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일 강미영이 먼저 제의했더라면 일방적으로 무지하게 욕을 먹었을 것이다...꽉 차 있던 베란다가 이내 텅텅 비었고 신주리는 다들 떠난 방향을 멍하니 바라보더니 따라 가려 하자 육경서가 그녀의 손목을 잡으며 물었다.“어딜 가려고?”“인솔자가 해결해야 하는 거 아니야? 네가 장소를 선택했으면 네가 기획해야지.”신주리가 안간힘을 쓰며 손을 빼려고 하자 육경서는 꽉 움켜잡고 풀어주지 않았다.“누가 그랬어? 이모가 우리 둘이 함께 기획하라고 했어.”신주리가 억지로 손을 빼면서 말했다.“난 못 들었어. 나는 지석 오빠가 인솔자가 좋은 방법을 생각해 보라고 하는 말밖에 못 들었어. 그리고 너도 승낙했잖아? 그래 놓고 지금 나를 이용하려는 거야? 꿈 깨.”육경서가 갑자기 손에 힘을 주면서 신주리를 힘껏 당기며 말했다.“안 돼. 오늘 밤 나와 함께 기획해야 해. 다음에 내가 도와줄게.”오랫동안 식단 조절하며 다이어트를 해온 가녀린 몸이 육경서의 힘을 이기지 못해 그대로 끌려오면서 옆자리에 털썩 주저앉고 말았고 풀썩 주저앉으면서 아래턱이 육경서의 어깨에 부딪히자 온 세계가 조용해졌다. 다음 순간 신주리가 갑자기 폭발했다.“육경서, 미쳤어? 대체 왜 그래?”“...”육경서는 당황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면서 급히 설명했다.“왜 이렇게 가벼워? 전에 나한테 주먹질 할 때는 힘이 꽤 있었잖아.”말하면서 그녀의 아래턱을 잡고 조심스럽게 살펴보았다. “다친 데 없나 봐봐.”두 사람의 거리가 아주 가까워 호흡마저 섞여버렸고 다투고 나서 처음으로 이렇게 가까운 거리에서 서로를 바라봤다.신주리의 표정은 부자연스러웠고 눈까풀도 파르르 떨렸지만 그를 밀쳐내지 않고 상처가 났는지 대신 살펴보게 하면서 입으로는 표독스럽게 위협했다.“얼굴이 찢어지기라도 하는 날이면 오늘 죽을 줄 알아.”육경서는 화가 나 뾰로통한 신주리의 얼굴을 보더니 참지 못해 말했다.“내가 몸에 가시가 있는 것도 아니고 한번 부딪혔다고 얼굴이 찢어지겠어? 사기를 쳐도 유분수지.”남자의 잘생긴
오늘 밤 육경서 팬들이 침묵에 빠졌다.‘오빠가 이럴 줄 몰랐어. 어떻게 그 여자한테 이렇게 상냥할 수 있고 왜 신주리가 제멋대로 하게 내버려둬? 그리고 왜 그렇게 떨고 있어?’승인하고 싶지 않지만 이런 육경서의 매력에 팬들은 또 한 번 공략당하고 말았다. 초가을의 밤바람이 싸늘했다. 쿠션을 안고 의자에 앉은 신주리가 저도 모르게 부둥켜안자 지도에 시선을 꽂고 있던 육경서가 그녀를 힐끗 쳐다보고는 저도 모르게 자리에서 일어나 곁에 놓인 담요를 가져왔다. 그러고는 자기 행동이 너무 아부하는 것처럼 보일까 봐 걱정되는지 담요를 들고 우왕좌왕하더니 이내 신주리 머리에 던져버렸다. “감기들면 네 팬이 또 날 죽이려고 할 거야.”“내 팬이 어떻게 감히 육씨 가문 둘째 도련님을 욕하겠어?”말하면서 신주리는 머리에서 담요를 끄집어내려 몸에 걸쳤고 육경서는 불이라도 내뿜을 기세로 눈을 크게 부릅뜨고 말했다.“너 자꾸 빈정대며 말할 거야? 나도 그럼 아무 말이나 막 할 거야.”신주리는 이내 입을 다물면서 육경서가 유치하다고 생각했다. 그러자 댓글 창에서 도리어 조급해서 안달이었다.“신주리, 왜 겁을 먹어? 우리가 알면 안 되는 일이라도 있어?”“혹시 우리 경서 오빠한테 약점이라도 잡혔어?”“이 두 사람 분명히 무슨 문제가 있어.”“육경서 나쁜 자식이 감히 우리 주리를 협박해? 천벌 받을 자식.”“...”신주리는 담요로 윗몸을 감싸고는 눈동자를 데구루루 굴리더니 갑자기 무슨 생각이 났는지 말했다.“내가 저번에 너한테 보낸 그거 너 승낙했어?”“언제? 뭘?”육경서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물었다.“그거 있잖아. 핸드폰 줘 봐.”신주리가 손바닥을 내밀자 육경서는 여전히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핸드폰을 그녀의 손바닥 위에 올려놓았다. 그러자 신주리는 재빠르게 비밀번호를 입력해 잠금 해제하고는 한참 뒤적거리더니 갑자기 그를 향해 말했다.“이번에는 이 누나가 너 대신 해결해 줬어. 다음에 내가 인솔자 되면 너도 날 도와야 해.”그러자 육경서는 해맑게
