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초 후.지잉지잉.연결음과 함께 휴대폰 진동소리가 차 안에서 울려 퍼지고 흠칫하던 강유리는 운전기사의 뒤통수를 향해 입을 열었다.“이만 퇴근해 보세요. 전 남편이 데리러 나올 거라.”하지만 그녀의 말에도 기사는 말없이 수락 버튼을 누를 뿐이었다.그리고 육시준이 전화를 받은 것을 발견한 강유리가 바로 애교섞인 목소리로 말했다.“여보... 나 취한 것 같아...”“그래. 많이 취한 것 같네. 남편 뒤통수도 못 알아보고.”‘뭐지? 목소리가 겹쳐서 들리는 것 같기도...?’“뭐라고? 잘 안 들리는데?”환청인가 싶어 강유리는 운전석 쪽으로 목을 내밀었다.“...”기나긴 침묵에 호기심을 이기지 못한 강유리가 몸을 일으키려던 그때,좌석을 뒤로 이동한 육시준이 강유리의 얼굴을 잡아 자신에게로 돌렸다.“으악!”짧은 비명소리와 함께 익숙한 품속에 안긴 강유리는 한참 뒤에야 상황을 인지하고 가볍게 그의 가슴을 두드렸다.“뭐야. 진짜 당신이었어? 그런데 오는 내내 왜 한 마디도 안 했어?”그녀의 허리를 꽉 끌어안은 육시준이 어딘가 음침한 목소리로 물었다.“그럼 나도 곁에 없는데 그렇게 마음 놓고 자고 있었단 말이야?이에 그의 목을 끌어안은 강유리가 꺄르르 웃어보였다.“에이, 다 연기지. 나 한숨도 안 잤어.”“...”“여보, 다들 우리더러 부부 안 같고 연인 같대. 우리 진짜 연애 해보면 안 돼?”갑작스러운 강유리의 질문에 육시준은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그래.”‘엥?’육시준이 너무 쉽게 고개를 끄덕이자 강유리는 오히려 얼떨떨할 따름이었다.평소 같았으면 잔뜩 진지한 표정으로 “우린 연인 아니고 부부잖아”라고 말하며 찬물을 확 끼얹었을 텐데 말이다.“뭐야? 훨씬 더 좋아할 줄 알았는데.”육시준이 강유리의 코트를 벗겨주고 강유리도 온순히 그의 손길에 몸을 맡겼다.“나 지금 안 취했어. 내일 돼도 똑똑히 기억할 거야.”“그래, 알아. 누가 뭐래?”“그러니까 대충 달래는 식으로 대답하지 말라고. 나 진지해. 나 진지하게 당신이랑
한편 어딘가 이상해진 분위기를 전혀 눈치채지 못한 강유리는 여전히 순수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응. 우리 오늘 은밀한 얘기도 많이 나누었지롱.”“예를 들면 어떤 얘기?”자연스레 대답하려다 정신이 번쩍 든 강유리가 급 브레이크를 밟았다.“여자들끼리 한 비밀이야기야. 남자는 안 돼요!”“주태규... 생각보다 매력이 떨어지네.”나지막한 육시준의 목소리에 강유리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뭐?”“그럼 우린 부부끼리만 할 수 있는 얘기를 해볼까?”그리고 강유리가 미처 반응하기도 전에 턱이 붙잡힌 그녀를 향해 뜨거운 키스가 쏟아졌다.잠깐 멈칫하던 강유리 역시 어느새 자연스레 그의 품에 안긴 채 천천히 응하기 시작했다.알코올 향이 깃든 달콤한 숨결에 육시준은 이곳이 아직 차안이라는 사실도 잊은 채 점점 빠져들기 시작했다.“내일 일어나도 정말 다 기억할 수 있겠어?”어느새 섹시하게 젖은 목소리로 육시준이 물었다.“응.”“그럼 똑똑히 기억해. 이 모든 걸.”차가운 겨울 바람이 휘몰아치는 바깥 날씨와 달리 차 안의 온도는 점점 뜨거워지기 시작했다.야릇한 숨결로 뜨겁게 데워진 차안에서 강유리의 이성은 점점 더 멀어져가고 있었다.몽롱해진 큰 눈으로 그를 바라보던 강유리가 입을 열었다.“육시준...”“여보라고 불러.”‘정말 여기서 하는 게 괜찮은 건가?’이성과 욕망이 서로 얽히고 섥히는 가운데...잠시 후, 강유리는 소안영의 질문을 떠올렸다.“흠, 시간 보는 걸 깜박했네.”강유리가 어딘가 아쉬운 듯 중얼거렸다.이때 어디선가 차가운 기운이 느껴지자 강유리가 몸을 부르르 떨었다.“뭐야? 에에컨 끈 거야?”“추워?”잠깐 멈칫하던 육시준이 질문과는 다른 대답을 던졌다.“그럼... 다시 뜨겁게 달궈주면 될 거 아니야.”...다음 날 아침.강유리는 해가 중천에 뜰 때에야 눈을 뜰 수 있었다.어정쩡한 발걸음으로 계단을 내려온 강유리는 여유롭게 소파에 앉아있는 육시준을 발견하고 어색하게 고개를 돌렸다.‘차라리... 취해서 필름 끊기는
