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재이는 어느덧 설영준이 해주는 요리에 적응됐다.처음엔 놀랍고 어쩔 바를 몰랐지만 이젠 습관이 돼버렸다.두 사람은 식탁 앞에 마주 앉았다.송재이는 비록 일반 가정 출신이지만 엄마가 밥상 예절을 잘 가르쳐줘서 항상 예의 바르고 다소곳하게 임한다.밥 먹을 때 쩝쩝거리는 법이 없고 국물을 마실 때도 매우 조용하게 마신다.그녀는 설영준이 해준 미트볼을 유독 좋아한다.한 그릇 다 먹고 모자라서 또 더 먹으려 했다.이때 마침 설영준이 젓가락을 들고 그녀가 집은 미트볼을 채갔다.송재이는 그가 일부러 이러는 게 아니란 걸 알아채고 더 말하지 않았다.설영준은 방금 집은 미트볼을 그녀의 앞접시에 내려놓았다.“괜찮아. 너 먹어!”“누가 먹든 다 똑같아.”설영준이 답했다.이건 마치 두 사람이 하나가 될 정도로 친밀해져서 미트볼도 누가 먹든 차이가 없고 따질 필요도 없다는 것처럼 들렸다.송재이는 머리를 더 푹 숙였다.설영준은 시선을 올리고 그녀를 쳐다봤다.그녀 또한 이 남자의 시선이 느껴졌다.오늘 아침 침대 시트에 피를 묻힌 건 너무 창피한 일이라 그에게 보이고 싶지 않았다.하지만 설영준이 하필 발견해버렸다.송재이는 치부를 들킨 것처럼 한순간 그를 마주할 용기가 없었다.그녀가 줄곧 피하기만 하니 설영준도 분노가 슬슬 차올랐다.그는 이젠 둘 사이가 달라진 줄 알았다. 적어도 연애의 느낌이 조금은 난다고 여겼다.송재이가 그를 더 믿어주고 기대게 될 줄 알았다.하지만 모든 건 설영준의 착각이었다.그녀는 결국 이 남자를 남처럼 대하고 있다!오늘 원래 집에서 그녀와 함께 있어 주려 했는데 문득 기분이 잡쳤다.마침 여 비서가 기업 인수 건으로 보고드릴 내용이 있다고 하니 설영준은 회사에 다녀왔다.그가 떠난 후 송재이도 한숨을 돌렸다....그제야 어제 박윤찬 엄마에게 두통을 치료하는 약 처방을 찾아드리겠다고 약속한 일이 떠올랐다. 하마터면 까마득히 잊을 뻔했다.그녀는 재빨리 일어나 침실에 돌아가서 물건을 한바탕 뒤졌다.무릇 엄마의 물건이라면
요즘 오케스트라 동료들은 다들 연지수와 대화하길 꺼린다.연지수는 아예 입을 꾹 틀어막거나 말만 꺼냈다 하면 화약을 삼킨 듯 닥치는 대로 상대를 저격한다.다들 몇 번 당한 후 그녀를 피해 다니기 시작했다.연지수가 지나간 후에야 서유리가 긴 한숨을 내쉬었다.“어제 있잖아요. 연지수 씨가 글쎄 수석으로 참석한 연주회에서 연속 몇 번이나 음정을 틀린 거 있죠. 오늘 오전에 단장님 사무실로 불려 가서 호되게 혼났대요. 서 전무님 면을 봐서 수석 자리를 겨우 지켜내는 거예요...”송재이는 알겠다며 답했다.다른 사람들은 연지수가 지금 잠시 컨디션이 저조하다고 여길 테지만 송재이는 잘 알고 있다. 그녀가 이렇게 된 건 분명 서도재와 연관이 있다는 것을.애초에 서도재의 등장은 연지수에게 구세주가 나타난 것과 같았고 탄탄대로를 걸을 줄 알았지만 지금은 되레 발목을 잡히는 듯한 느낌이 든다.또 혹은 두 남녀가 서로 물어뜯고 서로를 지치게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송재이는 이런 일에 일절 평가하지 않는다!...유은정과 함께 병원에 다녀온 이후로 송재이는 매일 틈만 나면 그녀에게 카톡을 보냈다.유은정이 우울감에 빠져들어 어리석은 생각이라도 할까 봐 짬짬이 그녀를 다독여주고 있다.