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 뭔 일 당하고 싶지 않으면 도망가는 것도 좋은 생각이야.’고정남은 오늘 갑자기 성신영과 함께 뜬금없이 강씨 가문으로 가자고 했는데, 아마 강유리를 위해 온 것으로 생각이 들었다.하지만 성신영은 예전의 성신영이 아니기에 더 이상 강유리의 들러리가 되고 싶지 않았다.“왜 그래?”육경원은 고개를 돌려 성신영에게 물었다.그러자 성신여은 고개를 저으며 이와 함께 시선도 도로 거두었다.“아무것도 아니야. 얼른 들어가자. 외할아버지께서 기다리시겠어.”이에 육경원은 고개를 끄덕이고 JL빌라로 차를 몰고 들어갔다.그러더니 주위를 살펴보면서 있는 듯 없는 듯 물었다.“근데 네 이 빌라 말이야, 듣기로는 성홍주가 돈을 냈다며?”“......”성신영은 순간 멈칫거리더니 육경원의 뜻을 헤아리며 조심스레 대답했다.“맞아. 나한테 선물로 준 빌라야. 내 이름으로 되어 있고 난 인제 고씨 가문 사람이라 이 빌라는 성홍주 자산 동결 범위에 속하지 않았어.”“네 이름으로 되어 있으면 너 스스로 처리할 권리도 있다는 말이네.”성신영은 그 말의 뜻을 조금씩 알아차리기 시작했다.“우린 부부니깐 함께 의논하고 결정해야지. 만약 무슨 생각이라도 있으면 언제든지 말해. 네 생각부터 존중해줄게.”이러한 성신영의 태도가 마음에 들었는지 육경원은 성신영의 손을 잡았다.“신영아, 넌 늘 이렇게 배려심이 깊어.”그러자 성신영은 안절부절못하며 웃었다.“당연한 걸 그래.”앞을 바라보며 육경원은 덤덤한 목소리로 말했다.“왕소영은 너를 키워준 어머니이기에 앞으로 연락을 유지해도 상관없어. 근데 왕씨 가문 사람들은 네가 돌봐줘야 할 의무 따위는 없어.”지난번 고성 그룹 주년 행사에서 육경원은 이미 성신영에게 경고하였었다.될 수 있는 한 빠른 시일 내에 “애물단지”를 해결하라고 했다.성신영의 손에는 성홍주의 약점이 있었기에 손쉽게 성홍주를 해결했었다.그리고 왕송영 측은 그나마 말도 잘 듣고 자기를 위해 생각도 많이 해준 이유로 지금까지 손을 대지 않았다.“아직 결혼식
한편, 검은색 승용차는 JL빌라에서 천천히 나가고 있다.뒷좌석에 앉은 고정남은 등을 지그시 기댄 채 얼굴에는 피곤한 기색이 역력하다.오랫동안 참아 왔던 감정으로 오는 내내 기대가 컸던 만큼 실망도 이내 컸다.마치 천국에서 지옥으로 뚝 떨어지는 듯한 느낌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다.하지만 진정하고 나서 다시 생각해 보니 이런 것이 오히려 더욱 합리적인 듯싶었다.만약 정말로 강미영을 만나게 된다면 사실인지 아닌지 긴가민가할 것만 같았다.지금껏 여러 해 동안 찾아다녔음에도 불구하고 그 어떠한 소식도 알아내지 못했으며 강미영은 응당 자기를 피해 다녀야 한다고 생각했다.혹은 포기하지 않고 강미영을 찾아다닌 것처럼 강미영도 그만큼 자기를 쉽게 용서하지 않을 것으로 생각했다.하지만 그게 무엇이든 상관없다.이 순간이 오기를 여러 해 동안이나 기다렸는데, 며칠 늦어진다고 해서 조급하지는 않았다.강미영이 서울로 돌아왔다는 것을 알고 지금 같은 도시에서 생활하고 있는 것만으로도 만족스러웠다.“차 세워.”고정남은 차가운 목소리로 운전 기사에게 말했다.이곳은 별장 구역이라 대문을 나서더라도 내부 도로와 거리가 있다.그들은 지금 별장 구역과 주간 도로 중간에 차를 세운 채 절대 그만두지 않겠다는 자세를 드러내고 있다.운전기사는 잠시 망설이더니 나지막이 일깨워주었다.“고 대표님, 오늘 저녁에 댁으로 돌아가셔서 사모님 곁을 지켜줘야 합니다.”그러자 고정남은 보지도 않고 말했다.“밀어.”“……”이에 운전기사는 어안이 벙벙해졌다.그렇게 얼마나 지났는지, 고정남의 휴대전화가 울리기 시작했다.고정남은 눈살을 찌푸리며 마냥 귀찮아한 채로 휴대전화를 꺼내 화면을 한 번 보고는 전화를 받았다.“고 대표님, 정철 어르신께서 조금 전에 나가셨습니다. 아마 박철순 씨와 약속을 잡은 것 같습니다.”그 소리를 듣고 고정남은 저도 모르게 허리를 곧게 펴고 물었다.“두 사람은 어쩌다가 약속까지 잡게 된 것이냐?”“박철순 씨께서 먼저 어르신께 연락을 드린 것으로 보입니다