“두 사람 다투지 말아요. 알콩달콩 사랑하는 모습을 보여줘요.”“커플 팬은 썩 꺼지지 못해? 귀찮아 죽겠어.”“...”댓글 창은 예외 없이 쟁논으로 가득했지만 의외인 것은 전처럼 상대방을 공격하지 않았다.다들 내막을 알고 싶어하는 눈치였고 공격하는 댓글이 있으면 바로 묻혀버렸으며 두 사람의 연애를 지지하는 커플 팬은 슬픔에 빠진 육경서를 위로하기에 바쁜 그의 팬한테 억울하게 한바탕 비난을 당했다. 이튿날 아침.나이 든 선배들은 다들 일찍 기상했지만 유독 신주리와 육경서만 밤늦게 잔 탓인지 아직 일어나지 않았다.“내가 주리한테 가볼 테니까 지석이는 경서한테 가 봐.”강미영은 두 사람이 한참 지나도 내려오지 않자 깨우러 가려고 했다. 여행경비가 제한이 있기에 비행기 시간을 놓치면 처리하기가 곤란하다. 소지석이 고개를 끄덕이며 계단으로 향하려고 할 때 육경서가 마침 빠른 걸음으로 위에서 내려왔고 방금 잠에서 깬 모습이 아니었다. 다들 계단 아래에 서 있는 것을 보고 육경서가 흠칫 놀라더니 이내 말했다.“주리가 감기 든 것 같아요. 감기약을 타 먹여야 할 것 같은데 2분만 기다려줘요. 죄송해요.”그 말에 강미영은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많이 안 좋아?”“깨긴 했는데 컨디션이 별로 안 좋아요.”육경서는 서툰 솜씨로 약을 물에 타면서 대답했다.“의사한테 보이지 않아도 될까?”강미영이 걱정스레 묻자 제작팀과 피디도 긴장하는 눈치였다. 게스트가 일반인이든 연예인이든 모두 쉽게 건드릴 수 있는 인물이 아니라서 조금이라도 차질이 생겨서는 안 된다. 피디가 고개를 돌려 조연출에게 의사를 부르라고 지시하자 조연출이 말했다.“서 선생님이 한의사시잖아요. 공항으로 가면서 주리 봐달라고 하면 안 돼요? 진단만 해주시면 제가 가서 약을 지어오면 촬영하는 데는 문제가 없지 않을까요?”‘지독한 자식.’하지만 조연출의 말에도 일리가 있다고 생각한 피디는 고개를 돌려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는 서진태를 바라봤다. 서진태는 신주리가 감기들었다고 하자 저도
신주리는 고개를 갸우뚱하고 그를 힐끗 쳐다보더니 헐렁한 겉옷으로 윗몸을 감싸며 “네.”하고 대답했다. 신주리의 반응에 서진태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녀는 이내 말했다.“괜찮아졌어요. 이동하면서 차에서 얘기하죠. 안 그러면 늦을지도 몰라요.”신주리는 자기 때문에 이미 시간을 지체했다는 것을 알기에 길게 말하지 않고 곧바로 문을 열고 차로 향했다. 나머지 게스트들도 줄지어 차에 오르기 시작했다. 그러자 댓글 창에서 불만의 소리가 터져 나왔다.“후배가 예의도 없어. 다들 걱정돼서 그러는데 저렇게 쌀쌀맞게 나가버려?”“비행기를 놓치게 생겼는데 그 자리에 서서 한 사람씩 돌아가면서 인사해야 해?”“몸도 안 좋은데 한 사람씩 차례로 고맙다고 인사해야 한다면 미쳐버릴 것 같아.”“네티즌들이 너무 가혹하다.”“내가 보기에는 서진태는 아빠의 잔소리 같고 주리는 반항하는 딸내미 같은데? 오른쪽 귀로 듣고 왼쪽 귀로 흘려보내면 되잖아.”“그래, 딱 그거야.”제작진은 여덟 명의 게스트를 위해 넉 대의 승합차를 준비해 두명이 한 팀이 되어 한 차에 타기로 했지만 신주리가 제일 먼저 첫 번째 차에 탑승하자 육경서는 자연스레 따라 올랐고 서진태가 뒤에서 머뭇거리다가 이내 따라 올랐다.공항으로 이동하면서 신주리의 병을 봐주기로 했으니 함께 탑승할 수밖에 없었다. 그 뒤를 이어 강미영도 신주리가 걱정돼 따라 오르자 그 뒤에 있던 소지석은 추호의 머뭇거림도 없이 첫 번째 차량에 올라타려 했다...“아니. 다른 차도 많은데 다들 이 차가 마음에 드시나 봐요?”한지원이 첫 번째 차에 올라탄 사람을 향해 말하자 제작진도 따라서 입을 열었다.“두 명이 한 팀이 되어 아무 차나 선택해서 타시면 됩니다. 넉 대의 차량이 준비되었기에 굳이 규칙을 설명하지 않아도 알 수 있는 사실인데 다들 첫 번째 차량에 오르면 어떡한단 말인가?소지석은 차 문을 잡고 불쾌한 듯 서 있었고 몇 초 동안 기다려도 차에서 내려오는 사람이 없자 발을 들어 올라가려 할 때 카메라맨이 그의 앞을
