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영준의 사무실에서 나온 문예슬의 얼굴에는 아직도 홍조가 가시지 않았다.이는 화가 났기 때문이다.문예슬은 자신이 도대체 어떤 점이 송재이보다 못한지 알 수 없었어.이미 헤어졌는데 왜 다시 연애하지?문예슬은 주머니에서 휴대전화를 꺼내 전화를 걸었다.여러 번 울리 후에야 마침내 전화가 연결됐다. 송재이의 목소리를 듣자마자 문예슬의 가슴속에 쌓아두었던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그래도 매너를 유지하기 위해 문예슬은 목소리를 가다듬으며 심호흡한 후 말했다.“재이 씨, 설영준은 짐승보다 못해! 며칠 후면 아빠 생일이어서 청첩장을 보냈지만 받지 못했는지 회신이 없었어. 오늘 아빠는 나에게 직접 보내라고 해서 찾아갔는데 글쎄 나의 몸에 손을 대는 거 있지? 남자는 다 양아치인가 봐? 너와 함께 있을 때도 그랬어?”설영준이 문예슬의 몸에 손을 댔다고? 송재이는 믿을 수 없었다.마침 수업을 마친 송재이는 교실 문 앞에 서 있었다.전화를 받으며 송재이는 천천히 복도로 걸어갔다.창가에 기대어 선 송재이는 맑은 하늘을 바라보며 담담하게 물었다.“어떻게 했어?”송재이의 말투에서는 화가 났음을 느낄 수 없었다. 오히려 설영준이 어떻게 손을 썼는지 궁금해했는데 이는 분명 믿지 않는 눈치였다.그 때문에 문예슬은 갖은 상상력을 펼쳐 일어나지도 않은 장면을 생생하게 묘사했다.설영준에게 청첩장을 건네줄 때 그녀의 손을 만졌을 뿐만 아니라 방 카드까지 쥐여주었다고 했다...송재이는 눈살을 찌푸리며 문예슬이 말할 때 휴대전화의 녹음 버튼을 눌렀다.문예슬이 방금 한 말은 한 글자도 빠뜨리지 않고 녹음되었다.송재이는 눈썹을 찡그리며 문예슬에게 말했다.“걱정하지 마. 내가 꼭 복수해 줄게...”송재이의 말을 들은 문예슬은 어리둥절해졌다.“복수는 됐어! 그저 설 대표님이 어떤 사람인지 알고는 당하지 않기를 바랐을 뿐이야. 지금 떠나도 늦지 않았어. 겉만 멀쩡하지 뼛속까지 추잡할 줄은 몰랐어. 역시 남자는 다 똑같아...”문예슬이 송재이와 이런 말을 하는 것은 설영준과 빨
송재이는 미소를 지었다.휴대전화 화면 너머로 설영준의 긴장감이 느껴졌다. 송재이의 생각에 신경을 쓰는 것을 알았지만 통쾌하게 결론을 주지 않았다.송재이는 회신하지 않았다. 이미 경주에서 며칠 지체했기에 이젠 돌아가야 했다.남도에는 아직 일이 남았던 송재이는 설영준에게 한마디 말도 하지 않고 남도로 가는 비행기 표를 샀다.도착한 후 휴대전화를 켜보니 안에는 여러 통의 부재중 전화가 있었는데 그 중 설영준이 보낸 문자도 있었다.이미 남도로 돌아간 것을 알고 있었다.두 사람의 카톡 대화는 그녀가 답장하지 않은 것에 머무르고 있었다.설영준은 송재이가 문예슬의 영향을 받아 홧김에 훌쩍 떠난 줄 오해했다.송재이는 웃으며 설영준에게 문자를 보냈다.[남도에 아직 일이 남았어. 인연이 되면 다시 만나게 될 거야.]이 문자를 본 설영준의 표정을 상상하며 송재이는 그의 회신을 기다리지도 않은 채 휴대전화를 무음으로 꺼버리며 주머니에 넣었다....송재이가 보낸 마지막 문자를 본 설영준은 어리둥절해졌다.마침 박윤찬이 곁에 있어 그는 문자를 보여주며 의아해서 물었다.“재이 씨가 마지막에 보낸 문자는 무슨 뜻이지?”박윤찬도 어리둥절해 하며 의심스러운 듯 입을 열었다.“안녕이라는 말은... 안녕히 하는 뜻일까요?”역시 국어는 오묘했다. 말투가 다르면 두 가지 의미를 불러일으킬 수 있었다.하필 송재이의 표정을 볼 수 없었던 설영준은 직접 전화를 걸려고 하다가 또 망설였다.“남자친구라는 분이 어떻게 이럴 수 있어요?”박윤찬은 옆에서 심드렁하게 말했다.설영준은 의아해하며 말했다.“뭐?”“내일이 송재이 씨 생일인데 지금 돌아가라고 하는 것은 선물을 주지 않겠다는 뜻인가요?”박윤찬은 설영준이 아직 송재이의 생일을 몰랐을 것으로 추측했다.그는 옹졸한 사람이 아니었다.또 송재이와 정이 가장 깊은 시기에 생일을 기억하지 못하는 척할 수 없었다.과연 박윤찬의 말을 들은 설영준은 몇 초 동안 멍해졌다.“정말이야?”무심코 주민등록증을 봤는데 바로 오늘이에요
