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영준이 집에 도착했을 때 송재이는 이미 자고 있었다.송재이는 자기가 잠을 못 잘 거로 생각했다. 설영준이 다른 여자와 함께 섹슈얼한 상태로 여자를 보면 참지 못할 거로 생각했기 때문이었다.그러나 불을 끄자, 그녀는 정신을 잃고 이내 잠에 빠졌다.깊게 잠든 송재이를 본 설영준은 마음속의 화가 더욱 불타올랐다.그녀를 깨우려고 걸어가는데 화장대 위에 놓인 가정용 의약 상자가 달빛에 비춰 보였다.그는 눈살을 찌푸리고 다가가 옆에 버려진 연고를 집어 들었다. 연고에는 타박상이라는 단어가 크게 적혀있었다.‘발을 삐었나?’설영준이 송재이의 잠든 옆모습을 바라보았다.침대 옆에 쪼그리고 앉은 그가 이불을 들추자 웅크리고 있는 희고 보드라운 발이 보였다.오른발에 붉은빛이 역력했다.그리고 다른 한쪽보다 훨씬 선명하게 부어있었다. 그래도 결백한 피부는 유혹적이었다.발가락은 조개처럼 약간의 곡선이 있었다.하얗고, 핑크빛이 놀고 따듯했다.전에는 그녀의 발이 이렇게 이쁜지 관심도 없었다.지금에야 그는 고대에 왜 여자의 발을 쉽게 보여줄 수 없었는지 이해가 됐다. 여자의 발에는 치명적인 유혹력이 있었다.그는 자신이 변태같이 느껴졌다. 달빛 아래에서 그녀의 발을 손에 품고 있으며 설레는 마음으로 주시하고 있으니 말이다.숨을 깊이 들이마시니 명치끝에 모여있던 기운이 절반 이상 사라진 것 같았다.그는 오늘 밤 그녀와 아래층에서 이야기를 나눈 남자가 방현수라는 것을 짐작하고 있었다.아마 그녀가 발을 삐어서 방현수가 부축해서 위층으로 올라온 것 같았다.그녀가 남자를 끌어들인 것이 아닐 것이다.아니, 분명 아니었다.저녁 내내 품고 있던 노여움은 그녀의 붉게 부어오른 발을 본 후에 정당한 분출구를 찾은 것 같았다. 화가 절반은 가라앉았다.설영준이 다시 그녀에게 이불을 덮어주었다.그가 몸을 일으켜 침실을 나갔다.시간이 너무 늦어 그는 다른 방에서 샤워하고 싶었다.거실을 지나다 그는 실수로 무릎을 탁자에 부딪혔다.무언가가 떨어져 나가며 둔톡한 소리를 냈다.
오월 첫날, 송재이의 음악회 공연이 있었다.그녀는 사전에 설영준에게 말하지 않았다. 송재이는 그날 설영준이 뜻밖에도 무대 아래에 앉아 있을 줄은 몰랐다.설영준이 투자자 중 한 사람이라는 사실은 그도 송재이에게 말한 적이 없었다.그의 옆에 앉아 있는 사람은 송 대표였다.송 대표는 설영준과 송재이의 사이를 너무 잘 알고 있기에 말도 잘 가려서 했다.음악회 날, 송재이는 우아한 연한 색 드레스를 입고 높지 않은 굽의 구두를 신고 화장도 연하게 했다.그녀는 처음으로 수석으로 음악회에 섰는데, 모든 과정은 침착하고 여유로웠다.설영준과 송 대표가 앉은 자리는 두 번째 줄 가운데였다. 무대가 잘 보이는 위치였다.“앞으로 재이 씨가 형수님이 되는 건가요?”송 대표가 농담 반, 진담 반 떠보면서 물었다.“그럴 수도.”설영준이 송재이를 바라보며 답했다.송재이는 처음으로 수석 피아니스트로 음악회에 참가했지만, 상당히 훌륭하게 공연을 이어 나갔다.지금 그녀는 단정하고 우아하며 분위기 있는 보습으로 옆 모습조차 온화하고 예뻤다.온 세상에서 설영준만이 그녀가 어젯밤 그의 아래에서 떨면서 욕망을 표출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은밀한 생각이 그를 즐거움과 흥분에 떨게 했다.“설 대표님, 정말 재이 씨랑 결혼하려고요?”송 대표가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물었다.설영준은 괜히 어깨를 으쓱였다.그녀가 아니면 안 될 것 같기도 했고 없어도 상관없을 것 같기도 한 태도였다.아무튼 그의 진심은 알 수 없었다.“모르죠. 재이가 하는 거 봐서요.”설영준이 또 답했다.시간은 하루하루 흘러갔지만, 설영준은 아직도 송재이에게서 선물을 받지 못했다.오히려 그는 박윤찬의 책상 위에서 개봉되지 않은 시계를 보았다.당시 설영준은 박윤찬과 할 얘기가 있어 예율 법률 사무소를 찾았다. 갔을 때 박윤찬은 사무실에 없어 먼저 앉아서 기다리라고 했다.설영준은 책상 맞은편에 앉아 핸드폰을 꺼내려고 할 때, 책상 위 서류 뭉치 옆에 익숙하고도 예쁜 선물 상자가 놓여 있는 것을 발견했다