두 번째 차량에는 심수정이 타고 있었고 그녀는 다른 게스트에 비해 카메라가 앞에 있어도 전혀 개의치 않았다. 소지석을 보자 심수정은 바로 그를 까발렸다.“강미영 씨와 함께 앉고 싶어요?”소지석은 흠칫하더니 고개를 들어 그녀를 바라보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비록 소지석의 답을 못 들었지만 심수정은 전혀 개의치않고 되레 그에게 방법을 가르쳐줬다.“같이 타고 싶으면 억지로라도 타요. 여기까지 쫓아와서 왜 쑥스러워해요?”소지석은 얇은 입술을 깨물더니 말했다.“빈자리가 없어요. 제가 타면 촬영사가 못 타요.”그러자 심수정이 잠깐 생각하더니 말했다.“강미영 씨와 주리가 함께 할 확률이 높으니 다음에도 자리가 없으면 경서를 밀어내요.”그 말에 소지석은 진지하게 대답했다.“그게 좋은 방법이네요.”두 사람의 대화에 댓글 창은 난리가 났다. “전혀 우리를 사람 취급 안 하는 건가?”“하지만 난 수정 언니가 너무 좋아. 멋있어.”“그럼 미영 언니와 지석 오빠가 커플이 되는 거야? 내가 기대하던 커플이야. 지석 오빠가 방금 인정했잖아. 아, 어떡해.”“...”[나와 함께 힐링]에서 제일 처음 속내를 밝힌 사람이 소지석일 줄은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다. 배우 소지석은 한평생 예술혼을 불태우며 연애를 안 할 줄 알았는데 처음 출연한 연애 예능프로에서 자기 속마음을 밝혔다. 그것도 연애 허울을 쓴 여행 프로에서 말이다. 힐링하고 오라고 강유리가 추천해서 출연했다고 하지 않았던가?오늘의 실시간 검색은 이미 예정된 사실이었고 네티즌의 의견은 호불호가 갈렸다. 어떤 네티즌은 강미영이 정서가 온정 되고 멘탈이 강한 우수한 여성이라고 칭찬했지만 다른 한 부분의 팬은 상당히 불쾌하게 생각했다. 이혼하고 애 딸린 강미영이 자기 마음속의 아이돌과 전혀 어울리지 않았고 더욱이 그녀의 딸이 소지석과 동년배라는 점이 아주 불쾌했다. 그녀의 딸은 현재 모니터 앞에서 땡땡이를 치다가 이 광경을 목격했고 지금 그녀의 표정은 꼭 마치 지하철에서 핸드폰을 보는 할아버지와도
그러자 댓글 창은 온통 웃음소리로 도배되었다.“이 아저씨 상당히 매력이 있어. 난 독설 날리는 사람이 너무 좋아. 하하하하.”“웃겨 죽는 줄. 육경서가 위험해. 다급해졌어.”“그러니 왜 무차별 공격을 하냐고? 의사한테도 막말을 해대고.”“의사가 아니라 연적이야.”“서 모 씨가 이상한 거 아니야? 요즘 밤새우지 않는 젊은이가 어디 있어? 더욱이 우리 오빠는 연예인인데... 무슨 자격으로 함부로 우리 오빠를 지적해?”“맞아. 의사는 어질다고 하더니 서진태가 우리 오빠를 저주했어.”“누가 지적했어? 진실을 말했을 뿐이잖아. 육씨 가문 둘째 도련님 팬은 너무 사나워. 아무 말도 못 하게 해.”“...”이번에는 신주리 팬이 승리했다. 서 선생님 덕분에 육경서 팬을 보란 듯이 저격할 수 있었다. 육경서가 한참이나 멍하니 있더니 반격을 못 하고 직설적으로 말했다.“다 봤어요? 다 봤으면 뒤에 와서 앉아요. 제 여자 친구를 돌봐야겠어.”결정적인 순간에는 남자 친구의 신분이 우세가 있었다.“아직 안 됐어. 왜 재촉하고 그래?”서진태도 꽤 고집 있는 편이라 육경서에게 지려 하지 않았고 그러자 육경서는 눈을 부라리며 말했다.“유명한 한의사시라면서요? 왜 이렇게 오래 걸려요?”“그럼 네가 직접 하던가.”서진태의 말에 육경서는 입을 다물고 말았다. ‘너무 화가 난다. 이 늙은이가 일부러 이러는 것이 틀림없다.’옆자리에 담요를 덮고 머리를 의자에 기댄 채 쉬고 있던 신주리는 두 사람의 다투는 소리에 머리가 지끈거렸다. 신주리는 어제 자기와 육경서가 목적지 때문에 다툴 때 두 당사자가 왜 말렸는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육경서, 조용히 해줄래?”신주리는 윗사람한테 뭐라고 할 수 없어 육경서를 나무라자 안 그래도 서진태 때문에 화가 잔뜩 났는데 그녀마저 자기편을 들어주지 않자 억울한 듯 눈이 휘둥그레져서 말했다.“내가 시끄럽게 했어? 내가 혼자서 시끄럽게 할 수 있겠어?”그러자 신주리는 미간을 찌푸리며 공정하게 말했다.“너부터 시작했어.”
