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날, 병원 복도에서 송재이와 유은정이 벤치에 앉아 있은 지 벌써 15분이 지났다.“은정아, 내가 갈게!”유은정이 긴장한 모습을 보고 송재이가 의사 사무실로 들어가 그녀의 건강검진 보고서를 받았다.유은정은 너무 긴장한 나머지 송재이의 손을 꼭 잡고 있었다.“잠깐만!”유은정은 금방이라도 눈물을 쏟을 것 같았다.“내가 정말 AISD에 감염됐다면 너도... 나를 다른 사람들과 차별할 거야?”송재이가 다시 자리에 앉았다. 그녀는 진지한 말투로 입을 열었다.“아니? 네가 잘못한 게 없다는 걸 알고 있어. 그러니까 안 그럴 거야. 넌 언제나 내 절친이야.”“만약 내가 친구들로부터 버림받고 세상에서 버림받고 부모님에게서 버림받으면...”“그럴 리 없어! 내가 완전히 공감해 줄 수 없다는 거 알아. 하지만 네가 날 필요로 하면 난 항상 네 편일 거야. 넌 절대 혼자가 아니야.”송재이는 유은정을 끌어안았다.친한 친구가 가장 힘들 때, 그녀는 최선을 다해 위로해 주고, 맞서나갈 힘을 주려고 했다.그 격려와 따뜻함에 감동 받았는지 유은정이 입술을 깨물더니 마침내 일어섰다.그녀는 송재이의 손을 잡고 송재이의 손에 이끌려 의사 사무실로 들어갔다.30분 뒤 두 사람은 완전히 다른 표정으로 걸어 나왔다.웃음꽃이 활짝 핀 얼굴이었다.건강검진 결과는 음성이었다.유은정은 송재이와 꼭 껴안았다.“재이야, 하느님이 나를 봐주셨나 봐!”그녀는 기쁨에 겨워 눈물을 흘렸다.송재이도 같이 울었다.송재이는 요 며칠 동안 유은정의 불안과 고통이 그녀에게 어떤 의미인지 잘 알고 있었다.젊은 나이에 사람을 잘못 믿은 것 때문에 좋지 않게 인생을 끝낼 거라는 걱정이 가득했다.하지만 알고 보니 괜한 생각이었다. 이보다 더 다행스러운 것은 없다.“재이야, 그거 알아? 나는 원래 하지현과의 7, 8년이 물거품으로 돌아간 걸 안타까워했었어. 하지만 지금은 아니야. 남자가 뭐가 중요하다고! 내가 살아 있다는, 나 자신이 건강하게 살아 있다는 사실이 제일 중요하지.”이런 일
그 후 며칠 동안 설영준의 정서는 아주 평온했다.하지만 송재이의 생리가 끝난 그날에, 설영준은 그녀를 침대에 눕히고 지독하게 그녀를 원했다.요 며칠의 평온함은 꾸며진 것이라고 송재이가 의심할 정도로 말이다.송재이는 온몸이 땀투성이였다. 마지막에 그녀는 눈물이 그렁그렁한 채로 그를 바라보았다.“이제 그만, 나 이젠 못 해...”설영준은 그녀의 귓가에 속삭였다.“보기만 좋고 쓸모는 없어서는!”그렇게 말하고는 몸을 뒤척이며 그녀를 안았다.며칠 전부터 설영준은 송재이한테 문제가 많다고 얘기했었다. 게다가 지금은 또 쓸모가 없다고까지 하니... 그녀는 매우 억울했다.‘설영준은 왜 항상 날 무시할까?'하지만 너무 졸려서 이유를 묻기가 귀찮아졌다.송재이는 그의 단단한 품에 안겨 깊은 잠에 빠졌다.다음날, 옷을 입을 때 송재이는 거울에 비친 자기의 몸에 멍이 든 것을 보고 어제 설영준이 얼마나 독했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점점 더 심해져만 갔다.속으로 짜증을 내고 있는데 침실 문이 열렸다.설영준이 들어와서 송재이의 거울에 비친 흔적을 보았다. 그가 낸 흔적이었다.그는 야릇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그녀도 그를 올려다보더니 눈을 희번덕거리며 외면했다.“화났어?”설영준이 농담조로 물었다.“본성이 드러났어.”송재이는 이를 악물고 중얼거렸다.“네가 나보고 짐승이라며. 짐승은 다 그래.”“자랑스럽다고 생각해?”그녀는 화가 났다.설영준은 다가가서 허리를 굽히더니 등 뒤의 지퍼를 살펴보면서 말했다.“내가 도와줄게.”설영준의 손이 송재이의 허리에 닿았다. 그녀의 얇은 허리는 정말 잡기도 애매했다.그녀가 입은 긴 치마는 옷감의 질감이 좋았지만 유일한 단점은 지퍼가 뒤에 있다는 것이었다.그래서 지퍼를 올리기가 힘들었다. 혼자 입을 때면 매번 지퍼를 올리는 데만 시간을 많이 태웠다.설영준이 돕겠다고 한 이상 그녀도 사양하지 않았다.이 치마는 몸에 달라붙어서 조심하지 않으면 살이 끼기 쉬웠다.“화장대를 잡고 있어.”설영준이 입을 열었다