오후에 설영준은 여진 비서를 자동차 판매센터에 보내 여자가 좋아할 만한 차를 고르라고 했다.송재이가 선호하는 브랜드나 색상에 대해 설영준은 잘 몰랐다.나중에 종업원에게 물어서야 차를 골랐고 저녁 무렵 여진 비서는 이 차를 몰고 돌아갔다.설영준은 일을 다 처리한 후 새 차를 몰고 남도로 갔다.직접 운전해서 가는데 5시간 이상 걸렸다.설영준은 처음으로 이렇게 오래 운전한 것은 아니다....남도송재이가 퇴근하자마자 설영준이 걸려온 전화를 받았다.“혼자 도망가는 건 무슨 뜻이야?”전에 송재이는 그의 반응이 어떤지 보려는 장난기 어린 마음으로 떠났다.전화 속 말투를 듣고 있으니 약간 억눌린 분노도 있었다.송재이는 웃음을 금치 못했다.하지만 정색해서 또박또박 대답했다.“출근해야 하므로 급하게 돌아왔어.”“나에게도 말해 줘야지.”설영준의 말투에는 배신당한 여자처럼 약간의 원망이 들어 있었는데 그도 미처 발견하지 못한 것 같았다.송재이는 눈썹을 찌푸렸다.“화났어?”설영준의 반응은 확실히 예상을 초월했다.“아니야!”설영준은 단호하게 대꾸했다.그러나 빨리 대답할수록 오히려 더 의심스러워졌다.“지금 어디야?”자신이 추태를 부렸음을 의식한 설영준은 다시 입을 열었는데 말투가 한결 누그러들었다.“집으로 가는 중이야.”종일 수업을 들은 송재이는 너무 피곤해서 돌아가서 샤워하고 푹 자고 싶었다.설영준은 담담하게 대꾸했다.“그럼 일찍 돌아가서 쉬어.”말을 마치자마자 설영준은 전화를 끊었다.송재이는 휴대전화 화면을 바라보며 설영준의 의도를 알 수 없어 어리둥절해 했다.설마 퇴근 후 돌아다니는 것이 싫어서 경고 삼아 전화를 걸었을까?만약 그렇다면 옹졸했다....잠자리에 들었던 송재이는 침대 머리맡에 놓인 휴대전화의 벨 소리를 들었다.몸을 뒤척이며 꿈인 줄 알았는데 시간을 보니 이미 새벽 3시가 되었다.수신 버튼을 누르자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송재이. 문을 열어줘.”설영준이 말했다.잠이 덜 깨서 멍한 송재이는 휴대전화에
피곤한 송재이는 마침내 잠자리에 들었다.다음날 눈을 떴을 때, 마치 테니스 경기를 한 것처럼 온몸이 시큰거리며 쑤셔놓았다는.“어젯밤에 왜 갑자기 왔어?”송재이는 몸을 뒤척이며 그의 가슴에 기대었고 한 손으로 그의 가슴에 원을 그렸다.설영준은 웃으며 손을 뻗어 송재이를 품에 안았다.“조금만 더 자.”피곤해 보이는 쉰 목소리로 설영준이 말했다.설영준도 피곤했을 것이다. 어쨌든 그런 일을 할 때 힘을 쓰는 것은 남자이기 때문이다.결국, 두 사람은 침대에서 15분 정도 더 뒹굴다가 일어났다.아침을 먹은 후 설영준은 그제야 말했다.“함께 아래층으로 내려가. 보여줄 것이 있어.”말을 마친 후 그는 송재이를 데리고 주차장으로 갔다.그 차를 본 송재이는 멍해졌지만 두 눈에는 놀라움이 없었다. 그저 설영준의 의도를 모르는 체하는 의아함이 반짝였다.차 문을 연 후 설영준은 송재이를 운전석에 앉히며 말했다.“오늘이 생일이지? 선물을 준비했어.”‘오늘이 생일이었나?’생일이 다가온 것 같았으나 요즘 너무 바빴던 재이는 전혀 기억하지 못했다.“싫어?”설영준이 물었다.“솔직히... 내가 방금 산 차를 몰아도 충분해.”송재이가 억 원을 넘는 고급 차를 좋아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매일 출퇴근하며 많은 동료가 보고 있어 관심을 끌기 싫었을 뿐이다.일부 동료들은 이미 은연중에 그녀에게 불만을 표시했다.만약 송재이가 너무 뽐낸다면, 논란을 불러일으킬 수 있었다.송재이는 재벌 출신이 아니고 또 그녀의 집안 배경을 잘 알고 있었다. 쏘타나를 몰던 사람이 갑자기 고급 차를 운전하면 틀림없이 구설에 오르게 될 것이다.설영준은 옆에서 송재이의 망설이는 표정을 눈여겨보았다.문득 설영준은 아까 박윤찬이 한 말이 생각났다. 아마 그렇게 좋아하지 않을 것이라고 했는데 지금 보면 적중한 것 같았다.이것은 박윤찬이 송재이를 잘 요해했다고 뜻이다.또 남자친구인 자신보다 더 잘 안다는 뜻이기도 했다.비록 송재이는 이렇게 비싼 차를 몰고 출근하지 않을 것이지만 설영준이
한참이나 멍하니 서 있다가 그제야 정신을 차린 송재이는 설영준의 곁으로 다가가 손을 잡으며 말했다.“아니야. 자기가 준 선물은 다 마음에 들어. 그런데...”외출할 때 사용하기도 불편하고 중요한 건 너무 눈에 튀었다.박윤찬이 자기에 대한 요해가 깊다고 설영준이 말해서부터 그녀는 머릿속이 복잡했다.자신과 박윤찬의 사이를 오해한 것이 확실하다.두 사람이 어렵게 재결합했기에 이런 작은 일로 다시 감정을 상하고 싶지 않았고 여기까지 오면서 너무 많은 일을 겪었다.서러워서 당장이라도 눈물이 터질듯한 송재이의 표정에 설영준은 가슴 속에서 화가 치밀어 오르지만 애써 누르고 있었다.송재이의 표정 때문만이 아니라 그도 송재이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힘들게 재결합했기에 다시 그녀에게 상처 주고 싶지 않았다.바로 이때 갑자기 울린 휴대전화 벨 소리가 정적을 깼다.설영준이 휴대전화를 꺼내 확인해보니 도 대표의 전화였다.