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유리가 진지하게 묻자 인자한 미소만 짓고 있던 한미연의 표정 역시 조금 어두워졌다.소파에 살짝 몸을 기댄 그녀가 대답했다.“내 아들은 내가 가장 잘 알아. 지금 이 상황에서 네가 마음에 드네 마네 하는 말을 하는 건 아무 의미가 없단다. 오히려 괜한 집안싸움만 되는 꼴이겠지. 하지만 이거 하나는 확실해. 나도, 시준 아빠도, 시준이를 믿고 그 아이의 뜻을 존중해. 그러니 당연히 널 우리 집안 며느리로 받아들일 거다.”진솔한 대답에 왠지 모르게 강유리의 고개는 더 숙어졌다.“말씀은 그렇게 하셔도 저에 대해 조사는 해보셨을 거잖아요. 그렇다면 제 소문에 대해서도 아실 테고요.”“그 소문들 정말 사실이니?”생각지 못한 질문이라 강유리의 몸이 살짝 떨려왔다.“아, 아니요.”“아니면 된 거 아니야? 재벌가... 다들 고상한 척, 깨끗한 척 하지만, 어찌 보면 시궁창보다 더 더러운 게 이 바닥이야. 그저 다들 돈과 권력으로 애써 더러운 허물을 숨기는 능할 뿐이지. 나도 이 나이까지 살면서 볼 꼴, 못 볼 꼴 많이 봐왔어. 적어도 뭐가 진실이고 뭐가 거짓인지 가릴 수 있는 분별력 정도는 가지고 있다는 뜻이야.”정말로 현명한 인생 선배 같은 한미연의 말에 강유리는 멍한 표정을 지어보였다.‘진짜 이런 시어머니도 있구나...’“그리고 어젯밤에 있었던 일은... 어머니로선 당연히 네가 시준이의 대외적인 명예와 입장을 생각해 주길 바라지만, 너와 같은 여자로선 시준이 행동이 틀렸다고 생각하지 않아. 자기 여자도 제대로 못 지키는 놈이랑 결혼을 왜 해? 그리고 그런 자식이 다른 일을 잘하면 얼마나 잘 하겠어?”“그럼 어머니로서의 생각과 여자로서의 생각 중 어느 쪽에 더 무게가 실리시는데요?”고개를 갸웃하던 강유리가 다시 날카로운 질문을 던졌다.“글쎄? 솔직히 말하면 한 번도 진지하게 생각한 적 없는 질문이구나.”“네?”“인생 선배로서 조언하는데 너도 괜히 그런 문제 때문에 고민하고 그러지 마. 그런 건 육씨네 부자들이 알아서 하게 내버려두자고. 우리 이
“이 수표는... 받지 않을래요. 물론 새 작품도 어머님을 위해 남겨둘 테니 걱정하지 마시고요.”이 세상에 공짜는 없다.단순하지만 강유리의 좌우명 같은 말이었다.게다가 시어머니라는 애매한 사이에서 괜히 신세를 지는 것도 마음에 걸렸고 행여나 이것이 LK그룹의 돈을 보고 육시준에게 접근한 것이 아닌지에 대한 테스트가 아니라고 100% 확신할 수도 없었기에 덥썩 받는 건 위험하다는 생각에서였다.‘그리고... 내가 원하는 건 내 힘으로 얻어야 제맛이지.’한편, 2층 서재의 분위기는 훨씬 더 무거운 모습이다.워낙 보수적인 육지원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이 바로 효심이었으므로 화가 머리끝까지 난 듯했다.“할아버지 화 많이 나신 거 뻔히 알면서 달래드릴 생각은 안 하고 불난 데 기름을 부어? 우리 가문에 불효자는 필요없다. 계속 네 멋대로 하고 살 거면 나도 가만히 안 있을 테니까 그렇게 알아.”“가만히 안 있으면.. 어떻게 하실 건데요?”“너야 뭐... 내가 어떻게 할 수 없을지는 몰라도. 강유리, 그 정도는 이 아비가 건드려 볼만 하지 않겠니?”육지원의 입에서 강유리의 이름이 나오자 육시준이 고개를 번쩍 들었다.육지원, 육시준.살가운 부자사이라고는 절대 할 수 없었지만, 이렇게까지 언성을 높이는 일도 드물었다.보통은 효도네 뭐네 하는 레파토리가 나올 때쯤이면, 육시준이 먼저 타협하곤 했었지만, 강유리까지 건드린 이상, 그도 절대 물러서고 싶지 않았다.‘괜히 나 때문에 유리가 더 위험해지는 건 싫어.’“사실 저한테 더 좋은 방법이 있는데요.”“무슨 방법?”육지원이 미간을 찌푸렸다.“유리가 사고를 쳐서 할아버지 심기를 건드린 것도 삼촌과 아버지 사이가 껄끄러워진 것도 사실이니... 차라리 이혼하겠습니다.”이에 차분한 육시준과 달리 육지원이 발끈했다.“내가 제대로 사과하라고 했지 언제 너더러 이혼까지 하랬어?”“이혼이 더 쉽고 깔끔하죠. 그리고 제 성격 아시잖아요? 잘못한 게 없는 상황에서 마음에도 없는 사과까지 할 만큼 멍청하지
