왠지 불안한 예감이 엄습하고...역시나 성홍주는 말을 이어갔다.“우리 집안 사정에 고성그룹 사람들에게 줄을 댈 수 있을 거라 생각해?”“그럼요.”성신영이 애써 미소를 지었다.“전 고정남 대표 딸이고 두 분은 절 지금까지 키워주신 분들이잖아요.”“그게 아니라... 강유리가 너무 타이트하게 압박하는 바람에... 널 이용했던 거야.”“그러게 내가 그러지 말자고 했잖아. 아무리 급해도 자식을 이용하진 말자고! 그런데 굳이 그렇게까지 해선... 나도 미쳤었지... 왜 당신 제안을 받아들여선. 지금 애 꼴을 봐. 어떻게 할 거야!”왕소영의 질타에 성홍주는 그 어떤 말도 하지 못했다.“후우...”이때 성신영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아니에요. 괜찮아요. 두 분께서 절 지금까지 키워주신 은혜가 있는데 마지막으로 두 분을 위해 할 수 있는 게 있다면 전 기꺼이 이용당할 수 있어요.”정말 이해를 못한 건지 아니면 사실을 부정하는 건지 여전히 맥락을 짚지 못한 성신영을 바라보던 성홍주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그러니까 내 말은... 넌 우리 딸이야. 고정철 대표가 널 가짜 딸로 위장하자고 제안했던 거야...”“그만하세요!”성신영이 목소리를 높였다.애써 침착한 척하던 눈동자 역시 빨갛게 달아올랐다.“가짜 딸로 위장한다는 게 말이 돼요? 아버지가 바보도 아니고 그런 거짓말에 속을 리가 없잖아요! 그리고 친자검사도 했는데...”“신영아, 일단 진정 좀 해. 받아들이기 힘들다는 거 알아. 하지만 너에 대한 자료와 친자검사까지 전부 고정철 대표가 조작한 거야. 그리고 지금 상황을 보아하니 고정남 대표 역시... 애초에 널 딸이라고 생각하지 않은 것 같아.”‘그저 신영이를 욕받이로 사용한 것뿐이겠지. 그리고 이제 이용가치를 다했으니 매정하게 버린 것뿐이고.’“아니야... 그럴 리가 없어...”그녀를 바라보던 고정남의 표정을 생각하며 성신영은 고개를 저었다.“우신 오빠가... 우신 오빠가 분명 그랬단 말이에요. 내가 동생이 맞다고. 날 처음 보는 순간
차가운 표정의 성홍주가 왕소영의 손목을 낚아챘다.“그만 좀 해. 언제까지 네 마음대로 굴 거야.”순간 당황하던 왕소영은 곧 성홍주를 향해 비웃음을 날려준 뒤 그의 손을 뿌리쳤다.“하, 아직도 허세야? 고정철도 연락두절에 이제 유강그룹은 끝이야. 지금까지 당신이 장부를 조작해 왔던 거 내가 모를 줄 알아?”“닥쳐!”성홍주가 호통을 쳤다.“그래서 뭐? 그깟 푼돈으로 나한테 유세라도 부리고 싶어? 당신 전 재산 다 퍼부어도 지금 유강그룹의 문제를 해결한 순 없어.”LK그룹이 강유리의 편을 들기로 한 이상 유강그룹의 상황은 풍전등화 그 자체.‘이대로 과거의 찌질했던 모습으로 돌아갈 순 없어. 내가 지금의 입지를 어떻게 다졌는데. 방법을, 어떻게든 방법을 찾아야 해.’생각이 여기까지 닿은 성홍주는 여전히 충격을 먹은 표정의 왕소영을 지나쳐 밖으로 나갔다.그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다 한참 뒤에야 정신을 차린 왕소영이 중얼거렸다.“찌질한 자식. 결국 제발 도와달라고 빌러 올 거면서...”금요일 오후.강유리는 평소처럼 병원으로 향했다.송이혁의 말에 따르면 1주일 정도만 더 입원한 뒤에는 퇴원을 해도 될만큼 강학도는 빠르게 건강을 회복하고 있다고 했다.‘퇴원하면 바로 우리 집으로 모셔야겠어. 할아버지가 아버지랑 다시 함께 살게 둘 순 없으니까...’이런 생각을 하면서 병실 앞에 도착한 강유리는 그 앞을 지키고 있는 송이혁을 발견하곤 고개를 갸웃했다.“왜 이제야 왔어요.”“왜요? 무슨 일 생겼어요?”자연스레 병실 안을 들여다 본 강유리의 표정이 무겁게 가라앉았다.‘아버지?’“누가 들여보낸 거예요?”꽤 화목해 보이는 두 사람의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강유리는 저도 모르게 까칠한 목소리로 물었다.“할아버님께서요.”송이혁이 어깨를 으쓱했다.시간을 확인하던 송이혁이 말을 이어갔다.“시준이한테도 연락했으니까 아마 곧 도착할 거예요. 그럼 집안일은 당사자들끼리 해결하시고. 전 이만 가보겠습니다.”“지금가지 기다려주서 고마워요.”강유리가