식사를 마친 강유리는 태블릿으로 기사를 확인하기 시작했다.여한영 본부장 역시 발빠르게 앞으로 유강엔터 역시 도덕적으로 문제가 있는 연예인과는 영원히 함께 일하지 않을 것이란 강경 대응을 내세웠다.“그래도 가족인데 이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었나?”“그럼 의붓언니 남자친구 빼앗은 건 괜찮고?”“어차피 이제 고성그룹과의 연도 끊어졌겠다 바로 꼬리 자르는 거지 뭐.”“난 유강그룹 편이야. 굳이 문제있는 연예인이랑 함께 일하는 리스크를 가질 필요는 없잖아?”“솔직히 처음에 영상이 유출됐을 땐 강유리는 아무 말도 안 했었잖아? 세마가 모든 억울함을 벗은 뒤에야 이런 발표를 하는 걸 보면 설마... 전에 협박이라도 받고 있었나?”“로열 엔터에서 먼저 입장을 발표한 것도 와이프 편 들어주려고 그런 거였어? 뭐야. 스윗해.”“...”육시준과 그녀의 사이를 응원하는 댓글을 발견한 강유리가 싱긋 미소를 지었다.“이 댓글들 당신이 푼 알바들이야?”그녀의 맞은 편에 앉은 육시준이 되물었다.“무슨 댓글?”강유리가 태블릿을 보여주며 말을 이어갔다.“이것 봐. 이번 일로 우리 사이를 응원해 주는 사람들이 되게 많이 늘었다? 그래서 당신이 푼 건가 해서. 이럼 우리 결혼식 기사 나도 악플은 덜 받을 수 있겠다.얼굴도 모르는 사람들이 내뱉는 말에 딱히 신경 쓰는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인생에 한 번뿐인 결혼식인데 비난보다는 축복속에서 진행하고 싶었다.“장 대표가 왜 그렇게 발 빠르게 입장 발표를 했는지는 궁금하지 않아?”태블릿을 내려놓은 육시준이 물었다.“그게 뭐가 궁금해. 딱 봐도 우리 남편이 시킨 거겠지. 그리고 어젯밤에 이미...”자연스레 말을 이어가려던 강유리가 아차 싶은 생각에 육시준의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이에 육시준은 짐짓 아무것도 모르는 척 오버스러운 말투로 물었다.“아, 어젯밤에 벌써 봤던 거야? 어젠 취했다면서.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을 만큼.”“취, 취하기 전에 본 거지 뭐.”강유리가 부자연스럽게 웃었다.“술 기운이 확 올라왔나 봐.
‘이건 위험하다.’강유리의 머릿속에 경보음이 울리기 시작했다.웃음기가 서린 육시준의 눈동자를 보아하니 이미 뭔가 눈치챘음에도 일부러 묻는 게 분명한데 도대체 어떻게 넘어가면 좋을까 난처했다.“큼, 뭐 못 알려줄 거야 없지.”강유리가 최대한 호탕하게 웃어보였다.“그냥 우리 두 사람에 대한 이야기였지 뭐. 우리가 사이좋게 잘 지내나... 뭐 그런 질문?”“그래서 어떻게 대답...”“윽.”이때 강유리가 갑자기 미간을 찌푸렸다.어딘가 고통스러워 보이는 표정에 육시준이 당황하며 물었다.“왜 그래?”일부러 허리를 만지작거리던 강유리는 일부러 더 오버스럽게 물었다.“나 어제... 술 먹고 시비라도 붙었나? 왜 이렇게 삭신이 쑤시지?”“...”“허벅지는 또 왜 이렇게 아파. 나 혼자 집에 왔었어?”강유리는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커다랗게 떠보였다.“아니, 당신이 안 온 건 그렇다 치고 기준 씨는?”어이없다는 듯 웃던 육시준이 물었다.“병원이라도 가볼래?”“아니, 그 정도는 아니야.”“이리 와봐.”너무나 자연스러운 말이었지만 강유리는 급격히 경계하기 시작했다.“왜 나더러 가라고 그래?”이에 자리에서 벌떡 일어선 육시준은 너무나 쉽게 그녀를 번쩍 안아 자신의 허벅지에 앉혔다.그리고 그의 큰 손으로 강유리의 허리를 어루만졌다.잔뜩 긴장한 채 뻣뻣하게 앉아있던 강유리는 한참 뒤에야 육시준이 마사지를 해주고 있음을 인지했다.“힘 빼. 어때? 지금은 좀 괜찮아?”그제야 안심한 강유리는 자연스레 육시준의 품에 머리를 기댔다.“윽.”육시준의 마사지는 충분히 편했지만 가끔씩 그녀가 간지러움을 타는 부분을 건드리는 통에 이상한 신음소리가 흘러나오고 분위기는 순식간에 조금 어색해졌다.“음, 미안.”“아, 괜찮아. 내가 간지러움을 너무 많이 타서.”“아니, 그거 말고. 어젯밤에 내가 너무... 몰아붙인 거 같아서.”얼굴을 파묻은 채 한참을 가만히 있던 강유리가 대답했다.“괜찮아. 뭐 그런 걸로 사과까지 해. 그래도 다음부터는 그러지
