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영준의 차가운 시선에 박윤찬은 입술을 깨물었다.그도 설영준이 전부터 자신과 송재이를 의심하고 있다는 걸 눈치챘었다.그가 송재이에 대한 관심이 많을수록 설영준에게 덜미가 잡힐 것이다.방 안의 공기는 삽시간에 쥐죽은 듯 고요했다.둘이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을 때쯤, 갑자기 누군가의 노크 소리가 울려 퍼지며 그 조용한 분위기를 깨뜨렸다.그것은 바로 사인을 받으러 온 설영준의 비서였다.여진 비서는 설영준의 옆에 멀뚱히 서 있었다.그는 사무실에 들어서자마자 분위기가 이상함을 눈치챘다.수년간 설영준과 같이 일하면서 지낸지라 눈치를 살피는 건 그에게 있어 가장 기본적인 일이었다.그 순간의 설영준과 박윤찬은 모두 표정이 좋지 않았었다.사인을 받은 뒤 여비서가 나가려던 찰나, 박윤찬도 같이 일어섰다.“일이 있는걸 까먹었네? 먼저 가볼게요.”박윤찬은 더는 설영준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고 자리를 떠났다.설영준 또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박윤찬이 가는 모습만 바라보았다.어떤 일들은 일단 어긋나기 시작하면, 아무리 친구 사이라도 돌이킬 수 없을 것이다.어쨌든 몇 년 동안 서로 알고 지낸 사이라, 그 누구도 여자 한 명 때문에 우정을 잃고 싶지 않을 것이다.…박윤찬이 간 뒤 설영준은 혼자 사무실에 앉아 있었다.그날 호텔에서 송재이와 그런 일이 발생한 뒤 현재까지 불과 며칠 되지 않았다.설영준은 조금 전 박윤찬이 그녀를 만났을 때, 그녀의 두 눈이 붉게 부었다는 말이 떠올랐다. 아마도 그날 밤에 그녀가 집에 가서 울었을 것이다.그는 그녀가 여전히 자신에게 화가 나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설영준은 마음을 가라앉히고 자신이 충동적으로 행동했음을 인정했다.그녀가 그를 대할 때, 심하게 반항했었으니 말이다.하지만 그는 그녀가 거절하는 표정을 지을수록 더욱 화가 났다.아마 이런 부분에서 그는 여전히 나쁜 본성을 가지고 있는듯했다.설영준은 눈을 감고도 그의 곁에서 통곡하던 그녀의 모습이 떠올랐다.그는 마음이 산산조각이 나는 것만 같았다.…한편 남
송재이는 설영준에게서 답변이 올 거라는 기대는 하지 않았다.하지만 뜻밖에도 다음 날 아침, 그녀가 교사 연수회에 참석하러 갔을 때 그에게서 답장이 온 것이었다.[그 노트 우리 집 2층 서재에 있어. 나 기다리지 말고 직접 가서 가져도 돼.]그 말에 송재이는 두 눈을 반짝였다. 그녀가 기뻐하기도 전에 설영준에게서 또 한마디 답장이 왔다.[근데 최근에 엄마가 집에 있을 거야.]그 말에 송재이는 표정이 굳어졌다.설영준의 엄마 오서희는 그녀를 극도로 싫어했으니 말이다. 그녀가 2층 서재가 아닌 그 집 문 앞에만 서 있어도 아마 가장 빨리 그녀를 설 씨 집안 문 앞에서 쫓아내 버릴 것이다.그녀는 한참 동안 고민하다 그에게 답장을 보냈다.[그럼 올 때까지 기다릴게요.]송재이가 그를 기다리는 이유는 단지 그 노트를 가지기 위해서이다.하지만 설영준은 그녀의 그 문자 한마디에 왠지 모르게 가슴이 따뜻해지는 것만 같았다.…...수련회에 참가한 후, 그녀는 가장 먼저 남도로 돌아가지 않고 묘지에 갔다.