성홍주의 의자를 억지로 밀어내는 소리가 삐걱대며 울려 퍼졌다.조그마한 체구에서 어떻게 이런 힘이 나오는 건지 강유리의 힘에 밀린 성홍주는 하마터면 의자에서 떨어질 뻔하다 겨우 중심을 잡았다.“강유리!”불쾌한 목소리에 고개를 돌린 강유리가 어깨를 으쓱했다.“보다시피 병실이 많이 좁아요. 아버지까지 계시기엔 너무 답답하니 이만 나가주세요.”“...”말로는 강유리를 당해낼 자신이 없으니 성홍주는 강학도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하지만 이번에 강학도는 강유리를 꾸짓기는커녕 호탕하게 웃어보였다.“넌 참... 어렸을 때 그대로구나. 조심해. 그러다 네가 다칠라.”“할아버지는 제가 애인 줄 아세요?”강유리가 싱긋 웃어보였다.한편, 사이좋은 두 사람을 바라보는 성홍주의 표정이 조금씩 일그러졌다.‘이 익숙한 기분... 참 오랜만이군. 전에도 이런 식이었지. 강민영도, 강유리도 두 사람이 뭘 하겠다고 하면 뭐든 응원해 주면서 난... 수십 년이 지나도 가족으로 인정받지 못하는 이 기분... 저 영감 눈치 보는 것도 이제 지긋지긋해.’“유리야.”겨우 마음을 다잡은 성홍주가 다시 인자한 목소리로 강유리를 타이르기 시작했다.“아빠한테 섭섭한 거 많다는 거 알아. 하지만 그건... 너에 대한 시험 같은 거나 마찬가지였어. 이게 다 우리 유강그룹을 위해서였다고.”그제야 고개를 돌린 강유리는 또 무슨 개소리를 지껄이나 들어나 보자라는 심정으로 성홍주를 훑어보기 시작했다.“네가 이렇게 훌륭하게 커서 얼마나 자랑스러운지 몰라. 아까 할아버지한테도 말씀드렸지만 오늘 부로 유강그룹의 모든 업무를 네게 맡길 생각이다.”쿠궁!생각지 못한 전개에 당황한 강유리가 의아한 표정으로 고개를 돌리고 강학도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좋아요. 양도 계약서는 제가 작성해서 월요일까지 보내주실게요.”원하는 유강그룹을 쥐어주면 조금이라도 기뻐할 줄 알았것만 마치 빌려주었던 물건을 돌려받은 듯 너무나 당연하다는 표정을 짓는 그녀의 모습이 성홍주의 눈에는 너무 괘씸하게 보였다.“다음 주
성홍주가 병실을 나가자 성유리는 설득을 이어갔다.“왜 굳이 지분을 양도하려고 하시는 건데요. 저 혼자서도 유강그룹을 이끌어갈 수 있어요. 고마움의 의미요? 아버지가 그 동안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다 아시잖아요. 도대체 뭐가 고마운데요. 비록 지금은 증거가 없어서 가만히 있지만 언젠가 아버지가 했떤 일들 다 까밝힐 거예요.”하지만 그녀의 말을 듣고 있는 강학도는 여전히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왜 그 정도 지분에 그렇게 집착을 해? 어찌 어찌 해도 네 아버지야. 그냥 노후자금으로 줬다고 생각해.”“할아버지, 애초에 그 인간이 제 친아버지긴 해요?”강유리의 갑작스러운 질문에 살짝 흠칫하던 강학도가 헛웃음을 터트렸다.“그래. 아버지로서 제대로 된 역할을 못한 사람이라는 거 나도 안다. 하지만 아버지는 아버지야.”“...”더 이상 할아버지를 설득할 수 없음을 깨달은 강유리가 결국 잔뜩 주눅이 들어서 병실을 나서고... 병실 문이 닫히는 순간, 강학도의 자애로운 눈동자가 차갑게 식었다.‘유리 말에도 일리가 있어. 한번 부탁을 들어주다 보면 결국 끌려다니게 될지도 몰라.”한편, 병실을 나선 강유리는 육시준이 복도 저끝에서 다가오는 걸 보고 의아한 듯 고개를 돌렸다.“왜 그쪽에서 와?”‘저긴 송이혁 씨 진료실이 있는 곳이잖아?’“아, 이혁이가 잠깐 얼굴 좀 보자길래. 별일 아니었어.”“아, 그래?”짧게 대답한 강유리가 육시준을 향해 손을 뻗었다.“나 기분 안 좋아. 와서 나 좀 안아줘.”이에 입꼬리를 씨익 올린 육시준이 그녀를 품에 안았다.“왜 그래? 할아버지랑 싸웠어?”그의 품에서 얼굴을 비비적거리던 강유리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성홍주가 병실에 왔더라고.”“그 사람이 왜.”“다다음주 월요일 이사회에서 유강그룹을 나에게 물려주겠다고 발표하겠대. 지분도 나한테 양도하고.”“그럼 좋은 일 아니야?”“...”집 가는 내내 시무룩해 있던 강유리가 순간 눈을 반짝였다.“저기... vip 병실 cctv 영상 좀 확인할 수 있을까?”“환