“재이 씨도 알 거예요. 서도재가 재이 씨한테 마음이 있는 거. 서도재는 나쁜 놈이에요. 사람도 아니죠! 저보고 두 사람에게 기회를 만들어 달라고 하더라고요. 나를 뭘로 생각하는지...”“전 그저 짜증이 나서 그랬을 뿐이에요. 서도재를 상대할 수 없으니까 타깃을 재이 씨에게로 돌렸나봐요. 제가 바보에요. 하지만 저도 제 어리석음에 대해 대가를 치렀어요.”“그날 식사 때도 보셨잖아요. 지금 서도재가 저를 어떻게 대하는지... 그는 설영준 씨가 그에게 주었던 수치심을 모두 저에게 화풀이했어요. 예전의 사랑과 따뜻함은 이미 다 사라져 버렸어요.”“저도 그를 떠나고 싶었지만 서도재를 잃어버리면 제가 다시 원래 모습으로 돌아갈까 봐 두려웠어요. 게다가 최근 두 번의 공연에서 실수를 반복하며 정신이 나갔었어요.”말을 마친 연지수는 손으로 이마를 짚고 고개를 숙인 채로 당장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 같았다.잠시 침묵을 지키고 심사숙고하던 송재이가 입을 열었다.“외딴 마을에서 나왔는데도 어릴 때부터 피아노를 배워서 큰 도시로 왔잖아요. 큰 도시에서 음악을 배워유명한 오케스트라에 합격하기까지...”“지수 씨의 지식과 재능만이 자기 자신의 자본이에요. 지수 씨는 외모도 예쁘고 피아노에도 재능이 있잖아요. 여러 관계를 맺지 말고 권력이 있는 사람에게 빌붙지 말고 본인의 일에 집중해 봐요. 스스로 창조한 밝은 미래는 서도재 씨를 떠난다고 해도 흔들리지 않아요. 도대체 뭘 두려워하는 거죠?”송재이는 말을 이어 나갔다.“지난번에 저를 계단에서 민 사람이 지수 씨라는 건 알고 있었어요. 하지만 말하지 않았을 뿐이에요. 단지 왜 그랬는지 물어보고 싶었어요.”“지수 씨가 서도재 곁에서 어떤 노릇을 하고 있는지를 알고 어이가 없고 우스웠어요.”이 말은 연지수의 마음속 깊이 어딘가를 찔렀다.그녀는 고개를 들어 송재이를 바라보며 이를 악물었다.“서도재를 따르기로 했으니 그의 지시를 따라야죠. 제가 원해서 한 건 아니에요”“서도재가 저를 밀라고 했어요?”송재이가 씩 웃었다
하지만 바로 다음 날 점심, 송재이는 다시 한번 가짜 소문이 몰려오는 걸 느꼈다.이번에는 그녀의 절친 유은정과 연관이 있는 소문이었다.그녀가 화장실에서 나오자마자 서유리가 휴대폰를 보고 있는 것을 보았다.호기심에 다가갔더니 유은정이 ‘AIDS'에 감염됐다는 뉴스가 인터넷에 올라왔던 것이었다.서유리는 계속 그 뉴스를 보고 있었다.“뭘 보고 계세요?”뒤에 서 있던 송재이가 한마디 했다.그녀는 고개를 돌리더니 서둘러 그 사이트를 탈퇴했다.하지만 송재이가 이미 본 뒤였다.그녀의 표정은 매우 진지했다.송재이는 별말 없이 핸드폰을 꺼내 실시간 검색어를 찾아보았다.그녀가 그날 유은정을 데리고 병원 감염과에 가서 건강검진을 받은 사진들이 담겨 있었다.그녀는 알 수 없었다. 그날 병원에서 누군가가 보고 있었나?아니면 누가 미리 소식을 들어서 미행한 건가?송재이에게 놓고 말해서 이 일은 이미 지나간 것과 마찬가지였다.건강검진 결과가 음성인 한 그녀는 안심할 수 있었다.그런데 왜 갑자기 소문이 났는지 알 수 없었다.전에 있었던 다시 기사로 올라오면 온 세상에 폭로될 것이었다.“유은정, ‘AIDS' 감염했나.”기사들은 마치 직접 본 것처럼 그녀의 사생활을 마구 평가했다.유은정은 분명 피해자인데 오히려 공격을 당하고 있었다.하지만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중요한 건 사람들은 유은정만 공격하는 게 아니라 그녀와 함께 건강검진을 받으러 간 송재이도 공격했다는 것이었다.이 일을 폭로한 사람이 바로 송재이라고 하면서 말이다.그들은 송재이가 이 사건을 이용해 노이즈 마케팅을 하고 있고 이 기사는 그것을 목적으로 한 자작극이라고 말했다.절친의 아픔을 딛고 더 많은 관심을 받으려 한다고 그녀를 욕했다.오후 동안, 송재이는 자신이 공격을 받는 모든 기사를 다 읽었다.그리고 나서 유은정에게 카톡을 보냈는데 인터넷에 올라온 자신에 대한 언급은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너 괜찮아? 기분은 어때? 원래 다 지나간 일인데 누가 또 이런 소문을 냈는지… 영향받
송재이와 설영준은 거의 비슷한 시간에 유은정이 보낸 이 해명 글을 보았다.설영준은 사무실에 앉아 한 구절 한 구절 읽어 내려갔다.하지현...유은정의 약혼자...공식 석상에서 설영준은 그를 몇 번 만난 적이 있었다. 그는 인터넷 회사의 임원이었다.잘생겼지만 집안 출신은 별로였고 유은정과는 고등학교 때부터 연애를 했던 사이였다. 그가 유은정의 약혼자라는 사실은 모두가 알고 있었다.유중건은 하나뿐인 외동딸을 아주 아꼈다. 그래서 처음엔 강하게 반대했지만 유은정이 너무 좋아하는 걸 보고 결국 허락했다.그는 하지현에게서 돈을 바라지 않았다. 그저 유은정을 사랑하는 마음이면 족했다.설영준은 얼마 전에 두 사람이 약혼했다는 사실도 전해 들었었다.그는 원래 별로 관심이 없었지만 하지원이 양성애인 데다가 커밍아웃하지 않은 상태일 줄은 몰랐다.이 사건은 유은정 자신에게도 큰 스캔들이었다.