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록 모자를 쓰고 있는 하지현이었지만, 송재이는 한눈에 그를 알아봤다.하지현 반대편에 앉은 남자는 지난번 술집에서 만난 남자였다. 몸매도 생김새도 나쁘지 않았지만 잔을 들 때 치켜든 새끼손가락이 그의 분위기를 망쳤다.하지현만 계속 얘기하고 있었는데 감정이 좀 격해진 것 같았다.그 키 큰 남자는 손에 든 찻잔을 내려놓으며 더 이상 참을 수 없다는 듯이 몸을 일으켜 가려고 했다. 하지만 하지현이 갑자기 그 남자의 손을 잡더니 불쌍한 눈으로 애원했다.그 남자는 혐오스럽게 그를 뿌리쳤다.그 모습을 본 송재이는 화가 났다.하지현 때문에 유은정이 감염될 뻔했었다.그 며칠 동안 조마조마한 줄타기 같은 생활을 했고 인터넷에까지 알려져 네티즌들에게 폭언을 들었다. 모든 원인은 그에게 있었다.예전의 그녀는 하지현을 존중했다. 어쨌든 절친의 약혼자였으니 말이다.다시 만나게 된 그는 이제 원수나 다름없었다.그녀는 별생각 없이 손에 주스 잔을 들고 하지현을 향해 빠르게 다가갔다.“하지현!”송재이가 그의 이름을 불렀다.아직 키 큰 남자와 대화하고 있던 하지현이 누군가가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본능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맞은편에서 다가오던 송재이가 망설임 없이 물을 뿌렸다.“뭐 하는 짓이야! 미쳤어?”얼음까지 넣은 주스는 특별히 차가웠다. 얼굴에 끼얹힌 차가운 주스로 인하여 하지현은 저도 모르게 몸을 떨었다.송재이 임을 확인한 하지현의 표정이 변했다.“너! 나는...”한참이나 말을 더듬는 하지현을 본 송재이가 냉랭하게 웃으며 손을 들어 그의 뺨을 때렸다.“에이즈 확진 판정까지 받은 당신인데 지금 누구한테 미쳤다고 하는 거야? 너는 은정이를 망쳤어, 알아?”송재이가 옆에 있던 키 큰 남자를 힐긋 쳐다보고 하지현을 가리키며 말했다.“이 사람이랑 스킨십 할 수 있겠어요? 남자 여자 가리지 않는 나쁜 새끼라는 거 몰라요?”그녀는 이전 폭로된 사진이 그가 사람을 찾아 일부러 찍었다고 의심하고 있었다.하지현을 향한 송재이의 적대심은 매우 컸다.유은정에게
하지현이 비틀비틀 물러서 두 손으로 허겁지겁 중요 부위를 감쌌다.조금 전까지 하지현에게 시달리던 남자는 그가 부른 송재이의 이름을 듣고 그녀를 몇 번 더 훑어보았다.하지현이 또다시 송재이에게 덤벼들려고 할 때 그 남자는 하지현의 무릎을 걷어찼다.“끝은 없어? 여자까지 때리다니 그 얼굴은 더 이상 들고 다닐 생각이 없는 거야?”얼굴을 반쯤 가린 송재이가 의아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하지현의 새 애인인 줄 알았는데 그녀의 편에 설 줄은 몰랐다.하지만 송재이는 고마워하지 않았다. 지금은 하지현과 관련된 사람이라면 생리적으로 거부감을 느꼈다.그 남자는 하지현과 관계를 깔끔히 정리하고 싶은 듯 핸드폰을 꺼냈다.“이런 사람은 경찰서에 보내지 않으면 교훈이 없어요.”말을 마친 그 남자가 바로 경찰서에 전화를 걸었다.전화를 끊은 그 남자는 미안한 표정으로 송재이에게 말했다.“저는 이런 쓰레기하고 아무런 관계도 아닙니다. 필요하시다면 경찰에 증언해 드릴 수 있습니다.”송재이와 서유리가 경찰서에 앉아 있었다.송재이의 입가에는 반창고가 붙어있었다.