아무리 힘들어도 내색하지 않고 소박한 분위기를 연출해야 하는 것 아닌가?연기하기는 글렀고 맨 처음으로 강미영이 불만을 토로했다.“안 되겠어. 저녁에 강 사장하고 얘기를 좀 나눠야겠어. 이 나이에 이건 학대야. 어떻게 의식주행에서 이렇게 가혹할 수가 있어?”강미영이 진지하게 말하자 육경서가 불난 집에 부채질하고 있었다.“맞아요. 형하고 형수가 어떻게 이럴 수가 있어요?”강미영은 육경서를 힐끗 쳐다보더니 말했다. “너도 그래. 아무리 네가 연예계 유명 배우가 아니라고 이런 대접을 한단 말이야?”육경서는 이모님이 아주 온화한 분이라고 생각했는데 불만이 절정에 달하자 무차별 공격을 해댔다. 하도 이번 항공편에 승객이 많지 않은 관계로 그들은 한곳에 집중해 앉을 수 있었다.강미영이 자리에 앉자마자 소지석이 바로 그 뒤를 따랐지만 자리에 앉기도 전에 한 사람이 쌩하니 달려오더니 그녀의 옆자리에 털썩 앉았다.심수정이었다.소지석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고 아까 공항으로 오는 길에 자기에게 대책을 가르쳐주던 사람이 갑자기 왜 이러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이런 어이없는 일이!심수정이 소지석을 향해 우아한 웃음을 지어 보이자 그는 침울한 기분으로 뒤편으로 가 혼자 앉았다. 서진태는 아까 전 두 꼬맹이가 다투는 바람에 정신이 없어 다시는 그들과 가깝게 있기 싫어 전혀 주저하지 않고 바로 소지석의 옆자리에 앉았다. 공항으로 올 때부터 주상현과 한지원이 함께 앉았기에 비행기에 탑승해서도 두 사람이 함께 앉았다. 이제 붙어있는 두 자리만 남았고 아직 착석하지 않은 사람은 신주리와 육경서 뿐이었다. 앞으로 걸어가던 신주리가 먼저 자리에 앉았고 좌석 옆에 서 있던 육경서는 조금 전에 자기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다시 너와 같이 앉으면 내가 개야...그렇다면 할 수 없이 개가 되어야 한단 말인가?육경서는 머뭇거리며 끝까지 몸부림치더니 고개를 돌려 심수정에게 말했다.“수정 이모, 저랑 자리 바꿀 수 있어요? 우리 이모 곁에 앉고 싶어요.”그러자
댓글 창이 잠잠해지려고 할 때 비행기가 이륙하면서 라이브 방송이 끊겼다.육경서는 입으로는 싫다고 툴툴거렸지만 신주리와 나란히 앉게 되어 내심 기뻤다 카메라가 꺼지고 나서 신주리에게 다시 태클을 걸려고 하다가 그녀가 무기력하게 의자에 머리를 기대고 있는 모습에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육경서는 스튜어디스에게 따뜻한 물을 요구해서 신주리 앞에 놓으며 말했다.“따뜻한 물 좀 마셔. 지금 어때? 좀 괜찮아졌어? 서 선생님이 그러시는데 해성 분원에 한약을 달여놓으라고 말해놓으셨대. 공항에 도착하면 바로 약을 받을 수 있어.”신주리는 감기 기운이 있는 데다 화장까지 안 한 탓에 얼굴색이 그다지 좋아 보이지 않았다. 육경서 말에 신주리는 고개를 들어 그를 힐끗 보고 앞에 놓인 물컵을 보더니 담담하게 말했다. “고마워.”“오호, 신씨 가문 아가씨는 고맙다고 말할 줄 모르는 줄 알았어. 욕을 하도 잘해서 말이야”육경서는 신주리의 뜨뜻미지근한 태도가 눈에 거슬리는지 또다시 빈정거렸다.그러자 신주리는 눈을 뜨고 그를 힐끗 보더니 조용히 말했다.“카메라가 꺼졌으니 연기하지 않아도 되잖아?”신주리 말에 육경서의 미소가 싹 가시더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녀의 말투는 싸늘하기 그지없었고 조금 전 신주리는 인사할 줄 모른다는 말에 대한 답 같기도 했다. 카메라가 꺼졌으니 연기할 필요가 없다는 뜻은 카메라가 있을 때 그와 친근한 척하고 옥신각신 다투는 모습은 전부 연기였고 열애사를 인정한 커플의 분위기를 내기 위해서란 말인가?그리고 육경서에게 지금 카메라가 꺼졌으니 연기하지 않아도 된다고 귀띔해 주는 것 같기도 했다.그렇다면 신주리는 육경서의 관심이 연기라고 생각했던 것인가?신주리의 한마디 말에 육경서는 가슴이 큰 바위에 눌린 듯 갑갑해 숨을 쉴 수가 없었다. 이때에야 육경서는 두 사람이 진짜로 이별했다는 것을 실감했고 이별 통보는 자기가 먼저 했다...육경서는 억지로 미소를 지으며 아무 일도 없는 척 신주리의 말에 답했다.“그래. 네가 말하지 않았더