설영준이 간 후, 박윤찬은 혼자 사무실에 앉아 있었다.그는 먼저 최근에 소송을 진행하고 있는 사건의 파일을 보고 나서 다시 책상 위에 있는 시계 박스에 시선을 돌렸다.그는 조금 전 했던 말들이 설영준에게 오해를 불러일으킨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시계를 봤을 때 설영준의 반응은 아무리 숨기려고 해도 이상함이 느낄 수 있었다.누가 봐도 질투였다.누가 그의 질투를 불러일으켰는지는 묻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이 시계는 이틀 전, 즉 그의 생일 전날 봄 송재이가 운전하며 그의 법률 사무소를 지날 때 건네준 것이었다. 송재이는 서유리가 보낸 선물이라고 했다.“유리 씨가 윤찬 씨에게 주는 생일 선물이에요. 유리 씨가 직접 전하기 쑥스럽다고 해서 제가 대신 전해드립니다. 유리 씨는 윤찬 씨 좋아하는 것 같아요. 윤찬 씨도 마음 있으시면 데이트 신청하고 싫으면 너무 깊게 빠지지 않도록 가능한 한 빨리 대답해 주세요.”그날, 송재이는 최대한 자연스럽게 행동하려고 했지만 감정적인 일에 낀 적이 없어서 여전히 조금 어색한 모습이었다.시계를 건네받은 박윤찬은 상당히 난처한 표정이었다. 그는 단 한 번도 서유리가 그에게 이성적인 마음을 품을 줄 몰랐다.박윤찬이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알겠습니다. 제가 직접 얘기할게요.”‘윤찬 씨의 반응을 보니, 유리 씨를 거절한 건가?’“윤찬 씨... 더 생각해 보지 않아도 괜찮겠어요? 두 분 모두 싱글이시잖아요.”송재이가 서유리 대신 아쉬움을 표했다.박윤찬이 허탈하게 웃었다.박윤찬은 웃을 때 예뻤다. 웃지 않는다면 올곧고 매서운 분위기가 풍겼지만, 웃을 때는 봄바람이 부는 듯 따듯한 모습이었다.“둘 다 싱글이라고 해서 꼭 연애해야 하는 건 아니잖아요.”박윤찬은 침착하게 대답했다.송재이의 말문이 막혔다.하지만 연애도 어디까지 개인의 자유였다. 그녀가 고개르 끄덕였다.“알겠어요. 유리 씨도 남자에게 먼저 대시하는 건 처음이니 조금 더 온화하게 거절해주세요.”송재이는 에둘러 서유리의 마음을 상하게 하지 말라고 표현
저녁, 송재이는 집에 돌아온 후 옷장 맨 아래에서 자신이 설영준에게 주려고 산 벨트를 꺼냈다.그날 다른 여자가 전화를 받지 않았더라면 그녀는 벌써 벨트를 선물했을 것이었다.생각하고 있는데 문밖에서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그녀는 설영준에게 스페어 키를 주었기에 그는 언제나 그녀의 집에 드나들 수 있었다.설영준이 현관에서 신발을 바꿔 신었다.문을 들어서자 송재이가 뒷짐을 진채 거실에 올곧이 나무처럼 서 있는 모습이 보였다.그는 그저 한 번 보고 외투를 벗으며 침실로 들어갔다.송재이의 아파트는 크지 않았지만, 방마다 욕실이 있었기에 샤워하러 갔을 것이다.하지만 그녀를 무시하는 듯한 행동은 그녀를 화나게 했다.송재이가 몸을 돌려 따라 들어갔다.“나 못 봤어? 밥 먹었어? 나한테 할 말 없어?”송재이가 연거푸 세 가지 질문을 했다. 하지만 그녀의 말투는 점점 더 약해졌다.설영준은 누가 봐도 멋있는 모습으로 거칠게 넥타이를 풀고 눈을 치켜든 채 그녀를 보았다.눈빛 하나만으로 송재이가 찔리게 했다.그녀는 자신이 무엇 때문에 찔리는지 몰랐다. 다른 여자와 함께 썸을 탄 사람은 설영준이었는데 말이다.그녀가 설영준 앞으로 다가갔다.“기회 줄게. 물어보고 싶은 게 있으면 지금 당장 물어봐. 묻지 않겠다면 앞으로도 쭉 물어보지 마.”말을 마친 그녀가 그의 반응을 살폈다.설영준은 손에 넥타이를 쥔 채 고개를 기울이며 말 한마디 없이 싸늘한 눈길로 그녀를 바라보았다.송재이는 그의 시선에 당황하며 눈을 희번덕거렸다. 그러고 몸을 돌려 말했다.“됐어. 그럼 한평생...”“한평생 뭐?”설영준이 갑자기 넥타이로 그녀를 감쌌다.그는 의도하지 않았지만, 무심결에 야한 모습을 연출했다.송재이는 설영준에게 등을 돌린 채로 서 있었고 넥타이는 공교롭게도 그녀의 풍만한 가슴 아래를 조이고 있었다.고개를 숙인 그녀에게 더 커진 듯한 가슴이 보였다.송재이가 갑자기 얼굴을 붉히며 발버둥 쳤다.“뭐 하는 짓이야. 얼른 놔!”설영준은 그녀의 말을 듣기는커녕
설영준은 원래 그저 송재이를 좀 놀리려고 한 것뿐이었다.그런데 생각지도 못한 몇 마디에 그녀는 오히려 그를 화나게 했다.설영준은 그녀를 놔주기는커녕 넥타이로 매듭을 지어 그녀를 완전히 속박했다.송재이가 발버둥 칠수록 그 매듭은 더욱 조여들었다.설영준은 송재이를 마치 병아리 들듯 들었다.그녀의 얼굴은 베개 쪽으로 향했고 그는 뒤에서 단추를 풀었다.송재이의 등에는 아주 매혹적인 작은 점 하나가 있었다. 특히 어두운 조명 아래에서 그녀는 마치 물고기처럼 몸을 뒤틀고 있어 그의 몸을 더욱 단단하게 만들었다.침대에 오른 후 그녀는 줄곧 욕을 하며 설영준에게 협조하지 않으려 했다.송재이는 지금까지 누구에게도 이런 대접을 받은 적이 없었다.격렬한 저항으로 인해 유난히 하얀 팔뚝 피부에 넥타이로 인한 붉은 자국이 생겼다.