유은정도 처음엔 정말 하늘이 무너질 것 같은 절망감에 빠졌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송재이가 보낸 카톡을 일일이 읽으며 서서히 마음의 문이 열렸다.점심시간, 1층 식당에서 밥 먹을 때 송재이는 유은정이 보낸 카톡을 받았다.[내일 오전이면 병원에 검진 결과 받으러 갈 수 있겠네. 죽을 만큼 긴장할 줄 알았는데, 감히 현실을 마주하지 못할 줄 알았는데, 그거 알아 재이야? 나 지금은 그렇게 나쁜 일이라고 생각되진 않아. 왜냐하면 너라는 소중한 친구가 항상 날 신경 써주고 있으니까. 인간의 운명은 다 정해져 있어. 결과가 어떻든 하늘이 내려준 최상의 선택이라고 생각하고 받아들일래.]말미에 하트 이모티콘까지 추가했다.유은정의 말투와 컨디션 모두 전과 훨씬 다른 모습이었다.송재이는 너무 감격스럽
서유리가 화장실에서 걸어 나왔다.창가 쪽에 앉은 박윤찬을 본 순간 그녀는 눈도 깜빡이지 않고 심장이 콩닥콩닥 뛰기 시작했다.서유리는 웃음을 참으며 그들을 향해 스스럼없이 걸어갔다.세 사람은 소불고기, 녹두전, 갈치 조림, 보르쉬 이렇게 네 가지 음식을 주문하고 마무리로 잡곡밥 3인분을 시켰다.다들 이 식당에서 음식을 맛있게 한다는데 송재이는 늘 설영준이 한 것보다 별로였다.그녀는 음식을 두 점 집고 국을 반 그릇 마셨는데 저도 몰래 설영준의 요리가 그리워졌다...서유리는 식사 내내 긴장감에 떨었고 이따금 맞은편에 앉은 박윤찬을 힐끔거렸다.그녀는 박윤찬을 처음 만났던 때가 떠올랐다.병원 문 앞에서 그의 등판에 한 줄기 빛이 감돌았고 눈부신 햇살처럼 한눈에 쏙 들어왔다.너무 잘생기고 정직하며 제스처마다 진중함과 듬직한 분위기가 차 넘쳤다.이번에 하도 송재이 덕분에 다시 만났을 뿐 아마 평생 박윤찬에게 먼저 데이트 신청을 못 했을 것이다.송재이는 서유리의 속셈을 알아채고는 존재감을 낮추고 묵묵히 밥만 먹으며 두 사람에게 시간을 내드렸다.하지만 서유리는 너무 숙맥인지라 좋아하는 남자 앞에서 고개를 푹 숙인 채 밥만 먹고 있었다.이에 송재이는 몹시 안달이 났다.그는 몰래 서유리의 발을 밟으며 곁눈질했다.서유리도 지금이 천재일우의 기회라는 걸 알고 있다!그녀는 이를 악물고 식사를 다 마치고 나서야 끝내 용기 내어 말했다.“윤찬 씨... 우리 함께 사진 찍을까요?”박윤찬은 이제 막 식사를 마치고 시선을 올렸다.“그게 그러니까! 윤찬 씨랑 저랑 재이 씨 이렇게 셋이서 사진 찍자고요!”거의 다 왔는데 서유리가 또다시 삐걱거렸다.그녀는 박윤찬과 단둘이 사진 찍자는 말이 도통 입 밖에 나오지 않았다.하여 어쩔 수 없이 송재이를 끌어들이며 분위기를 완화했다.“좋아요.”박윤찬은 스스럼없이 웃으며 답했다.서유리는 한숨을 돌리고 잔뜩 신나서 휴대폰을 부랴부랴 꺼냈다.그녀는 송재이에게 곁눈질했다.송재이는 속절없는 표정만 지어 보였다.‘유리