바론 공작이 잠시 멍해져 있다가 물었다. “어른들을 어떻게 대하는데?”강유리가 정색하며 대답했다. “그냥 친구처럼요!”바론 공작의 얼굴에 당혹감이 가득했다. “아빠가 저보다 어른인 걸 누가 모른다고 매번 그걸 강조하시는 거 지겹지도 않으세요? 심지어 오늘은 사적인 자리라고요. 잘난 척은 넣어두시죠? 이런 식으로 저한테 간섭하시는 게 제 천성을 얼마나 구속하는데요!”“......”바론 공작은 강유리가 말한 앞의 두 문장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강조하든 말든 자신이 어른이라는 것에는 변함이 없었으며, 이게 사적인 만남이라는 이유 하나로딸이 이렇게 버릇없이 굴어도 된다는 말인가? 딸의 버릇없는 말에 기분이 나빠지려던 찰나에 들은 강유리의 마지막 말은 바론 공작의 주의를 다른 곳으로 돌리기에 충분했다. “네 천성?”강유리가 눈을 크게 뜨고 양손을 턱 아래로 받쳐 얼굴을 치켜들더니 귀여운 모습을 했다. “네! 제 활발하고! 귀엽고! 장난꾸러기 같은 천진난만한 천성이요!”“…” 바론 공작이 잠시 침묵했다. 침묵이 길어지자 룸 안에 이상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강유리 역시 바론 공작의 태도에 이상함을 느꼈다. 강유리에게 익숙한 장소인 데다가, 위계질서가 딱딱하게 잡혀 있는 영국 황실을 벗어났으니 아무래도 평소보다 자신을 많이 풀어버렸고 그 결과, 강유리는 눈앞에 있는 남자도 두려워하지 않고 제멋대로 행동해 버린 것이다. 그게 평소였다면 괜찮았겠지만, 바론 공작의 눈빛을 계속 받고 있자니 강유리의 심장이 쿵쾅거리기 시작했다. 강유리는 무표정한 얼굴로 손을 다시 제자리로 하더니 의자에 단정하게 앉았다. “장난 한 번 쳐본 건데, 안 웃기면 됐어요.”바론 공작이 낮은 목소리로 무뚝뚝하게 말했다. “너한테 이런 성향이 있는 줄은 전혀 몰랐구나.”“…” 강유리가 침묵했다. ‘이게 무슨 의미지? 지금 날 비웃는 건가?’“구속하지 않을 테니, 계속 이렇게 있어주렴. 어린아이는 이래야지.” 바론 공작이 표정 변화 없이 말했다. 강유리가 믿을 수 없다는
바론 공작은 육시준의 질문이 당황스러웠는지 육시준의 시선이 어디에 가 있는 지도 의식하지 못한 채 자신만의 세계로 빠져들었다. “내 사업은 나 혼자만의 일이 아니야.”“그 말씀은 좋아하는 사람을 포기하시겠다는 겁니까?”“당연히 아니지!”바론 공작이 미간을 찌푸리더니 부정했다. “어떤 사람은 사랑 말고도 등에 지고 있는 것들이 많아. 책임이나 집안의 흥망성쇠 같은 것들 말이지. 난 내가 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과 내가 신경 쓰고 있는 사람들을 지키기 위해 노력하네.”“......”육시준이 눈을 치켜뜨며 바론 공작을 바라봤다. 바론 공작의 대답은 의외이면서도 어느정도 예상했던 대로였다. 하지만 그의 대답으로 인해 마음속에서 어느 정도 확신을 얻게 됐다. 강유리가 옆에서 열심히 고개를 끄덕이며 둘의 대화에 끼어들었다. “아버지 말씀이 맞는 것 같아요, 저도 동의해요.”높은 지위에 앉게 되면, 자기가 어찌할 수 없는 일들이 생기기 마련이었다. 여자를 물건 취급하는 사람들에 비하면 바론 공작은 친절한 편이었다.두 딸을 입양해 키운 것도 역시 환경과 상황 때문에 좋아하는 사람과 함께하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안타까운 일이었다. 바론 공작이 고개를 돌려 깊어진 갈색 눈동자로 상기된 채 물었다. “내 의견에 동의한다고?”강유리가 믿을 수 없다는 듯 상기된 바론 공작의 모습에 잠시 멍해졌다가 대답했다. “당연하죠! 사랑이 인생의 전부는 아니니까요! 그리고 아버지의 이런 생각은 정말 성숙한 어른만이 할 수 있는 생각인 것 같아요, 정말 대단해요!” 강유리가 엄지 손가락을 치켜올려 보이며 그의 말에 동의했다. “언니가 동의하면 나도 동의해! 성숙한 남자는 최고지!” 릴리가 옆에서 거들었다. “......”두 딸의 지지를 얻은 바론 공작의 기분이 좋아진 듯했다. 강유리가 이렇게 이성적인 생각을 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던 육시준이 놀라 그 질문을 했던 진짜 목적도 잠시 잊었다. 옆에서 대화를 들으며 웃고만 있던 강학도가
강미영의 안목은 틀린 적이 없다는 사실이 증명됐다.그녀가 이성적으로 판단했을 때는 틀린 적이 없다는 것을 이제껏 과연 누가 알았을까?아래층 테이블 옆쪽. 고정남이 우연을 가장해 좋은 분위기가 이어지던 테이블의 대화를 끊었다. “도 선생님, 이런 곳에서 만나다니 정말 우연이네요! 여기서 뭘 하고 계셨습니까?” “......”테이블에 앉아있던 두 사람이 고개를 돌렸다. 고정남을 본 고정철이 잠시 미간을 찌푸렸지만 애써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형님.”도 선생은 고정남을 보고 잠시 의아한 표정을 했지만 이내 웃으며 말했다. “고 사장님, 안 그래도 방금 사장님 이야기를 하던 중이었는데 이렇게 만나 뵙는군요.”