그녀는 어머니를 위해 작은 꽃다발을 준비하고 조촐한 제사를 지냈다.그러다가 방금 퇴원한 도경욱의 건강 또한 조금 걱정되어 도정원에게 가서 뵙고 싶다고 문자를 보냈다.도경욱은 회복이 잘 되어 지금은 침대에서 내려올 수 있었다.게다가 가끔 아래층 동네 산책도 하고 햇볕도 쬐곤 했다.이번 만남에서, 송재이도 분명히 도경욱의 정신이 예전보다 많이 좋아졌다고 느꼈다.송재이가 온 것을 보고 도경욱 또한 엄청나게 기뻐했다.점심때, 도경욱, 도정원, 송재이가 같이 앉아 밥을 먹었다.왠지 송재이보다 그 두 사람의 감정이 더 복잡해 보였다.도정원은 때때로 송재이를 주시하고 있었고, 도경욱 또한 그에게 눈치를 주며 송재이에게 반찬을 집어주도록 했다.그들은 같이 밥을 먹으면서 이야기를 나누었다.도경욱은 친구가 소개한 국제 뇌 외과 의사 덕분에 이번에 빨리 회복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게다가 자신의 분야에서뿐만 아니라, 한의학 마사지에도 매우 능숙하다고 했다.“진
그 말에 송재이가 멈칫하더니 물잔을 내려놓았다. 그녀는 고개를 들어 차갑게 문예슬을 바라봤다.“네 연애에 내가 괜찮은 의견을 줬다면, 나 또한 지금쯤 솔로가 아니지 않을까?”그 말에 문예슬은 말문이 막혔다.문예슬은 송재이의 웃음기 없이 날카롭고 직설적인 모습에 등골이 오싹해지는 느낌을 받았다.하지만 포기할 생각은 전혀 없었다.그녀는 다시 미소를 머금으며 송재이의 옆에 앉았다.“내가 누구를 좋아하는지 왜 안 물어봐?”송재이는 아무 말 없이 자리에 앉아 천천히 물을 들이켰다.그녀가 전혀 대꾸하지 않으니 문예슬은 본인 입으로 이어서 답했다.“나 설영준 씨랑 잘해보려고.”문예슬이 말했다.“너도 알다시피 나 일찍 이부터 설영준 씨 좋아했잖아. 단지 예전에 너랑 그 사람... 하지만 지금은 너희 이미 헤어졌잖아? 내 주변에는 나랑 맞는 남자도 없고 우리 집에서도 내가 빨리 결혼하길 바라고 있어. 근데 난 그 사람 아니면 결혼할 생각이 없거든! 물론 설영준 씨가 여전히 너랑 만나고 있다면 나도 그사이 깰 마음은 없어. 굳이 친구의 남자를 뺏었다는 말은 듣고 싶지 않거든...”그녀가 구구절절 길게 말했지만, 그 말뜻인즉, 지금 송재이와 설영준이 아무런 사이도 아니니, 그녀가 당당하게 설영준을 꼬실 거라는 뜻이었다.이윽고 송재이가 천천히 고개를 돌리며 그녀에게 말했다.“이미 너 스스로 그 사람으로 결정을 했으면서, 굳이 내 의견은 왜 필요한데? 만약 내 의견이 그 사람과 관련해서 유용한 의견이었다면, 나랑 설영준 씨가 왜 굳이 헤어졌겠어?”사실 의견을 들으려 한다는 건 거짓이었고, 송재이를 도발하려는 게 문예슬의 진심이었다.하지만 송재이의 마음은 움직이지 않았고, 표정 또한 조금도 동요하지 않았다.문예슬은 속으로 화가 났다.그녀는 송재이가 그 말을 듣고 안색이 변하며, 자신에게 따질 것이라고 예상했었다.하지만 그녀의 반응이 이렇게 덤덤할 줄이야!그 행동은 오히려 문예슬을 한동안 말문이 막히게 했다.…...문예슬은 송재이가 모르는 새 어