“설 대표님, 남도에 오셨다면서요? 내일 클럽에서 모임을 하려 하는데 참석할 의향이 있으세요?”도경진은 설영준이 일 때문에 자주 연락하는 사업 파트너이다.설영준은 고개를 들어 맞은편에 있는 송재이를 힐끗 보더니 전화에 대고 말했다.“참석할게요. 하지만 동행이 한 명 있어요.”머리 좋은 도경진은 그 말을 듣자마자 이내 뜻을 알아차리고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얼마든지요.”비록 말은 이렇게 했지만 도경진은 머릿속으로 구체적인 이미지를 떠올렸다.저번 파티 때 화려한 복장으로 나타났던 송재이의 모습이 도경진에게 아주 깊은 인상을 남겨주었다.송재이가 설영준의 옆에 서니 선남선녀가 따로 없어 많은 사람들의 화젯거리가 되었다.설영준이 여자 파트너와 동행하겠다고 주동적으로 말을 했으니 송재이를 제외하고 다른 사람이 없을 것이다.도경진과 통화를 마친 뒤 휴대전화를 내려놓으며 고개를 들어 송재이에게 말했다.“방금 내가 한 말 들었지? 내일 저녁 나와 함께 가야 해.”송재이는 방금 설영준이 자기와 박윤찬의 사이를 오해한 일때문에 미안한 마음이
파티가 끝나고 송재이와 설영준 사이의 분위기가 어쩐지 무거웠다.직접 운전하고 온 설영준이 갈 때가 되자 갑자기 산책을 제의했다.시계를 보니 너무 늦은 시간이 아니었다.두 사람은 달빛과 네온사인이 어우러진 길을 따라 걸었다. 주위의 바람 소리와 차 소리 외에 두 사람의 그림자밖에 보이지 않았다.한참 걸어 다리에 도착하니 불빛에 반짝이는 냇물이 보였다.다리에 도착한 송재이가 갑자기 걸음을 멈추더니 천천히 쭈그려 앉았다.“힘들어?”설영준은 송재이에게로 다가가 머리를 쓰다듬자 그녀는 불쌍한 표정을 지으며 바라보았다.한마디 말도 하지 않았지만 설영준은 무슨 뜻인지 알아차렸다.한숨을 내쉬며 손을 내밀어 송재이를 바닥에서 일으키자 1초도 주저하지 않고 냉큼 그의 등에 업혔다.처음으로 설영준의 등에 엎힌 송재이는 두 팔로 그의 목을 감싸고 턱을 어깨에 괴었다.일부러 그러는 건지 아닌지는 몰라도 줄곧 턱으로 설영준의 어깨를 살살 문질렀다.집에 도착하니 열두 시가 다 되었다.현관에서 설영준은 송재이를 업은 채로 그녀의 신발만 벗기고는 그대로 침실로 걸어가 침대 위에 던져버렸다.설영준이 두팔을 짚고 엎드린 채로 한 쌍의 까만 눈으로 송재이를 지그시 바라보자 갑자기 당황했다.눈빛을 피하려고 얼굴을 옆으로 돌리자 설영준은 송재이의 곁에 누우면서 그녀를 품에 안았다.두 사람의 몸이 밀착되었고 주변에서 풍기는 호르몬 냄새 때문에 송재이도 덩달아 몸이 뜨거워졌다.“움직이지 마.”설영준이 귓가에 대고 속삭이자 송재이는 진짜로 꼼짝하지 않고 있었다.샤워하고 싶었지만 설영준의 품에 안기니 저도 모르게 잠이 쏟아지면서 눈꺼풀이 천근만근이었다.당장 꿈나라로 들어가려고 할 때 설영준이 조용히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재이야.”“...”“재이야.”갑자기 눈을 뜬 송재이는 설영준이 자신을 부른다는 것을 느꼈다.한참 지나 송재이는 몸을 뒤척이며 돌아누워 설영준의 허리를 껴안으면서 얼굴을 품에 묻었다.그러자 설영준도 이내 두 손으로 송재이를 껴안으며 턱으로 정
송재이는 전혀 머뭇거리 않고 바로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안 돼. 오늘 출근해야 해.”“그럼 몇 시 퇴근해? 데리러 갈게.”설영준이 자진해 말했다.송재이가 머뭇거리더니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혼자 갈 수 있어. 회사 부근에 나타나면 내가 불편해...”그러자 설영준의 표정이 점점 어두워졌다.연거푸 거절하는 바람에 설영준이 화 났다는 것을 느낀 송재이는 재빨리 그의 목을 감싸면서 말했다.“오늘 일찍 퇴근해서 내가 밥할게.”두 사람이 함께 있고부터 설영준이 밥하는 경우가 더 많았기에 송재이가 자진해서 밥하겠다는 건 아부인 셈이다.비록 불쾌함이 풀리지 않았지만 설영준의 얼굴색이 많이 온화해졌다.설영준은 송재이를 무릎에 앉히고 손으로 그녀의 아래턱을 잡으며 얼굴을 마주 보고 말했다.“만일 우리 부모님이 허락하면 나와 결혼할 거지? 맞지?”송재이는 설영준의 말에 한참 지나서야 반응했고 입술을 깨물면서 고개를 끄덕이더니 말했다.“내가 안 하겠다고 한 적 없어.”그제야 설영준은 기분이 조금 좋아지면서 송재이의 입술에 키스하고나서 그녀를 풀어줬다.설영준의 무릎에 앉아 두 사람이 한참이나 알콩달콩하다 바닥으로 내려왔다.출근하느라고 두 사람이 함께 별장 대문 밖으로 나가면서 송재이가 설영준의 양복자락을 잡았다.