병실에서 일어난 일을 모두 육시준한테 알려주자, 육시준은 몇 분간 침묵하다 입을 열었다.“모두 이유가 있으셨겠지. 항상 할아버지 말씀 잘 들었잖아. 지금 갑자기 왜 이러는 거야?”“…”강유리는 육시준을 의아한 눈빛으로 훑어보았다. 육시준의 그녀의 눈빛을 느꼈는지 고개를 돌려 물었다.“왜?”“지금 받아들여라고 말리는 거야?”육시준은 멈칫했다.“아니, 그저 궁금해서 그러는 거야. 네 성격에 이런 걸 신경 쓸 것 같지는 않아서 그래.”강유리는 말없이 입을 다물고 있었다.할아버지가 그녀의 태도를 이해 못 하는 건 짐작이 갔지만 육시준은 그러면 안 됐다. 할아버지가 드시던 약에 문제가 있다는 것도 알고 있고 내가 성씨 가문에 불만이 많다는 것도 알고있는 육시준이기 때문이다. 더욱 중요한 건, 항상 아무 말 없이 그녀의 결정을 존중해 왔었기 때문이다. 지금처럼 뭔가 암시하는 듯한 의견을 내놓는 것이 아니라…둘 다 말없이 각자 집으로 돌아갔다.욕조 안으로 들어가니 온몸의 피로가 풀리는 듯했다. 강유리는 팩 하나 얼굴에 부치고 나서 교외에 온천으로 유명한 호텔이 생각났다. 온천으로 유명해진 그 호텔에 겨울마다 찾아가는 유람객들이 끊이질 않았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친구들이랑 같이 가기로 약속했는데 유강그룹을 책임지고 나면 더 바빠질 것 같으니, 지금이 제일 좋은 기회다. 그녀는 수건으로 손의 물기를 닦아내고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마침 소안영의 전화도 걸려들어 왔다.“여보세요?”“내가 사진 보낼 테니 한번 봐봐.”소안영은 흥분을 애써 가라앉히는 듯한 말투였다.강유리는 막연하게 채팅창을 열어보았는데 정교하게 디자인된 귀걸이의 사진이었다. “예쁘네. 이게 왜?”“너 전에 육시준이랑 고정남이 비밀리에 뭘 계획하고 있는 것 같다고 했잖아.”“응. 요즘엔 신경 안 쓰고 있는데.”고성그룹이 성신영을 버린 후에 육시준도 이 일에 관심을 끈 상태였다.“너 고정남이 같이 밥 먹자고 했다며? 게다가 강 씨네에 대해서도 이것저것 묻고 알고 싶어했다
당연한 거 아니야?성신영의 신분에 문제가 있다면 그 전달된 자료도 빈틈이 없어야 했는데, 누군가가 일부러 한 것이 분명하다. 추측이 틀리지 않는다면 고정철이 한 것일 것이다. 고 씨네 일로 강 씨네 까지 휘말리다니. 이 정도는 새로운 정보도 아니었다.그녀는 흥미가 떨어지는 느낌에 팩을 뜯어버리고 뭐라고 말하려고 하는 찰나에 소안영이 말했다. “너 오늘 진짜 우울하구나! 머리가 안 돌아가는 거야?”“…”“이 귀걸이 뭔가 익숙하지 않아?”“???”“이거 네 것이잖아! 정확하게 말하면 민영 아주머니가 너한테 물려준 거!”강유리는 바로 앉아 방금 채팅창의 사진을 다시 열어 자세히 보았다. 소안영도 믿을 수가 없다는 듯 계속 말을 해왔다.“진짜 까먹은 거야? 나, 네 집 처음으로 놀러 갔을 때 이 귀걸이 예쁘다고 너한테 달라고도 했잖아!”“생각났어. 너 안 가져갔잖아.소안영은 액세서리 모으는 걸 좋아해서 그녀가 좋아하는 걸 보니까 선물로 주려고 했는데 엄마가 남긴 물건이란 걸 안 후에 그녀의 호의를 거절했었다.소안영이 이 귀걸이를 기억하고 있는 것도 이상하지 않다. “네가 이렇게 신경 안 쓰는 줄 알았더라면 그때 가지는 거였는데.”“엄마가 준 액세서리가 많아서 너한테 준다고 한 거였는데.”게다가 강유리가 좋아하는 스타일도 아니었다.“그래!”소안영은 비꼬는 듯 말했다.“그래 돈 많아서 좋겠다…”그녀가 대범한 척해서 아끼는 물건도 스스럼없이 주는 건 줄 알았었다. 제일 좋은 친구로서 이런 중요한 의미가 담긴 물건은 받기 이상하다고 생각한 소안영이다. 그녀를 거절하고 나서 소안영은 조금 아쉬웠지만 정확한 선택이라고 생각했다.유혹 앞에서 우정을 선택했다니!하지만 지금 보면 그럴 필요가 하나도 없었다.“이 귀걸이 성신영 스타일도 아닌데, 그날에 끼고 참석한 거지. 뭔가 일부러 그런 것 같지 않아?”강유리는 진지하게 분석하기 시작했다.“고우신을 만나야 하기 때문이네. 고우신의 눈에 띄어야 하는데 마침, 이 귀걸이도 특별한 의미가
강유리는 한참 말이 없더니 슬쩍 웃고는 다시 욕조에 기댔다.“나 뭔가 알 것 같아.”육시준이 고정남을 그렇게 싫어하는데 뭔가 같이 계획하고 있다고 해도 분명 그 일이 신경 쓰여서 그런거 일것 이다. 그는 고정남이 하는 일을 지지하고 고 씨네 발표회가 순조롭게 흘러가길 원한다. 분명 자신과는 관계가 없는 일인데. 이러면 가능성은 딱 한 가지 남았다. 이일이 그녀랑 연관이 있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그도 성신영이 메꾸고 있는 그 자리가 사람들한테 공격받길 원하지 않는다.문기준은 그녀의 경호원이고 고정남을 지켜보고 그녀를 위해 모든 일을 하고 있지만 육시준은 나한테 모든 걸 알리지 말라고 그한테 부탁한 모양이다. 소안영처럼 그녀가 자신의 “혼외 딸” 신분을 받아들일 수 없을까 봐 근심한 것 같았다.심지어 전에 고정남이 찾고 있던 딸이 혼외 딸이 아니라고 강조도 한 적도 있었다.