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예슬이 대답하기도 전에 설영준은 펜꽂이에서 볼펜을 집어 들고 수표 앞에 내려놓았다.뜻인즉슨 앞으로 먹고 떨어질 만한 액수를 쓰라는 것이다.문예슬의 기분이 바닥까지 가라앉았다.비록 야속한 남자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가슴이 미어지는 고통은 어쩔 수 없었다....저녁이 되자 설영준은 일찍 퇴근했다.그리고 차를 몰고 근처에 있는 디저트 가게에 가서 케이크를 샀다.하지만 송재이의 아파트에 도착했을 때 집이 텅 비었다.이 시간에 어디로 간 거지?설영준은 휴대폰을 확인하더니 눈살을 살짝 찌푸렸다.10분 뒤, 결국 기다리다가 지쳐서 전화를 걸었다.하지만 생각지도 못한 남자 목소리가 휴대폰을 타고 흘러나왔다.“영준 씨?”설영준의 안색이 어두워지더니 한참이 지나서야 입을 열었다.“윤찬 씨가 왜...?”박윤찬은 태연자약한 말투로 대답했다.“오늘 남도에 왔는데 볼일 보고 시간이 남아서 재이 씨랑 밥먹으러...”말을 이어가는 와중에 화장실에서 돌아온 송재이를 발견하고 손을 흔들었다.“전화 왔어요.”자신의 휴대폰을 들고 있는 박윤찬을 보자 송재이는 의아함을 감추지 못했다.“영준 씨에요.”박윤찬은 이내 그녀에게 휴대폰을 건네주었다.아마도 발신자에 설영준의 이름이 떠서 어차피 친구라는 생각에 대신 받아 줬을 가능성이 컸다.워낙 자연스러운 표정에 송재이도 의심을 지우고 미묘한 기분을 애써 외면했다.그리고 입꼬리를 살짝 올리더니 말했다.“고마워요.”곧이어 전화를 받았다.설영준은 휴대폰 너머로 들려오는 대화 소리를 듣고 고개를 숙여 손에 든 케이크를 내려다보더니 자조적인 미소를 지었다.이내 송재이에게 물었다.“어디야?”착각인지는 모르겠지만, 송재이는 설영준의 말투가 유난히 쌀쌀맞게 느껴졌다.결국 잠시 망설이다가 레스토랑의 이름을 알려주었다.“알았어. 지금 갈게.”그리고 송재이가 대답하기도 전에 전화를 끊었다.설영준은 엘리베이터를 타고 1층까지 내려간 다음 입구에 있는 휴지통 앞에 우뚝 멈춰 섰다. 이내 손에 든 케이크를 미련 없이
설영준이 심심하다고 연락한 적이 과연 있었나?설령 사이가 제일 좋았을 때도 마찬가지였고, 하물며 냉전 중인 지금은 더 말할 것도 없었다.송재이는 미간을 찌푸렸지만 딱히 태클을 걸지 않았고, 대충 상황을 무마시켰다.설영준이 피식 웃더니 고개를 돌려 박윤찬을 바라보았다.“어머님이 최근에 소개팅을 주선해 줬다고 하던데 어땠어요?”박윤찬은 흠칫 놀라면서 당황한 듯 고개를 저었다.“간단하게 밥만 먹었죠, 뭐.”“음... 마음에 안 들었다는 거네요? 아니면 마지막 연애 때문에 받은 상처가 아직도 남아 있어서 트라우마에서 벗어나지 못한 건가요?”뜬금없이 소개팅을 언급하더니 자연스럽게 마지막 연애까지 폭로하는 설영준이 과연 실수였을지 그 의도가 의심되는 순간이었다.만약 송재이가 박윤찬에게 마음이 있다면 실망하기 마련이다.하지만 정작 흑심을 품은 사람은 따로 있었다.박윤찬은 아무 말 없이 어두운 얼굴로 물을 한 모금 마셨다.“박 변호사님, 소개팅하셨어요?”순식간에 돌변한 주변 분위기를 아직 눈치채지 못한 송재이는 샘물처럼 맑은 눈을 깜빡이며 호기심이 잔뜩 담긴 목소리로 물었다.“네, 뭐...”박윤찬이 다소 모호하게 대답했다.“어떤 여자예요? 몇 살? 사진 있어요?”비록 박윤찬과 알고 지낸 지 얼마 안 되었지만 송재이는 그가 참 괜찮은 남자라는 생각을 늘 하고 있었다. 