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 뭔 일 당하고 싶지 않으면 도망가는 것도 좋은 생각이야.’고정남은 오늘 갑자기 성신영과 함께 뜬금없이 강씨 가문으로 가자고 했는데, 아마 강유리를 위해 온 것으로 생각이 들었다.하지만 성신영은 예전의 성신영이 아니기에 더 이상 강유리의 들러리가 되고 싶지 않았다.“왜 그래?”육경원은 고개를 돌려 성신영에게 물었다.그러자 성신여은 고개를 저으며 이와 함께 시선도 도로 거두었다.“아무것도 아니야. 얼른 들어가자. 외할아버지께서 기다리시겠어.”이에 육경원은 고개를 끄덕이고 JL빌라로 차를 몰고 들어갔다.그러더니 주위를 살펴보면서 있는 듯 없는 듯 물었다.“근데 네 이 빌라 말이야, 듣기로는 성홍주가 돈을 냈다며?”“......”성신영은 순간 멈칫거리더니 육경원의 뜻을 헤아리며 조심스레 대답했다.“맞아. 나한테 선물로 준 빌라야. 내 이름으로 되어 있고 난 인제 고씨 가문 사람이라 이 빌라는 성홍주 자산 동결 범위에 속하지 않았어.”“네 이름으로 되어 있으면 너 스스로 처리할 권리도 있다는 말이네.”성신영은 그 말의 뜻을 조금씩 알아차리기 시작했다.“우린 부부니깐 함께 의논하고 결정해야지. 만약 무슨 생각이라도 있으면 언제든지 말해. 네 생각부터 존중해줄게.”이러한 성신영의 태도가 마음에 들었는지 육경원은 성신영의 손을 잡았다.“신영아, 넌 늘 이렇게 배려심이 깊어.”그러자 성신영은 안절부절못하며 웃었다.“당연한 걸 그래.”앞을 바라보며 육경원은 덤덤한 목소리로 말했다.“왕소영은 너를 키워준 어머니이기에 앞으로 연락을 유지해도 상관없어. 근데 왕씨 가문 사람들은 네가 돌봐줘야 할 의무 따위는 없어.”지난번 고성 그룹 주년 행사에서 육경원은 이미 성신영에게 경고하였었다.될 수 있는 한 빠른 시일 내에 “애물단지”를 해결하라고 했다.성신영의 손에는 성홍주의 약점이 있었기에 손쉽게 성홍주를 해결했었다.그리고 왕송영 측은 그나마 말도 잘 듣고 자기를 위해 생각도 많이 해준 이유로 지금까지 손을 대지 않았다.“아직 결혼식
한편, 검은색 승용차는 JL빌라에서 천천히 나가고 있다.뒷좌석에 앉은 고정남은 등을 지그시 기댄 채 얼굴에는 피곤한 기색이 역력하다.오랫동안 참아 왔던 감정으로 오는 내내 기대가 컸던 만큼 실망도 이내 컸다.마치 천국에서 지옥으로 뚝 떨어지는 듯한 느낌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다.하지만 진정하고 나서 다시 생각해 보니 이런 것이 오히려 더욱 합리적인 듯싶었다.만약 정말로 강미영을 만나게 된다면 사실인지 아닌지 긴가민가할 것만 같았다.지금껏 여러 해 동안 찾아다녔음에도 불구하고 그 어떠한 소식도 알아내지 못했으며 강미영은 응당 자기를 피해 다녀야 한다고 생각했다.혹은 포기하지 않고 강미영을 찾아다닌 것처럼 강미영도 그만큼 자기를 쉽게 용서하지 않을 것으로 생각했다.하지만 그게 무엇이든 상관없다.이 순간이 오기를 여러 해 동안이나 기다렸는데, 며칠 늦어진다고 해서 조급하지는 않았다.강미영이 서울로 돌아왔다는 것을 알고 지금 같은 도시에서 생활하고 있는 것만으로도 만족스러웠다.“차 세워.”고정남은 차가운 목소리로 운전 기사에게 말했다.이곳은 별장 구역이라 대문을 나서더라도 내부 도로와 거리가 있다.그들은 지금 별장 구역과 주간 도로 중간에 차를 세운 채 절대 그만두지 않겠다는 자세를 드러내고 있다.운전기사는 잠시 망설이더니 나지막이 일깨워주었다.