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천천히 다가가서 그녀의 하얗고 긴 다리를 바라보다가 전등을 꺼버렸다.침실에 어둠이 찾아왔다.옆자리 매트리스가 살짝 흔들리자 강유리는 저도 모르게 육시준 쪽으로 돌아누웠다.두 사람의 피부가 얇은 천만 사이에 두고 밀착되자 서로의 온기가 그대로 느껴졌다. 어젯밤 어떻게 같은 침대에서 잠을 잤는지 강유리는 기억나는 게 하나도 없지만 그렇다고 쑥스럽지는 않았다.하지만 오늘 밤은 서로가 다 정신이 멀쩡한 상태였다.23년 인생에서 처음으로 이성과 같은 침대에서 멀쩡한 정신으로 같이 누워 있는 상황. 게다가 아까 그런 도발적인 말까지 했으니….강유리는 저도 모르게 심장이 쿵쾅거렸다.두근.두근.고요한 밤이라 소리가 더 선명하게 들렸다.하지만 그렇게 바짝 긴장한 상태로 한참을 기다려도 옆자리에 누운 남자는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쳇, 남자는 다 사기꾼이라더니! 오늘 했던 말은 다 거짓말이었어?’그녀는 자기만 기대했다는 생각에 조금 화가 났다.쑥스러움과 긴장감에서 분노와 실망으로 바뀐 강유리는 피곤함이 몰려왔다. 그제야 옆에 있던 남자가 천천히 그녀에게 다가왔다.육시준이 그녀를 향해 돌아눕자 탄탄한 가슴에 얼굴이 닿았다.그는 손을 내밀어 그녀의 허리를 껴안았다. 그제야 강유리는 짜증스럽게 고개를 들며 물었다.“왜?”졸다가 이제야 옆에 여자가 있다는 걸 알아챈 건가?남자의 차가운 입술이 그녀의 입술에 닿았다. 처음에는 가벼운 뽀뽀로 시작했다가 갑자기 돌변하더니 거친 키스가 이어졌다.강유리는 순식간에 잠기가 싹 사라졌다.여자의 작은 손은 저도 모르게 남자의 가슴으로 가 있었다.뜨거운 온도가 손끝에서 느껴졌다.“너….”“우리 어젯밤 아무 일도 없었어. 하지만 오늘은 좀 다르지.”육시준은 양팔로 그녀의 옆자리를 짚고 조용히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그의 검은 눈동자에 뜨거운 불이 치솟고 있었다.축 가라앉은 중저음 톤의 목소리에서 뜨거운 욕망이 느껴졌다.강유리는 정신을 못 차리고 있다가 한참이 지나서야 그가 무슨 말을 했는지 알아들었다.
“저긴 LK그룹 소유잖아. 다 아는 사실인데 정말 몰랐어?”육시준은 뭔가 알아내려는 듯한 날카로운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그는 그녀가 지금도 자신의 신분을 모른다는 걸 믿지 않았다.3년 전에 그가 귀국했을 때, 그녀 역시 비슷한 시간에 귀국했기에 소문을 못 들었다는 건 이해할 수 있었다.하지만 육경서가 유강으로 갔고 어젯밤 일도 있는데 정말 아무것도 못 느꼈을까? 아니면 알면서 모르는 척하는 걸까?강유리는 눈을 깜빡이며 그에게 물었다.“그 남자만 좋아한다는 갑부?”육시준은 당황한 표정을 금할 수 없었다.“아쉽네!”그 갑부의 손에서 건물을 빼앗아 온다는 건 불가능한 얘기였다.강유리는 망원경을 내려놓고 힘겹게 몸을 일으키고는 침실로 갔다. 마치 오랜 기대가 무너진 것처럼 쓸쓸하고 처량한 뒷모습이었다.육시준만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그 자리에 그대로 얼어 있었다.왜 그에 대한 그녀의 평가는 남자를 좋아하거나 그 방면에 문제가 있다는 게 전부인 걸까?강유리는 다시 침실로 돌아가서 잠을 청했다. 그렇게 단잠을 자던 그녀는 전화 벨소리에 잠에서 깼다.수화기 너머로 성홍주의 분노한 목소리가 들려왔다.“내가 너 대신 기소 포기 각서 썼어. 천강이도 일을 크게 만들고 싶지는 않다고 했으니까 경찰서에 있었던 일도 더 얘기하고 싶지 않아.”“자경원 아파트는 네 엄마 거니까 양도하기 싫은 거 이해해. 하지만 신영이랑 천강이 곧 결혼하는데 신혼집을 군림 별장에 구매하기로 했거든? 돈이 좀 부족하니 결혼선물이라고 생각하고 120억 입금해.”“네 남편 육가 놈이라며? 그러면 돈도 많을 텐데 그 정도 돈은 줄 수 있겠지?”사실 마지막 말이 성홍주의 목적이었다.경찰서에서 있었던 일을 전해들은 그는 크게 분노하며 인맥을 총동원했지만 경찰서에서는 사람을 풀어주지 않았다. 결국 그는 보호자 신분으로 출석해서 강유리 대신 합의하고 겨우 임천강을 경찰서에서 데리고 나왔다.그런데 임천강이 한 말이 충격이었다.한국 재계 순위 1위, LK그룹 대표가 강유리의 남편이라