어차피 다 밝혀진 거 강유리는 연기 같은 걸 집어치우기로 결정했다.육시준의 목을 끌어안은 그녀가 생글생글 웃으며 물었다.“그럼 어젯밤에 했던 대답... 그 대답도 그대로인 거지?”“그럼.”시원한 대답에 만족스러워진 강유리는 방금 전까지 여기저기 쑤셔대는 몸이 한결 가벼워지는 기분이었다.육시준의 입술에 살짝 흔적을 남긴 그녀가 폴짝 뛰어내려 안방으로 향했다.저녁 식사 후.육시준은 평소처럼 서재로 들어가 낮에 미처 처리하지 못한 업무를 보기 시작했다.그런데 서재에 앉은 지 2분 정도 지났을까? 누군가 서재 문을 똑똑 두드렸다.“들어와.”문틈 사이로 익숙한 실루엣이 보이고 강유리의 목소리가 흘러들었다.“저기요, 옆에 자리 있나요?”그런 그녀의 얼굴을 확인한 육시준이 멈칫했다.평소에 집에선 항상 편한 차림으로 있던 강유리가 오늘은 흰 원피스에 살짝 메이크업까지 한 모습이었으니까.화려한 이목구비에 곁들인 청순한 메이크업이 그녀의 색다른 매력을 보여주고 있었다.“자리 비었데요.” 어느새 서재로 들어온 강유리가 사뿐사뿐 걸음을 옮겼다.“아, 오늘 너무 늦게 왔는지 도서관에 여기 말고 빈 자리가 없네요. 앉아도 괜찮죠?”‘연애하는 것처럼 살자더니. 도서관에서 함께 공부하는 것이 로망이었나?’육시준이 픽 웃었다.“괜찮습니다. 여긴 저만 앉는 자리라 앞으로도 언제든지 오세요.”서재를 둘러보던 강유리가 의자에 등을 기댔다.“솔직히 저도 이런 공간이 있긴 하거든요? 그런데 이젠 좀 질려버렸어요.”“그럴 리가요. 가장 아늑한 공간인 걸로 알고 있는데.”“내일부터 확장 공사라도 할까 봐요.”“그럼 제가 너무 시끄러워질 것 같은데요.”“...”어색한 침묵 끝에 강유리가 먼저 입을 열었다.“NG! NG! 우리 지금 첫눈에 반한 연기 중이거든? 그런데 왜 대화가 이런 식으로 흘러가?”“방에 대한 얘기를 먼저 꺼낸 건 너잖아?”육시준이 미간을 찌푸렸다.“아니, 거기서 포인트를 어떻게 그렇게 잡아? 왜 질렸는지 이유를 물어야지. 그래야 더
‘화... 화상 회의’강유리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연애하는 기분을 느껴보고 싶어 집에서 화장을 하는 오버까지 했는데 이런 상황이 벌어지다니.“하하하하!”잠시 후, 방으로 돌아온 강유리에게서 자초지종을 들은 신주리의 웃음소리가 스피커를 타고 흘러나왔다.“주리야, 그만 웃자. 괜찮아. 너 알렉스 앞에서도 온갖 추태 다 부렸었잖아.”도희의 목소리도 들려왔다.“그래. 그런데... 추태를 부리는 방식도 너무 다양해서 탈이다.”강유리가 힘 빠진 목소리로 대답했다.“갑자기 연애니 뭐니 해서 뭘 어떻게 하려나 했더니. 기껏 생각해 낸 게 집에서 로코 찍으시는 거셨어요? 아, 귀엽다니까. 하여간.”“그래, 칭찬 고맙다.”“됐고. 어울리지도 않는 짓 그만하고 지금까지 하던 것처럼 그냥 일이나 하면서 살아. 새 작품 언제 출시할 거야? 나 빨리 돈 벌고 싶어.”“지금 저 상황에서 일이 머리에 들어오겠어?”신주리가 짐짓 도희를 꾸짖었다.“됐어. 연애 그깟거 배워봤자 별 쓸모도 없어. 너, 사랑은 변해도 다이아몬드는 영원한 거 알지? 정신 똑바로 차려.”“육시준 대표님과 하는 연애는 뭔가 다를 수도 있잖아.”“...”대화를 한동안 이어간 뒤에야 소안영의 부재를 인지한 강유리가 물었다.“안영이는? 주태규랑은 뭐 어떻게 돼가고 있는 거야? 주태규 정말 강남연우에 취직이라도 했어?”그녀의 질문에 신주리가 대답했다.“그건 잘 모르겠고 어젯밤에 꽤 흥미로운 일이 벌어졌다는 것쯤은 알고 있지.”“뭔데? 뭔데?”강유리가 눈을 반짝였다.신주리의 입에서 흘러나온 어젯밤의 후속 스토리는 그야말로 가관이었다.강유리가 자리를 뜬 뒤에도 소안영에게 들러붙던 고우신에게 욕이라도 퍼부어야 하던 그때, 주태규가 갑자기 나타나자 방금 전까지 귀찮아 죽겠다는 표정을 짓던 사람이 갑자기 고우신의 품에 안겼다는 것이다.“헐, 독하다, 독해... 그래서 어떻게 됐는데?”“어떻게 되긴 뭐가 어떻게 돼. 주태규가 그거 보고 완전 눈 돌아가선 고우신이랑 치고 받고 난리났었지
“아니, 왜?”이에 도희는 알렉스가 찾은 정보를 말해 주었다.얼마 전 소안영이 주태규의 뒷조사를 한 적이 있었는데 그 과정에서 그가 레이싱 선수라는 꿈을 포기한 것이 단순히 가족들의 반대 때문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고 한다.고성그룹 고정철은 당연히 자기 아들이 회사를 물려받길 바랐고 그러기 위해선 고우신이 아예 레이싱계에 뼈를 묻는 것이 좋다는 생각에 물심양면으로 고우신의 레이싱 커리어를 응원해 주었다.그 와중에 고우신과 막상막하의 실력을 가진 주태규가 눈에 거슬린 고정철은 그를 은퇴시키기 위해 주성 그룹에 압박까지 가했던 것이다...“헐, 뭐 이런 막장 스토리가 다 있냐? 두 사람 친구 아니었어?”신주리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뭐 물론 본인들은 이 일을 전혀 모르고 있지.”도희가 한마디 덧붙였다.“어쩐지. 안영이는 주태규가 이렇게라도 복수를 하길 바랐던 걸지도?”