문자를 확인한 서유리는 그제야 긴장했던 마음이 가라앉았다.그녀는 숨을 고르며 설영준에게 답장했다.[아니요, 대표님. 연지수 씨 요즘 무슨 마가 씌웠는지 툭하면 신경질적으로 변하긴 하지만 저희는 평상시에 정상적으로 연습만 할 뿐 딱히 교류가 없어요. 그래서 저희한테까지 불똥이 튀지도 않고요. 물론 재이 씨한테 또 더 시비 건 적도 없어요.]그녀는 문자를 작성하고 오타는 없는지 재차 점검한 후에야 설영준에게 전송했다.잠시 후 설영준한테 답장이 왔다.[알겠어요!]서유리는 그제야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설영준은 어떻게 연지수가 송재이를 귀찮게 구는 걸 알게 됐을까?그렇다면 분명 박윤찬이 그에게 말해줬을 것이다!그날 서유리는 가는 길에 박윤찬을 한 번 실어줬었다.그리고 그의 질문에 걸려들고 말았다.인제 보니 나름 좋은 일인 듯싶었다. 적어도 설영준이 지켜주고 있으니 송재이는 더 이상 위험하지 않을 테니까.서유리는 별안간 누군가의 보호를 받는 송재이가 내심 부러웠다.그녀는 이렇게 생각하며 또다시 그 사진을 열어보았다.결국 박윤찬의 얼굴에 시선이 멈춰버렸다.‘너무 잘생겼어. 완전 내 이상형이잖아.’그녀는 송재이가 나온 부분을 싹둑 잘랐다.이젠 휴대폰 갤러리에 본인과 박윤찬이 함께 찍은 사진이 생겨났다.서유리는 너무 기쁜 나머지 사진을 몇 번이고 들여다봤다!물론 그녀도 그리 양심 없는 사람은 아니다. 세 사람이 함께 찍은 원래 사진도 여전히 저장해두었다.송재이가 나온 사진은 그녀에게 전송해주었다.이제 막 전송했는데 단장이 문 앞에서 그녀를 불렀다.휴식실이 너무 조용하여 갑자기 울려 퍼진 소리에 서유리는 화들짝 놀랐다.그녀는 황급히 일어나 연습실로 들어갔다....두 시간 후 연습을 마치고 서유리는 또다시 휴대폰을 힐끔 들여다봤다.무심코 봤을 뿐인데 큰 사고가 나버렸다.송재이에게 보내야 할 사진을 손이 미끄러워진 바람에 그만 설영준에게 보내버렸다!!설영준은 방금 그녀와 카톡으로 대화한 마지막 사람이었으니까.서유리는 박윤찬의
송재이는 별생각 없이 눈을 비비고 이불을 걷고는 맨발에 달려나갔다.설영준은 입구의 벽 등만 켜서 방안은 여전히 어두컴컴했다.두 사람은 흐릿한 불빛 속에서 서로 눈이 마주쳤다.그는 미간을 구기고 있었다.아직 아무 말도 안 했는데 송재이가 다짜고짜 그에게 달려와 목을 덥석 안았다.그리고 그의 귓가에 나긋나긋하게 속삭였다.“영준 씨 왜 이제 돌아와?”한없이 부드럽고 말랑말랑한 목소리로 ‘영준 씨’라고 부르니 온몸에 전율이 흐르듯 짜릿해졌다.맑은 대낮이라면 그녀는 절대 이런 말투로 그의 이름을 부르지 않았을 것이다.마침 금방 깨어났고 꿈에서 엄마를 봤다.행복한 꿈에서 깨어나니 가족이라곤 단 한 명도 없었다.이 세상에 그녀와 제일 가깝고 친밀한 사람은 아무리 생각해도 설영준 뿐이었다.적어도 이번 생에 오직 그만이 송재이의 마음속 깊이 들어왔으니까.아프고 짜릿하며 달달하고 고통스러운 느낌이었다.설영준은 3초 동안 멍하니 넋을 놓았다.하려던 말이 목구멍까지 차올랐지만 이 순간 한 글자도 내뱉지 못했다.곧이어 그녀를 끌어안고 신발을 벗고는 곧게 침실로 향했다.송재이는 그의 목에 얼굴을 파묻은 채 이제 막 밖에서 들어와 이 남자의 옷에 배인 알싸한 바람 냄새가 코끝을 찔렀다.또한 몸에 밴 은은한 담배 향과 술 냄새까지 깃들여져 있었다. 그 와중에 여자의 향수 냄새는 확실히 없었다.이에 송재이는 그에게 더 바짝 다가갔다.“영준 씨...”그녀는 원래 온화하고 요염하며 청순함까지 깃들여진 매력적인 여자였다.이런 여자를 보면 남자들은 흔히 여우를 연상케 된다.하지만 송재이의 두 눈동자가 하필 또 티 없이 맑고 깨끗했다.어떠한 잡념도 섞이지 않고 심지어 아이처럼 순수한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온 세상에 아무런 바람도 없고 오직 그대로 가득 찬 모습이었다.타고난 연기자 체질인지 아니면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건지 도통 갈피가 안 잡혔다. 설마 그녀가 다른 남자 앞에서도 이런 눈빛을 선보이는 걸까?설영준은 순간 짜증이 밀려와 저도 몰래