그는 다급히 다가가서 그녀를 위로했다.“신영아, 미안해. 어젯밤 그 말은 진심이 아니었어! 오해하지 마.”성신영은 입술을 질끈 깨물고 말없이 눈물만 흘렸다.“그때는 어떻게든 육경서와 계약해야겠다는 마음뿐이었어. 그게 아니었으면 그런 성격파탄자를 내가 왜 만나!”그는 그녀의 눈물을 부드럽게 닦아주었다.성신영은 얼굴을 그의 품에 파묻고 서럽게 울었다.사실 어젯밤 이성을 되찾은 뒤에는 그가 왜 그랬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임천강은 사실 강유리가 곧 유강 엔터를 되살릴 수도 있다고 암시하고 있었다.하지만 질투에 이성을 잃은 그녀는 정상적인 사고를 할 수 없었고 그 말이 그냥 듣기 싫었다.강유리는 화려한 이목구비를 소유하고 있었다. 한번 보면 절대 잊을 수 없는 그런 미모였다. 그리고 능력도 좋아서 유강 엔터를 맡게 되면서 세간의 주목을 끌었다.사람들은 모두가 그녀를 칭찬했다.성신영은 질투가 나서 미칠 것 같았다.신분부터 자신과는 비교도 안 되는 그녀를 질투했고 아름다운 외모를 가진 그녀를 질투했으며 남자를 자유자재로 다룰 수 있는 그녀의 매력을 질투했다.“사실 처음부터 언니가 나보다 낫다고 생각한 거 아니야?”그녀가 훌쩍이며 물었다.“그럴 리 가! 넌 강유리보다 착하고 온순하잖아. 난 네가 대단한 사람이기를 바라지 않아. 내가 어차피 너 지켜줄 테니까.”임천강은 그녀가 울기만 하자 가슴이 아파서 부드러운 목소리로 계속 위로했다.“여자가 아무리 대단해도 어차피 우리 결혼식을 준비해 줘야 할 입장이잖아. 장인어른이 그러셨어. 그 여자한테 결혼 선물로 큰 거 하나 받겠다고. 우린 성대한 결혼식을 치르게 될 거고 모두가 우릴 부러워할 거야.”성신영이 원했던 말이었다.그녀는 이내 부정적인 감정에서 벗어나 심정을 추스르고 이렇게 물었다.“하지만 언니한테 그렇게 큰 돈이 있을까?”임천강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사실 그녀가 돈이 없다고 하면 차라리 편할 것 같았다.그렇다는 건 어젯밤 변호사가 사람을 잘못 봤다는 걸 증명할 수 있었다.그가
120억을 결혼선물로 내놓으라니.정말 강도가 따로 없었다.그리고 새신랑과 같이 밥 먹으러 오라니….강유리는 호박죽을 숟가락으로 저으며 생각에 잠겼다.그녀를 아무리 쥐어짜도 돈이 나오지 않으니 주의를 그녀의 남편에게 돌린 것 같았다.떠오르는 스타 성신영과 대영그룹 막내아들이 약혼한 다는 소식은 조용히 인터넷에서 퍼지고 있었다.연예계도 떠들썩했다.성신영은 예쁜 외모에 훌륭한 배경을 가진 것으로 유명한데 약혼자가 재력가 집안이라니 더욱 주목을 끌었다.그것에 비하면 강유리가 거의 무너져 가는 엔터테인먼트를 인수한 소식은 그리 화려하지는 않았다.토요일 저녁.성홍주는 본가에 친척과 지인들을 초대했다.강유리는 집에서 여유롭게 화장을 하고 있었다.성홍주의 비서가 사전에 연락해서 약속 시간을 꼭 지켜야 한다고 주의를 주었다.강유리는 핸드폰을 옆에 내려놓고 눈을 가늘게 뜨고 아이라인을 그리는데 집중하고 있었다. 어차피 갈 생각이면 지각은 하지 말자는 게 그녀의 생각이었다. 그리고 물론 결혼 선물도 준비했다.화장을 마치고 나오자 소파에 익숙한 그림자가 보였다.“왜 벌써 왔어?”최근 같이 생활하면서 그녀는 육시준의 출퇴근 시간을 대략 파악하게 되었다.그는 아침 아홉 시에 나가서 저녁 여섯 시에 집에 돌아온다.늦게 돌아올 때는 있지만 일찍 들어올 때는 없었다.그런데 오늘은 퇴근 시간 전에 집에 돌아왔다.육시준은 고개를 들고 그녀를 빤히 바라보았다.몸매를 강조한 검은색 이브닝 드레스에 허리까지 오는 긴 생머리, 작고 청초한 얼굴. 동작 하나하나가 우아하고 매혹적이었다.“같이 본가에 가야지.”남자가 담담한 목소리로 자리에서 일어서며 말했다.강유리는 그제야 그가 정장을 입고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늠름하고 준수한 모습이었다.“같이 가려고?”강유리가 조심스럽게 물었다.“당연한 거 아니야? 원래 나랑 같이 가려던 거 아니었어?”“그럴 것까지는 없는데?”그녀는 어차피 약혼식 깽판 부리러 가는데 짐짝은 필요 없었다.하지만 아무런 거리낌도 없는