“가만히 있던 고우신 씨만 당했구만.”“솔직히 억울할 것도 없어. 그렇게 멍청하니까 여기저기 이용이나 당하고 다니는 거지.”도희가 혀를 찼다.“성신영이 자살 시도를 했단다. 어제 그거 우리한테 따지려고 피어싱까지 찾아온 거였어. 유리야 어제 잔뜩 취해서 기억 못하겠지만.”“큼.”도희의 말에 강유리가 어색하게 기침을 날렸다.‘사실 어제 나 하나도 안 취했어. 오히려 너무 또렷하게 기억이 나서 문제지...’“어쨌든 결론적으론 안영이가 유리 대신 사태를 해결해 준 거나 다름없으니까 육시준 대표도 이번 일로 안영이에 대한 생각이 많이 바뀌었을걸? 주리 너도 남자친구한테 우리 안영이 그렇게 나쁜 애 아니라고 설명 좀 잘 해줘.”“당연하지. 내가 내 욕하는 건 참아도 친구 욕하는 건 또 못 참지.”무의식적으로 대답한 신주리가 뭔가 이상한 점을 의식하곤 바로 반박했다.“아, 그리고 남자친구라니.”“남자친구를 남자친구라고 그러지 그럼 남편이라고 하냐?”이에 잠깐 침묵하던 신주리가 대답했다.“그래, 솔직히 말해서 지금 우리 사이... 도대체 어디까지가 진심이고 어디까
잠깐 망설이던 강유리가 물었다.“그게 성신영 말이야... 고정남 딸이 맞긴 한 걸까?”“하, 참나. 꾸물대더니 묻는 게 겨우 그거야?”소안영이 코웃음을 쳤다.“당연히 아니지. 정말 친딸이었으면 아무리 성신영이 큰 잘못을 저질렀다 해도 이렇게 차갑게 내쳤겠어? 이젠 성홍주도 성신영을 구해 주긴 힘들 것 같고... 그냥 앞으로 네가 하고 싶은대로 해. 여기저기 눈치 보지 말고.”“그럼 고정남의 연인이었다는 그 여자에 대해서 조사해 본 적 있어?”“내가 그걸 왜 알아봐? 주태규랑 상관도 없는 일...”이때 잠깐 멈칫하던 소안영이 어색하게 말을 바꾸었다.“아, 그러니까 내 말은 딱히 내가 관심없는 일이라고.”평소라면 허점을 드러낸 소안영을 끈질기게 놀려댔겠지만 적어도 지금은 그럴 겨를이 없는 강유리가 말을 이어갔다.“솔직히 말하면... 난 그 여자가 우리 엄마랑 상관이 있을 것 같아.”쿵!뭔가 떨어트린 듯한 소리와 함께 시끄러운 소안영의 목소리가 귀통을 때렸다.“뭐? 왜 그런 생각을 해? 증거라도 찾았어? 뭔데.”“증거 같은 거 없어. 그냥 감이랄까?”“이런...”입 주변까지 나온 욕을 억지로 삼킨 소안영이 질문을 이어갔다.“그럼 왜 갑자기 그런 감이 들었는데? 계기가 있을 거 아니야.”이에 강유리는 고정남과 함께 식사를 했을 때의 모습과 얼마 전 릴리에게 조사를 부탁했지만 결국 알아내는 것에 실패했던 일까지 모든 걸 털어놓았다.“이렇게까지 정보가 막혀있다는 건 이모가 이 일을 일부러 숨겼다고밖에 볼 수 없어.”“뭐 좀 이상하긴 하네. 그런데 날 너무 과대평가 한 거 아니야? 네 동생도 못 알아낸 걸 내가 알아낼 수 있을 거라 생각해? 차라리 남편한테 부탁하는 게 훨씬 더 효율적일 것 같은데.”“이런 뒷조사는 네가 더 잘할 것 같아서.”‘뭐야, 칭찬인 것 같은데 왜 이렇게 기분이 나쁘지?’“그리고 당분간은 남편 얼굴 보고 싶지 않아.”“왜? 어제 늦게 들어갔다고 싸웠어?”순수한 소안영의 질문에 강유리의 볼이 다시 화끈 달아
신주리는 고민하다가 말했다.“난 최근에 일이 많지 않아 괜찮지만 다음 달에 곧 새로운 촬영을 시작할 거야.”육시준은 고개를 끄덕였다.“네. 다음 달에 돌아가면 촬영 일정을 맞출 수 있어요.”육경서는 그들이 두어 마디 말로 일정안배를 끝내가 다급하게 입장을 밝혔다.“나도 있어! 주리가 돌아가지 않으면 나도 안 돌아갈래!”신주리는 흘겨보며 물었다.“넌 바쁘지 않아?”“마침 이 영화가 촬영을 마감할 예정이야. 기타 활동은 중요한 건 뒤로 미루고 중요하지 않은 건 매니저더러 거절하게 하면 돼.”육경서는 미처 깊게 생각하지도 않고 말했다.강유리는 반대하지 않고 귀띔했다.“강덕준 감독이 널 죽일 수도 있어.”육경서는 아랑곳하지 않았다.“괜찮아. 한 달뿐이잖아. 설마 날 따라 여기까지 오겠어?”강덕준이 그를 죽일지는 둘째치고, 어쨌든 지금 바론 공작은 그를 죽여버리고 싶었다.그는 그저 예의상 딸아이의 친구들을 초대해서 놀게 했을 뿐인데 결국 딸아이가 다음 달 귀국하는 일정을 안배하게 되다니?병원에서 육시준이 비아냥거리던 말을 그는 실행할 계획이었다. 단계마다 다른 이유로 딸을 만류하고 싶었고 시름 놓고 이곳에서 편히 안태하게 하고 싶었다.그러나 사위는...만약 자기 일을 다 처리했다면 남아있어도 괜찮았다. 부양할 수 없는 것도 아니니 말이다.그러나 지금 덤으로 두 사람이 더 생겼고 또 이 두 사람은 시간 맞춰 돌아가야 했다. 돌아가지 않으면 재촉당할 것이 뻔하다.“두 분이 바쁘면 굳이 남지 않아도 돼. 유리는 지금 손님 접대하는 게 불편하거든.”그는 정색해서 다시 말했다.그러자 여러 가지 눈빛이 삽시에 바론 공작을 향했다......신주리와 강유리는 제작팀과 반나절만 휴가를 냈기 때문에 오후에 돌아가야 했다. 그러나 오전 시간만으로 두 친구가 얘기하기엔 터무니없이 부족해 강유리는 직접 감독에게 전화해 하루 연장했다.점심시간.신주리는 육시준의 자리에 앉아 강유리의 옆에 누워 계속 절친끼리 이야기를 했다.강유리는 이번에 단도직입적