그러자 설영준이 눈썹을 찡긋하더니 고개를 돌리면서 물었다.“내가 가는 게 아쉬워?”“아니. 나 다음 달에 해외로 공연하러 가. 아마 2주 정도 걸릴 거야. 먼저 자기한테 말하느라고...”설영준은 이 말에 다시 눈살을 찌푸리더니 고개를 돌리면서 물었다.“또 가?”설영준은 송재이가 주기적으로 해외로 공연갔던 것으로 기억되었다. 송재이가 우수해서이겠지만 그에게는 그다지 반가운 소식은 아니었다.“다음 달?”설영준이 묻자 송재이가 고개를 끄덕이면서 그의 표정을 살폈다.비록 설영준은 애써 담담한 척하려고 했지만 송재이가 아는 설영준은 지금 아주 저기압이다.송재이는 까치발을 들며 설영준의 뺨에 키스했다.살짝 입맞춤한 것뿐인데 설영준이 갑
출국하는 날, 송재이는 혼자 공항으로 가려 했으나 설영준이 차로 바래다줬다.가는 동안 설영준이 아무 말도 하지 않았기에 송재이는 차 안의 분위기가 갑갑하게 느껴졌다. 요 며칠 두 사람은 껌딱지처럼 붙어있었고 그런 설영준을 두고 떠나려니 송재이도 아쉬웠다.하지만 게이트를 통과할 때 송재이는 전혀 주저하지 않고 빠른 걸음으로 통과했다.설영준은 등 뒤에서 오래도록 뒷모습을 바라보면서 한 번쯤은 송재이가 뒤돌아볼 줄 알았는데 한 번도 돌아보지 않았다.생일에 선물한 억 원 가까이하는 수입 자동차를 송재이는 몇 번밖에 운전하지 않았다.눈에 튀는 것을 좋아하지 않기에 가능한 저자세를 유지했다.설영준에게 비록 사정을 설명했지만 씁쓸함이 없지 않아 있었고 박윤찬이 자기보다 송재이를 더 잘 안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불편했다....비행기에 오른 송재이는 공항에서 작별할 때 설영준이 착잡해하던 모습이 떠오르면서 무슨 영문인지 모르지만 가슴이 아팠다.목적지에 도착한 뒤 그녀는 빠르게 일에 빠져들었다.남도에 온 지 1년밖에 안 되는 사이에 자주 해외 공연을 다녔고 이런 경력은 그녀에게 큰 도움이 되었다.눈 깜짝할 사이에 반달이 지나갔다.송재이는 저녁마다 설영준과 영상통화로 안부를 나눴다.두 사람 사이에 10여 시간의 시차가 있지만 하루도 빠짐없이 통화했다.이번에 송재이와 함께 출장 온 동료 중에 송재이보다 몇 살 어린 바이올린 연주자가 있었고 그의 이름은 서지석이다.저번에 출장갈 때도 서지석이 있었지만 과묵한 성격인지 항상 모퉁이에 조용히 있었고 따로 이야기를 나눈 적이 거의 없기에 친한 사이는 아니었다.이번에 호텔 방을 배정받으면서 서지석의 방이 바로 맞은편이라는 것을 알았다.한밤중에 서지석이 갑자기 송재이의 방문을 두드렸다.처음에는 무서워 문을 열지 않았지만 문밖에서 서지석의 가냘픈 구조 목소리가 들려와 외시경을 통해 맞는지 확인하고 문을 열어보니 서지석이 창백한 얼굴로 배를 움켜쥐고 당장이라도 쓰러질 듯 서 있었다.송재이가 허둥대며 급히 문을 열
통화가 종료된 후 설영준은 더 마음이 무거워졌다.그는 다시 한번 송재이 병실로 가 침대 끝에 앉았다. 그리곤 창백한 얼굴로 고요히 잠든 송재이의 얼굴을 보았다.설영준은 마치 송재이에게 자신이 한 말이 들리는 것처럼 나직하게 말했다.“재이야, 내 말 들려? 나 여기 있어. 네 옆에 있어.”그는 조심스럽게 송재이의 손을 잡으며 미약해진 체온을 느꼈다.“어쩌면 지금 내 말이 안 들릴 수도 있다는 걸 알아. 하지만 그것만은 알아줬으면 좋겠어. 내가 널 얼마나 사랑하는지 말이야.”설영준은 이내 심호흡을 하면서 감정을 갈무리하려고 애를 썼다.“우리 아직 함께 해보진 못한 일들이 많아. 혹시 기억해? 우리 그때 그랬었잖아. 함께 세계 곳곳에 있는 나라로 여행 가서 우리와 다른 사람들의 문화를 체험해 보고 그곳의 음식을 먹어보자고. 네가 지금 눈만 떠준다면 난 지금 당장 너랑 함께 그 떠날 거야.”이때 누군가 노크하더니 도정원이 들어왔다. 그는 아주 엄숙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영준 씨, 경찰들이 지금 출동했다고 하네요. 곧 도진욱의 거처로 들이닥칠 거예요.”설영준은 자리에서 일어난 뒤 고개를 끄덕였지만 여전히 아쉬움이 가득한 눈길로 송재이를 보았다.“정원 씨, 부탁 하나만 들어줄래요?”“말씀하세요. 제가 도울 수 있는 거면 도와드릴게요.”“저 대신 재이 좀 잘 챙겨주세요. 전 누구 만나러 가야 할 것 같아서 그래요. 그 사람이 아마 이 사건에 아주 큰 도움을 줄 수 있을 거예요.”“걱정하지 말고 가봐요. 여긴 제가 꼭 붙어 있을 테니까 아무도 재이를 건들지 못할 거예요.”설영준은 고마운 눈빛으로 도정원을 힐끗 보곤 몸을 돌려 병실을 나섰다.떠나기 전 설영준은 나직하게 송재이의 귓가에 대고 말했다.“재이야, 나 얼른 돌아올게. 그러니까 나 꼭 기다려줘야 해.”송재이의 병실에선 도정원만이 묵묵히 곁을 지키며 그녀가 깨어나길 기다리고 있었다. 설영준은 이미 진상을 찾으러 떠났다.그는 오랜 친구를 만나러 갈 생각이다. 그 친구는 의학 부문에서 아