“고 대표님, 오늘 저녁에 댁으로 돌아가셔서 사모님 곁을 지켜줘야 합니다.”그러자 고정남은 보지도 않고 말했다.“밀어.”“……”이에 운전기사는 어안이 벙벙해졌다.그렇게 얼마나 지났는지, 고정남의 휴대전화가 울리기 시작했다.고정남은 눈살을 찌푸리며 마냥 귀찮아한 채로 휴대전화를 꺼내 화면을 한 번 보고는 전화를 받았다.“고 대표님, 정철 어르신께서 조금 전에 나가셨습니다. 아마 박철순 씨와 약속을 잡은 것 같습니다.”그 소리를 듣고 고정남은 저도 모르게 허리를 곧게 펴고 물었다.“두 사람은 어쩌다가 약속까지 잡게 된 것이냐?”“박철순 씨께서 먼저 어르신께 연락을 드린 것으로 보입니다
바론 공작이 잠시 멍해져 있다가 물었다. “어른들을 어떻게 대하는데?”강유리가 정색하며 대답했다. “그냥 친구처럼요!”바론 공작의 얼굴에 당혹감이 가득했다. “아빠가 저보다 어른인 걸 누가 모른다고 매번 그걸 강조하시는 거 지겹지도 않으세요? 심지어 오늘은 사적인 자리라고요. 잘난 척은 넣어두시죠? 이런 식으로 저한테 간섭하시는 게 제 천성을 얼마나 구속하는데요!”“......”바론 공작은 강유리가 말한 앞의 두 문장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강조하든 말든 자신이 어른이라는 것에는 변함이 없었으며, 이게 사적인 만남이라는 이유 하나로딸이 이렇게 버릇없이 굴어도 된다는 말인가? 딸의 버릇없는 말에 기분이 나빠지려던 찰나에 들은 강유리의 마지막 말은 바론 공작의 주의를 다른 곳으로 돌리기에 충분했다. “네 천성?”강유리가 눈을 크게 뜨고 양손을 턱 아래로 받쳐 얼굴을 치켜들더니 귀여운 모습을 했다. “네! 제 활발하고! 귀엽고! 장난꾸러기 같은 천진난만한 천성이요!”“…” 바론 공작이 잠시 침묵했다. 침묵이 길어지자 룸 안에 이상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강유리 역시 바론 공작의 태도에 이상함을 느꼈다. 강유리에게 익숙한 장소인 데다가, 위계질서가 딱딱하게 잡혀 있는 영국 황실을 벗어났으니 아무래도 평소보다 자신을 많이 풀어버렸고 그 결과, 강유리는 눈앞에 있는 남자도 두려워하지 않고 제멋대로 행동해 버린 것이다. 그게 평소였다면 괜찮았겠지만, 바론 공작의 눈빛을 계속 받고 있자니 강유리의 심장이 쿵쾅거리기 시작했다. 강유리는 무표정한 얼굴로 손을 다시 제자리로 하더니 의자에 단정하게 앉았다. “장난 한 번 쳐본 건데, 안 웃기면 됐어요.”바론 공작이 낮은 목소리로 무뚝뚝하게 말했다. “너한테 이런 성향이 있는 줄은 전혀 몰랐구나.”“…” 강유리가 침묵했다. ‘이게 무슨 의미지? 지금 날 비웃는 건가?’“구속하지 않을 테니, 계속 이렇게 있어주렴. 어린아이는 이래야지.” 바론 공작이 표정 변화 없이 말했다. 강유리가 믿을 수 없다는
바론 공작은 육시준의 질문이 당황스러웠는지 육시준의 시선이 어디에 가 있는 지도 의식하지 못한 채 자신만의 세계로 빠져들었다. “내 사업은 나 혼자만의 일이 아니야.”“그 말씀은 좋아하는 사람을 포기하시겠다는 겁니까?”“당연히 아니지!”바론 공작이 미간을 찌푸리더니 부정했다. “어떤 사람은 사랑 말고도 등에 지고 있는 것들이 많아. 책임이나 집안의 흥망성쇠 같은 것들 말이지. 난 내가 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과 내가 신경 쓰고 있는 사람들을 지키기 위해 노력하네.”