저쪽에서 한참 동안 침묵이 흘렀다.상대방도 자신만큼 놀란 모습을 상상하며 육경서는 다음 이야기가 기대되었다.그러나 생각지도 못하게 송미연은 놀랐지만 기뻐하는 기색이 없었다.“유리 찾으러 갔어? 프로그램을 녹화한다며 왜 그들을 찾으러 갔어? 거기는 시간이 아직 이르지 않아? 이맘때면 유리는 잠을 잘 자지도 못했을 건데...”송미연은 육경서가 철이 없이 강유리가 잘 쉬지 못하게 방해한다고 한바탕 야단을 쳤다.그러나 그녀의 말은 한 가지 중요한 소식을 알렸다.“진작 알고 있었어요?”“물론이지!”송미연은 자랑스럽게 말했다.“며느리가 임신했는데 이렇게 큰 소식을 어떻게 바로 나에게 알려주지 않을 수 있겠어? 경고하는데 너무 떠들지 마. 네 형수님을 화나게 하면 안 돼! 그냥 녹화만 잘하면 되는 거 아니야? 주리가 널 용서했어? 왜 돌아다니며 다른 사람의 가십거리를 알아내려고 해! 이번에 돌아와서 주리의 용서를 받지 못한다면 넌 아예 돌아오지도 마!”...화제가 자신을 욕하는 방향으로 변해버리자 육경서의 열정은 순식간에 식어버렸고 목소리도 누그러들어 어쩔 수 없이 말했다.“알았어요. 알았어요. 제가 원한 줄 아세요? 이것도 어쩔 수 없었기 때문이잖아요...”“뭐가 어쩔 수 없다는 거야? 모두 네가 자초한 거잖아! 쌤통이야!”“...”“섬에서의 상황이 어떤지 모르니 넌 주리를 잘 돌봐야 해. 난 실시간으로 라이브 방송을 살펴보고 있을 테니 넌 주리 괴롭히지 마.”송미연이 또 당부했다.육경서는 머뭇거리다가 정색해서 대답했다.“알았어요. 걱정하지 마세요.”송미연은 또 몇 마디 더 당부한 후 전화를 끊었다.육경서는 어두워진 휴대폰 화면을 보며 입꼬리를 올리며 웃었다.‘잘됐어. 아빠 엄마가 다 주리를 좋아하니 나중에 언제든지 주리는 억울함 당하는 일이 없을 거야. 적어도 내가 있는 한 억울함 당하지 않을 거야...”...점심은 빌라의 셰프가 만든 영양식이다. 맛은 좋지만 오래 먹으면 질릴 수 있어 강유리는 이 음식을 보며 저도 모르게 한숨
그러나 앉은 자리가 아직 따뜻해지기도 전에 육경서는 흥분된 듯 바로 일어나 소리쳤다. “뭐? 임신했다고?” 바론 공작은 짜증 섞인 눈길로 그를 쳐다보며 말했다. “목소리 좀 낮춰. 뭘 그렇게 놀라!” 그는 지금까지는 침착한 모습을 유지하고 있었지만 사실 소식을 들었을 땐 당황하고 흥분했던 걸 그가 모를 리 없었다. 육경서는 입을 막으며 어색하게 다시 앉았다. 하지만 그의 눈빛은 반짝이며 감출 수 없는 흥분이 드러났다. ‘나 이제 삼촌 된다! 삼촌 된다!’ “의사가 말하기를 첫 3개월은 불안정하니까 특히 조심해야 한다고 했다. 아버지도 이 소식을 공개하지 말고 태아가 안정될 때까지 기다리자고 하셨다.” 바론 공작은 드물게 인내심을 가지고 설명했다. 그는 그 말을 끝내며 신주리를 한번 훑어봤다. “그래서 나는 유리를 위해 사람들을 안배해 가까이서 돌보게 한 거다.” 그의 시선을 느낀 신주리는 고개를 들었다. 그녀는 공작을 한 번 보고 다시 눈을 내리깔며 강유리의 아랫배를 바라봤다.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마치 한번 만져보고 싶은 듯했지만 참았다. 그녀의 눈은 아름답게 빛나고 있었고 육경서와 같이 흥분과 기쁨을 숨길 수가 없었다. 그녀는 강유리의 아랫배를 가리키며 말했다. “그래서 지금 이 안에 작은 생명이 자라고 있는 거야?” “맞아.” 강유리가 그녀를 보고 웃으며 말했다. 신주리는 표정은 진지했지만 눈 속에 담긴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그럼 만져봐도 돼?” 육경서도 순간 정신을 차리며 손을 내밀었다. “나도...” “안 돼!” “안 돼!” 두 명의 목소리가 동시에 차갑게 외쳤다. 그들의 무리한 요구를 바로 거절했다. 강유리는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돌려 옆에 있던 두 남자를 쳐다봤다. 그녀는 그들에게 체면을 차리지 않았고 대신 신주리에게만 속삭였다. “조금 있다가 방에 들어가면 만져도 돼.” 육시준과 바론 공작은 동시에 얼어붙었다. ‘우리가 안 들릴 거라고 생각하나?’ 육경서는 기대에 찬 눈빛으로 강유리를