그러자 보안 요원이 말했다.“여긴 병원 CCTV를 관리하는 곳입니다. 외부인에게 함부로 영상을 보여줄 수 없습니다.”설영준은 확고한 어투로 말했다.“전 송재이 씨 약혼자입니다. 전 반드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아야겠으니 협조 부탁드립니다.”보안 요원은 다소 망설이더니 결국 그에게 영상을 보여주었다.영상 속에서 설영준은 세세한 부분까지 발견했다. 송재이가 쓰러지기 전 도진욱은 물잔을 송재이에게 건넸다. 그 순간 설영준은 의심을 하게 되었다.같은 시각 도정원은 병실에서 쪽지 한 장을 발견했다. 쪽지엔 갈겨 쓴 글씨가 있었다. 약물의 이름과 사용량이 적힌 쪽지였다. 그는 발견하자마자 바로 설영준에게도 알렸다.두 사람은 각자 발견한 것을 공유하곤 분석하기 시작했다. 설영준은 도진욱이 송재이에게 건넨 물잔과 쪽지 위에 쓴 약물의 명칭을 보았다. 그는 순간 무언가 깨닫게 되었다.송재이가 검사실로 들어간 뒤 설영준과 도정원은 각자 단서를 찾으러 움직였기에 설영준은 다시 돌아와 송재이를 기다려 보기로 했다. 그러나 도정원은 쪽지에 적힌 약물 이름을 보면서 조사하기 시작했다.설영준은 초조한 얼굴로 검사실 밖에서 송재이를 기다렸다.“재이야, 꼭 버텨야 해. 내가 여기서 기다리고 있을게.”시간이 1분 1초 흘러갔다. 설영준은 마음이 점점 더 무거워졌다. 머릿속에 송재이의 미소와 웃음소리, 그리고 함께 보냈던 즐거운 시간들이 떠올랐다. 그는 속으로 기도했다. 송재이가 무사히 나오길 바라며 말이다.설영준은 혼잣말로 중얼거렸다.“재이야,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를 기억해? 네가 그때 엄청 찬란한 미소를 지었었어. 네 찬란한 웃음이 온통 어둠뿐이던 내 세상을 환하게 빛내주었지. 그때 널 지켜주겠다고 다짐했었는데... 지금은...”바로 이때 문이 스르륵 열리고 의사가 나왔다. 설영준은 바로 다가가 물었다.“선생님, 재이는 어때요?”“저희가 최선을 다해 독이 퍼지는 것을 막고 있습니다. 하지만 너무 희귀한 독에 중독된 거라 독 분석하고 해독제를 만드는 데 시간이
송재이의 말은 청천벽력이었다. 도정원과 도진욱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수사관이 빠르게 다가와 상태를 살폈다. 그도 사태의 심각성을 알게 되어 얼른 입을 열었다.“저희가 바로 의사를 불러오겠습니다.”도정원은 빠르게 긴급 호출 벨을 누르면서 송재이를 부축한 채 옆에 있던 의자에 조심스럽게 앉혔다.의자에 앉히자마자 도정원은 초조한 마음으로 송재이를 어깨에 기대게 했다.“재이야, 조금만 버텨줘. 의사가 금방 도착할 거야.”도진욱은 다소 복잡한 감정이 담긴 얼굴로 송재이를 보았다. 속으로 뭔가 갈등하고 있는 듯했다.그러더니 혼잣말로 중얼거렸다.“독에 중독됐다고? 그럴 리가... 난 아무것도 하지 않았어...”예리한 수사관은 그런 도진욱의 상태를 눈치채고 바로 심문했다.“도진욱 씨, 이 상황에 관해 설명하세요. 송재이 씨가 왜 갑자기 중독된 거죠?”도진욱의 안색은 더 창백해졌다. 그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전... 전 정말로 모릅니다. 제가 왜 제 조카를 죽이겠습니까?”바로 이때, 의사와 간호사가 병실로 들어오며 송재이를 살펴보았다.의사가 엄숙하게 말했다.“아무래도 정밀 검사를 해봐야 알 것 같습니다. 어떤 독에 중독되었는지 확인할 수 없습니다.”송재이는 급하게 검사받으러 갔다. 도정원과 도진욱이 그 뒤를 따라갔다. 수사관은 묵묵히 이 상황을 지켜보았다. 머릿속에 이미 사건의 윤곽이 그려지기 시작했다.도정원이 밖에서 초조한 마음으로 송재이를 기다렸다. 그러나 도진욱은 홀로 구석으로 간 뒤 손을 주머니에 찔러넣은 채 안에 있는 핸드폰만 불안한 마음으로 만지작거렸다.그러더니 낮은 목소리로 누군가와 통화했다.“나야. 일이 복잡하게 됐어. 송재이가 갑자기 독에 중독되어서 경찰이 개입하게 되었어. 나도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인지 몰라. 하지만 우린 지금 반드시 움직여야 해.”전화기 너머로 잔뜩 가라앉은 목소리가 들려왔다.“우리 계획을 수정할 필요가 있군요. 일단 절대 증거를 찾게 해서는 안 돼요. 안 그러면 우리 모두 끝장나게 되니까