“......”육시준이 눈을 치켜뜨며 바론 공작을 바라봤다. 바론 공작의 대답은 의외이면서도 어느정도 예상했던 대로였다. 하지만 그의 대답으로 인해 마음속에서 어느 정도 확신을 얻게 됐다. 강유리가 옆에서 열심히 고개를 끄덕이며 둘의 대화에 끼어들었다. “아버지 말씀이 맞는 것 같아요, 저도 동의해요.”높은 지위에 앉게 되면, 자기가 어찌할 수 없는 일들이 생기기 마련이었다. 여자를 물건 취급하는 사람들에 비하면 바론 공작은 친절한 편이었다.두 딸을 입양해 키운 것도 역시 환경과 상황 때문에 좋아하는 사람과 함께하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안타까운 일이었다. 바론 공작이 고개를 돌려 깊어진 갈색 눈동자로 상기된 채 물었다. “내 의견에 동의한다고?”강유리가 믿을 수 없다는 듯 상기된 바론 공작의 모습에 잠시 멍해졌다가 대답했다. “당연하죠! 사랑이 인생의 전부는 아니니까요! 그리고 아버지의 이런 생각은 정말 성숙한 어른만이 할 수 있는 생각인 것 같아요, 정말 대단해요!” 강유리가 엄지 손가락을 치켜올려 보이며 그의 말에 동의했다. “언니가 동의하면 나도 동의해! 성숙한 남자는 최고지!” 릴리가 옆에서 거들었다. “......”두 딸의 지지를 얻은 바론 공작의 기분이 좋아진 듯했다. 강유리가 이렇게 이성적인 생각을 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던 육시준이 놀라 그 질문을 했던 진짜 목적도 잠시 잊었다. 옆에서 대화를 들으며 웃고만 있던 강학도가
강미영의 안목은 틀린 적이 없다는 사실이 증명됐다.그녀가 이성적으로 판단했을 때는 틀린 적이 없다는 것을 이제껏 과연 누가 알았을까?아래층 테이블 옆쪽. 고정남이 우연을 가장해 좋은 분위기가 이어지던 테이블의 대화를 끊었다. “도 선생님, 이런 곳에서 만나다니 정말 우연이네요! 여기서 뭘 하고 계셨습니까?” “......”테이블에 앉아있던 두 사람이 고개를 돌렸다. 고정남을 본 고정철이 잠시 미간을 찌푸렸지만 애써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형님.”도 선생은 고정남을 보고 잠시 의아한 표정을 했지만 이내 웃으며 말했다. “고 사장님, 안 그래도 방금 사장님 이야기를 하던 중이었는데 이렇게 만나 뵙는군요.”고정남이 신이 나서 말했다. “아? 제 이야기를요?”고정철이 차가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형님이 그 땅에 관심이 참 많으시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었습니다.“…” 고정남이 침묵했다. 도 선생과 고정철이 만나서 그 프로젝트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니 고정남은 자신이 마음을 바꿔 이곳에 온 게 천만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고정철 역시 프로젝트를 위해서 급하게 이곳으로 온 게 분명했다. “서울의 특징을 알아보고 싶어서 일부러 서울을 방문한 거라 자문을 구할 겸 담소나 나누고 있었습니다.”도 선생이 담담한 말투로 설명했지만 고정남이 듣기엔 전혀 믿음이 가지 않았다. ‘자문이라, 자문을 구하다 프로젝트 얘기까지 나온 건가?’고정철에게 이런 능력이 있을 줄은 몰랐는데, 생각보다 꽤 예리한 구석이 있는 모양이었다. 