고정남이 신이 나서 말했다. “아? 제 이야기를요?”고정철이 차가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형님이 그 땅에 관심이 참 많으시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었습니다.“…” 고정남이 침묵했다. 도 선생과 고정철이 만나서 그 프로젝트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니 고정남은 자신이 마음을 바꿔 이곳에 온 게 천만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고정철 역시 프로젝트를 위해서 급하게 이곳으로 온 게 분명했다. “서울의 특징을 알아보고 싶어서 일부러 서울을 방문한 거라 자문을 구할 겸 담소나 나누고 있었습니다.”도 선생이 담담한 말투로 설명했지만 고정남이 듣기엔 전혀 믿음이 가지 않았다. ‘자문이라, 자문을 구하다 프로젝트 얘기까지 나온 건가?’고정철에게 이런 능력이 있을 줄은 몰랐는데, 생각보다 꽤 예리한 구석이 있는 모양이었다. 고정남이 테이블 옆에 서서 자기 어필을 시작했다. “서울이라면 저도 잘 알고 있기도 하고, 저희 고성 그룹에서도 특색있는 여러 가지 사업을 하고 있는데 도 선생님께서 흥미가 있으시면 설명해 드려도 될까요?” 도 선생은 딱히 사람을 가리지도 않았고 오는 사람을 막을 이유도 없었다. “좋습니다, 고 사장님이랑도 자리가 있었으면 했는데 오늘 이렇게 만나게 되니 굉장히 영광입니다.”그렇게 말하며 직원을 불러 한 사람분의 수저를 추가로 세팅했
식사가 끝난 뒤, 바론 공작이 짧게 숨을 내쉬더니 내일 출발할 예정이며, 그쪽의 일이 다 처리가 되면 공명정대하게 돌아와 강유리의 결혼식에 참석할 것이라고 말했다. 육시준은 바론 공작이 그렇게 말할 것이라고 예상했는지 이미 준비가 끝났다고 말했다. 릴리가 급하게 손을 들더니 말했다. “난 안 갈래요! 유리 언니랑 결혼식 날까지 여기서 외할아버지랑 같이 지내기로 약속했어요!”강미영이 생각도 안 해보고 릴리의 말을 거절했다. “안돼. 이 정도 놀았으면 됐지, 학교는 안 갈 거야?”그러자 릴리가 얼굴색 하나 안 바뀌고 말했다. “아이, 학교에서 배우는 거 이미 다 아는 거라고요! 그냥 가서 시간만 떼우다 오는 건데 그럴 거면 그냥 여기서 외할아버지랑 시간 보내는 게 훨씬 나아요!”강미영이 릴리에게 뭐라고 하려고 할 때, 강학도가 중간에서 입을 열었다. “가기 싫으면 가지 말렴, 여기서 외할아버지랑 같이 보내자꾸나.” 강미영이 눈썹을 찌푸리며, 마음에 안 든다는 말투로 말했다. “아버지!”강학도가 어쩔 수 없지 않냐는 표정으로 강미영을 달랬다. “여기까지 오는 게 쉬운 일도 아닌데, 애한테 너무 그러지 말아라.”“그런 게 아니라 저는…”“제 언니랑 형부도 여기 있는데 무슨 문제가 생기겠니, 걱정은 넣어둬라.”“......”강미영이 잠시 생각하더니 강학도의 뜻을 이해한 듯했다. 고정남의 태도로 보아 그를 이기기 위해선 결국 소란이 일어날 수밖에 없었는데, 어차피 소란이 일어나야 한다면 결혼식 날보단 고정남에게 시간을 더 주는 편이 모두에게 더 좋았다. 육시준이 강학도와 그 옆에서 고민하고 있는 강미영을 보더니 말했다. “걱정하지 마세요, 릴리는 저희가 잘 보살피겠습니다.”바론 공작이 그날 오후 강미영이 했던 ‘세상엔 피할 수 없는 일이 있고 결국 그 일에 맞서야 한다’는 말을 기억해 냈다. 그때 강미영은 분명 모든 준비를 다 했다고 했지만 아무것도 모르는 듯한 릴리를 보니 그 말이 틀린 것 같았다. “좋아, 그럼 여기 남는 걸로 하자.” 바
강미영의 위로에 가라앉아있던 강유리의 기분이 조금 좋아졌다. 강유리는 원래 괜찮다고 어쩔 수 없다고 말할 생각이었으나 그녀의 입 밖으로 튀어나온 말은 전혀 다른 말이었다. “꼭 그 집에 가셔야 해요? 그냥 전화로 하면 안 되는 거예요? 남은 시간이 많지도 않은데 꼭 이렇게 빨리 가셔야겠어요? 강유리가 입을 삐죽이며 나지막이 말했다. 이렇게까지 원망 섞인 말투로 말할 생각은 아니었는데 말하다 보니 어리광을 피우는 모양새가 되어 버린 것 같아 잠시 멈칫한 강유리가 말을 덧붙였다. “외할아버지랑은 시간을 보내지도 않으셨잖아요!”강유리의 목소리가 높아질수록 그녀의 숨기지 못한 진심이 더 느껴졌다. 강미영이 눈을 가늘게 뜨더니 이번엔 강유리를 설득하는 걸 관두고 옆에 있는 남자를 바라봤다. 바론 공작의 눈에 서려 있던 의심과 당혹감이 모두 사라지고 그곳엔 기쁨만이 자리 잡았다. ‘설마 지금 내가 돌아가는 게 아쉬운 걸까?’