하지현때문에 자신이 ‘AIDS’에 감염되지 않았을까 하는 지옥 같은 심리적 고통을 겪지 않았더라면 그녀는 이 모든 것을 공개할 용기가 없었을 것이었다.인터넷에 떠도는 자기에 대한 추측, 송재이에 대한 추측은 유은정을 화나게 했다.진짜로 잘못한 사람들은 사람들 속에 숨어 있는데 피해자들이 오히려 악플을 받을까?이건 너무 불공평했다. 유은정이 올린 장문은 어떤 것도 덧붙이지 않았고 모두 사실이었다.다시 떠올려도 그녀는 무슨 일이라도 일어났을까봐 두려웠다.만약 제때 발견하지 않았더라면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동성을 좋아하는 건 문제가 될 것 없었다. 그 사실을 숨기고 상대를 속인 것이 잘못된 것이었다.처음에 하지현과 헤어지자고 했을 때, 죽어도 동의하지 않았던 원인을 그녀는 인제야 알게 되었다. 그녀는 순진하게 하지현이 아쉬워서, 그녀와 헤어지기 싫어서 그런 줄 알았다.일이 터지고 난 후에야 유은정은 하지현이 그녀를 아까워하는 게 아니라 유중건 사위라는 타이틀을 아까워한다는 걸 깨달았다.그제야 유은정은 유중건이 지민건에게 자금을 빼앗겼을 때, 하지현이 그녀에 대한 태
설영준도 이제야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는 며칠 동안 송재이가 이런 일도 겪었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다.매일 함께 자면서도 그녀는 입 하나 뻥긋하지 않았다.아마도 절친의 사생활을 보호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송재이는 절친이 슬럼프에 빠졌을 때 묵묵히 옆에서 있어 주며 떠나지 않고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주었다. 설영준은 앞으로 그가 어려움에 빠져도 송재이는 같은 선택을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남자의 의리는 매우 소중했다. 마찬가지도 여자에게서 나온 의리도 너무나 매력적이었다.절친에게 잘해주는 만큼 자기 남자에게도 잘해줄 것 같았다.친밀함으로 따진다면 아마 그가 한 수 위일 것이다.설영준은 송재이를 구석구석 보았고 가장 깊은 곳도 탐험해 보았다.지금까지 아마 그가 가장 가까운 유일한 사람일 것이다.송재이의 인품에 대해 설영준은 더 깊은 믿음을 느꼈다.여진이 언론계에서 아는 사람은 정말 오랜 기간 연락하지 않은 초등학교 동창인 고민재였다.오후에 설영준의 분부대로 고민재에게 기사를 내라고 할 때, 고민재는 잠시 멈칫했다.오랜 시간 비서 업무를 한 여진은 자연히 예리한 통찰력을 갖고 있었다. 여진이 바로 물었다.“무슨 말이 하고 싶은데?”생각지도 못한 통찰력에 고민재가 웃으며 말했다.“우리도 알고 지낸 지 오래되었잖아. 그래서 나도 숨기지 않으려고. 재이 씨랑 유은정 씨가 감염과에서 검진을 한 사진이 폭로된 전날 밤, 우연히 화장실에서 가십을 하나 들었는데 바로 이 일이었다. 문씨 가문 셋째 아가씨가 계획하고 그 사진을 기자한테 팔았나 봐. 그 아가씨한테 매수된 기자 친구는 공교롭게도 내 선배야. 그 선배는 다 좋은데 재물에 대한 욕심이 있고 입이 가벼워. 선배가 말하길 정말 지금과 같은 세월에는 절친조차 잘 방비해야 한다고 하더라고. 우리도 알다시피 문예슬 씨, 재이 씨, 은정 씨 전에는 모두 절친한 사이였잖아. 지금처럼 이런 모함을 할 줄은 누가 생각이나 했겠어.”고민재가 아첨하는 듯한 태도로 이 일의 내막을 여진에게 알려주었다.지금
문예슬이 매번 그를 바라볼 때의 그 눈빛은 생각만 해도 소름이 끼쳤다.설영준은 우쭐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런 여자의 마음에 들었다는 생각에 재수 없이 느껴져 밖으로 말하기가 부끄러웠다.그는 양복을 입고 넥타이를 정리하더니 무표정한 얼굴로 답했다.“제가 어떻게 압니까?”그러고는 사무실을 나섰다.설영준은 운전하여 바로 박윤찬의 집으로 향했다.이전에 박윤찬의 어머니인 성수연이 돌아왔는데 몸이 안 좋아서 한의사를 보러 갔다고 했다.마침, 설영준이 잘 아는 한의사가 있어 이번에 소개해 주려 했다.가는 길에 설영준은 송재이에게 카톡을 보내 저녁에 일이 있어 밥 먹고 들어간다고 했다.하루 종일 인터넷이 떠들썩했는데 송재이도 집에서 하루 종일 뉴스 동향을 주시하고 있어 피곤했다.그의 메시지를 받았을 때 그녀는 부엌에 있었는데 생각에 잠겨 있다가 물이 끓어오르는 소리에 정신을 차리고는 알겠다고 답장하고 핸드폰을 내려놓은 채 국수를 삶았다.차 안에 앉아 그녀의 답장을 확인한 설영준은 눈살을 찌푸리고 있었다.