육경서는 얼굴에 기쁨이 가득한 채 입을 열려던 순간 정원에서 누군가가 다가왔다. 그 사람은 유창한 한국어로 두 사람에게 따뜻하게 인사했다. “이쪽이 둘째 도련님이랑 신주리 씨 맞으시죠? 강유리 아가씨께서 이미 기다리고 계십니다.” “안내 부탁드려요.” 신주리가 부드럽고 예의 있게 대답했다. 육경서는 잠시 멍한 표정을 지었다. ‘이 사람, 왜 이렇게 때맞춰 나타나는 거지? 다른 때는 왜 안 오고, 바로 이때 오냐고!’ “잠깐만요. 저희 형수 말고 일단 먼저 빌라를 둘러보고 싶어요!” 그가 급하게 발걸음을 옮기며 안내하는 집사를 붙잡았다. 집사는 그의 눈을 한 번 쳐다본 뒤 다소 의아해하는 표정으로 멈췄다. 신주리는 미소를 띤 채 침착하게 말했다. “미안해요. 낯을 가려서 그래요.” 육경서는 혼란스러웠다. ‘이게 무슨 말이야? 내가 낯을 가린다고? 왜 그렇게 갑자기...’ 집사는 이해한 듯 웃으며 공작님도 그들의 방문을 매우 기쁘게 생각해 오늘 특별히 이곳에서 기다리고 있다고 전했다. 육경서는 그 한마디도 제대로 듣지 않았고 눈앞의 신주리를 원망스러운 눈길로 바라봤다. ‘주리는 도대체 이게 무슨 뜻이야? 너무 쉽게 대답해서 다시 부정하려는 건가?’ 그들이 정원으로 들어섰고 이곳은 여전히 고요하고 우아한 분위기였다. 뜨거운 태양 아래 한쪽에서 차와 다과가 준비된 작은 테이블이 보였다. 강유리는 햇볕을 가린 파라솔 아래에 앉아 있었고 그 앞에는 육시준이 전화를 끊고 있었다. 바론 공작이 불만을 표하며 입을 열었다. “하루 종일 그 전화기 들고 있으면 안 돼! 그렇게 바빠? 전자기기 방사선이 얼마나 해로운지 알지? 의사 선생님이 말했잖아. 첫 세 달은 불안정하다고, 푹 쉬어야 한다고!” 육시준은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지난달에 돌아갔으면 이미 처리했을 일인데요.” 바론 공작은 얼굴에 불편한 기색이 스쳤다. “일이라는 게 끝날 수 있나? 돌아가면 내 딸과 시간을 제대로 보낼 수 있을까 몰라!” 육시준이 말하려던 순간 강유
감독은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강하게 반박하지도 못하고 조심스럽게 말했다. “규정에 따르면 녹화 중에는 제작진 팀을 이탈하면 안 됩니다.” 역시나 신주리는 가볍게 되물었다. “녹화 시작할 때 그런 규정은 없었잖아요? 갑자기 추가된 건가요?” “그건 아니지만 지금 상황이...” “그럼 우리를 일부러 견제하려는 건가요? 그럼 그냥 프로그램 안 하면 되죠?” 감독은 말문이 막혔다. 사실 첫 번째 시즌에서 육경서가 사고를 당한 이후로 그는 이미 이 두 사람에게 꼼짝 못 하고 있었다. 조건을 협상하든 규칙을 정하든 이 둘이 하겠다고 하면 다행이고 안 하겠다고 하면 모든 게 물거품이 될 판이었다. 결국 이를 악물고 그는 포기했다. “알겠어요, 알겠어! 두 분 다 제가 졌습니다! 하지만 어디 가든 꼭 행선지를 알려주시고 제작진 팀에서 두 분의 안전을 보장할 수 있어야 합니다!” “걱정 마세요. 너무 오래 걸리진 않을 거예요. 점심 먹고 바로 돌아올게요!” 신주리가 대범하게 말했다. ‘점심도 먹고 온다고?’ 하지만 그가 불만을 표현하기도 전에 두 사람은 이미 유유히 그의 앞을 지나쳐 나가버렸다. 호텔 문을 나서자마자 감독은 서둘러 휴대폰을 꺼내 전화를 걸었다. 전화기 너머로 나른한 목소리가 들렸다. “여보세요?” “강 대표님, 경서 씨랑 주리 씨가 지금 강 대표님을 만나러 갑니다! 그런데 프로그램 효과를 위해서 행선지에 대한 건 절대 발설하시면 안 됩니다!” 감독이 진지하게 말했다. 강유리가 태연하게 대답했다. “만약 제가 발설하면요?” 감독은 순간 당황했다. 그는 이런 대답을 예상하지 못했다. ‘아니, 이건 우리 회사의 프로그램 아니었나? 이렇게 마음대로 행동해도 되는 거야? 시청률이 안 오르면 강 대표님에게도 손해 아닌가?’ 감독은 빠르게 머리를 굴리며 어떻게든 이 대형 회사를 설득해야겠다고 결심했지만 강유리는 그의 말을 끊으며 다시 말했다. “농담이에요. 발설하지 않을 테니 걱정 마세요.” 감독은 긴 한숨을 내쉬며 안도했