약 30분 뒤, 육시준 부자가 차례로 서재에서 나왔다.여유로운 얼굴의 육시준과 달리 육지원은 수심이 가득한 얼굴 이었지만 말이다.한미연은 어떻게든 두 사람을 하룻밤이라도 집에서 재우고 싶은 모양이었지만 육지원은 중요한 할 말이 있는 듯한 표정으로 그녀를 2층으로 불렀다.그렇게 아쉬움 가득한 얼굴로 아들 부부를 떠나 보낸 한미연이 안방에 들어오자마자 남편을 향해 눈을 흘겼다.“아니, 당신 도대체 왜 그래요? 아들 부부가 처음 집에 온 거잖아요. 살가운 시아버지까진 아니어도 기본적인 예의는 지켜야 할 거 아니에요! 표정은 다 썩어서는!”아내의 말에 육지원이 흠칫했다.“내 표정이 그렇게 안 좋았나?”뻔뻔한 대답이라고 생각했는지 한미연이 코웃음을 쳤다.“당신의 그 복잡한 집안 사정, 난 이해하길 포기한 지 오래예요. 그리고 난 유리가 마음에 드니까 괜히 반대할 생각은 하지도 말아요. 마음에 안 드는 게 있으면, 당신 아들한테 화를 내세요! 괜히 시댁까지 와서 잔뜩 기죽어 있는 애한테 화풀이 하지 말고.”수십 년간 부부로 살다보니 이제 척하면 척.한미연은 딱 봐도 아들과의 말싸움에서 한방 먹은 게 분명한 얼굴을 하고 있는 남편을 향해 쏘아붙였다.‘하여간 나이를 먹어도 철이 안 들어.’“그래. 곰곰히 생각해 보니까 나도 마음에 드는 것 같아.”육지원이 어딘가 다급해 보이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결혼식... 최대한 빨리 올리라고 해. 당신이 애들 준비 좀 도와줘.”남편이 갑자기 이 결혼에 이렇게 적극적인 데는 분명 다른 꿍꿍이가 있는 것이라 생각한 한미연이 눈을 가늘게 뜨며 따져물었다. “아니, 식사 내내 뚱해 있던 사람이 왜 갑자기 변덕이에요? 솔직히 말해 봐요. 아까 시준이랑 도대체 무슨 얘기를 한 거예요?”“...”의심 가득한 아내의 질문에 육지원은 한 마디도 할 수 없었다.다른 것도 아니고 우리 아들이 게이일지도 모른다는 말을 어떻게 한단 말인가?“아니, 나도 유리 마음에 든다니까. 그러니까 얼른 결혼식 올리라고 해. 최대한
“어머니가 주신 선물이야. 너한테 꼭 전해다달라고 하시더라.”어리둥절한 표정의 강유리를 위해 육시준이 친절하게 설명을 해주었다.‘설마...’역시나 봉투를 열어보니 방금 전 그녀가 거절했던 백지수표와 ZJ에스테틱 회원카드가 들어있었다.ZJ에스테틱, 재벌가 사모님들이 가장 애용하는 곳, 철저하게 회원제로 운영되고, 새로운 회원으로 가입하려면, 기존 회원의 추천까지 받아야 하는 곳으로 이 카드는 단순히 VIP 카드가 아닌 그녀를 상류층의 일원으로 인정함을 의미했다.나름 부잣집 딸로 자랐지만, 이곳의 VIP 카드는 들어만 봤을 뿐, 직접 보는 건 처음이라 강유리도 한동안 입을 다물지 못했다.“우리 어머니 생각보다 화끈하시지? 그리고 언젠가 너도 부자가 되면 나랑 결혼한 거 공개하겠다고 했던 말 기억하지? 그럼 이제 부자 됐으니까 공개해도 되겠네?”“꼭 돈 때문이 아니라...”“그럼 뭐가 문제인데?”봉투를 꼭 쥔 강유리의 손이 살짝 떨려왔다.방금 전 그녀를 바라보던 친절한 눈빛과 말투, 그리고 진심으로 그녀를 위한 것처럼 들리던 조언들이 다시 떠오르고...시어머니 한미연의 진심이 느껴짐과 동시에 혹시나 이 모든 게 단순히 테스트가 아닐까 속물적으로 생각했던 스스로가 부끄러워졌다.누군가에게 인정받는다는 것, 누구라도 기뻐할 만한 일 이다.게다가 그 상대가 평생을 함께 하기로 한 배우자의 부모님이라면, 더 기쁠 터이니.진짜 가족에게서 느껴보지 못한 가족의 사랑과 정을 시댁에서 느낄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기대감이 넘실거렸다.“결혼식에는 양가 부모님 모두 참석해야 하잖아. 하지만... 아버지도... 성신영도 모두 내가 가족으로 인정하지 않은 사람들이야.”그리고 다시 고개를 돌린 그녀의 표정은 그 어느 때보다도 진지했다.마침 신호등에 걸리고 차량을 멈춘 육시준이 고개를 돌렸다.강유리의 맑고 아름다운 눈동자를 빤히 바라보던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할아버지 깨어나실 때까지 기다리자.”한편 병원.오후 내내 수술에 시달려 저녁도 챙겨먹지 못
“그런 생각 한 번도 해본 적 없는데요.”순진한 얼굴로 대답한 조보희는 평소와 달리 훨씬 더 어두운 표정의 송이혁의 눈치를 살피다 한 마디 덧붙였다.“아, 이제 알았으니까 볼일 봐요. 어차피 나도 별로 배 안 고팠어요. 더 기다릴 수 있어요, 나.”하지만 그런 그녀의 모습에 송이혁은 한숨만 나올 뿐이었다.“조보희 씨, 여긴 조보희 씨 집도 아니고 호텔도 아니고 병원입니다. 지금 조보희 씨가 별로라고 하는 이 병실, 수많은 환자들이 몇 달을 웨이팅해도 못 들어오는 곳이에요. 조보희 씨야 부잣집에서 태어나 평생 고생이라곤 못 해보고 자랐을 테니 평범한 사람들이 어떻게 사는지 잘 모르겠죠. 이해해요. 