‘안 돌아간다는데 별다른 영향이 없나 보네? 더 묻지 않는 거 보니 정말 철이 든 여자인가 보네.’하지만 그와 함께 한 3년 동안 그녀는 줄곧 그랬던 것 같았다.그때 그녀의 침착하고 철든 모습이 그의 눈에는 장점으로 보였는데, 지금은 오히려 트집을 잡기 시작했다.설영준이 핸드폰을 내려놓고 창밖으로 얼굴을 기울였다. 그의 표정은 더없이 어두웠다.그러나 박윤찬의 집에 도착하여 성수연을 보자 그는 평소의 침착함과 매너를 되찾았다.부엌에 있는 아주머니가 밥을 다 차려놓았다.밥 먹을 때, 처음에는 즐거웠는데 성수연이 테이블에 놓인 새우볶음을 보고는 가볍게 혀를 차며 아주머니를 불러왔다.“최근에 해산물 요리는 하지 말라고 하지 않았나요? 재이 씨 어머니가 먹었던 두통을 치료하는 한약을 먹고 있는데 의사가 식단 관리를 잘하라고 했단 말이에요. 앞으로는 하지 마세요.”아주머니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그녀가 어찌 성수연이 당부한 말을 잊었겠는가.하지
“윤찬 씨, 전에는 소설 즐겨보지 않았던 것 같은데, 아닌가요?”설영준이 책 제목을 보고는 내려놓고 무심결에 물었다.박윤찬이 주방에서 손을 씻고 나오며 설영준이 자기가 반쯤 본 그 책을 탁자 위에 올려놓는 모습을 보았다.“전에 영화를 본 김에 소설도 사 봤어요.”그가 답했다.“영화 본 김에요?”“네.”설영준은 한참 더 앉아 있다가 갔다.성수연과 박윤찬이 그를 문 앞까지 배웅하고는 문을 닫았다.“아까 왜 영준 씨한테 그런 말씀 하신 거예요?”박윤찬이 언짢은 표정으로 미간을 좁히며 물었다.성수연은 억울하다는 듯이 답했다.“내가 무슨 말 했는데? 엄마로서 여자 친구조차 없는 아들 걱정하면서 일찍 결혼하고 애 낳길 바라는 게 정상 아니야?”“그럼 재이 씨 얘기는 왜 하셨어요?”“재이 씨같은 기준으로 찾으라고 했지, 재이 씨 찾으라는 말은 안 했잖아.”성수연이 모른 척하며 박윤찬의 어깨를 두드렸다.“엄마도 재이 씨랑 영준이 한 쌍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어. 너랑 영준이는 친구고. 그런데 친구 여자 뺏으라는 말은 안 해. 우리 아들 도덕적으로도 완벽한 사람인데 그런 일을 할 리가 없잖아?”마지막 말은 그의 인품을 칭찬하는 말 같기도 하고 그의 가식을 조롱하는 말 같기도 했다.박윤찬은 성수연이 돌려서 하는 말을 귀찮게 여기며 말했다.“저는 재이씨랑 영준 씨 모두 존중해요. 괜히 나서서 긁어 부스럼 만들지 마세요. 지금 저는 영준 씨네 회사 법률 고문이에요. 앞으로 보기 싫어도 봐야 하는 사이인데 난처하게 만들고 싶지 않아요.”“알았어, 알았어! 앞으로는 안 할게!”성수연이 건성으로 답했다. 외부인이 없는 이상 그녀는 더 이상 점잖게 지낼 필요가 없었다. 그녀는 장난기 넘치는 표정을 하고 있었다.박윤찬으로서도 자신의 엄마를 어쩔 수 없어서 돌아서서 거실로 돌아와 그 책을 침실로 챙겨 들어갔다.저녁 9시가 넘어서야 설영준은 집에 도착했다.그는 송재이 집에서 살고 있었는데 이제는 자신의 집처럼 느껴졌다.그는 바로 침실로 향했는데 송재이
통화가 종료된 후 설영준은 더 마음이 무거워졌다.그는 다시 한번 송재이 병실로 가 침대 끝에 앉았다. 그리곤 창백한 얼굴로 고요히 잠든 송재이의 얼굴을 보았다.설영준은 마치 송재이에게 자신이 한 말이 들리는 것처럼 나직하게 말했다.“재이야, 내 말 들려? 나 여기 있어. 네 옆에 있어.”그는 조심스럽게 송재이의 손을 잡으며 미약해진 체온을 느꼈다.“어쩌면 지금 내 말이 안 들릴 수도 있다는 걸 알아. 하지만 그것만은 알아줬으면 좋겠어. 내가 널 얼마나 사랑하는지 말이야.”설영준은 이내 심호흡을 하면서 감정을 갈무리하려고 애를 썼다.“우리 아직 함께 해보진 못한 일들이 많아. 혹시 기억해? 우리 그때 그랬었잖아. 함께 세계 곳곳에 있는 나라로 여행 가서 우리와 다른 사람들의 문화를 체험해 보고 그곳의 음식을 먹어보자고. 네가 지금 눈만 떠준다면 난 지금 당장 너랑 함께 그 떠날 거야.”이때 누군가 노크하더니 도정원이 들어왔다. 그는 아주 엄숙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영준 씨, 경찰들이 지금 출동했다고 하네요. 곧 도진욱의 거처로 들이닥칠 거예요.”설영준은 자리에서 일어난 뒤 고개를 끄덕였지만 여전히 아쉬움이 가득한 눈길로 송재이를 보았다.“정원 씨, 부탁 하나만 들어줄래요?”“말씀하세요. 제가 도울 수 있는 거면 도와드릴게요.”“저 대신 재이 좀 잘 챙겨주세요. 전 누구 만나러 가야 할 것 같아서 그래요. 그 사람이 아마 이 사건에 아주 큰 도움을 줄 수 있을 거예요.”“걱정하지 말고 가봐요. 여긴 제가 꼭 붙어 있을 테니까 아무도 재이를 건들지 못할 거예요.”설영준은 고마운 눈빛으로 도정원을 힐끗 보곤 몸을 돌려 병실을 나섰다.떠나기 전 설영준은 나직하게 송재이의 귓가에 대고 말했다.“재이야, 나 얼른 돌아올게. 그러니까 나 꼭 기다려줘야 해.”송재이의 병실에선 도정원만이 묵묵히 곁을 지키며 그녀가 깨어나길 기다리고 있었다. 설영준은 이미 진상을 찾으러 떠났다.그는 오랜 친구를 만나러 갈 생각이다. 그 친구는 의학 부문에서 아