워낙 하얗고 부드러운 피부여서 뺨을 맞은 얼굴은 빨갛게 달아올라 더욱 가련해 보였다.서유리의 전화를 받은 박윤찬은 잘못들은 줄 알았다.“송재이가 싸움이요? 정말이에요?”서유리는 농담할 기분이 아니었다. 그녀는 급하게 전화로 사건의 자초지종을 얘기해 주었다.하지현 얘기를 할 때 그녀는 화가 나서 울 것 같은 모습이었다.40분 후 박윤찬이 경찰서에 도착했다.오는 길에 그는 설영준에게 전화를 걸었다.아직 회사에 있는 그는 연락을 받고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박윤찬과 설영준은 거의 동시에 경찰서에 나타났다.얼마 지나지 않아 유은정도 왔다.유은정은 이미 하지현의 연락처와 카카오톡을 모두 삭제한 상태였다.하지만 하지현은 경찰서에 들어서면서 가장 먼저 그녀가 떠올랐다.경찰의 전화를 받은 유은정은 하지현의 이름을 전해 듣고는 그저 잔영이 지워지지 않는 사람이구나 싶었다.하지만 하지현이 송재이와 싸웠다는
비록 이름을 밝히며 대화를 나누지 않았지만 그녀는 설영준이 누구를 얘기하는지 알고 있었다.하지현을 미워하는 송재이였지만 그녀는 그저 마음으로 미워할 뿐이었다.그저 묵묵히 기도하며 언제 하느님께서 천둥으로 그에게 천벌으 줬으면 하는 바람이었다.하지만 설영준은 그녀와 달랐다.그는 행동파였다.그는 하느님의 천벌을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직접 움직여 해결하고 있었다.그가 자신의 부하들에게 일을 시킬 때 얼굴에는 잔인함이 떠올랐다. 비록 설영준이 직접 자신의 모습을 볼 수는 없었지만, 송재이는 볼 수 있었다.통화를 마친 설영준이 몸을 돌리자 멀지 않은 곳에 서 있는 송재이를 발견했다. 그녀는 다소 어리둥절하고 의아한 표정으로 그를 쳐다보고 있었다.넋이 나간 그가 핸드폰을 내려놓고 막 다가서려고 한 순간, 송재이는 이미 돌아서서 먼저 침실로 돌아갔다.쾅하는 문소리와 함께 방문이 닫혔다.왜 그런지 모르겠지만, 송재이는 지금 이 순간 설영준이 조금 두렵게 느껴졌다.설영준도 송재이가 그를 피한다는 것을 느꼈다.하지만 그도 이유를 몰랐다.‘생리도 지났을 텐데, 호르몬이랑은 상관없지 않나?’잠깐은 그도 날이 서 있는 송재이를 마주하고 싶지 않았다.하여 그는 거실에 혼자 앉아 소파 밑에서 그 책을 꺼내 들었다.송재이가 보고 있는 소설을 공교롭게도 박윤찬도 보고 있었다.그는 이게 우연이라고 믿지 않았다.어떤 감정은 떠벌리려고 하지 않고 억누르다 보면 저절로 사라질 수도 있었지만, 반대로 밝혀지면 오히려 그 감정을 더 부추기는 경우도 있었다.전에 그는 송재이와 도정원 사이에 무슨 썸이 있는 줄 알았었다. 나중에 오해였다는 사실에 비로소 한숨을 돌렸는데 지금 또 새로운 연적이 생겼다. 그리고 그 사람은 그와도 아주 가까운 사이였다.설영준은 남자가 꼬이는 여자를 좋아하지 않았다. 하지만 송재이는 자주 그런 생각이 들게 했다.떠보고 싶은 말들은 그의 목수멍에 수없이 막혀있었다.말을 꺼내면 그녀가 슬퍼하고, 마음 상하고 엉뚱한 생각을 할