원래 강유리는 쌀쌀맞고 사람과 거리를 두는 편인 데다가 바론 공작과도 그렇게 친밀한 관계가 아니었기에 강유리 자신의 감정이나 생각을 바론 공작에게 말한 적이 없었다. 바론 공작은 강유리가 정말 많이 변했다고 느꼈다. 강유리의 진심이 드러나 버린 지금 이 작은 소동은 바론 공작의 마음을 약하게 하기에 충분했고, 바론 공작은 정말 다른 일은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은 채 그저 딸의 말을 들어주고 싶은 생각뿐이었다. 바론 공작이 입술을 깨물더니 천천히 강유리의 앞으로 걸어갔다. 그러더니 머뭇거리며 두 팔을 뻗어 강유리를 안았다. “다음에 돌아오면 그땐 꼭 너랑 더 많이 있어주마.”“......”강유리가 어색하게 고개를 내리더니 말했다. “누가 저랑 같이 있어 달래요? 제 말은 외할아버지였다고요!”강유리의 저런 고집스러운 모습마저도 귀엽다고 생각한 바론 공작이 피식 웃었다. 이제 보니 정말 제 엄마와 똑같은 모습이었다. 바론 공작이 품에 안고 있던 강유리의 이마에 입을 맞췄다. “그래, 외할아버지랑 시간을 보내는 김에 겸사겸사 너랑
바론 공작의 말은 강유리를 감동하게 했다. 다만 멀어지는 차를 보고 있자니 강유리는 방금까지의 모습이 조금 부끄러워져서 일부러 더 날카롭게 말했다. “온 가족이 다시는 헤어지지 않을 거라니 무슨, 죽으러 가는 것도 아닌데.”“그러니까! 저 사람 우리 아빠 맞아? 아무래도 아빠가 귀신에 홀렸나 봐. 손발이 오그라들어서 인사도 제대로 못 했네!” 릴리가 잠시 멈칫하더니 다시 말을 이었다. “근데, 귀신에 홀린 건 언니도 마찬가지인가 봐?”“그만! 그만 말해!”“......”두 자매가 아빠와의 작별 인사를 곱씹고 있을 때, 육시준과 강미영은 아무 말이 없었다. 아직 제대로 된 이별을 경험해 보지 못한 그녀들은 그게 얼마나 잔인한 일인지 제대로 깨닫지 못했다. 릴리가 제일 먼저 차에 올라탔고, 육시준이 차 문을 열어 주자 강미영도 그 위에 올라탔다. 바로 그때, 고정남과 그 형제 역시 주차장에서 도 선생을 배웅하는 중이었다. 고정남이 고개를 돌렸다가 마침 강유리 일행이 그곳에 있는 것을 발견하고 눈을 빛내며 달려와 인사를 했다. “아이고, 이런 우연이 있나요!”“그러게 말입니다. 방금 위층 룸에서 고 대표님이 급하게 들어오는 거 봤습니다.” 육시준이 숨김없이 말했다. 고정남이 자신의 차 뒤편을 바라보는 육시준의 시선을 알아채고는 급히 고개를 돌려 육시준을 바라봤다. 육시준이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웃었다. “아주머니께서 고 사장님이 집으로 방문하실 거라는 걸 듣고 이 기회에 사장님이랑 만날 기회가 생겼다고 좋아하셨는데 아무래도 사장님은 다른 쪽으로 마음을 정하신 것 같아 아쉽습니다.”고정남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그분은 지금 어디에 계시나요?”육시준이 대답했다. “오늘 밤 비행기라 급히 가셨습니다.” “......”고정남이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육시준을 죽어라 노려봤다. 이제야 고정남의 머릿속에서 뭔가 맞춰지기 시작했고 그럴수록 고정남의 얼굴이 더 험악하게 변해가더니 한가지 생각이 머리를 때렸다. ‘설마 오늘
신주리는 고민하다가 말했다.“난 최근에 일이 많지 않아 괜찮지만 다음 달에 곧 새로운 촬영을 시작할 거야.”육시준은 고개를 끄덕였다.“네. 다음 달에 돌아가면 촬영 일정을 맞출 수 있어요.”육경서는 그들이 두어 마디 말로 일정안배를 끝내가 다급하게 입장을 밝혔다.“나도 있어! 주리가 돌아가지 않으면 나도 안 돌아갈래!”신주리는 흘겨보며 물었다.“넌 바쁘지 않아?”“마침 이 영화가 촬영을 마감할 예정이야. 기타 활동은 중요한 건 뒤로 미루고 중요하지 않은 건 매니저더러 거절하게 하면 돼.”육경서는 미처 깊게 생각하지도 않고 말했다.강유리는 반대하지 않고 귀띔했다.“강덕준 감독이 널 죽일 수도 있어.”육경서는 아랑곳하지 않았다.“괜찮아. 한 달뿐이잖아. 설마 날 따라 여기까지 오겠어?”강덕준이 그를 죽일지는 둘째치고, 어쨌든 지금 바론 공작은 그를 죽여버리고 싶었다.그는 그저 예의상 딸아이의 친구들을 초대해서 놀게 했을 뿐인데 결국 딸아이가 다음 달 귀국하는 일정을 안배하게 되다니?병원에서 육시준이 비아냥거리던 말을 그는 실행할 계획이었다. 단계마다 다른 이유로 딸을 만류하고 싶었고 시름 놓고 이곳에서 편히 안태하게 하고 싶었다.그러나 사위는...만약 자기 일을 다 처리했다면 남아있어도 괜찮았다. 