예전에 서유리가 한창 대시했지만 아쉽게도 잘 안되었다.대체 어떤 여자가 그의 마음을 사로잡을지 은근히 궁금하기도 했다.박윤찬은 고개를 들고 억지로 미소를 쥐어 짜냈다.“밥만 먹고 헤어졌는데 사진은 무슨...”“또 마음에 안 든 거예요?”송재이는 속으로 눈이 참 높은 남자라고 저도 모르게 혀를 끌끌 찼다.박윤찬이 아무 말 없이 옆에서 구경 중인 설영준을 힐끗 쳐다보았다.그는 마치 이미 목적을 달성한 사람처럼 눈빛에 비아냥거림과 조롱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박윤찬의 얼굴에 자조적인 미소가 떠올랐다. 사실 설영준이 굳이 훼방을 놓지 않아도 자신을 향한 송재이의 감정이 기껏해
설영준의 눈에 조롱 섞인 웃음기가 서려 있었다.비록 웃고는 있었지만 그 웃음은 소름 돋을 정도로 서늘했다. 그 모습에 송재이는 저도 모르게 온몸을 부르르 떨었다.딱 좋다고 느껴졌던 주변 온도가 순간적으로 뚝 떨어진 것 같은 느낌이었다.설영준이 휴대폰을 집어넣더니 천천히 송재이에게 다가갔다.송재이가 몸을 돌려 차 문을 열려고 했지만 설영준은 한 손으로 그녀를 잡아 돌려세웠다.“찔려?”설영준은 이를 악물고 두 글자를 또박또박 내뱉었다.그의 날카로운 두 눈을 마주한 송재이가 본능적으로 몸을 떨었다.지나칠 정도로 강한 남자의 기세에 잘못한 게 없는 송재이였지만 그 날카로운 눈빛 앞에서 저도 모르게 고개를 숙이고 말았다.그 순간, 설영준은 송재이의 턱을 움켜잡더니 억지로 그녀의 얼굴을 들어 올려 시선을 맞추었다.“배려심 참 넘치네. 너 대신 나한테 전화까지 해서 해명을 다 해주고 말이야.” 설영준이 속으로 생각했다. 조금 전 박윤찬이 설영준에게 전화를 했던 이유는 설영준이 오해를 할까 봐서였을까, 아니면 송재이가 곤란해질까 봐서였을까. 송재이는 설영준의 눈빛에서 이글거리는 분노를 느꼈다.그녀는 저도 모르게 입술을 깨물었다. 그동안 쌓였던 감정들이 마침내 폭발해버리고 말았다.“너, 너 이거 놔!”“놔주면? 또 누구 찾아가려고? 그 자식?”설영준은 그 사람의 이름을 굳이 얘기하지 않았다.하지만 송재이가 무심코 말을 던졌다.“나랑 박 변호사는 아무 사이도 아니야. 제발 의심 좀 하지 마!”송재이의 말은 설영준의 화를 가라앉히기는커녕 오히려 불 나는 집에 기름을 부은 격이 되어버렸다.“너 박윤찬 언급한 거야? 왜 제일 먼저 떠오른 사람이 걘데? 네 입으로 자백하는 건가?”설영준은 송재이의 턱을 더욱 세게 움켜쥐었다. 송재이는 몰려오는 고통에 눈물까지 나올 지경이었다.애초에 말싸움에 약한 송재이는 잔뜩 긴장된 이런 분위기 속에서 더더욱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설영준의 압도적인 기세에 송재이의 머릿속은 백지장처럼 하얘져 아무 말도 할
차는 멈추지 않고 계속 앞으로 나아갔다. 송재이는 고개를 돌려 창밖을 바라보았다.끊임없이 뒤로 가는 풍경들이 그녀의 눈앞을 스쳐 지나갔다.송재이는 갑자기 자신의 시야가 흐려지는 것이 느껴졌다.별로 신경을 쓰지 않으려 했지만 눈에 고여있던 눈물이 또르르 흘러내렸다.그 순간, 참았던 눈물이 폭포처럼 쏟아졌다. 그녀는 슬픈 드라마 속 비련의 여주인공처럼 울었다.분명 먼저 헤어지자고 한 사람은 본인인데 지금 마음이 아픈 사람도 자신이었다. 송재이는 칼에 베이는 듯한 고통에 숨도 제대로 쉴 수 없었다.집으로 돌아온 송재이는 씻을 생각도 못 하고 곧바로 침대에 몸을 던졌다.그녀는 모든 에너지를 다 쓴 듯 힘이 다 빠져버렸다.