송재이는 아직 설영준에게 선물을 준 적이 없었다. 어젯밤 그가 직접 얘기했으니 선물을 주기로 마음먹은 그녀였다.‘뭘 선물하면 좋아할까?’마침 서유리가 송재이에게 쇼핑하러 가자고 했다.서유리는 박윤찬에게 줄 생일 선물을 고르고 싶어 했다.송재이도 이미 그녀 대신 선물을 전해주겠다고 약속했었다.“아직 여자 친구도 아닌데 이렇게 자상해요?”송재이는 놀리는 것을 멈출 수 없었다.“아, 정말! 아직 걸음마도 못 뗐어요! 얼른 가서 선물 고르는 거 도와줘요.”서유리가 송재이를 이끌고 근처 대우 백화점으로 향했다. 두 사람은 대화를 나누며 쇼핑을 이어갔다.서유리는 연애에 있어서 신생아였다. 그녀의 지략가는 하필이면 그녀와 별 차이 없는 송재이였다.송재이한테 의견을 구하는 건 맹인에게 길을 묻는 것과 다름없었다.하지만 송재이는 최선을 다해 서유리와 함께 분석했다.“지금까지 보면 유리 씨는 아직 박 변호사님을 짝사랑하는 단계예요. 선물은 너무 직접적이면 안 될 것 같고 평소에도 쓸 수 있으면서 너무 친밀해 보이지 않는 게 좋을 것 같아요.”서유리가 고개를 돌리자, 맞은편에 있는 시계 매장이 눈에 띄었다.보아하니 그녀는 목표를 정한 듯했다.송재이는 여전히 설영준에게 무슨 선물을 줄지 고민하고 있었다.송재이도 평소 설영준이 시계를 차는 습관이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그가 착용하는 시계는 억 단위여서 선물하고 싶어도 그럴 능력이 안 됐다.서유리가 매장 직원과 대화를 나눌 때 송재이는 한편에 서서 두리번거리고 있었다.그녀의 시선이 갑자기 옆집으로 향했다. 그곳에는 벨트를 파는 CN 프리미엄 전문점이 있었다.예전 어머니한테 들었던 말이 생각났다. 여자가 남자한테 벨트를 사준다는 건 상대방을 묶어두겠다는 뜻이라고 했다.송재이의 어머니는 나중에 사랑하는 사람이 생기거든 벨트를 선물하라고 하셨었다.하지만 그녀의 기억 속에 엄마는 돌아가신 아버지에게 벨트를 선물한 적이 없었다.전에는 신경을 안 썼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그 남자가 엄마의 진정한 사랑
송재이는 절뚝거리며 걸었다.방현수는 그녀의 이런 모습을 보며 마음속으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친절함이 치밀어 올랐다.그가 본 그녀는 항상 한 치의 빈틈도 없이 완벽한 모습이었다.이렇게 유치하고 앳되고 사랑스러운 모습은 처음으로 보는 것이었다.오늘 방현수가 친구의 부탁을 수락한 가장 큰 원인이 이 아파트에 송재이가 살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는 운을 시험해 보고 싶었다.하늘은 정말 그의 바람을 들어주어 예상치 못하게 만나게 되었다.“가시죠, 제가 부축해 드리겠습니다.”방현수가 말했다.송재이는 거절하고 싶었지만, 방현수의 당당한 눈빛은 정말 평범한 친구의 관심에서 비롯된 것 같았다.절룩거리며 아픔을 느끼는 상태에서 다시 거절한다면 억지를 부리는 것처럼 보일 것 같았다.그녀는 고개를 들어 집 창문을 보았다.11층이었는데 불이 안 켜진 걸 보니 설영준은 아직 안 돌아온 것 같았다.“그럼 부탁 좀 할게요.”송재이가 답했다.방현수가 웃으며 송재이를 부축해 천천히 건물 입구로 향했다.송재이는 멀지 않은 곳에 차 한 대가 계속 서 있다는 사실을 몰랐다.그들의 뒷모습이 사라지자 라이트가 켜졌다. 차 안에 있던 사람은 담배꽁초를 창문 밖으로 버리고 차를 돌렸다.설영준은 송재이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몰랐다. 그가 본 모습은 송재이와 방현수가 아래층에 서서 얘기를 나누다가 방현수가 그녀를 부축하는 모습이었고, 송재이가 고개를 들고 있는 모습이었다.