하지만 다른 건 몰라도 병원에서 이런 장난은 치지 마십시오. 조보희 씨 이기심 때문에 진짜 절실한 환자들이 치료를 못 받게 될 수도 있으니까요.”“아니, 그게 아니라...”상황이 생각보다 심각하게 흘러가자 조보희의 얼굴이 살짝 창백하게 질렸다.“화상 정도로 1주일을 입원해 있지 않나. 지금 강유리 씨가 퇴원한 틈을 타 바로 그 뒤를 이어받질 않나. 이기적인 거 맞잖아요?”평소 껄렁대는 모습은 전혀 볼 수 없을 정도로 진지한 얼굴, 그 모습에 겁을 먹은 조보희는 낯빛도 머릿속도 새하얘지고 말았다.“그, 그게 아니라... 유리가...”“강유리 씨가 하는 말이면 다 들을 겁니까? 강유리 씨, 그쪽 길가에 버리고 간 사람이에요. 그런데 왜 아직도 거기 붙어있어요?”“송이혁 씨, 그쪽이 날 무시하는 건 잘 알겠는데 내 친구한테는 뭐라고 하지 말죠?”하지만, 마지막 말에 조보희도 발끈했다.“그래요! 가끔씩 유리가 짓궂게 구는 건 맞지만... 적어도 다른 사람들이 나한테 상처주지 않게 지켜준다고요. 나 한 번 도와줬다고 내 인생에 이래라저래라 하지 말아요. 내가 그쪽 일하는 데 방해된다고 했죠? 그래요! 갈게요. 가면 되잖아요. 누군 병원에 있는 게 좋아서 여기 있는 줄 알아? 누군 배고파 죽겠는데 좋아서 여태까지 기다리고 있는 줄 아냐고!”침대에서 벌떡
조보희가 강유리의 지갑까지 야무지게 챙겨 자리를 뜨고...이 모습을 바라보던 육시준은 미간을 찌푸렸다.‘뭐야, 강유리... 대외적으론 고고하고 차가운 컨셉 아니었나? 왜 다른 사람한테도 저렇게 부드럽게 말하는 거야...!’놀랍게도 조보희의 동성친구 질투 유발 작전이 이상한 쪽으로 통한 모양이었다.하지만 육시준의 불편한 심경을 전혀 눈치채지 못한 강유리가 물었다.“이혁 씨, 지금 이게 무슨 상황인지 설명 좀 해주시겠어요? 이혁 씨가 보희 화나게 한 거 맞죠?”하지만 송이혁은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누가 감히 우리 보희 아가씨를 건드리겠어요. 두 사람 강 회장님 상태에 대해 물으러 온 거 맞죠? 잘됐네요.”“아, 사실 퇴원하려고 했는데 병원 쪽에서 검사 몇 개만 더 하라고 해서요. 아, 물론 할아버지 상태가 궁금하기도 했고요.”강유리의 대답에 송이혁의 표정이 살짝 굳었다.워낙 바쁜 스케줄 탓에 퇴원 오더를 내리지 못했으니 병원 측에서는 강유리의 퇴원 절차를 밟아줄 수가 없었고 결국... 그가 정말 조보희를 오해한 게 맞았으므로.“조보희 씨가 유리가 이미 퇴원한 병실을 차지하고 있었다고 생각한 거야? 물론 심한 말도 했겠네?”송이혁, 평소에는 깐족대다가도 환자 문제에 있어선 그 누구보다도 진지한 사람이라는 걸 알고 있는 육시준이 물었다.송이혁은 침묵으로 긍정의 뜻을 대신하고 강유리는 기가 막히다는 표정을 지었다.“내가 잠깐 여기 있으라고 한 거예요. 아니, 제대로 알아보지도 않고 대뜸 화부터 내면 어떡해요!”어찌 됐든 지금은 송이혁이 잘못한 게 맞으니 강유리의 질타에 송이혁은 그 어떤 변명도 하지 않았다.“그리고 저번에도 화상 입었을 때도! 보희가 얼마나 고생을 했는데 어떻게 그런 말을 해요?”“고생이라뇨?”일주일 내내 잘 먹고 잘 놀다 간 줄 알았는데 고생이라니.“병원 측이 바보도 아니고 그깟 화상으로 입원을 시켜줄 리가 없잖아요? 병실에 잠깐 자리 나면 거기서 머물고 그랬던 거예요. 이혁 씨랑 같이 퇴근하고 같이 밥도 먹고 싶어
그제야 강유리가 자리를 비켜주고 송이혁은 이때다 싶어 부랴부랴 병실을 나섰다.하지만 강유리의 예상과 달리 그는 조보희를 붙잡기 위해 그곳에서 벗어나려 했던 건 아니었다.이미 화가 난 상태에서 붙잡아봤자 괜히 감정만 격해질 거란 생각에 따로 기회를 잡아 제대로 사과할 생각이었다.하지만 부부가 동시에 질타가 담긴 눈빛을 쏘아대니 도저히 버틸 수 없어 화장실이라는 유치한 핑계를 대면서까지 현장을 벗어났던 것이다.한편, 강유리는 그제야 웃음을 터트렸다.“여보, 여보는 참... 사람 기분 나쁘게 하는 재주가 있어. 게다가 친구한테도 가차없네.”“그러는 넌 여자한테도 그렇게 부드러운 말투로 말할 줄은 몰랐네.”‘하, 뭐야. 이제 하다하다 친구한테까지 질투하니...?’잠시 후, 강유리, 육시준 부부가 진료실로 향했을 때 송이혁은 어느새 감정을 추스르고 진지한 의사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병원 쪽에서 보내준 차트를 확인해 보면 유전병, 노환으로 인한 질병이라고 적었을 뿐, 정확한 병인은 찾아내지 못한 것 같습니다. 하지만... 여러 수치들을 확인해 본 결과 확실히 뭔가 이상해요.”