시각적으로 보면 더욱 마음이 동하는 그런 모습이었다.설영준은 뒤에서 그녀의 머리를 돌려 입을 막았다.송재이는 드디어 욕을 할 수도 없는 처지가 됐고 방 안에는 격렬한 움직임 소리와 물소리만이 들려왔다.행위가 끝난 후 숨이 가빠진 송재이는 그대로 침대에 푹 쓰러졌다.그녀의 몸 위에서 몸을 일으킨 설영준이 넥타이를 풀어 주었다.송쟁이는 지금 온몸에 나시 하나만 입고 있었다.그녀는 난감한 모습으로 나시 끈을 위로 당기며 처음으로 그를 피하려고 했다.송재이는 피하면서 화를 냈다.“이런 악취미가 있을 줄은 몰랐어! 정말 변태야!”설영준도 이제 막 숨을 고르고 있었다.송재이가 발로 그를 걷어차려고 했지만 설영준이 더 빠른 속도로 그녀의 발목을 움켜잡았다.이제야 속박을 벗어났는데 송재이는 다시 한번 설영준에 의해 움직임을 이어 나갈 수 없게 되었다.“놔!”그녀는 발버둥을 치며 그의 손에서 발을 빼려고 했다.그러나 설영준은 오히려 기뻐하는 것 같았다.초라한 모습으로 화를 내는 송재이의 모습은 오히려 설영준의 욕망을 자극했다.심지어 설영준은 환하게 웃으며 그녀의 다른 발목까지 잡았다.그는 두 손에 힘을 주어 송재이를 가까이 끌
평소 송재이는 기품 있고 우아한 스타일의 옷을 즐겨 입었지만 이렇게 꽁꽁 싸매고 다니지는 않았다.어젯밤 그의 악행이 아직도 생생해서 지금은 그를 보고 싶지도 않았다.“오늘 밤에는 장하 별장으로 돌아가!” 그녀는 말하며 그의 맞은편에 앉아 작은 만두를 하나 집었다.“좋아, 너도 같이 가자.” 그가 말했다.“난 안 갈 거야.”“그럼 내가 다시 여기 올게.” 그가 또 말했다.“설영준!” 송재이는 참지 못하고 젓가락을 탁 놓았다.이른 아침부터 그에게 화가 나다니, 그는 정말 능청맞았다!“내 이름이 맞는데, 무슨 일이라도 있나?” 설영준은 눈꺼풀을 살짝 들어 올리며 그렇게 무심하게 말했다.“네가 나를 의심한다면 나도 묻겠어. 그날 밤 네 전화를 받은 여자는 누구야?” 그녀는 당당하게 그를 노려보며 말했다.“술자리의 여자야. 그녀는 내가 앉자마자 나를 유혹하기 시작했어.” 그는 솔직하게 대답했다.솔직하다기보다는 자신만만하게 자랑하는 것 같아서 그녀는 화가 났다. 그는 일부러 도발하는 것 같았다.송재이는 이를 악물고 말했다. “설영준, 너 정말 더러워!”“내가 더럽다고? 너는 매일 다른 남자에게 꼬리 치면서 무슨 자격으로 나한테 그런 말을 해? 언젠가 내가 정말 다른 여자와 잤다 해도, 너의 정신적 바람이 먼저였으니 따질 자격 없어!”그는 원래 화를 내지 않으려고 했지만 이 순간에는 참지 못하고 약간의 화를 담아 말했다.송재이는 놀라서 눈을 동그랗게 뜨고 설영준을 바라보며 그가 “정신적 바람”이라는 글자를 어떻게 말할 수 있는지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쳐다보았다.그리고 그녀는 언제 매일 다른 남자에게 꼬리를 쳤던가? 언제 그런 적이 있었던가?하지만 그는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마치 그녀의 “범행”을 세세히 열거하는 것을 귀찮아하는 것처럼 보였다.어쨌든 아침부터 그녀는 그에게 기분이 상했다.......오후.그녀가 아직 근무 중일 때, 오랜만에 문예슬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그녀는 문예슬의 소식을 들은 지 한참이 지났다.한
“도대체 무슨 일인데 이렇게 신비롭게 굴어?” 송재이는 짜증이 났지만 문예슬을 거스를 수 없었다.그래서 저녁에 약속 장소에 갔다.룸에 도착했을 때, 문예슬뿐만 아니라 방현수도 있었다.그녀가 놀란 것은 방현수가 있다는 것뿐만 아니라 방현수와 문예슬이 언제 친해졌는지 였다.기억이 맞다면, 지난번 바에서 그 둘은 처음 만난 사이였다.그녀가 들어섰을 때 방현수는 안색이 좋지 않아 보였고 정확히 말하면 매우 우울해 보였으며 옆으로 고개를 돌린 채 문예슬의 말을 듣고 있었다.문예슬 역시 매우 심각한 표정으로 뭔가를 논의하고 있었다.그들은 송재이를 보자 방현수가 먼저 일어나서 인사를 건넸다.송재이는 문예슬을 향해 보았지만 예의상 고개를 끄덕였을 뿐, 담담한 표정이었다.문예슬은 송재이의 냉담함을 느끼고 약간 당황한 듯이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웨이터가 들어와 주문을 받은 후 송재이는 말했다. “도대체 무슨 일이세요?”방현수는 입술을 꾹 다물고 먼저 입을 열었다. “송 선생님, 저는 강등되었습니다. 재무팀 팀장 자리에서 내려왔고, 본사에 머물 수 없게 되었습니다. 다음 주에는 벨기에 지사로 파견될 예정입니다. 알고 지낸 사이로서 작별 인사를 하러 왔습니다.”