참 미련한 여자였다.다른 여자들은 어떻게든 그와 엮이려고 안간힘을 쓰는데 그녀는 자꾸만 그를 밀어냈다.오늘은 그의 부모님이 귀국하는 날이었다. 두 분은 귀국하면서 오늘 본가에 밥 먹으러 오라고 지시했다.강유리는 약혼식에 참석한다고 나갔으니 그도 어쩔 수 없이 혼자 본가로 향했다.검은색 벤틀리가 정통식 저택의 정원에 들어섰다.집안으로 들어선 육시준은 육경서가 과장된 표정으로 형수가 돈도 많고 젊은 사업가이며 예쁜데 속물도 아니라며 자랑하는 소리를 들었다.육경서는 그를 보자 놀라서 화들짝 놀라며 그에게 물었다.“형은 왜 왔어?”육시준은 먼저 부모님께 인사를 드린 뒤 담담한 표정으로 대꾸했다.“밥 먹으러 왔지.”육경서는 어색한 표정으로 입만 뻐금거렸다.육시준의 어머니가 가장 먼저 입을 열었다.“네가 밥을 왜 먹어? 네 마누라 오늘 그 불쾌한 파티에 갔다는데 넌 밥이 넘어가니? 잠깐만, 경서 너 이 자식 우리한테 거짓말한 거 아니지?”부모님이 돌아오자마자 육경서는 대박 사건이라며 육시준의 결혼 소식을 부모님께 전했다.부모님은 신부에게 감사하다고 말했다.그들은 능력, 배경 이런 거 다 떠나서 정상적인 여자면 된다고 했다.하지만 그날 그 사건이 있은 뒤로 육시준은 여자와의 모든 접촉을 차단했다.곧 서른이 되어 가는 아들이 연애도 못해서 어쩌나 걱정하고 있는 상황에 희소식이 들려온 것이다.육경서는 두 손 들고 장담했다.“제 말 사실이에요! 처음 만나고 이튿날 바로 혼인신고 했고 바로 독립해서 나갔어요!”그의 말이 끝나기 바쁘게 옆에서 날카로운 시선이 느껴졌다.육시준이 음산한 눈빛으로 쳐다보자 육경서는 다급히 말을 돌렸다.“걱정하지 마. 누군지 얘기는 안 했어. 공개하고 싶을 때 공개해! 아니다, 그냥 형수님이 공개하고 싶을 때 공개해!”부모님은 두 형제의 대화를 들으며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하지만 한편으로는 황당하기도 했다.“우릴 능가하는 대단한 집안이야? 왜 공개하기 싫대?”아버지는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아들에게 물었다. 사
한편, 성가네.성신영은 약혼식은 꼭 본가에서 하고 싶다고 고집을 부렸다. 자기가 이 집의 아가씨라는 신분을 강조하기 좋은 곳이었다. 파티에는 상류사회 인사들과 연예계에서 사이가 각별한 친구들만 초대했다.물론 이렇게 화려한 약혼식에 언론 매체가 빠질 수 없었다.강유리는 10분 늦게 도착했다.그녀가 현장에 도착했을 때는 메뉴가 이미 올라온 뒤였다.아무도 그녀에게 관심을 주지 않았기에 그녀는 알아서 구석진 곳을 찾아 음식을 먹었다.“언니는 왜 혼자 있어? 형부는?”이때 애교스러운 목소리가 그녀의 조용한 식사를 방해하고 들어왔다.고개를 돌리자 임천강의 팔짱을 끼고 이쪽으로 다가오는 성신영이 보였다. 하얀색 A라인 드레스에 우아함을 강조하려고 목선을 드러냈지만 얼굴은 약간 부어 있었다.지난번 클럽에서 그녀는 약혼식장에 멍든 얼굴로 나오게 하려고 일부러 더 세게 때렸다.그래도 메이크업아티스트가 워낙 실력이 좋은지 멍은 완벽히 가려졌고 전체적으로 핑크톤을 많이 써서 사랑스러움을 강조했다.성신영은 강유리가 자신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자 갑자기 얼굴에서 통증이 느껴졌다. 솔직히 강유리의 화려한 아름다움에 비해 자신은 미운 오리새끼가 된 것 같아서 기분이 더 좋지 않았다.짓밟힌 자존감은 참을 수 없는 질투와 분노로 바뀌었다. 그녀는 굳은 표정으로 강유리에게 물었다.“언니, 왜 그렇게 빤히 쳐다봐? 못 알아보겠어?”강유리는 시선을 거두고 담담한 목소리로 대꾸했다.“며칠 안 본 사이에 더 못생겨졌네.”성신영의 얼굴이 흉하게 일그러졌다.그녀는 애써 분노를 수습하고 서러운 눈빛으로 임천강을 바라보았다.그런데 임천강은 강유리에게서 취한 듯 시선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그녀는 저도 모르게 팔짱을 낀 손에 힘을 주며 언성을 높였다.“오빠!”임천강은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그녀의 손을 다독이며 강유리에게 물었다.“유리야, 장인어른은 네 남편도 같이 데려오라고 하셨다던데 왜 혼자 왔어?”그는 인상을 쓰며 그녀를 빤히 바라보았다.강유리는 눈을 가늘게 뜨며 되
성신영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그녀는 잔뜩 긴장한 눈빛으로 임천강을 바라보았다.임천강은 의기양양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역시, 이 여자는 아직 날 잊지 못 했어.’그는 성신영에게 안심하라는 눈빛을 보내고는 거만한 태도로 말했다.“내가 좋아하는 사람은 신영이 뿐이야. 난 너한테 기회를 줬어. 네가 그걸 거절한 거고.”그가 말한 기회는 바람 피운 것을 들킨 날에 그가 너랑 결혼은 할 수 있다고 말한 것이었다.강유리는 그와 입씨름을 하기도 귀찮아서 자리에서 일어섰다. 성신영이 그녀의 팔목을 잡으며 말했다.“언니, 우리 얘기 좀 해.”