모든 검사 데이터를 확인하여 얻어낸 결론, 이미 90% 이상 확신이 들었지만 직접 입 밖으로 내뱉자니 여전히 조심스러웠다.“이혁 씨 말씀은... 아버지가 할아버지한테 사용한 약에 뭔가 문제가 있다는 건가요?”그리고 눈치 빠른 강유리는 바로 포인트를 캐치했다.“네.”‘역시... 워낙 똑똑한 여자라 얘기가 빠르겠어.’송이혁이 고개를 끄덕였다.“건강하시던 분이 갑자기 심장쪽 기능만 급격하게 떨어졌다는 게 솔직히 이해가 안 됩니다. 누군가 일부러 손을 썼을 가능성이 커요.”순간 다리에 힘이 풀린 강유리가 비틀거리고 육시준이 그녀를 부축해 의자에 앉혔다.애초에 이런 의심을 하지 않았던 건 아니지만 전문가의 입에서 흘러나오니 충격이 배로 다가왔다.‘엄마도... 엄마도 할아버지와 비슷한 증상이였어. 설마... 엄마도?’“지금까지 사용했던 치료 방안을 훑어봤는데 겉보기엔 아무
“보희가 방금 전에 예약한 레스토랑이에요.”송이혁이 강유리의 말에 반응했을 땐 두 사람이 이미 진료실을 나간 뒤.혼자 남은 그가 구시렁댔다.“비싼 시계 사준다고 했으면서... 이게 다야?”말은 그렇게 해도 그의 입가에는 묘한 미소가 피어올랐다.하지만 두 사람이 사라진 복도를 바라보던 그의 눈동자가 의미심장한 빛을 내뿜었다.‘강유리, 보통내기가 아니야...’실제로 만난 건 몇 번이 다지만 그때마다 강유리는 놀라운 모습을 보여주었다.똑똑한 데다 대담하고 일의 실행력도 빠른 것이 남자라면 사죽을 못 쓰고 남편의 힘과 명예 뒤에 숨어 모든 걸 조종한다는 소문과는 아예 딴판이었다.‘조보희 그 여자, 딱 봐도 세상 물정 모르는 순진한 부잣집 아가씨인데... 유리 씨 같은 사람과 친하게 지내다간 이용만 당하고 버려질지도 몰라. 내가... 말려야겠어.’뭔가 다짐한 듯한 송이혁은 바로 레스토랑으로 걸음을 옮겼다......한편, 집으로 돌아가는 길.창문에 기댄 채 빠르게 사라지는 길가의 풍경들을 바라보는 강유리의 눈빛은 차갑기만 했다.‘내가 해외로 나가있는 3년 동안 할아버지한테 그딴 짓을...’조금이라도 늦게 귀국했다면, 병원을 옮기는 걸 조금이라도 지체했다면 할아버지가 정말 세상을 떴을 수도 있을 거란 생각에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이때 육시준이 불안에 떠는 그녀의 손을 꼭 잡았다.“자책하지 마. 넌 최선을 다했으니까.”위로가 담긴 부드러운 목소리와 따뜻한 손에서 느껴지는 온기가 상처받은 그녀의 마음을 어루만지는 듯했다.손가락을 움직여 깍지를 켠 강유리는 언제 우울했었냐는 듯 장난스런 미소를 지었다.“여보, 요즘 우리 사이 너무 좋은 것 같아. 여보가 날 좋아해 준 덕분에 우리가 같이 하는 일도 잘 되고 있고...”“내가 널 좋아하는 게 우리 사업에 도움이 되긴 해?”“당연하지! 난 날 좋아하는 남자한테는 굉장히 후한 스타일이거든.”어이없다는 표정을 짓는 육시준을 향해 강유리가 진지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구체적으로 어떻게
신주리는 고민하다가 말했다.“난 최근에 일이 많지 않아 괜찮지만 다음 달에 곧 새로운 촬영을 시작할 거야.”육시준은 고개를 끄덕였다.“네. 다음 달에 돌아가면 촬영 일정을 맞출 수 있어요.”육경서는 그들이 두어 마디 말로 일정안배를 끝내가 다급하게 입장을 밝혔다.“나도 있어! 주리가 돌아가지 않으면 나도 안 돌아갈래!”신주리는 흘겨보며 물었다.“넌 바쁘지 않아?”“마침 이 영화가 촬영을 마감할 예정이야. 기타 활동은 중요한 건 뒤로 미루고 중요하지 않은 건 매니저더러 거절하게 하면 돼.”육경서는 미처 깊게 생각하지도 않고 말했다.강유리는 반대하지 않고 귀띔했다.“강덕준 감독이 널 죽일 수도 있어.”육경서는 아랑곳하지 않았다.“괜찮아. 한 달뿐이잖아. 설마 날 따라 여기까지 오겠어?”강덕준이 그를 죽일지는 둘째치고, 어쨌든 지금 바론 공작은 그를 죽여버리고 싶었다.그는 그저 예의상 딸아이의 친구들을 초대해서 놀게 했을 뿐인데 결국 딸아이가 다음 달 귀국하는 일정을 안배하게 되다니?병원에서 육시준이 비아냥거리던 말을 그는 실행할 계획이었다. 단계마다 다른 이유로 딸을 만류하고 싶었고 시름 놓고 이곳에서 편히 안태하게 하고 싶었다.그러나 사위는...만약 자기 일을 다 처리했다면 남아있어도 괜찮았다. 부양할 수 없는 것도 아니니 말이다.그러나 지금 덤으로 두 사람이 더 생겼고 또 이 두 사람은 시간 맞춰 돌아가야 했다. 돌아가지 않으면 재촉당할 것이 뻔하다.“두 분이 바쁘면 굳이 남지 않아도 돼. 유리는 지금 손님 접대하는 게 불편하거든.”그는 정색해서 다시 말했다.그러자 여러 가지 눈빛이 삽시에 바론 공작을 향했다......신주리와 강유리는 제작팀과 반나절만 휴가를 냈기 때문에 오후에 돌아가야 했다. 그러나 오전 시간만으로 두 친구가 얘기하기엔 터무니없이 부족해 강유리는 직접 감독에게 전화해 하루 연장했다.점심시간.신주리는 육시준의 자리에 앉아 강유리의 옆에 누워 계속 절친끼리 이야기를 했다.강유리는 이번에 단도직입적