화가 난 도정원은 이를 빠득 갈았다.“그게 무슨 의미죠? 설마 아버지 병이 당신과 연관이 있다는 건가요?”정체 모를 남자는 웃음을 터뜨렸다.“곧 알게 될 거야. 참, 도진욱. 가문의 이익을 위해 네 동생 행복을 희생했었지? 이젠 네가 희생할 차례야.”전화는 그렇게 끊겼다. 송재이와 도정원은 고개를 돌려 도진욱을 보며 설명을 바랐다.그러자 도진욱이 말했다.“난... 난 정말 몰랐어. 그때 일이 이렇게 될 줄은 몰랐다고. 그때 내가 그런 선택을 한 건 인정해. 하지만 전부 가문을 위해서였어. 난 너희들을 해칠 생각한 적 없다고.”송재이는 무력감이 들었다. 거짓과 배신으로 가득한 이 가족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몰랐다.절망에 빠진 송재이가 이마를 짚으며 말했다.“우리 이제 어떻게 해야 해요? 대체 누굴 믿어야 하는 거예요?”도정원도 다소 괴로운 눈빛을 하고 있었다. 그는 주먹을 꽉 움켜쥐며 감정을 갈무리하려고 애를 썼다.“가문의 이익을 위해서 그러셨다고요. 우리 도씨 가문이 언제부터 이익에만 눈멀어 가족을 버리는 가문이 된 거죠?”도진욱의 얼굴엔 죄책감이 가득했다. 그는 힘이 없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정원아, 그땐 내 잘못이 맞아. 나도 인정해. 난 내 선택으로 우리 가문이 더 힘이 있는 가문이 될 줄 알았고 가족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어. 난... 난 정말 미안하구나.”옆에서 듣고 있던 송재이는 막막하면서도 불안했다.“두 사람은 전부 제 가족이에요. 전 대체 누굴 믿어야 할지 모르겠다고요.”송재이의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그 순간 문밖에서 다급한 발걸음 소리가 들려오면서 이 숨 막히는 침묵을 깨버렸다.세 사람은 동시에 고개를 돌려 문 쪽을 보았다. 제복을 입은 남자들이 엄숙한 얼굴로 들어왔다.“안녕하세요. 저희는 경찰서 수사과에서 나왔습니다. 몇 가지 당신들이 조사에 협조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도정원과 도진욱은 서로 마주 보았다. 그들은 알고 있었다. 이것이 진상을 알아내는 데 중요한 조사라는 것을“네, 협조하겠습니다.
전화기 너머로 침묵이 흘렀다. 그리고 이내 짙은 한숨 소리가 들렸다.도진욱이 입을 열었다.“그래, 알았다. 너희들한테... 해줄 얘기가 있단다. 네 아버지의 과거와 어머니에 관한 얘기란다.”도정원과 송재이는 서로 눈빛을 주고받았다. 두 사람은 의아하면서도 초조했다.“큰아버지,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뭔가 알고 계신 거예요?”도진욱은 미간을 찌푸렸다.“곧 도착하니 얼굴을 보면서 얘기하자꾸나. 이 일은 내가 너희들 얼굴을 보면서 직접 말해줘야 할 것 같구나.”전화를 끊은 후 도정원과 송재이는 생각에 잠겼다. 두 사람은 도진욱이 어떤 얘기를 들려줄지 몰랐고 도진욱이 그들에게 해줄 얘기가 그들 가족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지도 몰랐다.얼마 지나지 않아 도진욱이 병원에 도착했다. 그의 얼굴엔 초조함과 죄책감이 담겨 있었다.그는 송재이와 도정원의 얼굴을 보더니 심호흡을 한 후 천천히 입을 열었다.“지금 마음이 얼마나 혼란스러운지 알고 있단다. 하지만 더는 너희에게 숨길 수 없을 것 같구나. 너희들이 모르는 사실은 더 많단다.”송재이는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머리가 어질거렸다.“큰아버지,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저희가 아직도 모르는 비밀이 있는 건가요?”“그래, 그때 당시 나와 네 엄마는 확실히 그런 사이였었지. 하지만 그건 다 지나간 일이란다. 나중에 난 그 삼각관계에 빠지기로 했고 네 엄마랑 네 아빠를 이어주기로 했었지. 그때의 난 그게 옳은 일이라고 생각했단다. 지금까지도 말이야.”송재이와 도정원은 충격받은 얼굴로 도진욱을 보았다. 그가 꺼낸 얘기는 도경욱이 꺼낸 얘기보다 더 충격적이었다.“큰아버지, 정말로... 정말로 그러셨어요?”“나도 알고 있단다. 내가 무슨 말을 하든 과거의 일을 없던 일로 할 수는 없겠지. 하지만 난 아직 살아 있을 때 너희들에게 진실을 말해주고 싶구나.”바로 이때 병실 안에서는 긴급 호출 벨이 울렸다.의사와 간호사들이 급하게 병실로 달려왔고 송재이와 도정원도 얼른 병실 안으로 들어갔다.의사는 그들을 보더니 고