말을 마친 그녀는 임천강에게 애교스러운 목소리로 좋게 대화로 풀겠다고 말했다.임천강도 더 이상 대화를 이어갈 분위기가 아니었기에 인상을 쓰며 자리를 떠났다.어차피 강유리가 자신을 잊지 못했다는 걸 확인한 걸로도 충분했다.임천강이 떠나자 성신영은 부드러운 미소를 싹 지우고 경멸에 찬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언니, 들었지? 천강 오빠는 나만 사랑해!”“그래. 평생 둘이 행복하게 살아.”강유리는 살짝 손을 빼며 말했다.성신영은 그녀의 차가운 태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말했다.“천강 오빠가 정말 언니를 걱정해서 그런 말을 한 것 같아? 오빠는 그냥 육경서랑 계약하고 싶은 거뿐이라니까? 그러니까 우리 천강 오빠한테서 멀리 떨어져! 평생 언니는 나한테 상대가 안 되니까!”성신영은 아무리 연기라도 임천강이 강유리에게 잘해주는 게 기분 나빴다.임청강은 그녀의 남자였고 가문의 재산도 모두 그녀의 것이어야만 한다.육경서? 안중에도 두지 않았다.“언니가 아무리 능력이 뛰어나도 천강 오빠는 나를 선택했잖아? 그리고 언니는 나한테 결혼 선물을 해줘야 하는 입장이고!”의미심장한 말을 마친 성신영은 미련없이 뒤돌아섰다.강유리는 인상을 쓰며 그녀의 뒷모습을 쏘아보았다.약혼식이 정식으로 시작되었다.성홍주는 무대 위에서 감개무량한 얼굴로 축사를 말한 뒤, 가족을 사랑하는 장녀가 동생을 위해 큰 선물을 준비했다면서 그녀를 무대로
분위기가 순간 이상해졌다.박수 소리도 뜸해졌다.성신영 모녀가 어디 출신인지 아는 사람은 별로 없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그냥 원래 이 집 안주인인 강민영이 세상을 떠나고 이들 모녀가 나타났다는 것만 기억했다.지금의 사모님은 성홍주의 첫사랑이었기에 사람들은 그녀가 도시에서 자랐다고 생각했다.아무도 그들의 출신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았다.그런데 강유리가 수많은 사람들을 상대로 고의인 건지는 모르지만….성홍주의 안색이 파랗게 질렸다. 강유리가 이렇게까지 가문의 체면은 안중에도 없이 사람들 앞에서 망신줄 줄 몰랐다. 하지만 그가 무대에 초대한 거라 당장 내려가라고 할 수도 없었다.그는 차가운 목소리로 물었다.“이번 시즌 수익이 얼마나 되는데?”이렇게 된 이상 어떻게든 강유리 손에서 돈이라도 받아와야 했다.“제가 유강 엔터를 물려받기 전에는 아버지가 경영하셨죠? 시즌 실수익이 어느 정도인지는 아버지가 가장 잘 아시겠죠.”강유리는 눈썹을 살짝 치켜올리며 담담하게 대꾸했다.성홍주도 침착한 목소리로 응대했다.“유강 그룹에 소속된 기업이 얼마나 많은데 언제 잘 나가지도 않는 엔터 사업을 신경 쓰겠어?”강유리는 그가 드디어 엔터 사업이 불황이라는 것을 인정하자 의기양양한 미소를 지었다.성홍주는 순간 불길한 느낌이 들었다.“그래요? 그럼 제가 돌아가서 장부 잘 정리해서 공개할까요?”여자는 눈을 깜빡이며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성홍주의 동공이 순식간에 확장되었다.유강엔터는 사실 매년 적자였다. 다른 기업에서 돈을 끌어다 쓰기 때문에 겉보기에는 흑자로 보여도 사실 모든 게 가짜였다.가짜 장부가 세상에 공개되면 그는 엄중한 처벌을 받게 될 것이다.“강유리!”“그래야 신뢰를 줄 수 있죠. 안 그러면 제가 돈을 빼돌렸다고 생각하면 어떡해요?”그녀는 순진무구한 미소를 지으며 성홍주를 바라보았다.하지만 이건 공공연한 도전장이었다.성홍주는 주먹을 불끈 쥐었다. 다리에서 힘이 풀리고 식은땀이 났다.옆에 있던 왕소영은 다급히 그를 부축하며 비서에게 쫓아내라
“뭐가 문제야? 유리 신분은 이미 공개된 비밀이니까 내가 지시만 하면 서류는 아무 문제가 없어.”바론 공작이 대수롭지 않게 손을 저으며 말하자 육경서가 물었다.“그럼 저는요?”“육 서방 서류가 조금 까다롭긴 하지만 자네가 협조하기만 한다면...”“협조 못 해요.”육시준이 바로 대답하자 바론 공작은 멍하니 서 있었다.‘그러면서 나한테 왜 물었어? 이럴 거면 귀국할 거라고 얘기하면 되 것을 남을 것처럼 쓸데없는 말을 한바탕 물었어?’“하지만 전 유리 의견을 존중해요. 유리가 남고 싶다면 저도 함께 남을 것이고 비행기는 이미 준비됐으니 싫다고 하면 바로 출발할 수 있어요.”바론 공작은 말문이 막혀 한참 동안 머뭇거리다가 자신 없는 목소리로 언성을 높였다.“그래서 자네가 지금 내가 유리의 의견을 존중하지 않는다고 비난하는 거야?”