저쪽에서 한참 동안 침묵이 흘렀다.상대방도 자신만큼 놀란 모습을 상상하며 육경서는 다음 이야기가 기대되었다.그러나 생각지도 못하게 송미연은 놀랐지만 기뻐하는 기색이 없었다.“유리 찾으러 갔어? 프로그램을 녹화한다며 왜 그들을 찾으러 갔어? 거기는 시간이 아직 이르지 않아? 이맘때면 유리는 잠을 잘 자지도 못했을 건데...”송미연은 육경서가 철이 없이 강유리가 잘 쉬지 못하게 방해한다고 한바탕 야단을 쳤다.그러나 그녀의 말은 한 가지 중요한 소식을 알렸다.“진작 알고 있었어요?”“물론이지!”송미연은 자랑스럽게 말했다.“며느리가 임신했는데 이렇게 큰 소식을 어떻게 바로 나에게 알려주지 않을 수 있겠어? 경고하는데 너무 떠들지 마. 네 형수님을 화나게 하면 안 돼! 그냥 녹화만 잘하면 되는 거 아니야? 주리가 널 용서했어? 왜 돌아다니며 다른 사람의 가십거리를 알아내려고 해! 이번에 돌아와서 주리의 용서를 받지 못한다면 넌 아예 돌아오지도 마!”...화제가 자신을 욕하는 방향으로 변해버리자 육경서의 열정은 순식간에 식어버렸고 목소리도 누그러들어 어쩔 수 없이 말했다.“알았어요. 알았어요. 제가 원한 줄 아세요? 이것도 어쩔 수 없었기 때문이잖아요...”“뭐가 어쩔 수 없다는 거야? 모두 네가 자초한 거잖아! 쌤통이야!”“...”“섬에서의 상황이 어떤지 모르니 넌 주리를 잘 돌봐야 해. 난 실시간으로 라이브 방송을 살펴보고 있을 테니 넌 주리 괴롭히지 마.”송미연이 또 당부했다.육경서는 머뭇거리다가 정색해서 대답했다.“알았어요. 걱정하지 마세요.”송미연은 또 몇 마디 더 당부한 후 전화를 끊었다.육경서는 어두워진 휴대폰 화면을 보며 입꼬리를 올리며 웃었다.‘잘됐어. 아빠 엄마가 다 주리를 좋아하니 나중에 언제든지 주리는 억울함 당하는 일이 없을 거야. 적어도 내가 있는 한 억울함 당하지 않을 거야...”...점심은 빌라의 셰프가 만든 영양식이다. 맛은 좋지만 오래 먹으면 질릴 수 있어 강유리는 이 음식을 보며 저도 모르게 한숨
그러나 앉은 자리가 아직 따뜻해지기도 전에 육경서는 흥분된 듯 바로 일어나 소리쳤다. “뭐? 임신했다고?” 바론 공작은 짜증 섞인 눈길로 그를 쳐다보며 말했다. “목소리 좀 낮춰. 뭘 그렇게 놀라!” 그는 지금까지는 침착한 모습을 유지하고 있었지만 사실 소식을 들었을 땐 당황하고 흥분했던 걸 그가 모를 리 없었다. 육경서는 입을 막으며 어색하게 다시 앉았다. 하지만 그의 눈빛은 반짝이며 감출 수 없는 흥분이 드러났다. ‘나 이제 삼촌 된다! 삼촌 된다!’ “의사가 말하기를 첫 3개월은 불안정하니까 특히 조심해야 한다고 했다. 아버지도 이 소식을 공개하지 말고 태아가 안정될 때까지 기다리자고 하셨다.” 바론 공작은 드물게 인내심을 가지고 설명했다. 그는 그 말을 끝내며 신주리를 한번 훑어봤다. “그래서 나는 유리를 위해 사람들을 안배해 가까이서 돌보게 한 거다.” 그의 시선을 느낀 신주리는 고개를 들었다. 그녀는 공작을 한 번 보고 다시 눈을 내리깔며 강유리의 아랫배를 바라봤다.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마치 한번 만져보고 싶은 듯했지만 참았다. 그녀의 눈은 아름답게 빛나고 있었고 육경서와 같이 흥분과 기쁨을 숨길 수가 없었다. 그녀는 강유리의 아랫배를 가리키며 말했다. “그래서 지금 이 안에 작은 생명이 자라고 있는 거야?” “맞아.” 강유리가 그녀를 보고 웃으며 말했다. 신주리는 표정은 진지했지만 눈 속에 담긴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그럼 만져봐도 돼?” 육경서도 순간 정신을 차리며 손을 내밀었다. “나도...” “안 돼!” “안 돼!” 두 명의 목소리가 동시에 차갑게 외쳤다. 그들의 무리한 요구를 바로 거절했다. 강유리는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돌려 옆에 있던 두 남자를 쳐다봤다. 그녀는 그들에게 체면을 차리지 않았고 대신 신주리에게만 속삭였다. “조금 있다가 방에 들어가면 만져도 돼.” 육시준과 바론 공작은 동시에 얼어붙었다. ‘우리가 안 들릴 거라고 생각하나?’ 육경서는 기대에 찬 눈빛으로 강유리를