부양할 수 없는 것도 아니니 말이다.그러나 지금 덤으로 두 사람이 더 생겼고 또 이 두 사람은 시간 맞춰 돌아가야 했다. 돌아가지 않으면 재촉당할 것이 뻔하다.“두 분이 바쁘면 굳이 남지 않아도 돼. 유리는 지금 손님 접대하는 게 불편하거든.”그는 정색해서 다시 말했다.그러자 여러 가지 눈빛이 삽시에 바론 공작을 향했다......신주리와 강유리는 제작팀과 반나절만 휴가를 냈기 때문에 오후에 돌아가야 했다. 그러나 오전 시간만으로 두 친구가 얘기하기엔 터무니없이 부족해 강유리는 직접 감독에게 전화해 하루 연장했다.점심시간.신주리는 육시준의 자리에 앉아 강유리의 옆에 누워 계속 절친끼리 이야기를 했다.강유리는 이번에 단도직입적
저쪽에서 한참 동안 침묵이 흘렀다.상대방도 자신만큼 놀란 모습을 상상하며 육경서는 다음 이야기가 기대되었다.그러나 생각지도 못하게 송미연은 놀랐지만 기뻐하는 기색이 없었다.“유리 찾으러 갔어? 프로그램을 녹화한다며 왜 그들을 찾으러 갔어? 거기는 시간이 아직 이르지 않아? 이맘때면 유리는 잠을 잘 자지도 못했을 건데...”송미연은 육경서가 철이 없이 강유리가 잘 쉬지 못하게 방해한다고 한바탕 야단을 쳤다.그러나 그녀의 말은 한 가지 중요한 소식을 알렸다.“진작 알고 있었어요?”“물론이지!”송미연은 자랑스럽게 말했다.“며느리가 임신했는데 이렇게 큰 소식을 어떻게 바로 나에게 알려주지 않을 수 있겠어? 경고하는데 너무 떠들지 마. 네 형수님을 화나게 하면 안 돼! 그냥 녹화만 잘하면 되는 거 아니야? 주리가 널 용서했어? 왜 돌아다니며 다른 사람의 가십거리를 알아내려고 해! 이번에 돌아와서 주리의 용서를 받지 못한다면 넌 아예 돌아오지도 마!”...화제가 자신을 욕하는 방향으로 변해버리자 육경서의 열정은 순식간에 식어버렸고 목소리도 누그러들어 어쩔 수 없이 말했다.“알았어요. 알았어요. 제가 원한 줄 아세요? 이것도 어쩔 수 없었기 때문이잖아요...”“뭐가 어쩔 수 없다는 거야? 모두 네가 자초한 거잖아! 쌤통이야!”“...”“섬에서의 상황이 어떤지 모르니 넌 주리를 잘 돌봐야 해. 난 실시간으로 라이브 방송을 살펴보고 있을 테니 넌 주리 괴롭히지 마.”송미연이 또 당부했다.육경서는 머뭇거리다가 정색해서 대답했다.“알았어요. 걱정하지 마세요.”송미연은 또 몇 마디 더 당부한 후 전화를 끊었다.육경서는 어두워진 휴대폰 화면을 보며 입꼬리를 올리며 웃었다.‘잘됐어. 아빠 엄마가 다 주리를 좋아하니 나중에 언제든지 주리는 억울함 당하는 일이 없을 거야. 적어도 내가 있는 한 억울함 당하지 않을 거야...”...점심은 빌라의 셰프가 만든 영양식이다. 맛은 좋지만 오래 먹으면 질릴 수 있어 강유리는 이 음식을 보며 저도 모르게 한숨
그러나 앉은 자리가 아직 따뜻해지기도 전에 육경서는 흥분된 듯 바로 일어나 소리쳤다. “뭐? 임신했다고?” 바론 공작은 짜증 섞인 눈길로 그를 쳐다보며 말했다. “목소리 좀 낮춰. 뭘 그렇게 놀라!” 그는 지금까지는 침착한 모습을 유지하고 있었지만 사실 소식을 들었을 땐 당황하고 흥분했던 걸 그가 모를 리 없었다. 육경서는 입을 막으며 어색하게 다시 앉았다. 하지만 그의 눈빛은 반짝이며 감출 수 없는 흥분이 드러났다. ‘나 이제 삼촌 된다! 삼촌 된다!’ “의사가 말하기를 첫 3개월은 불안정하니까 특히 조심해야 한다고 했다. 아버지도 이 소식을 공개하지 말고 태아가 안정될 때까지 기다리자고 하셨다.” 바론 공작은 드물게 인내심을 가지고 설명했다. 그는 그 말을 끝내며 신주리를 한번 훑어봤다. “그래서 나는 유리를 위해 사람들을 안배해 가까이서 돌보게 한 거다.” 그의 시선을 느낀 신주리는 고개를 들었다. 그녀는 공작을 한 번 보고 다시 눈을 내리깔며 강유리의 아랫배를 바라봤다.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마치 한번 만져보고 싶은 듯했지만 참았다. 그녀의 눈은 아름답게 빛나고 있었고 육경서와 같이 흥분과 기쁨을 숨길 수가 없었다. 그녀는 강유리의 아랫배를 가리키며 말했다. “그래서 지금 이 안에 작은 생명이 자라고 있는 거야?” “맞아.” 강유리가 그녀를 보고 웃으며 말했다. 신주리는 표정은 진지했지만 눈 속에 담긴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그럼 만져봐도 돼?” 육경서도 순간 정신을 차리며 손을 내밀었다. “나도...” “안 돼!” “안 돼!” 두 명의 목소리가 동시에 차갑게 외쳤다. 그들의 무리한 요구를 바로 거절했다. 강유리는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돌려 옆에 있던 두 남자를 쳐다봤다. 그녀는 그들에게 체면을 차리지 않았고 대신 신주리에게만 속삭였다. “조금 있다가 방에 들어가면 만져도 돼.” 육시준과 바론 공작은 동시에 얼어붙었다. ‘우리가 안 들릴 거라고 생각하나?’ 육경서는 기대에 찬 눈빛으로 강유리를