송재이는 얼른 도경욱의 손을 꼭 잡았다. 눈물이 그녀의 눈 앞을 가렸다.옆에서 두 사람의 모습을 보던 도정원도 눈시울이 붉어졌다.병실 안에는 무거운 분위기가 감돌았다. 그저 일정한 의료 기기 소리만 들려오며 시간이 흘렀다.도경욱은 송재이를 빤히 보았다. 그의 두 눈엔 아쉬움과 죄책감만 남아 있었다.자신에게 남은 시간이 얼마 없다는 것을 그는 알고 있었다. 하지만 죽기 전 꼭 해야 할 말이 있었다.미약한 목소리지만 그는 확고한 어투로 말했다.“재이야, 내 딸. 너에게 꼭 해줄 말이 있단다. 네 출생의 비밀과 네 엄마에 관한 얘기야.”송재이는 고개를 들었다. 눈물 그렁그렁 맺힌 그녀는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아빠,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제 엄마가 왜요?”도경욱은 숨을 깊이 들이쉬었다. 마치 온몸의 힘을 모으고 있는 것 같았다. 깊이 숨겨둔 진실을 정확하게 말해주기 위해서 말이다.“그때 네 엄마, 그러니까 서지원의 약혼 상대는 내 형이었단다. 네 큰아버지지. 하지만 운명이 장난을 쳤지. 서지원이... 네 엄마가 진심으로 사랑한 사람은 나였단다.”송재이는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너무도 충격적인 진실이었다. 그녀는 단 한 번도 자신의 출생에 이런 비밀이 숨겨져 있을 거라곤 상상도 못 했다.그녀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어...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었던 거죠?”도정원도 놀란 표정인 것을 보아 처음 알게 된 사실인 것 같았다.도경욱은 다소 괴로운 표정을 지었다.“네가 이 사실을 받아들이기 힘들어한다는 것을 나도 안다. 그렇지만 전부 사실이란다. 난 지원이를 단 한 번도 강요한 적 없었어. 우리는 서로 진심으로 사랑했어. 하지만 그때는 이런 추문을 받아들이지 않던 시절이었지.”송재이는 마음이 복잡했다. 이렇게까지 혼란스러운 감정은 처음이었다.그녀는 이렇게나 갑작스러운 사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몰랐다.“아빠, 그럼 대체 왜 일찍 말씀해 주지 않으신 거예요? 왜 그동안 숨기고 계셨던 거예요?”도경욱은 덜덜 떨리는 손으로 송
박정후는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다소 고통스러운 기억을 떠올리고 있는 듯한 눈빛으로 박윤찬을 보았다.“그때 내가 한 여자를 사랑하게 되었어. 아주 똑똑하고 예쁘고 착한 사람이었지. 나한테 아주 특별한 사람이기도 했어. 하지만 어머니가... 어머니가 우리 사이를 반대하셨어.”박윤찬은 미간을 찌푸렸다. 여전히 이해가 가지 않았다.“어머니가 왜 반대하셨는데? 어머니는 아무 이유도 없이 그러실 분이 아니잖아.”박정후가 대답했다.“처음엔 나도 이해하지 못했어. 그때의 난 분명 어머니가 그 여자에 대해 오해하고 있다고 생각했었지. 또 어쩌면 내가 사랑놀이에 푹 빠져 일을 제대로 하지 않을까 봐 걱정하시는 건 줄 알았어. 하지만 나중에 알고 보니 전혀 아니었어.”박윤찬은 초조하게 한숨을 내쉬었다.“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건데? 어머니가 아무 이유도 없이 반대하실 분은 아니야.”박정후의 낮게 깔린 목소리에선 슬픔이 느껴졌다.“그 여자는 성이 임 씨였어. 임씨 가문은 우리 성씨 가문과 오래전부터 원한이 있었지. 이 원한은 우리가 태어나기 전부터 있었던 거라 저주와도 같은 것이었어. 두 가문의 후대에도 아주 큰 영향을 주고 있어.”박윤찬은 놀란 모습이었다.“난 임씨 가문에 대해 들어본 적 단 한 번도 없었어. 어머니도 나한테 한 번도 말씀하신 적 없었다고.”박정후가 말했다.“어머니는 이 원한이 시간이 지나면서 잊히길 바라셨던 거야. 하지만 사실상 잊히지 않았지. 임씨 가문과 성씨 가문은 지난 세대에서도 심각한 충돌이 있었어. 두 가문은 사업 경쟁을 벌이다가 더 틀어지게 되었지.”박윤찬은 이해가 되지 않았다.“사업 경쟁이라니? 그게 언제 일인데 아직도 신경 쓰고 있다는 거야?”“그래, 하지만 지난번 경쟁에서 임씨 가문은 파산당하게 되었지. 그 가문 어르신도 결국 그때 세상을 뜨게 되신 거야. 임씨 가문에서는 우리 성씨 가문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경쟁을 벌여 그런 비극을 만든 것으로 생각하고 있어.”박윤찬은 한참 침묵하다가 입을 열었다.“그러