육시준은 그걸 이제야 알겠냐는 표정을 지었지만 말은 그렇지 않았다.“그런 뜻은 없어요.”바론 공작은 육시준을 힘껏 노려보더니 귀찮은지 가버렸다.‘이 자식이 보면 볼수록 마음에 안 들어. 유리 앞에서 갖은 자상한 척을 다 하더니 나만 나쁜 사람으로 만들었어. 기다려 봐. 내가 유리를 설득해서 이곳에 남게 하면 널 데릴사위로 맞아들일 거야.’시간이 훌쩍 지나 제2부가 시작되었다.이 동안에 육경서는 그날에 있었던 불쾌한 일을 잊어버린 듯이 여전히 신주리의 주위를 맴돌며 갖은 비위를 맞춰갔다.육경서는 녹화 날 댓바람부터 캐리어를 준비해 신주리의 아파트에 도착했고 카메라 감독이 문 앞에 서 있는 것을 보고는 먼저 인사를 건넸다.“좋은 아침이에요.”한 무리 사람이 돌처럼 굳어버리더니 무슨 상황인지 몰라 어리둥절해 있었다.육경서는 그런 사람들을 뒤로한 채 앞장서서 문을 노크하자 그걸 본 카메라 감독은 신속하게 카메라 초점을 그에게로 맞추며 입을 열었다.“경서 씨 여긴 무슨 일이에요? 오늘 녹화하는 날인 걸 잊지 않았죠?”“알아요.”육경서가 대충 대답하자 카메라 감독이 물었다.“그럼 경서 씨 카메
문이 쾅 하고 닫히면서 하마터면 바론 공작의 코에 부딪힐뻔하자 그는 화가 나 펄쩍 뛰었다.‘역시 딸내미는 시집가면 남이야. 자기 남편밖에 몰라. 열받아.’강유리 심부름을 다녀왔던 도우미는 무슨 일인지 살짝 예상했지만 굳게 닫힌 문을 보고 다시 험상궂은 바론 공작을 보더니 비밀을 배속으로 삼켜버리면서 말했다.“부부 사이 일이겠죠. 공작 어르신은 잠깐 기다렸다가...”“대디 걸이라고 누가 그랬어? 저 아이가 부부 사이의 일을 나한테 말해줄 것 같아? 이럴 때면 아비를 문밖에 버려두고 말이야. 사기꾼 같은 계집애.”비록 말은 이렇게 했지만 바론 공작은 은근히 기대하는 눈치였다. 강유리는 너무 흥분돼 정신이 나갔는지 육시준을 방안으로 끌어들인 뒤 화장실에 숨어 뒤에 감춘 물건을 보여줬다. 빨간 두 줄이 눈앞에 나타나자 육시준은 멍하니 서 있었고 표정은 변함없지만 두 눈이 반짝반짝 빛났다.육시준은 가까스로 흥분을 억제하며 조심스럽게 물었다.“이게 뭐야? 그래서 결과가 뭐야?”“이게 뭔지 몰라? 두 줄이잖아. 나 임신했어. 이번에는 진짜야.”강유리가 활짝 웃으며 감격해 말했다. 육시준은 여전히 담담한 표정을 유지했지만 테스트 시제를 받아 쥔 손이 살짝 떨리는 것으로 봐서 담담한 척했을 뿐이다. 그는 선명하게 찍힌 빨간 두 줄을 물끄러미 보다가 다시 사용 설명서를 읽어보더니 한참 뒤에야 하늘이 무너져도 끄덕하지 않을 것만 같았던 표정이 무너지면서 웃음꽃이 만발했다.“그렇다면...”“당신 아빠가 되었어.”강유리는 이런 육시준의 모습을 한 번도 본 적이 없기에 참지 못하고 재차 설명해 줬다. 다음 순간 강유리의 발이 허공에 뜨더니 육시준이 그녀를 번쩍 안아 올렸고 천정이 눈앞에서 빙글빙글 돌아가면서 귓가에는 흥분으로 가득한 남자의 환호 소리가 들려왔다.“내가 아빠가 됐어. 드디어 아빠가 됐어. 내가 이럴 줄 알았어.”강유리는 머릿속이 죽통이 되는 것 같아 작은 손으로 그의 팔뚝을 마구 흔들며 말했다.“진정. 진정. 정숙.”이 순간에 무슨
강유리가 잠깐 멍하더니 살짝 고개를 쳐들며 물었다.“왜?”그러자 육시준은 강유리의 얼굴을 지그시 바라보며 말했다. “자기가 힘들어하는 것 같아서. 그리고 남은 일정은 별로 끌리지 않아.”강유리의 눈까풀이 파르르 떨리더니 다시 고개를 숙였다.솔직히 요 며칠은 주로 집에서 바론 공작과 함께 시간을 보냈고 남은 일정에 대해 강유리도 별로 흥미가 없었다.그리고 예측하는 것이 있기에 그 일정을 소화하기에 무리가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강유리는 육시준이 눈치챘는지를 모르기에 머리로 그의 가슴팍을 가볍게 비비더니 온화하게 물었다.“여보, 내가 요 며칠 라이브에 정신이 팔려서 당신한테 신경 못 썼어.”“맞아. 그래서 어떻게 보상할 거야?”육시준이 대수롭지 않게 묻자 강유리는 고개를 들고 의아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보통 때라면 착한 육시준이 그저 가볍게 미소를 지으며 이해한다고 했을 텐데 보상을 요구했다.“부부 사이에 보상을 얘기하면 서운하지.”강유리는 작은 손을 내저으며 생글생글 웃었다.육시준은 그런 강유리한테 속지 않고 강경하게 말했다. “저번에 내가 긴급회의를 했다고 나한테 보상을 요구하지 않았어? 그때는 왜 내가 서운해할 거란 생각을 안 했어?”‘이득 앞에서 못 본 체하는 건 바보가 아닌가?’하지만 강유리는 절대 육시준이 쉽게 이득을 보게 하지 않을 것이다.“좋아. 보상해 줄게. 내가 그렇게 억지 부리는 사람이 아니야. 방금 전의 제의 들어줄게.”그 말에 육시준은 미묘한 눈빛으로 강유리를 바라봤다.‘방금 제기한 요구라면 혹시 앞당겨서 귀국하는 것을 말하는 것일까?’육시준은 이내 입꼬리를 끌어올리며 웃었고 항상 다른 사람을 계략에 빠뜨리던 그지만 강유리 앞에서는 속수무책이었다. 앞당겨 귀국하자고 한 건 사실 진짜로 귀국하자는 것이 아니고 강유리가 요즘 회사 일과 다른 일에 너무 정신이 팔려 자기한테 소홀한 것 같아 귀띔해 주려 했던 것인데 그녀가 바보인 척하며 그의 제의에 찬성했다. 강유리는 육시준의 놀란 표정을 보고 신
