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재이는 그가 이렇게 오해할 줄 알았지만 뒤로 물러서지 않고 계속 하던 말을 했다.“난 옛날 일이 반복되는 게 싫어...”이제 겨우 옛날 감정에서 빠져나왔는데 지민건을 견제하는 모습, 남도에 다시 나타나 온밤 아픈 자신을 돌봐주는 이런 모습 때문에 다시 그에게 빠져들까 봐 두려웠다.누군가의 대체품이 되기도 싫었고, 희망에서 절망으로 떨어질 때의 감정을 다시 마주하고 싶지 않았다.설영준은 컨트롤하기도, 파악하기도 어려운 사람이었다.설영준이 차갑게 쳐다보자 송재이는 결국 고개를 숙이고 말았다.이제 막 잠에서 깨어난 송재이는 머리가 부스스하긴 했지만 생얼이 유난히 뽀얗고 예뻤다.하지만 누군가에게 괴롭힘을 당한 듯한 두려움과 억울함이 가득한 표정으로 하는 말은 다른 사람에게는 상처였다.“그러니까 내 앞에서 죽어가는 모습을 봐도 모른 척하라는 거지?”“응...”말투에서 분노를 느꼈지만 그저 고개를 끄덕일 뿐이다.깔끔하게 헤어지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다.가끔 보여주는 다정한 모습에 속아 넘어가지 않기로 했다.‘제발 나한테 잘해주지 마!’쿵!설영준은 문을 걷어차고 밖으로 나갔다.송재이는 그가 화났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뒤돌아 거실 소파로 가서 앉은 그녀는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오늘로써 설영준과의 인연이 끝인 것을 알고 있었다.온밤 보살핌을 받았지만 결국엔 쫓아낸 식이 되어버렸다.자존심이 강한 설영준은 다시는 송재이를 찾지 않을 수도 있었다....설영준이 떠나고, 이원희가 전화와서 같이 밥 먹자고 했다.박윤찬이 이원희의 이혼소송을 맡기로 했기 때문이다.송재이의 도움이 없었더라면 박윤찬과 같은 유명 변호사를 만날 일도 없었다.이원희는 송재이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전하기 위해 유명 레스토랑을 예약했다.오늘은 윤수아도 함께 했다.주말이라 학교에 가지 않아도 되었다.윤수아의 나이는 12살, 이원희와 10살 차이였다. 비록 법적으로는 모녀 사이였지만 멀리서 보면 자매와도 같았다.송재이는 메뉴를 연구하고 있는 이 둘을 멀리서
송재이는 정하현의 사진을 본 적이 있었다.설영준의 전 여자친구라 단번에 얼굴을 익혔다.정아현도 오서희와 설동준의 결혼기념일 파티에서 송재이의 사진을 본 적이 있었다.그 사진 속에서는 설영준이 그윽하게 송재이를 쳐다보고 있었다.여자는 감각적인 동물이라 눈빛 하나만으로도 느끼는 바가 많았다.심지어 송재이는 이목구비가 또렷한 사람이라 한 번 보고 잊혀질 얼굴이 아니었다.두 사람은 그렇게 몇 초 동안 서로를 바라보게 되었다.정아현과 말을 섞고 싶지 않은 송재이가 먼저 자연스럽게 시선을 피했지만 정아현이 이쪽으로 걸어왔다.하지만 이렇게 조심스럽게 물어볼 줄은 몰랐다.“혹시 송재이 씨 맞으세요?”송재이는 그제야 고개를 들어 의아한 표정으로 정아현을 쳐다보았다.정아현은 억지 미소를 지으면서 자연스럽게 송재이의 옆에 앉았다.간단한 인사를 주고받고, 정아현이 또 송재이를 쳐다보면서 말했다.“안녕하세요. 저는 정아현이라고 해요. 전에 경주에서 도영이한테 피아노를 가르쳐주던 선생님 맞죠?”송재이는 그녀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몰라 미간을 찌푸리고 말았다.그저 사진에서 보던 모습과 다르다는 느낌이 들었다.