리 계획을 수정할 필요가 있군요. 일단 절대 증거를 찾게 해서는 안 돼요. 안 그러면 우리 모두 끝장나게 되니까
화가 난 도정원은 이를 빠득 갈았다.“그게 무슨 의미죠? 설마 아버지 병이 당신과 연관이 있다는 건가요?”정체 모를 남자는 웃음을 터뜨렸다.“곧 알게 될 거야. 참, 도진욱. 가문의 이익을 위해 네 동생 행복을 희생했었지? 이젠 네가 희생할 차례야.”전화는 그렇게 끊겼다. 송재이와 도정원은 고개를 돌려 도진욱을 보며 설명을 바랐다.그러자 도진욱이 말했다.“난... 난 정말 몰랐어. 그때 일이 이렇게 될 줄은 몰랐다고. 그때 내가 그런 선택을 한 건 인정해. 하지만 전부 가문을 위해서였어. 난 너희들을 해칠 생각한 적 없다고.”송재이는 무력감이 들었다. 거짓과 배신으로 가득한 이 가족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몰랐다.절망에 빠진 송재이가 이마를 짚으며 말했다.“우리 이제 어떻게 해야 해요? 대체 누굴 믿어야 하는 거예요?”도정원도 다소 괴로운 눈빛을 하고 있었다. 그는 주먹을 꽉 움켜쥐며 감정을 갈무리하려고 애를 썼다.“가문의 이익을 위해서 그러셨다고요. 우리 도씨 가문이 언제부터 이익에만 눈멀어 가족을 버리는 가문이 된 거죠?”도진욱의 얼굴엔 죄책감이 가득했다. 그는 힘이 없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정원아, 그땐 내 잘못이 맞아. 나도 인정해. 난 내 선택으로 우리 가문이 더 힘이 있는 가문이 될 줄 알았고 가족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어. 난... 난 정말 미안하구나.”옆에서 듣고 있던 송재이는 막막하면서도 불안했다.“두 사람은 전부 제 가족이에요. 전 대체 누굴 믿어야 할지 모르겠다고요.”송재이의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그 순간 문밖에서 다급한 발걸음 소리가 들려오면서 이 숨 막히는 침묵을 깨버렸다.세 사람은 동시에 고개를 돌려 문 쪽을 보았다. 제복을 입은 남자들이 엄숙한 얼굴로 들어왔다.“안녕하세요. 저희는 경찰서 수사과에서 나왔습니다. 몇 가지 당신들이 조사에 협조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도정원과 도진욱은 서로 마주 보았다. 그들은 알고 있었다. 이것이 진상을 알아내는 데 중요한 조사라는 것을“네, 협조하겠습니다.
전화기 너머로 침묵이 흘렀다. 그리고 이내 짙은 한숨 소리가 들렸다.도진욱이 입을 열었다.“그래, 알았다. 너희들한테... 해줄 얘기가 있단다. 네 아버지의 과거와 어머니에 관한 얘기란다.”도정원과 송재이는 서로 눈빛을 주고받았다. 두 사람은 의아하면서도 초조했다.“큰아버지,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뭔가 알고 계신 거예요?”도진욱은 미간을 찌푸렸다.“곧 도착하니 얼굴을 보면서 얘기하자꾸나. 이 일은 내가 너희들 얼굴을 보면서 직접 말해줘야 할 것 같구나.”전화를 끊은 후 도정원과 송재이는 생각에 잠겼다. 두 사람은 도진욱이 어떤 얘기를 들려줄지 몰랐고 도진욱이 그들에게 해줄 얘기가 그들 가족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지도 몰랐다.얼마 지나지 않아 도진욱이 병원에 도착했다. 그의 얼굴엔 초조함과 죄책감이 담겨 있었다.그는 송재이와 도정원의 얼굴을 보더니 심호흡을 한 후 천천히 입을 열었다.“지금 마음이 얼마나 혼란스러운지 알고 있단다. 하지만 더는 너희에게 숨길 수 없을 것 같구나. 너희들이 모르는 사실은 더 많단다.”송재이는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머리가 어질거렸다.“큰아버지,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저희가 아직도 모르는 비밀이 있는 건가요?”“그래, 그때 당시 나와 네 엄마는 확실히 그런 사이였었지. 하지만 그건 다 지나간 일이란다. 나중에 난 그 삼각관계에 빠지기로 했고 네 엄마랑 네 아빠를 이어주기로 했었지. 그때의 난 그게 옳은 일이라고 생각했단다. 지금까지도 말이야.”송재이와 도정원은 충격받은 얼굴로 도진욱을 보았다. 그가 꺼낸 얘기는 도경욱이 꺼낸 얘기보다 더 충격적이었다.“큰아버지, 정말로... 정말로 그러셨어요?”“나도 알고 있단다. 내가 무슨 말을 하든 과거의 일을 없던 일로 할 수는 없겠지. 하지만 난 아직 살아 있을 때 너희들에게 진실을 말해주고 싶구나.”바로 이때 병실 안에서는 긴급 호출 벨이 울렸다.의사와 간호사들이 급하게 병실로 달려왔고 송재이와 도정원도 얼른 병실 안으로 들어갔다.의사는 그들을 보더니 고