다음날, 병원 복도에서 송재이와 유은정이 벤치에 앉아 있은 지 벌써 15분이 지났다.“은정아, 내가 갈게!”유은정이 긴장한 모습을 보고 송재이가 의사 사무실로 들어가 그녀의 건강검진 보고서를 받았다.유은정은 너무 긴장한 나머지 송재이의 손을 꼭 잡고 있었다.“잠깐만!”유은정은 금방이라도 눈물을 쏟을 것 같았다.“내가 정말 AISD에 감염됐다면 너도... 나를 다른 사람들과 차별할 거야?”송재이가 다시 자리에 앉았다. 그녀는 진지한 말투로 입을 열었다.“아니? 네가 잘못한 게 없다는 걸 알고 있어. 그러니까 안 그럴 거야. 넌 언제나 내 절친이야.”“만약 내가 친구들로부터 버림받고 세상에서 버림받고 부모님에게서 버림받으면...”“그럴 리 없어! 내가 완전히 공감해 줄 수 없다는 거 알아. 하지만 네가 날 필요로 하면 난 항상 네 편일 거야. 넌 절대 혼자가 아니야.”송재이는 유은정을 끌어안았다.친한 친구가 가장 힘들 때, 그녀는 최선을 다해 위로해 주고, 맞서나갈 힘을 주려고 했다.그 격려와 따뜻함에 감동 받았는지 유은정이 입술을 깨물더니 마침내 일어섰다.그녀는 송재이의 손을 잡고 송재이의 손에 이끌려 의사 사무실로 들어갔다.30분 뒤 두 사람은 완전히 다른 표정으로 걸어 나왔다.웃음꽃이 활짝 핀 얼굴이었다.건강검진 결과는 음성이었다.유은정은 송재이와 꼭 껴안았다.“재이야, 하느님이 나를 봐주셨나 봐!”그녀는 기쁨에 겨워 눈물을 흘렸다.송재이도 같이 울었다.송재이는 요 며칠 동안 유은정의 불안과 고통이 그녀에게 어떤 의미인지 잘 알고 있었다.젊은 나이에 사람을 잘못 믿은 것 때문에 좋지 않게 인생을 끝낼 거라는 걱정이 가득했다.하지만 알고 보니 괜한 생각이었다. 이보다 더 다행스러운 것은 없다.“재이야, 그거 알아? 나는 원래 하지현과의 7, 8년이 물거품으로 돌아간 걸 안타까워했었어. 하지만 지금은 아니야. 남자가 뭐가 중요하다고! 내가 살아 있다는, 나 자신이 건강하게 살아 있다는 사실이 제일 중요하지.”이런 일
그 후 며칠 동안 설영준의 정서는 아주 평온했다.하지만 송재이의 생리가 끝난 그날에, 설영준은 그녀를 침대에 눕히고 지독하게 그녀를 원했다.요 며칠의 평온함은 꾸며진 것이라고 송재이가 의심할 정도로 말이다.송재이는 온몸이 땀투성이였다. 마지막에 그녀는 눈물이 그렁그렁한 채로 그를 바라보았다.“이제 그만, 나 이젠 못 해...”설영준은 그녀의 귓가에 속삭였다.“보기만 좋고 쓸모는 없어서는!”그렇게 말하고는 몸을 뒤척이며 그녀를 안았다.며칠 전부터 설영준은 송재이한테 문제가 많다고 얘기했었다. 게다가 지금은 또 쓸모가 없다고까지 하니... 그녀는 매우 억울했다.‘설영준은 왜 항상 날 무시할까?'하지만 너무 졸려서 이유를 묻기가 귀찮아졌다.송재이는 그의 단단한 품에 안겨 깊은 잠에 빠졌다.다음날, 옷을 입을 때 송재이는 거울에 비친 자기의 몸에 멍이 든 것을 보고 어제 설영준이 얼마나 독했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점점 더 심해져만 갔다.