밤바람이 그녀의 머리카락을 흩날렸다.그녀가 손을 뻗어 머리를 귀 뒤로 찔러 넣었는데, 그 모습이 매우 매력적이었다.다른 남자 앞에서 그녀는 유혹적이었다.설영준은 그 순간 방현수가 어떤 생각을 했는지 몰랐고 알고 싶지도 않았다.방금 어떤 사람이 저녁 먹자고 불렀지만 그는 거절했다.하지만 지금은 또다시 마음이 바뀌었다.엘리베이터까지 부축된 그녀는 몸을 돌려 말했다.“오늘 고마워요, 현수 씨.”그녀는 엘리베이터까지 그의 도움을 받겠다는 뜻으로 한 말이었다.방현수는 그저 웃어 보였다.그는 이 여자
송재이는 그녀가 산 벨트를 빨리 착용한 설영준의 모습이 보고 싶었다.하지만 오늘 밤, 그는 줄곧 돌아오지 않았다.샤워하고 나온 송재이가 머리도 말리고 화장품도 바르고 침대 옆에 앉아서 지루하게 있었다.옆으로 누운 그녀가 설영준에게 전화를 걸었다.그녀는 남자의 일거수일투족을 조사하는 여자가 아니어서 지금까지 한 번도 먼저 연락한 적이 없었다. 이번이 처음이었다.핸드폰이 두 번 울리고 상대편에서 전화를 받았다. 하지만 상대편에서는 달콤한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여보세요? 누구세요?”송재이가 어안이 벙벙해진 채 다시 핸드폰 번호를 확인했다. 그녀는 자신이 잘못 건 것이 아님을 확신했다.송재이는 설영준에게 연락한 것이었지만 받은 사람은 여자였다.‘내가 좋은 시간을 방해한 건가?’“여보세요. 설영준 핸드폰 아닌가요?”“아, 설 대표님이요...?”여자가 간드러진 목소리로 물었다.같은 여자가 들어도 온몸이 찌릿해 났다.“대표님께서 취해서 오늘 밤은 못 돌아갈 것 같아요. 아니면, 지금 데리러 와도 돼요.”여자가 말했다.송재이가 입술을 짓씹었다. 그녀는 상대방의 말투에 약간의 자랑과 도발이 섞여 있다는 것을 알아챘다.그녀는 상대방의 말을 알아듣지 못한 듯 담담하게 답했다.“취했으면 푹 재우세요. 그럼 부탁할게요. 내일 다시 얘기해요.”그녀는 상대방의 도발에 넘어갈 생각이 없었다.말을 마친 그녀가 바로 전화를 끊었다.그녀는 설영준과 같은 위치에 있는 사람에게 술을 권하는 사람이 있고, 설영준이 인사불성이 될 정도로 취한다는 것을 전혀 믿지 않았다.정말 취했다고 해도 송재이는 누군가가 그가 취했을 때를 틈타 핸드폰을 건드리는 것을 받아준다는 사실을 믿지 않았다. 앞으로 생황을 더 이어 나갈 생각이 없는 사람이라면 그럴 수도 있을 것이었다.유일한 가능성은 그가 맨정신인 상태에 누군가에게 지시하여 전화를 받게 했다는 것이었다.송재이는 그가 왜 이런 행동을 하는지 이해되지 않았다.하지만 그의 전화를 다른 여자가 받았으니 지금 그의 곁에
설영준이 집에 도착했을 때 송재이는 이미 자고 있었다.송재이는 자기가 잠을 못 잘 거로 생각했다. 설영준이 다른 여자와 함께 섹슈얼한 상태로 여자를 보면 참지 못할 거로 생각했기 때문이었다.그러나 불을 끄자, 그녀는 정신을 잃고 이내 잠에 빠졌다.깊게 잠든 송재이를 본 설영준은 마음속의 화가 더욱 불타올랐다.그녀를 깨우려고 걸어가는데 화장대 위에 놓인 가정용 의약 상자가 달빛에 비춰 보였다.그는 눈살을 찌푸리고 다가가 옆에 버려진 연고를 집어 들었다. 연고에는 타박상이라는 단어가 크게 적혀있었다.‘발을 삐었나?’설영준이 송재이의 잠든 옆모습을 바라보았다.침대 옆에 쪼그리고 앉은 그가 이불을 들추자 웅크리고 있는 희고 보드라운 발이 보였다.오른발에 붉은빛이 역력했다.그리고 다른 한쪽보다 훨씬 선명하게 부어있었다. 