신주리는 고민하다가 말했다.“난 최근에 일이 많지 않아 괜찮지만 다음 달에 곧 새로운 촬영을 시작할 거야.”육시준은 고개를 끄덕였다.“네. 다음 달에 돌아가면 촬영 일정을 맞출 수 있어요.”육경서는 그들이 두어 마디 말로 일정안배를 끝내가 다급하게 입장을 밝혔다.“나도 있어! 주리가 돌아가지 않으면 나도 안 돌아갈래!”신주리는 흘겨보며 물었다.“넌 바쁘지 않아?”“마침 이 영화가 촬영을 마감할 예정이야. 기타 활동은 중요한 건 뒤로 미루고 중요하지 않은 건 매니저더러 거절하게 하면 돼.”육경서는 미처 깊게 생각하지도 않고 말했다.강유리는 반대하지 않고 귀띔했다.“강덕준 감독이 널 죽일 수도 있어.”육경서는 아랑곳하지 않았다.“괜찮아. 한 달뿐이잖아. 설마 날 따라 여기까지 오겠어?”강덕준이 그를 죽일지는 둘째치고, 어쨌든 지금 바론 공작은 그를 죽여버리고 싶었다.그는 그저 예의상 딸아이의 친구들을 초대해서 놀게 했을 뿐인데 결국 딸아이가 다음 달 귀국하는 일정을 안배하게 되다니?병원에서 육시준이 비아냥거리던 말을 그는 실행할 계획이었다. 단계마다 다른 이유로 딸을 만류하고 싶었고 시름 놓고 이곳에서 편히 안태하게 하고 싶었다.그러나 사위는...만약 자기 일을 다 처리했다면 남아있어도 괜찮았다. 부양할 수 없는 것도 아니니 말이다.그러나 지금 덤으로 두 사람이 더 생겼고 또 이 두 사람은 시간 맞춰 돌아가야 했다. 돌아가지 않으면 재촉당할 것이 뻔하다.“두 분이 바쁘면 굳이 남지 않아도 돼. 유리는 지금 손님 접대하는 게 불편하거든.”그는 정색해서 다시 말했다.그러자 여러 가지 눈빛이 삽시에 바론 공작을 향했다......신주리와 강유리는 제작팀과 반나절만 휴가를 냈기 때문에 오후에 돌아가야 했다. 그러나 오전 시간만으로 두 친구가 얘기하기엔 터무니없이 부족해 강유리는 직접 감독에게 전화해 하루 연장했다.점심시간.신주리는 육시준의 자리에 앉아 강유리의 옆에 누워 계속 절친끼리 이야기를 했다.강유리는 이번에 단도직입적
저쪽에서 한참 동안 침묵이 흘렀다.상대방도 자신만큼 놀란 모습을 상상하며 육경서는 다음 이야기가 기대되었다.그러나 생각지도 못하게 송미연은 놀랐지만 기뻐하는 기색이 없었다.“유리 찾으러 갔어? 프로그램을 녹화한다며 왜 그들을 찾으러 갔어? 거기는 시간이 아직 이르지 않아? 이맘때면 유리는 잠을 잘 자지도 못했을 건데...”송미연은 육경서가 철이 없이 강유리가 잘 쉬지 못하게 방해한다고 한바탕 야단을 쳤다.그러나 그녀의 말은 한 가지 중요한 소식을 알렸다.“진작 알고 있었어요?”“물론이지!”송미연은 자랑스럽게 말했다.“며느리가 임신했는데 이렇게 큰 소식을 어떻게 바로 나에게 알려주지 않을 수 있겠어? 경고하는데 너무 떠들지 마. 네 형수님을 화나게 하면 안 돼! 그냥 녹화만 잘하면 되는 거 아니야? 주리가 널 용서했어? 왜 돌아다니며 다른 사람의 가십거리를 알아내려고 해! 이번에 돌아와서 주리의 용서를 받지 못한다면 넌 아예 돌아오지도 마!”...화제가 자신을 욕하는 방향으로 변해버리자 육경서의 열정은 순식간에 식어버렸고 목소리도 누그러들어 어쩔 수 없이 말했다.“알았어요. 알았어요. 제가 원한 줄 아세요? 이것도 어쩔 수 없었기 때문이잖아요...”“뭐가 어쩔 수 없다는 거야? 모두 네가 자초한 거잖아! 쌤통이야!”“...”“섬에서의 상황이 어떤지 모르니 넌 주리를 잘 돌봐야 해. 난 실시간으로 라이브 방송을 살펴보고 있을 테니 넌 주리 괴롭히지 마.”송미연이 또 당부했다.육경서는 머뭇거리다가 정색해서 대답했다.“알았어요. 걱정하지 마세요.”송미연은 또 몇 마디 더 당부한 후 전화를 끊었다.육경서는 어두워진 휴대폰 화면을 보며 입꼬리를 올리며 웃었다.‘잘됐어. 아빠 엄마가 다 주리를 좋아하니 나중에 언제든지 주리는 억울함 당하는 일이 없을 거야. 적어도 내가 있는 한 억울함 당하지 않을 거야...”...점심은 빌라의 셰프가 만든 영양식이다. 맛은 좋지만 오래 먹으면 질릴 수 있어 강유리는 이 음식을 보며 저도 모르게 한숨
그러나 앉은 자리가 아직 따뜻해지기도 전에 육경서는 흥분된 듯 바로 일어나 소리쳤다. “뭐? 임신했다고?” 바론 공작은 짜증 섞인 눈길로 그를 쳐다보며 말했다. “목소리 좀 낮춰. 뭘 그렇게 놀라!” 그는 지금까지는 침착한 모습을 유지하고 있었지만 사실 소식을 들었을 땐 당황하고 흥분했던 걸 그가 모를 리 없었다. 육경서는 입을 막으며 어색하게 다시 앉았다. 하지만 그의 눈빛은 반짝이며 감출 수 없는 흥분이 드러났다. ‘나 이제 삼촌 된다! 삼촌 된다!’ “의사가 말하기를 첫 3개월은 불안정하니까 특히 조심해야 한다고 했다. 아버지도 이 소식을 공개하지 말고 태아가 안정될 때까지 기다리자고 하셨다.” 바론 공작은 드물게 인내심을 가지고 설명했다. 그는 그 말을 끝내며 신주리를 한번 훑어봤다. “그래서 나는 유리를 위해 사람들을 안배해 가까이서 돌보게 한 거다.” 그의 시선을 느낀 신주리는 고개를 들었다. 그녀는 공작을 한 번 보고 다시 눈을 내리깔며 강유리의 아랫배를 바라봤다.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마치 한번 만져보고 싶은 듯했지만 참았다. 그녀의 눈은 아름답게 빛나고 있었고 육경서와 같이 흥분과 기쁨을 숨길 수가 없었다. 