속으로 짜증을 내고 있는데 침실 문이 열렸다.설영준이 들어와서 송재이의 거울에 비친 흔적을 보았다. 그가 낸 흔적이었다.그는 야릇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그녀도 그를 올려다보더니 눈을 희번덕거리며 외면했다.“화났어?”설영준이 농담조로 물었다.“본성이 드러났어.”송재이는 이를 악물고 중얼거렸다.“네가 나보고 짐승이라며. 짐승은 다 그래.”“자랑스럽다고 생각해?”그녀는 화가 났다.설영준은 다가가서 허리를 굽히더니 등 뒤의 지퍼를 살펴보면서 말했다.“내가 도와줄게.”설영준의 손이 송재이의 허리에 닿았다. 그녀의 얇은 허리는 정말 잡기도 애매했다.그녀가 입은 긴 치마는 옷감의 질감이 좋았지만 유일한 단점은 지퍼가 뒤에 있다는 것이었다.그래서 지퍼를 올리기가 힘들었다. 혼자 입을 때면 매번 지퍼를 올리는 데만 시간을 많이 태웠다.설영준이 돕겠다고 한 이상 그녀도 사양하지 않았다.이 치마는 몸에 달라붙어서 조심하지 않으면 살이 끼기 쉬웠다.“화장대를 잡고 있어.”설영준이 입을 열었다
“재이 씨도 알 거예요. 서도재가 재이 씨한테 마음이 있는 거. 서도재는 나쁜 놈이에요. 사람도 아니죠! 저보고 두 사람에게 기회를 만들어 달라고 하더라고요. 나를 뭘로 생각하는지...”“전 그저 짜증이 나서 그랬을 뿐이에요. 서도재를 상대할 수 없으니까 타깃을 재이 씨에게로 돌렸나봐요. 제가 바보에요. 하지만 저도 제 어리석음에 대해 대가를 치렀어요.”“그날 식사 때도 보셨잖아요. 지금 서도재가 저를 어떻게 대하는지... 그는 설영준 씨가 그에게 주었던 수치심을 모두 저에게 화풀이했어요. 예전의 사랑과 따뜻함은 이미 다 사라져 버렸어요.”“저도 그를 떠나고 싶었지만 서도재를 잃어버리면 제가 다시 원래 모습으로 돌아갈까 봐 두려웠어요. 게다가 최근 두 번의 공연에서 실수를 반복하며 정신이 나갔었어요.”말을 마친 연지수는 손으로 이마를 짚고 고개를 숙인 채로 당장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 같았다.잠시 침묵을 지키고 심사숙고하던 송재이가 입을 열었다.“외딴 마을에서 나왔는데도 어릴 때부터 피아노를 배워서 큰 도시로 왔잖아요. 큰 도시에서 음악을 배워유명한 오케스트라에 합격하기까지...”“지수 씨의 지식과 재능만이 자기 자신의 자본이에요. 지수 씨는 외모도 예쁘고 피아노에도 재능이 있잖아요. 여러 관계를 맺지 말고 권력이 있는 사람에게 빌붙지 말고 본인의 일에 집중해 봐요. 스스로 창조한 밝은 미래는 서도재 씨를 떠난다고 해도 흔들리지 않아요. 도대체 뭘 두려워하는 거죠?”송재이는 말을 이어 나갔다.“지난번에 저를 계단에서 민 사람이 지수 씨라는 건 알고 있었어요. 하지만 말하지 않았을 뿐이에요. 단지 왜 그랬는지 물어보고 싶었어요.”“지수 씨가 서도재 곁에서 어떤 노릇을 하고 있는지를 알고 어이가 없고 우스웠어요.”이 말은 연지수의 마음속 깊이 어딘가를 찔렀다.그녀는 고개를 들어 송재이를 바라보며 이를 악물었다.“서도재를 따르기로 했으니 그의 지시를 따라야죠. 제가 원해서 한 건 아니에요”“서도재가 저를 밀라고 했어요?”송재이가 씩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