사진 속 정아현은 차마 다가가지 못할 정도로 도도해 보였지만 실물은 말괄량이 같은 것이 아예 다른 사람처럼 보였다.송재이가 아무 말도 하지 않자 정아현이 머쓱한지 머리를 긁으면서 또 물었다.“죄송한데 송재이 씨, 혹시 민효연 씨를 아세요?”‘민효연?’민효연은 경주에서 이름난 슈퍼우먼이었다.“왜요? 그쪽도 민 사모님이랑 아는 사이에요?”“그분 혹시 설영준 씨랑 아직 연락하고 지내세요?”정아현이 또 묻자 송재이는 잠깐 생각하더니 대답했다.“늘 사이가 좋았어요. 그분 따님이랑 하마터면 결혼할 뻔했는데 파혼했어도 사이가 나빠지지 않았어요. 사적에서도 만나고 업무적으로도 만나고...”송재이의 말이 끝나지도 않았는데 정아현이 한숨을 내쉬면서 말했다.“그래요. 천천히 드세요. 저는 이만 가볼게요.”그러더니 다급하게 이곳을 떠났다.그녀의 모습
분명 입은 웃고 있었지만 차가운 눈빛에 민효연은 그만 소름이 끼치고 말았다.전 여자친구라고 소개할 줄은 설영준도 생각하지 못했다.4날 전, 남도.설영준이 송재이 집에서 나오던 그날, 현관 입구.열이 내린 송재이는 갑자기 사람이 바뀌더니 자기 일에 신경 쓰지 말라고 했다.화가 난 설영준은 문을 걷어차고 나가려다 송재이가 이런 말을 할 줄 몰랐다.“난 누군가의 대체품이 되기 싫어. 난 너의 전 여자친구가 아니라 송재이라고.”대체품?무슨 말인지 모르는 설영준은 뒤돌아 물어보고 싶었지만 송재이가 이미 뒤돌아선 상태였다.송재이는 괴로운 표정으로 울음을 참으면서 말했다.“송재이는 나 하나뿐이야. 누군가의 대체품이 아니라고.”복잡미묘한 심정으로 경주로 돌아온 설영준은 그제야 누군가 송재이에게 정아현을 언급했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과연 누구일까?몇 날 며칠 생각해 보았지만 결국엔 가까운 곳에 있는 사람이 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이 순간 설영준은 민효연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상대는 연장자였지만 분위기만 봤을 때 설영준이 압도적이었다.늘 멘탈이 강하던 민효연은 결국 한숨을 내쉬고 말았다.“설 대표, 왜 나를 의심하는 거야? 난 그런 호박씨나 까고 다니는 사람이 아니야.”설영준이 의미심장한 표정을 하더니 냉랭하게 물었다.“그러면 단도직입적으로 물을게요. 아현이를 언급한 사람이 사장님이세요?”“아니라고!”민효연은 아주 신속히 대답했다.그녀는 자세를 고쳐잡더니 말했다.“송 선생님이 갑자기 경주를 떠날 줄은 나도 몰랐어. 설 대표, 설마 내가 중간에서 이간질했다고 의심하는 거야? 정말 내가 그랬다면 인제 와서 이럴 필요는 없잖아?”맞는 말이기도 했다.주현아와 정략결혼이 잡혔을 때도 송재이를 해고하지 않았던 그녀였다.만약 정말 정아현과의 일을 말하고 싶었다면 지금까지 기다리지 않았을 것이다.그러면 민효연이 아니라 누구일까?설영준은 또 다른 사람이 생각났다.그 사람은 바로 박윤찬이었다....민효연은 업무 얘기가 끝나고
주승아는 아직 살아있었다.이 사실을 주치의, 간호사 외에 민효연밖에 모르고 있었다.주정명, 주현아도 아직 주승아가 죽었다고 믿고 있었다.민효연이 모든 사람을 속이고 주승아가 죽은 것으로 꾸몄던 것은 사실 딸을 보호하기 위해서였다.병실에 누워있는 주승아는 아직도 젊어 보였다.그저 건강했을 때보다 살이 많이 빠진 것 같았다.산소호흡기를 하고 조용히 누워있는 모습은 마치 자고있는 것만 같았다.엄마인 민효인의 눈에는 그저 자고있는 것처럼 보였다.민효연은 침대 옆에 앉아 주승아의 손을 살며시 잡았다.