사실 그전까지 송재이는 진지하게 설영준과 화해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하지만 최근 들어 여러 힘든 일들이 겹치면서 자신과 박윤찬의 사이까지 의심하는 설영준 때문에 전례 없는 답답함에 숨까지 막혀왔다.송재이는 이불에 얼굴을 묻었다.결국 참을 수 없던 울음이 터져버렸다.송재이가 목놓아 울고 있던 그 순간, 등 뒤에서 방문이 천천히 열렸다.이원희가 들어왔다.거실에 들어서자마자 방에서부터 송재이가 흐느끼는 소리를 들었다.송재이는 등 뒤에서 들려오는 인기척이 흐느끼며 고개를 돌렸다.이원희는 촉촉하게 젖은 송재이의 눈망울과 눈을 마주쳤다. 그녀의 눈가가 발갛게 부어올라 마치 상처 받은 작은 토끼 같았다.이원희는 재빨리 다가가 누워있던 송재이를 일으켰다.사람의 마음이 가장 나약해질 때, 혼자 천천히 감정을 소화해내는 것도 중요하지만 때로는 친구의 위로가 필요한 법이다.“원희야, 나 실연당했어.”송재이가 울먹이며 말했다.설영준에게 헤어지자는 말을 하던 때까지만 해도 송재이는 단호하고도 확신에 찬 모습을 보였다.하지만 지금 이 순간, 그녀는 그저 불쌍한 어린 소녀 같았다.그 후로도 한동안 송재이는 우울함에 잠겨있었다.다행히도 의리 넘치는 이원희가 매일 일찍 퇴근해 송재이와 함께 먹고 마시며 산책도 하고 이야기를 나눠주었다.
설영준과 손재이가 헤어졌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당사자 외에 이 사실을 아는 사람은 이원희와 박윤찬뿐이었다.박윤찬이 알게 된 것도 단순히 우연에 불과했다.그날 저녁, 술에 취한 설영준은 화장실에서 돌아오다가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갑자기 같은 룸에 함께 있던 박윤찬의 멱살을 잡았다.두 사람은 긴 세월을 함께 해온 오랜 친구로서 둘 다 이성적이고 절제적인 성격의 소유자였던 탓에 단 한 번도 이렇게 충동적으로 행동한 적은 없었다.자리에 있던 다른 사람들도 깜짝 놀라 황급히 두 사람을 떼어놓았다.뒤늦게 술이 깼을 때는 설영준이 그 일을 기억해내지 못했다.다행히 박윤찬도 깊게 따지지 않았지만 그 일 이후로 두 사람의 연락이 줄어들었다.송재이는 쭉 남도에 머물렀다. 특별한 일이 있지 않은 이상 경주로 다시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어쩌면 그녀와 설영준의 관계는 이렇게 끝나버린 것일지도 모른다...그날 밤, 송재이가 집에 돌아왔을 때는 이미 10시가 다 되어 있었다.아파트 아래에 익숙한 벤틀리가 주차된 게 어렴풋이 보였다.주변 가로등이 너무 어두웠던 탓에 그녀는 자신이 잘못 본 것이라 생각했다.송재이가 저도 모르게 걸음을 늦추었다.설영준이 차에서 내리는 모습이 그녀의 눈에 들어왔다.그의 훤칠하고 당당한 모습은 알아보기 너무 쉬웠다.하지만 그러면서도 희미한 불빛 때문에 송재이는 자신이 잘못 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설영준의 얼굴에서 피곤한 기색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자신을 바라보던 그 설영준의 눈빛은 이상할 정도로 어딘가 낯설었다.손재이의 기억 속에서 설영준은 항상 당당하고 지칠 줄 모르는 사람이었다. 그런 사람이 어떻게 저런 피곤할 얼굴을 할 수 있단 말인가?손재이는 설영준과 2미터 정도의 거리를 두고 계속 침묵만 유지한 채 그를 바라보았다.그녀 역시 설영준은 지금 그녀가 먼저 다가가 주길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평소 같았으면 손재이가 먼저 다가갔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둘은 이미 헤어진 연인 사이였다.설영