그녀는 강유리의 아랫배를 가리키며 말했다. “그래서 지금 이 안에 작은 생명이 자라고 있는 거야?” “맞아.” 강유리가 그녀를 보고 웃으며 말했다. 신주리는 표정은 진지했지만 눈 속에 담긴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그럼 만져봐도 돼?” 육경서도 순간 정신을 차리며 손을 내밀었다. “나도...” “안 돼!” “안 돼!” 두 명의 목소리가 동시에 차갑게 외쳤다. 그들의 무리한 요구를 바로 거절했다. 강유리는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돌려 옆에 있던 두 남자를 쳐다봤다. 그녀는 그들에게 체면을 차리지 않았고 대신 신주리에게만 속삭였다. “조금 있다가 방에 들어가면 만져도 돼.” 육시준과 바론 공작은 동시에 얼어붙었다. ‘우리가 안 들릴 거라고 생각하나?’ 육경서는 기대에 찬 눈빛으로 강유리를
육경서는 얼굴에 기쁨이 가득한 채 입을 열려던 순간 정원에서 누군가가 다가왔다. 그 사람은 유창한 한국어로 두 사람에게 따뜻하게 인사했다. “이쪽이 둘째 도련님이랑 신주리 씨 맞으시죠? 강유리 아가씨께서 이미 기다리고 계십니다.” “안내 부탁드려요.” 신주리가 부드럽고 예의 있게 대답했다. 육경서는 잠시 멍한 표정을 지었다. ‘이 사람, 왜 이렇게 때맞춰 나타나는 거지? 다른 때는 왜 안 오고, 바로 이때 오냐고!’ “잠깐만요. 저희 형수 말고 일단 먼저 빌라를 둘러보고 싶어요!” 그가 급하게 발걸음을 옮기며 안내하는 집사를 붙잡았다. 집사는 그의 눈을 한 번 쳐다본 뒤 다소 의아해하는 표정으로 멈췄다. 신주리는 미소를 띤 채 침착하게 말했다. “미안해요. 낯을 가려서 그래요.” 육경서는 혼란스러웠다. ‘이게 무슨 말이야? 내가 낯을 가린다고? 왜 그렇게 갑자기...’ 집사는 이해한 듯 웃으며 공작님도 그들의 방문을 매우 기쁘게 생각해 오늘 특별히 이곳에서 기다리고 있다고 전했다. 육경서는 그 한마디도 제대로 듣지 않았고 눈앞의 신주리를 원망스러운 눈길로 바라봤다. ‘주리는 도대체 이게 무슨 뜻이야? 너무 쉽게 대답해서 다시 부정하려는 건가?’ 그들이 정원으로 들어섰고 이곳은 여전히 고요하고 우아한 분위기였다. 뜨거운 태양 아래 한쪽에서 차와 다과가 준비된 작은 테이블이 보였다. 강유리는 햇볕을 가린 파라솔 아래에 앉아 있었고 그 앞에는 육시준이 전화를 끊고 있었다. 바론 공작이 불만을 표하며 입을 열었다. “하루 종일 그 전화기 들고 있으면 안 돼! 그렇게 바빠? 전자기기 방사선이 얼마나 해로운지 알지? 의사 선생님이 말했잖아. 첫 세 달은 불안정하다고, 푹 쉬어야 한다고!” 육시준은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지난달에 돌아갔으면 이미 처리했을 일인데요.” 바론 공작은 얼굴에 불편한 기색이 스쳤다. “일이라는 게 끝날 수 있나? 돌아가면 내 딸과 시간을 제대로 보낼 수 있을까 몰라!” 육시준이 말하려던 순간 강유
감독은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강하게 반박하지도 못하고 조심스럽게 말했다. “규정에 따르면 녹화 중에는 제작진 팀을 이탈하면 안 됩니다.” 역시나 신주리는 가볍게 되물었다. “녹화 시작할 때 그런 규정은 없었잖아요? 갑자기 추가된 건가요?” “그건 아니지만 지금 상황이...” “그럼 우리를 일부러 견제하려는 건가요? 그럼 그냥 프로그램 안 하면 되죠?” 감독은 말문이 막혔다. 사실 첫 번째 시즌에서 육경서가 사고를 당한 이후로 그는 이미 이 두 사람에게 꼼짝 못 하고 있었다. 조건을 협상하든 규칙을 정하든 이 둘이 하겠다고 하면 다행이고 안 하겠다고 하면 모든 게 물거품이 될 판이었다. 결국 이를 악물고 그는 포기했다. “알겠어요, 알겠어! 두 분 다 제가 졌습니다! 하지만 어디 가든 꼭 행선지를 알려주시고 제작진 팀에서 두 분의 안전을 보장할 수 있어야 합니다!” “걱정 마세요. 너무 오래 걸리진 않을 거예요. 점심 먹고 바로 돌아올게요!” 신주리가 대범하게 말했다. ‘점심도 먹고 온다고?’ 하지만 그가 불만을 표현하기도 전에 두 사람은 이미 유유히 그의 앞을 지나쳐 나가버렸다. 호텔 문을 나서자마자 감독은 서둘러 휴대폰을 꺼내 전화를 걸었다. 전화기 너머로 나른한 목소리가 들렸다. “여보세요?” “강 대표님, 경서 씨랑 주리 씨가 지금 강 대표님을 만나러 갑니다! 그런데 프로그램 효과를 위해서 행선지에 대한 건 절대 발설하시면 안 됩니다!” 감독이 진지하게 말했다. 강유리가 태연하게 대답했다. “만약 제가 발설하면요?” 감독은 순간 당황했다. 그는 이런 대답을 예상하지 못했다. ‘아니, 이건 우리 회사의 프로그램 아니었나? 이렇게 마음대로 행동해도 되는 거야? 시청률이 안 오르면 강 대표님에게도 손해 아닌가?’ 감독은 빠르게 머리를 굴리며 어떻게든 이 대형 회사를 설득해야겠다고 결심했지만 강유리는 그의 말을 끊으며 다시 말했다. “농담이에요. 발설하지 않을 테니 걱정 마세요.” 감독은 긴 한숨을 내쉬며 안도했