육경서는 얼굴에 기쁨이 가득한 채 입을 열려던 순간 정원에서 누군가가 다가왔다. 그 사람은 유창한 한국어로 두 사람에게 따뜻하게 인사했다. “이쪽이 둘째 도련님이랑 신주리 씨 맞으시죠? 강유리 아가씨께서 이미 기다리고 계십니다.” “안내 부탁드려요.” 신주리가 부드럽고 예의 있게 대답했다. 육경서는 잠시 멍한 표정을 지었다. ‘이 사람, 왜 이렇게 때맞춰 나타나는 거지? 다른 때는 왜 안 오고, 바로 이때 오냐고!’ “잠깐만요. 저희 형수 말고 일단 먼저 빌라를 둘러보고 싶어요!” 그가 급하게 발걸음을 옮기며 안내하는 집사를 붙잡았다. 집사는 그의 눈을 한 번 쳐다본 뒤 다소 의아해하는 표정으로 멈췄다. 신주리는 미소를 띤 채 침착하게 말했다. “미안해요. 낯을 가려서 그래요.” 육경서는 혼란스러웠다. ‘이게 무슨 말이야? 내가 낯을 가린다고? 왜 그렇게 갑자기...’ 집사는 이해한 듯 웃으며 공작님도 그들의 방문을 매우 기쁘게 생각해 오늘 특별히 이곳에서 기다리고 있다고 전했다. 육경서는 그 한마디도 제대로 듣지 않았고 눈앞의 신주리를 원망스러운 눈길로 바라봤다. ‘주리는 도대체 이게 무슨 뜻이야? 너무 쉽게 대답해서 다시 부정하려는 건가?’ 그들이 정원으로 들어섰고 이곳은 여전히 고요하고 우아한 분위기였다. 뜨거운 태양 아래 한쪽에서 차와 다과가 준비된 작은 테이블이 보였다. 강유리는 햇볕을 가린 파라솔 아래에 앉아 있었고 그 앞에는 육시준이 전화를 끊고 있었다. 바론 공작이 불만을 표하며 입을 열었다. “하루 종일 그 전화기 들고 있으면 안 돼! 그렇게 바빠? 전자기기 방사선이 얼마나 해로운지 알지? 의사 선생님이 말했잖아. 첫 세 달은 불안정하다고, 푹 쉬어야 한다고!” 육시준은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지난달에 돌아갔으면 이미 처리했을 일인데요.” 바론 공작은 얼굴에 불편한 기색이 스쳤다. “일이라는 게 끝날 수 있나? 돌아가면 내 딸과 시간을 제대로 보낼 수 있을까 몰라!” 육시준이 말하려던 순간 강유
감독은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강하게 반박하지도 못하고 조심스럽게 말했다. “규정에 따르면 녹화 중에는 제작진 팀을 이탈하면 안 됩니다.” 역시나 신주리는 가볍게 되물었다. “녹화 시작할 때 그런 규정은 없었잖아요? 갑자기 추가된 건가요?” “그건 아니지만 지금 상황이...” “그럼 우리를 일부러 견제하려는 건가요? 그럼 그냥 프로그램 안 하면 되죠?” 감독은 말문이 막혔다. 사실 첫 번째 시즌에서 육경서가 사고를 당한 이후로 그는 이미 이 두 사람에게 꼼짝 못 하고 있었다. 조건을 협상하든 규칙을 정하든 이 둘이 하겠다고 하면 다행이고 안 하겠다고 하면 모든 게 물거품이 될 판이었다. 결국 이를 악물고 그는 포기했다. “알겠어요, 알겠어! 두 분 다 제가 졌습니다! 하지만 어디 가든 꼭 행선지를 알려주시고 제작진 팀에서 두 분의 안전을 보장할 수 있어야 합니다!” “걱정 마세요. 너무 오래 걸리진 않을 거예요. 점심 먹고 바로 돌아올게요!” 신주리가 대범하게 말했다. ‘점심도 먹고 온다고?’ 하지만 그가 불만을 표현하기도 전에 두 사람은 이미 유유히 그의 앞을 지나쳐 나가버렸다. 호텔 문을 나서자마자 감독은 서둘러 휴대폰을 꺼내 전화를 걸었다. 전화기 너머로 나른한 목소리가 들렸다. “여보세요?” “강 대표님, 경서 씨랑 주리 씨가 지금 강 대표님을 만나러 갑니다! 그런데 프로그램 효과를 위해서 행선지에 대한 건 절대 발설하시면 안 됩니다!” 감독이 진지하게 말했다. 강유리가 태연하게 대답했다. “만약 제가 발설하면요?” 감독은 순간 당황했다. 그는 이런 대답을 예상하지 못했다. ‘아니, 이건 우리 회사의 프로그램 아니었나? 이렇게 마음대로 행동해도 되는 거야? 시청률이 안 오르면 강 대표님에게도 손해 아닌가?’ 감독은 빠르게 머리를 굴리며 어떻게든 이 대형 회사를 설득해야겠다고 결심했지만 강유리는 그의 말을 끊으며 다시 말했다. “농담이에요. 발설하지 않을 테니 걱정 마세요.” 감독은 긴 한숨을 내쉬며 안도했