송재이의 미간이 찌푸려졌다.그녀는 정아현과 설영준이 어떤 관계인지 정확히 알지 못했다.다만 설영준의 어머니인 오서희가 정아현을 이용해 송재이와 설영준의 사이를 이간질한 적은 있었다.어쩌면 정아현이 설영준의 진짜 첫사랑이 아니었을 수도 있다.하지만 둘의 관계가 애매모호한 것도 사실이었다.그래봤자 이미 송재이와 설영준은 헤어진 사이였다.그가 어떤 여자와 어울리든 이제 송재이와는 아무 상관없는 일이었다.그녀는 아랫입술을 깨문 채 1층에 있는 엘리베이터로 걸어가 버튼을 눌렀다.설영준은 엘리베이터의 문이 닫힐 때까지 들어오지 않았다.아마 정아현의 전화나 받고 있겠지.송재이의 입가에 자조적인 미소가 번졌다.정말 웃긴 일이었다. 무엇을 기대하고 있었던 걸까?설영준은 조금 전 송재이의 태도로 그녀의 화가 아직 풀리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분노에 가득 차 내뱉었던 “줏대 없는 여자”라는 말이 송재이의 밑바닥을 건드려 버린 것이다.지금이라도 같이 올라가봤자 냉대만 당할 뿐, 딱히 좋은 결과를 얻지는 못할 것이다.설영준은 다시 차 문을 열고 운전석에 올라탔다.정아현에게서 걸려오는 전화 때문에 벨 소리가 몇 번이나 더 울렸지만 설영준은 받지 않았다.계속해서 울리는 전화에 결국 설영준은 휴대폰을 무음으로 설정해놓았다.이 세상이 드디어 다시 조용해졌다.그는 입술에 물고 있던 담배 필터를 짓씹으며 한창 실랑이를 벌일 때 송재이가 지었던 표정을 떠올려 보았다. 그녀의 표정은 분명한 거부와 혐오감이었다.그리고 설영준이 만지려던 찰나에 정확히 그의 손길을 피하던 송재이의 모습까지.모든 장면이 그의 머릿속에 밀물처럼 밀려들었다.설영준은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들어 이미 불이 켜져 있는 위층의 창문을 올려다보았다.그의 깊고도 복잡한 눈빛에는 도무지 읽어낼 수 없는 감정이 담겨있었다.하지만 설영준의 머릿속에서는 송재이가 반복적으로 강조하던 말만 계속 맴돌았다.“우리 이미 헤어졌잖아.”헤어졌다.맞다, 지금 둘은 헤어진 사이다.하지만 설영준은 차로
송재이는 도경진, 도경진의 딸과 함께 식사하고 있었다.도경진은 여느 때와 다름없이 친절했다.하지만 송재이는 그와 나눌 대화가 별로 없었다. 곁에 어린 소녀가 있는 것이 오히려 다행으로 느껴졌다.송재이는 소녀에게 여러 반찬을 덜어주며 학교에서의 공부나 친구 관계에 대해 물어보았다.그러다 보니 한 끼 식사 자리가 생각보다 어색하지는 않았다.식사가 거의 끝나갈 무렵, 도경진이 갑자기 질문을 던졌다.“최근에 설 대표님이 회사에서 큰 프로젝트를 진행했거든요. 그래서 월말에 파티를 할 예정인데 송재이 씨도 오실 건가요?”“...네?”송재이가 뒤늦게 고개를 들었다.그녀는 도경진이 여전히 자신을 설영준의 여자친구로 생각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그래서 당연히 자신도 그 파티에 참석하리라 생각했을 것이다.“사실 저희... 이미 헤어졌어요.”송재이가 해명했다.도경진의 미소가 순식간에 굳어지더니 자신의 귀를 의심하듯 다시 물었다.“뭐라고요?”