송재이는 얼른 도경욱의 손을 꼭 잡았다. 눈물이 그녀의 눈 앞을 가렸다.옆에서 두 사람의 모습을 보던 도정원도 눈시울이 붉어졌다.병실 안에는 무거운 분위기가 감돌았다. 그저 일정한 의료 기기 소리만 들려오며 시간이 흘렀다.도경욱은 송재이를 빤히 보았다. 그의 두 눈엔 아쉬움과 죄책감만 남아 있었다.자신에게 남은 시간이 얼마 없다는 것을 그는 알고 있었다. 하지만 죽기 전 꼭 해야 할 말이 있었다.미약한 목소리지만 그는 확고한 어투로 말했다.“재이야, 내 딸. 너에게 꼭 해줄 말이 있단다. 네 출생의 비밀과 네 엄마에 관한 얘기야.”송재이는 고개를 들었다. 눈물 그렁그렁 맺힌 그녀는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아빠,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제 엄마가 왜요?”도경욱은 숨을 깊이 들이쉬었다. 마치 온몸의 힘을 모으고 있는 것 같았다. 깊이 숨겨둔 진실을 정확하게 말해주기 위해서 말이다.“그때 네 엄마, 그러니까 서지원의 약혼 상대는 내 형이었단다. 네 큰아버지지. 하지만 운명이 장난을 쳤지. 서지원이... 네 엄마가 진심으로 사랑한 사람은 나였단다.”송재이는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너무도 충격적인 진실이었다. 그녀는 단 한 번도 자신의 출생에 이런 비밀이 숨겨져 있을 거라곤 상상도 못 했다.그녀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어...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었던 거죠?”도정원도 놀란 표정인 것을 보아 처음 알게 된 사실인 것 같았다.도경욱은 다소 괴로운 표정을 지었다.“네가 이 사실을 받아들이기 힘들어한다는 것을 나도 안다. 그렇지만 전부 사실이란다. 난 지원이를 단 한 번도 강요한 적 없었어. 우리는 서로 진심으로 사랑했어. 하지만 그때는 이런 추문을 받아들이지 않던 시절이었지.”송재이는 마음이 복잡했다. 이렇게까지 혼란스러운 감정은 처음이었다.그녀는 이렇게나 갑작스러운 사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몰랐다.“아빠, 그럼 대체 왜 일찍 말씀해 주지 않으신 거예요? 왜 그동안 숨기고 계셨던 거예요?”도경욱은 덜덜 떨리는 손으로 송
박정후는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다소 고통스러운 기억을 떠올리고 있는 듯한 눈빛으로 박윤찬을 보았다.“그때 내가 한 여자를 사랑하게 되었어. 아주 똑똑하고 예쁘고 착한 사람이었지. 나한테 아주 특별한 사람이기도 했어. 하지만 어머니가... 어머니가 우리 사이를 반대하셨어.”박윤찬은 미간을 찌푸렸다. 여전히 이해가 가지 않았다.“어머니가 왜 반대하셨는데? 어머니는 아무 이유도 없이 그러실 분이 아니잖아.”박정후가 대답했다.“처음엔 나도 이해하지 못했어. 그때의 난 분명 어머니가 그 여자에 대해 오해하고 있다고 생각했었지. 또 어쩌면 내가 사랑놀이에 푹 빠져 일을 제대로 하지 않을까 봐 걱정하시는 건 줄 알았어. 하지만 나중에 알고 보니 전혀 아니었어.”박윤찬은 초조하게 한숨을 내쉬었다.“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건데? 어머니가 아무 이유도 없이 반대하실 분은 아니야.”박정후의 낮게 깔린 목소리에선 슬픔이 느껴졌다.“그 여자는 성이 임 씨였어. 임씨 가문은 우리 성씨 가문과 오래전부터 원한이 있었지. 이 원한은 우리가 태어나기 전부터 있었던 거라 저주와도 같은 것이었어. 두 가문의 후대에도 아주 큰 영향을 주고 있어.”박윤찬은 놀란 모습이었다.“난 임씨 가문에 대해 들어본 적 단 한 번도 없었어. 어머니도 나한테 한 번도 말씀하신 적 없었다고.”박정후가 말했다.“어머니는 이 원한이 시간이 지나면서 잊히길 바라셨던 거야. 하지만 사실상 잊히지 않았지. 임씨 가문과 성씨 가문은 지난 세대에서도 심각한 충돌이 있었어. 두 가문은 사업 경쟁을 벌이다가 더 틀어지게 되었지.”박윤찬은 이해가 되지 않았다.“사업 경쟁이라니? 그게 언제 일인데 아직도 신경 쓰고 있다는 거야?”“그래, 하지만 지난번 경쟁에서 임씨 가문은 파산당하게 되었지. 그 가문 어르신도 결국 그때 세상을 뜨게 되신 거야. 임씨 가문에서는 우리 성씨 가문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경쟁을 벌여 그런 비극을 만든 것으로 생각하고 있어.”박윤찬은 한참 침묵하다가 입을 열었다.“그러