송재이는 잠시 멍하니 있다가 천천히 말했다.“그래서... 내가 배웅해줘야 하는 겁니까?”“송재이, 왜 못 알아듣겠어. 방 팀장님이 갑자기 강등되고 국내에서 멀리 보내지게 된 건 누군가를 화나게 했기 때문이야. 그가 누구를 화나게 했는지는...” 문예슬이 갑자기 말을 끊고 방현수를 동정하는 눈빛으로 바라보았다.방현수는 입술을 깨물며 말했다. “송 선생님, 저는 국내에 돌봐야 할 어머니가 계십니다. 정말로 그렇게 먼 곳으로 가고 싶지 않습니다. 제발 제발 한 번만 설영준 대표님께 말씀해주시면 안 될까요?”마지막 문장은 거의 간절한 어조로 말했다.송재이는 가슴이 철렁했다.그녀는 이제야 그들이 자신을 만나자고 한 이유를 깨달았다.그녀는 약간 찡그리며 물었다. “당신 말은, 이번 인사 이동
“방 팀장님, 당신이 송재이를 좋아하지만 설영준 때문에 한 번도 표현하지 않았죠? 설영준이 뭔가 눈치 챈 건 아닐까요? 워낙 똑똑하니까요...”문예슬은 방현수가 계속해서 말하지 않자 초조해져서 방현수에게 고개를 돌려 작게 속삭였다.그러나 그녀가 작은 목소리로 말한 것이 송재이의 귀에 다 들어왔다.“뭐라고? 누구를 좋아한다고?”송재이는 매우 혼란스러웠다.방현수는 테이블 아래에서 주먹을 꽉 쥐고는 입을 열었다. “네, 아마 설영준이 저를 그렇게 대하는 건... 제가 송재이 선생님을 아주 좋아하기 때문일 거예요. 우리는 절대 가능성이 없다는 걸 알지만 그래서 애초에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았어요. 정말이에요. 설영준이 뭔가 오해한 거라면 제가 설명할 수 있어요...”이 말을 마치고 방현수는 고개를 숙였다.지금 자신의 모습이 너무 비참하게 느껴졌다.눈앞에는 자신이 아주 좋아하는 여자가 앉아 있는데 감히 다가가지도 못하고 관계를 분명히 해야 했다.그녀를 집까지 바래다주었을 때의 마음이 떠오르자 더욱 자신이 무능하다고 생각했다.주현아가 자신을 호텔로 유인했을 때는 아직 송재이를 지금처럼 좋아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 기회를 놓쳤어도 그저 담담히 실망했을 뿐 후회하지는 않았다.하지만 지금은 달랐다.일과 사랑 사이에서, 그는 처음으로 그 둘이 똑같이 중요하다고 느꼈다.단지 송재이가 자신을 좋아하지 않아서 일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하지만 그가 선택한 일마저도 좋아하는 여자에게 부탁해달라고 해야 했다.이렇게 생각하니 눈물이 날 것 같았다.다시 고개를 들었을 때, 그의 표정은 송재이를 깜짝 놀라게 했다.설마 울려고 하는 건 아니겠지?“방 선생님, 전혀 몰랐어요... 하지만 이 일이 정말 설영준이 한 건지 확실하지 않아요. 제가 그에게 전화해 볼까요?”송재이는 방현수가 자신을 좋아한다는 사실을 아직 완전히 받아들이지 못했다.하지만 지금 그의 눈이 빨개지고 매우 슬프고 억울해 보이는 모습에 마음이 약해졌다.그녀는 일이 방현수에게 얼마나 중요한지 알
통화가 종료된 후 설영준은 더 마음이 무거워졌다.그는 다시 한번 송재이 병실로 가 침대 끝에 앉았다. 그리곤 창백한 얼굴로 고요히 잠든 송재이의 얼굴을 보았다.설영준은 마치 송재이에게 자신이 한 말이 들리는 것처럼 나직하게 말했다.“재이야, 내 말 들려? 나 여기 있어. 네 옆에 있어.”그는 조심스럽게 송재이의 손을 잡으며 미약해진 체온을 느꼈다.“어쩌면 지금 내 말이 안 들릴 수도 있다는 걸 알아. 하지만 그것만은 알아줬으면 좋겠어. 내가 널 얼마나 사랑하는지 말이야.”설영준은 이내 심호흡을 하면서 감정을 갈무리하려고 애를 썼다.“우리 아직 함께 해보진 못한 일들이 많아. 혹시 기억해? 우리 그때 그랬었잖아. 함께 세계 곳곳에 있는 나라로 여행 가서 우리와 다른 사람들의 문화를 체험해 보고 그곳의 음식을 먹어보자고. 네가 지금 눈만 떠준다면 난 지금 당장 너랑 함께 그 떠날 거야.”이때 누군가 노크하더니 도정원이 들어왔다. 그는 아주 엄숙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영준 씨, 경찰들이 지금 출동했다고 하네요. 곧 도진욱의 거처로 들이닥칠 거예요.”설영준은 자리에서 일어난 뒤 고개를 끄덕였지만 여전히 아쉬움이 가득한 눈길로 송재이를 보았다.“정원 씨, 부탁 하나만 들어줄래요?”“말씀하세요. 제가 도울 수 있는 거면 도와드릴게요.”“저 대신 재이 좀 잘 챙겨주세요. 전 누구 만나러 가야 할 것 같아서 그래요. 그 사람이 아마 이 사건에 아주 큰 도움을 줄 수 있을 거예요.”“걱정하지 말고 가봐요. 여긴 제가 꼭 붙어 있을 테니까 아무도 재이를 건들지 못할 거예요.”설영준은 고마운 눈빛으로 도정원을 힐끗 보곤 몸을 돌려 병실을 나섰다.떠나기 전 설영준은 나직하게 송재이의 귓가에 대고 말했다.“재이야, 나 얼른 돌아올게. 그러니까 나 꼭 기다려줘야 해.”송재이의 병실에선 도정원만이 묵묵히 곁을 지키며 그녀가 깨어나길 기다리고 있었다. 설영준은 이미 진상을 찾으러 떠났다.그는 오랜 친구를 만나러 갈 생각이다. 그 친구는 의학 부문에서 아