그러자 보안 요원이 말했다.“여긴 병원 CCTV를 관리하는 곳입니다. 외부인에게 함부로 영상을 보여줄 수 없습니다.”설영준은 확고한 어투로 말했다.“전 송재이 씨 약혼자입니다. 전 반드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아야겠으니 협조 부탁드립니다.”보안 요원은 다소 망설이더니 결국 그에게 영상을 보여주었다.영상 속에서 설영준은 세세한 부분까지 발견했다. 송재이가 쓰러지기 전 도진욱은 물잔을 송재이에게 건넸다. 그 순간 설영준은 의심을 하게 되었다.같은 시각 도정원은 병실에서 쪽지 한 장을 발견했다. 쪽지엔 갈겨 쓴 글씨가 있었다. 약물의 이름과 사용량이 적힌 쪽지였다. 그는 발견하자마자 바로 설영준에게도 알렸다.두 사람은 각자 발견한 것을 공유하곤 분석하기 시작했다. 설영준은 도진욱이 송재이에게 건넨 물잔과 쪽지 위에 쓴 약물의 명칭을 보았다. 그는 순간 무언가 깨닫게 되었다.송재이가 검사실로 들어간 뒤 설영준과 도정원은 각자 단서를 찾으러 움직였기에 설영준은 다시 돌아와 송재이를 기다려 보기로 했다. 그러나 도정원은 쪽지에 적힌 약물 이름을 보면서 조사하기 시작했다.설영준은 초조한 얼굴로 검사실 밖에서 송재이를 기다렸다.“재이야, 꼭 버텨야 해. 내가 여기서 기다리고 있을게.”시간이 1분 1초 흘러갔다. 설영준은 마음이 점점 더 무거워졌다. 머릿속에 송재이의 미소와 웃음소리, 그리고 함께 보냈던 즐거운 시간들이 떠올랐다. 그는 속으로 기도했다. 송재이가 무사히 나오길 바라며 말이다.설영준은 혼잣말로 중얼거렸다.“재이야,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를 기억해? 네가 그때 엄청 찬란한 미소를 지었었어. 네 찬란한 웃음이 온통 어둠뿐이던 내 세상을 환하게 빛내주었지. 그때 널 지켜주겠다고 다짐했었는데... 지금은...”바로 이때 문이 스르륵 열리고 의사가 나왔다. 설영준은 바로 다가가 물었다.“선생님, 재이는 어때요?”“저희가 최선을 다해 독이 퍼지는 것을 막고 있습니다. 하지만 너무 희귀한 독에 중독된 거라 독 분석하고 해독제를 만드는 데 시간이
송재이의 말은 청천벽력이었다. 도정원과 도진욱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수사관이 빠르게 다가와 상태를 살폈다. 그도 사태의 심각성을 알게 되어 얼른 입을 열었다.“저희가 바로 의사를 불러오겠습니다.”도정원은 빠르게 긴급 호출 벨을 누르면서 송재이를 부축한 채 옆에 있던 의자에 조심스럽게 앉혔다.의자에 앉히자마자 도정원은 초조한 마음으로 송재이를 어깨에 기대게 했다.“재이야, 조금만 버텨줘. 의사가 금방 도착할 거야.”도진욱은 다소 복잡한 감정이 담긴 얼굴로 송재이를 보았다. 속으로 뭔가 갈등하고 있는 듯했다.그러더니 혼잣말로 중얼거렸다.“독에 중독됐다고? 그럴 리가... 난 아무것도 하지 않았어...”예리한 수사관은 그런 도진욱의 상태를 눈치채고 바로 심문했다.“도진욱 씨, 이 상황에 관해 설명하세요. 송재이 씨가 왜 갑자기 중독된 거죠?”도진욱의 안색은 더 창백해졌다. 그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전... 전 정말로 모릅니다. 제가 왜 제 조카를 죽이겠습니까?”바로 이때, 의사와 간호사가 병실로 들어오며 송재이를 살펴보았다.의사가 엄숙하게 말했다.“아무래도 정밀 검사를 해봐야 알 것 같습니다. 어떤 독에 중독되었는지 확인할 수 없습니다.”송재이는 급하게 검사받으러 갔다. 도정원과 도진욱이 그 뒤를 따라갔다. 수사관은 묵묵히 이 상황을 지켜보았다. 머릿속에 이미 사건의 윤곽이 그려지기 시작했다.도정원이 밖에서 초조한 마음으로 송재이를 기다렸다. 그러나 도진욱은 홀로 구석으로 간 뒤 손을 주머니에 찔러넣은 채 안에 있는 핸드폰만 불안한 마음으로 만지작거렸다.그러더니 낮은 목소리로 누군가와 통화했다.“나야. 일이 복잡하게 됐어. 송재이가 갑자기 독에 중독되어서 경찰이 개입하게 되었어. 나도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인지 몰라. 하지만 우린 지금 반드시 움직여야 해.”전화기 너머로 잔뜩 가라앉은 목소리가 들려왔다.“우리 계획을 수정할 필요가 있군요. 일단 절대 증거를 찾게 해서는 안 돼요. 안 그러면 우리 모두 끝장나게 되니까