비행기에 오를 때 각자 다른 생각을 품고 있었고 내릴 때도 마찬가지였다. 목적지에 도착했을 땐 이미 다음 날 새벽이었다. 제작진 팀은 미리 준비한 차를 타고 그들을 예약된 호텔로 보냈다. 해변가에 위치한 경치가 아름다운 5성급 호텔이었다. 모두들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이번에 제작진 팀 정말 큰돈 쓴 거네! 이게 진짜 여행 같아!” “그렇지. 갑작스러운 느낌도 있지만 일정은 꽤 합리적이네!” “응, 또 감사한 건 처음에 우리 주리랑 경서에게 그 사건이 터진 후로 대우가 점점 더 좋아졌다는 거야. 그들은 정말 목숨을 걸고 얻은 거라니까!” 모두가 웃으며 체크인 절차를 마쳤다. 그때 감독 팀에서 메시지가 왔다. “오늘 밤은 여기서 쉬고 내일은 섬으로 갑니다.” 모두들 당황했다. ‘그래서 목적지는 여기가 아닌가?’ “목적지는 반대편에 있는 작은 관광 섬입니다. 규모는 작지만 최근 몇 년 동안 관광업이 급성장했습니다. 얼마 전 이 섬의 소유자가 바뀌어서 다시 한번 큰 화제를 일으켰죠.” 감독이 그렇게 말하자 신주리는 점점 더 익숙해지는 느낌을 받았다. “그게 바론 공작이 유리에게 선물한 섬이죠?” 감독이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육경서는 감탄하며 물었다. “그럼 어떻게 우리 형수를 설득했어요?” 감독 팀은 미소를 지으며 답하지 않았다. 실시간 채팅창에서는 감탄이 이어졌다. [유리 언니가 이번 프로그램을 위해 진짜 대규모로 투자한 거네!] [하하하, 유리 언니가 투자한 건 아니야. 그냥 완전 부모님에게 의지하고 있는 거지! 그리고 그 덕분에 도련님과 미래의 동서가 혜택을 보는 거고!” “나도 섬 주인 언니가 있었으면 좋겠다!” “이번에 유리 언니 우정 출연할지 궁금하다!” 아침 식사 후 모두 방으로 돌아가 시차를 맞추기 위해 잠을 청했다. 카메라는 잠시 쉬어갔다. 신주리는 비행기에서 잠깐 눈을 붙였기에 이제는 전혀 졸리지 않았다. 그녀는 샤워를 하고 옷을 갈아입은 후 모자와 선글라스를 쓰고 호텔 방을 몰래 빠져나
심지어 원피스까지 캐리어 하나에 다 준비해 놨다. “안 믿을지 몰라도 내가 쇼핑 리스트까지 작성했어. 엄마한테도 참고를 부탁했거든! 원피스는 엄마가 골랐어. 안심해, 눈썰미는 진짜 좋아!” 말을 하면서 그는 정말로 쇼핑 리스트를 꺼내서 신주리에게 보여줬다. 신주리는 그 리스트를 보지 않아도 이미 믿고 있었다. 심지어 조금 놀랐다. “너 그럼 네 짐은 어쩌고? 얼마나 챙겨왔어?” “짐 하나야. 나중에 필요하면 제작진 팀에 부탁할 거야!” 육경서는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듯 말했다. 신주리는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그녀가 너무 오랫동안 육경서를 바라보고 있었던 탓인지 휴대폰을 들여다보지 않은 채 그를 쳐다보던 신주리가 이상하다는 걸 눈치챈 육경서는 본능적으로 고개를 들어 그녀를 쳐다봤다. “왜?” 신주리는 아무 말 없이 시선을 돌려 휴대폰 화면을 바라보며 말했다. “이렇게 많아?” 육경서는 묘한 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그렇게 많은 건 아니야. Y 국에 있는 우리 회사 지사에서 몇 가지 더 준비해 줬거든...” 그가 말을 하다 갑자기 멈칫했다. 불필요한 말을 했다는 걸 깨달은 듯했다. 신주리는 그 모습을 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그리고 그녀의 머릿속에 갑자기 대담한 생각이 떠올랐다. “이번 목적지는 네가 제작진 팀에 요청한 거 아니야?” “무슨 말이야? 내가 그런 사람인 줄 알아?” 육경서는 당황한 듯 대답했다. “네가 그런 사람 아닌가?” 육경서는 잠시 생각에 잠긴 후 고백했다. “맞아, 그런 사람일 수도 있어. 하지만 이번에는 정말 아니야! 사실 내가 쓴 목적지는 원래 해변이었어. 이런 건 결국 다 준비해야 할 것들이잖아.” 신주리는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다. 대신 이제는 아예 잠을 잘 수가 없었다. 다른 한편에서는 서진태와 소지석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서진태는 진지하게 소지석에게 도씨 가문의 그 양성 계획에 대해 물어보았다. 이 계획은 너무나도 비상식적이어서 의심의 눈초리를 거둘 수 없었다. 완전히 그들