모든 퍼즐이 순식간에 맞춰지는 느낌이다. 소안영은 이해가 안 되는듯했다.“뭘 알았다는 거야?”“네 말이 맞아. 그럴 리가 없어.”“그니까! 아주머니를 믿으셔야지. 유부남을 좋아하는 그런 일을 할 분이 아니잖아! 그리고 솔직히 말해서 고정남이 잘생긴 편도 아니고!”“객관적으로 봤을 때 괜찮게 생기셨지.”강유리는 이성적으로 그녀를 지적해 줬다. 소안영은 콧방귀를 꼈다.“얼굴에서 한 사람의 심성이 보인댔는데 딱 봐도 젊을 때 이리저리 여자만 꼬시고 다닌 것 같은 사람인데. 그리고! 지금 결혼도 했는데 옛 애인을 잊지 못하고 있는 건 나쁜 남자잖아!”소안영의 나쁜 남자 평가에 인정하려던 참에 그녀는 말을 바꾸었다.“안돼, 생각하면 할수록 짜증 난단 말이야! 나쁜 남자는 변하지 않는단 말이야!”“???”“안 되겠어. 온천 나 혼자 갈 거야.”“…”전에는 둘이 오려고 한거 였나?갑자기 어떤 분의 온천 체험 기회가 취소된 느낌이다. 불쌍하군.소안영과의 통화로 강유리의 궁금증이 해결된 느낌이다. 샤워를 끝내고 나서 강유리는 잠옷으로 갈아입고 머리를 말리고
눈이 마주쳤다.덤덤한 강유리와는 비교되게 육시준의 눈가는 한순간의 당황함이 스쳐 지나갔다.그러고는 웃더니 그녀의 볼을 쓰다듬었다.“유리가 이렇게 똑똑한데 내가 너한테 털어놓지 않은 일은 다 좋은 일이 아니라서 그런 거라는 걸 알잖아? 좋은 일이 아니면 왜 알려고 하는데?”강유리는 그의 손을 톡톡 쳤다.“뭐, 도리가 있는 말이지만, 내가 꼭 알고 싶다면?”“…”육시준이 생각을 정리하고 입을 열려고 하던 순간, 강유리는 한숨을 쉬고 그의 목에 팔을 두르고 품속에 안겼다.“자기 나한테 너무 잘해주는 거 아니야?”육시준은 그녀를 끌어안고 등을 토닥였다.“나 그런 나약한 사람 아니야. 생각보다 강하다고. 그러니까 이런 일로 제약받지 마.”육시준도 그렇고, 할아버지도 그렇고.그녀가 상처받지 말았으면 하는 마음에 한 일이라는 걸 알고있다.아무리 생각해도 할아버지가 성홍주한테 타협하고 10퍼센트의 주식을 내어줄 수 있게 하는 건 나에 연관된 일밖에 없다. 그녀와 가까운 사람들이면 모두 그녀가 자존심이 강하고 성신영 모녀가 다른 사람의 감정에 개입했다는 사실을 혐오하고 있다는 것도 알고 있다. 하지만 성신영을 싫어하는 이유는 단지 이것뿐만이 아니었다.더 정확하게 말하면 성신영이란 사람 자체가 별로이다.게다가 고성그룹에 관한 일은 육시준이 이미 그녀한테 말해줬다. 모두 고정남의 잘못이고 그가 애인이랑 딸을 배신한 거라고. 이게 그녀랑 무슨 상관이 있는 거지?육시준은 멈칫하더니 의아하듯 그녀를 보았다.“이미 알고 있었어?”강유리는 화가 난 나머지 웃음밖에 안 나왔다.우리 사이에 이 정도 신임이 있지 않나?강유리는 자기가 알고 있는 모든 걸 말하고 마지막에 결론을 낸 후 그의 가슴팍을 토닥토닥 두드리며 물었다.“내가 사기 칠까 무서운 거야? 네 맘속엔 내가 그런 사람밖에 안 되는 거였어?”“자기가 너무 똑똑해서 조심 안 하면 안 돼.”육시준은 그녀의 손을 잡고 입가에 뽀뽀했다.따뜻한 촉감이 손끝으로부터 온몸으로 퍼져왔다. 강유리는 애써
신주리는 고민하다가 말했다.“난 최근에 일이 많지 않아 괜찮지만 다음 달에 곧 새로운 촬영을 시작할 거야.”육시준은 고개를 끄덕였다.“네. 다음 달에 돌아가면 촬영 일정을 맞출 수 있어요.”육경서는 그들이 두어 마디 말로 일정안배를 끝내가 다급하게 입장을 밝혔다.“나도 있어! 주리가 돌아가지 않으면 나도 안 돌아갈래!”신주리는 흘겨보며 물었다.“넌 바쁘지 않아?”“마침 이 영화가 촬영을 마감할 예정이야. 기타 활동은 중요한 건 뒤로 미루고 중요하지 않은 건 매니저더러 거절하게 하면 돼.”육경서는 미처 깊게 생각하지도 않고 말했다.강유리는 반대하지 않고 귀띔했다.“강덕준 감독이 널 죽일 수도 있어.”육경서는 아랑곳하지 않았다.“괜찮아. 한 달뿐이잖아. 설마 날 따라 여기까지 오겠어?”강덕준이 그를 죽일지는 둘째치고, 어쨌든 지금 바론 공작은 그를 죽여버리고 싶었다.그는 그저 예의상 딸아이의 친구들을 초대해서 놀게 했을 뿐인데 결국 딸아이가 다음 달 귀국하는 일정을 안배하게 되다니?병원에서 육시준이 비아냥거리던 말을 그는 실행할 계획이었다. 단계마다 다른 이유로 딸을 만류하고 싶었고 시름 놓고 이곳에서 편히 안태하게 하고 싶었다.그러나 사위는...만약 자기 일을 다 처리했다면 남아있어도 괜찮았다. 부양할 수 없는 것도 아니니 말이다.그러나 지금 덤으로 두 사람이 더 생겼고 또 이 두 사람은 시간 맞춰 돌아가야 했다. 돌아가지 않으면 재촉당할 것이 뻔하다.“두 분이 바쁘면 굳이 남지 않아도 돼. 유리는 지금 손님 접대하는 게 불편하거든.”그는 정색해서 다시 말했다.그러자 여러 가지 눈빛이 삽시에 바론 공작을 향했다......신주리와 강유리는 제작팀과 반나절만 휴가를 냈기 때문에 오후에 돌아가야 했다. 그러나 오전 시간만으로 두 친구가 얘기하기엔 터무니없이 부족해 강유리는 직접 감독에게 전화해 하루 연장했다.점심시간.신주리는 육시준의 자리에 앉아 강유리의 옆에 누워 계속 절친끼리 이야기를 했다.강유리는 이번에 단도직입적