그래도 결백한 피부는 유혹적이었다.발가락은 조개처럼 약간의 곡선이 있었다.하얗고, 핑크빛이 놀고 따듯했다.전에는 그녀의 발이 이렇게 이쁜지 관심도 없었다.지금에야 그는 고대에 왜 여자의 발을 쉽게 보여줄 수 없었는지 이해가 됐다. 여자의 발에는 치명적인 유혹력이 있었다.그는 자신이 변태같이 느껴졌다. 달빛 아래에서 그녀의 발을 손에 품고 있으며 설레는 마음으로 주시하고 있으니 말이다.숨을 깊이 들이마시니 명치끝에 모여있던 기운이 절반 이상 사라진 것 같았다.그는 오늘 밤 그녀와 아래층에서 이야기를 나눈 남자가 방현수라는 것을 짐작하고 있었다.아마 그녀가 발을 삐어서 방현수가 부축해서 위층으로 올라온 것 같았다.그녀가 남자를 끌어들인 것이 아닐 것이다.아니, 분명 아니었다.저녁 내내 품고 있던 노여움은 그녀의 붉게 부어오른 발을 본 후에 정당한 분출구를 찾은 것 같았다. 화가 절반은 가라앉았다.설영준이 다시 그녀에게 이불을 덮어주었다.그가 몸을 일으켜 침실을 나갔다.시간이 너무 늦어 그는 다른 방에서 샤워하고 싶었다.거실을 지나다 그는 실수로 무릎을 탁자에 부딪혔다.무언가가 떨어져 나가며 둔톡한 소리를 냈다.
오월 첫날, 송재이의 음악회 공연이 있었다.그녀는 사전에 설영준에게 말하지 않았다. 송재이는 그날 설영준이 뜻밖에도 무대 아래에 앉아 있을 줄은 몰랐다.설영준이 투자자 중 한 사람이라는 사실은 그도 송재이에게 말한 적이 없었다.그의 옆에 앉아 있는 사람은 송 대표였다.송 대표는 설영준과 송재이의 사이를 너무 잘 알고 있기에 말도 잘 가려서 했다.음악회 날, 송재이는 우아한 연한 색 드레스를 입고 높지 않은 굽의 구두를 신고 화장도 연하게 했다.그녀는 처음으로 수석으로 음악회에 섰는데, 모든 과정은 침착하고 여유로웠다.설영준과 송 대표가 앉은 자리는 두 번째 줄 가운데였다. 무대가 잘 보이는 위치였다.“앞으로 재이 씨가 형수님이 되는 건가요?”송 대표가 농담 반, 진담 반 떠보면서 물었다.“그럴 수도.”설영준이 송재이를 바라보며 답했다.송재이는 처음으로 수석 피아니스트로 음악회에 참가했지만, 상당히 훌륭하게 공연을 이어 나갔다.지금 그녀는 단정하고 우아하며 분위기 있는 보습으로 옆 모습조차 온화하고 예뻤다.온 세상에서 설영준만이 그녀가 어젯밤 그의 아래에서 떨면서 욕망을 표출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은밀한 생각이 그를 즐거움과 흥분에 떨게 했다.“설 대표님, 정말 재이 씨랑 결혼하려고요?”송 대표가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물었다.설영준은 괜히 어깨를 으쓱였다.그녀가 아니면 안 될 것 같기도 했고 없어도 상관없을 것 같기도 한 태도였다.아무튼 그의 진심은 알 수 없었다.“모르죠. 재이가 하는 거 봐서요.”설영준이 또 답했다.시간은 하루하루 흘러갔지만, 설영준은 아직도 송재이에게서 선물을 받지 못했다.오히려 그는 박윤찬의 책상 위에서 개봉되지 않은 시계를 보았다.당시 설영준은 박윤찬과 할 얘기가 있어 예율 법률 사무소를 찾았다. 갔을 때 박윤찬은 사무실에 없어 먼저 앉아서 기다리라고 했다.설영준은 책상 맞은편에 앉아 핸드폰을 꺼내려고 할 때, 책상 위 서류 뭉치 옆에 익숙하고도 예쁜 선물 상자가 놓여 있는 것을 발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