[하하하, 이게 무슨 이상한 조합이야? 어쩐지 묘하게 어울리기도 하고 또 웃기기도 하네!] [처음부터 차 안에서 자리싸움만 아니었어도 이렇게 어색하지는 않았겠지.] [우리 지원 언니 한마디로 모든 흐름이 뒤집혔어!] [강미영은 도대체 무슨 속셈이지? 우리 지석이를 일부러 피하는 거야?] [다시 한번 말하지만 소지석 팬들 너무 이기적이지 마! 누구든 미영 언니에게 다가갈 수 있고 미영 언니는 모두를 거절할 권리가 있어!] 좌석이 정리되고 비행기가 이륙을 준비하자 라이브 방송은 일시적으로 종료되었다. 이런 24시간 라이브 촬영 프로그램에서도 이렇게 잠깐 동안만은 각자가 자신만의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강미영은 라이브 방송이 종료된 뒤 의아한 표정으로 한지원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여전히 왜 한지원이 굳이 자신과 함께 앉으려고 했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물론 지금 상황에서 누가 자신에게 같이 앉자고 했어도 마다하지는 않았겠지만... “미영 언니, 난 저 커플 팬이야. 무슨 일 있으면 나한테 얘기해. 그러니까 제발 내 최애 커플 깨지지 않게 도와줘!” 한지원은 진지한 얼굴로 이유를 털어놓았다. 강미영은 살짝 멍해지더니 결국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알겠어, 앞으로 네 최애 커플 잘 지켜주도록 할게.” 한지원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밝게 웃었다. “정말 고마워! 덕분에 내 최애 커플이 마음 편히 연애할 수 있게 됐어!” 강미영은 눈가를 약간 찡그리며 물었다. “근데 언제부터 걔네 둘의 팬이 된 거야? 그리고 지금 걔네 둘 관계 꽤 안정적이던데 내가 굳이 뭐 하러 그걸 망치겠어?” 한지원은 고개를 저으며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미영 언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야. 중요한 건 이런 카메라 밖에서의 달달한 순간들이지.” 강미영은 순간 뭔가를 깨달은 듯 눈썹을 살짝 치켜세웠다. “혹시 영감이라도 떠오른 거야?” 한지원은 멍하니 있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언니의 작은 호의 하나가 한 명의 유명 만화가를 탄생시킬 수도 있어!” 강
그는 단지 이런 행동을 통해 자신의 마음을 표현하고 싶었다. 강미영에게 그를 좀 더 이해할 기회를 주고 소지석에게는 그가 혼자서만 밀어붙이지 않도록 눈에 띄게 하려 했다. 그러나 이 행동을 알아본 사람들도 있지만 일부 팬들은 그를 오해하거나 비판하기도 했다. [솔직히 말해서 서진태는 너무 경계가 없지 않나요? 경쟁하고 싶다 해도 이렇게까지 급하게 해야 하나요? 왜 꼭 같이 앉아야만 하는 거죠?] [맞아요! 강미영 언니는 분명히 불편해 보였고 바로 피해서 조수석에 앉았잖아요!] [좋아한다고 해도 좀 경계를 두고 해야죠.] [근데 소지석 팬들 너무 이중잣대 아니에요? 오빠가 같이 앉고 싶으면 직설적으로 다가가도 ‘멋지다, 드디어 마음을 표현했다!’고 하는데 서진태가 다가가면 ‘경계가 없다’고 비판하잖아요?] [맞아요. 서진태는 사실 강미영 언니와 앉고 싶은 것보다는 자신의 마음을 표현하고 싶었던 거죠.] 댓글창은 점점 떠들썩해졌다. 신주리와 육경서의 강미영에 대한 이해도는 완벽했다. 감정상에서 경쟁이 시작되면 그녀는 주저 없이 피할 것이다. 강미영은 감정을 물건처럼 경쟁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이런 성격의 프로그램에서는 남성들끼리의 경쟁이나 여성들끼리의 경쟁이 감정을 더 순수하지 않게 만들 수 있고 로미오와 줄리엣이 될 거라고 생각했다. 결국 그런 외적인 압박이 감정을 더 강화시키는 효과가 생기게 된다. 사실 그들이 정말 사랑하는 건 아닐 수도 있다. 단지 지는 걸 참지 못해서 그런 것일지도 모른다. 그녀와 고정남의 관계도 그랬다. 주위에서 반대할수록 더 진지하게 여겨졌던 그 감정이었지만 결국 그것은 진정한 사랑이 아니라 엉망이 된 감정이었음을 깨달았다. “네가 졌으니까 내 선물 잊지 말고 사 와.” 신주리는 자신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육경서는 그 결과를 보며 입술을 삐죽 내밀고는 돌아서서 그녀에게 엄지를 치켜들었다. “이번엔 네가 이겼어.” 신주리는 눈을 깜빡이며 말했다. “이번? 그럼 다음에도 나랑 내기할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