손톱이 길어진 것을 보고 자연스럽게 서랍에서 손톱깎이를 꺼냈다.그녀는 딸의 손톱을 깎아주면서 말했다.“난 내 두 딸이 한 남자 때문에 불행해지는 것이 싫어. 결국 한 명은 병실에 누워있고, 한 명은 외국으로 떠났네? 난 이 나이에 왜 이렇게 고독하게 살아야 하는지 모르겠어. 우리 모두 이렇게 불행한데 그 새끼는 왜 저렇게 행복한 거지? 걱정하지 마. 엄마가 그 새끼 불행하게 만들어 줄게.”...설영준이 남도를 떠난 지 얼마 안 되었을 때, 지민건도 서주로 돌아갔다.송재이는 저번 그 일이 있은 뒤로 지민건이 다시는 찾아오지 않을 줄 알았다.그렇게 평범한 일상을 보내다 어느 하루 거울을 보다 얼굴에 여드름 같은 것이 난 것을 발견했다.병원에 가서 보였더니 의사 선생님은 별문제 없다고 했다.하지만 그래도 보기에는 흉측했다.송재이는 거울 속 자기 얼굴을 보더니 우울해져 한동안 집에만 있기로 했다. 그렇게 며칠 동안은 한 발짝도 집 밖을 나서지 않았다.맨날 집에서 배달이나 시켜 먹고, 심심하면 책을 보거나 영화를 감상했다.네 날 뒤, 얼굴이 조금 나아지자 선글라스와 마스크를 하고 밖에 나가서 상쾌한 공기를 마셔보기로 했다.그런데 내려가자마자 지민건을 만날 줄 몰랐다.정말 다시 찾아올 줄 몰랐다.송재이는 그와 말을 섞고 싶지 않아 일부러 피해 가려고 했다.하지만 아무리 꽁꽁 싸맸다고 해도 지민건은 단번에 그녀를 알아보았다.“송재이...”손
송재이가 서유리에게서 온 영상통화 요청을 보았다.남도에 온 이후로 둘의 연락은 카카오톡으로만 간간이 대화를 나누는 정도였고, 영상통화는 처음이었다. 무슨 일이라도 있나?그녀의 손가락이 미끄러져 수락 버튼을 눌렀고, 화면에 곧 서유리의 모습이 나타났다.“재이 씨, 오랜만이에요!” 서유리의 목소리는 부드럽고 명랑했지만 얼굴에 띤 미소는 다소 억지스러워 보였다.“무슨 일이에요?”송재이는 뭔가 이상함을 느끼고 물었다.“송재이, 대걸레가 어디 있어?”멀지 않은 욕실에서 갑자기 지민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그제서야 송재이는 그가 허락도 없이 집에 들어와 욕실에서 배수구를 뚫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지금 바닥은 온통 물바다였고 그는 대걸레를 찾고 있었다.송재이는 화가 났지만, 여전히 휴대폰을 들고 가까이 다가가 보니 욕실 바닥이 물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배수구는 뚫렸지만 일 처리가 영 깔끔하지 못했다!지민건은 평소에 밖에서 시간을 많이 보내는 편이라 이런 집안일은 원래 그의 적성에 맞지 않았다.송재이는 문득 오래전, 그녀와 설영준이 경주에 있는 그녀의 아파트에 살 때 설영준이 전구를 갈아준 일이 떠올랐다.비즈니스 세계에서 냉철하게 결단을 내리던 대표가 정작 양복을 벗고 셔츠 소매를 걷어올려 탄탄한 팔뚝을 드러내고 의자에 올라가 전구를 갈 때는 꽤나 솜씨 있어 보였다는 게 놀라웠다.이 순간 송재이는 생각했다. 만약 오늘 이 일을 설영준이 했다면 지민건보다 훨씬 더 능숙했을 거라고.“나가. 네 도움 필요 없어!”송재이는 본래 지민건이 무단으로 들어온 것에 대해 화가 나 있었는데, 이제 그가 욕실을 엉망으로 만든 것을 보고 그에게 말하는 어조도 좋지 않았다.하지만 지민건은 전혀 개의치 않는 듯 웃으며 말했다. “괜찮아, 이미 다 뚫었어. 대걸레가 어디 있는지만 알려줘. 내가 깨끗이 닦아줄게...”송재이와 지민건의 대화는 한 마디도 빠짐없이 전화기 너머의 서유리의 눈과 귀에 들어갔다.휴대폰 화면을 통해 서유리의 표정이 점점 어두워지는 게