고정남이 테이블 옆에 서서 자기 어필을 시작했다. “서울이라면 저도 잘 알고 있기도 하고, 저희 고성 그룹에서도 특색있는 여러 가지 사업을 하고 있는데 도 선생님께서 흥미가 있으시면 설명해 드려도 될까요?” 도 선생은 딱히 사람을 가리지도 않았고 오는 사람을 막을 이유도 없었다. “좋습니다, 고 사장님이랑도 자리가 있었으면 했는데 오늘 이렇게 만나게 되니 굉장히 영광입니다.”그렇게 말하며 직원을 불러 한 사람분의 수저를 추가로 세팅했
식사가 끝난 뒤, 바론 공작이 짧게 숨을 내쉬더니 내일 출발할 예정이며, 그쪽의 일이 다 처리가 되면 공명정대하게 돌아와 강유리의 결혼식에 참석할 것이라고 말했다. 육시준은 바론 공작이 그렇게 말할 것이라고 예상했는지 이미 준비가 끝났다고 말했다. 릴리가 급하게 손을 들더니 말했다. “난 안 갈래요! 유리 언니랑 결혼식 날까지 여기서 외할아버지랑 같이 지내기로 약속했어요!”강미영이 생각도 안 해보고 릴리의 말을 거절했다. “안돼. 이 정도 놀았으면 됐지, 학교는 안 갈 거야?”그러자 릴리가 얼굴색 하나 안 바뀌고 말했다. “아이, 학교에서 배우는 거 이미 다 아는 거라고요! 그냥 가서 시간만 떼우다 오는 건데 그럴 거면 그냥 여기서 외할아버지랑 시간 보내는 게 훨씬 나아요!”강미영이 릴리에게 뭐라고 하려고 할 때, 강학도가 중간에서 입을 열었다. “가기 싫으면 가지 말렴, 여기서 외할아버지랑 같이 보내자꾸나.” 강미영이 눈썹을 찌푸리며, 마음에 안 든다는 말투로 말했다. “아버지!”강학도가 어쩔 수 없지 않냐는 표정으로 강미영을 달랬다. “여기까지 오는 게 쉬운 일도 아닌데, 애한테 너무 그러지 말아라.”“그런 게 아니라 저는…”“제 언니랑 형부도 여기 있는데 무슨 문제가 생기겠니, 걱정은 넣어둬라.”“......”강미영이 잠시 생각하더니 강학도의 뜻을 이해한 듯했다. 고정남의 태도로 보아 그를 이기기 위해선 결국 소란이 일어날 수밖에 없었는데, 어차피 소란이 일어나야 한다면 결혼식 날보단 고정남에게 시간을 더 주는 편이 모두에게 더 좋았다. 육시준이 강학도와 그 옆에서 고민하고 있는 강미영을 보더니 말했다. “걱정하지 마세요, 릴리는 저희가 잘 보살피겠습니다.”바론 공작이 그날 오후 강미영이 했던 ‘세상엔 피할 수 없는 일이 있고 결국 그 일에 맞서야 한다’는 말을 기억해 냈다. 그때 강미영은 분명 모든 준비를 다 했다고 했지만 아무것도 모르는 듯한 릴리를 보니 그 말이 틀린 것 같았다. “좋아, 그럼 여기 남는 걸로 하자.” 바
강미영의 위로에 가라앉아있던 강유리의 기분이 조금 좋아졌다. 강유리는 원래 괜찮다고 어쩔 수 없다고 말할 생각이었으나 그녀의 입 밖으로 튀어나온 말은 전혀 다른 말이었다. “꼭 그 집에 가셔야 해요? 그냥 전화로 하면 안 되는 거예요? 남은 시간이 많지도 않은데 꼭 이렇게 빨리 가셔야겠어요? 강유리가 입을 삐죽이며 나지막이 말했다. 이렇게까지 원망 섞인 말투로 말할 생각은 아니었는데 말하다 보니 어리광을 피우는 모양새가 되어 버린 것 같아 잠시 멈칫한 강유리가 말을 덧붙였다. “외할아버지랑은 시간을 보내지도 않으셨잖아요!”강유리의 목소리가 높아질수록 그녀의 숨기지 못한 진심이 더 느껴졌다. 강미영이 눈을 가늘게 뜨더니 이번엔 강유리를 설득하는 걸 관두고 옆에 있는 남자를 바라봤다. 바론 공작의 눈에 서려 있던 의심과 당혹감이 모두 사라지고 그곳엔 기쁨만이 자리 잡았다. ‘설마 지금 내가 돌아가는 게 아쉬운 걸까?’