남도로 돌아오고 나서 송재이는 여느 때와 다름없는 일상을 보냈다.단지 요즘 들어 야근이 잦아지면서 몸이 조금 피곤한 상태였다.모처럼 일찍 퇴근한 어느 날, 한의원을 지나치다가 간만에 스트레스 풀 겸 한방 마시지를 받으러 무작정 들어갔다.그녀는 흰색 가운을 입은 젊은 여자의 안내를 받아 프런트 데스크에서 접수를 마치고 진료실로 향했다.이내 간단한 상담을 받고 나서 다른 룸으로 옮겼다.한의사가 워낙 프로라서 손놀림이 예사롭지 않았고, 마시지를 이어가면서 그녀에게 불편한 건 없는지 수시로 체크했다.예전에 어머니가 병원에 입원했을 때 송재이는 마사지를 배운 적도 있었다.어설픈 실력을 갖춘 그녀보다 확실히 전문가가 더 믿음직스러웠다.시간이 길어질수록 잠이 솔솔 왔고, 마사지가 끝났을 때는 이미 한 시간이 지난 후였다.침대에서 일어난 그녀는 방금 마사지를 해줬던 한의사와 소소한 담소를 나누었다.하지만 이때, 아무런 예고도 없이 갑자기 아랫배에서 뜨끈한 열기가 느껴졌다.송재이는 잽싸게 배를 끌어안고 벌떡 일어났다.그와 동시에 뜨거운 열기도 점점 아래로 흘러내리는 듯싶었다.이는 너무나도 익숙한 느낌이었다.아직 생리할 때도 아니라서 무방비 상태이지 않은가?한의사는 아직 눈치채지 못하고 여전히 웃는 얼굴로 송재이에게 말을 걸었다.하지만 그녀의 안색은 점점 어두워지기 시작했다.그리고 치마를 끌어 내리며 발걸음을 옮겼는데...이런!고개를 돌리자마자 카키색 치마에 물든 빨간 핏자국을 발견했다.순간, 그녀는 눈물이 핑 돌았다.맞은편에 있던 한의사도 송재이의 복잡미묘한 표정을 보더니 이상한 낌새를 눈치채고는 가까이 다가가 나지막이 물었다.“왜요?”송재이의 이마에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다행히 상대방도 여자니까 충분히 이해할 거로 생각했다.이내 목소리를 낮추고 조심스레 말했다.“치마 뒤에...”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신 선생님, 혹시 제 서랍에 있는 출석부 보셨나요?”문밖에 다정하면서도 나긋나긋한 여자 목소리
다른 사람은 어리둥절하겠지만, 송재이는 그가 생리일이 앞당겨졌냐고 물어봤다는 걸 단번에 알아차렸다.아직도 머릿속이 혼란스러운지라 남자의 말투가 그녀를 조롱하는 건지 아니면 단순히 물어보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게다가 자신의 생리일을 설영준이 언제부터 기억하고 있단 말이지?순간 패닉에 빠진 송재이는 그 자리에 꼼짝도 안 하고 서서 초조한 얼굴로 입술만 꽉 깨물었다.“영준아, 아는 사람이야?”방금 문 앞에서 노크를 한 사람은 키가 크고 늘씬한 여의사인데, 20대 후반으로 용모가 단정하고 인상이 친절한 편이다.“응, 둘은 볼일 봐.”설영준은 눈길조차 주지 않고 시종일관 송재이만 뚫어져라 쳐다보았다.양은서는 의아하긴 했으나 두 남녀 사이에 흐르는 미묘한 기류를 눈치챘다.이내 방금 송재이에게 마사지해준 한의사에게 눈짓을 보냈다.“그럼 일단 자리를 피해줄까요? 출석부 찾는 것 좀 도와줘요.”“네.”두 사람은 눈치껏 빠져나갔고, 문까지 살짝 닫아주었다.방 안은 금세 정적이 이어졌다.송재이의 손이 무심코 엉덩이를 가렸고, 이내 설영준이 성큼성큼 다가가서 앞에 멈추어 섰다.마치 치부라도 들킨 듯 고개를 숙인 채 난감해하는 그녀의 모습을 보자 농담을 몇 마디 던지고 싶었지만 발갛게 물든 얼굴이 눈에 들어오는 순간 끝내 아무 말도 못 했다.그리고 외투를 벗어 어깨에 살포시 걸쳐주었다.슈트의 길이는 마침 그녀의 엉덩이를 덮을 정도였다.송재이의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고, 나지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고마워.”잠시 후, 비록 아무런 인기척이 없었지만 그녀를 바라보는 설영준의 시선이 고스란히 느껴졌다.그윽한 눈빛은 뜨거우면서도 집요했다.한참이 지나서야 송재이는 용기를 내어 고개를 들었고, 어색한 분위기를 깨기 위해 먼저 입을 열었다.“런던에 있는 거 아니야? 언제 돌아왔어?”“어제.”설영준이 무심하게 대답하고, 뒤집힌 옷깃을 흘긋 쳐다보더니 손을 뻗어 자연스럽게 정리해주려고 했다.하지만 가까이 다가가는 순간 마치 세균이라도 되는 듯 그녀는 저