저쪽에서 한참 동안 침묵이 흘렀다.상대방도 자신만큼 놀란 모습을 상상하며 육경서는 다음 이야기가 기대되었다.그러나 생각지도 못하게 송미연은 놀랐지만 기뻐하는 기색이 없었다.“유리 찾으러 갔어? 프로그램을 녹화한다며 왜 그들을 찾으러 갔어? 거기는 시간이 아직 이르지 않아? 이맘때면 유리는 잠을 잘 자지도 못했을 건데...”송미연은 육경서가 철이 없이 강유리가 잘 쉬지 못하게 방해한다고 한바탕 야단을 쳤다.그러나 그녀의 말은 한 가지 중요한 소식을 알렸다.“진작 알고 있었어요?”“물론이지!”송미연은 자랑스럽게 말했다.“며느리가 임신했는데 이렇게 큰 소식을 어떻게 바로 나에게 알려주지 않을 수 있겠어? 경고하는데 너무 떠들지 마. 네 형수님을 화나게 하면 안 돼! 그냥 녹화만 잘하면 되는 거 아니야? 주리가 널 용서했어? 왜 돌아다니며 다른 사람의 가십거리를 알아내려고 해! 이번에 돌아와서 주리의 용서를 받지 못한다면 넌 아예 돌아오지도 마!”...화제가 자신을 욕하는 방향으로 변해버리자 육경서의 열정은 순식간에 식어버렸고 목소리도 누그러들어 어쩔 수 없이 말했다.“알았어요. 알았어요. 제가 원한 줄 아세요? 이것도 어쩔 수 없었기 때문이잖아요...”“뭐가 어쩔 수 없다는 거야? 모두 네가 자초한 거잖아! 쌤통이야!”“...”“섬에서의 상황이 어떤지 모르니 넌 주리를 잘 돌봐야 해. 난 실시간으로 라이브 방송을 살펴보고 있을 테니 넌 주리 괴롭히지 마.”송미연이 또 당부했다.육경서는 머뭇거리다가 정색해서 대답했다.“알았어요. 걱정하지 마세요.”송미연은 또 몇 마디 더 당부한 후 전화를 끊었다.육경서는 어두워진 휴대폰 화면을 보며 입꼬리를 올리며 웃었다.‘잘됐어. 아빠 엄마가 다 주리를 좋아하니 나중에 언제든지 주리는 억울함 당하는 일이 없을 거야. 적어도 내가 있는 한 억울함 당하지 않을 거야...”...점심은 빌라의 셰프가 만든 영양식이다. 맛은 좋지만 오래 먹으면 질릴 수 있어 강유리는 이 음식을 보며 저도 모르게 한숨
그러나 앉은 자리가 아직 따뜻해지기도 전에 육경서는 흥분된 듯 바로 일어나 소리쳤다. “뭐? 임신했다고?” 바론 공작은 짜증 섞인 눈길로 그를 쳐다보며 말했다. “목소리 좀 낮춰. 뭘 그렇게 놀라!” 그는 지금까지는 침착한 모습을 유지하고 있었지만 사실 소식을 들었을 땐 당황하고 흥분했던 걸 그가 모를 리 없었다. 육경서는 입을 막으며 어색하게 다시 앉았다. 하지만 그의 눈빛은 반짝이며 감출 수 없는 흥분이 드러났다. ‘나 이제 삼촌 된다! 삼촌 된다!’ “의사가 말하기를 첫 3개월은 불안정하니까 특히 조심해야 한다고 했다. 아버지도 이 소식을 공개하지 말고 태아가 안정될 때까지 기다리자고 하셨다.” 바론 공작은 드물게 인내심을 가지고 설명했다. 그는 그 말을 끝내며 신주리를 한번 훑어봤다. “그래서 나는 유리를 위해 사람들을 안배해 가까이서 돌보게 한 거다.” 그의 시선을 느낀 신주리는 고개를 들었다. 그녀는 공작을 한 번 보고 다시 눈을 내리깔며 강유리의 아랫배를 바라봤다.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마치 한번 만져보고 싶은 듯했지만 참았다. 그녀의 눈은 아름답게 빛나고 있었고 육경서와 같이 흥분과 기쁨을 숨길 수가 없었다. 그녀는 강유리의 아랫배를 가리키며 말했다. “그래서 지금 이 안에 작은 생명이 자라고 있는 거야?” “맞아.” 강유리가 그녀를 보고 웃으며 말했다. 신주리는 표정은 진지했지만 눈 속에 담긴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그럼 만져봐도 돼?” 육경서도 순간 정신을 차리며 손을 내밀었다. “나도...” “안 돼!” “안 돼!” 두 명의 목소리가 동시에 차갑게 외쳤다. 그들의 무리한 요구를 바로 거절했다. 강유리는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돌려 옆에 있던 두 남자를 쳐다봤다. 그녀는 그들에게 체면을 차리지 않았고 대신 신주리에게만 속삭였다. “조금 있다가 방에 들어가면 만져도 돼.” 육시준과 바론 공작은 동시에 얼어붙었다. ‘우리가 안 들릴 거라고 생각하나?’ 육경서는 기대에 찬 눈빛으로 강유리를