그러자 보안 요원이 말했다.“여긴 병원 CCTV를 관리하는 곳입니다. 외부인에게 함부로 영상을 보여줄 수 없습니다.”설영준은 확고한 어투로 말했다.“전 송재이 씨 약혼자입니다. 전 반드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아야겠으니 협조 부탁드립니다.”보안 요원은 다소 망설이더니 결국 그에게 영상을 보여주었다.영상 속에서 설영준은 세세한 부분까지 발견했다. 송재이가 쓰러지기 전 도진욱은 물잔을 송재이에게 건넸다. 그 순간 설영준은 의심을 하게 되었다.같은 시각 도정원은 병실에서 쪽지 한 장을 발견했다. 쪽지엔 갈겨 쓴 글씨가 있었다. 약물의 이름과 사용량이 적힌 쪽지였다. 그는 발견하자마자 바로 설영준에게도 알렸다.두 사람은 각자 발견한 것을 공유하곤 분석하기 시작했다. 설영준은 도진욱이 송재이에게 건넨 물잔과 쪽지 위에 쓴 약물의 명칭을 보았다. 그는 순간 무언가 깨닫게 되었다.송재이가 검사실로 들어간 뒤 설영준과 도정원은 각자 단서를 찾으러 움직였기에 설영준은 다시 돌아와 송재이를 기다려 보기로 했다. 그러나 도정원은 쪽지에 적힌 약물 이름을 보면서 조사하기 시작했다.설영준은 초조한 얼굴로 검사실 밖에서 송재이를 기다렸다.“재이야, 꼭 버텨야 해. 내가 여기서 기다리고 있을게.”시간이 1분 1초 흘러갔다. 설영준은 마음이 점점 더 무거워졌다. 머릿속에 송재이의 미소와 웃음소리, 그리고 함께 보냈던 즐거운 시간들이 떠올랐다. 그는 속으로 기도했다. 송재이가 무사히 나오길 바라며 말이다.설영준은 혼잣말로 중얼거렸다.“재이야,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를 기억해? 네가 그때 엄청 찬란한 미소를 지었었어. 네 찬란한 웃음이 온통 어둠뿐이던 내 세상을 환하게 빛내주었지. 그때 널 지켜주겠다고 다짐했었는데... 지금은...”바로 이때 문이 스르륵 열리고 의사가 나왔다. 설영준은 바로 다가가 물었다.“선생님, 재이는 어때요?”“저희가 최선을 다해 독이 퍼지는 것을 막고 있습니다. 하지만 너무 희귀한 독에 중독된 거라 독 분석하고 해독제를 만드는 데 시간이
송재이의 말은 청천벽력이었다. 도정원과 도진욱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수사관이 빠르게 다가와 상태를 살폈다. 그도 사태의 심각성을 알게 되어 얼른 입을 열었다.“저희가 바로 의사를 불러오겠습니다.”도정원은 빠르게 긴급 호출 벨을 누르면서 송재이를 부축한 채 옆에 있던 의자에 조심스럽게 앉혔다.의자에 앉히자마자 도정원은 초조한 마음으로 송재이를 어깨에 기대게 했다.“재이야, 조금만 버텨줘. 의사가 금방 도착할 거야.”도진욱은 다소 복잡한 감정이 담긴 얼굴로 송재이를 보았다. 속으로 뭔가 갈등하고 있는 듯했다.그러더니 혼잣말로 중얼거렸다.“독에 중독됐다고? 그럴 리가... 난 아무것도 하지 않았어...”예리한 수사관은 그런 도진욱의 상태를 눈치채고 바로 심문했다.“도진욱 씨, 이 상황에 관해 설명하세요. 송재이 씨가 왜 갑자기 중독된 거죠?”도진욱의 안색은 더 창백해졌다. 그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전... 전 정말로 모릅니다. 제가 왜 제 조카를 죽이겠습니까?”바로 이때, 의사와 간호사가 병실로 들어오며 송재이를 살펴보았다.의사가 엄숙하게 말했다.“아무래도 정밀 검사를 해봐야 알 것 같습니다. 어떤 독에 중독되었는지 확인할 수 없습니다.”송재이는 급하게 검사받으러 갔다. 도정원과 도진욱이 그 뒤를 따라갔다. 수사관은 묵묵히 이 상황을 지켜보았다. 머릿속에 이미 사건의 윤곽이 그려지기 시작했다.도정원이 밖에서 초조한 마음으로 송재이를 기다렸다. 그러나 도진욱은 홀로 구석으로 간 뒤 손을 주머니에 찔러넣은 채 안에 있는 핸드폰만 불안한 마음으로 만지작거렸다.그러더니 낮은 목소리로 누군가와 통화했다.“나야. 일이 복잡하게 됐어. 송재이가 갑자기 독에 중독되어서 경찰이 개입하게 되었어. 나도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인지 몰라. 하지만 우린 지금 반드시 움직여야 해.”전화기 너머로 잔뜩 가라앉은 목소리가 들려왔다.“우리 계획을 수정할 필요가 있군요. 일단 절대 증거를 찾게 해서는 안 돼요. 안 그러면 우리 모두 끝장나게 되니까