육경서는 얼굴에 기쁨이 가득한 채 입을 열려던 순간 정원에서 누군가가 다가왔다. 그 사람은 유창한 한국어로 두 사람에게 따뜻하게 인사했다. “이쪽이 둘째 도련님이랑 신주리 씨 맞으시죠? 강유리 아가씨께서 이미 기다리고 계십니다.” “안내 부탁드려요.” 신주리가 부드럽고 예의 있게 대답했다. 육경서는 잠시 멍한 표정을 지었다. ‘이 사람, 왜 이렇게 때맞춰 나타나는 거지? 다른 때는 왜 안 오고, 바로 이때 오냐고!’ “잠깐만요. 저희 형수 말고 일단 먼저 빌라를 둘러보고 싶어요!” 그가 급하게 발걸음을 옮기며 안내하는 집사를 붙잡았다. 집사는 그의 눈을 한 번 쳐다본 뒤 다소 의아해하는 표정으로 멈췄다. 신주리는 미소를 띤 채 침착하게 말했다. “미안해요. 낯을 가려서 그래요.” 육경서는 혼란스러웠다. ‘이게 무슨 말이야? 내가 낯을 가린다고? 왜 그렇게 갑자기...’ 집사는 이해한 듯 웃으며 공작님도 그들의 방문을 매우 기쁘게 생각해 오늘 특별히 이곳에서 기다리고 있다고 전했다. 육경서는 그 한마디도 제대로 듣지 않았고 눈앞의 신주리를 원망스러운 눈길로 바라봤다. ‘주리는 도대체 이게 무슨 뜻이야? 너무 쉽게 대답해서 다시 부정하려는 건가?’ 그들이 정원으로 들어섰고 이곳은 여전히 고요하고 우아한 분위기였다. 뜨거운 태양 아래 한쪽에서 차와 다과가 준비된 작은 테이블이 보였다. 강유리는 햇볕을 가린 파라솔 아래에 앉아 있었고 그 앞에는 육시준이 전화를 끊고 있었다. 바론 공작이 불만을 표하며 입을 열었다. “하루 종일 그 전화기 들고 있으면 안 돼! 그렇게 바빠? 전자기기 방사선이 얼마나 해로운지 알지? 의사 선생님이 말했잖아. 첫 세 달은 불안정하다고, 푹 쉬어야 한다고!” 육시준은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지난달에 돌아갔으면 이미 처리했을 일인데요.” 바론 공작은 얼굴에 불편한 기색이 스쳤다. “일이라는 게 끝날 수 있나? 돌아가면 내 딸과 시간을 제대로 보낼 수 있을까 몰라!” 육시준이 말하려던 순간 강유
감독은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강하게 반박하지도 못하고 조심스럽게 말했다. “규정에 따르면 녹화 중에는 제작진 팀을 이탈하면 안 됩니다.” 역시나 신주리는 가볍게 되물었다. “녹화 시작할 때 그런 규정은 없었잖아요? 갑자기 추가된 건가요?” “그건 아니지만 지금 상황이...” “그럼 우리를 일부러 견제하려는 건가요? 그럼 그냥 프로그램 안 하면 되죠?” 감독은 말문이 막혔다. 사실 첫 번째 시즌에서 육경서가 사고를 당한 이후로 그는 이미 이 두 사람에게 꼼짝 못 하고 있었다. 조건을 협상하든 규칙을 정하든 이 둘이 하겠다고 하면 다행이고 안 하겠다고 하면 모든 게 물거품이 될 판이었다. 결국 이를 악물고 그는 포기했다. “알겠어요, 알겠어! 두 분 다 제가 졌습니다! 하지만 어디 가든 꼭 행선지를 알려주시고 제작진 팀에서 두 분의 안전을 보장할 수 있어야 합니다!” “걱정 마세요. 너무 오래 걸리진 않을 거예요. 점심 먹고 바로 돌아올게요!” 신주리가 대범하게 말했다. ‘점심도 먹고 온다고?’ 하지만 그가 불만을 표현하기도 전에 두 사람은 이미 유유히 그의 앞을 지나쳐 나가버렸다. 호텔 문을 나서자마자 감독은 서둘러 휴대폰을 꺼내 전화를 걸었다. 전화기 너머로 나른한 목소리가 들렸다. “여보세요?” “강 대표님, 경서 씨랑 주리 씨가 지금 강 대표님을 만나러 갑니다! 그런데 프로그램 효과를 위해서 행선지에 대한 건 절대 발설하시면 안 됩니다!” 감독이 진지하게 말했다. 강유리가 태연하게 대답했다. “만약 제가 발설하면요?” 감독은 순간 당황했다. 그는 이런 대답을 예상하지 못했다. ‘아니, 이건 우리 회사의 프로그램 아니었나? 이렇게 마음대로 행동해도 되는 거야? 시청률이 안 오르면 강 대표님에게도 손해 아닌가?’ 감독은 빠르게 머리를 굴리며 어떻게든 이 대형 회사를 설득해야겠다고 결심했지만 강유리는 그의 말을 끊으며 다시 말했다. “농담이에요. 발설하지 않을 테니 걱정 마세요.” 감독은 긴 한숨을 내쉬며 안도했