비행기에 오를 때 각자 다른 생각을 품고 있었고 내릴 때도 마찬가지였다. 목적지에 도착했을 땐 이미 다음 날 새벽이었다. 제작진 팀은 미리 준비한 차를 타고 그들을 예약된 호텔로 보냈다. 해변가에 위치한 경치가 아름다운 5성급 호텔이었다. 모두들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이번에 제작진 팀 정말 큰돈 쓴 거네! 이게 진짜 여행 같아!” “그렇지. 갑작스러운 느낌도 있지만 일정은 꽤 합리적이네!” “응, 또 감사한 건 처음에 우리 주리랑 경서에게 그 사건이 터진 후로 대우가 점점 더 좋아졌다는 거야. 그들은 정말 목숨을 걸고 얻은 거라니까!” 모두가 웃으며 체크인 절차를 마쳤다. 그때 감독 팀에서 메시지가 왔다. “오늘 밤은 여기서 쉬고 내일은 섬으로 갑니다.” 모두들 당황했다. ‘그래서 목적지는 여기가 아닌가?’ “목적지는 반대편에 있는 작은 관광 섬입니다. 규모는 작지만 최근 몇 년 동안 관광업이 급성장했습니다. 얼마 전 이 섬의 소유자가 바뀌어서 다시 한번 큰 화제를 일으켰죠.” 감독이 그렇게 말하자 신주리는 점점 더 익숙해지는 느낌을 받았다. “그게 바론 공작이 유리에게 선물한 섬이죠?” 감독이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육경서는 감탄하며 물었다. “그럼 어떻게 우리 형수를 설득했어요?” 감독 팀은 미소를 지으며 답하지 않았다. 실시간 채팅창에서는 감탄이 이어졌다. [유리 언니가 이번 프로그램을 위해 진짜 대규모로 투자한 거네!] [하하하, 유리 언니가 투자한 건 아니야. 그냥 완전 부모님에게 의지하고 있는 거지! 그리고 그 덕분에 도련님과 미래의 동서가 혜택을 보는 거고!” “나도 섬 주인 언니가 있었으면 좋겠다!” “이번에 유리 언니 우정 출연할지 궁금하다!” 아침 식사 후 모두 방으로 돌아가 시차를 맞추기 위해 잠을 청했다. 카메라는 잠시 쉬어갔다. 신주리는 비행기에서 잠깐 눈을 붙였기에 이제는 전혀 졸리지 않았다. 그녀는 샤워를 하고 옷을 갈아입은 후 모자와 선글라스를 쓰고 호텔 방을 몰래 빠져나
심지어 원피스까지 캐리어 하나에 다 준비해 놨다. “안 믿을지 몰라도 내가 쇼핑 리스트까지 작성했어. 엄마한테도 참고를 부탁했거든! 원피스는 엄마가 골랐어. 안심해, 눈썰미는 진짜 좋아!” 말을 하면서 그는 정말로 쇼핑 리스트를 꺼내서 신주리에게 보여줬다. 신주리는 그 리스트를 보지 않아도 이미 믿고 있었다. 심지어 조금 놀랐다. “너 그럼 네 짐은 어쩌고? 얼마나 챙겨왔어?” “짐 하나야. 나중에 필요하면 제작진 팀에 부탁할 거야!” 육경서는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듯 말했다. 신주리는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그녀가 너무 오랫동안 육경서를 바라보고 있었던 탓인지 휴대폰을 들여다보지 않은 채 그를 쳐다보던 신주리가 이상하다는 걸 눈치챈 육경서는 본능적으로 고개를 들어 그녀를 쳐다봤다. “왜?” 신주리는 아무 말 없이 시선을 돌려 휴대폰 화면을 바라보며 말했다. “이렇게 많아?” 육경서는 묘한 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그렇게 많은 건 아니야. Y 국에 있는 우리 회사 지사에서 몇 가지 더 준비해 줬거든...” 그가 말을 하다 갑자기 멈칫했다. 불필요한 말을 했다는 걸 깨달은 듯했다. 신주리는 그 모습을 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그리고 그녀의 머릿속에 갑자기 대담한 생각이 떠올랐다. “이번 목적지는 네가 제작진 팀에 요청한 거 아니야?” “무슨 말이야? 내가 그런 사람인 줄 알아?” 육경서는 당황한 듯 대답했다. “네가 그런 사람 아닌가?” 육경서는 잠시 생각에 잠긴 후 고백했다. “맞아, 그런 사람일 수도 있어. 하지만 이번에는 정말 아니야! 사실 내가 쓴 목적지는 원래 해변이었어. 이런 건 결국 다 준비해야 할 것들이잖아.” 신주리는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다. 대신 이제는 아예 잠을 잘 수가 없었다. 다른 한편에서는 서진태와 소지석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서진태는 진지하게 소지석에게 도씨 가문의 그 양성 계획에 대해 물어보았다. 이 계획은 너무나도 비상식적이어서 의심의 눈초리를 거둘 수 없었다. 완전히 그들