송재이는 그저 쓴웃음만 지었다.그녀는 알고 있었다. 서유리가 자신과 설영준의 관계를 잘 모르고 있다는 것을. 조금이라도 알았다면 그런 말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당시 설영준이 송재이와 헤어질 때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었다. 아마도 그는 그녀를 떨쳐내고 싶어 안달이 났던 것 같았다.나중에 그가 남도에 온 것도 일 때문이었고, 포커 테이블에서 지민건에게 보인 공격적인 태도는 그저 그의 본성에 내재된 소유욕일 뿐이었다.하지만 이런 것들을 서유리에게 굳이 설명할 필요는 없었다.“됐어요. 난 남도에서 잘 지내고 있으니까 정말 좋아요.”이곳에서 송재이는 새 직장을 구하고, 새 친구들을 사귀고, 새로운 곳으로 이사했다. 그녀는 과거에 얽매이지 않고 계속해서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다.서유리는 송재이의 마음을 바꿀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그녀가 행복하다고 느끼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했다.두 사람은 전화로 잠시 더 이야기를 나눴다.송재이의 주의는 온통 서유리에게 쏠려 있었다.그녀는 자신의 뒤에서 분주히 움직이던 지민건이 TV 선반 옆 봉제인형들 사이에 몰래 숨겨진 카메라를 설치한 것을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송재이가 서유리와 통화를 마치고 고개를 돌리자, 지민건이 부엌에서 면 두 그릇을 들고 나오는 모습이 보였다.“대체 뭘 하려는 거야?”송재이는 지쳐 보였다. 지민건이 왜 이렇게 계속해서 그녀 앞에서 존재감을 과시하려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아직 병이 다 나은 게 아니잖아. 널 돌보는 게 당연하지.”지민건은 당연하다는 듯이 말하며 끓인 면을 식탁에 올려놓고 아주 당당하게 먹기 시작했다.식탁 위치는 TV 선반과 마주 보고 있었다. 송재이는 지금 자신과 지민건이 함께 있는 모습이 카메라에 찍히고 있다는 것을 전혀 알지 못했다.송재이는 지민건이 점점 더 되바라진다고 느꼈고, 마침내 참을 수 없어 그의 앞으로 가서 그의 손에서 젓가락을 거칠게 빼앗았다.“당장 나가지 않으면 경찰 부를 거야. 내가 들어오라고 했어? 배수구 뚫으라고 했어? 내 부엌을 쓰라고 했
설영준은 당연히 도정원이 송재이에 대해 이야기하려는 줄 알았다.하지만 뜻밖에도 그가 입을 열자마자 언급한 것은 민효연이었다.“며칠 전 연우를 데리고 정기적인 심리 상담을 받으러 갔는데, 마침 민 사장님도 외출하시는 걸 봤어요. 백화점에 쇼핑 가신다고 하셨는데, 내가 아는 한 그분은 쇼핑을 즐기는 분이 아니거든요. 게다가 그 백화점은 북쪽에 있는데, 그분 차는 남쪽으로 향하더라고요.”도정원은 술을 한 모금 마시고 계속 말했다. “아마 호기심 때문이었겠죠. 사장님과 거리를 두고 차를 몰고 따라갔더니, 그분 차가 미래 병원 앞에 멈추는 걸 봤어.”“그게 무슨 의미가 있어요?”“특별한 의미는 없어요. 그저 그분이 거짓말을 하셨다는 것, 병원에 누군가를 문병 가셨는데 그 환자의 신분을 아무에게도 알리고 싶지 않으신 거죠.”도정원은 아주 자연스러운 어조로 이 일을 설영준에게 말했다. 마치 정말 한가한 잡담을 나누는 것처럼.하지만 설영준은 여전히 예리하게 도정원의 말 속에 다른 뜻이 있음을 감지했다.