박정후는 시선을 돌려 창밖을 내다보았다. 바쁘게 움직이는 사람들을 보더니 생각에 잠겨 버렸다.그는 나직하게 말했다.“제가 멀리 떠나기로 결정한 건 저와 윤찬이 사이에... 오해가 있기 때문이에요. 저랑 윤찬이 사이에 갈등이 있었는데 전 제가 원하는 것을 이루기 위해 윤찬이 곁을 떠났죠. 하지만 혈연관계는 영원히 끊을 수 없는 거잖아요.”묵묵히 박정후가 하는 얘기를 듣고 있던 송재이는 박정후의 안타까움과 죄책감을 고스란히 느꼈다.송재이가 말했다.“가족 사이에 확실히 갈등이 생길 수도 있죠. 하지만 제일 중요한 건 서로 항상 응원하고 있음을 알고 있는 것이죠.”설영준은 진지한 얼굴로 박정후를 보았다.“정후 씨는 정의를 위해, 동생을 위해 이미 많은 것을 했으니 윤찬 씨도 이해해줄 거예요.”장주영도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맞아요. 정후 씨가 한 모든 것을 박윤찬 씨가 알게 된다면 분명 아주 자랑스러워할 거예요.”박정후는 한숨을 내쉬었다. 고개를 돌려 확고함이 가득한 눈빛으로 그들을 보았다.“그랬으면 좋겠네요. 이번에 돌아온 것도 윤찬이에게 뭐라도 도움이 되어주고 싶어서였어요. 그리고 윤찬이와 화해할 기회도 있었으면 좋겠네요.”그들을 도와준 정체 모를 인물은 바로 박정후였다.그는 마음이 너무도 복잡했다.이번 일로 동생과 무너진 관계를 회복하고 다시 화목하게 지내고 싶었다.박정후가 말했다.“관계를 회복하는 데 시간이 필요하다는 걸 알아요. 하지만 전 기다릴 수 있어요. 윤찬이가 저한테 기회만 준다면 형으로서 책임을 다할 거예요.”그는 확고한 눈빛으로 말했다. 박윤찬과의 거리감을 하루아침에 줄일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자리에서 일어난 그는 다시 창밖을 보았다. 꼭 사람들 속에서 누군가를 찾는 듯한 모습이었다.“전 반드시 윤찬이한테 찾아가야 해요.”박정후는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윤찬이가 저를 만나고 싶어 하든 말든 상관없이 알려주고 싶어요. 전 단 한순간도 윤찬이를 포기한 적 없다고 말이에요.”송재이는 박정후의 손을 잡아
설영준과 송재이는 서도재의 비웃음에도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저 빠르게 방 안의 상황을 살펴본 뒤 도망칠 길이나 반격할 기회가 없는지 파악했다.정체를 알 수 없는 인물은 조용히 숨어서 행동을 개시하려고 했다.설영준은 차갑게 피식 웃었다.“서도재, 이러면 네가 정말로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야? 네가 저지른 범죄는 이미 전부 드러났어. 밖엔 경찰들이 깔려 있다고.”서도재의 웃음이 사라지고 표정이 굳어졌지만 빠르게 다시 자신만만한 모습으로 돌아왔다.“경찰이 깔려 있다고? 넌 내가 아무 준비도 하지 않은 거로 보이나 봐? 이 아지트는 아주 단단하게 만들었거든. 너희들은 도망칠 수 없어.”송재이는 설영준이 방 한구석에 있는 창문에 힐끗 본 것을 발견하곤 바로 그의 의도를 눈치챘다.그녀는 일부러 서도재를 향해 목소리를 높였다.“그럼 우린 여기서 그쪽과 시간을 끌 수밖에 없겠네요. 그쪽 아지트가 먼저 무너질지 아니면 밖에 경찰들이 먼저 쓰러지게 될지 한 번 지켜보자고요.”서도재는 손을 들어 올리며 부하들에게 준비하라는 사인을 보냈다. 하지만 이때 방 안의 불빛이 꺼지더니 어둠이 내려앉았다.정체를 알 수 없는 인물은 확성기로 말했다.“꼼짝 마!”설영준과 송재이는 어둠 속에서 빠르게 창문이 있는 쪽으로 움직였다.설영준은 있는 힘껏 발로 창문을 깨버렸다. 두 사람은 거의 동시에 창문에서 뛰어내렸다. 바깥엔 이미 에어매트가 준비되어 있었다.서도재는 갑자기 어두워진 주위에 당황스러워하면서 미처 반응하지 못했다.불빛이 다시 켜졌을 땐 설영준과 송재이는 이미 사라졌다.그는 잔뜩 화가 난 목소리로 말했다.“쫓아가! 반드시 두 사람 내 앞에 잡아 와!”그러나 서도재의 부하들이 아지트에서 나가자마자 이미 밖을 포위하고 있는 경찰들을 발견하게 되었다.알고 보니 정체를 알 수 없는 인물이 미리 익명으로 경찰에 신고한 것이다.경찰은 확성기로 말했다.“안에 있는 사람 모두 들으세요. 당신들은 포위되었습니다. 당장 손에 든 무기를 내려놓고 항복하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