화가 난 도정원은 이를 빠득 갈았다.“그게 무슨 의미죠? 설마 아버지 병이 당신과 연관이 있다는 건가요?”정체 모를 남자는 웃음을 터뜨렸다.“곧 알게 될 거야. 참, 도진욱. 가문의 이익을 위해 네 동생 행복을 희생했었지? 이젠 네가 희생할 차례야.”전화는 그렇게 끊겼다. 송재이와 도정원은 고개를 돌려 도진욱을 보며 설명을 바랐다.그러자 도진욱이 말했다.“난... 난 정말 몰랐어. 그때 일이 이렇게 될 줄은 몰랐다고. 그때 내가 그런 선택을 한 건 인정해. 하지만 전부 가문을 위해서였어. 난 너희들을 해칠 생각한 적 없다고.”송재이는 무력감이 들었다. 거짓과 배신으로 가득한 이 가족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몰랐다.절망에 빠진 송재이가 이마를 짚으며 말했다.“우리 이제 어떻게 해야 해요? 대체 누굴 믿어야 하는 거예요?”도정원도 다소 괴로운 눈빛을 하고 있었다. 그는 주먹을 꽉 움켜쥐며 감정을 갈무리하려고 애를 썼다.“가문의 이익을 위해서 그러셨다고요. 우리 도씨 가문이 언제부터 이익에만 눈멀어 가족을 버리는 가문이 된 거죠?”도진욱의 얼굴엔 죄책감이 가득했다. 그는 힘이 없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정원아, 그땐 내 잘못이 맞아. 나도 인정해. 난 내 선택으로 우리 가문이 더 힘이 있는 가문이 될 줄 알았고 가족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어. 난... 난 정말 미안하구나.”옆에서 듣고 있던 송재이는 막막하면서도 불안했다.“두 사람은 전부 제 가족이에요. 전 대체 누굴 믿어야 할지 모르겠다고요.”송재이의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그 순간 문밖에서 다급한 발걸음 소리가 들려오면서 이 숨 막히는 침묵을 깨버렸다.세 사람은 동시에 고개를 돌려 문 쪽을 보았다. 제복을 입은 남자들이 엄숙한 얼굴로 들어왔다.“안녕하세요. 저희는 경찰서 수사과에서 나왔습니다. 몇 가지 당신들이 조사에 협조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도정원과 도진욱은 서로 마주 보았다. 그들은 알고 있었다. 이것이 진상을 알아내는 데 중요한 조사라는 것을“네, 협조하겠습니다.
전화기 너머로 침묵이 흘렀다. 그리고 이내 짙은 한숨 소리가 들렸다.도진욱이 입을 열었다.“그래, 알았다. 너희들한테... 해줄 얘기가 있단다. 네 아버지의 과거와 어머니에 관한 얘기란다.”도정원과 송재이는 서로 눈빛을 주고받았다. 두 사람은 의아하면서도 초조했다.“큰아버지,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뭔가 알고 계신 거예요?”도진욱은 미간을 찌푸렸다.“곧 도착하니 얼굴을 보면서 얘기하자꾸나. 이 일은 내가 너희들 얼굴을 보면서 직접 말해줘야 할 것 같구나.”전화를 끊은 후 도정원과 송재이는 생각에 잠겼다. 두 사람은 도진욱이 어떤 얘기를 들려줄지 몰랐고 도진욱이 그들에게 해줄 얘기가 그들 가족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지도 몰랐다.얼마 지나지 않아 도진욱이 병원에 도착했다. 그의 얼굴엔 초조함과 죄책감이 담겨 있었다.그는 송재이와 도정원의 얼굴을 보더니 심호흡을 한 후 천천히 입을 열었다.“지금 마음이 얼마나 혼란스러운지 알고 있단다. 하지만 더는 너희에게 숨길 수 없을 것 같구나. 너희들이 모르는 사실은 더 많단다.”송재이는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머리가 어질거렸다.“큰아버지,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저희가 아직도 모르는 비밀이 있는 건가요?”“그래, 그때 당시 나와 네 엄마는 확실히 그런 사이였었지. 하지만 그건 다 지나간 일이란다. 나중에 난 그 삼각관계에 빠지기로 했고 네 엄마랑 네 아빠를 이어주기로 했었지. 그때의 난 그게 옳은 일이라고 생각했단다. 지금까지도 말이야.”송재이와 도정원은 충격받은 얼굴로 도진욱을 보았다. 그가 꺼낸 얘기는 도경욱이 꺼낸 얘기보다 더 충격적이었다.“큰아버지, 정말로... 정말로 그러셨어요?”“나도 알고 있단다. 내가 무슨 말을 하든 과거의 일을 없던 일로 할 수는 없겠지. 하지만 난 아직 살아 있을 때 너희들에게 진실을 말해주고 싶구나.”바로 이때 병실 안에서는 긴급 호출 벨이 울렸다.의사와 간호사들이 급하게 병실로 달려왔고 송재이와 도정원도 얼른 병실 안으로 들어갔다.의사는 그들을 보더니 고