육경서는 화를 참지 못하고 자기도 모르게 욕이라도 할까 봐 아예 전화를 끊어버렸다. 형수를 욕하기라도 하는 날이면 강유리의 뒤끝이 걱정되기도 했지만 더욱 두려운 건 육시준이었다. 화를 못 이겨 육경서는 핸드폰을 소파에 집어 던지고 미친 듯이 머리카락을 헤집더니 바닥에 있는 쿠션과 인형을 발로 차버리고는 다시 풀썩 주저앉았다. 그러고는 발길에 채워 저 먼 곳에 불쌍하게 누워있는 인형을 한참이나 뚫어지게 바라보더니 이내 주워서는 원래 자리에 예쁘게 놓아줬다. 이건 주리가 선물한 것이기에 절대 이 아이한테 화풀이를 해서는 안 된다. 육경서는 조금 진정이 되었는지 형수가 한 말이 맞는 것 같기도 했다. 그가 먼저 헤어지자고 했기에 강유리가 주리를 설득해 화해하지 못하게 한 것이고 두 사람이 절친이기에 그녀를 위하는 것이 당연한 것이다.이렇게 좋은 절친이 있으니 주리는 절대 피해를 보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육경서가 남도 아니고, 아아아아악!강유리가 빨리 도망치라고 했기에 주리가 육경서를 냉랭하게 대한 것이고 전혀 기회를 줄 뜻이 없었으며 오해를 풀고 나서도 화해하려 하지 않는 것이다.그렇다고 이대로 포기하고 이 사실을 받아들인단 말인가?육경서는 털썩 주저앉아 오랫동안 생각하더니 갑자기 벌떡 일어섰다.‘절대 이대로 포기할 수 없어! 철없고 진지하지 못한 게 생리적 결함도 아닌데 고치면 되잖아.’육경서는 반드시 주리에게 성숙한 모습을 보여주고 그녀가 다시 자기를 신임할 수 있게끔 하리라고 결심했다.다른 한편 강유리는 전화를 끊고 나서 가볍게 미소를 짓더니 발가락으로 생각해도 육경서가 절대 이대로 포기하지 않을 것이란 걸 잘 알고 있었기에 그의 모든 심리 변화와 최종 결정을 훤히 꿰뚫고 있었다.강유리가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며 무의식 간에 고개를 돌리는 순간 깜짝 놀라 흠칫했다. 언제 들어왔는지 육시준이 팔짱을 끼고 베란다 옆 수납장에 기대어 웃을 듯 말 듯한 표정으로 그녀를 유심히 바라보고 있었다.“언제 왔어? 부르지 그랬어. 깜짝 놀랐잖아.”
강유리는 육경서의 목적을 잘 알고 있었고 아마 여론 뒤에 또 모순이 생긴 모양이다. 솔직히 강유리는 두 사람을 진심으로 응원하고 있긴 하지만 육경서가 아직 철들지 못했고 반평생을 도련님으로 살아왔기에 자기가 원하는 것은 당연히 자기 앞에 놓여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다 조금만 모순이 생기거나 좌절을 겪으면 의심하고 심지어 포기해 버리기에 이대로 지속된다면 두 사람 모두 힘들어질 것이고 많은 시련을 겪어야 할 것이다.강유리는 뭔가 골똘히 생각하더니 먼저 입을 열었다.“도련님한테 비밀을 알려드릴게요.”육경서는 전혀 감흥이 없는 목소리로 물었다.“무슨 비밀이요?”육경서는 주리와 연관된 것이 아니라면 모든 것에 흥미가 없었지만 형수 말을 거절할 수도 없었다.“주리가 처음 육씨 가문에 왔을 때 어머님이 사실 두 사람을 좋게 보지 않았어요.”강유리가 진지하게 말하자 육경서는 몇 초 동안 침묵하더니 이내 터져버렸다.“이게 다 형수님 탓이잖아요. 엄마. 아빠 앞에서 제가 남자를 좋아한다고 이상한 소리를 해서 남의 집 귀한 딸을 제가 해칠까 봐 그러신 거잖아요.”그러자 강유리는 담담하게 말했다.“이게 왜 이상한 소리예요? 도련님이 저한테 직접 말했잖아요.”“형수님, 미안해요. 지나간 일은 지나가게 해줘요.”“도련님이 얘기를 먼저 꺼냈어요.”강유리가 느릿느릿 말하더니 이내 덧붙여 말했다.“제가 이 말을 하려는 건 어머님 태도 때문에 주리가 그날 기분이 상당히 잡쳐있었어요.”육경서는 이해가 안 가는지 되물었다.“왜요?”강유리는 어이가 없어 입을 삐죽거리며 말했다.“도련님 생각에는요?”“주리가 승벽심이 강하고 어디를 가든 항상 주목받던 사람인데 어르신들의 사랑을 못 받으니 서운해서 그러지 않았을까요?”육경서 말에 강유리는 조용히 눈을 흘겼다.‘여태까지 솔로인 데는 다 이유가 있어. 미련 곰탱이 같으니라고.’오랜 침묵 끝에 육경서가 눈치를 챈 것인지 아니면 자신감이 붙은 건지 담대하게 예측했다.“혹시 저를 위해 좋은 인상을 남기려고