화가 난 도정원은 이를 빠득 갈았다.“그게 무슨 의미죠? 설마 아버지 병이 당신과 연관이 있다는 건가요?”정체 모를 남자는 웃음을 터뜨렸다.“곧 알게 될 거야. 참, 도진욱. 가문의 이익을 위해 네 동생 행복을 희생했었지? 이젠 네가 희생할 차례야.”전화는 그렇게 끊겼다. 송재이와 도정원은 고개를 돌려 도진욱을 보며 설명을 바랐다.그러자 도진욱이 말했다.“난... 난 정말 몰랐어. 그때 일이 이렇게 될 줄은 몰랐다고. 그때 내가 그런 선택을 한 건 인정해. 하지만 전부 가문을 위해서였어. 난 너희들을 해칠 생각한 적 없다고.”송재이는 무력감이 들었다. 거짓과 배신으로 가득한 이 가족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몰랐다.절망에 빠진 송재이가 이마를 짚으며 말했다.“우리 이제 어떻게 해야 해요? 대체 누굴 믿어야 하는 거예요?”도정원도 다소 괴로운 눈빛을 하고 있었다. 그는 주먹을 꽉 움켜쥐며 감정을 갈무리하려고 애를 썼다.“가문의 이익을 위해서 그러셨다고요. 우리 도씨 가문이 언제부터 이익에만 눈멀어 가족을 버리는 가문이 된 거죠?”도진욱의 얼굴엔 죄책감이 가득했다. 그는 힘이 없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정원아, 그땐 내 잘못이 맞아. 나도 인정해. 난 내 선택으로 우리 가문이 더 힘이 있는 가문이 될 줄 알았고 가족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어. 난... 난 정말 미안하구나.”옆에서 듣고 있던 송재이는 막막하면서도 불안했다.“두 사람은 전부 제 가족이에요. 전 대체 누굴 믿어야 할지 모르겠다고요.”송재이의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그 순간 문밖에서 다급한 발걸음 소리가 들려오면서 이 숨 막히는 침묵을 깨버렸다.세 사람은 동시에 고개를 돌려 문 쪽을 보았다. 제복을 입은 남자들이 엄숙한 얼굴로 들어왔다.“안녕하세요. 저희는 경찰서 수사과에서 나왔습니다. 몇 가지 당신들이 조사에 협조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도정원과 도진욱은 서로 마주 보았다. 그들은 알고 있었다. 이것이 진상을 알아내는 데 중요한 조사라는 것을“네, 협조하겠습니다.
전화기 너머로 침묵이 흘렀다. 그리고 이내 짙은 한숨 소리가 들렸다.도진욱이 입을 열었다.“그래, 알았다. 너희들한테... 해줄 얘기가 있단다. 네 아버지의 과거와 어머니에 관한 얘기란다.”도정원과 송재이는 서로 눈빛을 주고받았다. 두 사람은 의아하면서도 초조했다.“큰아버지,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뭔가 알고 계신 거예요?”도진욱은 미간을 찌푸렸다.“곧 도착하니 얼굴을 보면서 얘기하자꾸나. 이 일은 내가 너희들 얼굴을 보면서 직접 말해줘야 할 것 같구나.”전화를 끊은 후 도정원과 송재이는 생각에 잠겼다. 두 사람은 도진욱이 어떤 얘기를 들려줄지 몰랐고 도진욱이 그들에게 해줄 얘기가 그들 가족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지도 몰랐다.얼마 지나지 않아 도진욱이 병원에 도착했다. 그의 얼굴엔 초조함과 죄책감이 담겨 있었다.그는 송재이와 도정원의 얼굴을 보더니 심호흡을 한 후 천천히 입을 열었다.“지금 마음이 얼마나 혼란스러운지 알고 있단다. 하지만 더는 너희에게 숨길 수 없을 것 같구나. 너희들이 모르는 사실은 더 많단다.”송재이는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머리가 어질거렸다.“큰아버지,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저희가 아직도 모르는 비밀이 있는 건가요?”“그래, 그때 당시 나와 네 엄마는 확실히 그런 사이였었지. 하지만 그건 다 지나간 일이란다. 나중에 난 그 삼각관계에 빠지기로 했고 네 엄마랑 네 아빠를 이어주기로 했었지. 그때의 난 그게 옳은 일이라고 생각했단다. 지금까지도 말이야.”송재이와 도정원은 충격받은 얼굴로 도진욱을 보았다. 그가 꺼낸 얘기는 도경욱이 꺼낸 얘기보다 더 충격적이었다.“큰아버지, 정말로... 정말로 그러셨어요?”“나도 알고 있단다. 내가 무슨 말을 하든 과거의 일을 없던 일로 할 수는 없겠지. 하지만 난 아직 살아 있을 때 너희들에게 진실을 말해주고 싶구나.”바로 이때 병실 안에서는 긴급 호출 벨이 울렸다.의사와 간호사들이 급하게 병실로 달려왔고 송재이와 도정원도 얼른 병실 안으로 들어갔다.의사는 그들을 보더니 고