송재이는 얼른 도경욱의 손을 꼭 잡았다. 눈물이 그녀의 눈 앞을 가렸다.옆에서 두 사람의 모습을 보던 도정원도 눈시울이 붉어졌다.병실 안에는 무거운 분위기가 감돌았다. 그저 일정한 의료 기기 소리만 들려오며 시간이 흘렀다.도경욱은 송재이를 빤히 보았다. 그의 두 눈엔 아쉬움과 죄책감만 남아 있었다.자신에게 남은 시간이 얼마 없다는 것을 그는 알고 있었다. 하지만 죽기 전 꼭 해야 할 말이 있었다.미약한 목소리지만 그는 확고한 어투로 말했다.“재이야, 내 딸. 너에게 꼭 해줄 말이 있단다. 네 출생의 비밀과 네 엄마에 관한 얘기야.”송재이는 고개를 들었다. 눈물 그렁그렁 맺힌 그녀는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아빠,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제 엄마가 왜요?”도경욱은 숨을 깊이 들이쉬었다. 마치 온몸의 힘을 모으고 있는 것 같았다. 깊이 숨겨둔 진실을 정확하게 말해주기 위해서 말이다.“그때 네 엄마, 그러니까 서지원의 약혼 상대는 내 형이었단다. 네 큰아버지지. 하지만 운명이 장난을 쳤지. 서지원이... 네 엄마가 진심으로 사랑한 사람은 나였단다.”송재이는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너무도 충격적인 진실이었다. 그녀는 단 한 번도 자신의 출생에 이런 비밀이 숨겨져 있을 거라곤 상상도 못 했다.그녀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어...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었던 거죠?”도정원도 놀란 표정인 것을 보아 처음 알게 된 사실인 것 같았다.도경욱은 다소 괴로운 표정을 지었다.“네가 이 사실을 받아들이기 힘들어한다는 것을 나도 안다. 그렇지만 전부 사실이란다. 난 지원이를 단 한 번도 강요한 적 없었어. 우리는 서로 진심으로 사랑했어. 하지만 그때는 이런 추문을 받아들이지 않던 시절이었지.”송재이는 마음이 복잡했다. 이렇게까지 혼란스러운 감정은 처음이었다.그녀는 이렇게나 갑작스러운 사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몰랐다.“아빠, 그럼 대체 왜 일찍 말씀해 주지 않으신 거예요? 왜 그동안 숨기고 계셨던 거예요?”도경욱은 덜덜 떨리는 손으로 송
박정후는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다소 고통스러운 기억을 떠올리고 있는 듯한 눈빛으로 박윤찬을 보았다.“그때 내가 한 여자를 사랑하게 되었어. 아주 똑똑하고 예쁘고 착한 사람이었지. 나한테 아주 특별한 사람이기도 했어. 하지만 어머니가... 어머니가 우리 사이를 반대하셨어.”박윤찬은 미간을 찌푸렸다. 여전히 이해가 가지 않았다.“어머니가 왜 반대하셨는데? 어머니는 아무 이유도 없이 그러실 분이 아니잖아.”박정후가 대답했다.“처음엔 나도 이해하지 못했어. 그때의 난 분명 어머니가 그 여자에 대해 오해하고 있다고 생각했었지. 또 어쩌면 내가 사랑놀이에 푹 빠져 일을 제대로 하지 않을까 봐 걱정하시는 건 줄 알았어. 하지만 나중에 알고 보니 전혀 아니었어.”박윤찬은 초조하게 한숨을 내쉬었다.“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건데? 어머니가 아무 이유도 없이 반대하실 분은 아니야.”박정후의 낮게 깔린 목소리에선 슬픔이 느껴졌다.“그 여자는 성이 임 씨였어. 임씨 가문은 우리 성씨 가문과 오래전부터 원한이 있었지. 이 원한은 우리가 태어나기 전부터 있었던 거라 저주와도 같은 것이었어. 두 가문의 후대에도 아주 큰 영향을 주고 있어.”박윤찬은 놀란 모습이었다.“난 임씨 가문에 대해 들어본 적 단 한 번도 없었어. 어머니도 나한테 한 번도 말씀하신 적 없었다고.”박정후가 말했다.“어머니는 이 원한이 시간이 지나면서 잊히길 바라셨던 거야. 하지만 사실상 잊히지 않았지. 임씨 가문과 성씨 가문은 지난 세대에서도 심각한 충돌이 있었어. 두 가문은 사업 경쟁을 벌이다가 더 틀어지게 되었지.”박윤찬은 이해가 되지 않았다.“사업 경쟁이라니? 그게 언제 일인데 아직도 신경 쓰고 있다는 거야?”“그래, 하지만 지난번 경쟁에서 임씨 가문은 파산당하게 되었지. 그 가문 어르신도 결국 그때 세상을 뜨게 되신 거야. 임씨 가문에서는 우리 성씨 가문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경쟁을 벌여 그런 비극을 만든 것으로 생각하고 있어.”박윤찬은 한참 침묵하다가 입을 열었다.“그러