비행기에 오를 때 각자 다른 생각을 품고 있었고 내릴 때도 마찬가지였다. 목적지에 도착했을 땐 이미 다음 날 새벽이었다. 제작진 팀은 미리 준비한 차를 타고 그들을 예약된 호텔로 보냈다. 해변가에 위치한 경치가 아름다운 5성급 호텔이었다. 모두들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이번에 제작진 팀 정말 큰돈 쓴 거네! 이게 진짜 여행 같아!” “그렇지. 갑작스러운 느낌도 있지만 일정은 꽤 합리적이네!” “응, 또 감사한 건 처음에 우리 주리랑 경서에게 그 사건이 터진 후로 대우가 점점 더 좋아졌다는 거야. 그들은 정말 목숨을 걸고 얻은 거라니까!” 모두가 웃으며 체크인 절차를 마쳤다. 그때 감독 팀에서 메시지가 왔다. “오늘 밤은 여기서 쉬고 내일은 섬으로 갑니다.” 모두들 당황했다. ‘그래서 목적지는 여기가 아닌가?’ “목적지는 반대편에 있는 작은 관광 섬입니다. 규모는 작지만 최근 몇 년 동안 관광업이 급성장했습니다. 얼마 전 이 섬의 소유자가 바뀌어서 다시 한번 큰 화제를 일으켰죠.” 감독이 그렇게 말하자 신주리는 점점 더 익숙해지는 느낌을 받았다. “그게 바론 공작이 유리에게 선물한 섬이죠?” 감독이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육경서는 감탄하며 물었다. “그럼 어떻게 우리 형수를 설득했어요?” 감독 팀은 미소를 지으며 답하지 않았다. 실시간 채팅창에서는 감탄이 이어졌다. [유리 언니가 이번 프로그램을 위해 진짜 대규모로 투자한 거네!] [하하하, 유리 언니가 투자한 건 아니야. 그냥 완전 부모님에게 의지하고 있는 거지! 그리고 그 덕분에 도련님과 미래의 동서가 혜택을 보는 거고!” “나도 섬 주인 언니가 있었으면 좋겠다!” “이번에 유리 언니 우정 출연할지 궁금하다!” 아침 식사 후 모두 방으로 돌아가 시차를 맞추기 위해 잠을 청했다. 카메라는 잠시 쉬어갔다. 신주리는 비행기에서 잠깐 눈을 붙였기에 이제는 전혀 졸리지 않았다. 그녀는 샤워를 하고 옷을 갈아입은 후 모자와 선글라스를 쓰고 호텔 방을 몰래 빠져나
심지어 원피스까지 캐리어 하나에 다 준비해 놨다. “안 믿을지 몰라도 내가 쇼핑 리스트까지 작성했어. 엄마한테도 참고를 부탁했거든! 원피스는 엄마가 골랐어. 안심해, 눈썰미는 진짜 좋아!” 말을 하면서 그는 정말로 쇼핑 리스트를 꺼내서 신주리에게 보여줬다. 신주리는 그 리스트를 보지 않아도 이미 믿고 있었다. 심지어 조금 놀랐다. “너 그럼 네 짐은 어쩌고? 얼마나 챙겨왔어?” “짐 하나야. 나중에 필요하면 제작진 팀에 부탁할 거야!” 육경서는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듯 말했다. 신주리는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그녀가 너무 오랫동안 육경서를 바라보고 있었던 탓인지 휴대폰을 들여다보지 않은 채 그를 쳐다보던 신주리가 이상하다는 걸 눈치챈 육경서는 본능적으로 고개를 들어 그녀를 쳐다봤다. “왜?” 신주리는 아무 말 없이 시선을 돌려 휴대폰 화면을 바라보며 말했다. “이렇게 많아?” 육경서는 묘한 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그렇게 많은 건 아니야. Y 국에 있는 우리 회사 지사에서 몇 가지 더 준비해 줬거든...” 그가 말을 하다 갑자기 멈칫했다. 불필요한 말을 했다는 걸 깨달은 듯했다. 신주리는 그 모습을 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그리고 그녀의 머릿속에 갑자기 대담한 생각이 떠올랐다. “이번 목적지는 네가 제작진 팀에 요청한 거 아니야?” “무슨 말이야? 내가 그런 사람인 줄 알아?” 육경서는 당황한 듯 대답했다. “네가 그런 사람 아닌가?” 육경서는 잠시 생각에 잠긴 후 고백했다. “맞아, 그런 사람일 수도 있어. 하지만 이번에는 정말 아니야! 사실 내가 쓴 목적지는 원래 해변이었어. 이런 건 결국 다 준비해야 할 것들이잖아.” 신주리는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다. 대신 이제는 아예 잠을 잘 수가 없었다. 다른 한편에서는 서진태와 소지석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서진태는 진지하게 소지석에게 도씨 가문의 그 양성 계획에 대해 물어보았다. 이 계획은 너무나도 비상식적이어서 의심의 눈초리를 거둘 수 없었다. 완전히 그들