도정원은 입이 가벼운 사람이 아니다. 그가 일부러 설영준을 불러내 술을 핑계 삼아 이 이야기를 하는 것은 분명 무언가 숨겨진 사정이 있을 것이다.그러나 그것이 무엇인지는 도정원의 다음 말을 기다려봐야 했다.하지만 도정원은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그는 술잔으로 얼굴 반쪽을 가렸지만, 그의 눈빛은 깊고 알 수 없는 무언가가 있어 사람을 헤아릴 수 없게 만들었다.두 사람은 술집을 나와 각자 대리 운전을 불렀다.문 앞에서 기다리는 동안 도정원이 갑자기 고개를 돌려 설영준을 보며 물었다. “요즘 송재이는 어떻게 지내요?”여전히 아주 무심한 어조였다. 마치 날씨를 묻는 것처럼.설영준은 잠시 멈칫하더니 억지 웃음을 지었다. “어떻게 지내는지 내가 어떻게 알겠어요? 이미 헤어졌는데!”도정원은 길게 “오” 하고 소리를 냈다. 그때 대리 기사가 도착했다.그는 차에 오르기 전 다시 한번 설영준을 돌아보며 말했다. “헤어졌으면 더 이상 얽히지 말아야죠. 설 대표
설영준은 USB를 받아들고 잠시 만지작거리다가 컴퓨터에 꽂았다.마우스를 몇 번 움직이자 소리는 없이 영상만 나타났다.여 비서는 여전히 책상 맞은편에 서 있었다. 그는 설영준의 눈빛이 점점 깊어지고, 눈썹을 꽉 찌푸리며, 얼굴색이 점점 더 안 좋아지는 것을 보았다.설영준은 노트북을 탁 닫고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대표님...”“먼저 나가.” 설영준의 어조에는 억누른 분노가 묻어났다.오랫동안 그를 모셔온 여 비서는 그 말투를 알아들을 수 있었다.USB에 무엇이 들어있는지 모르겠지만, 여 비서는 더 이상 묻지 않았다.대답하고 돌아서서 나갔다.문을 닫자 사무실에는 설영준 혼자만 남았다.몇 초간 침묵하다가 그는 의자를 다시 돌렸다.다시 컴퓨터를 열었다.화면에는 두 사람, 송재이와 지민건이 나타났다.배경은 아마도 그녀의 집 거실인 것 같았다. 그녀는 카메라를 등지고 있었고, 지민건도 옆모습만 보였다.하지만 그는 손을 뻗어 그녀를 안고 있었다. 각도 때문에 그의 얼굴이 그녀의 가슴에 가까워 보였고, 그는 얼굴을 살짝 들어 가엾은 강아지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영상은 단 몇 초만에 끝났다.송재이의 표정이나 그 후의 반응은 볼 수 없었다.하지만 이 장면만으로도 설영준의 눈썹은 꽉 찌푸려졌다.영상이 편집되었을 수도 있다고 그는 생각했다. 보낸 사람이 이 몇 초만 보여주는 이유는 아마도 들통날까 봐 그런 것일 수도 있다.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설영준은 손으로 이마를 짚고 가까이 다가가 화면의 몇 초짜리 장면을 반복해서 재생했다.그는 지민건이 송재이를 안은 손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두 사람의 몸이 그토록 가깝게, 그토록 가깝게 붙어있었다.그날 마작을 치고 난 뒤, 그가 남도에 없는 동안 지민건과 송재이가 다시 연락했다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었다.설영준은 머리 위가 초록색으로 변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그는 일어서서 뒤에 있는 의자를 발로 걷어차자 의자가 비틀거리며 넘어졌다!사무실 문 밖의 여 비서는 소리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