비행기에 오를 때 각자 다른 생각을 품고 있었고 내릴 때도 마찬가지였다. 목적지에 도착했을 땐 이미 다음 날 새벽이었다. 제작진 팀은 미리 준비한 차를 타고 그들을 예약된 호텔로 보냈다. 해변가에 위치한 경치가 아름다운 5성급 호텔이었다. 모두들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이번에 제작진 팀 정말 큰돈 쓴 거네! 이게 진짜 여행 같아!” “그렇지. 갑작스러운 느낌도 있지만 일정은 꽤 합리적이네!” “응, 또 감사한 건 처음에 우리 주리랑 경서에게 그 사건이 터진 후로 대우가 점점 더 좋아졌다는 거야. 그들은 정말 목숨을 걸고 얻은 거라니까!” 모두가 웃으며 체크인 절차를 마쳤다. 그때 감독 팀에서 메시지가 왔다. “오늘 밤은 여기서 쉬고 내일은 섬으로 갑니다.” 모두들 당황했다. ‘그래서 목적지는 여기가 아닌가?’ “목적지는 반대편에 있는 작은 관광 섬입니다. 규모는 작지만 최근 몇 년 동안 관광업이 급성장했습니다. 얼마 전 이 섬의 소유자가 바뀌어서 다시 한번 큰 화제를 일으켰죠.” 감독이 그렇게 말하자 신주리는 점점 더 익숙해지는 느낌을 받았다. “그게 바론 공작이 유리에게 선물한 섬이죠?” 감독이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육경서는 감탄하며 물었다. “그럼 어떻게 우리 형수를 설득했어요?” 감독 팀은 미소를 지으며 답하지 않았다. 실시간 채팅창에서는 감탄이 이어졌다. [유리 언니가 이번 프로그램을 위해 진짜 대규모로 투자한 거네!] [하하하, 유리 언니가 투자한 건 아니야. 그냥 완전 부모님에게 의지하고 있는 거지! 그리고 그 덕분에 도련님과 미래의 동서가 혜택을 보는 거고!” “나도 섬 주인 언니가 있었으면 좋겠다!” “이번에 유리 언니 우정 출연할지 궁금하다!” 아침 식사 후 모두 방으로 돌아가 시차를 맞추기 위해 잠을 청했다. 카메라는 잠시 쉬어갔다. 신주리는 비행기에서 잠깐 눈을 붙였기에 이제는 전혀 졸리지 않았다. 그녀는 샤워를 하고 옷을 갈아입은 후 모자와 선글라스를 쓰고 호텔 방을 몰래 빠져나
심지어 원피스까지 캐리어 하나에 다 준비해 놨다. “안 믿을지 몰라도 내가 쇼핑 리스트까지 작성했어. 엄마한테도 참고를 부탁했거든! 원피스는 엄마가 골랐어. 안심해, 눈썰미는 진짜 좋아!” 말을 하면서 그는 정말로 쇼핑 리스트를 꺼내서 신주리에게 보여줬다. 신주리는 그 리스트를 보지 않아도 이미 믿고 있었다. 심지어 조금 놀랐다. “너 그럼 네 짐은 어쩌고? 얼마나 챙겨왔어?” “짐 하나야. 나중에 필요하면 제작진 팀에 부탁할 거야!” 육경서는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듯 말했다. 신주리는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그녀가 너무 오랫동안 육경서를 바라보고 있었던 탓인지 휴대폰을 들여다보지 않은 채 그를 쳐다보던 신주리가 이상하다는 걸 눈치챈 육경서는 본능적으로 고개를 들어 그녀를 쳐다봤다. “왜?” 신주리는 아무 말 없이 시선을 돌려 휴대폰 화면을 바라보며 말했다. “이렇게 많아?” 육경서는 묘한 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그렇게 많은 건 아니야. Y 국에 있는 우리 회사 지사에서 몇 가지 더 준비해 줬거든...” 그가 말을 하다 갑자기 멈칫했다. 불필요한 말을 했다는 걸 깨달은 듯했다. 신주리는 그 모습을 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그리고 그녀의 머릿속에 갑자기 대담한 생각이 떠올랐다. “이번 목적지는 네가 제작진 팀에 요청한 거 아니야?” “무슨 말이야? 내가 그런 사람인 줄 알아?” 육경서는 당황한 듯 대답했다. “네가 그런 사람 아닌가?” 육경서는 잠시 생각에 잠긴 후 고백했다. “맞아, 그런 사람일 수도 있어. 하지만 이번에는 정말 아니야! 사실 내가 쓴 목적지는 원래 해변이었어. 이런 건 결국 다 준비해야 할 것들이잖아.” 신주리는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다. 대신 이제는 아예 잠을 잘 수가 없었다. 다른 한편에서는 서진태와 소지석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서진태는 진지하게 소지석에게 도씨 가문의 그 양성 계획에 대해 물어보았다. 이 계획은 너무나도 비상식적이어서 의심의 눈초리를 거둘 수 없었다. 완전히 그들