육경서는 얼굴에 기쁨이 가득한 채 입을 열려던 순간 정원에서 누군가가 다가왔다. 그 사람은 유창한 한국어로 두 사람에게 따뜻하게 인사했다. “이쪽이 둘째 도련님이랑 신주리 씨 맞으시죠? 강유리 아가씨께서 이미 기다리고 계십니다.” “안내 부탁드려요.” 신주리가 부드럽고 예의 있게 대답했다. 육경서는 잠시 멍한 표정을 지었다. ‘이 사람, 왜 이렇게 때맞춰 나타나는 거지? 다른 때는 왜 안 오고, 바로 이때 오냐고!’ “잠깐만요. 저희 형수 말고 일단 먼저 빌라를 둘러보고 싶어요!” 그가 급하게 발걸음을 옮기며 안내하는 집사를 붙잡았다. 집사는 그의 눈을 한 번 쳐다본 뒤 다소 의아해하는 표정으로 멈췄다. 신주리는 미소를 띤 채 침착하게 말했다. “미안해요. 낯을 가려서 그래요.” 육경서는 혼란스러웠다. ‘이게 무슨 말이야? 내가 낯을 가린다고? 왜 그렇게 갑자기...’ 집사는 이해한 듯 웃으며 공작님도 그들의 방문을 매우 기쁘게 생각해 오늘 특별히 이곳에서 기다리고 있다고 전했다. 육경서는 그 한마디도 제대로 듣지 않았고 눈앞의 신주리를 원망스러운 눈길로 바라봤다. ‘주리는 도대체 이게 무슨 뜻이야? 너무 쉽게 대답해서 다시 부정하려는 건가?’ 그들이 정원으로 들어섰고 이곳은 여전히 고요하고 우아한 분위기였다. 뜨거운 태양 아래 한쪽에서 차와 다과가 준비된 작은 테이블이 보였다. 강유리는 햇볕을 가린 파라솔 아래에 앉아 있었고 그 앞에는 육시준이 전화를 끊고 있었다. 바론 공작이 불만을 표하며 입을 열었다. “하루 종일 그 전화기 들고 있으면 안 돼! 그렇게 바빠? 전자기기 방사선이 얼마나 해로운지 알지? 의사 선생님이 말했잖아. 첫 세 달은 불안정하다고, 푹 쉬어야 한다고!” 육시준은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지난달에 돌아갔으면 이미 처리했을 일인데요.” 바론 공작은 얼굴에 불편한 기색이 스쳤다. “일이라는 게 끝날 수 있나? 돌아가면 내 딸과 시간을 제대로 보낼 수 있을까 몰라!” 육시준이 말하려던 순간 강유
감독은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강하게 반박하지도 못하고 조심스럽게 말했다. “규정에 따르면 녹화 중에는 제작진 팀을 이탈하면 안 됩니다.” 역시나 신주리는 가볍게 되물었다. “녹화 시작할 때 그런 규정은 없었잖아요? 갑자기 추가된 건가요?” “그건 아니지만 지금 상황이...” “그럼 우리를 일부러 견제하려는 건가요? 그럼 그냥 프로그램 안 하면 되죠?” 감독은 말문이 막혔다. 사실 첫 번째 시즌에서 육경서가 사고를 당한 이후로 그는 이미 이 두 사람에게 꼼짝 못 하고 있었다. 조건을 협상하든 규칙을 정하든 이 둘이 하겠다고 하면 다행이고 안 하겠다고 하면 모든 게 물거품이 될 판이었다. 결국 이를 악물고 그는 포기했다. “알겠어요, 알겠어! 두 분 다 제가 졌습니다! 하지만 어디 가든 꼭 행선지를 알려주시고 제작진 팀에서 두 분의 안전을 보장할 수 있어야 합니다!” “걱정 마세요. 너무 오래 걸리진 않을 거예요. 점심 먹고 바로 돌아올게요!” 신주리가 대범하게 말했다. ‘점심도 먹고 온다고?’ 하지만 그가 불만을 표현하기도 전에 두 사람은 이미 유유히 그의 앞을 지나쳐 나가버렸다. 호텔 문을 나서자마자 감독은 서둘러 휴대폰을 꺼내 전화를 걸었다. 전화기 너머로 나른한 목소리가 들렸다. “여보세요?” “강 대표님, 경서 씨랑 주리 씨가 지금 강 대표님을 만나러 갑니다! 그런데 프로그램 효과를 위해서 행선지에 대한 건 절대 발설하시면 안 됩니다!” 감독이 진지하게 말했다. 강유리가 태연하게 대답했다. “만약 제가 발설하면요?” 감독은 순간 당황했다. 그는 이런 대답을 예상하지 못했다. ‘아니, 이건 우리 회사의 프로그램 아니었나? 이렇게 마음대로 행동해도 되는 거야? 시청률이 안 오르면 강 대표님에게도 손해 아닌가?’ 감독은 빠르게 머리를 굴리며 어떻게든 이 대형 회사를 설득해야겠다고 결심했지만 강유리는 그의 말을 끊으며 다시 말했다. “농담이에요. 발설하지 않을 테니 걱정 마세요.” 감독은 긴 한숨을 내쉬며 안도했