송재이는 얼른 도경욱의 손을 꼭 잡았다. 눈물이 그녀의 눈 앞을 가렸다.옆에서 두 사람의 모습을 보던 도정원도 눈시울이 붉어졌다.병실 안에는 무거운 분위기가 감돌았다. 그저 일정한 의료 기기 소리만 들려오며 시간이 흘렀다.도경욱은 송재이를 빤히 보았다. 그의 두 눈엔 아쉬움과 죄책감만 남아 있었다.자신에게 남은 시간이 얼마 없다는 것을 그는 알고 있었다. 하지만 죽기 전 꼭 해야 할 말이 있었다.미약한 목소리지만 그는 확고한 어투로 말했다.“재이야, 내 딸. 너에게 꼭 해줄 말이 있단다. 네 출생의 비밀과 네 엄마에 관한 얘기야.”송재이는 고개를 들었다. 눈물 그렁그렁 맺힌 그녀는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아빠,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제 엄마가 왜요?”도경욱은 숨을 깊이 들이쉬었다. 마치 온몸의 힘을 모으고 있는 것 같았다. 깊이 숨겨둔 진실을 정확하게 말해주기 위해서 말이다.“그때 네 엄마, 그러니까 서지원의 약혼 상대는 내 형이었단다. 네 큰아버지지. 하지만 운명이 장난을 쳤지. 서지원이... 네 엄마가 진심으로 사랑한 사람은 나였단다.”송재이는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너무도 충격적인 진실이었다. 그녀는 단 한 번도 자신의 출생에 이런 비밀이 숨겨져 있을 거라곤 상상도 못 했다.그녀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어...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었던 거죠?”도정원도 놀란 표정인 것을 보아 처음 알게 된 사실인 것 같았다.도경욱은 다소 괴로운 표정을 지었다.“네가 이 사실을 받아들이기 힘들어한다는 것을 나도 안다. 그렇지만 전부 사실이란다. 난 지원이를 단 한 번도 강요한 적 없었어. 우리는 서로 진심으로 사랑했어. 하지만 그때는 이런 추문을 받아들이지 않던 시절이었지.”송재이는 마음이 복잡했다. 이렇게까지 혼란스러운 감정은 처음이었다.그녀는 이렇게나 갑작스러운 사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몰랐다.“아빠, 그럼 대체 왜 일찍 말씀해 주지 않으신 거예요? 왜 그동안 숨기고 계셨던 거예요?”도경욱은 덜덜 떨리는 손으로 송
박정후는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다소 고통스러운 기억을 떠올리고 있는 듯한 눈빛으로 박윤찬을 보았다.“그때 내가 한 여자를 사랑하게 되었어. 아주 똑똑하고 예쁘고 착한 사람이었지. 나한테 아주 특별한 사람이기도 했어. 하지만 어머니가... 어머니가 우리 사이를 반대하셨어.”박윤찬은 미간을 찌푸렸다. 여전히 이해가 가지 않았다.“어머니가 왜 반대하셨는데? 어머니는 아무 이유도 없이 그러실 분이 아니잖아.”박정후가 대답했다.“처음엔 나도 이해하지 못했어. 그때의 난 분명 어머니가 그 여자에 대해 오해하고 있다고 생각했었지. 또 어쩌면 내가 사랑놀이에 푹 빠져 일을 제대로 하지 않을까 봐 걱정하시는 건 줄 알았어. 하지만 나중에 알고 보니 전혀 아니었어.”박윤찬은 초조하게 한숨을 내쉬었다.“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건데? 어머니가 아무 이유도 없이 반대하실 분은 아니야.”박정후의 낮게 깔린 목소리에선 슬픔이 느껴졌다.“그 여자는 성이 임 씨였어. 임씨 가문은 우리 성씨 가문과 오래전부터 원한이 있었지. 이 원한은 우리가 태어나기 전부터 있었던 거라 저주와도 같은 것이었어. 두 가문의 후대에도 아주 큰 영향을 주고 있어.”박윤찬은 놀란 모습이었다.“난 임씨 가문에 대해 들어본 적 단 한 번도 없었어. 어머니도 나한테 한 번도 말씀하신 적 없었다고.”박정후가 말했다.“어머니는 이 원한이 시간이 지나면서 잊히길 바라셨던 거야. 하지만 사실상 잊히지 않았지. 임씨 가문과 성씨 가문은 지난 세대에서도 심각한 충돌이 있었어. 두 가문은 사업 경쟁을 벌이다가 더 틀어지게 되었지.”박윤찬은 이해가 되지 않았다.“사업 경쟁이라니? 그게 언제 일인데 아직도 신경 쓰고 있다는 거야?”“그래, 하지만 지난번 경쟁에서 임씨 가문은 파산당하게 되었지. 그 가문 어르신도 결국 그때 세상을 뜨게 되신 거야. 임씨 가문에서는 우리 성씨 가문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경쟁을 벌여 그런 비극을 만든 것으로 생각하고 있어.”박윤찬은 한참 침묵하다가 입을 열었다.“그러