[하하하, 이게 무슨 이상한 조합이야? 어쩐지 묘하게 어울리기도 하고 또 웃기기도 하네!] [처음부터 차 안에서 자리싸움만 아니었어도 이렇게 어색하지는 않았겠지.] [우리 지원 언니 한마디로 모든 흐름이 뒤집혔어!] [강미영은 도대체 무슨 속셈이지? 우리 지석이를 일부러 피하는 거야?] [다시 한번 말하지만 소지석 팬들 너무 이기적이지 마! 누구든 미영 언니에게 다가갈 수 있고 미영 언니는 모두를 거절할 권리가 있어!] 좌석이 정리되고 비행기가 이륙을 준비하자 라이브 방송은 일시적으로 종료되었다. 이런 24시간 라이브 촬영 프로그램에서도 이렇게 잠깐 동안만은 각자가 자신만의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강미영은 라이브 방송이 종료된 뒤 의아한 표정으로 한지원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여전히 왜 한지원이 굳이 자신과 함께 앉으려고 했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물론 지금 상황에서 누가 자신에게 같이 앉자고 했어도 마다하지는 않았겠지만... “미영 언니, 난 저 커플 팬이야. 무슨 일 있으면 나한테 얘기해. 그러니까 제발 내 최애 커플 깨지지 않게 도와줘!” 한지원은 진지한 얼굴로 이유를 털어놓았다. 강미영은 살짝 멍해지더니 결국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알겠어, 앞으로 네 최애 커플 잘 지켜주도록 할게.” 한지원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밝게 웃었다. “정말 고마워! 덕분에 내 최애 커플이 마음 편히 연애할 수 있게 됐어!” 강미영은 눈가를 약간 찡그리며 물었다. “근데 언제부터 걔네 둘의 팬이 된 거야? 그리고 지금 걔네 둘 관계 꽤 안정적이던데 내가 굳이 뭐 하러 그걸 망치겠어?” 한지원은 고개를 저으며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미영 언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야. 중요한 건 이런 카메라 밖에서의 달달한 순간들이지.” 강미영은 순간 뭔가를 깨달은 듯 눈썹을 살짝 치켜세웠다. “혹시 영감이라도 떠오른 거야?” 한지원은 멍하니 있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언니의 작은 호의 하나가 한 명의 유명 만화가를 탄생시킬 수도 있어!” 강
그는 단지 이런 행동을 통해 자신의 마음을 표현하고 싶었다. 강미영에게 그를 좀 더 이해할 기회를 주고 소지석에게는 그가 혼자서만 밀어붙이지 않도록 눈에 띄게 하려 했다. 그러나 이 행동을 알아본 사람들도 있지만 일부 팬들은 그를 오해하거나 비판하기도 했다. [솔직히 말해서 서진태는 너무 경계가 없지 않나요? 경쟁하고 싶다 해도 이렇게까지 급하게 해야 하나요? 왜 꼭 같이 앉아야만 하는 거죠?] [맞아요! 강미영 언니는 분명히 불편해 보였고 바로 피해서 조수석에 앉았잖아요!] [좋아한다고 해도 좀 경계를 두고 해야죠.] [근데 소지석 팬들 너무 이중잣대 아니에요? 오빠가 같이 앉고 싶으면 직설적으로 다가가도 ‘멋지다, 드디어 마음을 표현했다!’고 하는데 서진태가 다가가면 ‘경계가 없다’고 비판하잖아요?] [맞아요. 서진태는 사실 강미영 언니와 앉고 싶은 것보다는 자신의 마음을 표현하고 싶었던 거죠.] 댓글창은 점점 떠들썩해졌다. 신주리와 육경서의 강미영에 대한 이해도는 완벽했다. 감정상에서 경쟁이 시작되면 그녀는 주저 없이 피할 것이다. 강미영은 감정을 물건처럼 경쟁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이런 성격의 프로그램에서는 남성들끼리의 경쟁이나 여성들끼리의 경쟁이 감정을 더 순수하지 않게 만들 수 있고 로미오와 줄리엣이 될 거라고 생각했다. 결국 그런 외적인 압박이 감정을 더 강화시키는 효과가 생기게 된다. 사실 그들이 정말 사랑하는 건 아닐 수도 있다. 단지 지는 걸 참지 못해서 그런 것일지도 모른다. 그녀와 고정남의 관계도 그랬다. 주위에서 반대할수록 더 진지하게 여겨졌던 그 감정이었지만 결국 그것은 진정한 사랑이 아니라 엉망이 된 감정이었음을 깨달았다. “네가 졌으니까 내 선물 잊지 말고 사 와.” 신주리는 자신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육경서는 그 결과를 보며 입술을 삐죽 내밀고는 돌아서서 그녀에게 엄지를 치켜들었다. “이번엔 네가 이겼어.” 신주리는 눈을 깜빡이며 말했다. “이번? 그럼 다음에도 나랑 내기할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