두 남녀 사이에 흐르는 분위기를 보아하니 비록 대화를 많이 하거나 신체적인 스킨십이 있는 건 아니지만 예사롭지 않은 기운을 풍겼다.설영준이라는 남자는 아무 관계도 없는 사람한테 자기 옷을 벗어서 입혀줄 정도로 친절한 타입과 거리가 멀었다.물론 그에게 소중한 존재이면 얘기가 달랐다.양은서는 입꼬리를 살짝 올리고 눈치 빠르게 송재이에게 먼저 친한 척했다.송재이도 예의상 그녀와 악수했다.“만나서 반가워요, 전 송재이라고 하며 대표님의... 친구에요.”어쨌거나 산전수전을 겪어본 자로서 양은서는 아무 말 없이 의미심장하게 웃기만 했다....송재이는 데려다주겠다는 설영준의 제안을 거절했고, 설영준도 굳이 강요하지는 않았다.아까 그녀와 마주쳤을 때 찰나의 씁쓸함을 끝으로 나중에는 아무런 감정 변화가 없다시피 무미건조했다.차라리 이런 모습이 송재이에게 더욱 안도감을 주었다.그리고 한의원을 나와 택시를 타고 집으로 갔다.다음날, 그녀는 설영준에게 카톡을 보내 지금 가서 일정 노트를 챙겨도 되냐고 물었다.곧바로 설영준의 답장이 도착했다.[그래.]설영준이 보낸 주소에 따라 송재이는 그의 지사로 향했고, 차에서 내린 다음 빌딩 입구에 서 있었다.고개를 들어 올려다보니 무난하면서도 호화로운 고층 건물이 하늘을 찌를 듯싶었다.회사가 설립한 지 얼마 안 되었기에 직원 관리가 아직 미흡한 편이었다.하지만 이상하게도 프런트 직원은 그녀를 보자 친절하게 안내까지 해주었다.“송재이 씨, 엘리베이터는 이쪽에 있어요.”송재이는 어리둥절했다. 대체 이 사람들이 그녀를 어떻게 알고 있는 걸까?유일하게 납득이 갈만한 이유는 설영준이 미리 언급했다는 건데...하지만 얼굴까지 정확하게 알아보다니? 설마 사진이라도 들고 다니면서 생김새까지 공개한 건가?...엘리베이터에서 내린 송재이는 문이 열리자마자 여진을 마주쳤고, 역시나 그는 미소 짓는 얼굴로 인사를 건넸다.“송 선생님, 대표님의 사무실은 이쪽이에요.”그리고 여진을 따라 한 사무실 문 앞에 도착했고, 크게
송재이는 순간 넋을 잃었고, 대체 언제를 얘기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설영준이 입술을 꽉 깨물었고, 눈빛이 점차 싸늘하게 식어갔다.곧이어 설도영이 화장실에서 돌아왔고, 냉장고에서 방금 꺼낸 아이스크림 2개도 챙겼다.어차피 형은 단 거 안 좋아하기에 일부러 2개만 샀다.하지만 테이블에 내려놓자마자 설영준에게 빼앗겼다.“재이는 못 먹어.”영문을 알 수 없는 설도영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뒤늦게 정신을 차린 송재이는 미소를 쥐어짜 냈다.“응, 차가운 거 먹으면 안 돼.”이내 말을 마치고 몰래 설영준의 눈치를 살폈다.아직도 생리 터진 걸 기억하고 있다니, 어제 일을 떠올리자 그녀의 얼굴이 저도 모르게 화끈 달아올랐다.이때, 설영준의 시선도 그녀를 향했다.그리고 다시 질문을 이어갔다.