박정후는 시선을 돌려 창밖을 내다보았다. 바쁘게 움직이는 사람들을 보더니 생각에 잠겨 버렸다.그는 나직하게 말했다.“제가 멀리 떠나기로 결정한 건 저와 윤찬이 사이에... 오해가 있기 때문이에요. 저랑 윤찬이 사이에 갈등이 있었는데 전 제가 원하는 것을 이루기 위해 윤찬이 곁을 떠났죠. 하지만 혈연관계는 영원히 끊을 수 없는 거잖아요.”묵묵히 박정후가 하는 얘기를 듣고 있던 송재이는 박정후의 안타까움과 죄책감을 고스란히 느꼈다.송재이가 말했다.“가족 사이에 확실히 갈등이 생길 수도 있죠. 하지만 제일 중요한 건 서로 항상 응원하고 있음을 알고 있는 것이죠.”설영준은 진지한 얼굴로 박정후를 보았다.“정후 씨는 정의를 위해, 동생을 위해 이미 많은 것을 했으니 윤찬 씨도 이해해줄 거예요.”장주영도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맞아요. 정후 씨가 한 모든 것을 박윤찬 씨가 알게 된다면 분명 아주 자랑스러워할 거예요.”박정후는 한숨을 내쉬었다. 고개를 돌려 확고함이 가득한 눈빛으로 그들을 보았다.“그랬으면 좋겠네요. 이번에 돌아온 것도 윤찬이에게 뭐라도 도움이 되어주고 싶어서였어요. 그리고 윤찬이와 화해할 기회도 있었으면 좋겠네요.”그들을 도와준 정체 모를 인물은 바로 박정후였다.그는 마음이 너무도 복잡했다.이번 일로 동생과 무너진 관계를 회복하고 다시 화목하게 지내고 싶었다.박정후가 말했다.“관계를 회복하는 데 시간이 필요하다는 걸 알아요. 하지만 전 기다릴 수 있어요. 윤찬이가 저한테 기회만 준다면 형으로서 책임을 다할 거예요.”그는 확고한 눈빛으로 말했다. 박윤찬과의 거리감을 하루아침에 줄일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자리에서 일어난 그는 다시 창밖을 보았다. 꼭 사람들 속에서 누군가를 찾는 듯한 모습이었다.“전 반드시 윤찬이한테 찾아가야 해요.”박정후는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윤찬이가 저를 만나고 싶어 하든 말든 상관없이 알려주고 싶어요. 전 단 한순간도 윤찬이를 포기한 적 없다고 말이에요.”송재이는 박정후의 손을 잡아
설영준과 송재이는 서도재의 비웃음에도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저 빠르게 방 안의 상황을 살펴본 뒤 도망칠 길이나 반격할 기회가 없는지 파악했다.정체를 알 수 없는 인물은 조용히 숨어서 행동을 개시하려고 했다.설영준은 차갑게 피식 웃었다.“서도재, 이러면 네가 정말로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야? 네가 저지른 범죄는 이미 전부 드러났어. 밖엔 경찰들이 깔려 있다고.”서도재의 웃음이 사라지고 표정이 굳어졌지만 빠르게 다시 자신만만한 모습으로 돌아왔다.“경찰이 깔려 있다고? 넌 내가 아무 준비도 하지 않은 거로 보이나 봐? 이 아지트는 아주 단단하게 만들었거든. 너희들은 도망칠 수 없어.”송재이는 설영준이 방 한구석에 있는 창문에 힐끗 본 것을 발견하곤 바로 그의 의도를 눈치챘다.그녀는 일부러 서도재를 향해 목소리를 높였다.“그럼 우린 여기서 그쪽과 시간을 끌 수밖에 없겠네요. 그쪽 아지트가 먼저 무너질지 아니면 밖에 경찰들이 먼저 쓰러지게 될지 한 번 지켜보자고요.”서도재는 손을 들어 올리며 부하들에게 준비하라는 사인을 보냈다. 하지만 이때 방 안의 불빛이 꺼지더니 어둠이 내려앉았다.정체를 알 수 없는 인물은 확성기로 말했다.“꼼짝 마!”설영준과 송재이는 어둠 속에서 빠르게 창문이 있는 쪽으로 움직였다.설영준은 있는 힘껏 발로 창문을 깨버렸다. 두 사람은 거의 동시에 창문에서 뛰어내렸다. 바깥엔 이미 에어매트가 준비되어 있었다.서도재는 갑자기 어두워진 주위에 당황스러워하면서 미처 반응하지 못했다.불빛이 다시 켜졌을 땐 설영준과 송재이는 이미 사라졌다.그는 잔뜩 화가 난 목소리로 말했다.“쫓아가! 반드시 두 사람 내 앞에 잡아 와!”그러나 서도재의 부하들이 아지트에서 나가자마자 이미 밖을 포위하고 있는 경찰들을 발견하게 되었다.알고 보니 정체를 알 수 없는 인물이 미리 익명으로 경찰에 신고한 것이다.경찰은 확성기로 말했다.“안에 있는 사람 모두 들으세요. 당신들은 포위되었습니다. 당장 손에 든 무기를 내려놓고 항복하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