[하하하, 이게 무슨 이상한 조합이야? 어쩐지 묘하게 어울리기도 하고 또 웃기기도 하네!] [처음부터 차 안에서 자리싸움만 아니었어도 이렇게 어색하지는 않았겠지.] [우리 지원 언니 한마디로 모든 흐름이 뒤집혔어!] [강미영은 도대체 무슨 속셈이지? 우리 지석이를 일부러 피하는 거야?] [다시 한번 말하지만 소지석 팬들 너무 이기적이지 마! 누구든 미영 언니에게 다가갈 수 있고 미영 언니는 모두를 거절할 권리가 있어!] 좌석이 정리되고 비행기가 이륙을 준비하자 라이브 방송은 일시적으로 종료되었다. 이런 24시간 라이브 촬영 프로그램에서도 이렇게 잠깐 동안만은 각자가 자신만의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강미영은 라이브 방송이 종료된 뒤 의아한 표정으로 한지원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여전히 왜 한지원이 굳이 자신과 함께 앉으려고 했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물론 지금 상황에서 누가 자신에게 같이 앉자고 했어도 마다하지는 않았겠지만... “미영 언니, 난 저 커플 팬이야. 무슨 일 있으면 나한테 얘기해. 그러니까 제발 내 최애 커플 깨지지 않게 도와줘!” 한지원은 진지한 얼굴로 이유를 털어놓았다. 강미영은 살짝 멍해지더니 결국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알겠어, 앞으로 네 최애 커플 잘 지켜주도록 할게.” 한지원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밝게 웃었다. “정말 고마워! 덕분에 내 최애 커플이 마음 편히 연애할 수 있게 됐어!” 강미영은 눈가를 약간 찡그리며 물었다. “근데 언제부터 걔네 둘의 팬이 된 거야? 그리고 지금 걔네 둘 관계 꽤 안정적이던데 내가 굳이 뭐 하러 그걸 망치겠어?” 한지원은 고개를 저으며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미영 언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야. 중요한 건 이런 카메라 밖에서의 달달한 순간들이지.” 강미영은 순간 뭔가를 깨달은 듯 눈썹을 살짝 치켜세웠다. “혹시 영감이라도 떠오른 거야?” 한지원은 멍하니 있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언니의 작은 호의 하나가 한 명의 유명 만화가를 탄생시킬 수도 있어!” 강
그는 단지 이런 행동을 통해 자신의 마음을 표현하고 싶었다. 강미영에게 그를 좀 더 이해할 기회를 주고 소지석에게는 그가 혼자서만 밀어붙이지 않도록 눈에 띄게 하려 했다. 그러나 이 행동을 알아본 사람들도 있지만 일부 팬들은 그를 오해하거나 비판하기도 했다. [솔직히 말해서 서진태는 너무 경계가 없지 않나요? 경쟁하고 싶다 해도 이렇게까지 급하게 해야 하나요? 왜 꼭 같이 앉아야만 하는 거죠?] [맞아요! 강미영 언니는 분명히 불편해 보였고 바로 피해서 조수석에 앉았잖아요!] [좋아한다고 해도 좀 경계를 두고 해야죠.] [근데 소지석 팬들 너무 이중잣대 아니에요? 오빠가 같이 앉고 싶으면 직설적으로 다가가도 ‘멋지다, 드디어 마음을 표현했다!’고 하는데 서진태가 다가가면 ‘경계가 없다’고 비판하잖아요?] [맞아요. 서진태는 사실 강미영 언니와 앉고 싶은 것보다는 자신의 마음을 표현하고 싶었던 거죠.] 댓글창은 점점 떠들썩해졌다. 신주리와 육경서의 강미영에 대한 이해도는 완벽했다. 감정상에서 경쟁이 시작되면 그녀는 주저 없이 피할 것이다. 강미영은 감정을 물건처럼 경쟁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이런 성격의 프로그램에서는 남성들끼리의 경쟁이나 여성들끼리의 경쟁이 감정을 더 순수하지 않게 만들 수 있고 로미오와 줄리엣이 될 거라고 생각했다. 결국 그런 외적인 압박이 감정을 더 강화시키는 효과가 생기게 된다. 사실 그들이 정말 사랑하는 건 아닐 수도 있다. 단지 지는 걸 참지 못해서 그런 것일지도 모른다. 그녀와 고정남의 관계도 그랬다. 주위에서 반대할수록 더 진지하게 여겨졌던 그 감정이었지만 결국 그것은 진정한 사랑이 아니라 엉망이 된 감정이었음을 깨달았다. “네가 졌으니까 내 선물 잊지 말고 사 와.” 신주리는 자신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육경서는 그 결과를 보며 입술을 삐죽 내밀고는 돌아서서 그녀에게 엄지를 치켜들었다. “이번엔 네가 이겼어.” 신주리는 눈을 깜빡이며 말했다. “이번? 그럼 다음에도 나랑 내기할 거야?”