그 질문에 송재이가 또박또박 다시 대답해주었다.“저랑 설 대표님은 이제 아무 사이도 아니에요. 남도에 지사가 있는 건 이미 알고 있지만 저를 초대하지는 않을 겁니다.”도경진은 한동안 멍해 있더니 길게 “오”라는 감탄사를 내뱉었다. 그런 그의 표정은 어딘가 모르게 조금 일그러져 있었다.하지만 곧이어 미소를 되찾은 도경진이 말했다.“잘 사귀고 계셨으면서 왜 헤어지셨어요? 전에 설 대표님이 재이 씨 데리고 나타났을 때부터 두 분 다 선남선녀라서 어울린다고 생각했었는데...”송재이가 아무렇지 않은 듯 웃어 보였다.선남선녀라고? 어울린다고?송재이는 전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다만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에게 더 말해줄 필요는 없었다.식사를 마치고 송재이는 레스토랑 앞에서 그들에게 작별인사를 건넸다.송재이가 자신과 설영준의 이별 소식을 얘기해줬지만 도경진은 여전히 공손하게 행동했다.그는 송재이를 직장까지 데려다주고 나서야 차를 몰고 자리를 떴다.돌아가는 길에 도경진의 휴대폰 벨 소리가 울렸다.전화를 걸어온 사
송재이는 설영준의 남도 지사에 있는 축하 파티에 애초부터 참석할 생각이 없었다.도경진의 말을 들은 다음에도 그 일에 대해서는 자세히 생각하지 않았다. 이제 송재이와는 전혀 상관없는 일이 되어버렸기 때문이다.어느덧 벌써 월말이 다가왔다.집으로 돌아오던 송재이의 눈에는 집 앞에 주차된 그 검은색 벤틀리가 또 한 번 눈에 들어왔다.그녀는 싸운 그 날 이후로 저 차가 다시는 나타나지 않을 줄 알았다.하지만 송재이가 이해할 수 없는 포인트가 하나 있었다. 그 차는 자신이 예전부터 봐오던 설영준의 벤틀리와 어딘가 달랐다.그녀가 제자리에서 멍하니 서 있던 그때, 차 문이 열리더니 설영준이 차에서 내렸다.송재이가 순간적으로 정신이 멍해졌다.하지만 곧이어 송재이는 6개월 전 그날이 떠올랐다. 그녀는 도경진이 분명 설영준에게 무슨 말을 해준 게 틀림없다고 확신했다.송재이가 숨을 깊이 들이쉬고는 발걸음을 옮겨 설영준이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설영준의 앞에 멈춰선 송재이가 입을 열었다.“왜 또 왔어?”설영준은 송재이의 말투에서 불쾌함이 묻어나오자 미간을 좁혔다.설영준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저 송재이의 손을 잡아 차 뒷좌석으로 데려갔다.“어디로 데려가려는 거야?”송재이는 두려움을 느끼지 못했지만 더는 이 남자와 얽히고 싶지 않았다.하지만 설영준에게는 그런 생각이 전혀 없어 보였다.아무 대답도 하지 않은 설영준은 운전석 문을 열어 시동을 걸었다. 마치 뒷좌석에 앉은 송재이에게는 아무런 관심도 없어 보였다.그렇게 송재이는 설영준에 의해 명품샵에 도착했다.입구에 도착하자 직원들이 문을 열어주더니 두 줄로 서서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사장님, 사모님. 안으로 모시겠습니다.”송재이는 더욱 혼란스러워졌다. 그녀는 무의식적으로 설영준을 올려다보며 물었다.“여긴 왜 데리고 온 거야?”“도와달라고. 여자 파트너 한 명이 필요했어.”설영준은 아주 당연하다는 듯 대답했다. 마치 설영준을 도와주는 게 송재이의 당연한 의무인 것처럼.그녀가 멍해 있는 사이에 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