박정후는 시선을 돌려 창밖을 내다보았다. 바쁘게 움직이는 사람들을 보더니 생각에 잠겨 버렸다.그는 나직하게 말했다.“제가 멀리 떠나기로 결정한 건 저와 윤찬이 사이에... 오해가 있기 때문이에요. 저랑 윤찬이 사이에 갈등이 있었는데 전 제가 원하는 것을 이루기 위해 윤찬이 곁을 떠났죠. 하지만 혈연관계는 영원히 끊을 수 없는 거잖아요.”묵묵히 박정후가 하는 얘기를 듣고 있던 송재이는 박정후의 안타까움과 죄책감을 고스란히 느꼈다.송재이가 말했다.“가족 사이에 확실히 갈등이 생길 수도 있죠. 하지만 제일 중요한 건 서로 항상 응원하고 있음을 알고 있는 것이죠.”설영준은 진지한 얼굴로 박정후를 보았다.“정후 씨는 정의를 위해, 동생을 위해 이미 많은 것을 했으니 윤찬 씨도 이해해줄 거예요.”장주영도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맞아요. 정후 씨가 한 모든 것을 박윤찬 씨가 알게 된다면 분명 아주 자랑스러워할 거예요.”박정후는 한숨을 내쉬었다. 고개를 돌려 확고함이 가득한 눈빛으로 그들을 보았다.“그랬으면 좋겠네요. 이번에 돌아온 것도 윤찬이에게 뭐라도 도움이 되어주고 싶어서였어요. 그리고 윤찬이와 화해할 기회도 있었으면 좋겠네요.”그들을 도와준 정체 모를 인물은 바로 박정후였다.그는 마음이 너무도 복잡했다.이번 일로 동생과 무너진 관계를 회복하고 다시 화목하게 지내고 싶었다.박정후가 말했다.“관계를 회복하는 데 시간이 필요하다는 걸 알아요. 하지만 전 기다릴 수 있어요. 윤찬이가 저한테 기회만 준다면 형으로서 책임을 다할 거예요.”그는 확고한 눈빛으로 말했다. 박윤찬과의 거리감을 하루아침에 줄일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자리에서 일어난 그는 다시 창밖을 보았다. 꼭 사람들 속에서 누군가를 찾는 듯한 모습이었다.“전 반드시 윤찬이한테 찾아가야 해요.”박정후는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윤찬이가 저를 만나고 싶어 하든 말든 상관없이 알려주고 싶어요. 전 단 한순간도 윤찬이를 포기한 적 없다고 말이에요.”송재이는 박정후의 손을 잡아
설영준과 송재이는 서도재의 비웃음에도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저 빠르게 방 안의 상황을 살펴본 뒤 도망칠 길이나 반격할 기회가 없는지 파악했다.정체를 알 수 없는 인물은 조용히 숨어서 행동을 개시하려고 했다.설영준은 차갑게 피식 웃었다.“서도재, 이러면 네가 정말로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야? 네가 저지른 범죄는 이미 전부 드러났어. 밖엔 경찰들이 깔려 있다고.”서도재의 웃음이 사라지고 표정이 굳어졌지만 빠르게 다시 자신만만한 모습으로 돌아왔다.“경찰이 깔려 있다고? 넌 내가 아무 준비도 하지 않은 거로 보이나 봐? 이 아지트는 아주 단단하게 만들었거든. 너희들은 도망칠 수 없어.”송재이는 설영준이 방 한구석에 있는 창문에 힐끗 본 것을 발견하곤 바로 그의 의도를 눈치챘다.그녀는 일부러 서도재를 향해 목소리를 높였다.“그럼 우린 여기서 그쪽과 시간을 끌 수밖에 없겠네요. 그쪽 아지트가 먼저 무너질지 아니면 밖에 경찰들이 먼저 쓰러지게 될지 한 번 지켜보자고요.”서도재는 손을 들어 올리며 부하들에게 준비하라는 사인을 보냈다. 하지만 이때 방 안의 불빛이 꺼지더니 어둠이 내려앉았다.정체를 알 수 없는 인물은 확성기로 말했다.“꼼짝 마!”설영준과 송재이는 어둠 속에서 빠르게 창문이 있는 쪽으로 움직였다.설영준은 있는 힘껏 발로 창문을 깨버렸다. 두 사람은 거의 동시에 창문에서 뛰어내렸다. 바깥엔 이미 에어매트가 준비되어 있었다.서도재는 갑자기 어두워진 주위에 당황스러워하면서 미처 반응하지 못했다.불빛이 다시 켜졌을 땐 설영준과 송재이는 이미 사라졌다.그는 잔뜩 화가 난 목소리로 말했다.“쫓아가! 반드시 두 사람 내 앞에 잡아 와!”그러나 서도재의 부하들이 아지트에서 나가자마자 이미 밖을 포위하고 있는 경찰들을 발견하게 되었다.알고 보니 정체를 알 수 없는 인물이 미리 익명으로 경찰에 신고한 것이다.경찰은 확성기로 말했다.“안에 있는 사람 모두 들으세요. 당신들은 포위되었습니다. 당장 손에 든 무기를 내려놓고 항복하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