[하하하, 이게 무슨 이상한 조합이야? 어쩐지 묘하게 어울리기도 하고 또 웃기기도 하네!] [처음부터 차 안에서 자리싸움만 아니었어도 이렇게 어색하지는 않았겠지.] [우리 지원 언니 한마디로 모든 흐름이 뒤집혔어!] [강미영은 도대체 무슨 속셈이지? 우리 지석이를 일부러 피하는 거야?] [다시 한번 말하지만 소지석 팬들 너무 이기적이지 마! 누구든 미영 언니에게 다가갈 수 있고 미영 언니는 모두를 거절할 권리가 있어!] 좌석이 정리되고 비행기가 이륙을 준비하자 라이브 방송은 일시적으로 종료되었다. 이런 24시간 라이브 촬영 프로그램에서도 이렇게 잠깐 동안만은 각자가 자신만의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강미영은 라이브 방송이 종료된 뒤 의아한 표정으로 한지원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여전히 왜 한지원이 굳이 자신과 함께 앉으려고 했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물론 지금 상황에서 누가 자신에게 같이 앉자고 했어도 마다하지는 않았겠지만... “미영 언니, 난 저 커플 팬이야. 무슨 일 있으면 나한테 얘기해. 그러니까 제발 내 최애 커플 깨지지 않게 도와줘!” 한지원은 진지한 얼굴로 이유를 털어놓았다. 강미영은 살짝 멍해지더니 결국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알겠어, 앞으로 네 최애 커플 잘 지켜주도록 할게.” 한지원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밝게 웃었다. “정말 고마워! 덕분에 내 최애 커플이 마음 편히 연애할 수 있게 됐어!” 강미영은 눈가를 약간 찡그리며 물었다. “근데 언제부터 걔네 둘의 팬이 된 거야? 그리고 지금 걔네 둘 관계 꽤 안정적이던데 내가 굳이 뭐 하러 그걸 망치겠어?” 한지원은 고개를 저으며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미영 언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야. 중요한 건 이런 카메라 밖에서의 달달한 순간들이지.” 강미영은 순간 뭔가를 깨달은 듯 눈썹을 살짝 치켜세웠다. “혹시 영감이라도 떠오른 거야?” 한지원은 멍하니 있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언니의 작은 호의 하나가 한 명의 유명 만화가를 탄생시킬 수도 있어!” 강
그는 단지 이런 행동을 통해 자신의 마음을 표현하고 싶었다. 강미영에게 그를 좀 더 이해할 기회를 주고 소지석에게는 그가 혼자서만 밀어붙이지 않도록 눈에 띄게 하려 했다. 그러나 이 행동을 알아본 사람들도 있지만 일부 팬들은 그를 오해하거나 비판하기도 했다. [솔직히 말해서 서진태는 너무 경계가 없지 않나요? 경쟁하고 싶다 해도 이렇게까지 급하게 해야 하나요? 왜 꼭 같이 앉아야만 하는 거죠?] [맞아요! 강미영 언니는 분명히 불편해 보였고 바로 피해서 조수석에 앉았잖아요!] [좋아한다고 해도 좀 경계를 두고 해야죠.] [근데 소지석 팬들 너무 이중잣대 아니에요? 오빠가 같이 앉고 싶으면 직설적으로 다가가도 ‘멋지다, 드디어 마음을 표현했다!’고 하는데 서진태가 다가가면 ‘경계가 없다’고 비판하잖아요?] [맞아요. 서진태는 사실 강미영 언니와 앉고 싶은 것보다는 자신의 마음을 표현하고 싶었던 거죠.] 댓글창은 점점 떠들썩해졌다. 신주리와 육경서의 강미영에 대한 이해도는 완벽했다. 감정상에서 경쟁이 시작되면 그녀는 주저 없이 피할 것이다. 강미영은 감정을 물건처럼 경쟁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이런 성격의 프로그램에서는 남성들끼리의 경쟁이나 여성들끼리의 경쟁이 감정을 더 순수하지 않게 만들 수 있고 로미오와 줄리엣이 될 거라고 생각했다. 결국 그런 외적인 압박이 감정을 더 강화시키는 효과가 생기게 된다. 사실 그들이 정말 사랑하는 건 아닐 수도 있다. 단지 지는 걸 참지 못해서 그런 것일지도 모른다. 그녀와 고정남의 관계도 그랬다. 주위에서 반대할수록 더 진지하게 여겨졌던 그 감정이었지만 결국 그것은 진정한 사랑이 아니라 엉망이 된 감정이었음을 깨달았다. “네가 졌으니까 내 선물 잊지 말고 사 와.” 신주리는 자신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육경서는 그 결과를 보며 입술을 삐죽 내밀고는 돌아서서 그녀에게 엄지를 치켜들었다. “이번엔 네가 이겼어.” 신주리는 눈을 깜빡이며 말했다. “이번? 그럼 다음에도 나랑 내기할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