비행기에 오를 때 각자 다른 생각을 품고 있었고 내릴 때도 마찬가지였다. 목적지에 도착했을 땐 이미 다음 날 새벽이었다. 제작진 팀은 미리 준비한 차를 타고 그들을 예약된 호텔로 보냈다. 해변가에 위치한 경치가 아름다운 5성급 호텔이었다. 모두들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이번에 제작진 팀 정말 큰돈 쓴 거네! 이게 진짜 여행 같아!” “그렇지. 갑작스러운 느낌도 있지만 일정은 꽤 합리적이네!” “응, 또 감사한 건 처음에 우리 주리랑 경서에게 그 사건이 터진 후로 대우가 점점 더 좋아졌다는 거야. 그들은 정말 목숨을 걸고 얻은 거라니까!” 모두가 웃으며 체크인 절차를 마쳤다. 그때 감독 팀에서 메시지가 왔다. “오늘 밤은 여기서 쉬고 내일은 섬으로 갑니다.” 모두들 당황했다. ‘그래서 목적지는 여기가 아닌가?’ “목적지는 반대편에 있는 작은 관광 섬입니다. 규모는 작지만 최근 몇 년 동안 관광업이 급성장했습니다. 얼마 전 이 섬의 소유자가 바뀌어서 다시 한번 큰 화제를 일으켰죠.” 감독이 그렇게 말하자 신주리는 점점 더 익숙해지는 느낌을 받았다. “그게 바론 공작이 유리에게 선물한 섬이죠?” 감독이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육경서는 감탄하며 물었다. “그럼 어떻게 우리 형수를 설득했어요?” 감독 팀은 미소를 지으며 답하지 않았다. 실시간 채팅창에서는 감탄이 이어졌다. [유리 언니가 이번 프로그램을 위해 진짜 대규모로 투자한 거네!] [하하하, 유리 언니가 투자한 건 아니야. 그냥 완전 부모님에게 의지하고 있는 거지! 그리고 그 덕분에 도련님과 미래의 동서가 혜택을 보는 거고!” “나도 섬 주인 언니가 있었으면 좋겠다!” “이번에 유리 언니 우정 출연할지 궁금하다!” 아침 식사 후 모두 방으로 돌아가 시차를 맞추기 위해 잠을 청했다. 카메라는 잠시 쉬어갔다. 신주리는 비행기에서 잠깐 눈을 붙였기에 이제는 전혀 졸리지 않았다. 그녀는 샤워를 하고 옷을 갈아입은 후 모자와 선글라스를 쓰고 호텔 방을 몰래 빠져나
심지어 원피스까지 캐리어 하나에 다 준비해 놨다. “안 믿을지 몰라도 내가 쇼핑 리스트까지 작성했어. 엄마한테도 참고를 부탁했거든! 원피스는 엄마가 골랐어. 안심해, 눈썰미는 진짜 좋아!” 말을 하면서 그는 정말로 쇼핑 리스트를 꺼내서 신주리에게 보여줬다. 신주리는 그 리스트를 보지 않아도 이미 믿고 있었다. 심지어 조금 놀랐다. “너 그럼 네 짐은 어쩌고? 얼마나 챙겨왔어?” “짐 하나야. 나중에 필요하면 제작진 팀에 부탁할 거야!” 육경서는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듯 말했다. 신주리는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그녀가 너무 오랫동안 육경서를 바라보고 있었던 탓인지 휴대폰을 들여다보지 않은 채 그를 쳐다보던 신주리가 이상하다는 걸 눈치챈 육경서는 본능적으로 고개를 들어 그녀를 쳐다봤다. “왜?” 신주리는 아무 말 없이 시선을 돌려 휴대폰 화면을 바라보며 말했다. “이렇게 많아?” 육경서는 묘한 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그렇게 많은 건 아니야. Y 국에 있는 우리 회사 지사에서 몇 가지 더 준비해 줬거든...” 그가 말을 하다 갑자기 멈칫했다. 불필요한 말을 했다는 걸 깨달은 듯했다. 신주리는 그 모습을 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그리고 그녀의 머릿속에 갑자기 대담한 생각이 떠올랐다. “이번 목적지는 네가 제작진 팀에 요청한 거 아니야?” “무슨 말이야? 내가 그런 사람인 줄 알아?” 육경서는 당황한 듯 대답했다. “네가 그런 사람 아닌가?” 육경서는 잠시 생각에 잠긴 후 고백했다. “맞아, 그런 사람일 수도 있어. 하지만 이번에는 정말 아니야! 사실 내가 쓴 목적지는 원래 해변이었어. 이런 건 결국 다 준비해야 할 것들이잖아.” 신주리는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다. 대신 이제는 아예 잠을 잘 수가 없었다. 다른 한편에서는 서진태와 소지석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서진태는 진지하게 소지석에게 도씨 가문의 그 양성 계획에 대해 물어보았다. 이 계획은 너무나도 비상식적이어서 의심의 눈초리를 거둘 수 없었다. 완전히 그들