박정후는 시선을 돌려 창밖을 내다보았다. 바쁘게 움직이는 사람들을 보더니 생각에 잠겨 버렸다.그는 나직하게 말했다.“제가 멀리 떠나기로 결정한 건 저와 윤찬이 사이에... 오해가 있기 때문이에요. 저랑 윤찬이 사이에 갈등이 있었는데 전 제가 원하는 것을 이루기 위해 윤찬이 곁을 떠났죠. 하지만 혈연관계는 영원히 끊을 수 없는 거잖아요.”묵묵히 박정후가 하는 얘기를 듣고 있던 송재이는 박정후의 안타까움과 죄책감을 고스란히 느꼈다.송재이가 말했다.“가족 사이에 확실히 갈등이 생길 수도 있죠. 하지만 제일 중요한 건 서로 항상 응원하고 있음을 알고 있는 것이죠.”설영준은 진지한 얼굴로 박정후를 보았다.“정후 씨는 정의를 위해, 동생을 위해 이미 많은 것을 했으니 윤찬 씨도 이해해줄 거예요.”장주영도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맞아요. 정후 씨가 한 모든 것을 박윤찬 씨가 알게 된다면 분명 아주 자랑스러워할 거예요.”박정후는 한숨을 내쉬었다. 고개를 돌려 확고함이 가득한 눈빛으로 그들을 보았다.“그랬으면 좋겠네요. 이번에 돌아온 것도 윤찬이에게 뭐라도 도움이 되어주고 싶어서였어요. 그리고 윤찬이와 화해할 기회도 있었으면 좋겠네요.”그들을 도와준 정체 모를 인물은 바로 박정후였다.그는 마음이 너무도 복잡했다.이번 일로 동생과 무너진 관계를 회복하고 다시 화목하게 지내고 싶었다.박정후가 말했다.“관계를 회복하는 데 시간이 필요하다는 걸 알아요. 하지만 전 기다릴 수 있어요. 윤찬이가 저한테 기회만 준다면 형으로서 책임을 다할 거예요.”그는 확고한 눈빛으로 말했다. 박윤찬과의 거리감을 하루아침에 줄일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자리에서 일어난 그는 다시 창밖을 보았다. 꼭 사람들 속에서 누군가를 찾는 듯한 모습이었다.“전 반드시 윤찬이한테 찾아가야 해요.”박정후는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윤찬이가 저를 만나고 싶어 하든 말든 상관없이 알려주고 싶어요. 전 단 한순간도 윤찬이를 포기한 적 없다고 말이에요.”송재이는 박정후의 손을 잡아
설영준과 송재이는 서도재의 비웃음에도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저 빠르게 방 안의 상황을 살펴본 뒤 도망칠 길이나 반격할 기회가 없는지 파악했다.정체를 알 수 없는 인물은 조용히 숨어서 행동을 개시하려고 했다.설영준은 차갑게 피식 웃었다.“서도재, 이러면 네가 정말로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야? 네가 저지른 범죄는 이미 전부 드러났어. 밖엔 경찰들이 깔려 있다고.”서도재의 웃음이 사라지고 표정이 굳어졌지만 빠르게 다시 자신만만한 모습으로 돌아왔다.“경찰이 깔려 있다고? 넌 내가 아무 준비도 하지 않은 거로 보이나 봐? 이 아지트는 아주 단단하게 만들었거든. 너희들은 도망칠 수 없어.”송재이는 설영준이 방 한구석에 있는 창문에 힐끗 본 것을 발견하곤 바로 그의 의도를 눈치챘다.그녀는 일부러 서도재를 향해 목소리를 높였다.“그럼 우린 여기서 그쪽과 시간을 끌 수밖에 없겠네요. 그쪽 아지트가 먼저 무너질지 아니면 밖에 경찰들이 먼저 쓰러지게 될지 한 번 지켜보자고요.”서도재는 손을 들어 올리며 부하들에게 준비하라는 사인을 보냈다. 하지만 이때 방 안의 불빛이 꺼지더니 어둠이 내려앉았다.정체를 알 수 없는 인물은 확성기로 말했다.“꼼짝 마!”설영준과 송재이는 어둠 속에서 빠르게 창문이 있는 쪽으로 움직였다.설영준은 있는 힘껏 발로 창문을 깨버렸다. 두 사람은 거의 동시에 창문에서 뛰어내렸다. 바깥엔 이미 에어매트가 준비되어 있었다.서도재는 갑자기 어두워진 주위에 당황스러워하면서 미처 반응하지 못했다.불빛이 다시 켜졌을 땐 설영준과 송재이는 이미 사라졌다.그는 잔뜩 화가 난 목소리로 말했다.“쫓아가! 반드시 두 사람 내 앞에 잡아 와!”그러나 서도재의 부하들이 아지트에서 나가자마자 이미 밖을 포위하고 있는 경찰들을 발견하게 되었다.알고 보니 정체를 알 수 없는 인물이 미리 익명으로 경찰에 신고한 것이다.경찰은 확성기로 말했다.“안에 있는 사람 모두 들으세요. 당신들은 포위되었습니다. 당장 손에 든 무기를 내려놓고 항복하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