바론 공작이 하도 재촉하는 바람에 의료진은 불같이 달려왔고 한바탕 검사를 마친 뒤 아무 문제도 없다는 아주 난처한 결론을 내렸다.“당신들 뭐 하는 사람이야? 아무 문제도 없는데 왜 갑자기 헛구역질이 나?”“아빠가 너무 흥분하셨어요. 단순하게 위장이 불편했을 뿐이에요. 음식 습관이 안 맞을 수도 있잖아요.”강유리는 어이가 없다는 듯 바론 공작을 위안했고 지금은 또 괜찮아진 것 같기도 했다.의사는 고개를 끄덕이며 강유리의 말에 찬성했다.“맞아요. 그럴 수도...”바론 공작은 그때 비수처럼 날카로운 눈초리로 그를 쏘아보며 뒷말을 제지했다.‘네 자식이 감히 음식 습관이 안 맞다고 말을 하기만 해 봐. 내 딸이 어떻게 자기 집에서 음식 습관이 안 맞을 수 있어?’얼토당토않은 이유이고 이건 강제로 귀국시키려는 것과 마찬가지이다.의사는 그제야 바론 공작의 말뜻을 이해하고 이내 덧붙여 말했다.“아가씨가 이곳에 오신 지 한참 되셨는데 음식 습관 때문에 위장이 불편할 건 같지 않고요. 제가 보기에는 내일 병원에 가셔서 전면 검사를 받아보시는 게 좋겠어요.”자택에서 검사받는 것은 어디까지나 환경 제한이 있었다. 의사가 다행히 마지막 말을 하지 않은 덕분에 바론 공작이 비록 불만이 잔뜩 했지만 이내 손을 저으며 가보라고 했다. 강유리는 헛구역질 한번 한 것으로 아빠가 난리법석하는 모습이 우스웠지만 그래도 마음속은 따뜻했다. 사실 강유리는 생리가 일주일이나 미뤄졌기에 무슨 일인지 대충 짐작이 갔지만 전에 한번 해프닝을 겪었던 기억이 있기에 확정된 다음에 말하려고 아무 내색을 내지 않았다.저녁을 먹고 나서 강유리는 도우미를 불러 심부름을 다녀오라고 하자 그녀는 흠칫하더니 이내 두 눈을 반짝이며 믿기 어렵다는 표정을 지었다.그러자 강유리는 식지로 입을 막으며 작은 소리로 말했다.“비밀이야. 바론 공작과 육시준이 알게 하면 안 돼.”도우미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빠른 걸음으로 밖을 향해 걸어 나갔다. 어둠이 내리자 강유리는 베란다 소파에 앉아 절반 넘게 진행
어떤 커플이 툭하면 사귀고 툭하면 헤어지고 그런단 말인가? 만일 이번에 톡톡히 혼내주지 않으면 다음에도 이런 일이 생길 수 있으니 반드시 이번 기회에 나쁜 버릇을 고치고 진심을 보여주게 해야 한다.그리고 아직 예능 프로그램이 남았으니 함께 출연해 주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육경서에게 기회를 준 것으로 생각했다.솔직히 절친이 있으면 이런 점이 너무 좋았다. 무슨 일이든 무조건 자기편을 들어주고 자기 뜻대로 따라주며 쓸데없는 생각으로 스스로 괴롭히는 것을 자제하게 해준다.전에 신주리도 마찬가지로 릴리와 신하균이 사귄다고 했을 때 가족애를 버리고 그녀의 손을 들어줬다.여기까지 생각한 신주리는 갑자기 뭐가 생각났는지 물었다.“그날 밤 네가 그랬잖아. 신하균과 사귀는 것이 단지 그의 목소리와 얼굴에 반한 것이 아니라 그의 직업 도덕에 반했고 고독한 영혼을 달래주기 위해서라고.”이건 릴리가 신하균과 연애한 뒤 신주리에게 속내를 털어놓으면서 한 말이다.이 말을 듣고 나서부터 신주리는 두 사람의 연애를 더는 반대하지 않았다.릴리는 말문이 턱 하니 막히더니 부자연스러운 눈빛으로 물었다.“내가 그런 말을 했어?”그러자 신주리는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분명히 했어.”릴리는 생각하는 척하더니 반박하지 않고 말했다.“맞는 말이잖아. 내가 그때 마음이 약해지는 바람에 지금 운수가 안 좋아.”신주리는 릴리 말에 일리가 있는 것 같았다.융통성이 전혀 없고 일밖에 모르는 신하균은 예쁜 말로 여자를 달랠 줄도 모르고 낭만도 모르며 외모 빼면 자랑할 것이라곤 전혀 없으니 운이 없는 것과 마찬가지이다.다른 한편, 강유리는 단체방에서 수다를 떨다 결과를 마저 듣지도 못하고 릴리가 오프해버리는 바람에 심심한 나머지 인터넷에 접속해 실시간 검색어에 관한 기사를 찾아보며 무료함을 달랬다. 그러는 동시에 머리 한쪽 구석으로 이젠 귀국할 시간이 되었다는 생각을 줄곧 하고 있었다.도우미들이 주방에서 저녁 준비를 하고 있었고 요리하는 냄새가 어렴풋이 전해오자 강유리는