[하하하, 이게 무슨 이상한 조합이야? 어쩐지 묘하게 어울리기도 하고 또 웃기기도 하네!] [처음부터 차 안에서 자리싸움만 아니었어도 이렇게 어색하지는 않았겠지.] [우리 지원 언니 한마디로 모든 흐름이 뒤집혔어!] [강미영은 도대체 무슨 속셈이지? 우리 지석이를 일부러 피하는 거야?] [다시 한번 말하지만 소지석 팬들 너무 이기적이지 마! 누구든 미영 언니에게 다가갈 수 있고 미영 언니는 모두를 거절할 권리가 있어!] 좌석이 정리되고 비행기가 이륙을 준비하자 라이브 방송은 일시적으로 종료되었다. 이런 24시간 라이브 촬영 프로그램에서도 이렇게 잠깐 동안만은 각자가 자신만의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강미영은 라이브 방송이 종료된 뒤 의아한 표정으로 한지원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여전히 왜 한지원이 굳이 자신과 함께 앉으려고 했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물론 지금 상황에서 누가 자신에게 같이 앉자고 했어도 마다하지는 않았겠지만... “미영 언니, 난 저 커플 팬이야. 무슨 일 있으면 나한테 얘기해. 그러니까 제발 내 최애 커플 깨지지 않게 도와줘!” 한지원은 진지한 얼굴로 이유를 털어놓았다. 강미영은 살짝 멍해지더니 결국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알겠어, 앞으로 네 최애 커플 잘 지켜주도록 할게.” 한지원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밝게 웃었다. “정말 고마워! 덕분에 내 최애 커플이 마음 편히 연애할 수 있게 됐어!” 강미영은 눈가를 약간 찡그리며 물었다. “근데 언제부터 걔네 둘의 팬이 된 거야? 그리고 지금 걔네 둘 관계 꽤 안정적이던데 내가 굳이 뭐 하러 그걸 망치겠어?” 한지원은 고개를 저으며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미영 언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야. 중요한 건 이런 카메라 밖에서의 달달한 순간들이지.” 강미영은 순간 뭔가를 깨달은 듯 눈썹을 살짝 치켜세웠다. “혹시 영감이라도 떠오른 거야?” 한지원은 멍하니 있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언니의 작은 호의 하나가 한 명의 유명 만화가를 탄생시킬 수도 있어!” 강
그는 단지 이런 행동을 통해 자신의 마음을 표현하고 싶었다. 강미영에게 그를 좀 더 이해할 기회를 주고 소지석에게는 그가 혼자서만 밀어붙이지 않도록 눈에 띄게 하려 했다. 그러나 이 행동을 알아본 사람들도 있지만 일부 팬들은 그를 오해하거나 비판하기도 했다. [솔직히 말해서 서진태는 너무 경계가 없지 않나요? 경쟁하고 싶다 해도 이렇게까지 급하게 해야 하나요? 왜 꼭 같이 앉아야만 하는 거죠?] [맞아요! 강미영 언니는 분명히 불편해 보였고 바로 피해서 조수석에 앉았잖아요!] [좋아한다고 해도 좀 경계를 두고 해야죠.] [근데 소지석 팬들 너무 이중잣대 아니에요? 오빠가 같이 앉고 싶으면 직설적으로 다가가도 ‘멋지다, 드디어 마음을 표현했다!’고 하는데 서진태가 다가가면 ‘경계가 없다’고 비판하잖아요?] [맞아요. 서진태는 사실 강미영 언니와 앉고 싶은 것보다는 자신의 마음을 표현하고 싶었던 거죠.] 댓글창은 점점 떠들썩해졌다. 신주리와 육경서의 강미영에 대한 이해도는 완벽했다. 감정상에서 경쟁이 시작되면 그녀는 주저 없이 피할 것이다. 강미영은 감정을 물건처럼 경쟁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이런 성격의 프로그램에서는 남성들끼리의 경쟁이나 여성들끼리의 경쟁이 감정을 더 순수하지 않게 만들 수 있고 로미오와 줄리엣이 될 거라고 생각했다. 결국 그런 외적인 압박이 감정을 더 강화시키는 효과가 생기게 된다. 사실 그들이 정말 사랑하는 건 아닐 수도 있다. 단지 지는 걸 참지 못해서 그런 것일지도 모른다. 그녀와 고정남의 관계도 그랬다. 주위에서 반대할수록 더 진지하게 여겨졌던 그 감정이었지만 결국 그것은 진정한 사랑이 아니라 엉망이 된 감정이었음을 깨달았다. “네가 졌으니까 내 선물 잊지 말고 사 와.” 신주리는 자신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육경서는 그 결과를 보며 입술을 삐죽 내밀고는 돌아서서 그녀에게 엄지를 치켜들었다. “이번엔 네가 이겼어.” 신주리는 눈을 깜빡이며 말했다. “이번? 그럼 다음에도 나랑 내기할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