“그날, 호텔에서 있었던 일 때문에 아직도 나한테 화났냐고.”물을 마시던 송재이는 자칫 뿜을 뻔했고, 무의식중으로 설도영을 바라보았다.지금 애 앞에서 무슨 소리를 하는 거지?비록 16살이 되었지만 어디까지나 미성년자이지 않은가?설도영은 여전히 멀뚱멀뚱한 얼굴로 아이스크림만 열심히 먹고 있었다.두 눈이 마주치는 순간 송재이는 재빨리 시선을 옮겼고, 곧이어 매서운 눈빛으로 남자를 노려보았다.“호텔 뭐? 이미 잊었어.”“그렇다면 화가 풀린 건가?”설영준은 당황한 그녀가 안중에도 없는 듯 말을 이어갔다.“지난번 박윤찬이 남도에 갔을 때 너랑 밥 먹다가 눈이 빨개진 걸 보고 전날에 분명 울었다고 확신하더니 나 때문이라고 생각했나 봐. 그래서 경주에 돌아오자마자 찾아와서 막 따졌다니까?”그는 송재이의 반응이 궁금한 나머지 일부러 한껏 부풀려서 말했다.송재이가 고개를 번쩍 들었다.비록 말투는 시종일관 무덤덤했고, 감정 기복을 찾아보기 힘들었지만 웃는 둥 마는 둥 하는 표정은 은근히 비꼬는 것 같기도 했다.이내 눈살을 살짝 찌푸리며 물었다.“너한테 따졌다고?”“응. 박윤찬이... 의리가 꽤 있나 봐.”그는 일부러 뜸을 들이며 말했고, 어떤 표현을 써야
송재이가 떠나고 나서 설영준은 굳이 따라가지 않았다.오히려 설도영이 옆에서 발을 동동 굴렀다.“형, 왜 또 선생님이랑 싸운 거예요?”사실 일부러 두 사람을 위해 기회를 마련해줬지만, 매번 설영준이 보기 좋게 망쳐버렸다.이제 자신도 두손 두발을 들었다.형이 워낙 성격이 변덕스러운 건 알고 있지만 송재이에 관한 일이라면 유난히 티가 났다.설도영은 안타까우면서도 어이가 없었다.설영준이 굳은 얼굴로 시종일관 침묵했다.하지만 입을 닫고 있으니 오히려 카리스마가 폭발했고 점점 더 다가가기 힘든 뉘앙스를 풍겼다.룸 안의 분위기는 금세 얼음장처럼 차가워졌다.설도영은 억지로 미소를 쥐어짜 내더니 속으로 구시렁거렸다.‘우리 형 이러다가 평생 혼자 살겠는데?’송재이는 레스토랑에서 나와 택시를 타고 집으로 돌아갔다.택시 안에서 오랜만에 되찾은 일정 노트를 펼쳐 보자 6개월 가까이 되는 스케줄이 빼곡히 적혀 있었다.물론 다른 사람에게 아무것도 아닐 수 있지만 그녀는 마침내 잃어버린 물건을 찾게 된 소중함이 느껴졌다.그리고 생각 없이 마지막 페이지까지 뒤적거렸다.이내 어지럽게 쓰인 ‘0’을 보고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그제야 설영준을 생각하면서 써 내려간 숫자라는 사실을 떠올렸다.0은 시작과 끝을 의미했다.대놓고 이름을 쓰면 행여나 속마음이라도 들킬까 봐 일부러 애매모호하게 숫자만 썼다.여태껏 일정 노트가 설영준한테 있었기에 이 페이지를 발견했는지 알 수가 없었다.그나마 선견지명이 있어 숫자 0만 쓴 게 천만다행이라고 생각했다.반면, 혹시라도 설영준이 유추해낸 건 아닌지 싶어 조마조마하기도 했다.설영준처럼 공사다망한 사람이 설령 발견했더라도 찬찬히 연구할 정도로 한가하지는 않겠지...?그녀는 속으로 묵묵히 위로할 수밖에 없었다....다음날 송재이는 교장실에 불려갔고, 교장이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송 선생, 혹시 출국할 생각은 없나?”무방비 상태의 송재이는 순간 넋을 잃더니 한참이 지나서야 대답했다.“네?”교장은 50이 넘은 중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