그 기분이 신씨 가문에 도착할 때까지 잘 유지되었고 비록 두근거리고 긴장됐지만 그래도 더없이 기뻤다. 하지만 신주리의 이 한마디 말이 마치 얼음물을 뒤집어쓴 것처럼 온몸이 얼어들었다.‘연기라고 했어...’육경서는 원망스러운 눈빛으로 그녀의 몸에 구멍이라도 뚫을 듯이 한참 동안 노려보자 불편함을 느낀 신주리는 두 사람의 운명을 책임진 운전대를 직접 잡고 있다는 사실에 감사했다.빨간불 앞에 차가 멈추자 신주리는 두 손으로 팔을 쓸어내리며 고개를 돌리더니 투덜거렸다.“왜 쏘아보고 그래? 그러다 물기라도 할 것 같아.”육경서는 슬픔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주리야. 나는 우리 두 사람이 오해가 생긴 게 유미나 때문인 줄 알았어.”이 말은 진심이었고 그는 유미나만 해결하면 두 사람이 화해할 줄 알았지만 신주리의 태도로 봐서는 전혀 장난 같지 않았다. 그를 혼내려는 것도 아닌 것 같아 순간 어찌할 바를 몰랐다. 신주리는 빨간 입술을 살짝 깨물더니 낮은 소리로 말했다.“네 생각이 틀렸어. 우리 사이의 문제는 다른 사람과 아무 상관이 없어.”솔직히 신주리도 유미나를 미워하기는 했지만 절대 두 사람 사이의 걸림돌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고 한 번도 육경서와 그녀 사이를 의심해 본 적이 없었다. 두 사람의 문제는 어떻게 상대를 대하는지의 문제였다. ...여론이 지속적으로 확산되면서 오늘 밤 어떤 사람은 상심에 빠졌고 어떤 사람은 수심이 가득했다. 유미나와 매니저는 서로 원망하기에 바빴고 게다가 거액의 배상금까지 떠안게 되어 죽고 싶은 마음마저 들었다. 육경서와 신주리도 아직 화해하지 못했기에 똑같이 수심에 빠져있었다. 신주리는 절대 나 혼자 죽을 수 없다고 생각하고 물귀신 작전을 펼치러 월계만으로 달려가 눈에 띄는 커플만 있으면 헤집어놓을 심산이었다. 릴리 집에 도착해보니 뻔뻔한 친오빠는 그곳에 없었고 릴리 혼자만 절친 단체방에서 수다를 떠느라 여념이 없었다. 화젯거리는 당연히 신주리였다.“핸드폰이 그렇게도 좋아? 여기에 사람이 이렇게 떡하니 서
현재 신주리 실력과 지위는 모든 사람이 다 아는 사실이다 보니 걱정할 필요도 없었다...지하 주차장에 신씨 가문 차량이 오래전부터 대기하고 있었고 경호원이 기자들이 다가오지 못하게 서슬이 퍼레서 주위를 살피고 있었다. 신주리는 매니저와 작별 인사를 나눈 뒤 차를 향해 걸어가자 경호원이 깍듯이 차 문을 열어줬고 허리를 숙여 차에 오르니 불청객 한 명이 앉아 있었다.“넌 왜 여기에 있어?”신주리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조수석에 앉아있는 육경서에게 묻자 그는 고개를 돌려 활짝 웃으며 말했다.“기자한테 포위돼 못 빠져나가는 것을 어머님, 아버님이 구해주셨어.”신명진은 고개를 돌려 짜증 섞인 신주리의 얼굴을 바라보면서 말했다.“다 가족인데 모순이 있으면 집에 가서 문 닫아걸고 얘기해.”그러자 한영숙도 한마디 곁들었다.“그래. 이 자식이 평소에는 믿음이 별로 안 갔는데 오늘 결정적인 순간에 너를 위해 서슴없이 나서는 것을 보니 그나마 책임감은 있는 것 같아.”신씨 부모님은 신주리의 열혈 팬이기에 두 사람의 관계를 모를 수 없었다.하지만 두 사람은 단지 팬에 그쳤고 딸이 실제 상황을 말해주지 않았기에 두 사람이 아직까지 사귀고 있는 줄로 알고 있었다...신주리가 입을 열고 뭐라고 설명하려다가 갑자기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그대로 입을 다물었고 차는 서서히 신씨 가문 별장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전에도 육경서가 신씨 가문을 방문한 적이 있지만 사위 신분으로 방문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고 하필이면 또 이런 특별한 사건이 생긴 시점이라 덜컥 겁이 났다.바로 이때 신주리가 입을 열고 말했다.“두 분은 먼저 들어가서 쉬세요. 저희는 아직 할 일이 있어 나갔다 와야겠어요.”그러자 한영숙이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저녁 먹을 시간인데 뭐가 그렇게 바빠?”“회사 여부장님이 좀 만나자고 해서요.”신주리는 대충 아무 핑계를 대면서 두 사람을 차 밖으로 밀어냈다. 합리적인 이유라 부모님이 두 사람을 의심하지 않았지만 한영숙은 차에서 내리면서 낮은 소리로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