원래 강유리는 쌀쌀맞고 사람과 거리를 두는 편인 데다가 바론 공작과도 그렇게 친밀한 관계가 아니었기에 강유리 자신의 감정이나 생각을 바론 공작에게 말한 적이 없었다. 바론 공작은 강유리가 정말 많이 변했다고 느꼈다. 강유리의 진심이 드러나 버린 지금 이 작은 소동은 바론 공작의 마음을 약하게 하기에 충분했고, 바론 공작은 정말 다른 일은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은 채 그저 딸의 말을 들어주고 싶은 생각뿐이었다. 바론 공작이 입술을 깨물더니 천천히 강유리의 앞으로 걸어갔다. 그러더니 머뭇거리며 두 팔을 뻗어 강유리를 안았다. “다음에 돌아오면 그땐 꼭 너랑 더 많이 있어주마.”“......”강유리가 어색하게 고개를 내리더니 말했다. “누가 저랑 같이 있어 달래요? 제 말은 외할아버지였다고요!”강유리의 저런 고집스러운 모습마저도 귀엽다고 생각한 바론 공작이 피식 웃었다. 이제 보니 정말 제 엄마와 똑같은 모습이었다. 바론 공작이 품에 안고 있던 강유리의 이마에 입을 맞췄다. “그래, 외할아버지랑 시간을 보내는 김에 겸사겸사 너랑
바론 공작의 말은 강유리를 감동하게 했다. 다만 멀어지는 차를 보고 있자니 강유리는 방금까지의 모습이 조금 부끄러워져서 일부러 더 날카롭게 말했다. “온 가족이 다시는 헤어지지 않을 거라니 무슨, 죽으러 가는 것도 아닌데.”“그러니까! 저 사람 우리 아빠 맞아? 아무래도 아빠가 귀신에 홀렸나 봐. 손발이 오그라들어서 인사도 제대로 못 했네!” 릴리가 잠시 멈칫하더니 다시 말을 이었다. “근데, 귀신에 홀린 건 언니도 마찬가지인가 봐?”“그만! 그만 말해!”“......”두 자매가 아빠와의 작별 인사를 곱씹고 있을 때, 육시준과 강미영은 아무 말이 없었다. 아직 제대로 된 이별을 경험해 보지 못한 그녀들은 그게 얼마나 잔인한 일인지 제대로 깨닫지 못했다. 릴리가 제일 먼저 차에 올라탔고, 육시준이 차 문을 열어 주자 강미영도 그 위에 올라탔다. 바로 그때, 고정남과 그 형제 역시 주차장에서 도 선생을 배웅하는 중이었다. 고정남이 고개를 돌렸다가 마침 강유리 일행이 그곳에 있는 것을 발견하고 눈을 빛내며 달려와 인사를 했다. “아이고, 이런 우연이 있나요!”“그러게 말입니다. 방금 위층 룸에서 고 대표님이 급하게 들어오는 거 봤습니다.” 육시준이 숨김없이 말했다. 고정남이 자신의 차 뒤편을 바라보는 육시준의 시선을 알아채고는 급히 고개를 돌려 육시준을 바라봤다. 육시준이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웃었다. “아주머니께서 고 사장님이 집으로 방문하실 거라는 걸 듣고 이 기회에 사장님이랑 만날 기회가 생겼다고 좋아하셨는데 아무래도 사장님은 다른 쪽으로 마음을 정하신 것 같아 아쉽습니다.”고정남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그분은 지금 어디에 계시나요?”육시준이 대답했다. “오늘 밤 비행기라 급히 가셨습니다.” “......”고정남이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육시준을 죽어라 노려봤다. 이제야 고정남의 머릿속에서 뭔가 맞춰지기 시작했고 그럴수록 고정남의 얼굴이 더 험악하게 변해가더니 한가지 생각이 머리를 때렸다. ‘설마 오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